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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할 수 없다(2023) / 김민홍 제6시집(끝)
101. 병상에서
수술 전
그대가 어떤 선택을 하든
난 고맙다
견디기 힘든 슬픔이 몰려와도
고맙다
아무리 나빴던 일을 기억하려해도
고마운 일이 훨씬 많았던 생
그대가 있었기 때문이지
고맙고 충분하다,
라는 생각이 미치기 전
의식이 사라졌다.
수술 후
마취에서 깨자 수술은
잘 되었다고 했다
날 아는 이들은 모두
다행이라고 했다
며칠 머리도 감지 못하고
샤워는커녕
양치, 세수도 하지 못했다
가족 면회조차 금지되었다,
코로나 때문이라고 했다.
링거를 뽑는 날 비로소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하였다.
병원 옥상에 올라가면
내 사는 동네가 꿈결처럼 보였다.
102. 이 시대와 지난 시대의 경계를 허무는 시인 / 유한근
김민홍은 오랫동안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1981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시인이다. "깊은 서정성으로 우리 내면의 진실과 정서를 깨우며, 세상의 부조리까지도 서정으로 삭이면서 거듭나야 할 그 무엇으로 인식한다. 자연의 생명력을 깊은 통찰력으로 탐색한 작품에서는, 이를 삶의 '무상'까지 이끌어가는 다분히 선禪적인 시인의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시집<편견 혹은 농담처럼>서평)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인간과 문학> '이 시인을 주목한다'에 발표하는 5편을 중심으로 그의 시세계를 탐색함을 전제한다. 그 이유는 이 시인에 대한 본격적인 작품론을 참고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며, 이미 펴낸 5권을 참고해서 그의 시세계를 가늠한다 해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1. 하심下心에 대한 인식
위의 서평에서 주목되는 구절은 "삶의 무상"까지 이끌어가는 다분히 '선禪적인 시선'은 하심下心과 언어도단言語道斷으로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우선 <설명할 수 없다>를 먼저 읽는다.
사십 여년 시와 시론을 써온
저명한 시인이자 교수가
어느 날 <금강경>을 만나고
언어를 버렸다고 썼다
시적 대상을 지우고
언어에 기대 무의식을 탐색했던 그가
이젠 언어조차 버리고
다만 쓰는 행위만 남았다고 쓴 글이
살아가는 행위만 있을 뿐
삶은 지워졌다고 읽혀진 까닭은
설명할 수 없다
나는 오늘 차마 생을 놓을 순 없고
그를 흉내내서
마음만 내려놓는다고 쓰고나니
내 속의 얼굴 없는 소리가 들렸다
'뭐라고? 마음이 물건인가?
내려놓게?'
나는 끝내 내려놓음과 포기와의 차이를
내 속의 소리에게 설명할 수도
물어볼 수도 없었다.
<설명할 수 없다> 전문
쉽게 읽힌다. 모르는 언어나 이미지가 없다. 그러나 이 시의 의미 공간을 탐색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많다. 한 편의 시가 은유구조이며, 세상의 마음과 삶의 모습을 담고 있는 은유 체계이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의 다층적 마음까지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어렵다. 저명한 시인이자 교수가 금강경을 접하고 언어를 버렸다는 에피소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금강경>을 알아야 하고, 그 속에 무엇 때문에 그리했는지 연결고리를 찾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금강경>의 핵은 공空사상과 보살행이며, 선불교의 핵심 경전이다. 선불교의 중흥조는 육조六祖 혜능慧能으로 "무상無相을 머리(宗)으로 삼고 무주無住를 몸으로 삼으며, 묘유妙有를 팔다리(用)로 삼"으며, "모양으로 있는 모든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니(凡所有相 皆是虛妄), 만상이 모양 없는 것임을 직관할 줄 알면 곧 부처를 보는 것이며, 깨닫는 것이다(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라고 그 요체를 설명한다. 그것을 '반야제일게般若第一偈'라 부른다. 불교는 마음의 종교이다. 마음먹기에 달라진다는 '속세의 언어'도 이에 기초를 둔 말이다. 불교 간화선看話禪에서는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를 화두로 묻고, 그 곳이 마음이라고 답한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가 그것이다. 그래서 禪 수행에서는 직지인심直旨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을 꿈꾼다. 시인도 긍극적으로 꿈꾸는 것이 부처와 같은 참 지혜 얻기이다. 시인의 내면 깊숙이 은밀하게 자리 잡고 있는 그 마음, 그 정체를 알았을 때 지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민홍 시인은 위의 시의 핵심 행에서 "마음만 내려놓는다고 쓰고 나니/내 속의 얼굴없는 소리가 들렸다/'뭐라고? 마음이 물건인가?/내려놓게?'라고 표현한다. 그 이유는 "사십여 년 시와 시론을 써온/저명한 시인이자 교수가/어느 날 <금강경>을 만나고/언어를 버렸다고 썼다/시적 대상을 지우고/언어에 기대 무의식을 탐색했던 그" 시인 때문에. 김민홍 시인은 "마음만 내려놓는다"고 쓰고 "마음이 물건인가"를 회의한다. 그리고 "나는 끝내 내려놓음과 포기와의 차이를" 설명할 수도 없고 물어볼 수도 없다고 토로한다. 이 시에서의 저명한 시인 교수를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문맥상으로 볼 때 무의미 시학을 말한 김춘수 시인인 것 같다. 물론 이는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 시에서 중요한 것은 김민홍 시인이 '마음'에 대한 존재론적 의미에 꽂혔다는 것과 하심下心의 시학에 관심을 가졌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불교를 모티브로 시를 쓰는 시인은 아니다. 그도 역시 지혜 얻기, 깨달음을 추구하는 시인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것을 이 시는 보여준다.
2. 내면 성찰과 본체 규명
'끽다거喫茶去'로 유명한 조주 선사의 이야기는 우리가 많이 아는 이야기다. 조주선사의 無자 화두는 유명하다. 이 화두는 학승이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를 묻자 조주 선사는 "없다(無)"고 말하면서 시작된다. 만물이 불성을 지니고 있다는 경전에 반하는 대답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다른 스님이 와서 똑같은 질문을 하자 스님은 "있다(有)"고 대답하기도 한다. 이 일화는 유와 무의 경계를 허물라는 가르침이다. 나아가서는 깨달음의 유무까지도 부정하는 논리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 유무의 경계 없음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보통사람이 이를 깨닫기 위해서는 내공이 있어야 할 것이다.
성격이 급한 나는
별 필요가 없어 보이는 물건들은
서둘러 치워버리곤 한다
성격이 느긋한 그는
필요없어 보이는 물건들도
필요없는 그 자리에 두어둔다
그에겐 세상에 필요없는 물건은 하나도 없다
구태여 버리는 수고를 하기 보다는
그 자리에 놓아 두고
가능한 덤덤한 눈으로 감상한다
싫어지면
그냥 고개를 돌리거나 눈을 감으면 그뿐
그는 늘 조용히 남의 이야기를 경청한다
하지만 듣기 거북한 말엔
은밀하게 자신의 귀를 막아버리거나
조용히 흘려보내는 일을 수행의 근간으로 삼았고
어느 날 문득 도(道)가 텄다
그의 얼굴이 늘 편안해 보이는
비밀을 알아차리는 데
나는 평생이 걸린 셈이다.
-<내공의 비밀> 전문
위의 시 <내공의 비밀>은 물건의 필요 없음과 있음에 대한 경계를 허무는 시이다. 그것을 시인은 '도道'라고 표현했고, '내공의 비밀'이라는 시어로 표현했다. 이 시의 1연에서는 시적 화자를 '나'로, 2연에서의 시적 화자는 '그'로 설정했다. 그리고 마지막 3행에서는 "그의 얼굴이 늘 편안해 보이는/내공의 비밀을 알아차리는 데/나는 평생이 걸린 셈이다"라고 토로한다. 이 부분에 와서 '나'와 '그'는 동일인물인 시인 자신임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보아도 무방하다. '그'는 "성격이 느긋"하여 "필요 없어 보이는 물건들도/필요 없는 그 자리에 두어" 두고 "덤덤한 눈으로 감상"하다가 싫어지면 "그냥 고개를 돌리거나 눈을 감"는, 그리고 "늘 조용히 남의 얘기를 경청"하다가 "듣기 거북한 말엔/은밀하게 자신의 귀를 막아버리거나/조용히 흘러보내는 일을 수행의 근간으로 삼"는 사람이다. "어느 날 문득 도道가" 튼 사람이다. 그렇게 도가 튼 사람의 내공의 비밀을 아는데 '나'는 평생이 걸렸다고 말한다. 자신의 내면 인식을 필요 없음과 있음의 경계 없음으로 인식했다는 것인데, 이는 곧 유무有無의 경계 없음을 깨달은 것과 다르지 않다.
이렇게 두 편의 시를 가지고 김민홍 시인의 불교적 인식으로 해명하는 것이 어쩌면 오독誤讀으로 인한 도로徒勞일 수는 있지만, 시인의 제4시집을 읽으며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특히 시 <청암사>*의 "세상과 세상 사이에서 비가 내리기 때문이다/세상과 세상엔 바람이 불 듯/세상과 세상 사이에 당신이 있기 때문이다/세상에서 세상으로 시방 눈 내리고"라는 구절을 읽으면서 그의 인식 속에서 원형질적으로 불교적 인식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여름 곤충에게 겨울의 살얼음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고
여름 곤충이 이해하겠어?
이는 중국 고전 속의 이야기
여름에 태어나 여름이 가기전에 죽는 곤충
하지만 그 곤충의 유충은 긴 겨울을 몇 차례 견딘 후에야
잠시 짧은 여름을 살수 있다는 것을
그 고전의 작가는 몰랐을거야
너라는 생각을 놓고 싶지 않은 너와
나라는 생각을 놓고 싶지 않은 내가
비록 완전소통할 순 없을지라도
오늘은
미소하며, 포옹하며
일치점을 찾아보자.
비록 우리가 두 방울의
영롱한 물처럼 서로 다르더라도.*
몇 년 전 세상을 뜬 폴랜드 시인
쉼보르스카 여사의 시라도 함께 읽어보는 것은 어떨지?
*쉼보르스카 <두번이란 없다> 중에서
-<일치점> 전문
시 <일치점>의 3연은 쉼보르스카 <두 번이란 없다> 중에서 인용했다고 밝히고 있다. 쉼보르스카는 노벨문학상을 수상(1996)한 폴랜드 여류시인이다. 이 시인은 <지금>이라는 시집으로 유명하다. 시 <두 번이란 없다>는 유고시집인 <충분하다>에 실린 시이다. 이 시나 이 시집으로 보아도 그 시인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영원보다는 찰나를 중시하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실존주의자로 보인다. "두 번은 없다"는 없다는 것,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하루도 없다, 두 번의 똑같은 밤도, 두 번의 한결같은 입맞춤도, 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는 사실을 신봉하는 시인이다. 그래서 소통 부재와 소통 없음을 모티프로 하고 있는 시에서 시인의 시 구절을, 김민홍 시인이 인용한 것은 일치점을 찾자는 메시지 때문이다. "미소하며, 포옹하며/(---)/비록 우리가 두 방울의/영롱한 물처럼 서로 다르더라도" 일치점을 찾고 싶다는 시인의 마음을 효율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존재양식뿐만 아니라, 관계양식에서도 불이不二를 꿈꾸는 시인이다. 여기에서 불교의 불이不二사상을 덧붙일 때 김민홍 시인은 불교시인이 된다.
3. 우리시대의 마지막 감성 가객 시인
내가 알고 있는바 김민홍 시인은 통기타 치며 노래하는 시인이다. 70년대의 청바지와 통기타에 고착(?)된 시인이다. 중등교사로 35년 명예 퇴임했으면서도 아직도 불러주는 곳에 마다하지 않고 가서 노래를 부르는 가객이다. 우리가 꿈꾸고 있는 마지막 우리 시대의 시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의 <목포의 눈물>은 새롭게 이해된다.
학교만 파하면
대전역 광장 모퉁이에서 목을 빼고
기다리던 시절이 있었지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 않던
돈 벌러 서울 간 친구 누나를 기다린 것은 아니야
목이 빠질대로 빠져버려
누구를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조차 희미해졌지만
오후만 되면 대전역 광장에서
어슬렁거리는 습관이 몸에 배었을 무렵
서울에 가면 누군가 반겨줄 것도 같고
서울에만 가면 뭔가 되어서 성공할 것 같기도 했지
불현듯 서울행 완행열차를 처음 탄 건
중학교 일학년 여름방학 때였어
서울역 근처만 서성이다가
서울역사에서 하룻밤 노숙하고
다시 완행열차를 타고 내려 왔지
그때부터 해마다 여름방학이 되면
서울행 완행열차에 몸을 실었고
하루나 이틀 서울역사에서 노숙하고 돌아오곤 했지만
친구 누나가 일한다는 영등포역에는 내려볼 엄두도 내지 못했고
간이역에서 선 채 사 먹은 우동 국물의 구수한 냄새와
단무지 몇 쪽의 짠맛에 길들여졌지
<이별의 종착역>, <대전부르스>같은
노래가 남의 얘기 같지 않았어
목포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으셨을 어머니의
십팔 번 <목포의 눈물>만 들으면 공연히 눈물이 났었지
아주 오랫동안 잊었던 이 노래들이
오늘 귀가 길 자동차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니
안구건조증에 시달리던 눈이 젖어오더군
보는 사람도 없는데 한동안 민망했어
그러고 보니 연고가 없는 목포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네
더 늦기 전에 한 번은 성묘가듯
삼학도 유달산도 둘러보아야 할 텐데
누가 같이 가볼 생각은 없어?
-<목포의 눈물> 전문
이 시를 읽으면서 누구나 그때가 떠오른다. 그때 그 사람들은 읽기만 해도 이해가 되는 시이다. 그러나 이 시가 정작 노래한 것은 후반이다. "목포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으셨을 어머니의/십팔 번 <목포의 눈물>만 들으면 공연히 눈물이 났었지"는 이 구절은 시인의 어머니에 그리움만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원형질적인 정서를 환기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잊었던 이 노래들이/오늘 귀가 길 자동차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니/안구건조증에 시달리던 눈이 젖어오더군"에서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생길 수 있는 시인의 안구건조증과는 다른 시인의 청년적(?) 정서, 즉 시인의 감성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이 시의 마지막 부분인 "그러고 보니 연고가 없는 목포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네/더 늦기 전에 한 번은 성묘가듯/삼학도 유달산도 둘러보아야 할텐데//누가 같이 가볼 생각 없어?"에서 어머니의 애창곡인 <목포의 눈물>이 시인에게는 자신과 어머니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이지만, 어머니가 묻힌 묘소라고 인식하는 시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일체유심조'라는 불교 언어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1>
아주 오래된 영화 한 편을 보았어.
내가 채 열 살도 되지 않았을 때
나왔던 영국영화
하지만 이미 그때부터
본능적으로 내 속에 숨어 살고 있었을 것 같은
아주 음울한 영화
한 나비 수집가의 여성 편집증에 관한
끔찍한 보고서를 읽었어
새벽 두시였어
대낮 도심 지하철역 화장실에서
무참하게 살해한 여자에게 개인적 원한은 없었다고
담담한 어조로 인터뷰를 하던
2016년 마스크를 쓴 청년에 대한 영화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가
내 나이쯤 되어 보고 있는 것 같은,
아주 오래되고 음울한 영화 한 편을 보았어.
-<아주 오래된 영화>전문
<2>
요즘 누가 돈까지 들여 시를 읽겠니
그저 시를 좋아하거나
시를 쓰는 사람들 몇 모여
시 낭송도 하고
시집들도 주고받을 뿐
어느 시대이든 시만 써서
생계를 유지하긴 어려웠다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개국開國 이래 시인이 가장 많은 이 시대를
건너가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구나!
그래서 나같이 재능 없는 인사도
시랍시고 끌적거리고 있긴 하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전문
위의 시 두 편은 시인의 감성이 돋보이는 시이다. <1>의 시가 더욱 그러하다. 이 시 <아주 오래된 영화>는 아마도 1965년 칸영화제에서 남-여 주연상을 받은 윌리엄 테일러 감독의 영화 <수집가(The collector)>일 것이다. 이 영화에서 주목되는 이야기는 한 남자에게 납치된 여자를 박제된 나비로 표상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2016년 마스크를 쓴 청년에 대한 영화"는 아마도 테러 조직에 관한 최근의 영화일 것이다. 이 두 편을 비교하면서 시인의 자신의 '음울함'에 대해서 이 시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미지의 병치나 시적 진술 방식이 새롭다.
그리고 <2>의 시는 요즘의 시에 대한 현실을 담담하게 폭로하고 있다. 그리고 제목 '그러함에도 불구하고'라는 언어의 트릭을 우리 문단과 자아 비하라는 아니러니 방식으로 새롭게 실험하고 있다. 우리의 아픈 현실을 비아냥거리고 있어 더욱 슬프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개국開國 이래 시인이 가장 많은 이 시대를/건너가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다"는 우리의 문단 현실, 그리고 "그래서 나같이 재능 없는 인사도/시랍시고 끌적거리고 있긴 하지만"이라고 자기 비하가 우리의 진정성과 고통을 환기하게 한다.
20세기 키워드의 중의 하나는 영화였다. 그리고 21세기로 들어왔지만 '영화'의 영향권은 쇠퇴하지 않았다. 그것은 영상이라는 개념과 함께 우리의 문화콘텐츠의 부가가치를 높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나는 영화에게 문화예술의 종주국 자리를 물려주지 않기 위해서는 영상과 문학의 학제간 연구의 필요성을 반복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또한 원소스 멀티-유스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케이(K)-스토리에도 관심을 가져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이러한 나의 생각을 피력하는 것은 <1>의 시가 내포하고 있는 영화 영상과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의 감응성과 영향력에 대한.
4. 시 혹은 시인을 모티프로 한 시
김민홍 시인은 시 <김민홍의 시에 대한 분석>이라는 시에서 자신의 시를 “구태여 분석할 필요가 없어요/김민홍이 일기처럼 써온 시엔/김민홍의 허접한 인생이/노출되었으니까요”(1연)라고 토로한다, 그리고 시 <예쁜 시>에서는 “예쁜 시가 쓰고 싶어” 라고 노래한다. 그리고 “예쁜 시가 되긴 틀린/내 인생”이라고 토로하면서 마지막 행에는 “그런데 예쁘다는 게 뭐지?”라고 되묻기도 한다. 이 두 편의 시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김민홍의 시 정신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시라고 하는 것은 그 시인의 삶 그 자체라는 것과 예쁜 시란 시인이 원하는 시, 시인이 예쁘다고 생각하는 시임을 아이러니한 표현 구조로 차용하여 쓰고 있다.
김민홍 시인의 시와 시인을 모티프로 한 시들은 위의 두 편 시 외에 <詩를 쓴다는 건> <詩, 혹은 시간, 아니면 골목>, <詩는 詩> <詩人이란> 등 여러 편이다. 이 중에서 우선 <詩, 혹은 시간, 아니면 골목>부터 먼저 보자.
어딜 가나 널부러져 있는 시간들
을 줍는다, 내 것인 아닌 것들,
당신 것도 아닌 것들, 그래,
누구의 것도 아닌 널브러진 골목들을
내가 걷는다, 내 것이 아닌 시간,
어딜 가나 실눈 뜨고 째려보는 시간
그래, 마음껏 노려보거라, 내 것이 아닌 절망아
물론 당신 것도 아닌, 끝내 당신 것이라고
우기는 기쁨아, 우겨라, 마음 가는 대로
詩도 아닌 것들
자꾸 시라고 우겨라
어딜 가나 널브러진 시, 언어, 부러진 문법
어긋난 사랑, 과잉된 시 낭송, 과부하過負荷 걸린 슬픔
시가 생긴 이래, 시만 써서 밥 먹고 산 인류는
없었다, 몇몇 스타 시인 말고는
막노동만 해서 생계를 이어온 시인
을 알고 있다 그의 이름만 알고 있다
오늘도 널부러진 시간들이
서점에도 못 가고 버려진다,
한 번도 읽힌 적 없는
시간이 배설한 시간, 시를 주우며
내가 걷는다, 허리가 아프다,
아픈 것도 시시한 일,
詩, 혹은 시간, 아니면 골목
- 시<詩, 혹은 시간, 아니면 골목> 전문
이 시도 읽으면 그대로 이해되는 시이다. “어딜 가나 널브러져 있는 시간들”과 “누구의 것도 아닌 널브러진 골목들” 그리고 “어딜 가나 널브러진 시”를 이 시에서는 등가치로 놓는다. 어디에나 혹은 어느 때나 널브러진 것들로 시=시간=골목을 등가치로 본다. 그리고 시인은 “내 것이 아닌 시간,” “당신 것도 아닌 골목”에서 그것들을 줍는다. ‘시인의 시 세계’에서 ‘세世’는 시간을 의미한다. 그리고 ‘계界’는 공간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김민홍의 세계는 김민홍의 시간과 공간인 셈인데, 이 시에서 나타난 김민홍의 시 세계는 널브러진 시간과 골목이 그의 세계인 셈이다.
그 세계에서 시인은 이렇게 절규(?)한다, “어딜 가나 실눈 뜨고 째려보는 시간/그래, 마음껏 노려보거라, 내 것이 아닌 절망아/물론 당신 것도 아닌, 끝내 당신 것이라고/우기는 기쁨아, 우겨라”라고 명령조로 강요한다. 그리고 이어서 “어딜 가나 널브러진 시, 언어, 부러진 문법/어긋난 사랑, 과잉된 시 낭송, 과부하過負荷 걸린 슬픔”이 널브러져 있음을 환기하며, 오늘을 사는 시인의 처지를 이렇게 환기하기도 한다. “시가 생긴 이래, 시만 써서 밥 먹고 산 인류는/없었다. 몇몇 스타 시인 말고는/막노동만 해서 생계를 이어온 시인/을 알고 있다”고 아프게 노래한다, 그리고 이 시의 결말 부분에서는 “한 번도 읽힌 적 없는/시간이 배설한 시간, 시를 주우며/내가 걷는다, 허리가 아프다”고 토로하면서 “아픈 것도 시시한 일/詩,혹은 시간, 아니면 골목”이라는 지혜의 키워드로 반어적으로 마감한다.
그러나 ‘재미 록커rocker 마이클에게’라는 부제가 붙은 다른 시 <詩를 쓴다는 건>에서는 긍정적으로 노래한다.
詩를 쓴다는 건
인생을 단어 속에 묻어둔다는 것
시간을 낱말 속에 밀어 넣는다는 것이지
마치 압축공기처럼
튀어 오르거나 혹은 파열해서
가장 순수한 생만
추려내고 싶다는 것이지
시를 쓴다는 건
시를 쓰고 싶다는 것,
위로하고 이해받고 싶다는 것이지
그래, 시를 쓴다는 건
아직 살고 싶다는 독백이야
노래한다는 건
그대들 속으로 스미고 싶다는 것.
외로움과 기쁨을
나누고 싶다는 것이지
그동안 얼 만큼 외로웠는지
혹은 기뻤는지
순간순간 지나가겠지만
함께였다는 기억은 남는 것
비록 내 노래가
그대에게 닿지 못하더라도
나는
노래하고 싶다는 것이지
그래, 노래한다는 건
아직 생을 사랑한다는 것이지
-<詩를 쓴다는 건>전문
“詩를 쓴다는 건/인생을 단어 속에 묻어둔다는 것”이라는 말을 한 포르투칼 시인 아스팡카의 산문에서 인용하면서, 시를 쓴다는 것은 “시간을 낱말 속에 밀어 넣는다는 것”이며 “가장 순수한 생만 추려내고 싶다는 것”이라고, 그리고 “위로하고 이해받고 싶다 것”이며 “아직 살고 싶다는 독백”이라고 노래한다.
그리고 노래한다는 건 “그대 들 속으로 스미고 싶다는 것,/외로움과 기쁨을/나누고 싶다는 것”이며, “그동안 얼만큼 외로웠는지/혹은 기뻤는지/순간순간 지나가겠지만/함께였다는 기억은 남는 것”이라며 김민홍 시인은 “비록 내 노래가/그대에게 닿지 못하더라도/나는/ 노래하고 싶다”고 토로하며 “그래, 노래한다는 건/아직 생을 사랑한다는 것”이라고 토로한다.
자연인 김민홍은 시인이며 가수이다. 40여 년 동안 시를 써왔지만, 그 시간만큼 기타를 들고 노래해 온 가수이기도 하다. 그러한 사실은 김민홍 시인은 재미 록커rocker 마이클에게 시로 고백한다. 노래한다.
그리고 그는 <詩人이란> 시에서 이렇게 쓴다. “지난 일에 집착하는 건/가장 어리석은 일이라고 배웠지만/인생이 배운 대로 되는 건 아니지//詩人이란 본디 추억을 먹고 사는 사람/아무리 운치 있게 현재와 미래를 노래해도/추억을 채굴하는 사람//세상에서 가장 무모하고/아름다운 거짓말에 스스로 속고/그 거짓말을 노래하는 사람이다//詩人이란!”(전문)이라고 단언한다. 그렇다면 김민홍 시인은 아름다운 거짓말을 노래하는 가객인가? 지켜볼 일이다.
유한근 :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1984).
시집: <사랑은 흔들리는 행복입니다>외
평론집: <문학의 모방과 모반>,<현대불교문학의 이해>, <한국수필비평> <원 소스 멀티-유스 문학이야기> 등
명상언어집: <별과 사막>, 동화집 <무지개는 내 친구> 등, 저서 논문 다수.
수상: 만해불교문학상, 한국문학평론가협회상, 신곡문학상 대상 등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학교 교수. <인간과문학>주간.
*청암사에서
오래 품은 슬픔이 풀어져 내린다.
당신에게 가 닿지 못하는 슬픔이
슬픔에게 편지를 쓴다.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
내 슬픔이 풀어지며
당신을 적시지 못해도 이젠 섭섭하지 않다.
세상과 세상 사이에서 비가 내리기 때문이다.
세상과 세상 사이엔 바람이 불듯
세상과 세상 사이에 당신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세상으로 시방 눈 내리고
당신의 사원에 난 이제 겨우 당도한다.
폭설에 엉켜도 신비롭게 정돈되는 불영산.
무모했던 시간 들을 정돈하며 난 늙어갈 것이다.
세상의 모든 절망 들을 거쳐서 내가 왔기 때문이다.
당신에게 닿지 않더라도
이젠 섭섭하지 않기 때문이다.
<청암사에서>전문 (제4시집 <손목시계>)
<인간과 문학>2016년 가을(15호) 이 시인을 주목한다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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