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밭을 지날 때에 임을 만나면
입 맞추고 싶은데 울지않을까!
랄라랄라랄라 .....
보리 밭은 고향의 봄과 여름을 그리는 맘 가운데 넓게 펼쳐져 있어
눈을 감으면 바람과 함께 달음질 하는 그 초록 물결의 파도치는 들판이
아느 새 내 시야 가득 일렁인다.
긴 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견뎌 낸 보리밭 만큼이나 질긴 가난과 배고품으로
춘궁기를 내며 힘들게 봄을 일구워 낸 우리 부모님들의 고단한 삶도
아마 이 푸른 보리밭을 바라보시며 힘을 얻어 일어서셨을 것이다.
외가가 있는 진양재 넘어 남원군 아영면의 들에 비해 봄부터 보리밭이
푸르고 무성하게 자라 드디어 누런 황금물결을 이룬다.
나는 지난 6월 대평국민학교 5회 모임을 가면서 고향의 보리밭을 보겠다는 기대로
가기 전부터 많이 가슴을 설레며 기대하고 있었다.
그맘 때 쯤이면 누렇게 익어가고 있을 보리밭이 있는 들녘은 아무 곳에서도 보지 못하고
돌아와 여간 아쉽지가 않았다.
우리가 어려을 적,
도란에 사시는 이 아무개 선생님네가 다마네기라는 작물을 농사 짓는다고 이름이 났었는데,
내가 알기로는 우리 주위에 아무도 그 작물에 대해 관심이 없으셨다.
우선 묵고 살아야 하는 문제가 급한 시절이니 가을을 거둔 논과 밭에는 양식이 되는 보리를 심어
여름에 거두고 난 뒤 논에는 나락을 심고 밭에는 콩이나 팥을 심어 2모작을 한 셈이다.
나는 보리가 보이지 않는 논에서 수확이 가까운 양파 줄기들을 보고 맘이 허전했었다.
'보리가 쌀 보다 비싼데... 왜 들에는 온통 양파만 심겨있는지 모르겠어요."라고 푸념을 했더니
"보리보다 양파가 수익성이 높은 모양이지요."라고 옆지기의 성의 없는 답변이시다.
그리고 며칠 전 막내 여동생 더캬의 고향 친구로부터 양파 다섯 자루와 오디 5kg이 왔다.
송파에 사는 여자 형제들이 공동 구매를 한 것이란다.
보리밭은 논에 심겨 있어도 보리논이라 하지 않고 보리밭으로 부르는 것은
아마 마른 땅에 심겨 있어서 그렇게 부르지 않을지?
아무랫거나 보리논 보다 보리밭은 얼마나 낭만적인 어감인가!
그 보리밭은 겨울을 견디어낸 작고 파란 싹이 자라 작은 물결을 이루면서부터
아이, 어른 모두에게 설레임과 기대와, 그리고 그 힘든 환경에서도 삶의 여유를
느끼게 하는 아름다움이 있다.
우리는 이른 봄에 버들가지를 꺽어 피리를 만들어 불며 따뜻한 햇살이 내려쬐는
골목을 작은 짐승처럼 달음질하며 깔깔대고 즐거워했다.
그런데 우리는 버들피리를 피리라고 부르지 않고 홰때기라고 이름하여 불렀고
어른들은 그것을 집에서 불면 뱀이 들어온다고 집에서는 불지 못하게,
밤에 불면 도둑이 들어 온다고 밤에는 불지 못하게 하셨다.
초여름이 되면 누렇게 익어가는 보리밭 사잇길로 등하교를 한다.
아니, 우리들이 다니는 모든 길은 보리밭 사잇길일수밖에 없다.ㅎㅎㅎ
그 낭만적인 풍경 가운데 내가 있었는데 입 맛추고 싶은 사람이 있었더라면
정말 금상첨화였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왜 오늘에야 드누.ㅋㅋㅋ
그렇게 보리가 자라 이삭이 펴고 굵어져 누렇게 익어가면
바람이 지나면서 사그락, 사그락 탐스럽게 자란 보리이삭이 몸을 부딛기며 이야기를 한다.
햇살을 머금고 토실토실 살이찌면서 어느 새 보리밭은 가을논 보다 더 빛나고 누런 황금 들판이되는데
이 때 못된 세균이 보리이삭에 달라붙어 보리깜부기가 생긴다.
어린 우리들은 보리밭 사잇길을 걸어며 누구 논이라 할지라도 조심스레 들어가 보리깜부기를 뽑아낸다.
이것은 뭐 한 가지 장난감이 없는 그 시절에 우리에게 재미있게 가지고 노는 장난감도 되었다.
깜부기를 동무의 얼굴에 때려 검은 거으름이 얼굴에 묻어 우스깡스런 모습을 만들어
함께가는 모두가 깔갈깔갈 재미있어하며 장난을 치기도 하고
남은 보릿대는 적당한 곳을 잘라내어 보리피리를 만들어 불면서 서로 장난을 치며
허까나드리 좁고 가파른 길을 힘든지도 모르고 올라가게 했다.
보리가 누렇게 익는 계절이면 고향의 보리밭을 그리워하면서 생각키는 한 가지 잊혀지지 않는 추억이 있다.
그날은 토요일이라 언니와 내가 학교를 마치고 함께 집으로 돌아았다.
황아젱이를 지나 뫼똥거리 아래를 돌아 올라가는 양지샘골 아랫말 앞의 논들이 집안의 상동 오라버니댁 논이다.
논길을 가면서 우리 자매는 보리밭 여기저기에 보이는 보리깜부기를 뽑아 장난을 치기도 하고
보리피리를 만들어 불면서 느긋하게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는데 언니가 보리깜부기를 내 콧등에 두드려
아마 내 얼굴이 중국산 팬더곰처럼 만들어진 모양이다.
언니는 깔깔대고 웃으며 재미있어 어쭐줄을 몰라했고 나도 등달아 언니의 콧등에 깜부기 장난을 하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나보다 월등 키도 등치도 큰 언니가 내 맘대로 얼굴을 대어주지 않아 약이 올랐다.
징징거리면서 쫓아가다 보니 양지말 주막앞에까지 갔다.
그런데 주막앞에 나보다 한 학년이 위인 용기라는 남자아이가 남동생하고 싸리문 앞에 서서
우리를 쳐다보고 빙그레 웃고 있었다. 그 그림이 어제만 같이 생생하다.
닥종이 공예가 김 영희씨의 작품 닥종이인형 같이 생긴 머슴아 둘이 주막 앞 개울 가에 서서
나를 보고 빙그레 웃고 있는 것이다. 그 형제는 동네 사람들이 가물치네라고 부르는 엄마를 닮아
그 시절 아이들과 다르게 투실투실한 체격에 봄부터 집앞 개울에서 형제가 놀아서 그런지
원래 그런지 모르지만 검은 피부가 반질반질 윤이 났다.
짓광목 홑저고리와 바지를 둘둘말아올려 드러난 팔뚝과 종아리가 토실토실 귀엽고 종아리아래
검은 고무신도 너무 잘 어울리는 귀여운 머슴아들이었다.
도랑에서 얼굴을 씻으려 그 앞으로 갔다가 나를 처다보고 재미있어하며 웃는 용기와 눈이 마주친 나는
부그럽고 화가나서 나도 모르게 용기 콧등에다 보리깜부기를 두드려 주었다.
머슴아가 걷어부친 두 주먹을 불끈쥐고 순간 무서운 얼굴을 했으나 언니를 의식해서인지
금새 눈을 내려깔았으나 분명 부아가 나 있었다.
순간 어처구니 없는 일을 저질러놓고 나도 좀 겁이나서 짐짓 모르는체하고 도랑에 얼굴을 씻어며
물에 비친 내 얼굴을 보니 웃음이 났는데 등 뒤에서는 용기 동생이 제 형의 얼굴을 보고
깔깔 대고 웃어댔고 용기도 이내 제 동생과 함께 웃어댔다.
그런데 얼굴을 씻고 집으로 가는 고염나무 모퉁이를 돌아가면서 언니가 갑자기
"너는 이자 큰일 났다."라고 했다.
"....."
"월요일부텀 학교 마치믄 너 혼자 올 때 용기가 화가나서 저그 집 앞에 지키고 있다가
너를 쎄리(때려) 줄라고 할긴데 어찌 핵교에 댕기것노?"란다.
큰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이일을 언니가 이렇게 맹그라 놨으니 책엄을 지라.'고
집에 다가도록 언니를 졸라댔으나 해결책이 없었다.
집으로 들어가면서
"어므이, 이자 나는 핵교도 못가게 생깄어요." 눈물을 흘리며 하소연을 하는데
"와? 핵교가 없어졌나?" 장난기 많으신 우리 어머니의 반응에 나는 속이 터질 지경이 되어
'언니가 여차여차 하여 저차저차한 일이 일어 났으니 나는 어쩌면 좋겠는지.."
"언니가 그래도 네가 성질을 못되게 부려서 그리 된 일이니 어짜것노?" 라신다.
"어므이, 그래도 어므이가 가물씨 아지매 한테 잘 말씀 하시서
용기 머시마가 나를 떼리지 못하게 해 주시야지요."라고 통 사정을 해도
"나도 가물치 아지매는 심도 세고 무서버서 말 못한다.
와 딸을 그리 성질 사납게 키왔냐고 하믄 내가 할말이 있것나? 네가 책엄져라."
나는 이제 앞집 순애처럼 영 핵교도 못가고 집에서 동생이나 보믄서
지내게 될 것 같아 통곡이 나왔다.
그런데 헛간 앞에서 작두에다 풀을 썰고 있던 우리 농사일을 도우시는 아래재 준영이 아재가
"아무개야, 너는 참 운이 좋다. 오늘 후로는 그 머시마를 못 본다."
이렇게 반가운 소식이 없다.
"그 머시마를 못봐요? 아재, 와요? 이사도 안가는데."
"와 이사를 안가? 가(그애)들 오늘 배골로 이사간다카더라."
"배골로 이사요? 아재가 어찌 아셔요?"
참 이런 놀래고, 좋은 일이 있다니!
배골은 외가로가는 진양재를 넘어면 도장골, 배골을 지내
느더리 신작로로 나가게 되어있었다.
"아, 내가 아침에 들 논에 갔다 옴서 본깨 가물치 아지매랑 신랑이랑
벌쌔 이삿짐 한~짐 지고, 이고 진양재 넘어로 가고 있더라.
와, 너 올 때 그집 마당에 이삿짐 있는 거 안 봤나?
하매 가 저그 아부지랑 어무이가 한 행부 하고 와서 가들 데리고
이삿짐 마져 갖고 갔일끼고마"
그러고 보니 용기네 집 마당에랑 마루에 살림살이가 널려있고
방문이 모두 열려있었다는 생각이 난다.
운 좋은 나는 그렇게 아무 걱정 없이 학교를 다니게 되었고
용기네 집에는 우리 친구 하 춘자네가 이사를 왔다.
참 나는 운이 좋은 아이인지
6년 동안 추운 날은 추위를 더운 날은 더위를 피하여 춘자네 집에를 들어갔고
춘자 어머니는 우리 웃말 아이들을 싫은 내색 한 번을 하시지 않고
겨울에는 학교 가는 길, 돌아오는 길에 따뜻한 아랫목에 앉아 화로를 쬐게 해 주셨다.
더운 여름에는 더운 해를 피하여 마루에 않아 놀다가도 언제나 반가워하셨는데
좁은 집에 아이들이 들끓는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안았으리라 회상이 되고
새삼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보리밭을 회상하다가
옛날의 사람들과 사건들을 풀어본다.
참, 어느 세월에 보리밭이 관광 상품이 되어
블로그 탐방을 하다보면 광양 보리밭 구경을 하고 온 사람들의 글을 보게 되는데
경상도 보리 문디이도 옛 이야기가 된 것 같다.
올린 보리밭 그림들은 아쉽지만 집 가까운 올립픽 공원에 조성된 보리밭이다.
첫댓글 가물 가물 아련한 기억속의 추억들이, 한편의 수필을 읽덧 !
참 재미있게 묘사한 양희 언니 ! 저도 어린시절 기역들이 생생합니다 .
보리깜부기를 뽑아 장난을 치신 양희 언니 참 !큰 사건 이였네요 .
그래요 ! 언니 ,저의 집이 길가 집이라 학교를 오가며 웃말 양진말 춘자언니
친구들 !이 참 많이도 들락 거리며 놀다가 가곧했습니다 .
제가 생각해도 저의 어머니는 누구 한데나 늘! 친절 하셨던 분 같습니다 ,
언니 ! 어린시절 추억들 감사히 읽었습니다 .
무더위에 늘 건강 하시고 행복하세요 .^^
핵교를 못 다닐뻔한 큰 사건인데... 재미있으시다니.ㅋㅋㅋ
예지 동생의 말처럼 어머니께서 양지말 우리 동무들에게 참 친절하셔서
6년 동안 많이 도움을 받고 자랐는데 옛 사람들은 순박한 면은 있으나
좀 무딘 정서를 가지고 있어서 귀하고 감사한 것들에 대해 잘 몰랐던 것이 아쉽다는
회상이 되는구만. 평안하시게. 서울은 등골에 땀이 줄줄 흘러내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