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성하씨(達城夏氏) 동구 만촌동(晩村洞, 늦이) 마을
대구시내 효목 네거리에서 망우동 공원 쪽으로 가는 대로변, 청기와주유소 남쪽 인근에 대구의 토성(土姓) 중 중요성씨인 달성하씨(達城夏氏)의 집성촌이 있었다. 예부터 마을 이름이 만촌(晩村, 느지, 늦이)이었는데, 이곳은 달성하씨, 달성서씨 등이 문호를 차려놓고 강학에 힘쓰며 학문을 숭상한 나머지 생업은 등한시하여 농사철이 되어도 항상 이웃마을보다 농사일이 늦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인근 마을 주민들이 이곳을 농사일에 늦은 곳이라는 뜻에서 ‘늦이’라고 불렀던 것이 바뀌어 지금 이름 만촌이라는 마을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달성하씨의 시조는 중국 송(宋) 나라 대도독(大都督이)었던 하흠(夏欽)인데 고려시대 우리나라에 정착했다고 한다. 곧 달성하씨는 고려 중엽에 중국에서 귀화(歸化)한 성씨(姓氏)로. 하흠의 아들 하용(夏溶)이 호병(胡兵)을 물리친 공훈(功勳)으로 달성군(達城君)에 수봉(受封)되면서부터 대구부남(大邱府南) 입암골(立巖골), 지금의 봉덕동(鳳德洞)에 정착함으로써 달성(達城)으로 본관(本貫) 삼았다 한다.
만촌동에 하효자정려각(夏孝子旌閭閣)이 있는데, 그 정려각 안에 있는 비석은 대구경북에서 가장 오래된 효자비 중의 하나이다. 고려 때 이부시랑(吏部侍郞)을 지낸 하광신(夏光臣)의 지극한 효성을 기리기 위하여 고려 충숙왕(忠肅王) 14년인 1327년 조성에서 세운 것이다. 정려각은 처음에 달성하씨의 종산인 수도산 부근에 세워졌으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 졌다. 그래서 1761년 만촌동 형제봉 기슭에 중건한 것을 일제 강점기에 이곳으로 다시 옮긴 것이라 하는데, 요즘 깨끗하게 단장을 하여 탐방자를 맞이하고 있다.
달성하씨가 희성(稀姓)이라 크게 번성하지는 않았지만, 종문(宗門)의 행적(行蹟) 등을 보면 충(忠)과 효(孝)에 명성(名聲)을 높인 인물이 많았다. 그런가 하면 벼슬길에 올라 종문(宗門)뿐 아니라, 나라를 위해서 헌신(獻身)한 분도 많았다. 하광신(夏光臣)의 13세손(孫) 하운서(夏雲瑞)는, 선조(宣祖) 때 무과(武科)에 올라 훈련원(訓練院) 판관(判官)에 이르렀고, 그의 자손들은 3세(世)에 걸쳐 여덟 사람이나 등과(登科)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가 살던 곳에는 팔과정(八科亭)이 세워졌다.
달성하씨는 영조(英祖) 이후에는 사환(仕宦)보다는 학문(學問)과 덕행(德行)으로 입신(立身)한 인물들이 많이 나왔다. 하운서(夏雲瑞)의 오대손(五代孫) 열암(悅菴) 하시찬(夏時贊)은 예학(禮學)에 밝아 팔례절요(八禮節要)를 저술(著述)했고, 만년(晩年)에는 독무암서(獨茂巖棲)라는 서재(書齋)를 짓고 유학(儒學)에 정진(精進)하여 문명(文名)을 날렸다. 열암문집 5권은 이 때에 쓴 것으로 서문은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이 쓰고 발문은 이조판서 서능보(徐能輔)가 지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달성하씨는 씨족(氏族)의 역사에 비(比)해 벌족(閥族)한 성씨(姓氏)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많은 씨족이 멸문지화(滅門之禍)라 할 만큼의 수난을 겪은 데 있다.
그런 중에도 하광신(夏光臣)의 13세손 동추(同樞) 하인경(夏仁敬)은 가문(家門)의 소자출(所自出)을 기록, 오늘의 종통(宗統)을 확연하게 한 큰 공(功)을 세운 인물인데, 임진왜란 당시 이 사람을 제외한 대개의 하씨는 희생(犧牲)을 당하는 참화(慘禍)를 입었다. 그러나 다만 하우신(夏右臣)의 14세손 참의(參議) 운복(雲福)이 호남(湖南)에서 임진란(壬辰亂)에 기병입공(起兵立功)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 병조참의(兵曹參議)로 추증(追贈)되었으며, 그런 연유(緣由)로 그 후손들이 현재 호남에서 세거한다.
학명(學名)으로 알려졌던 인물들은 영조(英祖) 때의 하창징(夏昌徵)과, 숙종(肅宗)때의 인물 하기징(夏己徵)도, 하시찬(夏時贊)에 앞서 세상에 나온 분들이다.
그 뒤로 추모재(追慕齋) 하정익(夏正益)이 정조(正祖) 때에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지낸 문학인(文學人)이었고, 순조(純祖) 때 하석규(夏錫圭)는 금애집(錦涯集)을 썼으며, 졸수(拙搜) 하정화(夏正華), 경재(警齋) 하치규(夏治奎), 명언(明彦) 하우봉(夏遇峰)은 학행(學行)과 덕망(德望)이 높아 교도후진(敎導後進)하여 향리(鄕里)가 추숭(追崇)하였으며, 철종(哲宗)때의 하준(夏濬)과 하연(夏演)도 선문학(善文學)하여 시문집(詩文集)을 남겼다.
또 오재집(悟齋集)을 지은 오재(悟齋) 하동기(夏東箕)와 금은집(琴隱集)을 남긴 하동규(夏東奎), 그리고 서파집(西坡集)을 남긴 서파(西坡) 하동만(夏東萬)등은 모두 고종(高宗) 때의 인물로 달성하씨(達城夏氏)를 빛낸 인물들이다. 그리고 운정(雲亭) 하우근(夏瑀根)도 근대(近代) 하씨(夏氏)의 선각자(先覺者)로 종인(宗人)들이 흠모(欽慕) 하였다.
돌이켜 보면, 한말(韓末)과 일제시대에는, 철저한 배일정신(排日精神)으로, 일제(日帝)의 호적(戶籍)에 취적(就籍)을 거부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토지조사 사업에도 항거(抗拒)한 결과로 시랑공(侍郞公)의 정려각(旌閭閣) 땅 수천 평(數千坪)과 그 외 많은 토지를 빼앗기어 국유지(國有地)로 흡수되기도 하였다.
지금의 달성하씨(達城夏氏)들은 대구 수성구 만촌동(晩村洞)에서 조상(祖上)들의 유업(遺業)을 받들고자 힘쓰고는 있지만, 시대(時代)의 변천(變遷)에 따라 많지 아니한 일가(一家)들도 도시화에 따른 역풍으로 고향(故鄕)을 떠나고 있어, 하씨(夏氏)의 명맥(命脈)만 유지(維持)하고 있는 처지가 안타깝다.
통계청(統計廳) 인구조사(人口調査)에 따르면 달성하씨는 1985年에 總 713家口 2,823名이던 것이, 2000年에는 1,250가호 4,028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으나,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는 어쩐 일인지 2,194명으로 조사되었다.
이 문중의 유적으로는 위 하효자정려각, 독무재(獨茂齋) 외에 현재 망우당공원에 ‘달성하비유허비(達城夏氏遺墟碑)’가 세워져 있는데, 이가원(李家源)이 짓고, 서수생(徐首生)이 글씨를 썼었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達城은大邱의舊號이다當初新羅時에는達句火縣또는達弗城이요景德王時에이르러大丘縣으로고쳐졌고朝鮮世宗時에는郡으로昇格하고世祖時에는都護府로昇格되어드디어嶺南의雄府로크게발전되었다東國與地勝覽에依하면達城府에는토박이姓氏다섯이살고있는데夏氏가裵白徐李와함께列立하였다達城夏氏世譜를詳考하면夏氏는아득한옛날春秋時代에서비롯되어秦漢唐을거쳐趙宋에이르러漸次繁昌하게되었으며始祖大都督欽公이宋에서高麗에옮겨왔고그의아들溶이胡兵을물리친功勳으로達城君에受封되면서부터府南立巖골지금의鳳德洞에定着하고達城으로貫을삼았다達城君의아들致雲은大將軍이요曾孫에光臣과右臣두兄弟가있었는데昆光臣은明宗때벼슬이吏部侍郞에이르렀으며季右臣은淳州府使로到任하여그곳에定着하였으므로그後孫들이湖南의淳昌潭陽一帶에世居하고特히光臣은至極한孝誠으로老母를奉養하였기에그에關한傳說的인이야기가오늘에이르기까지傳해오고있다어느날病床에누운老母가光臣에게복숭아가먹고싶다고하였으나때는깊은겨울이므로求得하기가어려웠다光臣이뒷산에올라가自己孝誠이不足함을恨歎하고있을때瞥眼間큰호랑이가나타나꼬리를흔들며등에타란시늉을하기에光臣이그등에타고어떤산골외딴집으로가게되었는데그집에서仙人으로부터복숭아를얻어돌아왔다고한다그뒤母夫人의喪을當하여墓곁에三年廬墓하였으므로忠肅王丁卯年에旌閭門을세우게하고子孫들에게는赴役을免除해준事實이嶺南地理誌와江漢黃景源의孝子夏公旌閭碑에실려있다孝子光臣에서副護軍時雨에이르기까지十四世에걸쳐벼슬이이어졌으며특히光臣의十二代孫同樞公仁敬은壬辰倭亂을當하여十四歲의어린나이로祖上의來歷을적어後孫에게傳함으로써家門의所自出을알게하였으며그의아들雲瑞는宣祖때武科에올라벼슬이訓練院判官에이르렀고自身과子孫三世에八人이登科하였으므로그가살고있던옛터에八科亭이있었다夏氏의先世에있어서는거의武勳으로門戶를빛내어왔으나英正以後에는學文과德行을닦아儒家로써의새로운機運을열었다雲瑞의五代孫悅菴時贊은禮學에밝아일찍이八禮節要를著述하였고晩年에獨茂巖棲란書齋를짓고더욱學文에精進하여文名이높았으며悅菴文集五卷이上梓되어序는梅山洪直弼이짓고跋은吏曹判書徐能輔가지었다그弟子徐隣淳등이스승의遺德을追慕하여獨茂齋를짓고景德祠를세워每年三月上丁에享禮를치르고있다이제大邱市의發展에따라夏氏故庄의周圍가鬧熱한都市로變貌되어滄桑의느낌이없지않았으므로夏氏의後孫은先祖의빛나는遺蹟이점차湮滅될까두려워하여峨峨遺墟碑를이곳嶺南第一關에세워由緖깊은一家의歷史를後世에길이傳하려한다써銘하여가로되達伐의土姓으로近千載흐른오늘지난歷史燦然토다出天한그孝行의旌閭閣이우뚝솟고높이쌓인그陰德은沙鹿精靈어렸도다武勳으로빛낸傳統선비行實새로닦아獨茂齋그글소리琅浪히들리는듯아늑한江亭東山瑤花芳草瀾漫하니이빗돌에글을새겨千秋에알리노라 檀紀四三二十年丁卯淸明節 文學博士眞城李家源謹撰,文學博士達城徐首生謹書,達城夏氏大宗中建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