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에도 주인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2:23-28
2:23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그의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2:24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2: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2:26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2:27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2:28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서론. "해도 돼요, 안 돼요?"
아이들이 자주 묻는 말이 있습니다. "엄마, 이거 해도 돼요?" "아빠, 이거 먹어도 돼요?" 어른이 되어도 이 질문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모양만 바뀝니다. 이 정도는 괜찮을까. 이건 해도 되는 걸까.
이 질문 자체는 나쁘지 않습니다. 바르게 살고 싶은 마음에서 나오니까요. 그런데 이 질문이 방향을 바꿀 때가 있습니다. 내가 아니라 남을 향할 때입니다. "저 사람, 저래도 돼?" 내가 할 때는 사정이 보이고, 남이 할 때는 규칙만 보입니다. 그때부터 이 질문은 남을 재는 자가 됩니다. 자로 서로를 재는 곳에는 쉼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바로 이 질문이 나옵니다.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그런데 예수님은 이 질문에 답하시면서 질문의 자리를 옮기십니다. "해도 되느냐"에서 "이 날의 주인이 누구냐"로 옮기십니다. 쉼에도 주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길을 본문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1. 바리새인들은 쉼의 날을 고발하는 잣대로 바꾸었습니다
안식일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밀밭 사이로 난 길을 걸어갑니다. 제자들이 가면서 이삭을 자릅니다. 마태복음은 제자들이 시장해서 이삭을 잘라 먹었다고 알려 줍니다. 배가 고팠던 것입니다.
남의 밭에서 이삭을 딴 것이 도둑질일까요? 아닙니다. 율법은 이웃의 밭을 지날 때 손으로 이삭을 따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낫을 대지만 않으면 됩니다. 신명기 23장에 나옵니다.
문제는 날짜였습니다. 그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 곧 율법을 철저히 지키기로 이름난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삭을 자르는 것은 추수다. 추수는 일이다. 안식일에 일을 했으니 율법을 어겼다. 그래서 예수님께 따집니다.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하지 못할 일'은 '허락되지 않은 일'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이 오늘 본문의 첫 번째 열쇠입니다. 고발당한 사람은 제자들인데, 질문은 예수님께 던져집니다. 선생이 책임지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는 열심이 있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려는 마음은 진심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열심이 어디로 갔습니까? 하나님이 쉬라고 주신 날이 사람을 잡는 잣대가 되었습니다. 선물이 고발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그 날의 주인이 바로 눈앞에 서 계신데,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아이들 사이에서도 이런 모습을 봅니다. "선생님, 쟤가 먼저 그랬어요!" 남의 잘못을 일러바칠 때 이상하게 힘이 납니다. 어른이 되면 말만 점잖아질 뿐입니다.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주신 좋은 것을 점수표로 바꿀 때가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봉사를 하고, 헌금을 하면서 마음속으로 점수를 매깁니다. 나는 이만큼 했다. 저 사람은 저것밖에 안 했다. 이것은 가벼운 일이 아닙니다. 선물을 점수표로 바꾸는 것은 선물을 주신 분을 밀어내는 일입니다. 주인이 앉으실 자리에 규칙과 나 자신을 앉히는 일입니다. 점수가 높다 싶으면 교만해지고, 낮다 싶으면 주눅이 듭니다. 어느 쪽이든 쉼이 없습니다.
2.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펴서 제자들 편에 서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답하십니까? 제자들에게 "왜 그랬느냐"고 묻지 않으십니다. 대신 바리새인들에게 되물으십니다. "다윗이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성경을 누구보다 잘 안다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가 그렇게 읽은 성경에 이런 이야기가 있지 않으냐는 것입니다.
다윗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다윗과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핍절했습니다. 핍절은 먹을 것이 다 떨어졌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 진설병을 먹었습니다. 진설병은 하나님 앞에 차려 두는 거룩한 떡입니다. 제사장 외에는 먹으면 안 되는 떡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감추지 않으십니다. "먹어서는 안 되는"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이 쓴 '허락되지 않은'이라는 그 말을 그대로 쓰십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일로 다윗을 꾸짖지 않습니다. 굶주린 하나님의 사람들 앞에서, 거룩한 떡이 그들을 정죄하는 도구가 되지 않았습니다.
여기 작은 말 하나가 두 번 나옵니다. "함께 한 자들." 다윗과 함께 한 자들, 그리고 지금 예수님과 함께 한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은 두 장면을 겹쳐 보여 주십니다. 배고픈 채로 한 분을 따라가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들 편에 서십니다.
그리고 더 깊은 말씀을 하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신호등을 생각해 보십시오. 신호등은 사람을 지키려고 세운 것입니다. 사람이 신호등을 모시려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신호등을 없애자는 말도 아닙니다. 신호등이 왜 있는지를 알자는 것입니다.
안식일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지으신 뒤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창세기 2장입니다. 사람이 먼저 지어지고, 그 사람 앞에 쉬는 날이 선물로 놓였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안식일을 지키라 하실 때도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애굽에서 종이었을 때 내가 강한 손으로 너희를 건져 냈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신명기 5장입니다. 종은 쉬는 날이 없습니다. 그런데 건져 내신 분이 계셔서 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안식일은 일을 잘한 사람이 받는 상이 아니라, 건짐 받은 사람이 누리는 선물이었습니다. 짐이 아니라 숨 쉴 틈이었습니다.
여기에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사람을 짓누르려고 안식일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지친 사람은 쉬고, 배고픈 사람은 먹고, 모두가 건져 내신 분을 기억하며 예배하라고 주셨습니다. 그러니 배고픈 제자들을 규칙 앞에 세워 고발하는 것은 아버지의 선물을 거꾸로 읽는 것입니다.
3.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맺으십니다.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이 말씀은 깜짝 놀랄 말씀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정하신 날입니다. 그 날이 무엇을 위한 날인지 말할 수 있는 분은 그 날을 주신 분의 자리에 계신 분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지금 그 자리에서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은 규칙으로 안식일을 설명했지만, 예수님은 주인으로서 안식일을 설명하십니다.
집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집을 어떻게 쓸지는 집주인이 압니다. 손님들끼리 "이 방은 써도 되나, 안 되나" 하고 다투어도, 주인이 들어와 한마디 하면 정리됩니다. 그 집이 무엇을 위해 지어졌는지 아는 사람이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안식일이라는 집에 그 주인이 들어와 계십니다.
'인자'라는 이름은 바로 앞에서도 나왔습니다.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고,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죄를 사하시는 분이 이제 안식일의 주인으로 서십니다. 오늘 본문은 규칙 하나를 정리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밝히는 이야기입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을 없애지 않으셨습니다. 필요하면 무엇이든 해도 된다고 하신 것도 아닙니다. 안식일의 뜻을 바로 세우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도 이것입니다. 쉼의 뜻을 규칙에서 찾지 말고, 그 날의 주인이신 아들에게 듣고, 선물로 받아 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주인이 어떤 주인이신지 보십시오. 본문에서 제자들은 한마디도 변명하지 않습니다. 주인이 대신 답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자기를 지킨 것이 아니라 주인이 그들을 지켜 주셨습니다. 안식일의 주인은 고발하는 사람 편이 아니라 고발당하는 사람 곁에 서십니다.
결론. 그 쉼의 값을 주인이 치르셨습니다
그런데 이 주인은 변호에서 멈추지 않으십니다. 마가복음은 같은 인자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10:45).
대속물은 종을 풀어 주려고 치르는 값입니다. 빚 때문에 종이 된 사람은 스스로 풀려날 수 없습니다. 누군가 값을 대신 내 주어야 풀려납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값이 되겠다고 하셨습니다. 돈이 아니라 자기 목숨으로 말입니다.
우리는 정말 하나님 앞에 빚진 사람입니다. 선물을 점수표로 바꾼 죄, 서로를 고발한 죄, 주인의 자리에 나를 앉힌 죄가 있습니다. 이 빚은 더 열심히 지켜서 갚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인이 오셨습니다. 고발당할 사람의 자리에 주인이 서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가 받아야 할 고발과 정죄를 대신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그 값이 다 치러졌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쉼은 규칙을 다 채운 사람이 받는 품삯이 아니라, 주인이 값을 치르고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르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 주인을 눈앞에 두고도 몰라보았습니다. 성경을 많이 아는 것과 예수님을 주님으로 아는 것은 다릅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우리 눈을 열어 이 주인을 알아보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 눈을 여시면 보입니다. 이분은 내 점수를 매기는 분이 아니라, 내 쉼의 값을 치르신 주인이시라는 것이 보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이렇습니다. 내 점수표를 내밀지 않습니다. 빈손으로 주인 곁에 섭니다. 내가 얼마나 지켰는지를 세는 것이 아니라, 이 주인이 누구신지를 바라봅니다. 그 믿음도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닿으면 좋겠습니다.
해야 할 일에 눌려 쉬지 못하는 분이 있다면 이 말씀이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설 면목이 없다고 느끼는 날이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속으로 자기를 고발합니다. 이것도 못 했고 저것도 못 했다고 말입니다. 그때 바라볼 것은 내 기록이 아니라 내 주인이십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내 마음이 나를 고발할 때에도 성령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증언해 주십니다(롬 8:16). 더 세게 결심해서 쉬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우리 눈을 주인께로 돌려 주실 때 쉼이 옵니다. 순종은 그 뒤에 따라오고, 그 힘도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주십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잘해 왔다고 여기는 분에게 이 말씀은 질문이 됩니다. 예배하고 섬기면서 마음이 점수를 세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 점수표를 내려놓고 주인의 얼굴을 다시 볼 자리가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서로를 규칙으로 재는 말이 오갈 때가 있습니다. 서툰 걸음으로 예배에 나온 지체가 있을 때, 우리는 그를 재판석 앞에 세울 수도 있고 그 곁에 설 수도 있습니다. 주인께서 먼저 우리 곁에 서 주셨습니다. 그러니 곁에 설 자리가 있다면 그 자리에 서면 좋겠습니다. 그렇다고 기준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주인의 말씀이 우리의 기준입니다.
오늘 처음 오신 분이 있다면 이렇게 들리면 좋겠습니다. 교회는 규칙을 다 지킨 사람이 오는 곳이 아닙니다. 지치고 빚진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께 초대받는 곳입니다. 아직 아무것도 몰라도 괜찮습니다. 주인이 "내게로 오라" 하십니다.
처음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해도 돼요, 안 돼요?" 이 질문으로 서로를 재는 동안에는 쉼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질문을 옮기셨습니다. "이 날의 주인이 누구냐." 그 주인이 어떤 분인지 다시 보겠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지금 이 자리에서 그분을 주님이라 부르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점수표가 아니라 그 주인을 바라보며 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