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에스페란토 나라 여행기
< Mia vojaĝo en Esperanto-lando >
전장에 이어
바벨탑 언어사건과 우리의 언어 사이
본 글 原題원제, - 필자의 에스페란토에 몸담았던 이야기- 를 하다말고, 잠시 에스페란토 관련 이야기를 담아보고자 한다.
● 바벨탑 이야기
필자는 기독교 성경을 한글번역본에 앞서 에스페라토(語)로 처음 접하게 되었다. 고교사범학교 재학시절 이전에는 미쳐 교회 인근을 넘다 볼 기회가 없어서였기도 하거니와 성경책이 그리 흔하지 않았다. 잘 아시겠지만, 종교의 경經들은 대개 글 속에 담겨있는 교조적 의미 파악이 쉽지 않은 탓도 있으려니와, 그 말이 그 말 같고, 또한 교회나 사찰이라는 곳이 가깝지 않았던 게 억지로 떼다 붙인 필자의 이유다.
많은 종교의 창시자들은 왜 그리 인간들에게 할 말이 많은지, 왜 그리 가르칠 것이 많은지, 그 사실을 반대로 보자면, 지은 죄(?)가 얼마나 믾아서인지, 죄지은 인간들이 얼마나 많아서인지 종교창시자들은 한결같이 인간들을 향하여 -이래야한다, 그래서는 안 된다- 며 야단치셨는지?
기독교 성경중 구약성경은 에스페란토 창안자 Zamenhof 가 직접 번역하였다. 반면 신약성경 번역은 후진 에스페란토 전문가들이 번역해 에스페란토판 신구약 성경 전부가 세상에 나오게 된다. 이 기독교 성경(이하 성경) 외에도 각종 종교 경들은 전부가 에스페란토로 번역되어 세상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다. 우리나라 원불교의 경전까지도 번역된 지 오래다.
에스페란토 창안자 자멘호프는 유대인이었다. 그의 직업은 안과의사였다.
그의 자녀 1남 2녀들 모두가 2차대전 중 나치정권에 의해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에서 무참히 죽임을 당했다. 유대인이라서, 유대인이 만든 에스페란토인 가족들이라서. 평화지향이 목표인 Esperanto(평화를 희망하는 사람)가 악마에 의해 온 가족들이 몰살당하는 비극, 나치는 그렇게 사람들을 학살해왔다. 다행히도 아들 아담에게서 난 손자 하나 L. C. Zaleski-Zamenhof는 피신으로 목숨을 부지해 가계를 잇게 된다. 우리나라는 에스페란토를 일본에서 들여왔지만 일본 제국주의는 이를 박해했다.
그 이유는 바로 거기에 담긴 이념과 사상 때문이었다.
본 난에서 왜 기독교 성경에 대해 언급하느냐 하면, (특정 종교를 드러낼 의도가 아님을 이해하시기 바람) 다음 글을 함께 읽다 보면 인간갈등의 무서움을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되리라고 여겨 인용해본다.
성경은 인간을 교도하는 선지자, 선각자들의 가르침이나 전도역사의 기록인 데, 다만 구약성경 첫 편 창세기(Genezo)는 지어낸 것으로, 다른 말로 하면 허구(Non-fiction)다. 조금 심한 표현으로 하자면 가상의 천지창조부터 잘 꾸민 장편 소설이다. 저자는 모세였다고 한다.
첫 머리글에는, 하느님이 세상을 다 만들고는 아담과 이브 부부를 에덴동산에서 오손도손 살게 했는데, 그들 부부의 두 아들 중 장남 카인이 동생 아벨을 죽여버리는 형제살육사건이 선보이게 된다. 천지창조에 이어 사람을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머나먼 옛날을 그린 이야기지만, 인간이란 존재물은 벌써 그때부터 사악하기 그지없는 동물체임을 표현한 고발성 글이다. 모든 종교 경들의 핵심은 인간이 선하게 살아야 함을 교도하는 목적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카인은 왜 죄 없는 동생, 그 어진 아우를 죽이기까지 해야 했는가? 살해한 원인을 읽어보노라면 죽임을 당해야할 과오는 없었다.
성경을 좀 더 드다보노라면 - 높고 거대한 탑을 쌓아 하늘에 닿으려 했던 인간들의 오만한 행동에 분노한 하느님은, 그런 인간들이 괘씸해 본래 하나의 언어를 사용해왔던 인간들에게 여러 가지 언어로 분리하는 저주를 내려버렸다. 그 탑이 바벨탑 언어 저주사건이다.
- 바벨탑을 건설한 인간들은 하느님이 인간같지않다며 온천지에 홍수를 내려 노아가족 이외에 모든 인간들을 싸그리 없애버렸던 착하디착한 노아의 바로 후손들이었다. - 언어섞음으로 인한 소통혼돈은 결국에는 탑의 건설의 막을 내리게 해버렸고, 탑을 세우고자 했던 인간들은 불신과 오해 속에서 서로 다른 언어들을 떠안고는 전 세계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는것이다. 참 묘한 글이다. 언어가 통하지 않으면 긴요한 일을 할 수 없음을 증명한 셈이며 언어의 중요성을 보여준 이야기이다.
우리 속담에 - “아” 다르고 “어” 다르다 - 삼사일언 三思一言이니,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느니, 천 냥 빚도 말 한마디로 갚는다 느니 하여 말의 중요성이나 조심성을 요구한다. 이 지구 땅덩이에 사람이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말이 생겨나 편리함은 비견할 데가 없게 되었다지만, 그 말로 인한 불협화와 갈등은 결국에는 사람의 목숨에 위해를 가하는데까지 이른다.
에스페란토의 목표강령은 - 내국인들끼리는 자국어로, 외국인들과는 국제중립어로, - [1민족2언어 사용]주의다 - 강대국의 자국 언어사용 강요의 빌미를 없애며 피지배 약소국의 자존을 지켜주는 인본주의 정신을 담고 있음이 근본이다.
● 말글이 같다고 평화가 심어질까?
그런데, 에스페란토를 배운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필자의 머릿속에는, 위에 언급한 국가·민족 간 언어의 소통 편의성만으로 과연 평화에 이바지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
무슨 말인고 하니 – 6·25동란 때 시골 고향 동리에서 나의 눈으로 직접 본 북괴 인민군들, 그들이 사용하는 말글은 바로 우리 말글이었다. 처음 접한 호칭 “동무!”라는 말이 처음에는 낯설었으나 곧 이해가 되어 몇가지 공산당 특수용어 말고는 언어적 애로는 없었다. - 언어가 통일되면 평화를 만들 수 있다. - 는 국제중립어의 창제이념과 6.25 당시 피점령지역주민들이 맞닥뜨린 현실은 그렇지가 못했다.
점령군 북괴 인민군에게는 같은 말 사용하는 점령지역관리에 오히려 편리했다? 통역 아니라도 말이 잘 통할 수 있어 그랬다. 대한독립 직후 미 군정하에서는 언어소통이 힘들어 국정관리에 어려움이 많았다는데 비하면 땅짚고 헤엄치는 격이었다. 인민군들은 정보수집이나, 점령지역주민 관리를 위해 치안대라는 일선 조직을 구성, 앞잡이로 현지 사정에 밝은 현지인을 겁박으로 고용, 정보수집을 비롯하여, 지시사항이나 보고사항 그 어느 것 하나 소통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말글이 같으니까 그랬다.
필자의 이웃집 작은아들이 경찰이라는 정보를 치안대로부터 파악하고는, 그 집은 핍박과 감시로 노부모에서부터 가족 전원이 아주 힘들어했다. 그 기억으로 필자의 뇌리에는 언어의 동질성이 과연 평화를 사는데 도구가 될 수 있을까, 오히려 - 같은 말 사용으로 그 반대일 것이라는 것이라고 자문하면서 할 말을 잃게 되었다. 남북한이 원수로 살게 되는 것은 분명코 언어의 다름에서 연유된 것이 아닌, 사상, 이념의 다름에서 연유한다고 보게 된다.
우리는 중, 고등학교 6년 동안 메일 영어학습시간을 편성해왔다. 그리 장시간 학습했는데도 특출한 인재들 말고는 영어사용자 외국인을 만나 인사 한마디 건내지 못했다. 그럴 기회도 아예 없었다. 영어가 어려워서인지 교육방법이 잘못되어서인지 둘 중 하나, 아니면 둘 다 잘못된 경우라면, 성장 중의 그 긴 시간 동안 영어를 배우자고 안달낸 시간 - 허송세월은 어디에서 보상받을 것인가, 역한 반문을 갖게 한다. 영국이나 미국 등 영어권 학동들은 비록 제2외국어를 학습하기는 한다지만 우리의 허송 시간에 타종목 학습에 몰두할 수 있는 이점을 가지다 보니 앞설 수밖에 없지 않을까. 요즈음에는 우리나라 초등학교에서부터 영어교육을 하는 것으로 듣고 있다. 게다가 근년에는 경제력이 크게 된 중국어까지 거의 필수외국어로 다가와있다. 언제 어디서나 강대국 언어는 그들의 세상에 머물러있는가 하면 그 반대로 약소국 사람들은 그 예전에도 지금도 안간힘을 쏟다 세월 다 보낸다.
● 인터넷 세계의 군소 언어들은 어디로
인터넷이라는 전파소통 매체가 막 기승을 부리기 시작할 때, 컴퓨터에 심취했던 필자가 생각한 것은 아! 에스페란토 – 소속 민족도 소속 나라도 없는 언어 – 이제 더 살아남을 수 없게 되겠구나 상상하면서, 인터넷 잘 하려면 필자가 중학생시절부터 심혈을 기울였던 영어에 매달려야 하겠다고까지 생각에 이러르게 되었다. 왜냐하면, 인터넷소통언어로 영어라는 사실상 국제어가 자리를 확고히 해 다른 언어는 발붙일 데가 없어진다고 믿게 되었다. 인터넷을 통한 영어권의 언어식민지배가 도래할 것이라는 빈곤한 사념, 인터넷발명자도 사용언어도 영어 일변도여서 그랬던 것. 그런데 필자의 예상은 그 반대로 발전해가고 있음을 알게 되고서는 참 세상일이라는 거 함부로 단정할게 아니구나를 깨닫게 해주었다. 근년에는 오히려 인터넷 덕분에 에스페란토 사용이 엄청나게 늘어간다는 현실을 맞게 되었다면 이해가 갈런지.
근년에는 번역기술의 발달로 어느 언어든 배우지 못해도 번역기기를 통해 크게작게 외국어에 접근할 수가 있다. 물론 완벽을 기하기에는 아직 멀긴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완벽함에 다달을 수 있다고 예상된다. 유사한 언어들끼리는 지금도 거의 합격선에까지 와있다.
근간 범지구 코로나 사태로 대면 활동이 제약을 받고 있다. 그런데 비대면 非對面(virtual)이 기승을 부리게 되어, 오히려 대면 때 보다 더 활발한 접촉을 하게 되는 역선택을 맞고있다. 대면일 경우 장소 마련, 오가는 교통비용, 숙식 해결 한둘이 아닌 데, 비대면이 가져다주는 혜택은 그 이전에 비교해 굉장하다. 필자는 비대면 회동에 자주 참여한다. 늙어 할 일 줄고 외부활동 어려운데, 작게는 카톡의 페이스톡으로 (외국인들에게도 카톡 가입해줘서) 상대의 얼굴을 보면서 대화가 가능한 데다, 수십 명 다중 비대면 매체 스카이프 Skype나 줌 ZOOM 등으로 아주 편리하게 활용하고 있다. 물론 다수인 경우나 사용시간 등으로 자그마한 비용은 들지만, 쉽게 만날 수 없는 외국인들이나, 아주 먼곳에 있는 유럽인들과의 비대면 회동은 예전에 미처 생각지도 못한 편의성으로 활발히 애용하고 있다.
● 한글의 로마자 표기가 순조로워야 국제성이 부각된다
우리 한글은 익히기에는 쉬우나 세계인들이 읽어줄 로마자 표기는 쉽지 않은 구조다. 지금껏 까지 세 번째 수정을 해왔다. 그러니 외국인들의 눈에는 어떻게 비췄을까? 우리 대구 大邱를 Teagu로 표기되어왔음은 다들 알고 있다. 거북선을 로마자로 geobukseon 으로 표현해보고자 했던 당시 그에 대하여 어느 학자 왈 미국인한테 읽어보라고 했더니 지오북선 (아마도 geography – 지오그래피 - 지리 地理) 으로 읽더라면서 거북선의 geo는 안된다고 주장해 Keobukseon으로 첫 자를 K로 표기해 그동안 사용해오다가, 현재 마지막으로 geo 형식으로로 바꾸었던 얄궂은, 영어권 일변도에서 헤어나오게 되었다는 낯뜨거운 사례다.
대구 역시 Daegu로, 부산은 Pusan에서 Busan으로 왔다 갔다 했다. 부산은 표기변경으로 인해 부산국제영화제의 로마자표기에 (PIFF -- > BIFF) 변경으로 한동안 혼선을 맞기도 했다.이들 로마자 표기의 사실상 시작은 영어권 미군들에 의해 번안 표기된 것이라서 학술적으로 미흡할 뿐 아니라 국제성에는 더더욱 먼 표기였었다. 국제화 시대를 내다보지 못한 정치인들이나 학자들까지 쇄국에서 벗어나지 못한 일이라 애처롭다.
동대구역을 Tongdaegu station 바다의 생선 [통대구]로 오기하는 우를 범하지는 말아야! -끝-
다음 장으로 계속
첫댓글 낙기 성은 일찍부터 종교를 접했네요. 대댠한 사고의 비약입니다. 나는 '종교는 불합리한 상태에서 발생했다'는 생각에 많은 공감을 가지고 있지요. 그래서 그런지 성경이나 불경을 대하면 당췌 무슨 얘긴지 반의 반쪽을 못 읽고 헷갈리고 맙니다. 海上에서 죽을 고비를 만날 때마다 입에서 저절로 '하나님, 부처님, 용왕님, 부모님' 소리가 저절로 나왔지요.
'누구시든 좋습니다. 이 고비만 잘 넘기게 해 주십시요'. 하고 빌면서 '그렇게만 해 주시면 평생 섬기겠습니다'는 맹서를 하지만 넘기고 나면 잊어버립니다.
그 분들의 덕분인지 내 자신의 필사적인 노력 때문인지는 얼른 판단이 안 섰걸랑요. 시건방진 소리지요? ㅎㅎㅎ 부산넘
그러게요. 이사람 나이롱 신자로 살고있어요. 내가 듣기로는 선원들은 적도를 지날때마다 제를 모신다고 하더만요. 목숨이 위태로웁거나 극도의 불안이나 견디기 힘든 몸상태 또는 고난일때는 종교를 찾는다두만, 코로나사태가 그리 웅성거려도 어느 종교 하나 그걸 막지못하는 종교들 과연 그들은 능력이 있는지없는지...
@서되반 이낙기 적도제? 'Neptune's revel'이라해서 많이 지냈죠. 삶은 돼지대가리를 준비해 다니기도 하는데, 빌어묵을! 적도를 넘어야 지낼건데 지내지도 못하고 오래 두면 삶은 그 대가리가 좀 이상하게 되는 수가 있지요. 그걸 보고 뒤에 서있던 어떤 넘이 왈 "해신도 놀라것다" 해서 꾸지람 한 적도 있지요. 그것도 사실은 뵈는 거라고는 바다와 하늘 밖에 없는 망망한 바다위에서 지루한 seaman들의 마음을 달래고 위로하는 축제의 한 마당으로 海神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한 것이지요. 암튼 즐거운 날이되는 수도 했지요.
코로나와 종교요? 요새 하느님도 부처님도 워낙 많으니 바빠서 정신 없다고들 하답니다. ㅎㅎㅎ 부산넘
@늑점이 적도제라!
어떤 seaman은 일부변경선 지날때도 그런다더군, 다들 바다의 경계선을 넘거나 땅에서의 경계선 넘을때 비자를 받는거지.
비자값이 돼지대가리 그거 희귀한 영사관리네.
연말 잘 지내시고,
이름도 가물가물한 조선생께 안부 전해주구려
송구영신
@서되반 이낙기 늑점이형
seaman이라는 꼬꾸랑글로 보니 글 좋아하는 소생에게 뭐가 생각난줄 아셔? 헤밍웨이어 명작소설 "노인과 바다"가 생각히워서 다시 답글 쓴다오. 아마도 성격상으로 보아 그 소설 등장인물과 늑형이 그 기품이 모습을 연상케해서.- 이제 늙었으니 노인과 바다는 어울리는 소리가 아닐런지도 생각히우고. 소생 최근에 볼품적은 글이나마 읊어대는건 "노인과 무엇무엇" 이라는 하얀머리칼 뒤집어쓰고 흰수염 멋드러지게 날리며 광활한 바다를 지배하는 그 멋, 늑점이형이 오버랩돼.......... 영원한 seaman 그 기풍 언젠가 볼날 없어도 사진으로는..........
에스페란토는 기억하고 있지만 자멘호프씨는 잊고 있었습니다.
이런 분의 뜻이 지구상에 살아 있는 한 지구는 멸망하지 않을 것입니다.ㅎ
[1민족 2언어 사용]이란 취지가 맘에 듭니다.
강대국 언어로 인해 한글이 망가지지 않기를 바랄뿐입니다.
에스페란토씨의 건승을 빕니다.^^
에스페란토씨 닉네임 호명에 고맙게 받겠나이다.
추위가 때를 맞아 기승입니다. 우리모두 돌봐야할 건강으로 우리카페의 깃발이 21년을 지나 22년에도 휫날리기를 두손 합장 올립니다.
지기님
엊그적에 이 글을 읽었다며 어느 친구가 알려왔더군요.
우리 카페회원도 동창도 아닌 분인데도... 앞으로 계속 읽겠다며 격려까지 해주면서
@이낙기 네티즌 활동이 사회에 기여하는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뎃글도 열심히 달면 노출이 오래도록 유지되구요.
이 참에 쉰소리 한마디./우린 사회 기여도 일 순위 ㅎㅎㅎ
@김능자 굿도굿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