안녕하세요?
『시와세계』 2024년 상반기(여름호) 신인상을 받으면서 재등단을 하였습니다.
아래는 이번 신인상을 받은 저의 졸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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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세계』2024년 여름호 신인상
그믐달과 선글라스,
최범석
파랑을 열면 얼마나 더 파랄까요?
수평선을 해부하고 싶어요
환영해요 혹등고래가 항구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타는 건 다 위험하대요 엄마가 그랬어요 서서히 잠수합니다 눈은 감지 않을래요 눈을 감으면 눈물이 고여요 푸르고 시린 세월만 음미한 엄마의 눈물이
돌고래 서너 마리가 정어리 떼를 돌보고 있어요 무리에서 벗어날까 모차르트 교향곡 40번을 휘몰아쳐요 치솟다가 내리꽂히고 다시 치솟으며 군무를 펼치는 정어리 떼, 가끔은 일탈을 즐기는 것들도 있어요 괜찮아요 틀을 깨면 또 다른 미래가 보여요
산호초 마을은 한들한들 평화로워요 어린 비파가 비파를 켜며 인사를 해요 얼룩말 몇 마리가 해초를 뜯고 있고요 평화를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키싱구라미는 오거나 말거나 거울에 주둥이를 대고 있어요 나르시시즘에 빠졌나 봐요 나도 내가 보고 싶어요
아, 저기 바다에서 어푸어푸하며 솟아올라요 파랗게 물든 내가, 엄마! 나는 부레가 없어요
그믐달이 까만 선글라스를 쓴 오후 두 시에
바오바브나무에서 별똥별이 쏟아졌다
마다가스카르의 하늘은 검은색이었다
눈 뜨고 싶지 않은 요일의 색깔이 그랬다
나는 거칠고 푸르른 풍요에 취해 조롱박 같은 꿈을 바오바브나무에 매달았다 여자가 산들산들 다가와 나무를 흔들었다 별똥별이 여우비처럼 쏟아졌고 나의 어린 왕자는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으로 고요를 채웠다
여자가 나를 길들인다고 했다 처음엔 부드러운 혀로 애무하다가 매섭게 달려들어 나무를 쓰러뜨리고 바위를 부수었다 여자는 변신을 거듭하며 나를 혁명했다 철없이 환호하던 꽃잎이 부서지며 소복소복 일어서던 변명을 내 품에 파묻었다
나를 찾아온 발자국들이 만든 길은 사라졌고
오아시스는 신기루가 되어 달아났다
어딘가 감춰두고 찾지 못한 샘물은 새로운 꿈이 되고
낯익은 풍요를 벗겨낸 내겐 벌거벗은 고독이 메마른 등고선을 그리며 낙타 무덤처럼 쌓였다
눈을 감으면 여전히 마다가스카르의 하늘은 검고
바오바브나무에서 별똥별이 쏟아졌다
혀끝에서 빙하가 녹고 있어요
당신의 극지탐험에 초대받은 나
단맛에 길든 내 혀가 반짝반짝 침을 삼켜요
단짝 유리그릇에는 곱게 갈아놓은 만년설이 쌓여있고
그 위에 살짝 으깬 삶은 팥 한 주걱이 흘러내려요
아문센이 이랬을까요, 터벅터벅 설원을 헤엄치는 상쾌함
황악산 기슭에 주렁주렁 매달린 샤인머스캣을 통통 깨물고
다시 빙하를 뒤덮은 딸기밭을 뒹굴다가
차디찬 우유 샤워를 하면 시베리아 고추바람이 일어서지요
이쯤이면 당신의 등골에 흐르는 성급한 욕망은 멈출까요?
빙벽에 흐르는 초콜릿 시럽이 내 혀를 휘감으면
당신의 인내심은 한계에 다다를 거예요
하지만 아직은 더 기다려야 해요
바삭거리는 삶의 파찰음을 맛보아야 하고
이빨 사이에서 쫀득거리는 남의 연애사도 씹어보아야 해요
달콤한 맛에 싫증날까, 길목마다 키위도 묻어두고요
가끔은 반짝하는 큐빅을 줍는 행운이 톡 터지기도 하지만
살찐 바나나보트를 타고 유빙 사이를 헤엄치는
내 혀끝에서 남극의 빙하가 녹고 있어요
이제 당신이 뼛속 깊이 느낄 차례예요
크레바스에 빠져버린 영혼의 시린 맛을,
내 혀가 두레박이 되어 드릴게요
부엔 카미노*
누가 만들었을까 신생으로 가는 로드맵에 차례차례 이름 붙여놓은 징검다리 벽을 뚫고 짙은 안개 속으로 끊어질 듯 이어진다 끝조차 알 수 없는 길이 두려울까 서리꽃 사이로 떠오르는 소원을 손 모아 보듬으며 열어본다
꽃비 내리는 수채화 속을 연인과 거닐며 내일을 속삭이고 모퉁이 돌아가면 검푸른 건반을 두드리는 윤슬의 눈 시린 연주를 바라보다가 한고비 또 넘어가면 토라진 인연과 얼굴 붉히며 이별하는 숲에서 좌절하다가
배려일까 힘들 땐 쉬어가라며 곳곳에 붉은 장미꽃을 걸어놓고 타락하고 싶을 즈음 차라리 타락하다 가라며 서너 개씩 묶어 붉은 물감을 칠해놓은 징검다리 어느 석수장이가 이렇듯 다듬어 놓았을까
길 끝에 다다르면 노을 속으로 몰락하는 영혼을 향해 고맙다며 눈물짓다가 회한에 젖다가 또다시 이어지는 징검다리 하나하나 헤아리며 건너간다 만나는 사람에겐 부엔 카미노! 하고 외치면서
*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가는 길에 행운이 깃들라’는 인사말
공룡을 찾습니다
신천에서 배회 중인 브라키오사우루스 씨를 찾습니다
여름이라는 계절을 아무도 말해주지 않아
상투적인 알록달록한 바지에 빨간 패딩을 입었습니다
얼굴엔 채석강에서 빌려온 시름이 한가득 담겼고
파마머리엔 손녀가 선물한 때 묻은 토끼모자가 동행합니다
자식들이 다 빨아먹은 빈껍데기 가슴은 축 처졌고
들판에 엎질러졌던 허리는 펴지 못해 손수레에 의지한 채
어제처럼만 버티자며 한 가방의 약을 짊어지고 다닙니다
신천 강바닥을 가로질러 간 발자국, 어쩔까
뚜렷이 찍힌 발가락화석에 덜커덩 가슴이 아려옵니다
짐작건대, 고산골 공룡공원을 찾아가는 듯합니다
평생을 호숫가 초록에 묻혀 살다가
넘나들 통로조차 없는 콘크리트 벽이 답답했을까요
바라기로만 살아온 세월이 억울했을까요
알뜰하게 쌓은 인연을 몽땅 깨뜨리고, 미련 없이
어린 꿈만 품고 여행길을 떠난 걸까요
걷다가 허기지면 좋아하는 꽃이라도 요기하게
베란다 창문을 열어두시면 오늘이 화창해질 겁니다
맨몸으로 빙하기를 건너 민둥산을 넘어온 그녀,
가슴의 넓이와 키의 높이는 가늠할 수 없고
그 그늘에서조차 벗어날 수 없는 커다란 공룡입니다
이런 공룡을 발견하시면 182로 신고하여 주십시오
* 최범석
경남 함양군 안의면 출생
대구광역시 수성구 거주
평생글벗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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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세계 2024년 여름호 신인상 심사기
시와세계 신인상에 응모한 다수의 작품을 읽었다. 응모작들은 대부분 나름대로의 기량과 미덕을 갖추고 있었다. 그 가운데 최범석의 시 5편을 신인상 당선작으로 추천한다.
최범석의 시들은 ‘언어가 그리는 그림’을 큰 화폭에 담으려 하는 의욕을 보인다. 그런 만큼 그의 언어가 그믐밤에 선글라스를 끼고 바다의 지형도를 그리는 일은 추측건대 경험이 아니라 그가 가진 무선의 상상력에 기인한 것으로 이해된다. 수평선을 해부하고 심해를 응시하면 ‘파랑은 더 파랄 것’이라고 시어에 색을 입힌다. 이때 선글라스 속에는 혹등고래며 돌고래, 정어리떼가 우글거리고 심해어가 지나는 물결은 높은 파도를 일으키며 모차르트교향곡을 연주한다고 그는 묘파한다(그믐달과 선글라스). 그런가 하면 그의 시에는 극지와 빙하와 시베리아의 설산과 미지를 탐험하는 아문센의 도전정신이 도사리고 있기도 하다. 그뿐이 아니다. 그의 시의 궤적에는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나누는 ‘부엔 카미노’가 있고 마다가스카르의 검은 하늘과 별똥별 떨어지는 밤을 지키는 바오바브나무가 잎을 흔든다. 요컨대 최범석의 시는 넉넉한 품과 구김이 없는 대지의식이 충일하다. 그렇다는 것은 그의 시에는 그의 인품이 담겨 있음일 것이다. 최범석의 이 시편들을 읽는 독자는 평소에 접하지 못하던 해양체험과 짧지 않은 세계여행을 맛볼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의 시는 세밀화를 넘어 대형 벽화를 그리고자 하는 의욕이 넘친다. 당선을 축하한다.
심사위원 : 송준영(시인, 본지 주간) l 이기철(시인)(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