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영 욱
분단 때문에 장애인이 된 미숙이
간밤 첫눈인데도 풋눈이 소리 소문 없이 예년과는 달리 발목까지 빠질 만큼 많이 내렸다. 첫눈이 많이 내리면 다음 해 농사는 풍년이라는 속설도 있지만, 하필 설상가상으로 기온이 급히 내려가는 바람에 눈이 노면에 얼어붙어 강릉에서 와야 할 첫 시내버스는 오지 않았다. 버스를 타고 시내로 가야 할 사람들은 버스가 올 시간이 지났지만, 그래도 혹시 늦어도 버스는 올 것이라고 기다리며 발만 동동 굴러야 했다.
만약 첫 버스가 오지 않으면 다음에는 낮 12시 시간대에 버스가 있다. 시내로 가야 할 영수 부부는 난감했다. 정각 12시에 미숙이의 아들 결혼식인데, 아침 첫 버스를 타지 못하면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나간 봄이다.
영수의 아내는 갑자기 저녁 밥상머리에서, 남편 영수에게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불쑥 미숙이라는 여자 이름을 꺼냈다.
“당신, 미숙이라는 여자 알아요?”
“알지, 초교 동창생으로 주문진으로 시집가서 지금은 미니슈퍼를 하는데 남편이 의처증疑妻症이 있어 동창회에 안 나오지. 나뿐만 아니라 동창생들이 본지 오래된 여자야. 불쌍하지. 남편이 아내의 행동을 의심하는 변태적인 성격 때문에 일 년 열두 달 365일, 외출 한 번 하지 못하고 슈퍼 안에서 붙박이처럼 붙어살아야 한다는구먼. 심지어 여자 동창생들이 찾아가도 남편이란 그 작자가 자기 부인이 바람이 날까 봐, 되게 의심한다는 거야. 그래서 아예 여자 동창생들도 미숙이란 발 끊은 지 오래지. 그런데 그 여자를 왜 물어?”
“그 여자, 미숙이 말고요”
“그런 미숙이 말고 무슨 미숙이지?”
“왜, 있잖아요. 우리 마을에 살았던 데”
“아하, 미숙이! 그럼 그 미숙이 말인가. 우리 집과 한 마당 안에 살면서 나보고 오빠라고 불렀던 사연이 깊은 여자야!”
“무슨 사연이 어떻게 깊었다는 거예요. 얼마나 깊었던 여잔가요?”
“내가 깊었던 건 아니었지. 그쪽에서 깊었지. 내가 논산훈련소로 입대하기 전 스무 살 때였어. 아마 지팡이를 꽂아도 물이 올라 잎이 핀다는 봄이었는데, 하루는 미숙이가 종이로 접은 사각형 편지를 주어서 펼쳐 읽어보니 마을의 외진 비석바우 뒤에서 만나자는 거야. 그것도 해가 저문 밤에. 그래서 어쨌든 약속 장소에 나갔지. 그런데 미숙이가 먼저 기다리고 있더라고. 아마 그동안 나를 좋아했던 거지. 나도 미숙이가 싫지는 않았어. 홀어미 밑에서 마구 자란 언니들보다는 예쁘고 행실이 참했지. 그렇지만, 그날 밤 미숙이 한테 섣불리 별 얘기꺼리는 없었어. 시간을 두고 생각해보자고 그러고는 말았지. 그런데 얼마 후 갑자기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서너 집이 살고 있는 외딴 산골로 시집을 가버렸는데, 그때야 미숙이를 붙들어 놓았으며 좋았을 걸이란 생각이 들었지. 그땐 지나간 버스 손드나 마나였어. 속된 말로 죽은 아 자지 까보기였구먼”
“그러니, 기러기 한 백 년이다, 이 말씀이오?”
“마음에서 떠난 지 오래되었냐고, 애틋한 사이는 아니었어. 좀 아쉬웠던 여자였지. 더 이상도 더 이하도 아니지. 그저 지금 생각하면 아름다운 추억이지”
미숙이는 태어나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자동차도 자전거도 구경할 수 없는, 첩첩산중 고개를 젖히면 하늘만 빠꼼이 보이는 산골에서 살았다. 어쩌다가 하늘을 지나는 비행기는 볼 수 있었다. 그곳의 분교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상경해 부잣집 식모살이를 하다가 주인 아들이 고등학생인데 수치심을 유발하도록 성적으로 치근대는 손을 뿌리치고 고향에 돌아와서 홀어미의 가사를 돕다가 1968년 울진 삼척 해안으로 침투한 무장공비가 북상하면서 사살되고 잔당이 태백산 줄기를 타고 북상하다가 오대산에서 나타나서 양민과 어린애들을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때 미숙이네는 첩첩산중에서도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외진 산골에 사는 게 겁나서 하루 걸리는 큰 고개를 넘어 조금 평지로 나가 산다고 이사한 것이 자동차도 다니고, 면 출장소도 있고, 여러 주막이 있는 마을이었다. 그것도 집을 사서 이사한 것이 아니고 영수의 집 행랑채에 돈 몇 푼 주고 살고 있었다.
일찍 사별한 미숙이 어머니는 얼굴이 반반해서 마을의 주막집을 오가며 유지행세를 하는 남정네와 바람이 났고, 큰언니는 남편과 별거해 홀어미 곁에 더부살이하면서도 외간 남자와 바람을 피우고, 둘째 언니 역시 바람기가 있어 평판이 좋지 않았다. 그런 바람의 소용돌이에서도 미숙이만은 참했다.
“그럼 미숙이 한테 마음이 좀 있었네요?”
“그래요. 그런데 시집을 가버리고 말았거든. 그것도 열 살이나 훨씬 나이가 많은 떠꺼머리한테 갔는데 잘 사는 것도 아니고 그저 밥만 겨우 먹는 집이지. 시어머니는 언어장애인으로 반버버리였거든”
“그래서 당신이 붙들지 못한 것이 후회된단 말이죠?”
“그까짓 건 아니고. 심성이 좋고, 예쁘고 그랬지. 그래서 떠꺼머리한테 시집을 간 미숙이가 가련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야. 하지만 미숙이 남편도 나중에 안 일이지만, 비록 떠꺼머리였지만 반버버리인 홀어머니를 모시고 농사일을 열심히 했던 노총각인데 미숙이와 결혼 후에는 강릉 시내로 나가 둘이 연탄배달 일을 하며 열심히 산다는 소식을 들은 게 마지막인데, 그런데 미숙이를 어떻게 알아?”
“미숙이를 만났어요”
“어떻게?”
“강릉여성회관에서요. 읍, 면, 동 부녀회장 모임에 왔는데, 내 옆에 앉았더라구요. 나를 보더니 어디서 왔느냐고 묻길래, 나는 해내지 마을에서 왔다고 그랬더니 자기도 해내지에서 산 적이 있다고 그러면서 당신 이름을 대면서, 그 사람이 지금도 해내지에 살고 있느냐고 물어서, 대뜸 그 사람이 내 남편이라고 그랬는데 반색을 하며 ‘오빠 잘 있으냐?’ 묻길래 ‘잘 있다’고 그렇게 대답을 했죠. 그런데 그 여자가 왜 당신보고 오빠라고 하는지 아리송해요. 혹시?”
“혹시라니?”
“뭐 그렇고 그런 사이가 아니냐구요”
“확 까놓고 말하자면 미숙이가 날 짝사랑했지. 하마터면 군대 가기 전에 미숙이 한테 장가들 뻔했거든. 그런데 미숙이가 먼저 시집을 가버렸지. 그리고 나는 군대 가고 미숙이는 강릉에서 산다는 거만 알지. 그 후 30년이 지났는데 미숙이 소식을 당신한테 듣는구먼”
“그래요. 미숙이가 시간 내 오빠를 보러 집에 오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어요. 그런데 미숙이 걸음걸이가 이상해요. 왼쪽 다리를 절름대면서도 똑바로 걸으려고 하던데, 원래 그래요?”
“아니지. 시집가기 전에는 절름대지 않았는데 왜 절름대지, 많이 절름대?”
“아니요. 약간요?”
미숙이는 18세 처녀 때만 해도 그 또래의 처녀들보다는 건강미가 넘쳐 흘렸다. 꼭 찍어 말한다면 산골에 살망정 티 없이 맑은 눈동자에 옥 같은 자태였다. 그렇지만 생활이 넉넉지 못했던 그녀는 영수네 행랑채에서 꼬박 이태 동안 살면서 두 번의 보릿고개에 양식을 아끼느라고 나물죽이라도 쑤어 먹으려고 산과 들로 나물을 뜯으러 다녔던 미숙이가 다리를 약간 절름댄다는 말이 영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혹시 무슨 사고라도 당해서일 까라는 생각을 하며 오지그릇 뚝배기 깨지는 둔탁한 소리로 아내에게 말했다.
“미숙이가 우리 집에 오면 알겠지. 어느 정도 절름대는지 물어보면 알겠지”
“당신도 딱해. 그런 걸 왜 물어요. 듣는 사람이 기분 잡치잖아요?”
“하긴 그래. 하지만 이태 동안 오빠라고 불렀던 처녀니까. 그런데 나도 실은 미숙이가 싫진 않았거든. 단지 미숙이 엄마가 행실이 좀 그런 여자라는 나쁜 소문이 나서 좀 그랬지. 그런데다가 언니들조차 행실이 그렇고 그러니 좀 그랬어”
“좀 그랬지라니요?”
“마을 사람들이 딸은 제 어미 행동대로 따라 한다고 미숙이 조차 여자로서의 행실이 자기 엄마와 언니들처럼 나중에 그렇게 될 거라고 여겼던 거야. 그런 분위기에 미숙이 한테 약간 거리를 두고 있었던 거지. 만약 그때 내가 미숙이의 마음을 받아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당신과 나랑 만날 일이 없었겠지요. 미숙이, 처녀 땐 꽤 예뻤을 것 같애요”
“같애요가 아니라 사실 예뻤거든. 딱 부러지게 표현하자면 단순호치丹脣皓齒의 낭창낭창한 버들 허리 ‘팔등신 미녀’였지. 도회지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전문 미용실에서 몸매 제대로 가꾸었더라면 미스코리아 ‘진眞’은 몰라도 ‘미美’는 되었을걸. 그 당시 초등학교만 다녔는데도 비록 식모살이지만 2, 3년 서울 물을 먹어서 맹탕은 아니었어. 어떻게 배웠는지는 몰라도 알파벳 A, B, C는 알고 있었던 거야. 아마 중학교 과정의 강의록을 본 것 같애”
그런 일이 있었던 후에 영수의 아내는 미숙이를 집으로 초대했다. 매미마저 덥다고 목청껏 맴맴 울어대는 여름 한낮이었다. 미숙이의 손에는 그물망에 담긴 큰 수박과 큰 술병이 들려있었다. 이미 영수의 아내는 지난해 직접 농사지은 콩을 삶아 믹서기에 갈아 놓았던 콩물을 냉장고에 넣어 두었고 손수 밀가루 반죽을 납작하게 밀대로 밀어서 칼국수를 만들어 놓았다. 미숙이가 오기만 하면 칼국수를 삶아 건져 찬물에 헹군 후 냉장고에서 콩 국물을 꺼내 담아내 점심 대접할 시원한 콩국수를 준비해 손님맞이를 해놓았다.
드디어 미숙이가 약속한 시각에 맞춰 왔다. 현관문을 들어서면서, “사 올 건 없고 우리 집에서 재배한 수박인데 올여름은 유난이 가물어서 매우 달다”고 그러면서 오빠 주려고 더덕으로 담근 술도 한 병 가지고 왔다고 했다. 영수의 아내는 수박과 술병을 받아 들며 그냥 오면 어떠냐고 반색하며 주방으로 이끌었다.
그때 영수는 안방에서 그 옛날 자기네 행랑채에 살던 미숙이를 만난다는 설렘으로 앉아있기보다는 서성이다가 주방으로 가서 미숙이를 보자마자 먼저 그녀의 손을 잡고 반가워했고, 미숙이 역시 그 반가움의 답례로 처녀 때의 보조개 웃음을 살짝 지어 보였다.
“오빠! 오랜만이네요?”
“그려, 한 사십 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지. 이렇게 만나니 반가워!”
“그래요, 오빠! 난 오빠를 이렇게 만나본다는 게 정말 행운인가 봐요”
“나도 가끔 동생 생각을 했어. 왜 우리 집 행랑채에 살 때지, 그땐 우리 집은 커다란 금성사金星社에서 나온 탁상용 커다란 진공관 라디오가 있었지만, 너는 서울에서 어렵게 식모살이해서 번 돈으로 사 온 손바닥만 한 일제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유일한 낙樂이자 동무였고, 이미자의 신곡 유행가가 나올 때마다 노래를 따라 부르며 가사를 베껴 놓고 외우던 네 모습이 선해. 그리고 있잖아. 왜, 그 뭐냐 추석 저녁때 우리 마을 해내지, 그리고 아랫마을 토내지, 웃마을 벌내지가 공동으로 주최한 면민 콩쿠르에 나가 ‘한번 준 마음인데’를 불러 삼등 했잖아, 삼등! 그런데 실력으로는 일등이지만 너를 외지에서 이사 왔다고 차별해서 그렇게 됐잖아! 그때 가슴이 아팠어!”
“저도 알아요. 오빠가 열심히 응원해 주었잖아요. 박수치고 노래 끝에 앵콜을 외친 사람은 오빠밖에 없었으니, 그럼 나 오빠를 위해 오늘 그 노래를 한 번 불러줄 테니까요. 언니는 오해하지 마셔요”
영수와 미숙이의 해후는 그렇게 시작되었고 콩국수로 점심을 먹은 후 마당으로 나가 그늘진 감나무 밑 평상에서 영수의 아내는 미숙이가 가지고 온 수박을 쪼개 놓은 더덕주 술상을 차려 놓았다. 미숙이는 더덕주를 술잔에 따라 영수 부부에게 먼저 권했다. 더덕 향기가 분위기를 화和하게 했다. 영수도 미숙이에게 술을 권했다. 몇 순배의 술잔이 돌고 뭔가 서로 통한다는 화기애애和氣靄靄한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술기가 오른 미숙이는 스스럼없이 영수가 왜 왼쪽 다리가 불편한지 물어보기 전에 누에가 고치를 지으려고 실을 토해내듯 말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난 한때 오빠를 사랑했어요. 그땐 오빠는 나를 사로잡는 우상이었어요. 먼저 아까 말한 옛날에 추석 때 면민 콩쿠르에서 부른 ‘한번 준 마음인데’를 한 곡조 뽑고 얘기할게요”
밤하늘의 별빛은 꺼질지라도 한번 준 마음인데 변할 수 없네 사랑이 미움 되어도 바람 속에 세월 속에 그리운 얼굴 가슴 깊이 새기며 살아갑니다 세월따라 꽃잎은 시들어 가도 한번 준 사랑인데 돌릴 수 없네 사랑은 흘러간대도 바람 속에 세월 속에 정다운 이름 영원토록 그리며 살아갑니다
난 오빠를 짝사랑하면서 이 노래를 많이 불렀지요. 내 마음을 몰라주던 오빠를 원망하면서 불렀지요. 시집가기 전날 밤 마지막으로 오빠의 얼굴을 지우면서도 이 노래를 불렀지요. 그러면서도 우리 집 환경이 오빠네와는 너무 달랐기에 체념하고 못난 남편 따라서 일부종사一夫從事하기로 했지요. 그런데 남편은…”
“아니, 남편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지요. 우리 부부는 연탄배달을 하며 돈을 좀 모으게 되자 시내에 좀 떨어진 산촌에 농토를 장만하고 농사를 짓게 되었고, 소도 여러 마리 키우면서 슬하에 자식은 남매인데 둘 다 대학을 공부시켜 취직해 외지로 나가고, 이젠 좀 밥 먹고 살만했는데 그만 남편은 이 세상을 떠났지요. 그것도 위암에 걸려 전 재산을 다 털어 먹다시피 하고 가버렸지요. 그렇지만 조금 남은 자투라기 땅에 농사짓고 살면서 봄이면 높은 산에 산나물을 뜯어다 시장에 내다 판 돈으로 가용으로 요긴하게 쓰고 했는데, 그만 죽을 뻔하고 다시는 산나물 하러 산에 가지 않지요”
“아니, 죽을 뻔하다니! 그게 무슨 일이야? 요즘 우리나라에선 멸종된 큰 산짐승 호랭이는 아닐 테고, 혹시 도야지 습격이라도 당했단 말인가?”
“그건 아니고요. 오빠, 몇 년 전에 방송에 크게 뉴스 나가고 신문에 실렸던 산나물 채취하러 갔다가 군사기지에 매설했던 지뢰를 밟아 크게 다쳤단 여자를 모른단 말이오?”
“그런데, 뉴스는 보지 못했고, 그런 사건이 있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구체적인 사실과 누구인 줄 몰랐지!”
“오빠, 바로 그 사건의 주인공이 저 미숙이었지요. 그래서 왼쪽 발목을 잃고 의족을 했어요. 그래서 약간 절름대요”
영수는 아내한테 처음 미숙이가 왼쪽 다리를 절름댄다는 말을 듣고 왜 절름댈까? 많은 의문을 품었는데 비로소 미숙이를 만나 의문이 풀렸다.
미숙이가 해마다 봄에 산나물을 채취했던 높은 산은 태백산맥 오대산과 대관령 사이에 있는 황병산으로 6·25전쟁 후 군사기지가 들어선 곳으로 적과 외부 민간인의 무단출입을 막기 위해 발목지뢰를 매설해 놓았다. 그런데도 이 군사기지가 있는 이 산에는 양질良質의 산나물이 많이 났다. 향기 짙은 곰추, 그리고 독특한 향을 품고 있는 강원도 토속나물 누리대는 높은 값으로 팔리는 바람에 지뢰의 위험을 무릅쓰고 지뢰매설 구역 안에 들어가 산나물을 채취하다가 사고가 나고는 했는데, 그 사고 중 한 사고의 주인공이 미숙이었다.
“오빠, 그땐 난 죽는 줄 알았어요. 발아래서 무엇인가 퍽 터지는 순간 발목이 없는 거예요. 아찔했지요. 그리고 피가 솟구치는 걸 보고는 하늘이 노랗게 보이면서 나중엔 앞이 보이지 않아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같이 갔던 마을 아주머니들이 피를 멈추게 하려고 끈으로 다리 정강이를 꽁꽁 묶은 다음 서로 번갈아 엎고는 간신히 민가가 있는 산 아래로 급히 내려간 다음 경찰서에 신고 됐고 구급차가 와서 병원으로 이송돼 살았지요”
“아, 목숨을 잃지 않았으니 다행이구먼”
“다, 나 잘못이죠. 빨간색 표지판에 ‘지뢰地雷’라는 표시를 해놓고 ‘무단출입을 하지 마라’는 경고문을 무시하고 안으로 숨어 들어가 나물을 뜯는다는 게 위법이지요. 누구한테 하소연할 수 없었지요. 오히려 죄를 받아야 했지만, 당국의 선처로 일이 잘 해결됐지요”
“아, 그건 동생의 잘못이 아니고 남북분단南北分斷이 빚어낸 비극이지. 해방 후 분단이 되지 않았더라면 그런 일이 없었을 거야. 토내지 골에 아는 형도 동생처럼 남북분단의 비극으로 한쪽 눈을 실명했지. 그 형은 중학교에 갈 형편이 못돼 꼴망태 쇠꼴 베는 목동으로 앞산, 뒷산 나무해 나르던 초동樵童이었지. 언제나 그리운 건 중학교 마당 밟아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그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지. 꿈 대신 돌아온 건 얄궂은 사고였어. 쇠꼴을 베러 갔다가 풀숲에서 6·25전쟁 때 버린 폭탄의 뇌관을 주워 어린 마음에 무엇인가 호기심이 땡겨 낫 끝으로 탁탁 두드려보다가 폭발해, 그 파편이 눈에 박혀 그만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았으나 실명하고 말았지만, 그 후 그 형의 동창생들이 그의 번듯한 이름 대신 ‘애꾸눈’이라고 불렀지. 심하게는 눈이 까졌다고 ‘까집이’라고 조롱조로 불렀는데 그래도 심성이 고운 그는 애꾸눈이든 까집이든 개의치 않고 지금도 동창생 모임에 나오거든. 그런데 그런 장애를 딛고 시내에서 열심히 가내공장을 하며 오십이 넘도록 홀로 살다가 연변 아가씨 만나 신접살림 차리고 잘살고 있어. 뒤늦게 애까지 낳고 말이야. 지금까지 내가 알기로는 군사지역, 특히 민통선에서 그런 유사한 사고로 수많은 민간인이 목숨을 잃거나 다리 등 신체의 일부를 잃은 장애인들이 많이 있거든”
“그렇대요. 처음엔 목발만 짚고 다녔는데 사람들이 병신이라고 곱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기에 의족을 하게 되었는데 걸음을 걸을 땐 약간 절름대지요. 그런데도 여전히 사람들의 시선이 좀 그래요!”
“그런 시선을 극복해야지. 앞으로 장애인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많이 달라질 거야”
“그래야죠. 내가 장애인이 되고 보니, ‘과부 심정 과부가 안다’고 장애인들의 심정을 알겠더라고요. 그래도 난 행복하게 생각해요. 한쪽 발목만 잃길 다행이지 만약 두 발목을 다 잃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런 생각을 많이 해요. 양쪽 다 의족을 하면 오리처럼 뒤뚱대며 걸을 수 있겠지만, 이렇게 자유스럽게 나들이할 수 없겠지요. 감사할 따름이지요. 그래서 우리 마을 부녀회장을 맡아 열심히 마을을 위해 일하고 있어요. 그런데도 무슨 장애인이 부녀회장을 한답시고 남편도 없는 년이 싸돌아다니느냐고 깔보는 사람들이 있지만 개의치 않아요. 우리 주변에는 생활하다가 사고로 죽거나 장애인이 될 환경이 너무 많아요. 하다못해 경운기를 몰고 논밭으로 가다가 전복하면 깔려 죽을 수도, 다쳐 장애인이 될 수도 있는데 그런 생각은 조금도 안 해요”
“맞는 말이지. 멀쩡한 사람도 살다보면 본의 아니게 어떤 재난이나 사고가 나서 장애인이 될 수 있지. 실은 나도 장애인이야”
“오빠, 어디가…?”
“장애인들의 심정을 모르는 장애인이야. 즉 비장애인이지”
“아이구! 깜짝 놀랐잖아요”
그날 영수는 미숙이 한테 그간의 사연을 듣고 나서야 미숙이가 왼쪽 발목이 절단돼 절름대는 장애인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자기 집 행랑채에 살던 때처럼 오빠, 동생처럼 지내기로 했다. 한편 그녀는 돌아오는 동지 무렵에 아들을 장가들인다면서 일가친척도 별로 없는데 친오빠 셈치고 부디 결혼식에 참석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영수는 강릉 가는 시내버스를 아무리 기다려보아도 오지 않자 눈이 좀 많이 와도 차량이 다니는 7번 국도가 지나는 면 소재지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30여리 되지만 눈길일지라도 있는 힘을 다해 뛰다시피 걸으면 2시간이면 될 것이고, 거기서 시내버스를 타기만 하면 미숙이의 아들 결혼식에 당도할 것 같아 눈길을 내달렸다.
영수의 아내도 남편과 같이 가서 미숙이의 아들 결혼식을 축하해야 했는데, 무심한 하늘을 쳐다보다가 동구 밖 눈길 속으로 사라지는 남편의 뒷모습을 아련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