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신문 2008. 12. 28발행 [1000호]
옛 신앙 숨쉬는 경기북부 유일의 교우촌
평화신문 제164~165호(1992년 1월 1일~1월 12일)에 실린 교우촌 갈곡리. 한국 천주교회의 모태 역할을 했으나 산업화 도시화 물결에 밀려 차츰 고유한 모습을 잃어가는 교우촌들을 찾아 신앙의 뿌리를 확인하고자 기획시리즈로 연재한 '교우촌을 찾아서'의 첫 번째 현장이 갈곡리였다. 17년이 지난 교우촌 갈곡리는 어떻게 변했을까. 지령 1000호 특집 '다시 찾은 그때 그 현장'에서 갈곡리를 찾았다. "아니, 여기 대모님이 계시네…." "바울라 할머니, 이 사진 할머니 사진이네요." "여기 나오는 이 분들은 돌아가셨지…." 기자가 가져간 17년 전 갈곡리 기사를 보던 마을 어르신들이 지면에 나온 사진을 보고는 이야기꽃을 피운다. 더러는 생존해 있지만 더러는 이미 하느님 품으로 돌아갔고, 또 더러는 다른 곳으로 이사 갔다.
경기 북부의 유일한 교우촌 갈곡리는 여러 면에서 바뀌었다. 17년 전에는 경기도 파주군 천현면 갈곡리였으나 이제는 파주시 법원읍 갈곡리로 바뀌었다. 관할 본당은 법원리본당으로 예전과 다름없으나 관할 교구가 바뀌었다. 2004년 의정부교구가 출범하면서 '서울대교구의 유일한 교우촌' 갈곡리는 '의정부교구의 유일한 교우촌'이 됐다.
주소지나 관할 교구는 바뀌었지만 마을 분위기는 17년 전과 별 다름이 없다. 매일 새벽 6시와 낮 12시, 저녁 6시에는 어김없이 성당 종소리가 울려퍼지고 신자들은 종소리에 맞춰 삼종기도를 바친다. 또 낮 12시에는 성당으로 향하는 주민들 발걸음이 이어진다. 삼종기도에 이어 어려운 이들을 위한 지향 등으로 묵주기도를 바친다. 그러고 나면 가정을 위한 기도, 사제를 위한 기도, 성모 성심께 바치는 기도가 이어진다. 기도문도 개정되기 이전의 17년 전 것 그대로다. 아무도 기도서를 보지 않는다. 그냥 줄줄 왼다. 오랜 만에 듣는 할머니들의 구성진 기도소리가 정겹다.
관할 법원리본당 주임 원동일 신부는 "갈곡리는 옛 신앙이 계속 살아 있고 현대 사회를 변화 속에서도 보존될 수 있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마을"이라며 "지금도 무슨 때가 되면 일을 같이 하고 음식을 나누며 하느님을 찬미하는 곳"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달라진 게 있다. 17년 전 31가구 150여 명이 살던 마을은 이제 27가구 50여 명이 사는 마을로 주민 수가 줄었다. 당시 3가구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신자였지만 지금은 신자가 20가구밖에 되지 않는다. 예전에는 외지에서 신자가 들어오면 자연스럽게 동화돼 신자가 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제는 외지인들과 마을 신자들 간의 교류가 별로 없다. 본당에서 교리를 받고 있는 예비신자가 1명 있을 뿐이다.
게다가 젊은 신자들이 없다. 법원리본당 1구역에 속하는 갈곡리에서 48살인 구역장 송순덕(루치아)씨가 제일 젊다. 젊어서 구역장을 맡았다. 1반 반장 정정순(마리아)씨는 62살이다. 그 밖에는 대부분이 60대 후반에서 70~80대다. 공소회장 조병현(베드로)씨도 75살 할아버지다. 갈곡리에서 거동이 가능한 어르신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조창문(바울라, 88) 할머니와 바로 다음 연장자로 최영식(가톨릭중앙의료원장) 신부 어머니인 이순이(아가타, 87) 할머니를 비롯한 마을 어르신 몇 분이 자리를 함께 했다. "예전처럼 좀 많은 신자들이 함께 모여 살았으면 좋겠는데…." "외지로 나간 자식들이 냉담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으면 좋겠구만." 할머니들이 한결같이 바라는 바다. 결혼 후 줄곧 외지에서 살다가 몇 달 전에 고향 갈곡리로 돌아온 최양자(루갈다, 70)씨는 이렇게 말한다. "그래도 어르신들이 변함없이 성당을 지키면서 모범을 보이고 있고, 또 구역장 반장을 통해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모습은 다른 이들에게도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러나 젊은이들이 없어서 신자들이 힘들어 하는 것을 보면 정말 안타깝지요."
비단 갈곡리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마을을 지키는 어르신들이 세상을 뜨고 나면 갈곡리 교우촌의 모습이 아예 자취를 감춰 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게 갈곡리 신자들의 안타까움이다.
갈곡리 신자들은 얼마 전 낡은 옛 공소 건물을 개축, '칠울강당'이란 이름으로 축복식을 가졌다. 신자들은 칠울강당을 피정의 집으로 활용하면서 이를 계기로 갈곡리가 좀 더 활성화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그렇지만 일손 부족은 여전한 과제다. 그래서 자칫 신앙 유적지로 변모해 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마을 신자들에게는 지워지지 않는다.
갈곡리를 신앙 유적지가 아니라 살아 있는 교우촌으로 계속 보존할 길은 없을까. 실현 가능할지 모르지만 원동일 신부는 이렇게 호소한다. "갈곡리 출신이 아니어도 초대 교회 모습을 계승해 나갈 신자들이 이 마을에 들어왔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은퇴하신 분들이 이곳으로 이사 오셔서 마을 전통을 함께 계승해 나갔으면 합니다."
글=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 사진=전대식 기자 jfaco@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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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도를 바친 후 성당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는 갈곡리 마을 신자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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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당 마당에서 얼음과자를 깨먹으로 놀고 있는 아이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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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지에 있는 자녀들을 기다리며 순두부를 쑤고 있는 김옥순(데레사, 73)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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