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해운대구 중동 해운대시장 입구의 '신흥관'은 해운대에서 가장 오래된 음식점이다.
물론 이전에도 음식점이야 있었겠지만, 지방자치단체에 공식 등록된 음식점 '1호'가 바로 '신흥관'이다.
'신흥관'은 1954년, 당시 관할 관청인 부산시 해운대출장소에 영업신고를 했다.
그 뒤를 이어 '해운대암소갈비집'(1962년), '금수복국'(1970년) 등이 등장한다.
제주도·설악산·경주·유성 등과 더불어 1994년 국내 최초로 관광특구로 지정된, 연간 방문객이 2천만 명에 이르는 해운대 정도 되는 동네에서 반 세기 넘어 존재했다면, 화려한 중국식 기와와 홍등으로 치장한 건물에 값비싼 코스요리 정도가 나와야 정석이다.
하지만 '신흥관'은 배달을 하지 않는다는 것 외에는 동네 중국집과 다를 바 없는 외형과 메뉴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중화요리전문점'이 아니라 '중국집'이다. 그렇다고 만만히 볼 집이 아니다. 수십 년 단골은 단골대로 발길이 이어지고, 신세대 입맛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블로거들은 블로거들대로 칭찬 일색이다. 기호는 다양해지고 입맛의 기준은 높아지는 세태에서 57년 동안 한자리를 지키며 초심을 유지하는 비결이 뭘까?
"1940년대부터 시작된 역사는 중국 산둥성
만주 북한 서울 부산 대만을 배경으로 한다
소설로 치면 대하소설 수준 영화로 치면 블록버스터다.
장성은 쌓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더 어렵다
이 작은 중국집이 만리장성만큼이나 크고 단단해 보인다"
먼저 역사를 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1940년대부터 시작되는 이 작은 중국집의 역사는 중국 산둥성, 만주, 북한, 서울, 부산, 대만 등을 배경으로 한다. 사람의 이야기니 로맨스는 물론 역사의 수레바퀴와 맞물려 제법 스펙터클한 요소도 있다. 소설로 치면 대하소설 수준이고, 영화로 치면 어지간한 블록버스터급은 된다.
'신흥관'의 창업자인 윤무림(1921∼1983) 씨는 중국 산둥성 북동부에 있는 옌타이 출신이다. 한국에서도 꽤 알려진 '연태고량주'라는 중국술이 생산되는 바로 그 동네다. 무역업에 종사하던 윤 씨는 20대 초반에 산둥성을 떠나 만주와 평양을 거쳐 1940년대 후반 서울에 정착한다. 서울서 그는 같은 고향 출신이 운영하던 중국집에 취직하고, 여기서 주인집 따님이자 이후 평생의 반려자가 될 왕괭향(1928∼2006) 씨를 만난다.
운명이란 원래 모질고 질투가 강한 것이어서, 두 사람의 사랑이 싹틀 즈음 한국전쟁이 발발한다. 혈혈단신이던 윤 씨는 배달용으로 사용하던 자전거를 타고 피난길에 오른다. 부산까지 꼬박 8일이 걸렸다. '설마…' 하겠지만 산둥성에서 만주, 평양, 서울을 거쳐 온 그의 인생 역정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한 사실이다.
피난지 부산에서 다시 만난 두 사람은 결혼을 하고, 1954년 지금의 자리에서 '신흥관'을 시작한다. 꼼꼼한 성격이 요리에까지 이어졌던 남편과 화상의 딸로 장사 수완이 남달랐던 아내가 운영하는 중국집은 비교적 순탄한 길을 걷는다. 그 나름대로 재산도 모으고 8남매를 낳아 길렀다. 여기까지가 1부다.
한국전쟁이 끝나자 해운대에는 군수물자의 하역 등을 위해 미군 부대가 주둔했다. 송림공원 근처 우1동 609번지에는 '609탄약중대'가 있었고, 달맞이고개에는 미군 골프장이, 해운대해수욕장에는 미군 클럽이 있었다. '신흥관'과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지금의 해운대구청 자리에도 미군 부대가 있었다. 과거 어디든 마찬가지였듯, 군대가 주둔하던 곳에는 자연스레 기지촌이 형성되었고, 기지촌에는 아가씨들과 그들에게 기생하는 건달들이 몰리기 마련이다. 그래서 초창기 '신흥관'의 주요 고객은 미군, 아가씨, 건달 순이었다. 미군이 떠나자 지금의 해운대구청 자리에는 '온천풀장'이라는 여관이 들어선다. 이때부터는 전국에서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이 주요 고객이 된다.
신흥관 역사의 제2부는 장남 영호(50) 씨로부터 시작된다. 대만으로 유학을 가 무역학을 전공하던 영호 씨는 아르바이트를 하던 햄버거 가게에서 아내 유소정(47) 씨를 만난다. 대만의 명문 여대에서 금융학을 전공했던 소정 씨는 남편만 믿고 덜컥 한국행을 결정한다. 하지만 1988년 귀국한 부부에게는 녹록지 않은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8남매를 공부시키고 시집 장가 보내느라 재산은 온데간데없고 빚만 쌓여 있었다. '신흥관'은 1983년 부친이 돌아가신 후 직원으로 있던 분이 운영하고 있었고, 어머니 왕 씨는 얼마 되지 않는 임대수입으로 생활하던 처지였다. 영호 씨는 그간 쌓인 빚을 청산하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한 방편으로 '신흥관'을 재건하기로 한다.
다행히 '신흥관'을 운영하고 있던 직원은 2세가 물려받는다면 가게를 돌려주겠다던 약속을 지킨다.(그 직원은 현재 해운대해수욕장 입구에서 '문화관'이라는 중국집을 운영하고 있다.) 이때부터 초보 요리사인 남편과 한국말도 제대로 못하는 아내의 파란만장한 삶이 시작된다.
영호 씨는 기억 속에 남아있는 아버지의 음식 맛을 토대로 어머니로부터 혹독한 수업을 받았다. 아내 유소정 씨는 밖으로는 언어의 장벽과 문화의 차이를 극복해야 했고, 안으로는 시집살이와 육아를 감당해야 했다. 꼬박 4년이 걸렸다. 남편은 제법 요리사다운 실력이 붙었고 아내는 서툴게나마 부산의 말과 정서에 적응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또한 시작에 불과했다. 부모님이 30년 동안 쌓아 놓은 견고한 벽을 뛰어 넘어야 했다. 부부는 그렇게 23년 동안 '신흥관'을 이끌어 왔고 이제는 청출어람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신흥관'을 반석에 올려 놓았다.
고객층은 달라졌어도 예나 지금이나 '신흥관'의 변함 없는 인기 메뉴는 자장면과 탕수육이다. 차이점이라면 자장면의 경우 지금은 공장에서 생산되는 춘장을 쓰는 반면, 과거에는 '신흥관'에서 직접 담가서 썼다는 점. 또 탕수육 소스의 경우 요즘에야 케첩의 사용이 일반화 되었지만, 케첩이 흔치 않던 과거에는 간장으로 간을 했다. 지금도 전통을 지키기 위해 간장을 고집하는 중국집이 더러 있다.
자장면과 탕수육에 이어 최근 들어 '신흥관'의 대표 메뉴로 떠오른 것은 사천자장과 짬뽕이다. 부모님이 운영하시던 시절에도 사천자장과 짬뽕은 있었지만 지금의 모습과는 조금 달랐다. 사천자장은 매운맛이 주를 이루었던 반면, 짬뽕은 맵지 않은 흰짬뽕이었다.
사천요리는 해산물을 주 원료로 하며 매운맛이 특징이다. 현대인들은 단순히 맵기만 한 음식보다는 매콤·달콤·새콤한 맛이 이루는 3박자를 선호한다. 그래서 사천자장 역시 세 가지 맛을 아우르는 형태로 변했다. 많은 사람들이 '신흥관'의 사천자장에 두반장 소스가 사용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은 고춧가루, 고추기름, 간장 등으로만 맛을 낸다.
짬뽕의 변화는 이보다 조금 더 글로벌하다. 돼지고기·표고버섯·죽순·파 등을 넣고 끓인 국물에 국수를 말아 먹는 중국 푸젠 지방의 음식인 '탕러우쓰'과 고기와 채소를 볶아 닭이나 돼지뼈로 만든 육수를 붓고 면을 말아먹는 '초마면' 등이 짬뽕의 기원이다. 이 음식들이 일본 나가사키에서는 '잔폰'이 되고, 한국에서는 '짬뽕'이 된다. 나가사키의 '잔폰'은 원형을 비교적 유지한데 반해 '짬뽕'은 급격한 현지화 과정을 거친다. 재료를 볶는 과정에 마른고추와 고춧가루가 들어감으로써 매운 음식으로 변한 것이다.
취재 과정에서 '신흥관'의 옛날 맛을 확인하기 위해 간장소스를 곁들인 탕수육과 초마면을 부탁했다. 탕수육의 경우 새콤 달콤함은 줄어 든 대신 담백하고 깔끔한 맛이다. 돼지 등심 부위의 육질과 얇은 튀김 옷이 이루는 풍미가 훨씬 선명하게 느껴진다. 신선한 해산물과 채소를 재빨리 볶은 다음 돼지뼈를 진하게 우려낸 육수를 부은 초마면은 골격이 단단하다. 기존의 짬뽕이 시원하고 칼칼한 맛이라면 초마면은 풍부한 향과 더불어 첫 맛은 묵직하지만 끝 맛은 개운하다. 옛맛을 경험하고 싶은 고객을 위해 간장소스 탕수육과 초마면(2인분 이상)은 지금도 주문을 받는다.
오십칠 년의 전통을 지켜 온 '신흥관' 맛의 비결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우선은 재료다. 채소, 해산물, 육류 등의 기본 재료는 그날그날 사용할 분량만 구매한다. 면은 하루의 영업을 시작하기 전인 오전 일찍 뽑는다. 돼지등뼈와 다리뼈를 사용한 육수 또한 직접 뽑는다. 기본이 반듯하니 음식이 정갈할 수밖에 없다.
두 번째 비결은 '불'을 다루는 솜씨다. 강한 불에서 5㎏이 넘는 중국 팬(웍)으로 재료를 재빨리 볶아 내면, 재료의 질감은 살아있되 특유의 풍미가 생긴다. 흔히 말하는 '불맛'이다. 이 맛에는 묘한 중독성이 있다. 한번 맛들이면 헤어날 수 없는 간자장에도, 단순한 양념만을 사용한 사천자장에도, 생닭을 뼈째 사용한 깐풍기에도 '신흥관' 특유의 풍미가 느껴지는 것은 부모님한테서 윤영호 대표에게 이어진 불을 다루는 솜씨 덕분이다. 내림 손맛이란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신흥관 역사의 제3부는 조금 더 기다려야 할 듯싶다. 윤영호 씨와 유소정 씨 부부의 딸은 대만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현재 한국과 대만이 합작한 게임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다. 아들 역시 대만대학에서 유학 중이다. 아들이 '신흥관'을 물려 받았으면 하는 속내를 굳이 감추지는 않지만 우선은 본인의 의지를 존중해 주고 싶다는 게 아버지의 생각이다. 대신 2대를 걸쳐 내려온 맛과 기술을 전수해 줄 제자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57년 전통의 무게를 감당할 만한 의지와 열정을 가진 사람이라면 한번 도전해 볼 만하겠다.
'장성은 쌓는 것 보다, 지키는 것이 더 어렵다'라는 중국 속담이 있다. 윤영호 씨와 유소정 씨 부부는 부모님이 쌓아 놓은 '신흥관'을 더욱 견고하게 지켜왔다. 이들의 역사를 헤아리고 이들이 만드는 음식을 경험하고 나면, 이 작은 중국집이 만리장성만큼이나 크고 단단해 보인다.
부산 해운대구 중1동 1394의 32. 051-746-0062.
매주 월요일 휴무. land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