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金秀映
캘리포니아는 겨울에도 높은 산을 제외하고는 눈 오는 날이 거의 없다. 일 년 열두 달 영상의 따뜻한 날씨가 이어져 추위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겐 살기가 좋은 곳이다. 그러나 수년동안 비가 많이 오지 않아서 가뭄이 들고 건조한 날씨가 계속되면서 산불이 곳곳에서 발생해 산에 집을 가진 주민들은 공포의 도가니 속에서 불안에 떨고 있다.
소방관들도 진화 작업을 하다가 목숨을 잃을 수가 있고 또한 화상으로 부상당해 병원에 입원하는 때도 있다. 화재의 원인은 담뱃불, 방화, 행인들의 부주의 등 여러 각도로 조사를 벌여 화인을 밝혀내지만 화마가 휩쓸고 간 폐허위엔 주민들의 허탈감과 좌절감의 통곡만이 메아리칠 뿐이다. 설상가상으로 산불이 자주 발생하여 보험회사에서는 주민들에게 집 보험 마저 취소하는 소동이 벌어져 주민들은 이중 삼중 고통을 당하는 수가 많다.
내 집은 다행하게도 시내 평지에 자리 잡고 있어서 별로 산불 걱정은 안 하고 안심하며 살수 있었다. 그런데 작년 가을에 남가주에 그것도 우리 집에서 멀지 않는 곳에서 산불이 발생하여 사방팔방으로 불길이 번지는 바람에 나는 얼마나 가슴을 조마조마 졸였는지 모른다.
더군다나 담임목사님과 성도들이 산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많이 살고 있어서 시시각각 안부를 전화로 문의하는 절박한 상황이 벌어졌던 것이다. 목사님 집도 불길에 위협을 받는 순간 하나님께서 바람의 방향을 반대 방향으로 돌리는 바람에 화마를 모면할 수 있었고 성도 중 한 가정만 산 중턱에 살았는데 집 주위의 집들은 다 탔는데 그 집사님의 집은 별 채와 야자수 나무들만 타고 집 본 채는 고스란히 건질 수 가 있었다고 한다. 위기의 순간 하나님께서 바람의 방향을 돌리는 바람에 그런 기적이 일어났다고 나중에 심방 갔을 때 눈물을 글썽이면서 목이 메어 울먹였다. 우리는 불꽃 같은 눈동자로 보호해 주시고 피난처가 돼 주시고 요새가 되어 주신 주님께 감사 찬양을 드리며 뜨겁게 예배를 드렸다.
또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화마의 한가운데 있던 ‘삼성장로교회’가 화마의 위험에서 완전히 벗어나 하나님의 살아계신 놀라운 기적을 체험했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나는 또 한 번놀랬다. 신문기사에 난 화재현장 교회 사진을 보니 홍해 바다가 갈라지듯이 불길이 일직선으로 나무와 숲을 태우고 바람의 방향이 반대로 부는 바람에 교회 건물을 모두 무사히 건질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담임목사님이 마침 한국에 나가고 안 계셔서 성도님들이 많이 교회에 모여서 기도하면서 물을 퍼다가 교회 주변을 계속 뿌려도 불길을 막을 길이 없었는데 갑자기 하나님께서 바람의 방향을 바꾸어 놓아 순식간에 교회 사방 바깥쪽으로 불길이 번져 나갔다고 한다.
이 신문기사에서 불탄 자리가 일직선으로 줄을 그은 듯이 되어 있는 것 을 보고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성경 말씀이 생각났다. 다니엘서 3장 17절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느브갓내살왕에게 말하기를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27절에
‘방백과 수령과 도백과 왕의 모사들이 모여 이 사람들을 본즉 불이 능히 그 몸을 해하지 못하였고 머리털도 그슬리지 아니하였고 고의 빛도 변하지 아니하였고 불탄 냄새도 없었더라.’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지켜주시면 과거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세 살람에게 일어났던 기적이 오늘날도 똑같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또 다시 한번 확인한 셈이다.
히브리서 13장 8절에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란 말을 실감할 수 가 있었다.
며칠 몇 날을 산불이 휩쓸고 간 뒤 연기가 공기를 오염시키고 남은 것은 재뿐인데 그 재가 바람과 함께 멀리까지 날라와서 드라이브 길에 세워둔 차 위에 눈이 온 것처럼 희뿌옇게쌓였고 찻길에도 많은 재가 쌓여 있었다.
오염된 공기 때문에 호흡하기가 곤란했고 며칠 동안 유리창문을 꼭꼭 닫아 두어야만 했다. 나는 공기 정화기 2대를 계속 털어놓았더니 덕택에 공기 오염에서 해방될 수가 있었다.
외출은 되도록 삼갔다. 재들이 얼마나 날라 왔는지 온 집 밖이 재투성이였다.
산타 아나 바람이 강하게 부는 바람에 소방관들이 손 쓸 사이 도 없이 화염은 무섭게 번져 가서 순식간에 불바다로 변하고 말았다. 어떤 집주인들은 불이 타는 집에 들어가 불길 더 번지기 전에 중요 한 것을 끄집어 내어 오려고 집안에 들어갔다가 불똥이 튀어서 옷에 구멍이 많이 나고 살을 불에 데기도 하여 겁이 나서 다 포기하고 발걸음을 돌렸다고 했다.
이 난리통에도 도둑이 극성을 부리는 것 보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주인이 집을 비운 사이 보석이다 현금이다 등등 귀중품을 훔치다가 되돌아온 주인에게 들켜 경찰에 쇠고랑을 차는 신세들이 되었다. 그 북새통에 주인의 아픈 마음도 아랑곳없이 때는 이때다 생각하고 물불을 가리지 않고 물질에 혈안이 된 얌체족 때문에 경찰이 골머리를 앓는 것 을 보고 세상은 정말 말세구나 하고 생각했다.
다행히 사람이나 애완동물들이 별로 다쳤다는 보고가 없어서 그나마 불행 중 다행한 일이었다. 한가지 마음 아픈 것은 Chino Hills에 있던 목장이 불에 타는 바람에 방목해서 키우던 소들이 피난을 가느라 무척이나 고생하는 것 같았다. 풀밭이 깡그리 타 버려서 뭘 먹이고 키울것인지 겨울을 앞두고 주인들은 걱정이 태산 같다. 인간의 실수로 죄없는 짐승까지 고생을 시킨다고 생각하니 말 못하는 소들이 불쌍하고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아담 하와가 범죄한 결과 자연도 저주를 받아 황폐해진 것 처럼 인간의 죄 때문에 죄없는 동물들까지도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이 들었다. 더욱 걱정되는 것은 인간이 만든 동물사료를 먹고 광우병에 걸리면 어떡하나 걱정이 앞섰다. 우유도 유기농이 못될 것이고…….
목장을 다른 곳으로 옮기면 괜찮을지 그것도 가능한 일인지 혼자 이 궁리 저 궁리 해 보지만 내 걱정은 기우에 불과 할 뿐이라고 자위해 보기도 했다.
화마가 휩쓸고 간 폐허 위에는 재만 쌓여 있고 타다 남은 건축물의 잔해만 여기저기 뒹굴고 있을뿐 마치 육이오 전쟁후의 폐허와 흡사했다. 어떤 집주인들은 가슴이 무너져 내려 아예 눈물조차 말라 버렸다. 화재 발생 다발지역이라 집 보험이 취소돼 주 정부 보험을 가입은 했어도 보상이 얼마 되지가 않아서 걱정이 태산 같지만 재기의 꿈을 안고 불사조 처럼 분연히 일어서겠다고 다짐하는 각오가 눈물 겨웠다.
Brea에 사는 한 의사분은 평생 모은 돈으로 보금자리를 마련했지만 이렇게 갑자기 순식간에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날아 가 버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한치의 앞을 내다 볼 줄 모르는 것이 인간이라고 했다. 버클리 대학교에 다니는 딸이 추수감사절에 집에 내려온다고 했는데 전화로 내려오지 말라고 말했을때 흐느껴 우셨다고 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하므로 말미암아 자연이 저주를 받아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내고 남자는 평생 땀흘려 일을 해야하고 여자는 해산의 고통을 맛 보아야 했다. 하나님은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축복을 주셨지만 에덴 동산에서 쫓겨 난후 정복을 당하는 비극이 인류에게 도래하고 말았다.
죄의 값은 사망(영 육의 사망)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유황불로 소돔 고모라를 멸하셨고 모세가 인도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거역하고 하나님을 거역했을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고 땅을 벌려 그들을 삼켜 버렸다. 또한, 노아 홍수 때 도 홍수로인류를 심판하사 노아 식구 여덟 명과 방주 속 에 있던 각각 종류별 짐승들 외에는 모두 홍수로 그들의 생명을 쓸어 버렸다. 무지개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물로 다시는 심판하시지 않겠다고 언약을 맺어셨다.
앞으로 남은 것 은 불 심판이다. 하나님은 경고(warning) 없이 심판하시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지만 또한 사랑의 하나님이요 자비의 하나님이시다. 이 세상 모든 되어 가는 것이 말세지 말을 향하여 달음박질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기를 마태복음 24장 7-8절에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인도네시아의 쓰나미 현상이라던가 뉴올린스의 태풍으로 말미암은 홍수라던가 중국의 대지진 남아메리카의 대지진 등 재앙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베드로 후서 3장 10-14절에 보면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體質)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 보도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 쓰라.”
요한계시록에도 보면 세계 제삼 차 전쟁(아마겟돈 혹은 므깃도 전쟁) 이 불로 이루어지는것을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공중의 날아가는 새 한 마리도 주님의 뜻이 아니면 떨어 떨이치 않는다고 말씀하셨고 우리들의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된다고 하셨다.
요번 산불이 학생들이 캠핑하고 불씨를 다 끄지 않아서 발생했다고도 하고 자동차에서 스파크가 일어나 불똥이 튀어서 일어났다고도 하고 방화의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그 원인 이야 어떠하든 간에 우리는 자신을 한번 살펴보고 자성할 때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우리는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화약고 안에서 살고 있다. 땅밑 지구 핵 속에는 이글그리는 액체 광물질 불덩어리로 꽉 차 있고 땅 위에는 각국에서 만들어 놓은 핵무기가 저장돼어 있고 하늘에는 양전기와 음전기로 꽉 차 있어서 언제 벼락같은 불덩어리들이 눈처럼 쏟아질지 아무도 모른다. 이러한 위험한 환경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불꽃 같은 눈동자로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그 은혜가 놀랍지 않는가!
나는 요번 산불을 바라보면서 21세기의 뛰어난 모든 장비도 속수무책이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강한 바람으로 불길을 삽시간에 번지게 하니 소방관들이 최신 소방장비를 한번 써 보지도 못하고 수수방관 할 수 밖에 없었던 사실이 슬펐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위로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한번 입김으로 확 불어 버리면 꼼작도 못하는 나약한 인간이 자기 머리만 믿고 하나님 앞에 교만하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존재가 아니고 무엇인가! 피조물 인간이 감히 어찌 창조주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는가 말
이다.
로마 네로 황제가 로마시를 불을 지르고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면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네로는 불을 지른 뒤 화재가 한창 절정에 오르자 매케나스탑에 올라가 트로이 함락이라는 노래를 처음부터 끝까지 불렀다고 한다. 수금을 들고 있던 네로가 마침내 불타는 로마를 바라보며 바이올린을 켜는 황제로 그 이미지는 오늘날까지도 그대로 전해 내려오고 있지만 사실 여부는 확증되지 않고 있다. 네로가 불을 질렀다고 민심이 흉흉해지자 기독교인들에게 누명을 뒤집어 씌워서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그래서기독교인들은 박해를 피해 한번 들어가면 나오지 못하는 미로인 카타콤 지하 공동묘지로 피신을 하고 그곳에서 수많은 기독 신자들이 순교했던 것이다.
로마 대화재와 민심 수습을 위한 기독교 탄압을 소재로 한 소설로는 노벨 문학상을 탄 셰키에비치의 ‘쿠오바디스’가 있다. ‘쿠오바디스 도미네 Quo Vadis Domine?(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사도 베드로가 그리스도 교도 사냥으러 광폭하게 날뛰는 수라장의 로마를 피하여 길을 떠나가다가, 문득 예수의 모습을 보고 놀라서 던진 말, ‘네가 백성을 버린다면 내가 가서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겠다’라는 주의 대답에, 베드로는 즉시 로마로 되돌아가서 순교한다. 전설에 의하면 사도 베드로는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려 순교했다고 한다. 소설에서의 제목도 이 말에서 딴 것이다.
요번 화재가 로마의 대화재와는 비교도 안되지만 화염에 휩싸여 꺾일 줄 모르는 기세로 산림과 집을 태울때 아흐레 동안 계속된 로마의 대화재를 연상케 했다. 안전하다고 방심할 때 요번 대화재 같은 재앙이 덮칠 줄 모르기 때문에 평상시 우리들은 신앙생활을 잘해야 되겠다고 다짐해 본다. 폼페이 시가 베스비오 화산이 갑자기 폭발하여 삽시간에 용암과 잿더미에 파묻힐 것을 아무도 예상 못 했듯이……., 마태복음 24절 37절에 ‘노아의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