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 최대 원유 수출 기지, 사우디아라비아 동부의 라스타누라 Ras Tanura 항구를 방문하면 탱커선들이 줄지어 선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온도계가 섭씨 40도를 가리키는 지독하게 더운 날, 옅게 낀 안개 사이로 15척쯤 되는 탱커선들이 보인다. 어떤 배는 짐을 신고 있고, 어떤 배는 대기 중이며, 어떤 배는 자기 자리를 찾아 이동 중이다. 탱커선들은 작고 다부진 예인선들에 이리저리 끌려가거나 밀려가며 움직인다. 탱커선들의 거대한 실루엣에 가려서 예인선들의 모습이 이따금 사라 지기도 한다. 이런 종류의 탱커선을 전문 용어로는 VLCC Very Large Cude Carrier, 즉 초대형 원유운반선이라 부른다. VLCC는 바다의 노동자들이다. 최대35만 톤의 원유를 운반할 수 있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높이보다 더 길다. 요즘에는 ULCC Ultra Large Crude Carrier, 일명 극초대형 원유운반선이라고 하는 더 큰 탱커선도 있지만, ULCC는 너무 크다. ULCC는 심해항 중에서도 매우 깊은 곳이 아니고서는 좀처럼 정박할 수가 없으므로 요즘에도 대체로 VLCC를 많이 사용한다.
아람코의 도선사들은 탱커선에 직접 탑승해서 입항을 돕는다. 항만을 출입하는 배들을 안전한 수로로 안내하는 도선 업무에는 물에 띄운 보트에서 로프 사다리로 제때 점프하는 일, 갑판 위를 맴도는 헬리콥터에서 라펠 하강하는 일도 들어간다. 탱커선들은 지시에 따라 제 자리에 정박하는데, 그중 일부는 기괴하게 생긴 시아일랜드로 향한다. 시아일랜드는 파이프와 강철로 된 기다란 플랫폼으로, 바다로 몇 해리 나아간 곳에 있어서 아무리 큰 탱커선도 육지와 접촉하지 않고 정박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었다. 모든 여건이 잘 맞아떨어지면 탱커선 한 척이 원유를 신는 데 하루에서 하루 반 정도가 걸린다. 가와르와 그 인근 유전에서 시작된 기다란 파이프라인을 따라서 퍼올린 원유가 탱커선 한가득 실리면, 갑판의 높이가 흘수선과 비슷하게 가라앉는다.
라스타누라 터미널의 역사는 담맘 유전에서 사우디아라비아 최초로 원유가 나오기 시작했던 193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기념식에서 국왕 압둘아지즈 이븐 사우드 Abdul Aziz Ibn Saud가 밸브를 연 뒤로 지금까지도 원유가 계속 흘러나오고 있다. 세계 최대의 원유 수출 기지인 라스타누라에서는 세상을 계속 돌아가게 하는 항해가 시작된다. 탱커선 대부분이 중국과 인도로 향하는데, 세계 경제 생산량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지역들에 연료를 공급하며 힘을 보탤 것이다. 일부는 아메리카나 유럽을 항해 떠난다. 이 탱커선들은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호르무즈 해협을 지나 아라비아반도를 돌다가 다시 북쪽으로 올라가 홍해로 들어선다. 하지만 원유를 잔뜩 실은 VLCC의 선체는 수에즈 운하의 얕은 수로를 지나기엔 너무 깊다는 문제가 있다. 그래서 일단 수에즈운하 부근의 아인 수크나 터미널에 들러서 원유 일부를 터미널 파이프에 덜어낸 다음 운하를 통과한다. 그렇게 지중해 쪽으로 나아간 VLCC는 수에즈운하의 끝에서 원유를 다시 적재한다.
이런 정교한 수송 과정은 당신이 이 책은 읽는 지금도 한창 진행 중이다. 이 과정 어딘가에 문제가 생긴다면 공해와 강철 파이프를 타고 끊임없이 흐르는 탄화수소의 동맥혈이 멈춰버릴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라스타누라를 매우 중요한 곳이자 매우 취약한 곳으로 만든다. 페르시아만의 맞은편에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숙적 이란이 있다. 라스타누라는 이란 미사일의 사정거리 안에 있으므로 불과 몇 분이면 항구가 완전히 파괴될 수도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시설은 주기적으로 드론 공격을 받고 있는데, 대개는 예맨 북부의 후티 반군이 이란에서 지원을 받아서 공격하는 것으로 보인다. 2021년 사우디아라비아는 라스타누라에서 드론과 미사일 공격을 요격했다고 밝혔다. 이러한 공격이 원유 공급망에 장기간의 피해를 낸 적은 아직 없지만, 전문가들은 그렇게 되는 건 시간문제라며 우려를 표시했다. 라스타누라가 유일한 표적이 아니라는 사실도 문제이다. 여기서 동남쪽으로 160킬로미터 정도 내려가면 오늘날 점점 더 중요해지는 또 다른 항구가 나온다.
천연가스의 파이프 정글, 라스라판
라스라판Ras Laffan은 카타르 반도의 곶에 자리하고 있다. 이 일대의 사막에는 파이프 정글이 사방으로 뻗어 있다. 이 파이프들은 천연가스에 섞인 불순물을 제거하고 처리하며, 가스를 응축하고 냉각하여 액화한다. 나는 몇 년 전에 라스라판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작은 전동 골프 카트를 타고 강철의 미로를 따라 및 시간을 이동하면서 액화 작업이 실제로 어디서 일어나는지 살펴보려고 했지만 실패했었다. 쾰른의 베셀링 정유공장에서처럼 라스라판 역시 무척 당황스러웠다. 이곳의 탄화수소는 베셀링에 비해 가벼운 편이었고 뭔가 다르게 느껴졌다.
원유를 가지고 석유, 디젤, 기타 석유화학 제품을 정제하는 방법을 발견한 순간 3차 에너지 대전환이 일어났다. 그리고 천연가스는 4차 에너지 대전환을 상징한다. 석유는 대부분의 석탄 종류보다 에너지 밀도가 훨씬 높고 내연기관용 연료로도 더 적합하지만, 연료를 동력으로 전환하는 데는 가스가 더 낫다. 오늘날 가스 터빈은 현존하는 에너지 변환 장치 중 최고의 성능을 자랑하며, 가스를 가장 효율적이고 오염을 최소화하는 연료로 만들었다. 중국이 화력발전소의 연료를 전부 석탄에서 가스로 바꾸면 기후 목표를 금방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에너지 대전환이 실제로 이루어지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린다. 석유는 1960년대 중반에 석탄을 제치고 세계 최대의 에너지원으로 부상했지만, 가스는 2020년대 초반에야 석탄을 추월하기 시작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가스가 석유보다 수송이 휠씬 더 까다롭기 때문이다. 가스 수송에는 광대한 유통망이 필요하므로 구축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현재는 북아메리카와 중국, 중동과 캅카스를 가로지르는 파이프라인이 있다. 러시아의 시베리아 가스전과 유럽을 연결하는 파이프라인 일부는 현재 비활성 상태인데. 그중 가장 큰 파이프라인인 노르트스트림 Nord Stream은 2022년에 사보타주로 손상되었다. 라스라판 같은 일을 하는 터미널들은 점점 더 늘고 있다. 천연가스를 압축하여 과냉각한 뒤 액화 형태로 만들면, 전 세계를 순환하는 매머드 탱커선을 닮은 특수 LNG 선박에 선적할 수 있다.
라스라판은 페르시아만을 따라 자리를 작은 다튼 항구와 공장보다 훨씬 중요한 곳인데, 그 옆에 단일 규모로는 지구에서 가장 큰 에너지원이 있기 때문이다. 가와르가 세계에서 가장 큰 유전이라면, 카타르 바로 옆의 바다 밑에 있는 노스필드North Field는 세계에서 가장 큰 천연가스전이다. 천연가스는 다른 어떤 연료보다 더 효율적으로 일이나 동력으로 전환될 수 있으므로, 노스필드에서 얻을 수 있는 유용한 에너지의 양은 그 어느 곳보다 많다. 심지어 가와르 유전 그리고 라스타누라 터미널을 통해 유통되는 전체 원유보다도 더 크다. 노스필드는 단일 규모로는 지구상에서 가장 중요한 에너지원이라 할 수 있다.
노스필드는 거대하다. 9,713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지하 가스층 대부분이 카타르 해역에 속하지만. 일부는 이란 영토까지 뻗어 있다. 카타르는 파이프로 가스를 퍼올리고, 라스라판의 강철 정글에서 이산화탄소와 유황을 제거한다. 이 놀라운 곳이 얼마나 중요한지 제대로 파악하기란 꽤 어려운 일이다. 노스필드 단 한 곳에서 전 세계 에너지의 약4퍼센트를 공급하는데, 이는 전 세계의 모든 태양광 패널과 풍력발전용 터빈을 합친 것보다도 휠씬 많은 양이다.
이 세상의 에너지 중심이 석탄과 석유에서 가스로 옮겨 가면서 라스라판은 더 중요해질 것이다. 그래서 라스라판이 이란의 크루즈 미사일 사정거리에 들어간다는 사실은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카타르와 이란, 서로 너무나 다른 두 나라가 하나의 가스층에 빨대를 꽂고 있다. 한 나라는 매우 작고 서양에 우호적인 반면, 다른 한 나라는 거대하고 이른바 악의 축을 이룬다. 불안에 떨면서도 두 나라 모두 전 세계에서 가장 에너지가 풍부한 지역에서 탄화수소를 퍼올리고 있는데, 이 탄화수소는 수억 년 전 열대 바다에 가라앉은 플랑크톤이 화석화된 것이다.
(중략)
석유의 경우에도 구리와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해저 깊은 곳이든, 세상 먼 오지이든, 가와르 같은 저류암층이 아닌 단단한 셰일층이든 상관없이 인류는 비상한 능력을 발휘하여 탄화수소를 더 많이 얻어내려 애쓰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유전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서서히 쇠퇴하는 중이고, 그사이 새로운 유전들이 발견되면서 감소분을 보충하고 있다. 미국의 프래킹 혁명 이후 아무도 더는 '피크 오일’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혹여 그런 말이 나오더라도 그것은 공급 정점이 아닌 수요 정점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천연가스는 가장 효율적이고 환경오염도 가장 덜한 화석연료이다. 천연가스는 석유보다 5분의 1, 최고급 석탄보다 3분의 1 적게 탄소를 배출하지만, 탄소 배출 문제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전 세계 인구와 에너지 수요 모두 증가하면서 탄소 배출량도 계속 증가하고 있다.
오늘날 세계 대부분의 국가가 반드시 5차 에너지 전환을 이루어 내겠다고 결의한 상태이다. 5차 에너지 전환의 목표는 이전처럼 에너지 밀도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탄소 배출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다. 지금 사용 중인 화석연료를 수력, 태양력, 풍력, 원자력 같은 재생 가능한 자원으로 대체할 계획이다.
- 에드 콘웨이 Ed Coway, 이종인 譯, 2024, 『물질의 세계 - 6가지 물질이 그려내는 인류 문명의 대서사시』, 인플루엔셜. 중에서
첫댓글 흥미롭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