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과 패기넘치는 사진가들을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려 차세대 사진가로 자리매김할 수있도록 한 달에 한 명의 작가를 초대하여 갤러리 브레송에서 기획전을 열고 있습니다.
최현주의 감칠맛나는 글과 더불어 <사진 바깥에서 사진읽기>라는 제명으로 월간 사진예술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섬유질의 집들이 이루는 말랑말랑한 세상의 온도 - 안희정 <Cube>
글. 최 현주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하고 15년 동안 광고대행사 카피라이터 및 제작팀장을 거쳐 현재 Freelance copywriter로 활동 중. 공저 <워딩의 법칙>(2005년) 및 <두 장의 사진>(2008년)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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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엔 A, B, C, D, E, F, G로 구성된 7개의 빌딩들이 있다. 2001년에서 2004년 사이에 건축되었으며 모두가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로 사용되고 대부분 유명한 한국인들이 거주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 빌딩 중 G는 267.3m 높이로 63빌딩을 제치고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다. 국내 최고 분양가를 기록했으며, 입주 이후 HAS 터치스크린과 웹패드를 이용한 실내 자동조절 기능, 지문인식과 비밀번호, 중앙감시실 등을 통한 고도의 보안시스템 등 그간에 영화 속에서만 보아오던 최첨단 미래형 주택 자동화 시스템을 실현하여 그 실체에 대한 세간의 궁금증이 증폭되고 이에 대한 가상 체험담이 기사화되기도 하였다. 최근에는 IMF를 능가하는 경기침체와 집값 하락에도 불구하고 종합부동산세 등 세제 완화에 대한 기대감으로 244㎡형이 50억 원대에 거래되어 여전히 불황 무풍지대의 위세를 과시한다든지, 일 년에 가구당 380만 원대가 넘는 전기세를 지불한다든지, 실내 바람길이 차단된 탑상형 구조나 엘리베이터 및 복도 조명의 과도한 사용 등으로 CO2 배출량이 일반 아파트의 2~3배에 달한다든지, 심지어는 그곳에 사는 높으신 분들 중 농지를 실제 경작하거나 경영하는 농업인들만 탈 수 있는 쌀 직불금을 수령하신 분들이 손가락 수만큼은 된다든지 하는 온갖 보도기사가 끊이지 않고 나와, 이 빌딩과 이 빌딩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 혹은 시샘이나 부러움은 언제까지라도 사라지지 않을 성 싶다. 이 정도면 다 눈치 챘겠지만 이 빌딩은 서울특별시 강남구 도곡동 467번지에 있다. 이 빌딩의 이름은?
맞다.‘높게 솟아오른 궁전’이라는 뜻에 걸맞게, 인근 삼성동 아이파크에 실제로는 최고 매매가 1순위의 자리를 내주고도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속에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 부자들의 아파트’라고 인식되어 있는 곳, 타워팰리스. 타워팰리스의 탄생은 우리나라 대한민국 1%의 욕망을 채워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당시 타워팰리스 광고 마케팅은 VVIP(Very Very Important Person)만을 위한 고도의 고객 유치 전략으로 이루어졌다. 일반인들에게는 아직 주상복합아파트라는 용어조차 생소했던 1998~1999년에 이루어진 1차 분양을 위해 그들은 오직 서울 강남(강북의 부자들은 빼고)의 40평형대 이상 아파트와 골프 회원권을 소유한 40~50대 연령의 전문직 종사자와 대기업 임원 및 벤처기업 경영자들의 데이터베이스를 만들고 이들을 대상으로 1:1 마케팅을 펼쳤으며, 이들 중에서도 특별한 초청장을 지참한 사람들만이 모델하우스 안에 입장할 수 있게 하였다. 말 그대로 ‘아무나 누릴 수 없는 명품의 가치’를 보여준 셈이다. 이렇게 하여 실현된 명품의 가치는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어 타워팰리스를 소유 여부가 ‘그들만의 리그’에 속할 수 있는 새로운 기준이 돼버린 것이다. 타워팰리스는 이후 2000년대 고급아파트의 분양광고에 있어 매우 중요하게 쓰이게 된 또 하나의 용어를 선점했으니, 그것은 바로 ‘커뮤니티’라는 용어이다.
community : (이해·종교·국적·문화 등을 공유하는) 공동 사회, 공동체, 지역 사회를 뜻하며 (재산 등의) 공유, 공용, (사상·이해 등의) 공통성, 일치를 의미하는 말.
커뮤니티는 우리나라 아파트 용어사전에서는 타워팰리스와 이후의 고급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의 자부심을 한 단어로 축약한 말로 쓰인다. 그것은 일상생활과 스포츠, 여가활동, 쇼핑 등을 모두 원스톱으로 가능하게 하는 그들만의 각종 편의시설들과 이음동의어(異音同義語)로 쓰이고 이들의 종류는 호텔식 로비와 클럽 하우스, DVD룸, 연회장, 게스트룸, 헬스장, 골프연습장, 수영장, 사우나, 프리미엄 수퍼마켓과 명품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이들은 모두 특급호텔을 닮을수록 환영받는다. 아파트 단지에서 이루어지는 그들만의 커뮤니티는 점점 더 발전하여 ‘웰빙(Wellbeing)-커뮤니티’나 ‘로하스(LOHAS)-커뮤니티’ 나아가 ‘컬쳐(Culture)-커뮤니티’라는 용어로 세분화되기도 하였다. 커뮤니티가 입지나 교통편의, 인테리어에 못지 않는 아파트 시세 상승의 주요인이 된 것인데, 이렇게 다양하고 고급스러운 부대 편의시설을 누릴 수 있는 사람들만의 공동체 의식은 외부인들에게는 당연히 배타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끼리만, 아파트 입주자들끼리만 누릴 수 있는 아주 아주 특별한 생활. 그것은 얼마나 매력적인 호소인가. 경기침체에 울고 88만원 세대에 한탄하며 대규모 구조조정을 두려워하고 사는 99%와 차별화되어 외부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들끼리는 안전하고 안락하며 여유롭게 사는 단 1%들만의 견고한 성채! 그 자부심이 ‘커뮤니티’라는 일반명사 안에 고스란히 담긴 셈이고 그것은 때로 ‘당신의 특별한 이웃’이라는 카피로 대체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젠 제품을 보고 사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품격과 안목에 어울리고 최고의 대접을 받으며 자라나는 당신 아이들의 수준을 해치지 않을 만큼 품위있고 고급스러운 당신의 이웃을 보고 아파트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뒤집어 말하자면, 이웃이라는 이름으로 당신과 당신 가족도 이미 제품화, 물성화 되어버린 것이다.
집이라는 말은 따스하다. 집의 지붕 아래에는 늘 가족이 있고, 집과 집을 이루는 담과 담 아래에는 이웃이라는 또 하나의 가족이 있다. 집이나 이웃이라는 말의 온도는 사람 한 명의 체온보다 높아 아파트나 부동산, 호텔이라는 말은 결코 갖지 못한 온도, 즉 삶의 숭고함이 스민다. 그 숭고함은 비록 일상적이긴 해도 모든 사람들의 가슴 속에 평생도록 특별하게 들어와 앉는다. 그렇게 따스한 온도를 가진 말, 즉 존재들이 머리에 머리를 기대고 어깨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공유이며 공동체이다. 커뮤니티란 말은 원래 감싸 안는 말이지 밀어내는 말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딱딱하고 갈라지고 종국엔 무너지는 시멘트의 온도가 아니라 차라리 손으로 깊고 바느질하며 헤지고 또 다시 맞대어 이을 수 있는 섬유나 천(fiber, woven stuff)의 온도여야 옳다.
안희정 작가의 집들이 단단하지 않고 무른 섬유로 만들어진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똑같은 입방체로 형상화되었으나 그 집들은 하나부터 열까지 똑같은 모양과 높이를 지닌 아파트가 아니라 조금씩 다른 색과 창, 구김을 가진 낮은 집들의 행렬로 이루어진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어떤 집은 담쟁이 넝쿨에 덮여 있고 어떤 집은 섀시 문을 달았으며 어떤 집은 돌담을 또 어떤 집은 붉은 창틀을 가졌다. 그 집들의 크기는 거의 같은데, 한땀 한땀 바늘과 실로 이루어진 그 집들은 작가의 표현에서 빌리자면 ‘부드러운 피부와 유연한 척추와 두뇌를 가진 사람들’과 이형동의어(異形同義語)에 다름 아니다. 그 무른 집들이 이루는 큐브는 ‘말랑말랑’하다.
집들은 말랑말랑하다. 실제 집이 시멘트나 벽돌 혹은 철제로 지어졌다고 해도 우리들 마음속에 자리 잡은 집은 딱딱하게 굳은 물성이 아니라 동화 속 초콜릿 비스킷이나 밀크 쿠키로 지은 집처럼 부드럽고 유연하다. 집이 보금자리라는 아늑한 온도를 가진 단어로 대체될 수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집들이 ‘타워팰리스’거나 ‘아이파크’이거나 ‘래미안'이거나 ’푸르지오'가 아니라 그저 ‘집’일 때, 그 집들은 희노애락 오욕칠정에 끄달리며 고만고만한 간격을 두고 서로서로 맞붙어 있거나 그만그만한 높이로 세상 풍파 속에 대롱대롱 매달려 사는 우리들의 집이다. 거기엔 특별한 부대시설도 없고 하여 자랑할만한 자부심도 없다. 내 수준을 대변해주는 자랑스런 특별한 이웃이 아니라, 그저 나와 똑같이 내로라 할 것 없는 평범한 이웃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 이웃들은 아파트 분양 카다로그 속에 제품 리스트 중의 하나로 등장하는 이웃이 아니라, 부드러운 피부와 유연한 척추와 두뇌를 가진 살아있는 이웃이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아파트 시세를 높여주는 요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때로는 품위없이 큰 소리로 다투기도 하고 치사하게 서로 헐뜯기도 할 것이다. 그들이 이루는 섬유질의 작은 큐브는 말랑말랑하게 함께 모여 음악의 높낮이처럼 다양하고 풍요로운 세상풍경을 이룬다.
안희정 작가가 생각하는 집들이 이처럼 섬유질이라면, 그 섬유질의 집들이 모여 이루는 도시도 세상도 사람의 살림살이도 또한 섬유질일 것임에 틀림없다. 사각의 입방체로 정형화된 도시라는 큐브를 자세히 살펴보면 조금씩 서로 다른 구김과 서로 다른 체온을 가진 작은 큐브들이 있고 이들의 집합체가 대한민국이며 더 한발자국 나아가면 세계가 될 터이다. 우뚝 솟은 최고층 주상복합아파트들이 군림하는 이 도시의 사이사이에 재개발지역이나 낮은 오래된 동네의 집들과 그 집에 깃들여 사는 이들의 온기가 여전히 존재하고, 세상에는 집의 높이와 평형과 부동산 시세가 아니라 집과 이웃이라는 존재감으로 인해 여전히 따스하고 말랑말랑한 소통이 가능하다는 믿음, 안희정 작가의 도시가 획일화되어버린 숨막히는 거대한 큐브가 아니라, 어릴 적 도시락 가방처럼 혹은 조각조각 이어붙인 옛 이불처럼 따스한 것은 온전히 그 믿음을 향한 수고로움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