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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재 스크랩 초보끼리 놀자 - 분재의 예술성
사냥꾼 추천 0 조회 84 08.02.28 16:3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초보끼리 놀자 (초보 취미인이 매섭게 안내하는 분재 입문) - 분재의 예술성 오영택 (Home) 2005-08-11 17:38:18 

초보끼리 놀자
- 초보 취미인이 매섭게 안내하는 분재 입문  

제 1 장
4.  분재의 예술성  

일본의 문헌과 기록들을 보다 보면 ‘분재예술’ 이란 표현과 매우 빈번하게  마주치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또한 영어권 국가에서도 ‘art of bonsai’ 라는 개념은 이미 정착된 것으로 보일만큼
자주 사용되며 관련된 간행물 또한 쉽게 찾을 수 있다.  

우리 분재계와 분재인들에게는 어떨까?
분재예술이란 말이 낯설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분재작품’ ‘작품’ ‘작품분재’ 등의 표현이 자주
쓰이는 만큼  ‘분재예술‘ 이란 표현은 그다지 상용되는 것 같지 않다.

필자는 분재의 구성요소를 크게 예술적 범주 (artistic) 와 과학적 범주 (scientific) 로 구분
하여 접근할 때, 분재의 각 요소에 대한 이해가 빨라지고, 배양 및 관리 능력을 보다 효율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으며, 분재를 보는 포괄적 시각의 형성에도 유익하리라 생각해 왔다.  

그러나 우리 분재계의 현실은 분재의 예술적 범주에 속하는 수형, 연출, 진열과 감상 등에 대한 논의가
수종, 배양/관리/창작에 관한 기법과 기술, 병충해, 시비(施肥), 용토 등 과학적 범주에 비해 턱없이 드물다.

아마도 과학적 범주에 속하는 요소들은 사실과 경험, 번역, 인용 등 논의의 근거를 찾기가 용이하여,
자료를 생성하는 필자들이 많은데 비해, 예술적 범주의 요소들은 주관성의 위험과 이로 인한 논란의
소지가 크기 때문에 기피해온 까닭이 아닌가 싶다.

시각을 바꾸어 분재를 모르거나 분재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일반인들 중에서 분재를 하나의 예술 장르로
인식하고 분재 작품을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수용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어느 정도일까? 필자는 그 결과에
그다지 긍정적이지 못한 생각을 갖고 있다.

그와 더불어 우리 분재인들에게 분재가 하나의 예술행위요 예술작품인 까닭을 질문하였을 때, 충분한
논리적 배경과 근거를 갖고 이를 설명할 수 있는 분재인이 과연 몇이나 될까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본고 ‘제1절 분재란 무엇인가’에서 인용한 여럿의 분재의 정의에는 공통적으로 ‘예술’ 이란 표현이
포함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재예술에 관하여 명확한 소견을 제시할 수 있는 분재인들이
많지 않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에 필자는 예술철학과 예술평론에서 제기된 관점들을 차용하여
분재의 예술성 논의를 위한 단초들을 제공해 보고자 한다.
  
1) 예술과 예술작품

예술이라는 개념은 일반적으로 ‘창작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산물’을 의미하지만 ‘창작 행위의 과정’을
뜻하기도 한다. 예술작품은 ‘미학적 반응을 유도하는 대상’을 말하며, ‘자연물이 아닌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을 지칭한다.

예술을 분류하는 기준은 다양하지만 본고와 연관지어 우선 '순수 예술'(fine art)과 '실용 예술'(useful art) 의
구분을 보기로 하자. '순수 예술'이란  ‘아름다움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예술(작품)’을 뜻하는데
비해 '실용 예술'은 실용성이 일차적인 목적이 되는 예술(작품)’을 가리킨다. 즉 미술•음악•문학이 순수예술의
영역에 속한다면 공예, 도예 등은 실용예술의 영역에 속한다 하겠다. 한편 이 두 영역의 경계에 놓여있는
예술분야로 건축을 들 수 있다.

다음은 예술을 존재케하는 예술의 매개요인에 관한 기술이다.
첫째는 예술작품의 창작 당시 작가의 정신상황, 의도, 이러한 상황과 의도에 영향을 주는
모든 외재적, 내재적 요인이다. 둘째는 물리적 실체들로 색채 (회화), 나무와 돌(조각), 소리
(음악), 언어(문학) 등이다. 셋째는 작품을 체험한 관객 또는 감상자에게 작품이 미친 영향
즉 미학적 체험과 비미학적 체험이 있다.
예술은 곧 이와 같은 요소들이 상호 작용함으로써 생성되고 존재한다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예술의 매개요인 중, 가장 주목되는 것은 물리적 매개요인으로 이는 예술분류의 기준으로도
작용한다. 즉  시각예술 (회화, 조각, 건축 등- 시각적 자료)과 청각예술 (음악-소리), 언어예술(문학-언어)과
혼합예술 (연극, 오페라) 로 예술을 분류하는 기준은 시각적 자료, 소리, 언어와 같은 물리적 매개요인이다.

다음으로 시대와 사조에 따라 변해온 대표적인 예술론을 간략히 살펴보자.
가장 오랜 전통은 ‘예술은 외적 세계의 모방(Iimitation)과 묘사(representation)’ 라는 입장의 모방주의적
예술론이나 현대에는 더 이상의 큰 영향력을 갖지 못한다,
이에 대비되는 것으로 예술은 예술가의 내적세계를 반영한다는 입장의 표현주의 예술론이다.
이들 입장에 반대되는 것으로 ‘예술을 위한 예술'을 주장하는 형식주의 예술론이 있다. 즉 예술은 즐기고 감상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진정한 의미의 예술 감상은  선,  색채,  음조, 언어 등의 복잡하고 미묘한 배열과 조합
즉 매개요인의 재구성을 감식하는 가운데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끝으로 실용주의 예술론이 있는데 예술작품이란 외적이든, 내적이든 무언가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라는 시각이다

2) 분재예술의 한계  

매우 제한적이긴 하지만 위의 내용들을 참고하여 먼저 하나의 예술로서 분재를 논함에 있어 제기될 수 있는
한계점이 무엇인가를 고찰해 보기로 한다.

우선 분재는 인간이 창작과정을 통해 만들어 낸 산물이며, 미학적 반응을 유도하는 하나의
대상이란 개념을 적용한다면 하나의 예술과 예술작품의 필요조건을 갖추고 있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분재는 기존의 다양한 예술분류를 기준으로,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분재는 실용성을 찾기가 어렵고 단지 아름다움의 창조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기에  순수예술의 영역에 속한다
할 수 있을까? 목적만 놓고 볼 때는 분재를 예술로 주장하는 것이 타당하지만, 음악, 미술, 문학 등의
순수예술 장르와 같은 반열에 놓기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아마도 그것은 물리적 매개 요인의 속성에서 기인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색채, 소리, 언어 등의 물리적 매개요인들은 화가, 작곡가 또는 소설가나 시인등 작가의 의도에
따라 완전 통제가 가능한 대상들이다. 또한 작가의 의도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을 경우, 동일한 규격과
성질의 매개요인(재료)을 구할 수 있다 (음악이나 문학에서는 지우고 다시 쓰면 된다). 즉 창작 행위의
과정에서 작가는 의도에 따라 매개 요인을 자유롭게 통제할 수 있지만 매개요인이 작가 또는 작품의 결과를
통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분재작가에게 있어서 물리적 매개요인, 즉 소재가 되는 나무는 ‘하나의 생명체’인 까닭에 사실상
완전 통제가 불가능하다. 뛰어난 분재작가라 하더라도 결함이 많은 소재를 갖고서는 예술성이 높이 작품을
창작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 사실이다. 결국 매개요인인 소재가 작가의 창작 방향과 결과에 더 많은
통제를 가하는 것이 분재가 갖는 속성인 것이다. 여기서 하나의 예술 장르로서 분재가 갖는 한계가 노정되며,
예술로서의 분재에 대한 반론이 제기될 것이다.    

공간예술, 시간예술의 개념 속에서도 분재는 다시 한번 그 한계를 드러낸다.
분재는 회화, 건축 등의 공간예술과 마찬가지로 물리적 매개 요인 전체를 한꺼번에 제시한다는 측면에서
공간예술적 성향이 강하다. 부분을 연속적으로 살펴가며 작품을 감상할 수도 있지만 언제나 전체가 동시에
주어져 있어 어떤 부분을 먼저 보는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공간예술 장르에서는 한꺼번에 제시된 매개요인들이 작가의 손을 떠나는 순간부터 변화하지
않고 영구적 또는 반영구적으로 보존된다. 그러나 분재는 매개요인인
나무 자체가 생명을 갖고 있어 작가의 의도와 관계없이 제 스스로 변화함은 물론,  소장하는 사람이 바뀜에 따라  
본래의 모습과 현격히 달라질 수도 있다. 예술로서의 분재, 예술작품으로서의 분재에 대해 반론을 제기할 수 있는
두 번째 문제이며 한계점이다.

(필자주:
일부 자료에서 작품을 만들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의미로 분재를 시간예술로 정의하는 경우도 발견되는데
이는 개념 상의 오류일 뿐 분재는 시간예술적 속성을 전혀 갖지 못한다.  음악, 문학 등 시간예술 장르에 속하는
예술작품들은 물리적 매개요인 중 하나 또는 여럿이 연속적으로 제시되는데 분재는 이러한 속성이 없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시대에 따라 변해온 예술론을 분재에 적용할 경우에도 우리는 한계에 부딪힌다. 즉 모방주의 예술론을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적지만, 표현주의적 예술의 관점에서 볼 때 분재의 예술적 조건은 매우 취약해진다.  

즉 분재 작품이 과연 작가의 의도 즉 ‘내적 감정의 외적 표출’이 가능한 대상인가 하는 점이다. 중국의 펜징
(盆景, Penjing)에서는 삶의 희로애락과 작가의 감정이 다양한 방식으로 반영된 작품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지만 한국과 일본의 경우 소수의 작가와 작품을 제외하고 일반적인 정통 분재작품들 속에서 작가의 의도와
감정을 읽어 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는 관객 또는 감상자들이 다른 장르의 예술에서 경험하는 미적 체험의 영역을 제한하는 요소로 작용할 것이며,
작가 또한 ‘예술가적 체험’에 있어 일정한 한계와 제한을 갖게 만들 것이다. 이는 예술로서의 분재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또 다른 요인이며 한계가 될 수 있다는 반론을 피할 길 없다.

다만 형식주의 예술론의 주요 논점들을 적용할 때는 분재의 예술적 요소들을 부각시킬 수 있음이 발견된다.
이에 대한 논의는 다음 항목에서 다룰 것이다.

이상을 요약하자면 분재는 개념상 예술 또는 예술작품의 조건은 갖추고 있으나 물리적 매개요인 즉 소재의
속성에서 기인하는 문제로 인해, 기존의 다른 예술장르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요소들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으며, 다양한 예술론적 시각을 적용할 때, 예술 또는 예술작품으로서의 한계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결국 다른 예술장르의 이론적 기준들을 적용하여, 분재를 예술로 파악하고 정의하려는 시도는 많은
문제와 극복하기 힘든 한계에 직면할 가능성이 매우 높을 것이다.   


3) 분재의 예술성

미적 반응을 유도하는 대상 또는 미적 체험의 대상으로서 분재, 즉 분재를 통해 직관적으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분재예술, 분재의 예술성이 보다 광범위하게 수용되고 학술적인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분재에 내재된
독특하고 고유한 예술적 속성들이 보다 명쾌하게 밝혀져야 할 것이다.  타 예술장르가 그래왔듯 객관성과
논리적 체계를 갖춘 비평과 평론, 그리고 일반화된 기준(fact) 들을 중심으로 한 이론 정립의 필요성이
분재계와 분재인들로부터 높이 인식되고, 다양한 필자들로부터 다양한 관점에서 분재의 예술성에 대한
논의가 전개되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필자는 분재의 예술적 정체성을 드러내려는 구체적인 시도는 우선 ‘명확한 목적’이 설정되어야만 장려될 수
있을 것이며, 어떠한 목적을 갖는 기술일지라도  객관성을 방어할 수 있는 ‘방법론’이 뒷받침되어야만 폭넓게
수용될 것이란 점을 강조하고 싶다.

그렇다면 분재를 하나의 예술로 고양시킬 수 있는 분재만의 고유한 특성에는 어떠한 것들이 존재할까?

첫째는 물리적 매개요인, 즉 소재가 생명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생명체라는 사실은 분재의 예술적
속성에 한계로 작용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는 어떤 예술장르의 매개요인과도 차별되는 요소임이 분명하다.

어떠한 예술작품도 제 스스로 변화하지 못하며, 계절에 따라 모습을 바꾸지 못한다. 그러나 건축과 같은
공간예술 작품이 주위 환경과의 조화, 빛의 양, 보는 각도 등 외재적 변수에 따라 서로 상이한 미적 체험을
가능하게 하듯, 보다 적극적인 개념을 도입한다면 살아있는 생명체인 분재작품의 변화는 분재예술만이
갖는 독특한 미적 체험을 가능하게 만드는 매우 강력한 요인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이는 분재작품의 예술성을 논하는 기준이 어느 한 시점, 한 계절에 국한되지 않고 사계절의 변화, 세월의
흐름을 전제하여 설정되어야 하는 이유가 될 것이며, 우리가 이를  가칭 ‘생명예술’이라 개념하여 객관화,
일반화 할 수 있다면 예술로서의 분재의 한계점은 오히려 예술로서의 차원과 지평을 확대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작가의 의도가 강력한 메시지로 표현된 문학이나 미술작품들은 단순한 미학적 체험을 넘어서는
‘제2, 제3의 체험을’ 관객이나 감상자에게 유발하는 강력한 힘으로 작용하고 이러한 속성이 평론가들에 의해
그 작품의 예술성을 높이는 요인들로 평가된다.

그렇듯 분재 또한 '하나의 생명체를 다루는 예술'이라는 차별성이 다른 어떤 예술작품도 유발할 수 없는 힘을
갖고 감상자들로 하여금 단순한 미학적 체험을 넘어서는 ‘제2, 제3의 체험’을 가능케 한다면 이러한
속성들 또한 반드시 정리되고 구명되어 분재가 하나의 예술로, 예술작품으로 ‘보다 더 폭넓고 깊이있게
이해되고 즐길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다.  

둘째는 분재미를 구성하는 핵심적 기준 또는 요소들이다.

분재미를 구성하는 요소중 안정감, 통일감, 균형과 조화 등은 다른 많은 예술장르의 작품들에서도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요소들이다. 그러나 고태미, 자연미 등의 분재미를 구성하는 몇몇 요소들은 다른
예술장르에서는 없거나 제한적으로 적용되고 있어 분재만의 차별적인 예술적 요소라 해도 무방한 것들이다.

그러나 단순히 차별적 요소라 하여 그것이 분재의 예술성을 담보하는 객관적 근거로 작용하지는 못할 것이다.
고태미, 자연미의 정의와 기준, 작가 또는 외재적 변수에 의해 이들이 표현되는 과정 등이 특정의 틀 속에서
분석되고 기술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형식주의 예술론에서 논의되는 중점적 기준들을 통해 분재의 예술적 속성을 논하는 도구로서의 차용
가능성을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유기적 통일성이다.
형식론자들이 말하는 유기적 통일성이란 고등의 생명체가 지닌 것과 동일한 유기적 통일성으로 부분과 부분이
서로 유기적 관계를 이루고 있어 어느 한 부분을 제거하는 경우 전체가 제대로 기능을 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구태여 부언하지 않더라도 유기적 통일성은 분재미의 핵심 중의 핵심이다. 밑둥(근장)과 주간과 가지의
유기적 통일성, 열매 또는 꽃과 가지의 배열, 엽성과 수형, 목질의 속성과 수형, 왜성/속성 등 나무의 성장성과
수형 등과 같은 몇몇 가지의 예만으로도 유기적 통일성이란 기준이 분재작품의 창작과정과 완성 단계에 있는
분재작품의 평가에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란 것은 바로 드러난다. 이들 요소중 어느 한가지가 제거될 때, 분재
작품이 표현하는 아름다움은 제대로 기능할 수 없을 것이다. 
  
둘째, 복합성 혹은 다양성이다
‘예술작품이란 단조롭고 일률적인 부분들이 모여 형성된 것이 아니라, 다양하고 복잡한 요소들이 모여
통일체를 이룬 것이란 가정을 전제’하는 것으로 '다양성 속의 통일성'과 '통일성 속의 다양성'이라는
예술작품의 평가 기준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이 또한 분재작품의 예술성을 논하는 기준으로 부족함이 없다. 혹자는 분재를 일컬어 ‘한 가마니의 참깨 알’
만큼이나 많은 변수들이 작용하는 창작 활동이라고 한다. 일본에서는 전형적인 기준과 일탈된 부분이 많은
분재작품이 때로 ‘국풍상’을 수상하는 경우가 있다. 다양하고 복잡한 것에 보태 살아있기까지 한 분재는
무수히 복잡하고 복합적인 요소들이 창작의 과정에서 반영되어야 하고, 그 결과로 보여지는 작품들 또한
해석의 폭과 깊이에서 폭넓은 유연성이 적용되어야 하는 예술적 대상이 아닐까 한다.

셋째, 주제와 주제의 변조다
작품 안에 존재하는 가장 지배적 요소를 주제라고 할 때, 주제는 작품의 각 부분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변조될 수 있음을 말한다.

이 부분은 사고와 연구가 많이 필요한 부분으로 판단된다. 송백이나 상엽이나 상화, 상과와
같은 분재의 구분은 그 자체의 중요성이 매우 높은 하나의 주제일 것이다. 또한 근장의 역동감이 분재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주제가 될 수도 있고, 주간의 섬세하고 연약한 빨림이 문인목을 구성하는 지배적 요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소재를 작수하는 과정에서 작가가 갖게 되는 주제와, 완성된 작품을 통해 감상자가 느낄  주제는 다를 수도
같을 수도 있다. 그러나 창작 과정과 감상 과정, 비평과 평론의 과정에서 공히 주제를 찾아내고 주제를 중심으로
작품을 어떻게 전개할 것이고 전개 되었는가 하는 요소는 분재작품의 예술적 정체성을 강화해 줄 것이 틀림없다.    

넷째, 전개다.
시간예술 작품의 경우 여러 요소들이 일정한 순서에 따라 배열되는 것을 의미한다. 순서가 바뀌면 작품
자체의 미학적 완성도가 깨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이 개념은 중시된다.

이 요소는 시간예술의 속성을 갖지 못하는 분재의 속성상 적용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다섯째, 균형이다.
예술작품의 성공도는 다양한 부분들이 얼마만큼 전체적으로 조화롭게 배열되어 있는가에 따라 평가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

균형의 첫 번째 요소인 유기적 통일성을 뒷받침하는 기준이 될 것이다. 가지의 숫자와 위치,  근경과
수고의 비율, 수고와 수폭의 비율, 주간과 가지의 굵기, 제1지와 2지의 비중, 수심의 위치와 비중,
분재수와 화분의 색조와 크기 등등 헤아릴 수 없는 부분과 부분의 조화들이 분재작품의 균형, 안정감을
표현하는 요소들일 것이다.

간략하지만 형식주의 예술론에서 중점적으로 거론되는 요소들을 분재의 예술적 속성을 기술하는데
커다란 무리는 발견되지 않으며, 향후 다양한 시도가 가능하리라 판단된다.
분재의 예술적 속성을 분석하고 기술하는 사례가 누적되는 과정을 통해 다른 예술 장르에서 기왕에
적용되고 있는 분석 툴들의 무리한 부분들과 개념들은 수정되고 보완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도구가 확보된다면 창작에 몰두하는 작가의 창작 세계와 감상자들의 미적 체험의 세계 모두에 제공하는
폭과 깊이가 깊고 넓어질 것이다.

4) 분재 비평과 분재 평론

예술비평과 예술철학이란 것이 있다. 예술비평의 목적은 ‘특정의 예술작품을 보다 더 폭넓고 깊이 있게
이해하거나 즐기는 데 있으며’, 예술철학의 목적은 ‘비평가들에게 예술비평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개념적
기초를 마련해 주는데 있다’고 한다. 요컨대 예술철학자들은 비평 활동에 근거가 되는 기본 개념들을
검토하거나, '예술', '미학적 가치', '표현' 또는 비평가들이 사용하는 그 밖의 개념들을 규정하고 정립함으로써
비평가들이 보다 더 조리있고 명료하게 예술작품에 대해 논의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것이다.

필자는 분재비평 또는 분재평론이 분재발전을 위한 불가결의 요소라는 신념을 갖고 있다.
그 목적이 분재작품을 보다 더 폭넓고 깊이 있게 이해하거나 즐기는 데 있기에 분재 작가에게는 분재의
예술적 속성을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내어 분재의 예술성을 높일 수 있도록 할 것이며, 감상자에게는
보다 많은 앎을 제공함으로써 감상의 안목을 높이는데 기여할 것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러한 것이 없어도 나무는 죽지 않는다거나 분재를 잘 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무지와
몽매에서 오는 매우 소아적인 발상일 뿐이다.  

필자는 또한 어느새 우물 안 개구리가 되고 만 한국 분재가 세계적인 분재 선진국에 진입하고 궁극적으로
일본 분재를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론으로서 서둘러 분재비평, 분재평론의 기반을 닦아야 한다는
신념을 아울러 갖고 있다.

다양한 논객들의 비평과 평론을 통해 한국적 분재론을 정립하려는 시도를 계속하는 한편, 이를 바탕으로
한국분재 고유의 예술적 특성을 창조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개별적인 분재작가들은
부정적인 작품 평가조차 작가 정신을 고양하고 보다 치열하게 작품 창작에 몰입하는 동기로 삼아야 할 것이며,
취미인들 또한 다양한 시각의 비평과 평론을 통해 자신의 경험과 안목을 높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현상들이
상호 유기적 연관성을 갖출 때, 보다 수준 높은 비평과 평론에 필요한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연구활동이
자극되고 유도될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웹 상에서 분재원 실명거론조차 논쟁을 일으키고 문제시되는 현실에서 파괴력이 보다 큰 비평과
평론이 과연 가능한 일이며 가능하다 전제할 때는 어떠한 방식으로 수행되어야 하는 것일까?

우선은 분재평론가가 양성되어야 할 것이다. 분재에 관한 이론(분재의 이론이 존재하는지 의문시 되지만) 과
지식으로 탄탄히 무장된 평론가의 등장은 예술성과 작품성이 높은 분재작가와 분재작품의 발굴을 단축할 것이다.
우리의 현실은 분재작가 스스로 자신을 소개하고 자신의 작품을 평가 받을 수 있는 채널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평론가의 등장을 통해 우회적이고 간접적으로 작가와 작품을 발굴하는 것이 현실적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분재 평론가의 양성과 관련하여 우리 분재계가 경계해야 할 점은 경력 중시 풍조이다.
분재가 하나의 예술로 분재가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인정되어야 한다는데 동의한다면 경력은
하나의 고려사항일 뿐 전부가 되어서도 안되며 될 수도 없다는 것에도 동의해야 할 것이다.

평론가가 분재 작가일 이유도 없다는 점도 동의를 필요로 한다. 평론과 작품창작은 관련이
있을 뿐 기본적으로 별개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한 움큼도 안 되는 지식과 깨달음으로 평생을 노력한다고 해서, 시대를 더디 읽고 사조를
더디 이해하는 감각을 갖고 평생을 매달린다고 해서 예술성이 탁월한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 있다면
그것은 우연일 것이다.  

경력의 장단에 상관없이 탁월한 재능을 갖는 분재작가와 분재 평론가의 등장을 환영하고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는 작가와 평론가에 의해 창작된 작품과 평론의 가치 또한 온전히 수용되는 풍토가  조성되어야 할 것이다.

평생을 해도 예술적 차원에 접근하지 못할 가능성과, 불과 수년의 경력만으로 탁월한 작품을 창작할 가능성
모두가 똑같이 인정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다음으로 분재 비평과 평론의 방법이 마련되어야 한다.

비평 또는 평론이란 ‘어떤 특정한 작품에 대해 '서술'(敍述)하고 '평가'(評價)하는’ 것이다.
(필자주:평가란 가치를 판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분재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누가 평가할 것인가를 우려하고 있다. 그러나 평가의 과정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누가’ 가 아니라 ‘무엇과 어떻게’ 라는 점이다. 즉 객관적 지표들과 객관성을 방어하는 방법론이
더욱 중요하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가치판단(評價)이란 특정의 대상에 대해 무언가를 서술하는 가운데 만들어진다. 가치판단을 할 때
조심해야 할 부분은 자신의 취향, 선호, 좋고 싫음 등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인 취향에 의존하는 가치판단은 '감상적(鑑賞的) 판단'이라고 하여 비평과 평론에서는 이를
핵심으로 여기지 않는다. 비평과 평론의 핵심은 기준과 법칙에 의거하여 가치를 판단하는 '규범적 판단' 이다.
특정의 작품에 대한 규범적 판단의 중요한 원칙은 ‘객관적이고 검증 가능한 것’ 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이 작품은 주간의 빨림이 양호하며, 수고와 수폭의 비례가 좋고, 1지 2지를 비롯한 가지의
위치와 굵기가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이루고 있다”

‘이 작품은 주간 밑동의 직경이 4.5cm 로 수고 12cm 의 수심에 이르기까지 일률적인
가늘어짐과, 수고의 1/5 위치에 직경 1.3cm 주간으로부터 78도의 하방 기울기를 가진 제1지와,
수고의 1/3 위치에, 직경 1cm 로 제1지와 같은 기울기의 제2지가 주간의 일률적인 가늘어짐과 더불어
작품의 안정성을 구성하는 제1의 요인이다. 수폭은 18cm 로 수고와 4:6의 비율로 배양하여 불과 5개의
가지를 갖고 있는 소품이면서도 잔가지의 영역을 충분히 확보함으로써 노거수의 수격을 표출하는데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  

두 글 모두 개인적 취향은 담겨있지 않지만 전자가 직관적인데 반해 후자는 전자에 비해 객관적이며
검증 가능하도록 기술한 차이를 볼 수 있다. 규범적 판단에 의한 평론이란 아마도 후자에 가까운
서술방식을 취할 것이다.

물론 기준과 법칙 자체에 대한 논쟁의 가능성도 예상할 수 있으며, 가치의 상대성이나 다양성의 문제도
제기될 것이다. 하지만 근장, 주간, 가지와 연관하여 모든 분재작품에 적용되는 정석적인 기준들과,
상처의 유무, 수종 별로 적용될 수 있는 꽃의 숫자와 크기와 색조, 열매의 충실도, 고태미를 표현하는 요소,
화분과 수목의 형태, 색상, 크기의 조화 등 이미 분재의 역사를 통해 입증되고 객관화된 기준들이 적지 않음에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이다.

논쟁의 소지가 있어 객관화가 필요한 기준 또한 적지 않음에 주의한다면 분재 비평과 평론의 방법론은
점차적으로 세련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규범적 판단에 준거하여 기술된 비평과 평론들이 수종 별, 규격 별로 누적되었을 때, 이에 대한 통계적 분석이
후속된다면 명품으로 평가되는 작품에 내재된 공통 요인을을 발견해낼 수 있을 것이며, 그렇지 못한 작품들의
결격 요소들 또한 무엇인지도 드러날 것이다. 이러한 작업들이 점차적으로 분재 비평의 기준들을 확대하고
분재 비평의 영역과 지평을 넓힐 수 있을 것이다.  

5) 우리 모두가 소중한 자산

필자는 ‘분재작품을 보다 더 폭넓고 깊이 있게 이해하거나 즐기는 위한’ 분재비평과 분재평론의 목적을 다시
한 번 주지할 것을 요청한다.

경험이 깊고 안목이 높은 분재인들과, 명품 소장가들과, 우량한 소재를 배양 중인 분재인과,
질, 량을 떠나 분재 행위 그 자체를 즐기는 취미인과, 분재 기술자들과, 이제 막 분재 세상을 기웃거리는
입문자들과, 열정을 갖고 작품 창작에 몰두하는 분재작가들과 분재 관련 용품을 취급하는 유통업자들까지….
모두가 한국 분재발전을 위한 소중한 자산들이다.

선각자와 개혁자들의 생각과 행동이 한국 분재를 우물 안에서 밖으로 꺼낼 수 있는 일차적인 동력이 될 것이요,
원로와 중진과 중견들의 지지는 이차적인 동력이 될 것이며, 숫적 다수이며 광범위한 계층으로 구성된 초보와
입문자들은 미래를 위한 동력이 될 것이다.

우리에게도 뛰어난 분재작가와 작품들이 있으나, 문제는 겉으로 드러나기 보다 감춰져 있다는 점도 시급한
개선의 과제다. 고가의 애장품이나 창작의 열정이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거나 취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난도되는 것은 소장자에게나 작가에게나 유쾌한 일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논쟁을 우려하기에 앞서 가깝고 먼 미래 모두를 위해, 먼저 많은 것을 버리고 변화의 길 위로 나서야
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언급하기는 껄끄럽지만 겉 멋을 버리고, 자존의 의미를 되새길 필요도 높다 여겨진다.  

기무라라는 일본 분재계의 대가 뒤에는 근대분재라는 미디어가 있었고, 역으로 근대분재의 지속적 발전은
분재계의 대가들이 지속적으로 육성된데 기인했다는 일본 분재계의 ‘선순환적 가치사슬 (value chain)’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필자주)
예술비평과 예술철학에 문외한인 필자는 본 절의 기술을 위해, Jo. Hospers 글 | 張敬烈
참조 집필의 “예술철학”의 내용에 상당 부분을 의존했음을 밝힙니다.


오영택
제 글 올리기가 많이 늦어졌습니다.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 경황이 없었던 점 이해를 청합니다.

이번 호 목차는 본래 ‘분재의 구성요소’ 였으나 ‘분재의 예술성’으로 제목과 내용을 수정하였습니다.
분재의 구성요소를 기술하는 과정에서 제2장과 제3장을 통해 향후 기술하게 될 내용과의 중복이 발견되고,
필자가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는 분재의 예술성에 대한 내용을 기술할 마땅한 항목이 없던 것이
근본적인 수정의 이유입니다.

몇 일간의 비로 무더위가 가셨습니다. 모두들 건강하시고 즐거운 분재생활 하시기 바랍니다.
2005-08-11
17:40:50



김석헌
잘 읽어 보았습니다.
무더위 뒤에 장대비로 한 여름에 여유가 생기는 군요.
오영택님도 건강에 유의하시고 앞으로도 좋은글 부탁드립니다.
2005-08-11
22:30:32



주상규
예술의 일반론을 분재에 접목하려는 님의 시도에 박수를 보냅니다.

님의 글 접하면서 많이 놀랐습니다.
자신이 좋아 몰입하는 취미의 영역에서도 이런 시도가 있다니! 그리고 반가웠고요.
아울러 10여편의 글을 제 블로그에 퍼갔음을 뒤늦게 고백합니다.
먼저 양해를 구했어야 하는데..

햇빛이 그리운, 때 아닌 팔월장마이네요. 건필하십시오. -- 분재세계의 문고리를 막 잡은 초보 드림 --
2005-08-12
10:18:50



안균호
수고 많았습니다. 그리고 잘 읽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을 만들어 재 심독하려 합니다
2005-08-12
10:47:04

수정


일지매
님의 글을 읽으면서 만시지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오영택님이 추정한 250개의 분재원이 1만명(분재원 한 곳당 40명의 취미인)에 불과한 현실에서, 그리고 분재를 하는 분재인들이 대부분 예술을 한다는 생각보다는 먹고 살기 위해 몸부림을 치다가 결국은 분재원의 문을 닫는 취약한 상황 아래에서 님이 의도하는 바는 너무도 멀고 힘들다는 생각입니다. 닫혀있는 사람들의 맹목적인 부정적 사고가 판을 치고 익명을 이용한 악플이 감정적 대응으로 일관하는 현실에서 누구나 인정하고 공감하는 분재 평론이 과연 가능할 것인지 하는 의문도 들지만 분명 가치있는 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건필을 기대합니다. 2005-08-12
10:48:08

수정


안병철
초보의 눈으로 몇 몇 분재원을 다니다 보니 분재원마다 교과서와 같은 엇비슷한 수형, 소수의 한정된 종류의 나무 등 개성이 다소 떨어진 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분재가 예술인가, 예술이라면 과연 어떤 면에서 예술이 될 수 있으며, 그러한 판단의 기준을 무엇일까라는 의문이 막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던 참에 오영택님의 글을 보니 제가 갖는 의문이 저만의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되었습니다.
오영택님의 열정에 찬사를 보내며, 폭넓은 생산적인 토론을 기원합니다.
2005-08-12
11:55:26



주상규
손수 저의 섬으로 찾아오셔서 답글 남겨주셨더군요. 거듭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저 위의 쪽글에 링크 걸어놓았던 제 블로그 주소는 수정했어요. ㅎㅎ
2005-08-12
12:07:04



이종삼
저는 한목회 준회원 이종삼입니다.
어제는 10여명이서 자신들이 기르는 나무이야기며 나무에 관하여 주변이야기들을 나누는 분재모임엘 다녀왔습니다. 보통은 식당에서 모임을 갖는데 더러는 회원들의 가정에서 기르는 분재를 앞에 두고 모임을 갖기도 합니다. 그때마다 느낌은 너무도 편안하고 즐거운 자리라는 겁니다. 회원들 중에는 교수님도 한분 있고, 시쳇말로 잘나가는 사업가도 몇 분 있으며 직장인도 있습니다. 또 값비싼 나무의 소장자도 있고 값싼 나무 10여분을 애지중지 소장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무를 앞에 두고는 직위의 고, 하도 소유의 유, 무도 따로 없습니다. 오직 순서가 가려진다면 나이의 많고 적음이 있을 따름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그만큼 순수하게 나무 가꾸는 것을 즐기고 그 즐거움을 배가시키기 위해 동반자를 찾는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우린 학교에서 음악도 배우고 미술도 배우며 더러는 학원에서 악기를 배우기도 합니다. 그리고 일부는 살면서 그것을 취미로 삼기도하지요. 그러나 모두가 예술을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는 어느 분야건 취미로 하는 데는 개론(槪論) 정도면 처음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다음은 어우러지면서 깊이를 더해갈 것이고, 또 더 깊이 하고픈 이는 전문가의 길을 찾으면 될 테니까요. 한목회의 슬로건이 “순수취미 분재인들의 모임”이라고 홈에 쓰여 있기에 조금 가벼운 주제였으면 하는 바램에 이글을 써봅니다.
2005-08-12
13:07:31



최두현
안녕하세요? 위 글을 읽고 댓글을 다니 내용이 날라가버려,
아이구 빨리 마무리 지어야지.

우리나라에는 분재 잡지 한 권 발행되지 못하는 현실을 평소 늘 안타가워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인터넷 상에서 의견들을 주받을 수 있어 천만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위 부분에서는 "밑둥"이라 하셨기에 착각하시는 것인가 했는데, 뒤 부분에는 밑동이라 되어...
다섯째, 균형이다. 에서 분석 툴들의...
鑑賞的에서 感인가 하여 찾아보기도...
5) 우리 모두가 소중한 자산 에서 이해하거나 즐기는 위한...

관심의 표명으로 잔소리 첨부했습니다.
건강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2005-08-13
07:37:23



취미인
예전에도 그러 했고 지금도 저 자신에게 끝없이 던지는 질문 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분재를 예술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답을 요구 하면 ????
남들이 예술이라 하니까...
이런식의 대답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만의 확실한 예술관(분재관)을 가지고
생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 됩니다.
물론 자신만의 분재관을 정립하기 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 입니다.
또한 상업 분재와 예술 분재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판매를 목적으로 생산되는 나무들은 미적 요소들을 조금 덜 포함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빨리 생산해서 많은수를 판매 하는 것을 목적으로 육성 되는 것이고요
이에 반해 예술 분재의 경우 비록 속성이라 하더라도 상업용 분재와는 비교할수도 없을 만큼의 정성이 들어가 있습니다.
더불어 많은 미적 요소들을 지니고 있으며 나무를 키운 사람의 생각이 들어가 있습니다.
자타가 감탄하는 그런 나무들은 많은 미적 요소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감상하는 사람이 분재를 모르는 사람 일지라도 내재되어 있는 미적 요소들에 감탄을 자아내는 것 입니다.

분재가 예술이라 불리는 까닭은
화분안에 존재하는 나무에서 자연의 미적 요소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 입니다.
그리고 작가의 생각과 혼이 담겨 있기 때문 입니다.

분재의 미적 요소들을 찾아 내고 그것을 발전시키는 일은 분재에 관심이 있는 많은 분들의 몫이라 생각 됩니다.
2005-08-13
19:17:43

수정


아는만큼
음악도 미술도 온갓 예술들이 아는만큼 보이는게 아닐런지요
음악에 전연 조예가 없는 사람이라면 명곡도 교향악도 좋은줄 모르게 마련
하여 자기에 수준에 맞는 음악을 듣게 마련이고 오히려 대중가요를 더 훌륭한 음악이다? 라고 .. ^^
미술도 그렇지 않은가요? 참 한목회에 화가분 한분 계시지요 그분이 계셔서 미술은 이야기를 하기가 좀..

어느사람은 명곡을 들으며.. 또 어떤이는 크래식을 들으며.. 또 다른사람은(저같은 자) 대중가요를 들으며(그것밖에 들을줄 모름으로)제일로 훌륭한 음악인줄 아는 이도 있지요,

본인이 잘 모르면 알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하겠습니다
아는만큼 보이고 들리고 느끼는 이치가 아닐런지요.
2005-08-13
20:01:43

수정


다솔 분재원
예술이고 뭐고 논하기전에 무엇 보다 인간의 됨데미가 그리고 인간으로 기본적인 것을 갖추고나서 예술도 바로보이는법이지요 모든 예술품에는 그인간의 오감을 불어넣기 때문에 첫제 심성이 고와야 그리고 인간성인가요 매사에 욕심을 버리면 바 보인로다고 했지요 먼저 나을 따듬고 예술을 논함이 연세 연만하신데 아휴 49세면 상당한 년세이신데 몸조심하세요 2005-10-07
21: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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