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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의 노래
최보일
독일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이자 수도사, 신부였던 마르틴 루터(1488-1546)가 종교개혁의 기치를 든 지 금년으로 꼭 500주년 되는 해이다. 1517년 10월 31일, 천주교의 베드로 성당 신축 자금 마련을 위한 면죄부 판매에 반기를 들고 비텐베르크 교회 정문에 ‘95개조 논제’를 붙임으로써 개신교 탄생이 예고된 것이다. 이를 기념하여 교계적으로 다양한 행사가 있었고, 우리 교회도 전교인이 참여하는 ‘성경 500독 운동’을 통하여 성경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열의에 적극 동참한 바 있다. 또한 신학대학교 교수들을 초청하여 ‘루터와 엘리야가 가진 종교개혁의 함의’ 등 세 차례의 특강도 있었으며, ‘엘리야 오라토리오’ 연주 등 다채로운 행사도 펼쳐졌다. 무엇보다도 교회적으로 종교개혁 당시의 뜨거운 열정과 순수한 신앙정신을 본받고자 하는 열의가 충만했던 분위기에 감사드린다. 개인적으로는 이번 11월 13일부터 약 열흘간 요르단과 이스라엘, 그리고 그리스를 방문하면서 예수님을 깊이 묵상하며 사도 바울의 행적과 초대교회 시절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열정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으면 했다.
2017년이 저물어가는 11월 13일(월)부터 11월 22일(수)까지 8박10일 여정으로 이스라엘-요르단-그리스를 둘러볼 예정이다. 이스라엘은 주로 예수님의 생애와 발자취를 더듬어 볼 예정이고, 요르단에서는 모세가 이끌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다음 홍해를 건너 40년의 광야생활을 끝내고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직전의 과정을 중심으로 살펴 볼 예정이다. 그리고 그리스에서는 초대교회 시절 사도 바울이 1·2·3차 전도여행을 통하여 이룩했던 역사적인 전도사역지가 이번 여정의 중심이 될 것이다.
이번 성지순례 기간 중 시간과 여건상 둘러보지 못한 부분은 1997년 여름에 아내와 다녀왔던 기억을 되살려 몇 군데 삽입하였다. 갈수록 기억력이 떨어지고 집중력이 쇠하여져 잘못 기록된 정보가 있을 줄 알지만, 세 분 가이드의 설명과 인쇄물을 참고하여 보고 듣고 느낀 점을 시간 순서에 따라 기록하려고 노력하였다.
제1일차 2017년 11월 13일(월)
11월 12일 오후 4시 25분 발 KTX는 온통 가을 단풍으로 물들어가는 조국의 산하를 뒤로하며 부산을 출발 인천공항으로 내달렸다. 지금껏 환승 여객기를 활용해 왔으나 이번에는 시간관계상 열차를 타보니 오랜 동안 공항에서 기다려야 하고 오가야하는 불편함이 없어 좋은 면도 있었다. 약 4시간의 여행 끝에 열차는 인천국제공항 터미널에 오후 8시쯤 도착하였다. 청사 3층 출국장 D카운트에서 오후 8시 30분에 갖는 여행자 미팅에 참석하여 반갑게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이번 성지순례는 총 27명 참여하게 되고 인솔 가이드는 하나투어여행사의 문장욱 과장(집사님)이었다. 구성원은 경기도 김포시 동산교회 김종우 담임목사님 내외를 비롯한 부목사님, 전도사님 두 분 그리고 젊은 집사 부부 등 20명이 참여하여 주축을 이루었다. 그 외에도 서울 신도림제일교회 전도사님 등 두 분, 경북 대구에서 여성도 한 분, 부산에서 우리 내외, 나머지 두 분은 이미 이스라엘로 바로 가셔서 거기서 합류하게 된다. 이번 구성에 특이한 점은 재롱둥이 초등학교 어린이 3명이 참석하게 된 점이다. 어린이라고 해서 여행비 354만원 중 할인이 거의 없는데도 젊은 부모의 성의가 대단하다 싶다. 김포동산교회는 통일된 조끼 착용에다가 자체 제작한 유인물을 소지하는 등 오랜 동안 준비를 한 것 같았다.
밤 12시 40분 터키항공 소속 TK 0091편으로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12시간 35분만인 새벽 6시 15분에 터키 이스탄불의 아타튀르크 국제공항에 도착하였다. 새벽 동트기 전의 이스탄불 공항은 어둠에 깊이 잠겨있고 마르마라 해협에 휘황찬란한 불빛만이 아련하다. 허브공항인지라 유럽을 여행하다보니 터키를 종종 거치게 될 때마다 이곳에 들르게 되어 생소하지 않았다. 멀리 400년간 오스만터키의 왕궁이었던 톱카프 궁전의 웅장한 모습이 고즈넉하게 비쳐지고 있었다. 이곳에서 약 1시간 30분을 체류한 다음, 오전 7시 45분 역시 터키항공소속 TK 0784편으로 약 1시간여만인 오전 8시 50분에 지중해 연안의 텔아비브(일명 벤구리온)공항에 도착하여 이스라엘 가이드 윤순현 목사님을 만났다. 윤 목사님은 이스라엘에서 약 30년 동안 체류하면서 신학을 공부하셨고 선교활동에 깊이 관여하며 봉사하시는 분이였다. 20년 만에 첫 성지순례 후 다시 텔아비브공항에 당도해보니 청사 확장공사를 하였는지 외관이 커 보였다. 강산이 두 번 바뀔만한 세월을 보내고 직장과 교회에서마저 은퇴를 하고 다시 오니 감회가 새롭고 감격스러웠다. 이스라엘은 사통팔달 도로망이 잘 발달하여 적어도 이곳에서는 정체가 없었다.
이스라엘Israel은 언제나 우리에게 관심을 끄는 나라이다. 2017년 통계에 의하면, 현재 인구가 약 875만 명이고, 그 중 유대인이 약 650만 명이며 나머지 220만 정도가 아랍계이다. 오히려 미국에 650만 명이 거주하는 등 전 세계에 유대인이 본국보다 더 많이 흩어져 살고 있다. 종교는 인구의 74.8%가 유대교이지만 17.6%의 회교도와 1.3%의 가톨릭, 그리고 0.2%인 약 16,00명의 개신교도가 있다. 이스라엘은 ‘시온이즘Zionism’ 건국운동을 거쳐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48년 5월 14일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다. 국토면적은 20,770㎢로 우리나라 강원도만한 크기쯤 된다. 동서의 길이는 145km로서, 한두 시간의 자동차 거리이지만, 남북은 450km로서 국토가 길쭉한 형태다. 국토의 대부분이 산지와 광야 등 불모지가 약 60%를 차지하고 있어 농작물 재배를 위해 갈릴리 호수의 물을 파이프로 연결, 전국토로 보내야 한다. 이토록 작은 나라인데도 몇 가지 점에서 지리적 특징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해발 2,814m의 헬몬Hermon산이 있는가 하면 해발 -400m의 사해死海가 있고, 광야가 끝없이 전개되다가 사막이 계속되는 곳이기도 하다. 이 작은 국토가 지중해를 끼고 있고, 갈릴리 호수가 있으며, 소금 호수까지 있다. 약 120명의 국회의원이 입법부에 있는 내각제 민주주의 공화국이며 친미국가이다. 지금의 총리가 네타냐후인데 20년 전에도 총리였었다.
오늘 성지순례의 첫발을 내딛은 텔아비브는 이스라엘의 독립 역사에 중요한 지점이다. AD 70년 로마에 항거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했지만 처절하게도 140만 명이 살육을 당하고 실패로 돌아갔다. 마사다에서 최후의 항전을 했지만 그마저 로마 10군단에 의해 처참히 끝났다. 유대인은 약 2천년 동안 고국을 떠나 세계 곳곳으로 흩어져 종족을 이어갔고 삶을 구걸해야 했다.
그로부터 약 2천년이 지난 1948년 5월 제2차세계대전 후 연합군의 승리로 독립을 하게 된다. 이미 1880년대에 ‘시온이즘’의 기치 아래 이스라엘로 돌아온 사람은 간혹 있었지만 그들에겐 옛날의 고국이 아니었다. 팔레스타인(블레셋) 사람들이 그들의 이스라엘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06년 최초의 유대인들이 걸어서 들어올 수 없는 고국에 배를 타고 이곳 욥바에 처음으로 들어와 텐트를 치고 마을을 세웠으니, 이곳을 텔아비브라고 일컬었다. 텔(Tel ‘언덕’)과 아비브(Aviv ‘봄’)가 합성된 마을이름 즉 ‘봄의 언덕’이 최초로 형성된 것이다. 텔아비브는 이스라엘 역사상 ‘봄'이 시작된 것임을 알리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곳은 미국을 비롯한 세계 80여 개국의 대사관이 자리 잡고 있는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행정중심 수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난데없이 이곳에 유대인이 정착촌을 만들었을 때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당혹감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 같다. 땅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팔레스타인과 비집고 들어와야 하는 유대인 간의 처절한 싸움은 그때나 지금이나 계속되고 있다.
가이사랴와 헤롯의 흔적
2008년 이후부터 사회 간접자본이 늘어 곳곳에 도로를 확장하고 건물도 신축하여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우리는 샤론 평야를 왼편으로 끼고 시원한 지중해를 바라보며 가이사랴Caesarea로 향해갔다. 가이사랴는 하이파에서 남쪽으로 37km떨어진 해변에 세워진 도시이다. 가는 도중 차창 너머로 바라보니 세계적인 명문 하이파공대가 있는 하이파 시내를 외곽으로 지나가지만, 하이파는 성경에 나오지 않는 지명이었다. 미국의 실리콘 밸리를 방불케 하는 첨단 과학단지로서 하이파는 현재 세계 각 곳에서 기술을 얻으려는 두뇌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다.
샤론 평야는 지금 갈수기가 되어 마침 추수기를 지난 밭에서는 푸른 채소가 자라고 스프링클러를 통하여 시원스럽게 급수를 하고 있는 장면이 차창 너머로 보였다. 물이 부족한 이스라엘에서 대단지의 물웅덩이가 있어서 물어보니 양어장이라고 했다. 그곳에는 비단잉어 등 세계적인 육종사업을 통하여 고수익을 올리고 있다고 전했다. 우리나라에도 이스라엘 잉어는 간디스토마에 감염이 안 된다며 회를 먹는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가이사랴로 가는 평야지대는 농사짓기에 알맞은 땅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처럼 보였다. 지금은 추수가 끝나갈 무렵이라 황량하지만, 12월부터 우기가 시작되어 비가 내리면 내년 3,4월에는 온 이곳도 푸른 옥토로 변할 것 같다.
2천 년 전 헤롯왕은 BC 22-10년 사이 이곳에 원형경기장과 전차경기장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그 이름을 ‘가이사랴’로 지어 로마 황제에게 바쳤다. 아우구스투스에게 충성심을 보여주기 위해 황제의 이름을 딴 것이다. 민심수습 차원에서 했을 것이라고 역사학자들은 말한다. 헤롯은 이두메Idumaea사람으로 로마 제국 시대에 유대 지방에 분봉된 왕, 즉 로마제국이 유대를 간접 지배하기 위해 유대의 왕으로 임명한 자이다. 사도 바울이 이곳 어딘가에서 수감된 적이 있었고, 백부장 고넬료에게 세례를 준 곳도 이곳이다.
이두메는 에돔의 헬라식 이름이다. 에돔은 에서의 후예로서 ‘붉다’는 뜻이다. 그들은 보스라Bozrah를 수도로 삼고 번성했다. 에돔은 주전 14세기에 사해 남부에 정착해서 주전 13-8세기에 번성했고, 주전 6세기 바벨론에 의해 무너졌다(BC 587년). 최고 전성기에 에돔은 북쪽은 모압, 서쪽은 아라바, 남쪽은 항구도시 에일랏, 동쪽은 아라비아 사막을 경계로 하는 거대한 왕국을 이루었던 적이 있었다.
따라서 유대인 사이에서는 이두메인이 이스라엘 왕이 되는 것에 대해 상당한 거부감을 나타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헤롯은 흔히 동방 박사와 예수의 탄생 이야기에서 어린 아이를 죽이라고 명령한 왕으로 알려져 있으나, 유대인들이 가장 신성시하는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세운 왕으로도 유명하다.
지중해를 바라보는 곳에 원형경기장과 전차경기장이 우람한 자태를 뽐내었다. 관중석은 현재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보존 상태가 양호했고, 영화 ‘벤허’에서 봄직한 전차경기장 트랙을 밟으니 당시의 열띤 함성이 들려오는 듯 했다. 십자군 원정 시 지었다는 교회는 건물 천장의 십자가 돌 문양이 뚜렷하게 남아있었으나 폐허가 되어 있었다. 십자군은 결국 이슬람 세력에 의해 밀려나고 이 땅을 모두 블레셋에 내주고 말았다. 지중해 바람이 불어오는 낮은 언덕에 서서 그 옛날을 생각하며 모래 언덕을 걸어보았다. 오랜 풍상에 시달린 채로 남아 당시의 치열했던 역사의 상처를 보여주고 있었다.
아름다운 지중해가 바라보이는 해변에 위치한 레스토랑 포트카페Port Cafe에서 파스타와 피자 햄버거로 점심을 대신하고는 갈멜Carmel산으로 향했다.
갈멜산에서 만난 선지자 엘리야
갈멜산은 해발 550m 정도의 산으로 차로 오르기에 그리 험한 산은 아니다. 하이파만을 끼고 이스르엘 평야 쪽으로 25km 뻗어 있는 산맥이 갈멜산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자동차로 구불구불 난 도로를 따라 여기에 도착했다. 유태교나 기독교나 다 거룩한 산으로 인식하고 있을 만큼 신비한 산임에 틀림없다. 이곳을 지나다보면 그 산세의 모양과 숲의 우거짐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이곳은 자연보호 구역으로 선사 시대 동식물이 서식한다고 들었다. 갈멜산은 울창한 숲 때문에 ‘동산’ ‘과수원’이라 불리며 지중해 연안의 중앙 돌출 부분이기도 해서 이스르엘 평야가 눈 아래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산으로 엘리야 동굴이 교회로부터 200m 지점에 있다.
갈멜은 ‘하나님의 포도원’이란 뜻으로, BC 860년 북이스라엘 왕 아합과 이세벨 왕후의 비호를 받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의 종교적 중심지였다. 바알과 아세라신을 섬기는 제사장 850명과 대결 끝에 패배시키고 기손 시냇가로 데려고 내려가 처형했던 그 대결의 현장이었던 산이다(왕상18:1-46).
정상의 전망대에 오르니 황사가 있어서 멀리까지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건너편에 다볼산과 모레산, 그리고 오른 쪽에 길보아산이 자리 잡고 있었다. 시계가 맑으면 요르단과 멀리 지중해가 보인다고 하는데 오늘은 욕심인 것 같다. 갈멜산 바로 아래로 이스르엘 곡창지대의 비옥함이 손에 잡힐 듯 이어지는데 이런 협곡지대에서 나는 과일의 생산량이 많아 이스라엘에서는 보기 드문 비옥한 땅임을 느끼게 했다. 그 옛날 이집트가 군사 원정을 이곳까지 했음을 그들의 기록에 남을 정도로 외부의 침입이 잦은 곳이기도 하다.
당시 엘리야는 3년 반이나 가문 그 곳 산 정상에 무슨 물을 가지고 와서 제단과 주변을 적시게 했을까? 지중해에서 떠오기에는 너무나 멀어 보인다. 그렇다고 그 아래 평야 지대 옆으로 흐르는 기손 시내에서 떠 왔을까? 그것도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기손강은 상시천이 아니고 계절에 따라 흐르는 임시천臨時川 또는 간헐천間歇川(‘와디’라고 부르며 이런 와디는 이스라엘 전체에 무수히 많다)이다. 큰비가 내리면 임시로 형성되었다가 곧 그치는 강이기 때문에 3년 넘어 가문 기손강에 물이 있었을 리가 없다.
그런데 이 산의 해발 200m 지점에 샘이 있었다고 전하는 것을 보아 그 곳의 물을 사용했으리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자세히 보니 이곳은 지중해가 멀리 보이고 동서로 도로가 연결되어 교통의 중심지로 각광을 받을 만한 곳이기도 하다.
사사기 4,5장에 보면 이 이스르엘Jezreel 골짜기에서 적들의 철병거 900승이 쳐들어 와 맞서 싸운 기록이 나타난다. 에스드렐론Esdrelon평원과 므깃도 골짜기Valley of Megiddo와 이스르엘 골짜기는 경계가 불분명해서 세 지명이 혼용되는 곳이다. 사울이 블레셋에 대항 포진한 곳이기도 하고 아들 요나단이 전사한 곳이기도 하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철병거와 싸워 이겼을까? 드보라와 바락이 승리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 성경에 나온다. ‘구름이 물을 내린다.’는 기록으로 보아 여호와께서 비를 내려 철병거를 무용지물로 만든 게 아니었을까.
길르앗의 디셉 사람 엘리야는 북이스라엘 최고의 선지자로서 아합왕의 악정을 질타하고 3년 반의 가뭄을 예언한 후, 그릿 시냇가로 몸을 숨겼으나 하나님의 지시로 다시 나타난다. 멀리 눈 아래로 지중해와 기손 시내, 그 옆으로 펼쳐진 평야의 비옥함이 곧 바로 피부에 와 닿는다.
엘리야 기념교회 뜰에는 칼을 높이 쳐들고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기는 제사장을 징벌하는 모습의 엘리야 동상이 서 있다. 그리고 엘리야를 기념한 교회가 깨끗한 모습으로 봉우리 가운데 우리를 맞이하고 있다. 교회의 왼쪽에는 삼 면에 부조가 조각되어 있는데 첫째 장면에서는 바알과 아세라 신의 제사장이 제사지내는 광경이, 둘째 장면에서는 엘리야가 제사지내는 장면이, 셋째 장면에서는 엘리야가 승리한 후 우상 신을 섬기는 제사장을 처형하는 장면 등이 새겨져 있었다.
고대 열강들의 각축장 므깃도
갈멜산에서 하산하여 58km 지점에 위치한 므깃도Megiddo로 이동하였다. 이집트에서 해안 도로를 타고 다메섹(다마스커스)으로 향하다 보면 왕의대로와 마주치는 곳, 고대인이 살고 있었던 중요한 한 지점이 눈에 띄었다. 지정학적으로 전쟁이 자주 발발했던 곳이기도 한 이 므깃도는 그런 중요성 때문에 수많은 외침이 있었다. 역사의 뒤바뀜 속에 20여 차례나 건축과 파괴가 되풀이 된 곳임을 최근 발굴에서 입증되었다고 한다. 므깃도는 ‘주둔지’란 뜻을 가지고 있다. 그 뜻에서 보듯 군사 전략상 요충지였음을 암시한다. 하이파 동남쪽 32km 에스드렐론 평야의 끝 부분에 위치하고 있었다. 중요한 군사 요충지로서 60여m 길이에 80걸음의 이 성의 규모를 BC 35세기경의 기술로 어떻게 만들었는지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BC 3500년경 가나안에 의해 건설되었고, BC 1468년 이집트의 투트모세3세에 의해 곡식 저장 창고가 옛 모습 그대로 발굴되어 있다. 아합왕 때 만든 지하 통로를 걸으며 적에게 노출되지 않고 성 밖의 우물물을 긷게 하기 위해 암반을 뚫고 수십 미터의 통로를 냈던 공사의 어려움을 실감할 수 있겠다. 정복되는 동안 각 나라의 우상과 산당을 짓고 우상 터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복 후 므낫세 지파에게 준 땅으로 솔로몬왕 때 요새화 된 성으로 이 성의 폐허에서 인생의 무상함과 역사의 흥망성쇠를 뼈저리게 느끼며 성을 내려왔다.
과거보다는 더 많은 고고학적 발굴로 유물도 전시할 수 있는 전시공간도 확보하고 있었고 진입로와 휴식 공간도 중간에 마련해 두고 있었다. 몇 그루의 대추야자나무가 큰 키를 뽐내며 바람에 잎을 흔들고 섰다. 애급과 바빌론 그리고 아수르간의 처절한 전투가 이곳을 휩쓸고 지나갔던 역사적 현장답지 않게 평온하다.
나사렛 예수님 수태고지 교회
예수님이 어린 시절부터 자라신 나사렛Nazareth이다. 나사렛은 갈릴리 산간 지방에 속하는 해발 357m의 소도시이다. 이곳에는 ‘수태고지 교회’가 있어서 유명하다. 이태리 건축가 간바디 무치오의 설계로 1955년부터 1969년 사이에 건축된 2층 건물이다. 고지 장소에 비잔틴 교회의 제단이 있고 동굴 앞에는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와 함께 계시다” 라는 라틴어가 기록되어 있다. 인구 약 5만 정도의 작은 도시로서 갈릴리 호수 남서쪽 24km 지점으로 지중해 동쪽 32km 해발 433m의 분지이다. 기후는 온화하고 강우량이 적당하여 농사짓기가 좋은 곳이라고 한다.
예수님이 30세까지 사셨고, 이곳에서 배척당하셨다. 콘스탄틴 대제(AD 324-337) 때 이곳 교회가 성소로 인정되었다.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는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은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눅1:31-32), 성경에 나오는 수태고지의 내용이다. AD 700년경 이슬람교도에 의해 훼손되었다가 십자군원정 때 회복되었다. 당시 유태인들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고 무시했던 이곳에서 우리는 맨 처음 천사가 마리아에게 수태 고지를 하였던 그 교회를 찾았다.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 예수님을 잉태할 것임을 알린 교회인데 20세기에 와서 지은 건물로 이스라엘에서는 가장 큰 교회로 천주교회에서 지었다고 전한다. 아마 지금까지 찾았던 수많은 교회 가운데 가장 크고 화려하게 지어진 교회가 아닌가 할 정도로 잘 다듬어진 교회이었다.
교회당의 지하에는 당시 수태 고지를 받았던 동굴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각 나라의 고유 의상을 입은 채로 마리와 아기 예수의 모습이 벽화로 남아 있는 교회로서 유명하다. 우리나라 전통 의상을 입고 아기 예수를 안고 서 있는 마리아의 모습의 벽화도 눈에 띄어 감회가 새로웠다.
그 교회에서 4,50m 떨어진 위쪽에 요셉의 집 터 위에 세운 교회도 방문했다. 옛날의 혈거 흔적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는데, 요셉 집의 포도즙을 짜는 틀, 물 저장고 등이 지하에 그대로 보존되어 그 위에 이를 기념하는 교회를 세운 것이다. 물론 십자군원정 시대 있었던 교회 위에 새로 교회를 증축했다고 전한다.
가나 혼인잔치 기념교회의 추억
이번에는 시간 관계상 들리지 못했으나 이곳에서 차를 타고 다시 한 30분쯤 달려 조그마한 동네 가나Gana에 이르렀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비스듬히 산등성이에 자리 잡은 가나 동네에는 비슷비슷한 돌집들이 여기저기 성냥갑처럼 엎디어 있었다. 그때 기억으로는 그리 크지 않은 동네가 퍽 한가롭게 보였다. 그곳은 주로 아랍인들이 거주하는 동네이어서인지 검은 차도르를 한 여인들이 눈에 띈다. 이스라엘 정착촌은 이곳에서 좀 떨어진 곳에 깨끗하게 지어진 산동네 마을이다. 가나 동네는 예수님 당시부터 형성되어 있던 오랜 도시라서 도로나 동네 건축물들이 무질서한 것 같으나, 유태인 정착촌은 최근에 형성된 도시이므로 집도 도로도 반듯반듯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첫 이적을 베푸셨는데 바로 이곳 가나의 혼인 잔칫집에서 베푼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일이었다. 바로 이곳 혼인 잔치가 있었던 이곳에 당시를 기념하여 교회를 세운 것이다. 이른바 가나 혼인잔치 기념 교회이다. 이스라엘은 결혼식을 안식 후 3일째 주로 한다고 한다. 그것은 여호와가 천지를 창조하면서 첫째 날과 둘째 날에 ‘좋았더라.’ 라고 했던데 반해서 셋째 날은 두 번 반복해서 ‘좋았더라.’ 라고 했기 때문에 그 날을 길일吉日로 삼는다는 것이다. 안식 후 셋째 날(우리나라로 치면 화요일에 해당함)이 결혼식이 많다고 한다. 이곳의 결혼식은 우리나라의 옛 풍습대로 저녁에 이루어진다. 신랑이 아침에 출발하여 신부의 집에 가서 먼 거리일 경우 오고 가는 거리를 감안하여 신부를 데리고 와서 저녁 무렵쯤 신랑의 집에서 결혼 예식을 거행하게 된다. 장소도 호텔, 회당, 야외 등 어디서나 상관하지 않으나 다만 랍비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 남자는 14세 이상 여자는 12세 이상이면 부모 동의 없이도 결혼이 가능하다. 처녀와의 결혼 잔치에서는 7일간, 과부와의 결혼에서는 3일간의 잔치가 베풀어진다. 물론 신랑 신부의 친구들도 7일간 함께하면서 축하를 한다.
그때도, 가나 혼인 잔치 자리에서 이적을 베풀었던 곳을 기념하는 교회로 가는데 어디선지 떠들썩한 음악 소리가 나서 발길을 옮겨 어느 집안을 들어서게 되었다. 길거리에 사람이 없다 했더니 이곳에 다 모여 있지 않았는가! 한 집안의 뜰에 사람들이 빼곡하게 자리 잡고 음악 소리에 맞춰 흥겹게 노래를 부르기도 장단을 맞추기도 하고 있었다. 보아 하니 결혼예식을 마침 거행할 참이었다. 가나 혼인잔치 기념교회로 가는 길에 진짜 결혼식을 보게 된 것이다. 차일을 친 아래 맞은편에 들러리와 함께 신부가 드레스를 입고 환하게 웃고 앉아 있었다. 동네 사람들이 난데없는 동양인의 등장에 처음에는 의아해하다가 영어로 “결혼식을 축하하며 신부가 매우 아름답다”는 말을 건네면서 사진을 찍어도 좋으냐고 물었더니 쾌히 승낙을 했고 신부는 포즈를 잡았다. 신랑은 아직 그 집의 방안에서 나오지 않고 있어 보지는 않았으나 퍽 잘생기고 늠름한 청년일 것 같았다. 대충 보아도 그 곳에 축하하러 와 있는 모든 선남선녀들이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체격이 큰데다가 특히 여인들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사실 이스라엘의 남녀는 아랍인에 비해 왜소하고 못생긴 것을 이곳에 와서 느꼈다. 같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면서 이삭의 후손인 유태인과 이스마엘의 후손인 아랍인 사이에 이토록 차이가 있을까? BC 2000년경 아브라함이 86세 때 하갈과의 사이에서 낳은 이스마엘은 이삭이 태어나자 브엘세바 광야로 내쫓긴다. 아마도 이스라엘은 수천 년간 나라를 잃고 전 세계로 떠돌아다니면서 유태인 특유의 혈통을 상실하고 혼혈된 때문에 정통성을 유지하고 있는 아랍인에 비해 외모가 떨어질까?
혼자서 생각하는 동안 우리는 가나 혼인잔치 이적 기념교회 앞에 당도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마침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교회가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진행하고 있어 자세히 구경할 수밖에 없겠다고 걱정을 했다. 그런데 드릴로 벽을 뚫고 있던 인부가 작업을 중단하면서까지 우리에게 교회당의 내부를 구경하게 했다. 교회 내부 중앙에 포도주가 담겼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항아리가 놓여 있었다. 순박하고 인정 넘치는 사람들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교회당의 왼쪽을 돌아가 보았다. 예수님 당시의 것은 아닐지 몰라도 몇 개의 질그릇 항아리가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었는데 높이가 약 1m 전후의 큰 것에서 40cm정도의 작은 것들이 여럿 있었다. 우리나라의 질그릇처럼 만든 토기이었다. 그 옛날도 1주일씩이나 잔치를 계속하면서 마셔대던 술이 떨어졌다면 혼주로서는 퍽 당황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이 시점에서 예수님은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시게 한 후 떠서 손님에게 가져다주라고 하셨다. 이미 물은 포도주로 변하여 있었다. 그것도 앞에 내 놓은 것보다 더 질 좋은 포도주로 말이다. 결혼식은 축하하고 모두가 기뻐해야 할 일이기에 이 결혼식에서 처음으로 이적을 행하신 것이다. 아마도 구속사의 기쁨을 처음으로 맛보게 하시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을까?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동네 한 복판에 자리 잡은 이곳 기념 교회는 역시 천주교회에서 새로 지은 교회였던 기억이 난다.
제2일차 2017년 11월 14일(화)
예수님 당시 가나는 나사렛에 비하여 훨씬 큰 동네였다. 지금은 오히려 나사렛은 큰 도시가 되어 있었고, 가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큰 차가 없었다. 마침 언덕을 따라 진홍빛 부겐빌레아 꽃들이 만발했고 길가 가로수는 어디든 작은 파이프를 수로를 통하여 물이 공급되어 주변은 다 말라도 꽃과 나무는 싱싱하게 자라고 있는 모습이 보기에 좋았다.
가나 쪽으로 향하다가 고개를 넘어 갈릴리 지역으로 가다가 약 60km 쯤에서 차를 내려 텔단Tel Dan으로 향했다. 뽕나무와 도토리, 상수리나무가 우거진 이곳에 어린 학생들이 단체로 트레킹을 와 있었다. 헬몬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가 내를 이루어 텔단까지 내려오는 장면을 보기 위해 우거진 숲을 지나서 물이 흐르는 상류까지 찾아간 것이다. 이곳에서 흐르는 물은 중동의 물줄기 같지 않고 보기 드물게 맑고 수량이 많았다. 어떤 계곡에서는 소리 내어 흐르기도 하고 폭포가 되어 제법 많은 물줄기가 떨어졌다. 이스라엘의 척박한 국토 환경에서 이만한 환경이 보기 드문 수목지대로 비옥한 토양과 자연의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에는 야생동물 멧돼지·늑대·도마뱀·수달 등이 서식하는 곳이라 관광객의 주의를 요한다는 경고판이 붙어 있는 곳이다. 텔단 내에는 고대의 제단과 유적지 등이 원형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여기서 흐르는 맑은 물은 대부분 도시로 공급되며 요단강의 상류를 이룬다.
디베랴 해변에서 만난 제자들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요6:1), “무리가 옹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눅5:1), 등에서 보듯 게네사렛 호수, 디베랴 바다는 모두 갈릴리 바다를 일컫는 명칭이다. 성지순례 중 가장 시원하고 아름다운 풍경이 있는 곳이다. 갈릴리 호수를 떠다니는 유람선이 형형색색의 모습으로 우리를 반기었다. 유리처럼 맑고 푸른 갈릴리 호수 위를 하얀 물살을 일으키며 마다 한가운데를 향하여 미끄러지듯 나갔다. 우리 팀은 함께 갑판에서 주위를 구경하면서 사진 찍기에 바빴다. 호수라기에는 너무 넓은 55km의 둘레 때문에 바다라고 불리는 이곳은 가장 깊은 곳이 44m의 깊이를 자랑하는 이스라엘의 젖줄이기도 하다. 서쪽으로 요르단과 접경을 이루고 있고, 동편은 높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고원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멀어져 가는 디베랴 바닷가의 그림 같은 풍경은 희미해져가고, 대신 다가오는 동네들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워 온다. 저절로 입에서는 찬송이 흘러 나왔다.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저 솔로몬의 옷보다 더 고운 백합화/ 주 찬송하는 듯 저 맑은 새소리/ 내 아버지의 지으신 그 솜씨 깊도다.”
이 부근은 이스라엘에서 자연경관이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알려진 이곳은 지금도 바나나··목화·오렌지·올리브 등의 갖가지 농산물이 풍부하게 재배되고 있다. 갈릴리 호수의 물은 이스라엘 전역의 농업용수와 공업용수는 물론 음용수로 사용하기에 충분했으나 지금 호수의 물 저장량이 크게 줄고 있다고 한다.
2천 년 전 제자를 부르셨고 복음을 전하셨던 이 갈릴리 호수 위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그려보다가 어언 40여분의 항해 끝에 배는 건너 마을 선창에 닿았다. 울긋불긋 아름다운 꽃들이 다투어 피어 있고 보이는 사람들마다 건강하고 밝아 보인다. AD 1세기경 헤롯 안디바가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의 이름을 따서 붙인 그 디베랴 바닷가. 그 옛날 수도승들이 이곳에서 수도에 정진하다가 죽어서 무덤 터가 많다고 들었다. AD 163년 유태인의 2차 반란 때 이곳에 이주하여 살게 되면서 세인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고 탈무드가 이곳에서 완성되기까지 한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기독교로 보면 이곳에서 히브리어 성경 본문이 모음으로만 되어 있던 것에 자음을 붙여 완성한 곳이기도 하다.
가버나움Capernaum은 갈릴리 북쪽 해안에 자리하고 있는 매우 번화한 도시였던지 세관과 큰 회당이 세워져 있었고 주민들이 꽤 많았다. 다윗왕의 아들 압살놈의 어머니의 고향인 그술 땅이 건너편 낮은 산등성이로 보인다. 역시 이복형제 암몬을 죽이고 도망 쳐 간 곳이 어머니의 고향 땅으로 간 것이다. 골란고원이 길르앗과 함께 길게 드러누워 있고 귀신 든 돼지 떼가 몰살한 거라사 지방이 건너편에 보인다. 가버나움 본 동네에서 예수님은 공생애를 많이 보내셨다. 북서쪽이 가버나움이고, 동남쪽이 거라사이다. 예수님이 꾸짖어 잔잔하게 하신 바다가 이 호수이고 호수에서 배를 타시고 건너편 언덕에 앉아 있던 청중에게 복음을 전하신 곳도 이 곳이다.
갈릴리에서 사역하실 때 배에 올라 청중들에게 말씀을 전하신 때는 오전이었을 것이다. 오전에는 육지가 빨리 더워져 바다의 찬 공기가 육지를 향하여 이동하므로 바람이 바다에서 육지로 불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배에서 육지를 향하여 복음을 쉽게 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대신 오후에는 늦게 덥혀진 호수의 물로 말미암아 육지에서 바다로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아시고 바람의 방향을 따라 설교를 하신 것이다. 그래서 오전에는 바다에서, 오후에는 산에서 제자들을 가르치신 것이다. 산과 들에는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는 우기로서 비가 내린다. 이때는 이름 모를 들꽃들이 수없이 피어난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건기이기 때문에 산야는 마른 풀잎 밖에는 더 볼 것이 없다. 산상보훈山上寶訓을 말씀하시면서 ‘들에 백합화를 보라’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때 백합화는 어떤 꽃이었을까? 우리나라의 백합화는 아닐 테고, 아마 아네모네 종류의 꽃이 아닐까? 건기이지만 물을 공급하는 곳에는 개양귀비꽃이나 아네모네를 비롯한 수많은 꽃들이 자라고 있었다. 갈릴리 호수 주변의 자연·경치·길·가시덤불·돌길 등은 그대로 당시의 예수님께서 일컫던 비유의 소재가 된 것들이다. 당시의 청중들은 그때의 상황에서 이해가 쉬웠겠지만 오늘날의 우리는 그 장면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았는데 막상 와서 보니 이해가 간다.
예수님의 제자 중 적어도 5명은 이 곳 갈릴리 출신으로 유능한 어부였다. 예수님은 유월절이라면 우기이고 바닷물이 차가와 고기가 없을 곳에 그물을 내리라고 했다. 밤새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베드로가 그 말에 순종함으로써 큰 고기를 153마리나 잡았다는 말씀이 성경에 나온다. 자기 생각에는 맞지 않고 비논리를 알고도 예수님의 말씀을 따랐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덤벙대는 사람이 실수도 많지만 순종한 사람이 베드로였다. 성질이 급한 사람, 직설적인 사람, 나서기를 좋아하는 사람, 그런 사람을 예수님은 들어 쓰셨다. 구약에도 여호수아 12장 3절에 디베랴가 ‘기네렛 바다’로 나오고, 사해가 염해鹽海로 나온다. 막달라 마리아의 막달라 지방이 북서쪽 숲 속에 나지막한 평온한 마을로 자리 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