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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의 묘갈명(墓碣銘)
김세렴(金世濂)
자 : 덕응(德凝)
호 : 대암(大庵)
국조인물고 권38 음사(蔭仕)
문목공(文穆公) 한강(寒岡) 정 선생(鄭先生, 정구(鄭逑))은 도덕과 학문으로 출세하였는데 영남에 도의(道義)로 사귄 밀양 박공(密陽朴公) 곧 대암(大庵, 박성) 선생이 있었다. 격물(格物)ㆍ치지(致知)ㆍ성의(誠意)ㆍ정심(正心)의 학문부터 강구하지 않아서 학문이라는 것이 이단(異端)의 곡학(曲學)에서 섞여 나왔으나, 이어받아서 창도(唱道)한 한두 선철(先哲)이 없었으므로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ㆍ한훤(寒暄, 김굉필(金宏弼))ㆍ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ㆍ도옹(陶翁, 이황(李滉))의 정맥(正脈)이 이래서 끊어졌거니와, 강명(講明)하고 토론하여 서로 벗이 되어 도와서 도덕ㆍ학문을 닦는 자도 적었는데, 선생은 태어나면서 아름다운 자질이 있었으며 처음에는 낙천(洛川) 배신(裴紳)에게서 수업하였고 나이 열대여섯에는 이미 강개하여 학문에 뜻을 두었는데 분발하여 힘써 실천하게 되어서는 아주 변하여 도(道)에 이르렀다. 어버이가 작고하고는 과거 공부를 포기하여 응시하지 않고 공자(孔子)ㆍ맹자(孟子)ㆍ증자(曾子)ㆍ자사(子思)의 글이 아니면 읽지 않으며 종일 바르게 앉아 엄숙하고 공경하므로 남들이 태만한 모습을 보지 못하였다. 만년에는 ≪논어(論語)≫를 매우 좋아하여 거처하는 당(堂)에 편액(扁額)하기를 학안재(學顔齋)라 하고 동료(東寮)를 사물(四勿)이라 하고 서료(西寮)를 박약(博約)이라 하였으며, 그 안에서 글을 읽되 부지런히 힘써 마지않았다. 배우겠다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먼저 ≪소학(小學)≫을 읽게 하며 말하기를, “성현을 배우려면 이 글만한 것이 없다. 한훤의 학문은 여기서 나왔을 것이다.” 하고, 번번이 남에게 곧추앉기를 권하며 말하기를, “곧추앉으면 비뚜른 마음이 절로 없어진다.” 하였으며, 새벽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빗질하고 한밤에야 잤는데, 말하기를, “일찍 일어나고 밤에 자는 것도 학자가 첫째로 할 일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학문이 기질(氣質)을 변화하는 데에 이르러야 학문하였다고 할 수 있다. 나는 기질이 편벽하고 비루하므로 바로잡아서 넓고 크게 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드디어 대암(大庵)이라 자호(自號)하였다.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것도 그 천성이어서 악인을 대하면 더럽혀질 듯이 여겼으며, 자제가 남의 허물을 말하는 것을 보면 반드시 꾸짖어 말하기를, “어찌 최영경(崔永慶)이 초야에 있으면서 남의 허물을 밝히기를 좋아하여서 자신을 죽인 것을 보지 못하였느냐?” 하였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하여 모부인(母夫人)을 섬긴 20년 동안에 낯빛을 보고 마음을 살펴서 봉양하기를 지극히 하고 첫닭이 울 때에 반드시 침식(寢食)을 보살폈으며, 작고하게 되니 조금도 음식을 입에 넣지 않은 것이 여러 날이고 소상(小祥) 때에야 비로소 보리밥을 먹었으며 3년 동안 이밥을 먹거나 육장을 먹은 적이 없으며 상사(喪事)는 한결같이 의례대로 치렀으며 여막(廬幕)에서 반곡(反哭)하였는데 슬퍼하는 것이 지나쳐 야위어서 뼈만 남았다. 평소에는 새벽에 가묘(家廟)에 배알(拜謁)하고 봄ㆍ가을 제사에는 병이 났더라도 친히 임하였는데 아닌게아니라 훌쩍이며 마음이 동요하는 것이 마치 흠향하는 것을 보는 것 같았고 제사를 끝내면 아닌게아니라 슬퍼하였다. 곽간(郭趕) 공은 선생이 젊었을 때의 스승인데 호방(豪放)으로 자처하여 여악(女樂)이 앞에 가득하였으나 선생이 젊은 나이에 그 문하에 여러 해 동안 출입하였어도 한번도 주목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어려운 일로 여겼다. 집에서는 내외의 구별에 엄하였으므로 노비가 감히 중문(中門)을 엿보지 못하고 가정 안이 엄숙하였다. 가업(家業)이 본디 넉넉하였으나 옷은 몸만 가리는 것을 취하고 음식은 배만 채우는 것을 취하였으며 외물(外物)의 화려한 것에는 덤덤하였다. 우애에 독실하여 1백 구(口)의 노비를 죄다 아우와 누이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때 동배(同輩) 중에서 수우당(守愚堂, 최영경(崔永慶))ㆍ문목공(文穆公, 한강(寒岡) 정구(鄭逑))ㆍ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ㆍ송암(松庵, 김면(金沔))ㆍ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같은 이와 왕래가 끊이지 않고 서로 매우 기뻐하였으며,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이 일에 마음을 열고 일어난 것은 한강(寒岡)이 준 것이니 한강은 내 스승인데 어찌 벗할 수 있겠는가? 사우(師友) 사이로 대우해야 마땅하다.” 하였는데, 대개 문목공에게서 힘을 얻은 것이 가장 많기 때문이다. 처음에 정인홍(鄭仁弘)과 서로 친하였는데, 그가 대사헌(大司憲)이 되어 오로지 남을 치는 것을 일삼는 것을 보게 되어서는 글을 보내어 경계하기를, “임금을 보좌하여 그른 것을 바로잡기로 마음먹고 신하의 장단(長短)을 주워 모으는 것을 직분으로 삼지 말라.” 하였고, 정인홍이 남명(南冥, 조식(曹植))의 발문(跋文)을 지으면서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을 헐뜯게 되어서는 선생이 말하기를, “세상에 어찌 선정(先正)을 모욕하고서 군자(君子)가 될 자가 있겠는가? 그러나 내가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드디어 글을 지어 변론하였는데, 정인홍이 답하기를, “각각 소견을 지킬 것이지, 어지러이 시비를 다툴 것 없다.” 하였으므로, 선생이 드디어 절교하였다.
김 학봉(金鶴峯, 김성일(金誠一))이 거창(居昌)에 출진(出鎭)하였을 때에 선생이 참모로 종사하였는데, 적의 형세가 더욱 빨라져서 조석 사이에 보전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선생이 말하기를, “여기서 지키지 못하면 낙동강 서쪽을 보전할 수 없고 회복할 근거가 없어질 것인데, 혹 불행한 일이 있으면 공은 어떻게 조처하시겠습니까?” 하니, 학봉이 말하기를, “국경을 지키는 신하는 국경에서 죽는 것이 예(禮)이다. 이곳은 내 집이니 자네는 피하여 떠나도록 하라.” 하였으나, 선생이 웃으며 말하기를, “백이(伯夷)ㆍ노련(魯連)이 무슨 관수(官守)가 있었습니까? 더구나 공과 생사를 같이하기로 약속하였는데 어찌 만간에서 욕되게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하니, 학봉이 장하게 여겼다. 학봉이 염병에 걸리게 되니 막객(幕客)이 다 피하였으나 선생만이 떠나지 않았는데, 학봉이 병이 위독해지니 선생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본디 군(君)의 충신(忠信)이 이러할 줄 알았다.” 하였다. 정유년(丁酉年, 1597년 선조 30년)에 왜구가 다시 날뛰므로 선생이 의병을 일으키려고 조 월천(趙月川, 조목(趙穆))에게 가서 대장(大將)이 되기를 청하니 월천이 노쇠하였다 하여 선생에게 미루었는데, 마침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 공이 남으로 내려와 맞이하여 막부(幕府)에 두었다가 곧 선생을 주왕산성 대장(周王山城大將)으로 삼고 예경(禮敬)을 극진히 하여 대우하고 말하면 반드시 선생이라 칭하였다. 선생이 하루는 글을 쓰기에 임하여 말하기를, “내가 평생에 서울로 들어가는 글을 짓지 않았는데 이제 이렇게 늙어서 글을 쓰게 되었다.” 하였다. 이때 나라의 일이 날로 급해졌으므로 선생이 봉사(封事) 16조(條)를 올려 대계(大計)를 극진히 아뢰었는데, 말이 매우 적절하였다. 어떤 사람이 옥사(獄事)를 다스리는 데에 관한 것을 삭제하기 바랐으나, 선생이 말하기를, “내 소견이 이미 정해졌는데 어찌 고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말이 나라의 일에 미치면 아닌게아니라 팔을 걷어붙이고 통탄하며 이어서 눈물을 흘렸다. 그 충분(忠憤)의 격렬함이 이러하였다.
선생은 처음에 재행(才行)이 뛰어났기 때문에 왕자(王子)의 사부(師傅)로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뒤에 사포(司圃)에 제수되고 공조 좌랑(工曹佐郞)을 거쳐 안음 현감(安陰縣監)으로 나갔다. 어지러운 때를 당하여 명 나라 군사를 접응(接應)하였는데 장정을 기록하고 식량을 나르는 것이 으레 시기에 맞았으며 분별하여 다스리는 데에 전념하여 호족(豪族)을 용서하지 않았으므로 온 경내가 두려워 복종하였는데, 뒤에 좋아하지 않는 자가 당로(當路)하게 되어 때를 타서 모욕하였고 드디어 갈려서 돌아왔다. 이때부터 나가지 않고 청송(靑松) 주왕산(周王山) 아래에 터잡아 살았는데, 조정에서 여러 번 공조 정랑(工曹正郞)ㆍ익위사 위솔(翊衛司衛率)과 임천(林川)ㆍ영천(永川)ㆍ익산(益山)의 군수(郡守)와 군자감 부정(軍資監副正)ㆍ통례원 상례(通禮院相禮)ㆍ청송 부사(靑松府使)를 제수하였으나 가지 않았다. 병오년(丙午年, 1606년 선조 39년) 10월에 병으로 일어나지 못하였는데, 향년 58세이었다. 처음에 선생이 오도(吾道)의 중책을 자임하였고 선생에게 기망하는 벗들도 그러하였으나, 마침내 나아가 배운 것을 펴지 못하고 또 장수하지 못하고 별세하였으니, 슬프다.
선생이 별세하고 36년 뒤에 선생의 사자(嗣子) 박민수(朴敏修)가 여헌(旅軒) 선생의 글을 가지고 와서 눈물을 흘리며 나 김세렴(金世濂)에게 말하기를, “선인(先人)의 학문과 지행(志行)은 듣지 못한 것이 없으나 능히 죄다 상세히 아는 이로는 문목공(文穆公, 정구(鄭逑))만한 이가 없는데 이제 별세하셨고, 홀로 여헌 선생이 계실 뿐인데 선인의 영(靈)에 힘입어 지하에 계신 선인을 길이 전할 만한 행장(行狀)을 받을 수 있었으므로 불초고(不肖孤)가 죽어서도 눈을 감겠으나, 아직 묘갈(墓碣)이 없으니 자네의 한마디 말을 얻기 바란다.” 하였는데, 내가 재주가 없다고 사양하니, 말하기를, “일에는 알 수 없는 것이 있다. 대저 문목공 같은 이와 벗이 되었어도 그 묘소에 지(誌)와 명(銘)을 얻지 못하였으니, 자네가 개탄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노선생(老先生)이 그 행적을 적은 것이 이처럼 도타우니 조금도 여한이 없을 것이고 문목공이 다시 짓더라도 더 고칠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선생의 공덕은 낱낱이 말할 수 없으나, 그중에서 큰 것은 학문과 지행만한 것이 없다. 대저 문목공의 도덕과 학문으로도 선생은 문목공이 외경(畏敬)하는 바이었으니, 그 학문이 이미 지극하지 않았겠는가? 성인의 글을 읽고 따라 배워서 반드시 진취하고 구원(丘園)에 은둔하여 질소(質素)한 실천을 더욱 굳혔으니, 그 지행이 이미 지극하지 않았겠는가?
선생의 이름은 성(惺)이고 자(字)는 덕응(德凝)이며 시조 박중미(朴中美)는 고려의 밀직사사(密直司事)이다. 박성림(朴成林)이 감찰(監察) 박순(朴純)을 낳고 박순이 생원(生員) 박사눌(朴思訥)을 낳았는데 이분이 선생의 아버지이며, 어머니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관찰사(觀察使) 김연(金緣)의 딸이다. 승지 이광진(李光軫)의 딸은 지극한 행실이 있고 단정하고 조용하며 엄숙하여 능히 영덕(令德)에 짝하였다. 한 아들을 낳았으나 요절하였으므로 족질(族姪) 박민수(朴敏修)를 후사로 삼았으며, 딸이 두 사람인데 군수(郡守) 이의활(李宜活)과 승지(承旨) 황중윤(黃中允)이 그 사위이다. 측실에서 낳은 딸은 김예립(金禮立)에게 출가하였다. 내외손이 모두 약간인이다. 묘소는 현풍현(玄風縣) 송림(松林)의 언덕에 있다. 명(銘)은 이러하다.
성(性)은 하늘에서 타고나며 도(道)는 하나이니, 선과 악이 서로 대(對)하여 나지 않는다. 능히 수양할 것을 알고 때를 놓치지 않으면, 힘쓰는 것이 게으르거나 빠른 데에 달려 있을 뿐이다. 정(情)을 제약하여 중도에 맞추어 부자(夫子)가 길하였으니, 학문의 힘만이 아름다운 자질이 아니다. 본체(本體)가 확립하여 완전하고 나서 예(禮)를 따르면, 참으로 다시 힘들이지 않아도 욕심을 막을 수 있다. 힘써 옛 성현을 좇아서 그 심오한 데에 들어가면, 오직 ‘경(敬)’ 한 자가 공자(孔子)의 학술(學術)이다. 안팎의 종들도 질서가 있으니, 모두가 본받는 것은 엄한 가법(家法)이었다. 행지(行止)는 나에게 달려 있으니 누가 막으랴? 잠시 고을에 시험하니 민덕(民德)이 성실해졌다. 세자를 보내어 은일(隱逸)을 물으니, 남유(南儒)라 칭한 것은 어필(御筆)에서 비롯하였다. 낙동강 가 송림(松林)은 구름 속에 높은데, 큰 명예는 백세(百世)에 백일(白日)처럼 전하리라. 선량한 이는 반드시 장수하지 않고 요절할 수 있거니와, 적고 싶은 말을 다 적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