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고등학교에 퇴학 당한후 방황했던 기간이 너무 길어써 마음잡고 공부도 하지 못한 상황이데도 이듬해 경주고등학교에 가라는 부모님의 권유로 입학 시험을 첬지만 낙방하고 만다.그러나 1959년 3월 경주고에 입학하러 가라는 천북 면사무소 소사(잡일 하는 사람)로 부터 연락을 받는다.낙방을 했는데도 입학이라 당황하게 된다.당시 백부님이(오금댁)민선 천북면장으로 부임하면서 그명성이 대단하였다. 경주 고을의 유명 인사(군수,경찰서장,지방 유지등)들과 좋은 인맥이 형성 되었으며 특히 서ㅇㅇ 경주중고교 재단 이사장과는 특별하여 조카 한명의 입학 부탁은 어러운 문제가 아니였다.아버님은 흰 두루막이에 중절모를 쓰시고 학교로 입학하러 가자는 것이다.기쁘기도 하지만 당황스럽다.서ㅇㅇ 재단 이사장의 입학 축하 말씀이 끝나고 재단 이사장이 박부식 학생 왔으면 앞으로 나오라는 것이다.어께를 스다듬으면서 공부 열심히 하라고 격려를 해 준다.경주고 1학년 5반 교실의 맨뒤 좌석이 나의 자리다.한 학년 후배들과 마주하니 창피하고 자존심이 상해 마음의 상처가 심했다.정상적인 위치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2학기 부터는 문화중때 부터 이름이 알려져 가을 학교별 체육대회를 대비해 육상 선수로 차출된다.1 학년 때는 400m 계주에 뛰었지만 별로였고 2 학년 부터는 3 학년 선배들을 재치고 선발 선수로 발탁된다.육상 대회의 성적은 경주고을 일등하는데 나의 역활이 한 몫을 했다.친구들에 인기가 높았으니 반장 선출하면 당선이고 규률부(학생 복장등을 선도하는 군대의 헌병 역활)요원이 되어 선생님으로 부터 재목감(?)으로 인정받게 된다.3학년에 와서는 총학생 대대장이 되어 1000 여명의 학생으로 부터 선망의 인물로 등장한다.당시의 100m 기록이 11.7초 였고 넓이 뛰기는 6.2m 였다. 경북 고교 육상 대회에 참가하여 우수한 성적을 올려 교장 선생님으로 부터 회식(?)에 초대된다.문화중학교 출신이 경주고에서 확실한 간부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이 촌놈으로 더우나 3 류(?)중학교 출신이 제법 출세(?)한것 아닌가?. 2 학년 부터는 Arirang(아리랑)이라는 클업을 만들어 유명한 류ㅇㅇ 외 여러명의 친구들과 학생 선도는 물론이고 학교 對 학교의 대결(싸움)에 등장 한다.류ㅇㅇ가 등장하면 타 학교 선수(싸울 선발 대원)는 슬슬 꽁무니를 빼고 만다.1960년 4.19 학생 혁명으로 이승만 자유당독제 정권이 문어지고 장면박사의 민주당 내각제 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전국적으로 학생 운동이 빈번히 일어나 학원가에는 소용돌이가 대단했다.경주에서는 이모모 국회의원이 물러남과 동시에 부정으로 축재한 재산 대부분이 몰수되었다.그 중 대표적인 것이 감포항의 고기잡이 어선등이 옛주인에게 돌아 간다.경주군 갑에서는 안ㅇㅇ 의원이,경주 을에서는 황ㅇㅇ 의원이 민주당 의원으로 당선된다.우리 경주고 학생 간부들은 4.19 학생 혁명운동에 소극적이 였다는 비난을 받고는 아리랑 크럽의 간부 전원이 2 선으로 물러나고 만다.정치 바람이 학원가에도 영양을 받은 것이다..당시 나는 대한동(옛 일본에서 귀환한 동포 집성촌)큰 집에서 대학 진학을 위해 적극적으로 곰부을 하기 위해 큰 집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다.데모하다 경찰서에 연행된 것을 본 박경인(사촌 여동생)이가 대한동 집으로 뛰어가 큰아버지에게 밀고(?)하는 바람에 경찰 찝차에 실여 큰아버지 앞으로 연행(?)된것이다.큰 아버지는 체구는 외소하지만 권위가 대단하였으며 야단을 칠 때는 어느 누구보다 크고 무서운 어른이시고 선비였으며 행정가(?)였다.무릎 꿀고 앉아서 심하게 꾸중을 듣는다.앞으로 헛된짓 하지말고 공부만 하라는 것이다.말을 듣지 않으면 손곡으로 쫓아 버린다는 것이다.백부님의 천명같은 호통에 자숙하고 마음을 잡는다.이제 부터는 공부가 나의 전부라고 다짐한다.나는 불 같은 성격으로 매사를 추진할 때는 아프리카 밀림속의 물소 같다는 주위의 충고다. 그러나 선의의 충고나 합리적인 논리에는 절대적 순응이다.
대학 입시를 위한 교내 과외 수업이 적극적으로 실시되 코피 터지도록 책과 싸운다.1961년 대학진학시즌이 닦아 온다.연세대학교 부산 분교에 정법대학 행정학과에 합격된다.경주역 대합실에는 한 여인이 금의환양(?)으로 돌아온 나를 맞는다.손을 잡고 얼굴을 붉힌다. 가름한 얼굴에 길게 길은 생 머카락에 이국적으로 생겼다고 사촌 형수가 찍어 놓은 여인이였지만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행복을 빌 뿐이다.2 년간의 부산대학시절의 추억과 낭만이 지금까지도 나를 부산으로 초대한다.
왕성했던 고교생으로 고향의 행적으로 돌아 가기로 한다.
당시에는 어느 도시를 막론하고 깡페들이 경찰들을 비웃듯 활개를 친다.혼란기에 욕구 불만과 기성세대에 대한 반감과 억 눌려 살았던 감정이 거침없이 분출될 때라 감히 누구도 재제할 수 없는 시대의 세력으로 등장한다. 선생님을 데모해서 쫒아 내기도 했다. 일부 학생은 깡패가 되기도 했으며 무리를 지어 단니면서 사회적 패를 끼치는 일도 생긴다.당시의 학생들 사회에서는 크럽 활동은 시작에 불과하지만 한 두개 가입하게 된다.주로 선생님의 지도하에 선도 봉사 개혁의 기초 단계에서 부터 새력을 과시하는 크럽(조직)이 생긴다.행동 대원과 클럽의 활성화를 조정하는 브레인으로 조직된다.
우리 손곡에는 고길우와 내가 버티고 있었으므로 깡페들이 감히 출몰(?)하지 않았다.공부한다고 고향을 떠나 오래만에 왔을 때 어른들의 증언이다.그러나 골치 아픈일이 생기기 시작 한다.류ㅇㅇ(고인)를 비롯한 거리의 무리들이 우리 집에 들어 닥친 것이다.경찰의 수배를 받아 피신하러 왔으므로 같은 클업의 요원(?)으로 감히 뿌리칠 수 없었다.아버지는 놀고 밥 먹으면 안된다고 들로 끌고 가서는 이것 저것 일을 시키는데 농담하면서 열심히 일을 도왔다.경찰서 수사과장 보다도 무서운 존제가 아버지인 것이다 그 무리들도 시골의 분위기를 아는 모양이다.어머니는 식욕이 왕성한,식구(?)들에게 밥 해 먹이느라 고생이 많으섰다. 유ㅇㅇ를 고길우의 협력으로 보문호수 남서쪽 낭떠러지에 밀어 죽여 버러기로 침밀한 계획도 새운다.여름이면 약물탕 주변에서는 준깡페들과 멋대로 치장한 어슬픈 시골 촌놈(?)들이 나타나 나름대로 세력을 과시 하면서 시비를 걸어 오면 한 순간 초토화시켜 버리고 만다.무서운 맛을 똑똑히 경험하고 조용히 돌아 간다.닭서리,수박서리,복숭아,사과등 먹는것 서리는 반 강도 짓이다.달리기는 좀해야 되는데 박잠동(고인) 정말 못 뛰드라.도망처 끌고 오느라 정말로 혼이 났다.박ㅇㅇ,박ㅇㅇ(고인)동지 정말 사과 먹는데는 특등 일등이다.서리해온 사과를 갓안 넓다란 묘지 잔듸밭에 흩어 놓고 각자가 먹을 수 있을 때까지 먹고 난뒤에는 똑 같이 배분한다.불법 장물이라도 나누어 갖는다는 불문률이 적용 된것이다.얼마나 경제적으로 민주화가 아닌가.박ㅇㅇ이와 박ㅇㅇ 동지는 얼마나 먹었는지 몇일간 잇빨이 씨어서 밥을 먹지 못했다는 뉴스가 제법 재미있다.
당시 가장 유행했던 팻션은 나팔바지와 맘보바지였는데 나팔바지 가랑속에 처녀 한명은 넣을 수 있었으며 맘보바지는 몇년 후에 유행했는데 정말 멋이 있었다.사춘기에는 갖고자 하고자하는 일 생기면 앞이 보이지 않은 법.유행하는 옷 사주지 않으면 쌀 말은 퍼다 주었지.또래들과 어울리려면 어쩔할 수가 없었지.
가을 철만 되면 경주읍내 중고교 체육대회가 매년 있었는데 그때는 나의 모든 육상 실력을 발휘하게 된다.100m 출발선에서 탕 소리가 나면 경주의 인간 실탄들이 모교를 위하여 젖 먹은 힘 다해 뛴다.나는 지금도 그당시를 생각하면 심장의 박동이 빨라진다. 100m 기록이 11.7초이니 뛰었다 하면 일등으었지.체육 대회는 대회의 의미 보다 경주 고을의 잔치였지.푸라다나스 나무 그늘밑에서는 추어탕 끓이느라 연기 피어 오르고 국수장수, 떡장수,엿장수들이 한몱하기도 했었지.그 중에서 가장 인기있는 것은 엿치기로 재수 좋으면 엿 실컨 먹을 있었고 잘 못되면 갖고온 돈 몽땅 털리기도 했지.서산에 해가 걸리면 텅 빈 운동장에 바람이 먼지만 이르키고....
첫댓글 형님 추석입니다. 잘 지내셨지요? 저도 성묘하고 보문단지에 있는 엑스포공연장 관람까지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는데요. 휴대폰을 집에 두고 갔더니 부재중 전화가 열개나 들어와 있는데 갈산댁 맏손자 병록의 10살 먹은 아들녀석이 제주도 해수욕장에서 실종되어 3일 만인 오늘 2시 경 발견되었다는 비보로 우울합니다. 우리 큰집 종손인데 인간의 운명은 뭔가 있다는 느낌을 요새 절실히 느낍니다. 조상이 돌봐주어야 하는데 늘 그 제주도 종손이 걱정이었거든요.
벌초도 묘제도 안온지 십년이 다 되어가는가 싶네요. 큰집이 잘되어야 하는건데...
형님 진도가 너무 나갑니다.일제시대 잠시 언급되다가 고등학교까지 마치고 서울로 향하기 직전이네요. 학교 다니실 때 이박구는 좀 천천히 하시고 손곡에서의 어려웠던 시절 더 좀 해보시지요. 청운을 품었을 한양생활도 기대 되지만은요 천북초등학교 다니던 시절이랑 손가락 하나 없어진 이야기도 궁금합니다
형님 결국 경고에는 체육특기생으로 들어가셨구만요. 대대장하실 때가 황금시절였겠지요? 류달수라는 분 이름은 익히 들었지만 결국 졸업 못하고 잘 못 풀렸는가 봐요. 고길우 선배님이랑 잘 나가신 건 아는데 자상한 부분이 없어 그냥 짐작만 하고요. 사과서리하는 내용에서 실명을 밝히면서 온라인상에 하시면 그 분들 명예에 손상이 우려되니 이니셜로 표현하시든지 좀 감추면서 표현하심이 좋을 것 같습니다.
면장을 하셨던 오금아재(종숙)의 위상이 대단하셨구만요. 저는 다만 일개 면장을 지냈셨던 선비같은 분으로 기억되는데요. 다 고인이 되신 분들 우리 그 어른분들의 그림자라도 따라가야 될낀데요.!!!!
박병록( 재종질 ) 아들의 비보 소식에 심심한 애도를 보낸다.피어 보지도 못하고 한 생명이 갔다니 애통하다.
형님! 추석 잘 지내셨습니까? 저는 고향에 다녀 왔습니다. 작은 삼촌께서 몸이 좀 안좋으시더군요. 그 외에는 두루 두루 별고없습디다. 장문의 글 2편 재미있게 잘 읽고 갑니다. 4. 19 무렵은 저도 얼핏 기억이 나는 것도 같고,
형님 3단뛰기와 달리기 하시는 모습은 저도 어릴 때 경주고등학교에 가서 봤습니다. 또 들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