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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하게 죽은 단종의 무덤인 장릉(莊陵)이다.
강원도 영월읍에서 제천으로 나가는 끝자락 길인 소나기재 시작 부근에 있다
장릉은 조선왕릉 가운데 한양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왕릉이다.
한양에서 500리나 떨어져 있으니 아주 먼 곳이다.
그가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영월 땅에 홀로 단릉에 잠들게 된 사연은 가슴 저미게 한다.
단종은 왕위에서 쫓겨난 것도 모자라 17세의 어린 나이에 숙부인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다.
어린 단종은 유배지인 영월 동강에 버려졌다.
이때 호장(戶長) 엄흥도(嚴興道)가 삼족이 멸문당하는 처벌을 각오하고
냇가에 버려진 단종의 시신을 한밤중에 몰래 추스른다.
눈이 수북이 쌓인 산으로 도망을 가던 도중 노루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곳을
발견하고는 그곳에 단종의 시신을 묻었다.
그는 묏자리를 볼 줄 몰랐다.
그저 급히 시신을 묻어야만 했기에 좋은 터를 고를 여유가 없었다.
풍수지리가에 의하면 이곳은 천하의 명당이라고 한다.
억울하게 죽은 단종을 위로하기 위해 하늘이 베푼 은혜인지도 모른다.
단종의 무덤은 단종 사후 59년이 지난 중종 11년(1516년)에
왕명으로 찾게 될 때까지는 세상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중종 36년(1541년) 영월군수로 부임한 박충원(朴忠元)이 단종의 시신이 암장된 곳을
찾아내어 비로소 봉분한 무덤이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숙종 24년(1698년)에 단종대왕으로 복위되자 능호를 장릉(莊陵)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 낙낙장송엔 정령이 깃들여
있다고 했다. 왕비는 스님이 되어
평생 지아비 단종을 그리며
살았다. 그 왕비의 릉은
생각 할 사(思)를 따와
사릉(思陵)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평생을 단종을 그리며 살다가
죽어서도 곁에 뭍히지 못하고
떨어져 잠든 정순왕후 송씨다.
그 왕비의 애절한 마음처럼
사릉에 있는 소나무는 지아비
단종이 있는 영월을 향하여
기울어져 있었다.
사릉을 찾은 어느 여인은
이렇게 시(詩)로 노래했다.
영원한 이별인가요
나 그대 의지하렸더니
월계수(月桂樹) 나무 아래
절구질 하는 토끼 마냥
단심(丹心)으로 그댈 그리며
그대 계신 그곳 가고파
종소리 풍경(風磬) 소리에
부처님 전 빌었답니다.
1999년 4월 9일 남양주문화원은 사릉에서 금강송 소나무를 캐서 강원도 영월 장릉에 심고 단종과 정순왕후가 그간의 아쉬움을 풀고 애틋한 정을 나누도록 했다.
그 소나무를 '정령송(精靈松)'
이라고 하였다.
조선의 왕릉 가운데 건원릉(태조이성계), 영릉(세종)과 더불어 3대 명당으로 꼽고 있는 장릉이다.
숙종 때 대제학 서종태가 장릉을 복원하며 정자각 상량문에 다음과 같이 썼다.
“구불거리는 산세는 멀리 그 줄기가 갈라졌고 봉황이 날며 용이 오르는 기상을 머금었다.
뭇산이 둘러쳐 옹위함이 임금께 절하는 듯하다.”
이때 능은 추봉된 능의 예를 따라 능의 규모 또한 간소하게 조성하였다고 한다.
능 주위에 세워진 석물(石物)의 수가 얼마 되질 않는다.
봉분 앞에는 상석과 장명등을 중심으로 망주석과 문인석 그리고 석마(石馬)만이 각각 한 쌍씩 자리해 있을 뿐이다.
특이하게도 무인석을 두지 않았다.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의 칼에 의해 왕위를 빼앗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봉분의 모습 또한 소박합니다. 아마도 화려한 문양을 새긴 병풍석이나 난간석이 없기 때문인 듯하다.
다만 봉분의 네 귀퉁이에 석양(石羊) 한 쌍과 석호(石虎) 한 쌍을 세워놓았다.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되고 비참하게 죽자 의덕왕비도 궁궐에서 쫒겨나게 되었다.
비참하게 죽은 단종을 생각하며 세조에 대한 원한으로 세조가 내린 집과 식량도 거절하고
평생을 가난하게 스님으로 한맺힌 생활을 하며 살았다.
단종을 그리며 장릉에 가고 싶어 하였으나 가지를 못하였다.
그에게 자손이 없었으므로 단종의 누이인 경혜공주의 시댁 해주 정씨 문중에서 가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지금의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리에 있는 사릉(思陵)이다.
그가 죽은지 170여년 후인 숙종24년에 단종이 복위되면서 의덕대비는 정순왕후로 봉해졌고 무덤도 사릉(思陵)이라고
하였다. 단종이 한양에서 300리 떨어진 영월로 유배를 떠나게 되고 남편과 생이별을 한 정순왕후 송씨다.
그는 동대문 밖의 낙산 자락 청룡사 내 초가집 '정업원(淨業院·)'에 살면서 평생 단종을 그리워하며 지냈다.
정순왕후는 시녀들이 구해 오는 양식으로 생계를 잇다 후에 염색일을 하며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중간중간 왕비의 형편이 어렵다는 소식을 들은 동네 아낙네들이 감시병 몰래 금남(禁男)의 채소시장을 열어
정순왕후를 돌보기도 했다. 부군의 죽음을 전해 들은 송씨는 매일 아침 저녁으로 큰 바위에 올라 영월을 향해 통곡을
한다. 그리고 비명에 간 남편 단종의 명복을 빌고 또 빌었다.
서울의 좌청룡 타락산 자락에 자리한 비구니 사찰 청룡사이다.
그 안에 서럽디 서럽고 슬픈 정순왕후 비구니 허경스님의 사연이
살아 숨쉬고 있는 정업원 비각이다.
"숭인동 초막에서 홀로 스무 해를 기거한 내게 별안간 아들이 생기고
어미라는 벅찬 이름이 생겼습니다.
미수의 집으로 이사하여 들어가던 날은 아직도 뇌리에 생생합니다.
나는 얼마나 긴장하고 있었던지 흔들는 가마 속에서
잠시 아무도 모르게 혼절하기까지 하였답니다."
(소설 영영이별 영이별에서)
정순왕후 송비는 비구니 허경(虛鏡)이다.
그는 후궁 김씨 후궁 권씨 그리고 세 상궁과 함께 정업원 청룡사에서 80평생 몸을 맡기고 살았다.
허경스님은 희안 지심 계지 세 시녀와 함께 업을 닦으며 노 비구니로 조용히 입적하였다고 전한다.
이 세 시녀는 죽어서도 송비가 묻힌 사릉 곁에 묻혔다하니 눈물겹다.
단종과 송비의 들인 아들 정미수의 후손이다.
정미수의 아버지를 비롯한 그 가족의 운명은 어머니 정순왕후만큼이나 참으로 기구하다.
정미수는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와 부마 영양위 정종(鄭倧) 사이에 태여났다.
그 아버지 정종은 금성대군사건에 연루되어 영월에 유배,사육신사건으로 죄가 가중되어 끝내는 능지처참된다.
단종의 유일한 혈육인 경혜공주는 천민으로 강등돼 순천의 관비로 유배되었다.
관비가 된 경혜공주의 몸에서는 아기가 자라고 있었다. 그 아이는 순천도호부에서 아버지없이 태어났다.
"아들이면 모두 죽이라!"
세조비 정희왕후는 세조의 어명을 어기고 두 모자를 서울로 불러올려 궁중에서 보살폈다.
몹시 후회한 세조는 그 아이에게는 '미수'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으로 돼 있다. 바로 해평부원군 정미수(鄭眉壽·)다.
1506년(중종 1년) 중종반정에 아드님 해평부원군이 정국공신에 오름으로써 억울하게 돌아가신 아버님 영양위의
관작도 회복되었다. 증(贈) 순충적덕 보조공신 영의정 영양부원군에 추봉되고 영조 때 헌민의 시호가 내려졌다.
영월 장릉의 배식단사, 공주 계룡산의 동학사 숙모전에 배향되었다.
조선왕실과 단단한 혼맥을 이어온 해풍 정씨이다.
그 중심에는 정도공(貞度公) 정역(鄭易)이 자리한다.
정도공은 태종의 둘째 왕자 효령대군의 장인이다.
태종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처남들과 사돈인 양녕대군의 장인 정순공주(장녀)의 시아버지
세종의 장인 등 많은 인척들에게 사약을 내리거나 유배를 보냈다.
둘째 사돈인 정도공은 권력에 뜻을 두지 않은 청렴으로 각별한 신임을 받으면서 4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세종때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올라 해주정씨 번성의 문을 연 선조이다.
1425년(세종 7년) 정월에 세상을 떠난다.
그는 명당 중의 명당으로 알려진 오늘의 서오릉 자리에 묻힌다.
세조의 큰 아들 의경세자가 요절하자 세조는 명당 정역의 묘역에의경세자의 능 경릉을 두었다.
여기서 오늘의 서오릉은 시작된다.그의 묘역은 서초동 법조단지으로 옮겨야 했다.
80년대 법원-검찰에 또 밀려 여주로 이장을 한다.
정역의 큰 아들 정충경은 세종의 여덟째 왕자 영응대군의 장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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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두 편의 글을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