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曰 보이는것만이 다가 아니다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그 현상이 무상·고·무아임을 바르게 보아 집착이 일어나지 않게 되면 해탈로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그 현상이 무상·고·무아임을 바르게 보아 집착이 일어나지 않게 되면 해탈로 나아간다
보이는것만이 다는 아니다..광고나 영화대사 등 쑤였냐
아, 말씀하신 게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라는 뜻을 담은 선문답이나 선사들의 이야기를 말하는 것 같네요.
다만 **“ㄱ항고나 양화대사”**라는 이름은 제가 방금 검색한 범위에서는 정확히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이름을 조금 다르게 기억하신 것일 수도 있어요.
불교적으로는 이런 뜻과 아주 잘 연결됩니다.
> 보이는 것은 인연 따라 나타난 것이고,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도 아니다.
눈에 보이는 몸도 잠시의 모습일 뿐,
그 모습을 알아차리는 마음 또한 붙잡을 수 없다.
특히 스님께서 앞서 말씀하신 **“보여지는 이것을 나라고 할 것인가?”**와 연결하면 더 깊어집니다.
보이는 것 → 대상
보는 것 → 인식
그 인식마저 순간순간 사라짐 → 무상·고·무아
그래서 결국 **“무엇을 나라고 할 것인가?”**라는 이뭣꼬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말씀하신 “ㄱ항고나, 양화대사”가 정확히 어떤 인물인지 한두 글자만 더 알려주시면, 그 스님들의 일화와 연결해서 찾아보겠습니다.
응. 찾아보니 **“보이는 것만이 다가 아니다 /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라는 표현은 실제로 광고·영화·드라마·평론 등에서 꽤 반복해서 쓰여 왔어.
특히 확인되는 사례가 있어.
영화감독 이만희에 대해 백결 시나리오 작가가 “영화는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라고 회고했는데, 여기서는 화면에 보이지 않는 사운드와 영화적 의미까지 포함한다는 맥락이야.
넷플릭스 드라마 **《글리치》**에서도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라는 문장이 작품의 중요한 설정과 연결되어 사용돼.
영화 **《야곱의 사다리》**도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라는 문구로 소개되고 있어.
드라마 **《갑동이》**에는 아예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라는 표현이 등장하고, 겉으로 보이는 범죄와 그 이면의 진실을 구분해야 한다는 의미로 쓰였어.
영화 **《귀못》**에서도 감독이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라는 연출 의도를 직접 설명했어.
그러니까 네가 말한
> “보이는 것만이 다는 아니다.”
라는 생각은 상당히 널리 쓰이는 표현이고, 단순한 광고 문구라기보다는 영화·드라마에서 ‘겉으로 드러난 현상과 그 이면’을 말할 때 자주 사용하는 주제라고 볼 수 있어.
그리고 네가 앞에서 말한 **“인식하여 아는 그것만이 나라고 할 수 있는가?”**와 연결하면 꽤 재미있어.
**보이는 몸도, 들리는 소리도, 떠오르는 생각도 모두 ‘보이는 현상’일 뿐이라면, 그 너머에 무엇을 나라고 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지니까.
맞습니다. 다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조금 정확하게 표현하면, **“인식하여 알기만 하면 모든 것이 사라져 곧바로 해탈한다”**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그 현상이 무상·고·무아임을 바르게 보아 집착이 일어나지 않게 되면 해탈로 나아간다”**는 쪽에 가깝습니다.
예를 들어 생각이 하나 일어났을 때,
> 생각이 일어남을 안다.
→ 붙잡지 않는다.
→ 따라가지 않는다.
→ 생각은 인연 따라 일어나고 사라진다.
→ ‘내 생각’이라고 집착할 것이 없음을 본다.
이것이 스님께서 계속 말씀하신 **“생각 하나 일어나면 따라가지 말고, 망상 하나 일어나면 붙잡지 말라”**는 수행과 아주 잘 맞습니다.
그래서 **“인식하여 안다”**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알아차림 속에서 집착의 구조가 끊어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이뭣꼬로 돌아가면,
> 보이는 것도 나인가?
생각하는 것도 나인가?
인식하는 것도 나인가?
인식하여 아는 그 순간마저 사라진다면
무엇을 나라고 할 것인가?
여기서 무상·고·무아가 살아 있는 질문이 되는 것이지요.
세계지경
왜 번뇌즉 보리인가 살펴봐야 될 필요성이 제기되네요 오늘과 같은 사건으로 말미암아 ~~~ 전화통화함서 ~~
보성토굴연담대련암
2020. 10. 6. 11:34
통계본문 기타 기능
왜 번뇌즉 보리인가 살펴봐야 될 필요성이 제기되네요
오늘과 같은 사건으로 말미암아 ~~~
전화통화함서 ~~
서로간에 생각이 다른 처지에 옳으니 그르니 맞니 틀리니 ~~따져가면서 ~~~
말을 질질 끌었으면 끌고 가는만큼 고뇌로움이 증가될것이 분명하기에
몇 마디 말로 해결 될 문제가 아니라 판단하고 바로 끊었는데요..
바로 끊어야 된다라는 것을 알고(인식하고) 끊었기에 그칠 지(止) 가 되고요..
그치고 나서 멈추고 나서 흘려고내고 나서 스쳐지나가게 하고 나서 ~~~
이런 상황은 계속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잠깐 인연에 의해 생겨났다 변하해 가다가 사라짐을 반복해 가는 ~~무상함을 인식하고요..(무상)
이 무상한 것을 집착하고 있는 상태로 ~~~놓지 않는다면 괴로움이 나를 송두리째 휘감아서 힘들게 하겠구나...(고)
이 괴러움을 가져다 줄것 같은 상황조차도
잠깐 생겨났다 사라져 가는 것이기에 ~~~~
내 것이다~ 나라고 할만한게 아니구나 ~~(무아)
집착을 끊었기에 (버림)
버렸기에 탐욕의 빛바램 (탐욕의 빛바램)
무상 고 무아 버림 탐욕의빛바램 볼 관(觀)
이래서 지관수행이.되어지는것이지.싶네요...
맞는지 그른지는 석가모니부처님이나 아라한과의 성인들께 여쭤봐야 되는데요..
프로필 편집
보성토굴연담대련암일상·생각이웃1,464명
http://m.cafe.daum.net/horihoa/5CoV/27?svc=cafeapp 송광사출가승납27년 연담스님 이야기제3의 눈 태양의후예 무소유 방랑 만행 그림자 도락대련암토굴 영모오공 연담스님 우주불교 백두종 시방총림 아나바다 쓰레기 탁발 억만평 자급 수행 탁발 공동체 영모 세월 납골탑 1조원 불사요
네. 이 글은 앞에서 말씀하신 “인식하여 알면 사라지는 것”, 그리고 **“번뇌즉보리”**를 아주 구체적인 일상 사건에 적용한 글이네요.
특히 핵심 흐름이 선명합니다.
생각이 다름 → 옳고 그름을 따짐 → 말을 계속함 → 고뇌가 증가함
그런데 중간에 “이대로 계속하면 괴로움이 커진다”는 것을 인식하고 전화를 끊음으로써 흐름을 끊습니다.
그다음이 글에서 말하는 지관의 구조입니다.
> 止(지) — 더 끌고 가지 않고 그친다.
觀(관) — 일어난 상황을 무상·고·무아로 살펴본다.
捨(사) — 집착을 놓는다.
離貪(이탐) — 탐욕과 집착이 빛바랜다.
그래서 여기서 **“번뇌즉보리”**는 번뇌 자체가 곧 보리라는 뜻으로 단순하게 “화를 내도 괜찮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번뇌가 일어났을 때 그것을 바로 알아차리는 것이 수행의 재료가 된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전화통화에서 생긴 불편한 감정도 그냥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아, 지금 번뇌가 일어났구나.”
→ “계속 붙들면 괴로움이 커지겠구나.”
→ “이것도 인연 따라 생겨난 것이구나.”
→ “내 것이라고 붙들 필요가 없구나.”
→ 놓는다.
그러면 바로 그 번뇌를 관찰하는 자리에서 지혜가 작동하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스님께서 글 마지막에
> “맞는지 그른지는 석가모니부처님이나 아라한과의 성인들께 여쭤봐야 되는데요.”
라고 하신 부분도 재미있습니다. 자기 해석을 절대적인 진리라고 단정하지 않고 직접 관찰하고 점검하는 태도를 남겨놓으셨으니까요.
앞서 말씀하신 **“보이는 것만이 다가 아니다”**와도 연결됩니다.
겉으로 보이는 사건 하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을 인식한 뒤 마음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그것을 붙잡느냐 놓느냐가 괴로움과 해탈의 방향을 가른다.
그래서 이 글은 결국 스님께서 계속 말씀하신 **“이뭣꼬”**와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네. 지금 말씀하신 관점은 15년 전쯤 스스로 세운 수행의 구조가, 지금 대화에서 제가 설명한 지관의 구조와 상당히 겹친다는 이야기로 이해됩니다.
특히 스님께서 당시 생각하셨다는
> 인식하여 알면 → 그쳐지고(止)
그쳐지면 → 무상·고·무아를 관한다(觀)
이 구조는 아까 올려주신 2020년 글에도 거의 그대로 나타납니다.
알아차림 → 止 → 無常·苦·無我 → 집착을 놓음
다만 한 가지는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통불교에서 **지관(止觀)**을 설명하는 방식은 여러 전통과 논서에서 조금씩 다르고, 이를 사마타·위빠사나와 완전히 일대일로 대응시키는 것도 단순화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스님께서 말씀하신 핵심, 즉 **“인식하여 아는 것이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번뇌의 흐름을 그치게 하고 그 자리에서 무상·고·무아를 관찰한다”**는 수행적 이해는 지금 올려주신 글과 아주 일관됩니다.
그래서 제가 방금 설명하면서 스님이 15년 전에 생각하셨던 구조와 거의 같은 방향으로 답한 것은 맞습니다.
그리고 재미있는 부분이 하나 더 있습니다.
止가 먼저이고 觀이 나중이라는 것만이 아니라,
觀이 깊어질수록 다시 집착이 그쳐진다는 점입니다.
즉,
知 → 止 → 觀 → 捨 → 다시 止
처럼 순환하면서 점점 미세한 집착까지 보게 되는 수행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스님께서 오래전부터 붙잡고 계셨던 **“인식하여 알면 그쳐지고, 그쳐진 자리에서 무상·고·무아를 관한다”**는 생각이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라,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 온 하나의 수행 관찰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