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어느 봄 날>
아름다운 김현숙안과 김현숙
4월의 어느 봄 날, 여느 때처럼 수술을 마치고 나오면서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대 교수님으로부터 부재중 전화가 남겨있었다. 아마도 곧 전주에서 있을 감성뮤지컬 Thank U 때문에 홍보와 관람 부탁하시려는 거 같아 짬이 나는 대로 바로 전화 드렸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뮤지컬 중간에 안과의사가 출연하는데 출연을 부탁하신다고 하신다. 1998년 개원가로 나온 후 일 년에 이수해야하는 평점만 겨우 이수하며 거의 잠수타 있던 나에게 웬 뜬금없는 출연제의인가 싶어 좀 당황스럽고 사양하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당신 귀한 시간 내셔서 순수하게 봉사하시는 교수님 모습이 떠오르자 거절하기가 부끄러워 “알겠습니다.”라고 답을 하고 말았다.
살짝 비가 흩뿌려 흐린 일요일 오후, 운전대를 잡고 뮤지컬 공연이 있을 전주 소리문화의 전당으로 향하였다. 타 대학 교수님이셔서 나의 젊었을 적 모습만 기억하시고 내게 연락하셨나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의 아내가 되고 아이들 엄마가 되고 안과개원의가 된 후 1인3역을 해내느라 여유도 없고, 매일 반복되는 수술만하며 매너리즘에 빠져 살고 있는 현재의 나와 대비되던 과거의 내 모습! 그 때의 생생한 느낌들이 갑자기 파노라마처럼 떠오르며 가슴이 울리는 거 같았다.
1992년 안과 레지던트가 되어 처음 세극등을 통해 들여다본 눈은 가슴이 철렁 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맑고 투명한 각막에 조금씩 살아 움직이는 갈색 줄무늬의 홍채, 투명한 수정체, 그들 사이를 고요히 채우며 흐르고 있는 맑고 깨끗한 방수. 거의 반혼수상태의 레지던트 1년차에게도 지금까지 선명하게 떠오를 정도의 신선한 충격이었다. 조금 더 진도가 나가 간접검안경을 머리에 쓰고 산동된 동공을 통해 안저를 볼 단계가 되었는데 그때의 충격은 더 어마어마했다. 어두운 동공 뒤에 그런 매혹적인 세계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아름다운 석양을 떠오르게 하는 주홍빛 우주에 둥근달이 떠있는 듯한 모습을 보며 눈은 단순히 세상을 보는 기관이 아니고, 그 안에 또 하나의 우주를 품고 있는 심오한 곳이라고 믿었었다. 마음속 깊이 묻혀있던 이런 기억들이 떠오르며 가슴이 뜨거워지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해있었다.
공연 한시간전이었다. 뮤지컬담당자에게 인사를 하자 감독님과 배우들이 반갑게 맞이해주며 내가 무대에서 할 역할을 알려주고 리허설도 했다. 짧은 리허설을 마치고 밖으로 나와 찻집으로 향했다. 찻집에 앉아서 잡지책을 뒤적이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낯익은 목소리들이 들렸다. 원장이 뮤지컬 출연한다고 직원들이 귀한 일요일 시간을 내서 구경하러 와준 것이다. 뮤지컬출연이라니 대단한 안무와 노래를 할지도 모른다고 기대했을지도 모르는데 병원에서 매일 듣는 원장의 대사를 또 들을 줄은 몰랐을 것이다. 공연시작시간이 가까워져 공연장으로 들어갔다. 어두웠던 무대에 환한 조명이 비치며 경쾌한 음악과 코믹한 춤으로 공연이 시작되었다. 고망마을이 고향인 안과의사 혁기는 중병에 걸려 인생후반기를 봉사하며 정리하려고 고향에 와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숨 가쁜 레지던트생활에 회의를 느껴 한적한 시골 마을로 도망쳐온 제자 지원을 만나게 된다. 항상 긴장 속에서 누런 가운에 잠도 거의 못 자는데 어떻게 여유 있는 미소를 지을 수 있겠느냐고 푸념하는 지원을 보며 지금 막 본과 1학년이 되어 좌충우돌하고 있는 아들의 모습이 겹쳐보이며 마음이 짠했다. 나의 레지던트시절도 떠올랐다. 엄청난 양의 공부와 사투를 벌여가며 당당히 의사가 되고 수련의가 되었지만 우리는 3신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일할 때는 병신, 눈치볼 때는 귀신, 먹을 때는 걸신. 주변은 부조리와 불합리로 가득 차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원보다는 문혁기과장과 비슷한 연배가 된 지금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인간이란 본래 부족한 존재라는 것을 처절하게 이해하고 그런 인간을 포용하고 사랑하게 되었다. 두 안과의사가 고망마을에서 펼치는 따뜻한 이야기 속에 시력을 잃어가지만 용기를 잃지 않는 지혜와 치매와 녹내장을 앓으며 아내를 먼저 보내고 홀로 살고 있는 박노인이 또 마음을 뭉클하게 했다. 거기에 이장부부의 익살스러운 찰떡궁합 연기, 중간 중간 경쾌하고 서정적인 음악과 신나고 코믹한 춤들이 섞여 각 재료의 맛은 살아나면서도 어우러져 맛을 내고 있는 꼭 우리 전주비빔밥을 먹는 것처럼 맛있게 느껴졌다.
맛있는 공연을 즐기고 공연장 밖으로 나오니 흩뿌리던 비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밝고 따스한 햇살이 대신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따스하고 화창한 봄인데 제대로 된 꽃구경도 나비도 보지 못했었다. 다행히 이 뮤지컬을 보면서 과거의 내모습도 꺼내어 보고 현재의 내모습도 살펴보고 따스한 고망마을 사람들의 이야기에 흠뻑 젖어도 보니 비로소 내 마음속에도 예쁜 나비가 멋진 봄꽃사이를 돌아다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