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류 양주 별산대 놀이 지정번호 중요무형문화재 제2호 지정연도 1964년 12월 7일 기능보유자 김순희
※본문
1964년 12월 7일 중요무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었다. 애오개(아현동)·가믄돌(玄石)·사직골 등지의 것을 본산대(本山臺)라고 부르는 데 대하여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州內面)에 전승되는 탈놀음을 별산대라고 부른다. 양주별산대는 지금으로부터 200여 년 전 양주사람 이을축(李乙丑)이 서울 사직골 딱딱이패들에게 배워 양주에 정착시킨 것이라 하며, 그는 양주 최초의 가면제작가라고도 한다.
초파일·단오·추석에 주로 연희되었고, 그 밖에 명절이나 기우제(祈雨祭) 때도 연출되었다. 놀이 전에 탈고사를 지내는 것이 상례인데 고사에는 조라(산제에 쓰는 술)와 떡과 삼색과일·소머리·돼지다리 등 푸짐한 제물이 준비된다. 제물과 제주를 음복하여 취기가 돌면 앞놀이(길놀이)가 시작되는데, 서낭대와 탈들을 앞세우고 풍물을 울리며 마을을 순회한다. 놀이터는 양주 사직골로, 불곡산(佛谷山) 계곡 입구의 사방이 경사진 곳이 천연의 노천극장 구실을 하였고, 한가운데는 개복청(改服廳)과 삼현청(三絃廳)이 설치되었으며 그 주위에 잘 바라볼 수 있는 곳에 관객들이 앉게 되고, 조명은 모닥불이나 기름불로 밝히며 밑에서 위로 비추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한다.
놀이는 다른 가면극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음악반주가 따르는 춤이 주가 되며 거기에 묵극적(默劇的:팬터마임)인 몸짓과 동작 ·사설, 그리고 노래가 곁들여져 가무적인 부분과 연극적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등장인물은 상좌 2명과 먹중 4명과 완보(完甫)·옴중·소무(小巫)·연잎·눈끔적이·샌님·취발이·말뚝이·쇠뚝이·왜장녀·애사당·원숭이·포도부장·도령·해산모(解産母)·신주부·신할아비·미얄할미·도끼·도끼누이 등이며, 탈은 대개 바가지탈로 현재 22개의 탈이 있어 역할에 따라 겸용하기도 한다.
사설(대사)은 봉산탈춤이 비교적 운문적(韻文的)이라면 별산대놀이는 평범한 일상 회화로 비어(卑語)를 쓰며 동작은 하나의 전기적인 역할을 한다. 춤사위는 한국 민속가면극 중 가장 분화·발전된 것으로 몸의 마디마디 속에 멋[神]을 집어넣은 염불장단의 거드름춤과 멋을 풀어내는 타령장단의 깨끼춤으로 구분되어 몸짓 또는 동작이 유연한 형식미를 갖추었다. 반주악기는 삼현육각(三絃六角), 즉 피리·젓대·해금·장구·북 등인데 꽹과리·호적 등을 추가하는 경우도 있으며 반주장단에는 염불·타령·굿거리 등이 있다.
연희의 내용은 산대도감 계통의 공통된 내용으로 남녀의 갈등, 양반에 대한 풍자·모욕, 서민생활의 빈곤상 등 당시의 현실 폭로와 특권계급에 대한 반항정신을 나타내는 것들이다. 오늘날 산대놀이라 하면 이를 가리킬 만큼 대표적인 것이 되었다.
※양주 별산대 놀이의 역사와 배경
양주 별산대(楊洲別山臺)놀이는 서울 중심의 경기지방에서 연희되어 온 산대도감극(山臺都監劇)의 한 분파로서, 본산대(本山臺)라고하는 녹번(碌磻), 아현(阿峴)등지의 것과 대동소이한 것으로 보인다. 원래 이 산대놀이는 중국의 사신을 영접할 때도 연희되었으며, 나례도감(儺禮都監) 후에 산대도감(山臺都監)에서 관장한 궁중 행사에도 동원되었다.
그리하여 연희자들은 쌀, 포(布)등을 지급받았다. 그들은 보통 편놈(便人)들로서, 인조이후 공의(公儀)로서의 산대연희가 폐지되자 각기 분산되어 그들의 거주지를 중심으로 산대놀 이 단체(契)를 모았다.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공연한 결과 녹번리(碌磻里)산대, 애 오개(阿 峴)산대, 노량진(鷺梁津)산대, 퇴계원(退溪院)산대, 서울 사직골 딱딱이패 등이 생긴 것이다.
특히 양주별산대놀이는 약 200년전부터 해마다 주로 4월 초파일과 5월 단오에 한 양 사직골 딱딱이패를 초청하여 산대놀이를 놀다가, 그들이 지방공연 관계로 공연 약속을 어기는 일이 많자 관아의 하리패인 아전(衙前)들이 사직골 딱딱이패를 본 떠서 탈을 만들고 연희를 시작했다고 한다.
이 때의 중심 인물은 이을축(李乙丑)으로 양주 최초의 탈 제작자 이다. 양주의 옛 읍은 교통의 요지로서 주막이 즐비했고, 또 양주목사(楊洲牧使)가 주재 (駐在) 하던 곳으로 한강이북에서는 가장 큰 고을이었다.
이러한 배경속에서 민간화된 양주별산대놀이는 목사가 주재하던 객문동을 중심으 로 소위 '본바닥' 사람들만이 출 수 있던 독특한 탈춤으로 전승되었다. 양주 별산 대놀이는 4월 초파일, 5월 단오, 8월 추석에 주로 연희되고 크고 작은 명절외에 가 뭄때의 기우제(祈雨祭)같은 때에도 연희되었다.
격식대로하자면 놀이전의 고사(告祀)에는 조라(祭酒)와 떡과 삼색 과일 외에 쇠머리, 돼지다리등 푸짐한 제물이 올 라야 하고, 그 제물과 조라를 음복하여 취기가 돌아야 놀이가 시작되었다.
놀이비용은 마을유지들과 부가(富家)나 상인들이 추렴하고 연희자는 원칙적으로 무보수 였다고한다. 놀이터는 주로 마을 북서쪽 불곡산(佛曲山) 아래의 사직골이 었고, 여기에는 당(堂)집이 있어 놀이의 가면과 여러도구를 보관했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사직당이 없어지고 놀이터가 경작지로 바뀌어 지금은 전수회관(傳授會館) 앞뜰에서 낮에 연희된다.
원래 산대(山臺)란 말은 산붕(山棚), 채붕(綵棚), 오산(鰲山) 등을 전부 포함한 범 칭(汎稱) 으로 잡희(雜戱)를 노는 일종의 높은 무대 배경이나 무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므로 '산대도감극', 또는 '산대놀이'라는 호칭은 한때 나례도감이나 산 대도감에 속하고, '산대'라는 공의(公儀)의 무대에서 놀던 호칭을 물려받은 것이지 만, 공의로서의 뒷받침이 없어지고 민속극화된 뒤 부터는 산대놀이터는 더욱 간소 한 야외무대가 되고말았다. 경도잡지(京都雜誌)에서 산대극을 야희(野戱)로 분류 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 유래된 것이 아닌가 한다.
※양주 별산대 놀이의 특징과 의의
양주 별산대놀이는 다른 한국 탈춤의 연출형태와 마찬가지로 음악반주에 춤이 주가되고 노래가 따르는 가무적(歌舞的) 부분과 거기에 묵극적(默劇的)인 몸짓(科)과 덕담 (德談), 재담(才談)이라고 하는 사설(曰), 즉 대사가 따르는 연극적인 부분으로 구성 상연된다.
상좌, 연잎과 눈끔적이, 왜장녀, 애사당, 소무(小巫), 노장, 원숭이, 해산모, 포도부장, 미얄할미역(役)은 대사 없이 춤과 몸짓(mime)과 동작으로만 연기하지만, 그 밖의 역들은 대사 와 함께 춤과 몸짓 및 동작으로 연기한다. 봉산(鳳山)탈춤의 대사가 비교적 운문의 억양을 고집하고 있는데 비하여, 양주 별산대놀이는 평명(平明)한 일상 회화조(會話調)의 대사이다. 그리고 옴과 취발이와 말뚝이의 대사는 이 놀이의 대사 중 백미(白眉)로서 관중의 흥미를 끌었고, 말 없는 탈의 연기에서는 노장의 펜터마임이 가장 우수한 것으로 시종 대사한마디 없이 춤과 몸짓으로만 소무(小巫)와의 파계 과정과 농희(弄戱)를 훌 륭히 한 마당의 놀이로 성립시키고있다.
노래는 장단을 청하는 짤막한 불림과 그밖에 매화타령(梅花打令), 백구타령(白鷗打令), 천자(千字)풀이, 덕담(德談) 등으로 가짓수가 많은편은 못되며, 그것도 덕담외에는 처음의 허두만 조금 부르다 곧 재담이나 춤으로 바꾸어버려 동작의 신호적인 큐의 역할을 한다.
민속예능(民俗藝能)의 일반적 특성으로 연출 시간에는 제한이 없어 보통 저녁에 시작하면 다음날 새벽까지 계속되었으며, 그때그때의 흥(興)과 형편에 따라 3~4시간으로 줄이는 수도 있었다. 산대놀이의 반주악기로는 삼현육각(三絃六角), 즉 피리2, 젓대1, 해금1, 장구1, 북1로 구성 되지만 이밖에 꽹과리를 추가하는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피리와 장구만으로도 춤을 춘다. 반주악(伴奏樂)은 완중(緩重)한 염불, 리듬이 명확한 타령, 유장(悠長)한 굿거리곡 등을 사용한다.
산대춤은 봉산 탈춤이나 오광대(五廣大)놀이의 덧배기춤에 비하여 비교적 전아(典雅)한 맛이 있고 형식미를 갖추고 있다. 이것은 아마 경기인의 기질이나 궁중무 (宮中舞)의 영향등에서 온 것이 아닌가 생각되나 더 분석적인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우선 양주 별산대춤은 크게 거(그)드름식 춤과 깨끼식 춤의 두 종류로 나누어진다. 현전하는 양주 별산대놀이의 내용은 산대도감 계통극과 공통된 내용으로 조선조 서민문학(庶民文學)의 특성과 마찬가지로 파계승, 몰락한 양반, 무당(巫堂), 사당(寺堂), 하인(下人) 및 기타의 늙고 젊은 서민들의 등장을 통하여 현실 폭로와 풍자, 호색(好色), 웃음과 탄식 등을 보여주며, 그 주제는
1)벽사(酸邪)의 의식무(儀式舞)와 굿 2)파계승에 대한 풍자 3)양반에 대한 모욕 4)남녀의 대립과 갈등 5)서민생활의 실상(實相) 등을 보여 주는 것 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는 당시의 특권계층과 형식 도덕에 대한 일종의 비판정신을 구체적으로 연출하는 민중극이다.
이것은 세계 어느나라의 민속극에서도 공통적으로 볼 수 있 는 것으로, 인간의 약점이나 시류(時流)의 악폐(惡弊), 당시에 호사를 부리는 계층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와 패러디(parody)인 바, 이러한 서민문학 상(相)은 임진, 병자의 양란이후 새로 일어난 서민문화를 주류를 이룬 사조로서 서민예술의 하나인 산대놀이도 예외일 수 없었다.
양주 별산대놀이의 연희자도 다른 탈춤의 경우와 같이 대두분 반농반예(半農半藝)의 비직업적인 연희자들로 구성되어 왔으며, 이속(吏屬)과 무부(巫夫)가 많았다. 일반인들은 탈을 쓰면 조상의 넋이 겁을 내어 제사를 못 지낸다고 하여 꺼려왔기 때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