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창렬(安昌烈)
2派26世
인제현감(麟蹄縣監)괴산군수(槐山郡守) 동려집(東旅集)著
안창렬(安昌烈 ; 1847∼1925)
자는 순가(順可), 호는 동려(東旅),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안윤식(安潤植)의 후손, 안병례(安秉禮)의 아들로 유주목(柳躊睦)의 문인.
일찍이 경사자집(經史子集)에 열중하여 천(薦)으로 관직에 올라
1882년 임오군요(壬午軍擾)에 십조소(十條疏)로 의정(義政)을 밝혔다.
갑신정변(甲申政變)에 왕을 호종(扈從)한 공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계되고
문경(聞慶), 영천(永川), 하양(河陽), 이천(利川), 인제현감(麟蹄縣監)을 역임하고
괴산군수(槐山郡守)가 되어 선정하였다.
1908년 관직에서 물러나 예천(禮泉)에 이거(移居)하여 시문을 지으며 지내다 경술국치(庚戌國恥)의 소식을 들고 두문불출하였다.
안창열(安昌烈)
(1847~1925, 헌종13~)
순흥인(順興人), 자(字) 순가(順可), 호(號) 동여(東旅), 거(居) 예천(醴泉) 저곡(渚谷)
안윤식(安潤植)의 후손, 안병예(安秉禮)의 자(子)로 류주목(柳疇睦)의 문인, 일찍이 경사자집(經史子集)에 열중하여
천(薦)으로 관직에 올라 1882년 임오군요(壬午軍擾)에 십조소(十條疏)로 의정(義政)을 밝혔다.
갑신정변(甲申政變)에 왕을 호종(扈從)한 공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계되고
문경(聞慶), 영천(榮川), 하양(河陽), 이천(伊川), 인제(麟蹄)현감을 역임하고 괴산군수(槐山郡守)가 되어 선정하였다.
1908년 관직에서 물러나 예천 저곡(渚谷)에 이거(移居)하여 시문(詩文)을 지으며 자오(自娛)하다
경술국치(庚戌國恥)의 소식을 듣고 두문불출하였다. 동려문집(東旅文集) 6권3책이 전한다.
안창렬(安昌烈 : 1847~1925)
자는 순가(順可), 본관은 순흥(順興), 부친은 병례(秉禮), 모친은 동래정씨(東萊鄭氏) 관묵(觀?)의 딸이다.
안동(安東)에서 태어나 8세에 종조(從祖)인 치재(恥齋) 안윤시(安潤蓍)에게 수학하고
1863년 유계당(柳溪堂)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을 연마하였으며,
성재(性齋) 허전(許傳), 소정(韶亭) 조성교(趙性敎), 석산(石山) 김익용(金益容) 등에게 강학하기도 하였다.
1868년 순흥으로 이거하여 과거공부에 힘썼으나 합격하지 못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나자 포의(布衣)로서 고종(高宗)의 구언(求言)에 응해 10조의 시무를 상소하였으며,
이듬해 친군좌우영(親軍左右營)이 설치되자 문안(文案)으로 추천받아 관직에 올랐다.
갑신정변 때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한 공로로 평시서주부(平市署主簿)가 되었고,
이후 문경(聞慶), 영천(榮川), 하양(河陽), 이천(伊川), 인제(麟蹄), 흡곡(?谷) 등지의 수령을 지냈다.
1894년 부친상을 마치고 다시 괴산군수(槐山郡守)로 부임하여 선정을 펼쳤으며 동학난(東學亂)의 와중에 고을을 지켜내었다.
이후 공무의 여가에 감로재(感露齋), 옥호정(玉壺亭), 하정(荷亭) 등을 짓고 산수간에 소요하다가 1925년 향년 79세로 졸(卒)하였다.
동생 경렬(景烈)의 주도하에 김세락(金世洛), 이중균(李中均) 등이 유고를 교정하여 1927년 판각에 착수하였으며,
문집이 간행된 것은 1932년의 일이다.
『동려집(東旅集)』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권두에 이명익(李明翊)의 서문과 목차가 있다.
권1에 사(辭) 1수, 부(賦) 1수, 시(詩) 166수,
권2에 시(詩) 191수,
권3에 소(疏) 2편, 서(書) 74편,
권4에 서(序) 3편, 기(記) 8편, 발(跋) 5편, 잡저(雜著)로 해산기행록(海山紀行錄), 명(銘) 1편, 자전(自傳) 1편, 상량문(上樑文) 3편,
권5에 축문(祝文) 2편, 제문(祭文) 14편, 묘갈명(墓碣銘) 3편, 묘지명(墓地銘) 7편, 행장(行狀) 5편,
권6은 부록으로 김세락(金世洛)의 행장, 안경렬(安景烈)의 가장, 권상대(權相大)의 묘갈명, 권상규(權相圭)의 고유문이 수록되어 있다.
권말에 이중균의 발문과 권상규의 후지(後識)가 있다.
편지의 수신자 중 저명한 인물로 김윤식(金允植), 한경원(韓敬源) 등이 있으며,
「해산기행록(海山紀行錄)」은 1889년 흡곡현령에 임명된 저자가 이 해 4월 7일부터 5월 6일까지 정창시(鄭昌時),
이석지(李晳知), 정동시(鄭東時) 등과 함께 금강산을 유람한 기록이다.
동려문집 (東旅文集)
안창렬(安昌烈)의 시문집, 1932년 경북 예천(醴泉)에서 간행되었으며, 6권 3책의 목판본이다.
서명
동려문집 (東旅文集)
저자
성명
안창렬 (安昌烈)
자
순가 (順可)
호
동려 (東旅)
판사항
木版本
발행지
醴泉
발행자
安景烈
발행년
1932
권수
6
책크기
15.5×25.5㎝
사부분류
별집류
번호
기사명
연결정보
간략설명
1
[기사명] 옥곤정기(玉壼亭記)
玉壼亭在酒泉郡北距五十里,赤城山中長紫筏,雲汀
2
[기사명] 임당소기(林塘小記)
僑居拙築, 規制陋樸, 絶無林泉之勝, 時或斂收塵襟, 發
3
[기사명] 감로재기(感露齋記)
古興州府南距數弓許, 有山曰杮木嶺其趾有臺曰天
4
[기사명] 나암기(羅巖記)
慕芬華者, 夢金馬玉堂, 安澹泊者, 夢脩竹淸泉, 蓋是出
5
[기사명] 송정기(松亭記)
嘗讀我叔祖恥齋先生南遊錄, 知金陵之碧松亭, 有淸
6
[기사명] 송파정기(松坡亭記)
松坡亭在龍宮縣北距十里月梧山麓, 故國子上庠安
7
[기사명] 율호정기(栗湖亭記)
兩儀間凝聚而有形者, 大而流峙, 小而至於蔥蒨飛走,
8
[기사명] 금강천불동기(金剛千佛洞記)
豊巖()高城(一號)西三十里有溫井, 井西三十里有鉢峯,
동려집(東旅集)
澗松堂文集 간송당문집(문고 보관)
東旅文集 동려문집(古上 810.819 안811)
安昌烈 (1847∼1925) ; 字 順可, 號 東旅, 本貫 順興.
木板本. - 慶北醴泉 : [發行處不明], 1932.
6卷3冊 ; 30x20cm.
四周雙邊. 半匡 ; 20x16.5cm.有界.10行21字.註雙行. 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조선 말기의 학자·문신인 안창열의 시문집이다.
안창열은 안윤식(潤植)의 후손이며 안병례(秉禮)의 아들로 유주목(柳疇睦)의 문인이다.
일찍이 경사자집에 열중하여 추천으로 관직에 올라 1882년 임오군요(壬午軍擾)에 십조소(十條疏)로 의정(義政)을 밝혔다.
갑신정변(甲申政變)에 왕을 호종한 공으로 통정대부에 승계 되고
문경(聞慶), 영천(永川), 하양(河陽), 이천(利川), 인제현감(麟蹄縣監)을 역임하고 괴산군수(槐山郡守)가 되어 선정하였다.
1908년 관직에서 물러나 예천 저곡(禮泉 渚谷)에 이거(移居)하여 시문(詩文)을 지으며 자오(自娛)하다
경술국치(庚戌國恥)의 소식을 들고 두문불출하였다.
【上溪光明室文庫】수장본은 1932에 간행된 것이다.
序 ; 李明翔.
目錄.
卷之 1. 辭 ; 次歸去來辭.
賦 ; 金剛山賦.
詩(164首).
卷之 2. 詩(187首).
卷之 3. 疏 ; 應 旨十條, 請復 大行皇后位號.
書 ; 上石湖, 上金尙書(允植)(2), 上嶺伯, 上石山金公, 上柳坡韓公 與趙荷塘, 答趙荷塘, 與趙台丈(駿九), 答感宙金丈,
與小下黃丈, 與金雲圃(景洛), 答柳田園, 與柳田園, 與朴羅巖, 與權星臺, 答權星臺, 答李處士(鼎愚), 答金鶴田菊卿, 答忠伯,
與忠伯, 答鄭承旨(顯永), 答李北靑(源兢), 答曺德山(斗煥), 答李承旨(承載), 與李靑松(敎英), 答鄭聲振, 答李元八,
與李參判(勝宇), 答李承旨(道宰), 與趙南洲, 與韓參書(鎭昌), 答盧安邊(泳敬), 答李儀仲, 答金宣叔(鎬相), 與金極夫, 與金渭瑞,
答李致崇, 答李穉剛(中立)(2), 與張舜鳴(錫藎), 答進士宗人(潚), 答李茂馨, 答柳粹卿, 答權啓象(3), 答金啓周(應洛),
答李永夫(東錫), 答李仲圓(中轍), 答張炳叔(華植), 與李允明(中喆), 答李允明, 答金敬立, 答金叔憲(秀洛),
與丁而建(大稙)金敬極, 答金文顯, 答李在言(圭洪), 答洪舜卿(在謙)(2), 與柳體仁, 答權泰亨, 答柳楗一(萬植), 與朴武伯(鎬九),
答金景維(商哲), 答鄭景恒(翼文), 答李壻泰元, 答黃晦老(炳欽), 答李士弼(廷和), 答弟春可, 與金甥昌駿, 與李壻(奎鎬).
卷之 4. 序 ; 漁隱齋安公文集, 送金公善(澈元), 送鄭君翼歸望芝庵.
記 ; 玉壺亭, 林塘小, 感露齋, 羅巖, 松亭, 松坡亭, 栗湖亭, 金剛千佛洞.
跋 ; 梅花帖, 書榮州鄕校瞻學所節目, 書萬曆壬午司馬榜目, 書絡谷縣先生案改造, 書島田耕者安公行錄.
雜著 ; 海山紀行錄, 兢菴銘, 東旅自傳.
上樑文 ; 丹皐齋舍, 葛田順天金氏追遠齋, 下鶴洞正寢.
卷之 5. 祝文 ; 先祖忠靖公蘆圃先生墓碣改竪, 山坡壇所開基.
祭文 ; 祭石湖柳公, 祭趙荷塘, 祭李誠汝(敎萬), 祭邊司諫(相勳), 祭李左使(祖淵), 祭黃渚樵, 祭朴羅巖, 祭李穉剛, 祭金渭瑞,
祭孫景規, 祭外王考通德郞鄭公, 祭李表從玉汝(玉成), 祭從兄黔谷公(弘烈), 祭再從兄處士公(明烈).
墓碣銘 ; 竹下李公, 朝奉大夫行平丘察訪順興安公, 田園柳公.
墓誌銘 ; 可齋權公, 點彖窩安公, 從高祖成均生員來鶴臺府君, 外王考將仕郞新穀鄭公, 曾祖搙令人安東權氏,
伯從祖考成均進士大塘公, 先搙恭人東萊鄭氏, 通政大夫僉知中樞府事安公, 溪堂先生, 從祖考恥齋先生家狀,
王考通德郞府君行略, 先考通德郞府君.
卷之 6. 附錄 ; 行狀, 家狀, 墓碣銘, 竪碣告由文.
跋 ; 李中均.
後識 ; 權相圭.
1. 괴산군지(槐山郡誌) 인물(人物)
2. 澗松堂文集(문고 보관)
東旅文集 (古明 810.819 안811鑁)
安昌烈 (1847∼1925) ; 字 順可, 號 東旅, 本貫 順興.
木板本. - [發行地不明 : 發行處不明], 昭和7(1932).
零本2冊(全6卷3冊) ; 31.2x20.4cm.
四周雙邊. 半匡 ; 19.5x15.2cm.有界.10行21字.註雙行. 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위의 【上溪光明室文庫】(古上 810.819 안811鑁)와 내용은 동일하나
【明谷文庫】수장본은 1932(소화 7)년 간행된 것이나 零本 2책(卷之 3∼6)만 수장되어 있다.
漁隱齋安公文集,
跋 ; 書島田耕者安公行錄,
祝文 ; 先祖忠靖公蘆圃先生墓碣改竪, -안준(安俊)-호 蘆圃(노포)
山坡壇所開基
祭文 ; 祭從兄黔谷公(安弘烈), 祭再從兄處士公(安明烈)
墓碣銘 ; 朝奉大夫行平丘察訪順興安公
墓誌銘 ; 點彖窩安公, 從高祖成均生員來鶴臺府君, 伯從祖考成均進士大塘公
通政大夫僉知中樞府事安公, 溪堂先生, 從祖考恥齋先生家狀,
王考通德郞府君行略, 先考通德郞府君.
안윤식(安潤植)ㅡ......ㅡ>안병례(安秉禮)ㅡㅡ>안창렬(安昌烈)
옥호정기(玉壺亭記)
산수(山水)의 생활과 벼슬살이 중 어느 것이 더 즐겁겠는가. 산수 속에 사는 사람은 말하기를 벼슬살이가 즐겁다 할 것이고, 벼슬살이하는 자는 말하기를 산수의 생활이 즐겁다 할 것이다. 이것은 마치 고사리나 죽순(竹筍)에 싫증이 난 자는 고기와 쌀밥이 부럽고, 고기와 쌀밥에 물린 자는 고사리와 죽순을 생각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서, 그 호오(好惡)의 차이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처한 경우가 다른 데서 오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산수의 즐거움으로 말하면 이는 내심(內心)에 관련되는 것이고, 벼슬살이의 즐거움으로 말하면 이는 외물(外物)에 관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피차간의 내심과 외물의 구별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 중에서 어느 것을 취택해야 할지를 알 것이다.
나의 친구 안창렬(安昌烈) 군은 일찍이 벼슬살이에 종사하다가 나이가 많아지자 그 벼슬살던 괴안현(槐安縣)으로부터 인끈을 풀어 놓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하여 주천(酒泉)이란 곳의 적성산(赤城山) 속에 자그만 정자를 세우고는 그 이름을 ‘옥호정(玉壺亭)’이라고 하였다. 이 정자는 방과 곁방, 다락과 난간, 샘물[茶泉]과 돌의자[石榻], 널다리와 낚시터 등 모든 것들이 갖추어져 있으며, 물길이 모여들어서 정자 밑에서 이룬 못물은 그 맑기가 마치 옥항아리에 담긴 물과 같으니, 바로 이를 따라서 정자의 이름을 지은 것이다.
안군(安君)은 이미 이를 좋아하여 스스로 그 기문(記文)을 지었다. 그리고는 또 그 즐거움의 이치를 아는 자를 구하여 나를 찾아와서 이를 부탁하였다. 나 또한 일찍이 벼슬살이에 나갔었으나 사람됨이 못나서 가끔 산수를 찾아 돌아오곤 하였으므로, 산수 속에서 지내는 사람들의 호오(好惡)를 어느 만큼은 안다고 하겠다.
만약 어떤 자가 누더기 옷에 죽물이나 마시며 여위어 찌든 모습으로 새밭을 일구기에 지치고 논물을 대기에 기진하여 호랑이가 득실대는 산골짜기 가시덤불 속에서 근근이 그 목숨이나 이어 간다고 한다면, 그가 아무리 매일같이 맑은 샘물 소리를 듣고 아름다운 봉우리의 경치를 본다고 하더라도 어느 여가에 저와 같이 근심 걱정을 버리고 이러한 즐거움을 받아들여서 이를 즐길 수가 있겠는가. 만약 그가 저 바깥 세상에 나가서 현달(顯達)한 자를 본다고 한다면 저들은 일산(日傘)을 받치고 사마(駟馬)를 달리면서 벽제(辟除)의 소리가 요란하고 부서(簿書)의 옹위(擁圍)가 당당할 뿐만 아니라 아전과 졸도(卒徒)들이 이를 분주히 받들어서 모시는 품이 마치 이 세상의 어떤 즐거움도 이를 대신할 만한 것이 없을 것 같아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 이들은 저들 당사자의 근심 걱정이 도리어 산수나 즐기고 있는 자보다도 더욱 심하다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저처럼 벼슬을 하면서도 또한 이와 같이 산수를 즐길 줄 아는 자는 역시 그리 많이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면 즐길 만한 가치가 없는 외물(外物)을 즐거운 것으로 여기는 저러한 자는 참으로 어리석은 자이겠지만, 자신의 내부에 즐길 만한 것이 있는데도 그것이 즐길 만한 것이 되는 줄을 알지 못하는 자는 응당 군자가 이를 불쌍히 여길 만한 자가 아니겠는가. 이 때문에 옛 사람들은 먼저 그 백성들의 걱정거리를 걱정한 다음에 자신의 즐거움을 즐겼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몸소 그 나라의 안위(安危)를 짊어지고 이 세상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은 자의 일인 것이다. 그러므로 벼슬과 산수를 모두 버린 엄군평(嚴君平 엄준(嚴遵))과 같은 나야 물론 말할 것이 못 되지만, 그대와 같이 개연(慨然)히 이 세상에 대한 포부를 가지고 있는 자 또한 이처럼 지쳐서 물러나 휴식을 취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면, 지금까지 그 뜻을 이루어 보려고 애쓴 노력들은 진정 모두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이른바 근진(根塵 육근(六根)과 육진(六塵))의 망상(妄想)이란 말인가.
이제 이 정자에서 조용히 지내면서 그 구문(舊聞)을 수습하고 다시 여기에다 더욱 함양(涵養)과 조존(操存)의 공부를 보탠다면, 장차 그 물욕이 맑아지고 천리(天理)가 드러나서 바로 저 옥항아리에 담긴 물처럼 그 본성이 투명해질 것이다. 이렇게 된 다음에 세상에 나가서 저 천하의 일을 걱정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그 혜택을 입도록 하고, 다시 시골로 물러나와서 자신의 즐거움을 즐기면서 백성들과 더불어 그 스스로의 분수에 안주한다면, 아마도 이것이 이 정자의 이름에 걸맞는 것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대의 생각이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인가?
당(唐) 나라 사람의 시에 말하기를, “만일에 서울 친구가 나에 대해 묻거든, 한 조각 옥항아리에 담긴 얼음 같은 마음이더라고 하구려.[洛陽親友如相問 一片氷心在玉壺]” 하였다. 그런데 만약 그대가 정자 위에 앉아서 저 못물을 굽어본다면 응당 자신의 마음이 그 못물에 조응(照應)한다는 것을 알 것이니, 구태여 이를 남에게 물어 볼 필요가 없을 것이다.
수당집(修堂集) > 수당집 제6권 > 기(記) > 수당(修堂) 이남규(李南珪)선생의 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