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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호]
잡종 되기
장석원
1.
Rage Against The Machine(이하 RATM)이라는 미국 밴드가 있었습니다. 1990년대, 얼터너티브 문화의 극점에서 탄생한 이 좌파 밴드는 체 게바라의 초상화를 라이브 무대에 걸어두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이들은 혁명을 선동하는 자극적인 연주와 가사로 한 시대를 풍미했지요. 재미있는 것은 그들의 가사 내용과 상관없이 대중들이 환호했다는 점, 마이너 레이블이 아닌 메이저 레이블에서 그들이 당당히 앨범을 발매했다는 점입니다. 영화 『The Matrix』 시리즈의 주제가로 그들의 작품이 사용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기도 한 그들의 음악성은 훌륭했습니다. 음악성이 뛰어나니까 당연히 성공했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 그들을 언급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다른 것입니다. 그들이 정치성과 음악의 절묘한 결합을 통해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했을 때, 자본이 그들을 상품으로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없었던 음악이었으니까요. 자본은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받아들이고 빨아들입니다. 이윤 앞에서 이념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미국의 음악 자본이 RATM을 혁신적인 상품으로 판매했습니다. 어쩌면 밴드 RATM은 다음 세대의 구매력에 호소하는 잘 만들어진 새로운 상품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자본의 입장에서 보면, RATM만큼 놀라운 자극으로 무장한 밴드는 없었으니까요. RATM 멤버들이 이 모든 것을 읽었고, 따라서 잘 짜여진 각본에 따라 조목조목 신상품이 지녀야 할 가치들을 철저하게 준비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새로움이 아닙니다. 자본은 모든 것을 상품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새로운 예술은 그것이 어떤 형태를 띠든 이윤의 도구가 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상황입니다.
현빈 신드롬을 불러왔던 드라마 「시크릿 가든」이 떠오릅니다.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드라마의 세부를 말하고자 하려는 의도는 없습니다. 저는 이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읽었던 시집에 대해 말하려고 합니다. 주인공이 서가에서 꺼내 읽던 한 출판사의 시집이 클로즈업되었습니다. 시청자들은 그날부터 현빈의 손에 들려있던 시집은 물론, 잠깐 비췄던 책꽂이의 시집까지 구매했습니다. 화면에 노출되었던 시집 전부가 베스트셀러 순위에 올랐습니다. 이러한 저간의 사정을 두고 미디어의 위대함을 말한다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이겠지요. 돈 많고 잘 생긴 주인공이 지적인 매력을 갖추기 위해서 시집을 펼쳐 읽는다는 사실이 흥미를 끌었습니다. 이 드라마의 작가는 서울예술대학 재학 시절 시집을 읽으며 순수하게 문학에 투신했던 기억이 가장 행복했다고 인터뷰했습니다. 대중이 원했던 것은 시가 아닐 것입니다. 시로 대표되는 고급문화의 이미지를 소비하고 싶은 욕망이 대중들에게 시에 대한 선망을 불러일으킨 것은 아닐까요.
이러한 현상을 소통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저는 [소통]이라는 현상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과 저것 사이에 단절이 있었습니다. 이 단절이 해소되고 서로 다른 이것과 저것이 잘 통하게 되었다는 정도로 범박하게 [소통]을 규정지으려 합니다. 대중문화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그 모든 것이 통하고 있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크로스오버(cross-over)가 있었고, 퓨전(fusion)이 따라왔고, 이제는 하이브리드(hybrid)를 말하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두 개가 [소통]한다는 측면에서는 비슷한 양상을 일컫는 말이지만, 엄밀히 말하여 조금씩 차이를 지니는 이러한 용어들을 구분하는 기준은 [섞이는 혹은 섞는] 행위의 주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크로스오버는 서로가 서로를 받아들이는 것이구요. 퓨전은 서로 다른 것을 어떤 다른 주체가 하나로 만드는 것이거나 하나가 다른 하나를 주도적으로 융합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이브리드는 두 주체가―서로 주도권 없이―동등한 입장에서 하나의 주체로 통합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듯합니다. 비슷한 주체가 서로에게 영향 받기, 월등한 주체가 서로 다른 두 개를 통합시키기, 동등한 두 주체가 하나로 변환하기.
우리가 지금 말하려고 하는 것은 소통입니다. 대중문화에서 우리는 무엇을 찾아내야 할까요. 그것도 시를 쓰는 입장인 저에게, 대중문화의 소통적 국면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시인들은 대중문화라는 거대한 지층에서 어떤 것을 캐내야 할까요.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변은 우리 모두가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대중문화의 몇몇 장면들을 언급해보는 것으로 제가 떠올린 의문에 대한 답변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2.
미국의 힙합 뮤지션 Kanye West의 2010년 앨범 『My Beautiful Dark Twisted Fantasy』는 평단과 그래미상의 화려한 조명을 받은 작품입니다. 감상용 힙합이 탄생한 것입니다. 거리의 음악 힙합이 좋은 사운드 시스템 앞에서 우아하게 앉아 들을 수 있는 음악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이 작품에서 주목할 것은 카녜 웨스트의 감각입니다. 샘플링을 통해 존재하는 모든 텍스트를 이종교배시킬 수 있는 힙합의 장르적 특성을 감안해봅니다. 널리 알려진 클래식 선율을 차용했던 것은 옛날 일이었습니다. 카녜 웨스트는 앨범의 주제가이자 1번 트랙 「Dark Fantasy」에서 영국의 천재적인 아트록 뮤지션 Mike Oldfield를 갖다가 씁니다. 마이크 올드필드의 1983년 앨범 『Crises』의 3번 트랙 「In High Places」의 한 구절을 샘플링합니다. 이 노래의 보컬은 정교한 연주력과 웅대한 곡 구성으로 유명한 영국의 아트록 밴드 Yes의 보컬리스트 Jon Anderson이 맡았습니다. 2010년대의 음악 속에, 힙합 속에, 1970∼80년대의 영국 아트 록이 삽입되었습니다. 힙합이 플러그를 꽂을 수 없는 음악은 없을 것입니다. 영미 문화권의 고전에 해당하는 작품들로 손을 뻗어 자신의 음악에 아트 록의 기운을 불어넣은 카녜 웨스트는 영민합니다. 젊은 힙합 뮤지션이 자신들의 문화적 자산을 흡수하여 새로운 음악으로 변형시키는 광경은 세대 간 소통의 한 예를 보여줍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예를 들 수 있습니다. 아이돌 그룹들이 부르는 80년대 노래들이 그 예입니다. 빅 뱅과 이문세의 「붉은 노을」이 대표적이겠지요. 이 노래들은 리메이크 수준이기 때문에 카녜 웨스트와 비교하기는 힘들 듯합니다. 카녜 웨스트는 같은 앨범의 다른 트랙 「Power」에서 21세기의 절망한 미국 유색인종에 대해 말합니다. 여기서 그는 King Crimson의 1969년 앨범 『21st Century Schizoid Man』의 동명 타이틀 곡의 한 부분을 발췌합니다. 킹 크림즌의 베이시스트 그렉 레이크의 왜곡된 목소리로 들려오는 {21세기 정신분열증 남자}가 그것입니다. 카녜 웨스트가 난해하고 전위적인 킹 크림즌의 사이키델릭한 프로그레시브 음악을 컨텍스트로 활용하는 예입니다.
카녜 웨스트의 천재성을 말할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저의 관심은 새로운 음악을 만들기 위해 경계 없이 전진하는 대중음악의 놀라운 포식捕食 양상입니다. 자본의 운동 방식과 유사한 이러한 아메바적―하나의 세포가 다른 하나의 세포를 먹어 이전과 전혀 다른 세포로 변환하는―운동은 예술의 무한한 창조 가능성을 열어 보이는 유력한 증거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시가 새로운 것을 획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시는 이러한 현 시대의 문화적 양상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 것일까요.
3.
컨트리 뮤직으로 유명한 가수 Johnny Cash가 죽었습니다. 그가 최후로 남긴 음악은 「Hurt」입니다. 늙어 죽어가는 쟈니 캐쉬의 짙은 허스키 보이스는 삶의 신산한 고통을 고스란히 전달합니다. 트렌트 레즈너의 원맨밴드 Nine Inch Nails의 원곡을 쟈니 캐쉬는 재창조합니다. 인더스트리얼 음악의 주창자이자 산업시대의 기계음과 소음을 음악의 선율로 변이시킨 천재 트렌트 레즈너의 고통스럽고 음울한 세기말적 사운드에 쟈니 캐쉬는 세월의 통한痛恨을 이겨 붙입니다. 끊어질 듯한 그의 목소리는 죽음을 앞두고 인생 전부를 돌아보는, 고즈넉한 슬픔에 잠긴 한 영혼의 무게를 수식 없이 표현합니다. 장르로 보면 컨트리 뮤직과 인더스트리얼 뮤직이 소통하는 극적인 장면이라 하겠습니다. 노인 가수 쟈니 캐쉬가 자신이 껴안고 있는 생의 고통을 젊은 아티스트의 음악에 잔잔하게 풀어놓고 있는 이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한 사람의 목소리에 지나간 과거 전부가 어떻게 용해되어 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소통이라고 할 때, 세대를 떠올리게 되는 일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선배가 후배와 소통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전세대가 후세대와 소통하는 순간, 그 예술가의 작품은 새로워질 것입니다. 문제는 누가 누구와 소통하느냐 하는 선후 개념이 아닐 것입니다. 소통하여 역사를 기획하는 일, 통시성을 통해 공시성을 획득하는 일일 것입니다. 명예로운 전통의 계승과 새로운 전통의 창조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순간을 쟈니 캐쉬의 재가 되어 부서져가는, 모든 것을 삼키려는 검은 목소리에서 경험합니다.
4.
마블 코믹스는 많은 영화의 콘텐츠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지난 봄에 개봉되었던 『토르:천둥의 신』 역시 만화를 영화로 만들었던 작품입니다. 북유럽 신화에 기반을 둔 영웅 만화 [토르]가 컴퓨터 그래픽 기술을 바탕으로 하여 블록버스터로 재탄생했습니다. 신의 아들 토르가 초강력 무기인 해머 [묠니르]를 휘두르며 악의 무리들을 물리치는 [만화 같은] 내용으로 이루어진 텍스트. 당연히 어른들에게는 황당하다는 반응이 자연스러웠죠. 그런데 영화의 배우들을 훑어보면 [어라 이런 유명한 배우들이 왜 이 영화에 출연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여주인공에 나탈리 포트먼, 절대신 오딘 역으로 나오는 안소니 홉킨스, 과학자 역의 스텔란 스카스가드 등등이 이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입니다. 감독은 캐네스 브래너입니다. 캐네스 브래너는 세익스피어 전공 배우이자 감독이라고 불리웁니다. 안소니 홉킨스 같은 명배우들이 감독의 역량을 믿고 블록버스터에 출연한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 눈여겨 볼 것은 화려한 CG 화면이 아니었습니다. 오만했던 신의 아들이 인간 세계에서 시련을 겪고 마침내 절대신의 후계자가 된다는 줄거리도, 신의 세계와 인간 세계를 이어주는 세계수世界樹 이그드라실 같은 신화적 판타지도 아니었습니다. 감독 캐네스 브래너는 SF 액션 블록 버스터 뒤에 가족 드라마를 숨겨 놓았습니다. 아버지와 두 아들 사이의 갈등이 서사 전개의 동력으로 작동되는 영화였습니다.
절대신 오딘에게는 두 아들이 있습니다. 장남 토르와 차남 로키는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죠. 토르는 직선적이고 단순하고 책임감 강하고 판단보다 행동이 빠른 친구입니다. 로키는 예민하고 침착하고 섬세하고 판단이 신중하죠. 형을 존경하고 사랑했으나 형보다 무엇인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로키는 형을 도와 신의 나라를 강건하게 이끌겠다는 마음도 갖고 있었지만,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더 강했습니다. 형보다 낫다는 평가를 받고 싶은 마음이었죠. 언제나 자신보다 뛰어난 형을 이겨보겠다는 야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오딘은 맏아들을 당연히 후계자로 생각합니다. 성년이 된 두 아들들. 마침내 왕위 계승식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신의 제국 아스가르드에 새 왕이 탄생하려는 즈음 적들이 침입합니다. 토르의 활약으로 적의 내침을 물리친 아스가르드. 토르는 아버지 오딘에게 적을 섬멸하자고 제안하지만 오딘은 거절합니다.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아들 토르가 아버지의 명을 어기고 동료들과 함께 몰래 적의 나라에 잠입해서 전투를 벌이다가 위험에 빠지자 절대신 오딘이 나타나 토르 일행을 구합니다. 분노한 오딘이 토르의 능력을 빼앗고, 절대무기 묠니르의 힘도 앗아버립니다. 평범한 인간이 된 토르는 인간 세계로 귀양갑니다. 제인 일행을 만나 좌충우돌 소란을 겪다가 토르는 제인과 사랑에 빠집니다. 형 대신 아버지의 권력을 쥐게 된 로키는 인간 세계의 형을 처단하고 자신이 왕위에 오르기 위해 형을 공격합니다. 인간 세계는 위험에 빠지고, 토르는 자신에게 부족했던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깨닫고는 인간들을 위해 희생을 실현합니다.
이러한 스토리는 토르가 인간을 통해 얻은 사랑과 희생이라는 가치의 소중함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화는 차남 로키와 아버지의 갈등을 중심으로 삼습니다. 돌아온 토르, 깨어난 아버지, 그리고 로키는 담판을 짓습니다. 두 아들이 나락으로 떨어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아버지는 장남을, 장남은 차남을 붙잡고 있습니다. 차남 로키는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었다고, 그 이유 때문에 자신이 모든 계략을 꾸몄다고 말합니다. 로키는 아버지에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자신이 형보다 뛰어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지 않았냐고 합니다. 오딘은 냉정하게 [너는 아니다]라고 말하고 토르가 후계자라 선언합니다. 로키는 눈물을 흘리며 죽습니다. 사실 로키는 오딘의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로키는 적의 아들이었죠. 전투에서 승리한 오딘이 갓난아기였던 로키를 데려다 키웠던 것입니다. 성인이 된 로키는 이 사실을 알게 된 후에 자신의 핏줄에 대한 혐오감을 느낍니다. 로키는 아버지이자 절대신 오딘의 인정을 더욱 갈구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감독 캐네스 브래너는 아버지와 장남과 차남으로 이루어지는 갈등의 삼각형을 이 영화의 중심에 설치했습니다. 세익스피어 비극의 전형적인 요소들을 영화의 중심 서사로 풀어내는 감독의 재능이 빛나는 영화였습니다. 눈이 휘둥그레지는 비쥬얼 아래에 감춰져 있던 부자지간의 갈등과 화해라는 고전적 영웅 일대기가 인간 삶의 원형을 응축시켜 보여줍니다. 문학적인 비극 요소와 만화적인 상상력과 영화의 테크놀러지가 잘 어루러진 영화 『토르:천둥의 신』은 고급문화와 대중문화가 소통하는 한 국면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양 진영 모두가 서로를 원하고 있습니다. 콘텐츠는 무궁무진합니다. 문제는 [어떻게]입니다. [누가 누구를]이나 [무엇이 무엇보다 먼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시(문학)라는 고급문화의 구성원이라면, 먼저 소통을 시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는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시는 그 모든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시-묠니르]처럼 강력한 무기는 없으니까요.
5.
투바 공화국의 밴드 Huun Huur Tu의 노래 중에 「Irik Chuduk」이 있습니다. 낯선 몽골 음악을 들려주며 우리의 지친 귀를 청신하게 하는 이들은 저 머나먼 바이칼과 알타이가 품고 있는 자연의 그 모든 소리들을 우리에게 바람으로 전달합니다. 어머니 같은 타이가 숲과 아버지 같은 대초원의 햇빛과 바람과 구름이 가슴을 덮어줄 때마다 생의 한계를 포월하는 어떤 슬픔과 기다림의 절대적인 이미지가 흘러갑니다. 인간의 노래 능력 중 최고의 경지를 선보이는―[흐미] 창법을 구사하는―리더 카이갈-울 코발릭은 여섯 개 정도의 옥타브를 자유자재로 오르내립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인간의 감정과 정념을 풍장風葬시키는 이상한 마력이 깃들어 있습니다. [태양의 프로펠러]라는 뜻을 지닌 훈 후르 투의 노래 중에서, 이 자리에서 소개할 「이릭 추둑」의 가사를 봐 주십시오.
Khadyn chuduk synmaan bolza If the birch log had not broken
Kazhaa xoree tutkaj ertik I might have erected a fence
Khajyraan avam olbeen bolza If my poor mother had not died
Karak, kulak bolgaj ertik I would have had eyes and ears
제가 문외한이라서 그들이 노래에 사용한 언어가 몽골어인지 투바어인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만, 다행스럽게도 영어 번역 가사가 있었습니다. [Irik chuduk]은 [썩은 통나무]라는 의미를 지녔습니다. 대단히 단순한 가사입니다. 제가 이 가사를 여기서 읽는 이유는 그 무엇보다도 시적으로 응축된, 시만큼 아름다운 가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자작나무 통나무가 부러지지 않았더라면, 나는 담장을 세웠을텐데. 만약에 나의 가난한 엄마가 죽지 않았더라면, 내게 눈과 귀가 남아있었을텐데.] 썩어가는 통나무 앞에서, 문드러진 자신의 귀와 눈을 짚어보는 화자가 있습니다. 그는 [만약에]를 앞세웁니다. 현재를 과거로 되돌릴 수만 있다면, 죽은 엄마가 살아온다면, 우리 엄마가 가난하지 않았더라면…… 가정법이 지시하는 비참한 현실을 응시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노래를 부르는 화자는 눈과 귀를 잃은, 시력과 청력을 빼앗긴 장애인이로군요. 이 작품을 시라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다음 텍스트로 넘어가겠습니다.1)
박쥐가 밤의 안쪽으로 낙하하고, 침대 위 내 몸에 퀭한 해골 그림자를 새겨 넣네/아무것도 남겨지지 않을 때까지 깎이고 얇아져 쪼개지는 나무처럼 다시 시작되는 것/부러진 뼈 때문에 절룩거리는 나는 길가에 던져진 자/우리, 죽음 속에서 그 무엇도 이길 수 없었네/우리의 사랑은 죽어 죽음을 자라게 하고 다시 시작되는데/맹렬한 바람이 해변에서 파도를 찢어버린다/까마귀가 낮게 날아가네 죽음이 편재한다는 듯이
포크 싱어 Emily Jane White의 「까마귀(The Ravens)」라는 노래의 가사 중에서 일부를 발췌했습니다.2) 이 작품이 시보다 훌륭하다고 주장하려는 의도는 없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에게 시적인 것을 생각하게 하는 텍스트들이 아주 많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노래들이 시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 노래들의 아름다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면, 알지 못하던 새로운 아름다움의 편재를 향해 이곳에서 저곳으로 나아갈 용기가 충만하다면……
가수가 노래합니다. 저 높은 곳으로 공을 던져 올립니다. 나는 천천히 떨어지는 공을 바라봅니다. 점점 커지는 공이 있습니다. 죽음의 전령 까마귀가 낮게 날아다닙니다. 나는 죽음 앞의 생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아직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나는 죽음이라는, 이 끝나지 않는 거짓말의 박동을 따라 하염없이 걸어갈 것입니다. 우리 모두 결국 그곳에서 만날 것이니까요. 영원한 휴식으로 밤이 우리를 데려갈 것이니까요.
6.
결국, 소통이란 [그 모든 시적인 것들]을 향한 주체의 결단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시뿐만이 아닙니다. 여기에 모인 우리 모두는 문학이라는 교집합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문학이 자본보다 먼저 소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본보다 먼저 움직여 새로운 것들이 이윤의 수단이 되기 전에 예술로 흡수해야 합니다. 자본주의 상품과 대결해야 합니다. 문학의 눈으로, 문학의 마음으로, 문학의 신체로 먼저 소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잡종 - 되기]입니다. 잡종의 반대는 순혈인가요? [잡종 - 되기]를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모두가 잡종이 될 수는 없습니다. 모두가 잡종이 될 필요도 없습니다. 모두가 잡종이 된다면, 그것 역시 비극일 것입니다. 하지만 [나]가 간절히 원한다면, 잡종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즐겁게 잡종이 되는 것은 어떨까요. [나]의 결단에 따라 능동적으로 먼저 [타자들]과 섞이는 것을 저는 소통의 적극적 양상이라고 부르려고 합니다. 대중문화라는 무궁무진한 텍스트의 바다에서는 지금도 수많은 이질적인 것들이 하이브리드되어 [여기, 지금]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괴물들이 탄생하고 있습니다. 시적인 영혼은 두려움을 모릅니다. 시는 소통하려는 의지의 최초이자 최후의 동력입니다. 시 안에서 그 모든 것들은 [잡종이 되어] 새로운 하나로 (돌연변이로!) 태어날 것입니다.
- 장석원 시인. 광운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