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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심포지움 2000년 6월21일 프레스센타
전쟁과 인권-학살의 세기를 넘어서
【진행순서】 전체사회 :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13:00∼13:10 인사말 : 김중배(참여연대 공동대표) 13:10∼13:20 헌 시 : 이기형(시인)
【제1부】
사회 : 강창일 (배재대 교수)
13:20∼13:40 주제발표 1 :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학살의 실태" 발표자 : 강정구(동국대 교수) 13:40∼14:00 주제발표 2 : "민간인 학살문제 왜, 어떻게 해결되어야 하나" 발표자 : 김동춘(성공회대 교수) 14:00∼14:20 주제발표 3 : "민간인 학살사건에 관한 법적인 문제점과 해결방향" 발표자 : 강금실(변호사) 14:20∼15:20 토 론 토론자 : 이미경(국회의원), 서중석(성균관대 교수), 이장희(한국외대 교수) 15:20∼15:30 휴 식
【제2부】 사회 : 이영일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소장) 15:30∼16:50 유족회 및 시민단체의 활동 경과보고
1. 전남함평지역 : 정근욱 회장(사. 함평사건희생자유족회) 2. 고양금정굴 : 김양원 위원장(고양금정굴양민학살사건진상규명위원회) 3. 강화지역 : 서영선 대표(강화희생자유족회) 4. 전남나주지역 : 이상계 회장(나주동창교양민학살사건유족추진위원회) 5. 지리산외공마을 : 김석창 실행위원(외공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대책위원회) 6. 전남화순지역 : 김성인 의원(화순군의회양민학살진상조사특별위원회) 7. 산청군 시천.삼장지역 : 정맹근 회장(시천.삼장양민학살사건피학살자유족회) 8. 여수지역 : 이춘송 대표(여수남면양민학살유족회) 9. 익산역오폭사건 : 이창근 부회장(익산역미군폭격유족회) 10. 대전산내학살사건 : 정준섭 (대전형무소산내학살진상규명유족회) 11. 경북문경석달마을 : 채의진 대표(문경양민학살피학살자유족회) 12. 제주 4·3 : 박찬식 연구실장(제주4.3연구소)
16:50∼17:00 성명서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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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의 실태 강 정 구 (동국대학교 사회학과) I. 머리말
미군의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에 대한 미국 AP통신의 발표가 있자 한국전쟁 중에 저질러진 양민학살 일반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이제까지 이 양민학살에 대하여 제한된 일부의 문제제기가 있어 왔지만 사회적 및 국제적 쟁점이 제대로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미국계 통신사가 이를 대대적으로 발표하자 금방 쟁점이 되는 현실에 대하여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 없다. 노근리 양민학살은 전쟁 중 저질러진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의 대표적 경우이긴 하지만 미군의 양민학살 전체에 비하면 지극히 조그만 부분집합에 불과하다. 또 미군의 양민학살 전체 역시 6.25전쟁 전후 저질러진 양민학살 일반이라는 전체 모집합의 부분 집합에 불과하다. 이 글은 한국전쟁 중 저질러진 양민학살 전체 곧, 양민학살 일반에 대한 포괄적 이해를 위하여 다양한 기준에 의해 양민학살의 양태를 분류하고 분석한다. 첫째는 연대기적 분석이다. 이는 1948년 2월 5.10단독선거를 분쇄하여 민족분단을 막고 통일국가를 수립하기 위하여 무력투쟁을 공식적으로 선포한 2.7구국투쟁이라는 '작은전쟁'에서부터 6.25전쟁이 끝나는 1953년 정전까지의 전 기간에 걸쳐 특정 계기를 기준으로 나누어 각 기간의 양민학살 양태를 분석한다.1) 둘째는 학살주체를 기준으로 한 분석이다. 학살주체는 미군, 남한 국방군이나 그 산하 부대인 특무대 등 특별기관, 경찰, 서북청년단과 같은 비정규무장대, 이들과 중복되지만 4.3항쟁의 피해대상인 제주도 출신, 북한인민군을 주축으로 한 북한점령기관 일반, 빨치산, 지방 좌익으로 대별 될 수 있다. 이들 각 주체별로 학살의 양태나 특성들을 제시한다. 셋째는 피학살자를 기준으로 한 분석이다. 피학살자는 평택이남의 보도연맹원, 형무소 수감자, 제2전선 지역주민, 피난민, 부역혐의자, 공비 및 통비 혐의자. 국민방위군이나 불심검문 또는 가택수색에 의해 뚜렷한 혐의도 없이 학살의 대상이 되는 불특정 다수민간인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넷째는 학살행위에 따른 분류이다. 이에는 총살, 생매장, 초토화작전에 의한 불태우기, 수장, 일본도에 의한 참살, 굶어죽이기, 때려죽이기, 폭격이나 비행기에서의 기총사수 등에 따른 분류를 하며 덧붙여 학살의 야만적 행위유형에 따른 사례를 제시하겠다. 한국전쟁이 특히 이승만 정권에 의해 저질러진 양민학살이 얼마나 더러운 전쟁이었는지를 보여주겠다. 이들 세부적 분석은 주로 남한 땅에서 저질러진 양민학살을 대상으로 한다. 북한지역은 이러한 유형 분류식 분석보다는 전반적인 양태를 서술적으로 제시하면서 자료가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유형분류를 시도하겠다. 이들 유형분류에 이어 북한과 남한의 양민학살 일반에 대한 상호비교를 한다. 이 글은 인과적 요인분석을 시도하기 보다 누구도 쉽사리 접근하지 않으려는 '금기'의 영역에 대한 사실적 차원의 포괄적 구도와 특성을 제시하여 한국전쟁 양민학살 일반에 대한 포괄적 이해를 증진시키는 데 목적이 있다. 또 지면의 한계 때문에 연대기적 분석에 지면의 대부분을 할애하고 여타의 분석은 심층적 분석보다는 단순한 유형화 수준에 머문다. 이 글에서는 양민학살을 '아무런 위협이 없는 데도 불구하고 그저 좌익, 우익, 부역이라는 집합체의 성원(가족을 포함하여)이라는 이유 및 혐의만으로 무고한 살인을 저지르는 행위'를 의미하는 것으로 교전중의 살인행위를 제외하며 재판에 의한 살인행위라 하더라도 학살의 범주에 포함시킨다. 이는 헬렌 페인이 유엔협약의 제노사이드(genocide)정의를 재 정의한 "한 집합체 성원들의 생물학적 및 사회적 재생산의 정지를 통해 직·간접으로 그 집합체의 신체들을 멸한다는 목적으로 희생자들의 항복 또는 위협의 결여에도 불구하고 가해자에 의해 속행되는 행위"(Fein, 1990)라는 넓은 의미의 정의가운데 살인 행위에 국한하여 한정적으로 정의한 것이다. 그러나 공비나 통비를 제외시켜 양민을 범주화하는 우리 사회의 통념을 거절하고 이념적 지향을 가진다고 해도 양민의 범주에서 제외할 수 없는 것으로 정의하여 양민의 범주를 확대하였다. 이는 인권의 개념을 보다 확대하여 적용시켜야 한다는 필자의 개인적 가치관의 반영이다. {대한 경찰전사}는 부역자를 이념적 공명과 실천을 함께 하는 적극분자, '반정부 감정포지자'로서 '소극적 공산분자', 대세에 부화뇌동하는 소극분자, 강압 밑에 피동적으로 부역한 소극분자로 4가지로 분류하고 있다.2) 반정부 감정포지자를 부역자로 분류하는 것은 당시의 경찰이 빨갱이와 부역자를 얼마나 자의적으로 정의하는 것인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비록 이러한 4가지 범주에 해당된다 하더라도 일반 형법상 범죄요건이 성립되는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면 이러한 이념적 지향의 소지 자체가 재판에 의해서든 아니든 유죄 또는 살인의 소이(所以)가 될 수 없다고 본다. 따라서 이 논문은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남한정부의 '최 상층부'의 명령에 의해 처형된 1800여명의 정치범 역시 그들이 형법상 범죄 요건이 성립되지 않는다면 양민이라고 범주화된다.
II. 양민학살의 연대기적 양상
한국전쟁 중에 저질러진 양민학살에 대한 전반적 구도를 연대기적으로 포괄하여 정리해보면 아래와 같다.
1. 작은 전쟁기의 양민학살
한국전쟁의 시발은 엄밀한 의미에서 50년 6월 25일이 아니라 1948년 남한의 좌익이 분단을 막기 위하여 5.10선거를 무산시키고, 미군정과 이승만과 한민당 등 분단세력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무력투쟁을 전개하여 통일을 이루려는 무력항쟁 선언인 2.7구국투쟁부터이다. 한국전쟁의 첫 단계인 작은 전쟁 기간 주로 제주4·3항쟁이나 여순항쟁과 같은 인민항쟁, 유격대투쟁, 38선상의 남북충돌로 특징화할 수 있는 데 이 기간에 10만 명에 가까운 인명피해가 발생하였다(Merrill, 1983:136). 이 기간의 양민학살은 주로 인민항쟁과정에서 발생하였고 또 49년부터 본격화된 유격대 소탕전 과정에서 구사된 견벽청야 작전 등으로 주로 문경(채의진, 1995)같은 산간지역 주민들이 학살당하였다.
1) 4·3항쟁과 양민학살 4·3항쟁은 제주도민이 분단을 막기 위하여 5.10선거를 분쇄하기 위한 통일투쟁이었고, 또 도민이 대거 참여했다는 점에서 전 민중적 항쟁이라는 특성 외에도 전체 인구의 10%에 가까운 3만 명 이상의 희생자를 내고 실제 희생자의 85% 이상이 무고하게 또 무차별적으로 학살되는 참상을 겪은 양민학살이라는 특성을 띤다. 4·3항쟁에서 미국과 이승만이 이러한 학살만행과 대규모 살상행위를 주도한 것은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항쟁발발 초기부터 미국은 딘 군정장관의 정치고문인 CIC의 고급장교를 통하여 경비대장 김익렬에게 온갖 회유와 협박으로 국제적으로 범죄시 되어 있는 초토화작전을 촉구하였으나 실패하였다(김익렬, 1994: 312-314). 이에 제주도 미군사령관을 강경파인 브라운으로 교체하고, 또 경비대장을 박진경으로 교체하여 한 달여 만에 <조선일보>가 보도한 것처럼 무려 6천 명을 체포하는 대규모 토벌작전을 전개하였다. 이후 이승만 정권은 해안선 5km 이상 떨어진 지역을 무조건 적성지역으로 지정하여 48년 11월부터 무자비한 초토화작전을 감행하였다. 이승만 정권의 초토화작전에 의한 양민학살에 대해 미국은 그 책임을 부인하고 있지만 정부수립 9일 만에 미국은 한국과“주한미군은 대한민국 국방군에 대한 전면적인 작전상의 통제를 행사한다”고 규정하는 '한미군사안전잠정협정'을 체결하였고, 당시 제주도에는 임시군사고문단(PMAG), 방첩대(CIC), 미군 59중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이 점에서 미국의 동시책임은 면할 길이 없다(강정구, 1999). 2) 여수군민항쟁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14연대의 대다수인 3천 여명이 제주4.3항쟁의 진압출동명령을 거부하고 벌인 군인봉기에 여수의 좌익들이 가세하여 民軍봉기로 발전한 것이 여순군민항쟁이다. 이 항쟁의 진압과정에서 보복적인 테러, 학살, 약탈, 방화가 대대적으로 진행되었다. 관련자 색출작업은 전 주민을 학교 등 공공장소에 집결시켜 놓고, 주로 "머리가 짧은 자, 군용팬티를 입은 자, 손바닥에 총을 든 흔적이 있는 자, 흰 지까다비를 신은 자 등" 외모에 의하여 부역자를 골라내어 일부는 "즉석에서 곤봉, 개머리판, 체인 등으로 무참하게 타살되거나 또는 총살을 면치 못하였으며" 백두산 호랑이로 소문난 제5연대 김종완 대대장이 교정의 버드나무 밑에서 일본도를 휘둘러 즉결 참수처분을 하기도 하였다. 전라남도 보건후생부의 이재민 구호자료에 따르면 여수를 포함한 7개 지역에서 2,634명이 사망하고, 4,325명이 행방불명되었다고 한다(안종철, 1998). 반란군은 좌익민중들과 연합하여 항쟁을 전개하였으나 진압군에 격퇴 당하여 지리산 등의 산악으로 들어가 2.7구국투쟁 이후 형성된 야산대와 결합하여 본격적인 유격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렇게 하여 남한의 133개군 중 무려 118개 군에서 유격전구가 형성되어 작은 전쟁은 지속되었다. 이 유격대 토벌전쟁에서, 특히 11사단(사단장 최덕신)이 행한 견벽청야(堅壁淸野) 작전은 문경, 함평 등 산간지역에서 수많은 양민을 학살하고, 집과 재산을 파괴하였다. 이 작은 전쟁의 인명피해는 무려 10만에 이른다. 이 가운데 양민피살 숫자가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제주의 2만 5천, 여순항쟁에서 행방불명이 된 4300여명 대부분이 양민일 가능성이 높아 최소한 3만 명 이상일 것이다.
2. 6.25전쟁 초기의 양민학살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전쟁 확대, 곧 이어 27일 미국의 전쟁개입 선언, 28일에 한강 북방에 대한 미 공군과 해군의 포격이 시작되면서 한국전쟁은 새로운 국면, 곧 전면전쟁으로 진입했다. 이어 7월 5일 오산에 미국의 지상군이 투입되면서 본격적인 전쟁과 양민학살은 진행되었다. 미군이 오산전투를 치르기 이전, 곧 서울 점령전투나 그 직후는 양민학살이나 대량의 살상이 별로 전개되지 않았다. 유성철의 회고와 같이 "인민군이 서울 점령 3일째인 7월 1일부터 다시 남진을 시작함으로써 6·25는 제한전에서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한국일보 편, 1991:92). 이 시점, 곧 미군의 직접적인 개입에서부터 양민학살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의 양민학살 유형은 약 30만에 이르는 보도연맹원에 대한 집단적 학살, 6.25발발 시 1800여명의 대전형무소 수감자에 대한 집단적 처형과 같은 수감자 학살, 노근리나 이리역 같은 미군에 의한 학살, 북한인민군과 빨치산 및 토착 공산세력에 의한 학살, 수복과정에서 남한 군과 경찰에 의한 부역혐의자에 대한 무차별 학살 등이다. 1) 국민보도연맹원 학살 보도연맹은 1949년 11월 28일자 권순열 당시 내무부장관의 담화문에서 알 수 있듯이 좌익세력에 대한 통제와 회유를 위하여 만든 전국적 조직으로 연맹원이 30-35만 명에 이르렀다. 6.25전쟁이 터지자 이들 연맹원이 북한 점령의 첨병역을 할 것을 우려하여 평택이남의 전체 회원에 대한 학살명령이 최고위층에서 내려져 전국에 걸쳐 연맹원에게 자행된 집단학살이었다. 경남 진양군 대각면에서 이루어진 학살에 대한 증언은 전쟁초기에 이루어진 학살의 유형을 짐작케 한다.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보도연맹원을 소집하여 훈련을 시켰다. 전쟁 후 3∼4일 후부터 훈련이 시작되었다. 면에서 한 40∼50명이 훈련을 받았다. 2차에 걸쳐 사람들이 죽었다. 1차는 수곡면에서 4∼5명되었는데 먼저 잡아가 버렸다. 거물급이라고 생각되던 사람들이었다. 2차는 몇 차례 소집훈련을 한 후 하루는 훈련하던 사람들을 모두 묶었다. 죽은 사람이 40∼50명되었다. 명석(진양군 명석면) 근처의 골짜기에 몰아넣고 일제사격을 해 죽였다고 한다(정진상, 1994:118).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학살된 보도연맹원은 20-25만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3) 보도연맹원에 대한 초기의 집단적 학살은 그 이후 연쇄적 학살의 고리를 형성했다. 곧, 보도연맹에 연루되어 학살된 유가족이 그 이후 진주하는 북한인민군에 힘입어 남한의 공무원, 경찰, 지주계급 등에 대한 보복살인을 자행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 보복학살은 9·28수복 후에 주로 우익과 경찰 등에 의한 역 보복살인이라는 악순환을 가져와 더욱 더 동족상잔을 초래한 원인제공을 하였다. 만약 보도연맹원에 대한 이승정권 최고위층의 학살지시가 없었더라면 보복학살의 악순환이 훨씬 덜했을 것이라는 추론을 가능하게 하는 경험적 사례를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청주기독교방송이 확인한 바에 의하면 충북 괴산군 소수면에서는 지서장과 의용 소방대장이 학살명령에도 불구하고 200명을 살려주었다. 결과적으로 인민군 점령기나 국방군 수복 시에도 아무런 학살행위가 일어나지 않았다.4) 2) 형무소 수감자의 집단 학살 1999년 12월 16일 미국 국립문서기록보존소에서 비밀 해제된 한국전쟁 관련 문서에서 확인된 바와 같이 1950년 7월 4일에서 6일까지 1800여명에 이르는 대전형무소 정치범이 군경에 의해 집단 학살되었다.5) 이 같이 6.25전면전쟁 초기에 형무소에 있던 좌익 수감자들이 최고위층의 지시에 의하여 대대적으로 학살되었다. 당시 형무소 재감자는 3만 7천 여명이었는데 평택이북 재감자 1만7천을 제외한 2만 명이 학살된 것으로 보인다. 이 재감자에 미결수는 포함되지 않아 거의 기결수 숫자와 비슷한 것으로 추정되는 미결수도 대부분 처형된 것으로 보여 실제 형무소 재소자의 학살은 2만을 훨씬 능가할 것으로 보인다. 대구의 경우 1402명(김삼웅, 1995:166-167), 대전의 경우 약 3천명이 학살된 것으로 알려졌다(서중석, 1999:584-586). 부산의 경우 기·미결수를 합하여 약 6천 명이 학살되고 불심검문 등에 체포된 혐의자 등과 함께 처형되어 영도 동삼동 골짜기, 김해 대동면 신어산, 사하구 부평동 삼박골짜기, 송정동 구더포와 광어촌 사이 골짜기에 매장되고, 일부는 오륙도와 영도 앞 바다에 철사로 묶인 채 수장되었다. 이들 시체가 대마도에 밀려와 어장에 걸려 어민들이 피해보상을 요구할 정도로 대규모였다(김상웅, 1996:105-107). 국가보안법 피의자로 재판중인 통일일꾼이었던 손병선이 재판정에서 개진한 모두진술은 민간인 학살의 체험과 통일일꾼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잘 보여 준다. 저의 아버지는 8·15해방 이후 조국의 진정한 자주독립과 통일을 위하여 활동하다가 두 차례에 걸쳐 옥살이를 했으며 출옥 후에는 고향인 충북 영동에서 부산의 산 마을에 정착했습니다. 제가 23살 되던 때에 동대신동의 산 위 저희 마을 옆 초량 공동묘지에는 매일 오전 10시와 오후 4시에 미제 G.M.C.트럭이 한차 가득히 부산형무소에서 처형된 사상범들을 싣고 와서 가마니로 덮어놓은 것을 보면서 어린 나이에도 이 모든 비극이 해방이후 조국이 분단된 까닭이라는 것을 절감했습니다(반핵평화운동연합, 1992:2).
3) 남한에서의 미군 양민학살 6.25전쟁 초기 남한 땅에서의 미군 양민학살은 노근리 등 일부 지역에 한정되어 있는 현상이 아니라 보편적 현상이었다. 당시 중학교 1학년 학생이었던 진주 출신의 어느 衁 교수의 전쟁체험담을 들어보자. 전쟁 초기 그의 가족은 어느 초등학교에 머물렀다. 그런데 갑자기 미군 비행기 두 대가 그 초등학교에 기총사격을 가했다. 그래서 인근 지역인 의령지역으로 긴급히 피난지를 옮겨 다시 그 지역의 어느 초등학교에 투숙하게 되었다. 그런데 또 다시 미군 비행기가 초등학교를 사격해 사람들이 죽게 되었다. 이 때부터 사람들이 많이 운집하는 곳은 안전하지 못하다고 판단하여 산골짜기로 숨어 들어갔다. 그러나 산골에서도 집이 쉽게 노출되는 지역은 곧 바로 미군비행기의 표적이 되었다. 그래서 이들은 결국 산골짜기의 외딴집에 피신하여 폭격을 피할 수 있었다.6) 이러한 전쟁 체험은 미군비행기의 무차별 폭격에 의한 양민학살이 특수한 조건에서 특수하게 이루어졌다기보다는 6.25전쟁 초기 남한 땅에서 보편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미군의 양민학살에 대해서는 "공산당을 혐오와 불신으로" 묘사해왔던 {뉴욕타임스} 대구특파원까지도 시인하고 있다. 한국인들이, 공산당이 그들의 고향과 학교를 세워둔 채로 퇴각한 반면, 가공할 무기로 싸우는 유엔군이 일단 주둔했던 도시는 까맣게 하고(초토화하고) 떠나는 것을 보았을 때에 공산당은 심지어 퇴각 중에도 도덕적인 승리를 기록했다.7) 이번에 세계적인 쟁점으로 된 노근리 학살사건도 이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1950년 7월 25일 충북 영동 황간면 노근리의 양민을 학살한 쌍굴학살 사건의 진상규명 관계자인 정은용씨의 진술은 전쟁중 미군의 남한 내 양민학살에 대한 조직성, 공식성, 비우발성, 명령성, 체계성 및 범죄성을 잘 말해 준다. 그들이 피난시켜 주겠다고 동네 사람들을 목적 의식적으로 모은 점, 폭격기와 공동작전을 펼친 점, 굴다리에서 사흘간 계속 총질을 해댄 점 등을 볼 때... 그래서 현장의 미군이 말했다는 것처럼 미군은 실제로 '의심나는 피난민은 모두 죽여라'는 명령을 받았을 겁니다. 피난민 조사를 통해 그들은 비무장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살인을 계속한 것은 대전에서 당한 것에 대한 복수심과 피난민을 살려 둘 경우 언제 인민군들과 합세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라고 봅니다. 또 일단 '학살'을 시작했으니 '전멸'시켜 사건을 외부에 알리지 않으려 했을 수도 있겠습니다(오연호, 1994:44; 정은용, 1994). 이러한 정은용씨의 추론은 정확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아래의 99년 9월 30일자 {한겨레신문}의 보도는 이를 확인하였다. ◇ 1950년 7월24일 미 1기갑사단 명령(당일 오전 10시 휘하 8기갑 연대 통신문): 피난민이 (방어)전선을 넘지 못하도록 하라. 넘으려 하면 그가 누구든 발포하라. 여자와 어린이의 경우 분별력 있게 대처하라. ◇ 7월26일 아침 미 8군 본부 통신명령: 반복하지 않겠다. 언제 어떤 피난민도 전선을 넘는 것을 허용하지 마라. ◇ 7월26일 미 보병 25사단 통신문: 사단장 윌리엄 킨 소장은 전투지역에서 움직이는 모든 민간인은 적으로 간주되어야 하며 발포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 7월27일 미 보병 25사단장 윌리엄 킨 소장 (재차) 명령: (남한 양민들은 한국 경찰에 의해 전투지역에서 소개됐기 때문에) 전투지역에서 눈에 띄는 모든 민간인은 적으로 간주될 것이며 그에 따른 조처를 취할 것이다. 참전 병사들은 또“중화기 중대장이었던 멜번 챈들러 대위가 상급자와 연락을 취한 뒤 굴다리 입구에 기관총을 설치하고 발포할 것을 지시했다”고 말했으며, 유진 헤슬먼은“챈들러 대위가 '모두 없애버리자'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당시 대령으로 대대를 지휘했던 허버트 헤이어(88)는 “총격사건에 관해 알지 못하며 그런 명령도 내리지 않았다”고 발뺌했으나, 참전 병사들은“헤이어 대령이 당시 작전을 하급자에게 위임해 놓았다”는 상반된 증언을 했다. 역시 참전 병사인 텔로 프린트는“나와 다른 병사들도 미군의 공습을 받게 돼 피난민들과 함께 배수로로 몸을 숨겼다”며“누군가가, 아마도 미군 병사들이, 우리들을 향해 총을 쏘았다”고 말했다. 이렇게 미군의 양민학살이 상부의 공식적인 명령에 따라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공식문서로 재확인됨에 따라 전국 여러 곳에서 유사한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 요청과 증언이 쇄도하였다.8) 충북 영춘 곡계굴에서도 1951년 1월 20일 4백 여명이 학살된 것으로 주장되고 있다. 당시 폭격장면을 직접 목격한 김옥이씨의 증언이다. 폭격 있기 하루 전에 피난민들이 굴에서 나오는데 한 3-4백 명은 족히 됐다. ..그런데 그 다음날 또 폭격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나서 다시 모두들 그 굴로 들어갔다. 그러자 말자 미군정찰기가 와서 정찰을 하고 가더니 30분쯤 있으니까 또 다른 비행기가 와서 폭격을 해댔다9) 노근리 양민학살을 바탕으로 미군의 양민학살에 관한 몇 가지 특성을 살펴보겠다. 첫째, 노근리 양민학살은 미군이 저지른 수많은 양민학살 가운데 지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둘째, 미군의 양민학살은 비무장 피난민인 줄 뻔히 알면서도 무차별 비행기의 기총사격과 폭탄투하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많은 피난민들의 진술에 의하면 미군은 먼저 정찰기로 정찰한 이후 곧 이어 폭격기를 보내어 폭격을 감행하는 형식이었고, 때로는 정찰기에 의한 기총사격도 이루어졌다. 이러한 민간인 무차별 기총사격은 미국 <CBS방송>이 2000년 6월 5일 보도한 미 육군조사단이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찾아낸 미 공군의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터너 로저스 공군 대령이 남긴 이 기록은 “육군은 아군 진지로 접근해오는 모든 민간인들을 향해 기총소사를 가하도록 요청하고 있으며…지금까지 우리는 이에 부응해왔다”고 적고 있다한다. 육군은“북한군들로 이뤄졌거나 혹은 북한군이 통제하는 대규모 민간인들이 미군 진영에 침투하고 있다”며 민간인 사격을 합리화하고 있다고 <CBS>는 전했다({한겨레}, 2000.6.7). 셋째, 아군 땅이라고 간주한 남한에서 양민학살이 이러한 데 적군 지역이라고 간주된 북한지역에서의 양민학살은 오죽했겠는가 라는 의문은 논리적으로 제기될 수밖에 없다. 실제 평양시는 미군의 초토화작전 때문에 당시 공공건물 두 채 만 남아있었고, 모든 거리는 혈거인의 주거 모습으로 바뀌었다고 증언할 정도였다. 또 원산은 해상포격이 하루도 빠짐없이 2년 이상 지속되어 미 해군사상 최장기로 기록되기도 하였다. 넷째, 양민학살은 적과의 전투행위 중에 불가피하게 발생하거나, 결코 우연적이고 개인적인 실수나 순간적인 판단착오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노근리 사건에서 확인되었듯이 사단장의 작전명령과 같은 공식적 지휘계통에서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다섯째, 94년부터 정은용씨 등은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거론하고 미국에 4차례 이상 진상규명과 보상을 청구했고, 남한 정부에도 지속적으로 촉구했고, {한겨레}, {말}지와 같은 국내 진보언론이 이를 제기했으나 모두 묵살되었다. 이후 AP통신 곧, 미국의 언론에 의해 구체적으로 확인되기까지 미국은 부인으로 일관했다는 점이다. 제3세계의 언론이나 목소리는 철저히 잠재우고 미국의 언론이 세차게 문제제기를 하자 겨우 미국이 공식적인 반응을 보인다는 미국 패권주의를 이 번을 계기로 다시 확인하였다.
4) 토착공산세력과 퇴각하는 인민군의 양민학살 전쟁 초기 좌익 측의 학살은 크게 세 주체에 의하여 행해졌다. 북한인민군, 빨치산, 토착 공산세력이다. 이들의 학살은 시기별로 그 특색을 달리 한다. 인민군이 진주하기 전이나 진주 직후에는 주로 토착 공산세력이나 보도연맹원의 가족들에 의해 보복차원에서 우익인사에 대한 학살이 진행되었다. 이 경우 재판 등 적법 절차에 의하지 않는 즉자적인 보복학살이었다. 이 경우는 대부분 개인적 보복 수준이기 때문에 소규모이어서 아직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있다. 대검찰청수사국에서 펴낸 {좌익사건실록}에 의하면 8월 하순 경남 남해군 창천면에서 보도연맹 유가족 70명과 치안대가 경찰 5명 등 7명을 학살하고, 8월 4일 경남 사천군 사천면에서 치안대원이 순경 1명을 살해하였다. 7월 20일 순창군 북흥면에서 108명의 우익인사, 25명의 경찰, 920명의 일반인에 대한 집단학살이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김상웅, 1996: 139). 이후 인민군이 진주하면서부터 원칙적으로 인민재판 등 재판에 의한 학살과 북한 법에 따라 반동과 인민의 적으로 규정된 사람들에 대한 학살이 절제된 형태로 이루어졌다. 이는 정치보위부가 주도하고 인민위원회, 자위대, 민청원, 여맹 등이 가세하는 형식이었다. 경남 사천군 용현면 신북리의 겨우 인민위원장과 치안대장이 중심이 되어 경찰관, 반공연맹원, 국민회지부장, 군인가족 등 '악질반동분자'를 체포하였다 한다. 이 기간동안은 피학살 보도연맹원 가족들이 보복으로 경찰, 그 가족, 구장, 반장까지 인민재판에 붙여 학살하였다한다(장미승, 1990: 190-192). 이 기간은 그나마 법과 규정에 따른 절제된 학살이었다고 볼 수 있다. 또 북한 내무성은 공식적으로 "인권존중과 구타, 신문 등의 비인간적 악행을 금지할 것"을 교육하였다.10) 국회발언에서 홍창섭 의원과 김성칠 교수는 이 시기 인민군의 절제된 모습을 잘 서술하고 있다. "놈들이....무력전에는 졌는데 사상전에는 이겨야겠다고 해서 대단히 민심을 사력고 하는 전술을 썼단 말이에요. 세 가지 원칙이 있어요. 부녀자 강간을 안 할 것, 소를 잡아먹지 않을 것, 죄 없는 사람을 잡지 않을 것. 이러한 3대 원칙 하에 행동을 했단 말이에요...사람들은 대단히 괴뢰군이라든지 중공군의 행동에 대해서 오히려 감탄하고 있다"11) "그러므로 인민군들도 대체로 질이 좋았습니다. 우리 민족은 하기에 따라서는 반드시 사회가 부패하고 군이 부량화하고만 마는 것이 아니라는 확증을 잡을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김성칠, 1993: 268)." 그러나 인천 상륙작전이 이루어져 인민군이 퇴각하는 시점에서는 비록 이승만 정권의 양민학살 정도는 아니지만 무절제한 학살이 만연하였다 한다. 형무소에 수용된 우익이나 악질반동분자 등이 대거 학살된 것으로 보이나 일부만 알려지고 있다.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5,500명 중 1,557명(정근식, 1992) 또는 471명이(대전형무소 비문) 학살되었다하나 정확한 숫자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광주형무소에 수감되었던 2천 명 중 미군정 하 지사와 순천시장 등 70여명이 학살되었고, 이어 2차 학살도 있었다. 담양에서는 빨치산이 유엔군을 환영한 주민 약 60명을 학살하였다(정근식, 1992). 김삼웅은 전세가 불리해지자 9월부터 학살이 자행되었는데 무안에 감금되어 있던 우익 80명, 목포의 미곡창고에 수감된 300명, 정읍의 25명이 학살되고 무주의 유치장 수감자 84명이 용포리 하늘바위에서 학살되었다 한다(김삼웅, 1998: 170-173). 고양군 금정굴의 1천 명에 가까운 대량 양민학살은 9월 20일 경 내무서를 공격하려다 발각된 우익학생 비밀결사체인 태극단원 38명이 좌익에 의해 처형된 것이 발단이 되었다({한겨레}, 1995.10.23). 좌익에 의한 피학살자 수는 공식추계에 의하면 남자 97,680명, 여자 31,256명 등으로 합계 128,936명이라고 한다.12) 또 남한의 공보처 통계국이 공식적으로 발표한 인민군에 의한 남한 민간인 피랍자 수는 82,595명이다. 그러나 1959년 외무부 정보국장 이수영의 주재로 열린 피랍자명부 파악에 대한 대책회의에서 이수영은 이 명단을 국제적십자사에 그대로 보고할 수 없음을 밝히고, 이러한 오차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였다. 이에 공보처 통계국장은 납북인사 82,595명의 통계는 공산당의 죄악상을 폭로하기 위해 비 민간인인 군인과 경찰을 포함시켰고, 인명 중복이 있었고, 행방불명자까지 포함했기 때문에 피랍인사 위주의 통계가 아님을 밝혔다. 결국 82,595명은 군인, 경찰 등 비 민간인과 행방불명자까지 포함시킨 수치임을 실토했다.13) 이러한 통계의 자의성 때문에 자료의 신뢰성이 낮아 그 수를 추정하기가 힘들다. 당시 북한은 9·28 당시 미군과 남한 군에 의해 피랍된 숫자가 14,112명인 것으로 국제적십자사에 통보했다.
5) 남한 군·경의 무차별 학살 6.25전면전을 체험한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인민군보다는 남한의 국방군이나 경찰의 무차별적인 학살과 횡포에 대하여 많은 일화를 이야기한다. 이러한 사실을 할리데이와 커밍스도 뒷받침하고 있다. 컷포스는 이 시기 이승만 군대의 활동은 '전투라기보다는 대량학살'이라고 결론짓는다. 한 미대사관 직원은 1950년 9월 이승만 정권의 남한에서는 '아마도 10만 명 이상'이 살해되었다고 기록했다. 이 숫자는 전쟁 전기간에 걸쳐, 남북한을 통틀어 공산군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미국이 주장하는 최고치 인원보다 훨씬 더 많다(커밍스·할리데이, 1990:148). 이 미국대사관 직원이 말하는 10만 명 수준은 일반적으로 회자되는 1백만 학살 설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기는 하지만 당시 상황의 일단을 전해 준다. 또 당시 어느 한 목격자의 증언은 소름끼치는 장면을 잘 그리고 있다. 1950년 …늦은 가을… 미아리 뒷골목에선 한낮인데도 하나는 군인 또 하나는 청년 이렇게 두 젊은 사내가 젊은 아낙 한 분을 ... 때려죽이는 살인 만행이 벌어지고 있었다....그렇게 쓰러졌던 아낙은 피를 머금은 채 ...두먹신처럼 일어서며 울부짖는 것이었다. "그분이 북쪽으로 갔는지 남쪽으로 갔는지 내 어찌 아느냐"고 항변한다. … 이렇게 몽둥이 들고 내려치기를 서른 번 남짓 마침내 지는 해와 함께 그 몽둥이 찜질 소리도 그 아낙의 비명소리도 더 이상은 아니 들려왔다(백기완, 1994:121∼122). 세계 최장기 사상범으로 수감 45년만에 석방된 김선명씨의 경우 "50년 김씨가 월북하자 그의 아버지와 누이는 국군에 총살당했고, 살아남은 김씨 가족들은 그 피해의식에 짓눌려 아예 김씨를 잊으려 했다"14)는 진술에서 보듯이 부역자나 그 가족에 대한 학살과 억압은 적법한 재판도 없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몇몇 대표적인 경우에 한정하여 학살 양태를 간략히 살펴보겠다. 임시수도였던 부산이 학살이 가장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미 언급하였지만 약 6천 명의 형무소 수감자가 학살되고 부역이나 좌익혐의로 수만에 달하는 양민이 학살되었다. 6월 하순부터 헌병, 경찰, 특무대, 청년 방위대들이 전시가지에 걸쳐 불신검문이나 가택수색으로 좌익혐의자를 잡아갔다. 아무런 심사기준도 소명기회도 없었다. 7월 초부터 9.28수복까지 3개월 동안 부산 전체 가구를 무려 3번이나 저인망 식으로 훑어서 수만 명을 체포하여 동광동에 있는 특무대 지하실, 유치장 등에 수감하였다가 총살, 수장 형식으로 학살하였다. 부산 인근지역에서도 울산읍 677명, 충무시 267명, 마산 188명 등의 학살이 이루어졌다. 부산출신 국회의원 박찬현은 국회에서 "수 백 명 수 천 명의 문제가 아니고 그 당시의 부산의 사태는 아마 여러 만 명이 될 것이 올시다(35회 국회속기록, 1960)"라고 주장한 것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대대적인 1만 명 이상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김삼웅, 1996:105-109). 무차별 학살은 아산군 신창면 신창지서주임이던 유해진의 학살에서 잘 나타난다. 그는 150명의 양민을 학살한 혐의로 서울지검에 입건되었는데 그는 학살이 지나친 것이라 항의하는 박모 순경을 학살현장에서 총살시키겠다고 위협하였으며, 이 가운데 살아남은 이윤희 소년의 경우 아버지가 6.25때 행방을 감춘 것 때문에 그의 조부모, 어머니, 4살 난 여동생, 2살 난 남동생 등 5명이 학살당했다. 당시 어린이는 할머니와 어머니에 업힌 채로 줄에 묶여 살해당하였다. 그는 학살에 그치지 않고 정부 양곡을 도용하고, 좌익가족을 첨으로 삼고, 1.4후퇴 때에는 부하들에게 마을 부녀자를 농간하도록 하였다. 이후 이 지서 차석인 곽문석경사 에게 이를 묻자 그는 조금도 죄의식 없이 "그러한 일은 비단 신창지서뿐 아니라 전국 어느 곳에서도 안 일어났겠는가"라고 반문하였다 한다.15) 이러한 무차별적인 학살이 전국에 걸쳐 보편적이었음이 국회의원의 대 정부 질의에서도 뒷받침된다. 엄상섭 의원은 "통비라는 불확실한 혐의만으로 순경이 일가족을 총살"하고, 변진갑 의원은 "제2국민병 안 나온다고 죽이고, 소집불응에 죽이고 그 어머니까지 밥을 잘 못해준다고 사살"하였다 한다(서중석, 1999:641).
3. 6.25전쟁 후기의 양민학살
6.25전쟁은 9.28수복을 계기로 주 전선이 북한지역으로 옮겨가고 전쟁이 후기로 접어들면서 양민학살은 북한과 남한을 통틀어 전개되었다. 남한의 경우 빨치산 활동이 왕성했던 지리산 등 산간지역의 토벌작전 과정에서 일어난 제2전선에서의 양민학살, 중국군의 참전을 계기로 급조된 국민방위군의 장병들이 기아와 질병으로 5만 여명이 죽임을 당한 사건이 후반기의 대표적 학살이다. 북한의 경우 40일간 북한을 점령하는 기간 미군과 남한 군경에 의한 강점기간의 양민학살과 이후 전쟁이 소강 상태로 접어든 이후 주로 미군의 초토화작전에 의한 대대적인 양민학살이 대표적이다. 이 절에서는 남한에 국한하고 다음절에서 북한지역을 별개의 절로 다루겠다.
1) 제2전선 주위의 양민학살 사건 정희상에 의하면 6.25전쟁 전후 자행된 민간인 학살은 1백만 명 수준에 이른다. 전남북지역 약 20만 명, 보도연맹 30만 명 등을 포함하여 함평, 문경, 대구, 부산, 함양, 산청, 거창, 충무, 거제 등 민간인 학살은 전국적·조직적·체계적인 현상이었다. 4·19 이후 거의 남한 전역에 걸쳐 구성된 유족회, 국회진상조사단의 조사 등으로 이들 민간인 학살·만행에 대한 역사적 진실이 서서히 밝혀지기 시작했으나 5·16쿠데타 이후 이들 유족회는 대부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검거되어 침묵을 강요당해 왔고 역사적 진실 또한 은폐되어 왔다(정희상, 1990; 이태섭, 1989). 거창양민학살 사건, '전북도의회 6·25양민학살 실태조사특위' 위원장인 최강선의 글, 또 산청·함양 양민 705명에 대한 국군의 학살 보도 등16)을 보면 제2전선 주위의 양민학살은 대대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제2전선의 양민학살은 6.25전쟁 이후로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이미 작은 전쟁 당시에도 유격전선이 형성되어 있었고, 49년에는 대대적인 유격대 토벌이 남한군, 주로 11사단에 의해 전개되었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문경, 함평, 영광 등과 같은 지역에서 양민학살이 자행되었다. 형과 사촌동생의 주검 밑에 깔려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문경 양민 학살사건' 유족회장 채의진(63)씨는 10월 13일 미국의 비밀문서에서 6.25이전 유격대 토벌과정에서 문경주민들이 학살당했다며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촉구했다. 재미 사학자 방선주(66)씨가 입수한 미국 극동군사령부의 비밀문서는 문경 양민학살 사건을 아래와 같이 서술하고 있다. 1949년 12월24일 오후 2시. 국군 2개 소대가 경북 문경시 산북면 석봉리 석달마을에 들이닥쳤다. 국군들은 마을주민 100명을 한곳에 모아놓고 공산주의자들에게 협조하지 않았느냐고 추궁했다. 주민들이 필사적으로 부인하는데도 아랑곳없이 국군들은 수류탄을 터뜨리고 소총과 카빈총을 쏘아댔다. 남자 43명, 여자 43명 등 86명이 그 자리에서 숨졌으며, 이 가운데는 어린이와 노인, 학생들도 상당수 포함돼 있었다. 이웃 사람들의 주검 밑에서 죽은 채 엎드려 있던 14명은 구사일생으로 살아 남았다. 집은 모두 불태워졌다. 현지 부대를 지휘한 국군 장교와 경찰은 무장공비들이 마을 사람들을 학살했다고 상부에 허위로 보고했다.(주한 임시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 비망록, {한겨레신문} 1999년 10월 13일). 이에 대해서는 이미 {시사저널}(1995년 3월 23일자)의 보도가 있었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6.25이전에도 이승만 정부의 양민학살은 겉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는 점이다. 이들 석달부락 주민 124명 가운데 86명이, 그것도 여자 41명, 국민학생 10명, 갓난아기 5명까지 단지 국방군을 환영하지 않는 것 같다는 지휘관의 느낌 때문에 학살되었다. 당시 산북면사무소 서기로 학살현장 구호활동을 폈던 천규철씨의 증언은 이승만 정부가 직접 개입해 조작 은폐했음을 입증한다. 50년 1월 17일 신성모 국방장관이 현장을 방문해 유족들에 위로연설까지 했으나 그 이후 이 사건은 공비의 소행으로 둔갑되고, 당시 문경경찰서장과 지서주임은 '공비 출몰 총살'을 막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해임되었다. 나는 학살 다음날 면장의 지시를 받고 석달부락에 들어갔는데 처참하기 이를 데 없는 상황이었다... 그 당시 공비는 애매한 양민을 대낮에 죽이는 일은 없었다(필자 강조). 공비가 죽였다면 약탈한 흔적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전혀 없었다. 군인들이 학살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뒤에 신임 문경경찰서장이 공비의 소행이라고 적은 보고문을 면에 보내와 그대로 호적에 올리는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밝혀진 제2전선 양민학살 가운데 문경의 학살이 6.25이전에 이루어진 학살로서 그 야만성, 무차별성, 산간지역에 걸쳐 진행된 보편성, 조작성(양민을 공비와 통비로 조작)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면 6.25이후의 대표적 보기로는 거창 양민학살이다. 거창사건은 김영삼 문민정부에서 1996년 1월 5일 공포한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 제2조 정의인 "거창사건이라 함은 공비토벌을 이유로 국군병력이 작전수행중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가 시사하듯이 1951년 2월 10-11일 사이에 거창군 신원면의 양민 719명을 학살한 사건이다. 11사단 진주주둔 9연대 3대대(연대장 오익경, 대대장 한동석, 남원에 13연대, 광주에 20연대 주둔)가 신원면 주민 약 1천 명을 신원국민학교에 소집하여 경찰 및 지방유지 가족을 제외한 전원 719명을 박산골짜기에서 집단사살한 뒤 시체를 불태웠다. 그리고는 187명의 공비 및 통비분자를 소탕했다는 전과보고까지 했다. 피학살자는 남 331명 여 388명, 14세 이하 359명, 60세 이상 359여명이었다('거창양민학살사건 해결을 위한 청원서'). 군은 이 학살을 은폐하려고 외부와의 왕래를 일체 차단하고 생존자에 발설하면 공비로 총살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사단본부에서 3월 21일 사단장 최덕신의 명의로 "학살주민의 대부분이 양민이어서 군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지고 이 밖에도 부녀자 강간, 물품강요, 재산약탈 등으로 주민들이 분노하고 있다"라는 보고서를 올렸다. 이에 국방장관이었던 신성모는 "외국의 원조로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마당에 이 같은 비행이 외국에 알려지면 전쟁수행에 지장을 초래하고 군의 사기를 해친다"면서 "희생자 수는 187명이며 모두 통비분자였다"고 조작했다. 이후 국회·국방부 합동조사반의 현지조사 방문단이 신원면에 들어가려는 시점에서 백두산 호랑이 김종완이 매복시킨 위장공비의 위장공격으로 조사가 중단될 수밖에 없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군법회의에서 사단장 최덕신은 기소되지 않고, 연대장 무기, 대대장 10년, 소대장 이종대 무죄, 김종원 3년 언도를 받았으나17) 최덕신은 대사 등으로 출세가도를 달렸고, 김종원은 대통령 특별명령으로 석방되고는 전북경찰국장으로 복권되고, 이승만은 이를 이순신이 간신배에게 모함 당하듯이 음해를 입었다고 보았다. 사단장과 연대장도 1년도 안되어 석방되었다(서중석, 1999:676).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자행될 수밖에 없는 것은 소대장 등 개인적인 잘못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구조적으로 만연될 수밖에 없는 조건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이러한 무차별성, 야만성, 조작성, 보편성 등은 다반사였다. 이에 대한 구조적 조건은 근원적으로는 이승만 정권 자체의 반민중성과 반민주성 및 분단지향성, 외세예속성 및 이들로 인한 정통성 부재 및 일본제국주의 군대를 그대로 답습한 한국군의 인적 뿌리 등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국면적으로는 1950년 6월 28일 발표된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이라는 이승만대통령의 긴급명령과 11사단의 작전명령인 견벽청야, 신성모 등 수뇌부의 음폐기도 등에서 증폭되었다. 이승만의 특별조치령은 살인, 방화, 강간, 군사·교통·통신·수도·전기 등 시설의 파괴 및 훼손, 군수품 및 중요물자의 갈취·절취·약탈과 불법처분, 형무소 재감자 탈주 방조 등 6개항에 대해 사형, 무기 또는 10년 이상 징역을 규정하고 있다. 더구나 판결은 단심으로 하고, 40일 내에 언도하며, 판결시 증거확인은 생략하게 규정했다. 재판과정에서 밝혀진 11사단 견벽청야 작전지침의 지시사항은 '작전 지역 내에 있는 사람 전원 총살', '공비의 근거지가 되는 가옥 전부 소각' 등이었고, 분대장급 이상에 즉결처분권이 주어졌다. 이 작전시기사 문제가 되자 국방장관과 참모총장의 지시로 작전지시를 "작전지역 내 주민 중 이적행위를 한 자는 간이군법회의에 의해 처단하라"로 김종원 자신이 변조하였다고 증언하였다(서중석, 1999:605, 666, 636). 이러함에도 이승만은 "희생자는 대부분이 통비자였고... 군경이 불리한 상태로 포위 당하였을 때에는 공비들과 함께 죽창을 들고 군경에 반항한 사실이 있다. 교전간에 있어 혹은 유탄에 의해 희생된 약간의 부락인들이 있음을 계기로 항간에 560명의 양민을 학살했다는 소문은 사실과 다르다"(서중석, 1999: 676 재인용)라고 왜곡과 조작을 서슴치 않았다. 그나마 거창사건은 당시 지역출신 국회의원 신중묵의 용기와 정부 타부처와의 갈등으로 진상이 어느 정도 밝혀질 수 있었으나 이와 유사한 수많은 지역의 양민학살은 여전히 진상이 규명되지 않고 있다. 바로 인근 지역인 산청과 함양에서도 거창학살 이전에 이미 각기 700여명씩 학살을 저지른 것으로 알려졌다(김삼웅, 1996: 142-148).
2) 국민방위군사건 국민방위군은 만 17세 이상 40세 이하의 장정을 예비군으로 편입하여 경상도 지역에 강제 이송시켜 교육을 받게 하는 60만 명에 이르는 준 군대집단이었다. 이는 중국군의 개입으로 전선이 남하함에 따라 6.25전쟁 초기 많은 남한의 젊은이들이 자의 및 타의로 의용군에 입대한 전력이 있어 이의 재발을 막기 위하여 50년 12월 16일 급조된 조직이었다. 그러나 예산이나 시설 및 수송체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강제후송을 무리하게 강행하고 할당된 예산마저 간부들이 정치자금으로 유용하고 또 착복하여 후송 도중 무려 5만 이상, 수 만 명의 장정이 기아와 추위 및 전염병으로 떼죽음을 당하였다. 이상 6.25전쟁 후반기의 양민학살을 제2전선과 국민방위군에 국한하여 살펴보았다. 이 밖에도 전쟁기간 내내 부역자와 좌익혐의자에 대한 색출과 학살은 지속적으로 자행되었다.
4. 북한지역 양민학살
북한지역에 대한 미군의 양민학살은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첫 시기는 50년 10월 1일 38도선을 넘어 북한을 4-50일 가량 점령하는 시점에서 발생한 것이고 둘째 시기는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가 정전협상에 들어간 51년 6월 이후 정전일 마지막까지 자행된 북한지역에 대한 초토화작전에서 행해진 양민학살이다.
1) 북한점령 기간 내 양민학살 북한의 공식발표는 40여일 강점기간동안 미군의 지휘, 감독과 직접적인 적대행위에 의해 172,000여명의 북한주민이 학살되었다 한다. 이 숫자는 직접전투행위나 미군후퇴 이후의 폭격 등으로 살상된 숫자를 포함하지 않고 강점 40여일 동안 저지른 학살만을 포함하고 있다. 학살방법 또한 잔인성을 보여 집단적 생매장, 통풍이 되지 않는 건물에 감금하는 질식사, 굶겨 죽이기, 휘발유와 장작불로 태워 죽이기 등 야만성을 띠었다 한다.18) 이 학살 중 가장 큰 규모로 진행된 곳이 황해도 신천, 안악, 강원도 양양이다. 신천군의 경우 군내의 총인구의 1/4인 35,383명이 학살되었고 그 가운데 어린이, 노인, 부녀자들이 무려 16,234명이나 된다고 한다. 이러한 미군의 '범죄'행위에 대해 세계의 여론이 비등하여 1951년 국제민주여성동맹과 국제민주법률가협회가 진상조사단을 북한에 파견했다. 다음은 이 진상조사단의 일원으로 참가한 영국인 모니카 펠톤의(Monica Felton)의 기행문인 That's Why I Went와 1952년 3월 북한을 방문한 후 작성된 법률가협회의 보고서인 [미국의 범죄에 대한 국제법률협회조사단의 보고서]에 제시된 증언을 중심으로 미군의 학살행위를 살펴보겠다. 펠톤은 평양과 황해도를 중점적으로 조사하였고 또 이 황해도가 가장 참상을 많이 입었기 때문에 이곳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19) 이들 조사단이 황해도에서 처음 확인한 곳은 19,000여명이 살해되었다는 안악이었다. 처음 방문한 곳은 어른과 어린이들을 함께 가두어 며칠동안 물과 음식도 일체 공급하지 않고 심지어는 누울 수조차 없도록 사람을 많이 가두었던 간이 수용소였다. 그곳은 농가의 창고였었고 통풍할 창문도 없이 밀폐된 곳으로 단지 지붕과 담 사이에 있는 길다란 좁은 구멍으로 공기가 통할뿐이었다. 여기에 수 백 명이 억류되어 죽었고 몇 사람만이 살아남았다. 안악군 송화리 117번지에 살다 신천의 창고수용소에 갇혀서 간신히 죽음을 면한 28살의 양연득여인의 이야기는 이러하다. 어린이 다섯과 남편을 가진 7식구였으나 미군이 강점하자 남편은 즉시 살해되고 그녀와 다섯 어린이는 어떤 창고에 수용되었다. 이 창고는 약 300여 명의 여자와 어린이를 수용했다고 한다. 이 좁은 수용소에서 밀고 밀리는 아수라장 속에서 그녀의 두 살 난 어린이는 밟혀 죽었다. 며칠 뒤 미군 두 명이 그녀를 밖으로 끌고 나와서 차례로 성폭행 했다. 그녀는 어둠 속에 겨우 도망쳐 나와 신천이 다시 '해방'될 때까지 숨어 지냈다. 해방된 뒤에야 비로소 그녀의 네 어린이들이 그곳 창고수용소에서 불타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 법률가협회보고서는 미군의 범죄행위를 아래와 같이 더 생생하게 기술하고 있다. 미국인들은 증인의 남편의 손과 귀와 코를 쇠줄로 꿰어 뚫었다. 그들은 방에 있던 노동표창장을 그의 이마에 못으로 박아 붙이고 그가 죽을 때까지 고문했다. 5세로부터 25세에 이르는11명의 우말재 가족의 자녀들은 즉석에서 총살되었다. 우말재의 며느리는 미국장병들이 그 시아버지를 고문하는 것을 보고 제지하려고 하였다. 미국인들은 이 여성의 머리채를 잡아서 나무에 비틀어 맨 다음 젖을 베고... 다음 불을 질렀다(김주환, 1989:187). 1950년 10월 25일 사리원시에서 MP완장을 찬 한 미국군인은 김창두라는 사람에게 끔찍한 살인을 감행하였다. 그는 칼을 가지고 목에서부터 아랫배까지 희생자의 피부를 째고 산채로 피부를 벗기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하다가 잘 안되니까 그는 희생자를 돌로 때려 죽였다. 1950년 11월 11일 한 젊은 여성은 3명의 미국인들에게 강간당하였다. 이 여성은 몹시 구타당하였으며 또한 발로 채였으며 그의 목구멍에는 물을 부어 넣었다. 다른 병정들은 56세 된 노파를 강간하였다(김주환, 1989:188). 이렇게 학살된 숫자가 172,000명에 이르는지는 공식적 발표 외에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아군지역인 남한 내에서 부역자 혐의 등으로 자행된 양민학살의 양태를 본다면 적군지역이라 간주된 북한지역에서의 학살은 그 정도가 훨씬 심했을 것이고 여전히 야만성, 무차별성, 보편성, 조작성 등이 작용했으리라고 추론할 수 있다. 북한의 공식적 기록은 주로 미군에 의해 학살이 저질러진 것으로 기술하고 있으나 역시 학살의 주도는 남한의 군경과 서북청년단 등이 맡았을 것이라 추측된다. 실제 강원룡 목사의 증언에 의하면 국방군을 따라 북한에 진입한 장사꾼들은 "마치 자신들이 점령군이나 되는 것처럼 칼만 안든 강도 짓을"하였다. 국회전문위원 이선교도 평양 시찰보고에서 "국군의 비행이 있고, 역시 유엔군의 비행도 다소간 있었던 모양입니다. 물론 여자를 능욕하는 것도...물품의 약탈은 굉장한 형편... 평양에 있던 악질도배들이 국군하고 돌아다니면서 공산당 물건이나 뺏는다는 행위를 거듭하기 때문에 그 시가에 혼란이라는 것이 한이 없습니다({국회속기록} 제8회 43호, 1950.11.4-서중석, 1999:750 재인용)"
2) 전쟁 소강기 북한 양민학살 1951년 초여름부터 전선은 대체로 38선을 경계로 소강상태에 빠졌다. 이 소강상태란 지상전 전투행위의 소강상태를 의미하는 것이지 공중전과 해상전에서 절대적 우위를 지키고 있던 미군의 공습이나 함포사격 등이 소강상태를 유지했다는 뜻은 아니다. 전선 아닌 후방에서 군사시설이 아닌 민간 생업의 현장에 대한 해상 및 공중포격에서 북한의 주민들은 살해되고, 생존수단을 파괴당하는 끔직한 전쟁체험을 하였다. 더구나 51년 7월 이후 정전회담이 진행되고 있는 중에도 민간인과 비군사 민간시설에 대한 살상과 폭격행위는 계속되었고 정전이 실효되는 1953년 7월 27일 오후 10시 정각의 1분 직전까지도 지속되었다(Winnington & Wilfred Burchett, 1954:55). 전쟁초기 6개월 동안 미극동공군폭격사령관을 역임했던 오도넬이 맥아더 청문회 증언에서 밝힌 바와 같이 중국군이 개입하기 이전에 이미 북한의 5개 주요도시는(평양, 성진, 나진, 원산, 진남포) 철저히 파괴되었고 "한국에는 더 이상 목표물이 없습니다"(Stone, 1988:334)라고 할 정도였다. 신의주의 폭격상황을 조카 홍윤으로부터 소상히 들은 홍동근목사는 이렇게 전한다(홍동근, 1988:119). 1950년 가을, 미군폭격기 B-29가 80대 이상 연 사흘 신의주를 폭격하고 특히 소이탄으로 폭격하여 전 도시를, 집과 사람을 불로 태워버렸다는 것이다. 신의주 20만 사람의 삼분지 이의 사람이 타죽고 도시의 80%가 잿더미가 되었다 한다. 문자 그대로 무차별 야만적 폭격을 하여 여자, 아이 할 것 없이 모두를 불태워버렸다. 거기 내 작은 형님과 형수님과 철이가 불에 타 죽었다. 또 수 없는 동족의 부녀자들이 불타고 내 배움의 고향이 재가되어 없어졌다. 큰 형님 말씀이 그 불기둥으로 신의주의 밤이 붉었고 낮에도 타는 연기로 하늘이 먹구름이 되었다 했다. 이를 위해 맥아더가 한국 백성들에게 '맑은 일기'를 위해 기도하라고 했었던가 생각하니 치가 떨렸다. 이러한 무시무시한 폭격이 동해안 최대도시인 원산의 경우 정전 1분전까지 계속되었다. 미 해군함정이 원산을 41일 동안 밤낮 없이 연속적으로 포격했으며, 현대 미해군사상 최장일인 861일 동안 포위 공격했다. 미해군소장 스미스는 "원산에서는 길거리를 걸어다닐 수 없다. 24시간 내내 어느 곳에서도 잠을 잘 수 없다. 잠은 죽음을 의미했다"라고 기술했다(커밍스와 할리데이, 1989:158-9). 1953년 3-4월경 평양과 원산의 전후 상황을 김진계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김진계, 1990:182). 평양시내 건물이란 건물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고 모두 부서져서 허허벌판이 되어 있었다. 더구나 평양시민들은 오갈 데가 없이 부서진 집 속에 토굴 비슷하게 파놓고 살아가는데 마치 원시인들 같았다. 도시 전체가 완전히 빈민 소굴이요 난민 소굴이었다. 식량도 동이 날대로 나버렸고 비바람을 피할 천막이나 움집조차도 없었다. 굶주리고 병든 사람이 하나 둘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있었다. 살아 움직이는 사람보다 죽어 나자빠진 시체가 더 흔했다. 아니 살아있는 사람도 반쯤은 죽어 있었다. ... 전쟁 후 원산에 들린 적이 있었는데 그 곳도 평양과 다를 바 없었다. 아니 평양보다 더하면 더 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 미군은 군사시설뿐만 아니라 민가라도 야간에 불빛만 비치면 굶주린 개가 고기를 본듯이 공격을 했는데 나도 그런 일을 당해 죽을 뻔한 일이 있었다. 평양에 대한 초기의 대대적인 공습은 서울이 중국군과 인민군에 의해 다시 점령된 1951년 1월 3일에 행해졌다고 펠톤은 말한다(Felton 1953;116-17). 폭격은 3일 밤에 시작되어 그 이튿날 정오까지 계속되었다. 비행기는 15분 간격으로 폭탄을 떨어뜨리는데 처음에는 소이탄, 다음에는 네이팜탄, 고성능 폭탄, 그리고는 다시 더 많은 량의 소이탄과 시한폭탄을 연속적으로 투하했다. 이러한 연속적이고 체계적인 공습 때문에 조직적인 구조작업은 불가능했다. 수만 명의 주민들이 난파된 잔해 속에 깔려 구조 받지 못하고 질식사 또는 압사했다. 국제 여맹조사단이 방문한 5월까지 시체들이 치워지지 못한 체 남겨져 있었다. 수만 명의 주민이 불에 타 죽었다. 그날 공습으로 파괴된 건물 가운데는 시내의 대부분 병원들이 포함되었다. 8,000미터 상공에서도 식별할 수 있도록 적십자 표시를 해놓은 병원들도 미군의 폭격대상에서 제외될 수 없었다. 도시주민들은 대부분 도시를 떠나야 했다. 평양의 인구도 50만에서 약 5만으로 줄어들었다. 농촌이라고 결코 안전한 곳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동굴이나 지하방공호에서 혈거인과 같은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석유덩어리로 만든 신형무기인 네이팜탄은 가공스런 살상을 저질렀다. 높은 공중에서 폭발한 네이팜은 조그만 산탄으로 사방에 퍼져 지상에 있는 모든 물체를 태워버리고 사람의 살에 붙어서 몸을 불태워버린다. 시한폭탄은 철저한 인마살상용이다. 공습에 희생되거나 다친 이웃, 친지, 가족을 구조하기에 정신없는 동안 이 시한폭탄은 다시 이 구조대를 살상·파괴하는 것이다. 장마철에 평양근처의 저수지 댐을 폭파시켜 농토와 관개시설과 주위 주거지 소실, 화학전과 세균전의 감행,20) 문화재의 약탈과 파괴, 민간재산의 고의적 파괴, 대규모 폭격작전인 '교살작전', 500대 이상의 비행기를 동원해 북한전력공급의 90%를 차지했던 수풍댐과 발전소의 파괴 등 미군의 야수적 전쟁범죄로 인해 북한의 전 영토와 중부지역이 거의 완전 초토화되었다(커밍스와 할리데이, 1989:174). 이러한 범죄적 폭격의 흔적은 1955년까지도 그대로 목격된다. 평양역에 도착할 때까지 퍽 여러 번 정거하였지만 한 개의 역사도 제대로 있는 것을 볼 수 없었으며, 철도 연변에서도 도시나 마을 같은 것을 한번도 볼 수 없었습니다... 그 중에 사리원만은 옛날에는 여기도 하나의 도시가 있었구나 하는 것을 알아 볼 수 있을만한 벽돌집들의 허물어진 형체가 남아있고... 남한에서도... 인간 도살이 진행된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래도 서울-부산간을 몇 번씩 왕복하면서도 이런 감정은 느껴보지 못했는데, 나는 개성서 평양까지 오는 동안에 전쟁 중에 감행된 처참한 발자국들을 보면서 전쟁의 무서운 파괴력 앞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김낙중·김남기, 1985:169). 이상과 같은 학살과 전선에서의 살상으로 최소한 북한인구의 12-15%가 죽임을 당했다(Halliday, 1990:83). 국제민주법률가협회 보고서는 이 학살과 파괴가 결코 개인적 차원에서 무작위적으로 저질러진 것이 아니라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전쟁범죄였다고 규정짓고 세계법정에 출정시켜 책임자를 밝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조사단은 미국정부와 미군의 최고사령부 지도자들의 완전한 승인과 계획 없이는 이 대부분의 범죄들이 감행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러므로 본 조사단은 이 사람들과 이들의 범죄에 대하여 책임이 있는 전선의 모든 지휘관들과 국제법에 위반되는 명령을 수락하고 집행한 모든 개별적 병사들을 고발한다(김주환, 1989:206).
III. 학살주체별로 본 양민학살
학살주체는 남한측에서는 미군, 국방군, 경찰, 서북청년단과 같은 비정규무장대로 대별될 수 있고, 북한측에서는 인민군을 주축으로 한 북한점령기관 일반, 빨치산, 지방 좌익으로 대별 될 수 있다. 이들 각 주체별로 학살의 양태나 특성들을 살펴보겠다.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은 남한의 경우 피난민이 주된 대상이었고, 학살행위는 주로 비행기의 기총사수였으며 때로는 노근리와 같이 직접 피난민을 적으로 간주하여 직접적인 기총사격을 가하는 형식이었다. 시기적으로는 주로 전쟁 초기의 전선주위에서 많이 이루어졌고 전쟁후반기는 북한지역에 집중하여 양민학살이 이루어졌다. 북한의 경우 점령기간인 40일 동안은 야만적이고 직접적인 학살을 자행하였고 후반기에는 주로 북한 전역을 무차별 폭격하여 초토화함으로써 불특정 다수의 북한주민에 대한 대량학살을 감행하였다. 미군의 양민학살은 인종주의가 결합되어 상승을 기한 것이 특징이다. 국방군은 전선과 비전선에서 학살을 감행하였다. 전선학살의 초기에는 주로 남부전선에서 예비검속 등에 의해 좌익 의혹을 가진 사람에 대하여 군경합동으로 학살을 저질렀다. 후기에는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제2전선 지역에서 11사단 중심의 유격대 토벌과정에서 대량의 산간주민을 집단 학살하였다. 이들의 학살은 6.25전쟁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미 확인한 바와 같이 11사단의 작전지시가 산간지역의 모든 주민을 적으로 간주한 것이어서 양민학살은 구조적으로 발생되게 되어 있었다. 비전선에서의 학살은 보도연맹원에서부터 시작하여 전 지역에 걸쳐 부역자나 공비 및 통비분자를 색출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양민학살을 자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군의 특무대가 주도적 역할을 하였는데 그 특무대장인 김창룡은 공산당 한 명을 죽이기 위해서 양민 열 명을 희생시킬 수 있다는 지시를 내린 것으로 알려져 무차별 학살은 예정된 것이었다.21) 부산의 전 가구를 세 차례나 검속하여 수 만 명을 학살한 혐의는 사실에 가깝다고 보아야 한다. 경찰 역시 군과 같이 대부분 일제하 일본군이나 경찰 출신으로 반공에 운명을 걸 수밖에 없는 인적 구성을 가진 집단이므로 군과 동일한 학살을 저질렀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경찰은 집단적 학살 못지 않게 개인적 수준의 학살이나 만행이 많았다. 물론 군경 모두 자의적 학살만행을 저지를 수 있는 근거는 이승만의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이다. 비정규무장대에 의한 학살은 악명 높은 서북청년단 2,300명 이상을 학살한 것으로 알려진 강화향토방위특공대(서중석, 1999:631), 1천여 고양 금정굴 학살을 주도한 우익학생 비밀결사체인 태극단, 경북 월성군 민보단장 이협우와 같이 민보단 등 각 지역마다 조직되어 있는 자경단이나 치안단 등에 의해서 저질러졌다. 이들은 제주 4.3항쟁에서 서북청년단이 그 야만성과 무법성으로 악명을 떨친 것처럼 경찰과 군 못지 않게 널리 알려졌다. 위의 이협우는 민보단장으로 49년 칠석날 빨갱이를 원조한다는 허위보고를 받고 어린이가 대부분인 김하중일가 8명을 학살하고 재산 100마지기를 빼앗았고, 50년까지 살인, 방화, 재산약탈을 일삼아 그 희생자가 2백 명에 이르렀다. 그런데도 그는 자유당 공천으로 3선 의원이 되었으나 4.19이후 사형선고를 받았다(서중석, 1999:583). 이 경우 특히 재산갈취나 여자관계 등을 목적으로 한 학살이 많았다. 학살주체에 관하여 특이한 사항은 4.3항쟁의 피해자인 일부 제주도 출신이 앞장 선 점이다. 이는 전도된 심리가 보복 형태로 발현되거나 빨갱이가 아님을 억지로 입증하려는 피해의식의 소산이라 볼 수 있다. 경남 산청에서 700여명 의 학살이 저지러졌을 때 중대장은 "나는 제주도 출신인데 가족이 빨갱이한테 죽어 보복하러 왔다"하였고(김삼웅, 1996:145). 불갑산 언저리의 함평군 월야면 동촌마을 주민을 학살한 11사단 20연대 5중대는 제주도 출신이 많았는데 이들이 학살에 앞장선 것으로 알려졌다(서중석, 1999:620). 북한측의 학살주체는 인민군을 중심으로 한 북한정권기관, 빨치산, 지방좌익이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인민군 중심의 정권기관은 북한 법에 의거하여 재판절차를 밟아 반동에 대한 처형을 감행하는 절제된 형식이었다. 또 공식적으로 만행을 금지시키는 명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 이후 후퇴하는 과정에서 법과 재판 및 절제적 처형은 지켜지지 않고 형무소 및 유치원에 수감된 우익반동을 학살하는 만행이 자행되었다. 지방 좌익은 대부분 보도연맹원 학살 피해당사자이기 때문에 보복감정에 치우쳐 인민군 진주직후 보복학살을 주도했다. 빨치산도 토벌대에 비해 학살이나 만행을 자제하였지만 때로는 산간마을 양민에 대한 학살만행을 저지른 것으로 알려졌다. 남과 북의 대조적 차이는 북한은 상대적으로 정권기관 차원에서는 재판과 법 및 고문금지 등 절제된 모습을 보였지만 지방좌익이나 빨치산이 야만성과 비적법성을 오히려 더 노정 시켰다. 반면 남한의 경우는 공권력인 국가기관인 군과 경찰이 비정규군 못지 않게 비적법성과 야만성, 조작성, 무차별성 등을 노정 시켰다. 이들 북한 측 학살주체에 의해 저질러진 피학살자 수는 정부의 공식적 주장인 129,000명 선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수적으로 남한 정부나 비정규무장단체 의해 주도된 숫자보다 훨씬 적다.
IV. 피학살자별로 본 양민학살
피학살자는 평택이남의 보도연맹원, 형무소 수감자, 제2전선 지역주민, 피난민, 부역혐의자, 공비 및 통비 혐의자, 국민방위군이나 불심검문 또는 가택수색에 의해 뚜렷한 혐의도 없이도 학살의 대상이 되는 불특정 다수민간인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보도연맹원 학살은 이승만 정부 최고위층의 명령에 의해 전국적으로 비슷한 시기에 행해졌으므로 20--25만에 이르는 가장 대규모적이고 체계적인 6.25이후 최초의 학살이었다. 이것이 불씨가 되어 보복살인의 연쇄고리를 형성하였다는 점에서 남한 내 전반적 학살의 책임은 이승만 정부 최고위층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형무소 수감자의 학살 또한 대전형무소 1800명의 학살에서 확인되었듯이 최고위층의 명령에 의해 진행되었고 전국적으로 행해졌다. 그 숫자는 2만 명으로 추정되나 미결수를 포함할 경우 1-2만이 더 추가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들에 대한 학살 주체는 공권력인 군과 경찰이었다. 피난민은 미군에 의해 학살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북한에서 월남한 피난민은 군과 경찰에 의해 자의적으로 학살되는 경우도 있었다(김귀옥, 1999:265). 이들 피난민은 불특정다수로서 언제나 군과 경찰 및 비정규무장대의 부역 혐의자로 표적이 되어 무고하게 학살되는 경우가 많았다. 제2전선 지역주민은 언제나 공비와 통비 및 부역혐의자로 몰려 학살에 내몰렸고 아예 11사단의 작전명령은 '작전 지역 내에 있는 사람 전원 총살'로서 산간지역 주민들을 모두 통비로 보고 학살의 대상으로 선정하였다. 이 제2전선주민들은 아마도 보도연맹원 학살의 숫자보다 더 많은 학살을 당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좌익에 의한 피학살자는 주로 그들이 분류한 반동분자인데 이들은 주로 친일파, 친미파, 민족반역자로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주어지지 않았으며 이 밖에도 경찰관, 반공연맹원, 국민회지부장, 군인가족 등을 지칭한다(장미승, 1992:191). 북한지역에서의 피학살자는 북한전역에 걸친 불특정다수 인민들로 미군의 초토화작전에 희생되었고 또 40일 동안 북한을 점령한 시점에서는 주로 노동당이나 정부기관에 종사한 사람과 좌익혐의자였다.
V. 학살행위 유형별로 본 양민학살과 학살의 야만성
학살행위 유형에는 총살, 생매장, 초토화작전, 수장, 일본도에 의한 참살, 굶어죽이기, 때려죽이기, 폭격이나 비행기에서의 기총사수 등이 있다. 초토화작전과 비행기에서의 기총사수 등은 주로 미군에 의해 사용된 학살방법이고 미군은 제주 4.3항쟁 때부터 초토화작전을 시도했으며 실제 4.3항쟁에서 약 130 마을이 초토화되었다(김영훈, 2000:181). 물론 11사단을 중심으로 한 토벌대 역시 견벽청야라는 초토화작전으로 양민을 학살하였다. 수장은 주로 부산이나 통영 등 해안 가에서 많이 사용되었고 일본도에 의한 참수는 당시 일본군과 경찰에 복무하였던 김종원과 같은 친일파 분자들에 의해 보복성과 야만성을 과시하기 위하여 애용되었다. 학살 자체가 야만성의 발로이지만 상상을 초월한 극도의 야만성을 보여주는 사례를 제시하여 한국전쟁이 특히 이승만 정권에 의해 저질러진 양민학살이 얼마나 더러운 전쟁의 성격이었는지를 보겠다. 여기서의 양민학살은 주로 인륜적 기준에 의한 것에 중점을 둔다. 전쟁에는 모든 사람에게 야만성과 비극을 가져오지만 특히 연약한 부녀자와 어린이 및 노인에게 이들 야만성이 집중된다. 먼저 부녀자에 대한 강간 등 능욕과 관련된 야만성이다. 좌익으로 몰린 진영의 여교사는 얼굴이 예쁜 젊은 처녀들과 함께 능욕을 당하고 암매장되었는데 그녀는 다리까지 잘리었다. 또 충무·통영군 남녀 800여명의 학살은 헌병무관들이 부녀자 약탈의 은폐 책으로 빨갱이로 몰아 수장한 사건이었는데 이 당시 그들은 창고에 끌려가 남녀 모두 옷을 벗긴 채 구타를 당하였다(김삼웅, 1996:169). 남원군 대강면 강석리에서 11사단 205부대는 마을 주민 60여명을 살해하고 부녀자 7명을 끌어내어 대검으로 목과 유방, 심지어 음부까지 난자하여 모두 죽였다. 이번에는 19명을 일보도로 참수하였는데 김점동이 일본도에 의해 목을 두 번이나 내려쳐졌으나 죽지 않자 "더러운 놈 모가지가 왜 이렇게 질겨"하면서 장교는 세 번째 내려쳤다(서중석, 1999:620). 창원군 북면에서도 해군첩보대대장으로 황광수수병 등이 이곳 주민과 피난민 60명을 빨갱이로 몰아 살해하면서 어린애가 살려달라고 애원하자 일본도로 내리쳐 죽이고 부녀자들에게는 젖가슴을 칼로 자르고 팔다리를 절단하는 만행을 저질렀다(김삼웅, 1996:107-108). 이미 앞에서 보았지만 아산군 신창지서주임이던 유해진은 마을 부녀자를 농간하고 부하까지 농간하게 하고 좌익 측 부녀자를 첩으로 삼았다. 이제 인간으로서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反인륜과 패륜아 행위를 살펴보겠다. 이에는 6.25전후 가장 악명을 떨치던 일본군 출신이고 이승만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았던 김종완이 대표적이다. 그는 여수 등에서 일본도로 사람을 참수하는 것을 즐겼다. 이에 그치지 않고 그는 1950년 5월 6일 6.25전에 백골부대를 이끌고 거제도 일운면 구조리 앞 바다에 주민 1천명을 1시간 동안 찬물에 세워놓고 시아버지와 며느리, 장모와 사위 등 서로 어려운 사이를 골라 서로 마주 뺨을 때리도록 하고 만약 세게 때리지 않으면 총개머리판과 몽둥이로 난타하는 짐승 같은 짓을 저질렀다(서중석, 1999:583). 이 같은 '뺨때리기'와 '말태우기'는 흔히들 자행되던 보편적 현상이었다. 제주에서 토벌대는 주민들을 모아 놓고 시아버지를 엎드리게 하고 며느리를 태워 빙빙 돌게 하고, 할아버지와 손자를 마주 세워 놓고 서로 뺨을 때리게 하였다. 총살에 앞서 가족들을 앞에 세워놓고 총 맞아 쓰러질 때 가족들로 하여금 만세를 부르게 하기도 하였다(김종민, 1998:33). 통영에서는 죄 없는 양민 수십 명을 창고에 가두어 놓고 강제로 정교를 맺게 하고는 수장시켜 죽였고(김삼웅, 1996:108), 필자와의 면담에서 어느 육군상사는 시숙과 제수를 옷을 벗겨 강제로 정교를 맺게 하고는 덮석에 말아 굴리는 반인륜적인 만행을 저질렀다는 전언을 해와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가공스런 야수적 행위는 이미 제주에서부터 알려졌다. 처녀와 총각을 불러내어 서로 정교를 강요하였고(황상익, 2000:153 재인용), 처모와 사위를 대중이 모인 가운데 정조를 맺게 하고는 쏘아 죽이기도 하였다(김종민, 1998:33). 완도 경찰은 완도읍 두암리에 살던 좌익아들을 둔 할머니의 이야기다. 경찰이 그 아들을 죽이고는 아들의 간을 꺼내 할머니 입에 물리고는 마을을 돌아다니게 하였던 일이다. 그 할머니는 반 미친 상태에서 경찰이 시키는대로 하였고 13년형을 받아 7-8년 복역 후 석방되었으나 몇 달 후 죽었다고 한다(김삼웅, 1996:119). 이러한 반인륜적 행위가 단지 6.25 때문에 발생한 것만은 아니다. 이미 일본군국주의의 악랄한 인권말살주의에 물들어 있던 친일파, 곧 민족반역자들이 반공제일주의를 걸었던 미군정과 결합하여 그들의 생사를 걸고 남한사회의 권력을 장악하면서부터 구조적으로 잉태되었다. 실제로 미군정 당시에도 Mark Gain의 Japan Diary 에 서술되어 있듯이 경찰이 유사한 만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물론 6.25이전에도 4.3항쟁과 여수항쟁에서 보듯이 토벌대의 이러한 만행은 다반사였다. 단지 6.25이후 보다 대규모와 빈번히 일어났을 따름이다.
VI. 남북의 양민학살 양상의 상호비교
여기서는 북한정권과 남한정권의 양민학살 정책에 대한 비교와 양민학살 일반에 발견되는 대조적 특성 등을 제시한다. 상호비교는 학살의 양적 규모, 재판 등 법적 절차, 정부의 공식 정책 등에 대한 단편적인 비교에 한정한다. 먼저 양적인 비교를 해 보겠다. 남한지역에서의 양민학살은 이승만 정권에 의한 학살이 1백 만 명 수준, 좌익에 의한 학살이 공식적으로는 12만 9천 명 수준이나 이는 과장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미군에 의한 학살규모는 알 수 없다. 편의상 노근리 수준의 학살이 현재까지 접수된 40여 곳에 자행된 것으로 간주한다면 1,600명 수준이다. 실제 다른 곳은 노근리 만큼 숫자가 많지 않고, 미 신고 지역이 많은 점을 고려하면 미군의 경우 최대 숫자가 5천 명 이하일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지역에서는 미군과 국방군 등에 의한 40일 점령기간 동안의 학살이 공식적으로 17만 2천에 이른다. 북한정권과 중국군에 의한 북한양민의 학살은 제대로 알려진 것이 없다. 물론 중국군은 남한 내에서도 양민학살의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미군이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노근리같이 양민학살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상황논리는 중국군과 비교한다면 터무니없는 주장임이 여실히 입증된다. 전쟁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북한은 미군의 초토화작전에 의해 전역에서 엄청난 양민학살이 이루어졌다. 앞에서 보았지만 신의주의 경우 주민 20만의 2/3가 미군의 야수적 폭격에 의해 학살되었던 점을 고려한다면 수 십만 명 수준으로 추정된다. 정부의 공식정책은 남한의 경우 이승만의 특별조치령이나 거창사건 등에 대한 그의 담화, 11사단의 작전지시 등은 학살을 만연하게 하는 원초적 요인이라고 볼 수 있다. 북한의 경우 친일파, 친미파, 악질반동 등을 북한 법과 재판에 의거 처단하게 규정되어 있고 고문 등을 금지하라는 내무서 지시사항 등을 볼 때 보다 절제된 학살이 진행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역시 후퇴상황에서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양민학살 자체가 국가폭력에 의해 대부분 일어 날 수밖에 없었으나 그 폭력행사의 적법성, 야만성, 강도 등에서 남북간의 차이가 컸다. 남의 경우 고삐 풀린 국가폭력이라면 북의 경우는 그나마 절제된 폭력이었다. 전쟁의 경우 개인적 수준에서 양민학살이 이루어질 수 있는 개연성은 매우 높다. 보다 중요한 점은 이들 범죄행위가 공식집단에 의하여 얼마나 조직적으로 조장·묵인하는 가운데 행해졌느냐 하는 점이다. 남북의 대조적인 점은 북은 미국의 '범죄행위'에 대해 세계여론에 공식적으로 호소하여 그 진상을 공개적으로 조사할 것을 요청하였고, 실제로 국제적인 조사가 진행되었으나, 미국이나 남한은 북한의 학살·만행을 말로는 규탄하면서도 국제진상조사를 공식적으로 요청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남북간의 이러한 차이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지만 일본군출신 위주로 구성된 남한군의 태생적 한계와 유격대 출신 위주로 구성된 인민군의 태생적 인민성 등도 분명 중요 결정요소일 것이다.
VII. 맺음말: 노근리의 해원을 넘어 베트남 학살의 참회로
미군의 노근리 학살이 세계적 관심이 됨을 계기로 한국전쟁 중의 양민학살이 우리 사회의 쟁점이 되고 풀어야 할 당면과제로 대두되었다. 피해 당사자나 관련자의 경우 이미 노령으로 사망하거나, 도시화로 고향을 벗어나기도 하고, 아직도 가위 눌려 진실을 밝히지 못하고 원한만을 가슴에 삭이고 있고, 과거의 쓰라림을 망각 속에 묻혀 두고 싶기도 하여 한국전쟁 중 양민학살에 대한 역사적 진실은 계속 베일에 잠겨 있어왔다. 그러나 문민정부에서 거창사건에 대한 특별법이 제정되고 국민의 정부에서 제주4.3항쟁 특별법이 제정되어 일부의 진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는 관련유가족 당사자의 끈질긴 실행의 결과물로 획득된 것이다. 노근리의 진상규명과 미국의 공식적 사죄와 배상만으로 미군의 전반적 양민학살이 매듭지어져서는 안 된다. 양민학살에 대한 역사바로세우기가 미군학살에 머물러서도 안 된다. 이승만 정부, 더 나아가 북한지역에서의 학살도, 또 북한이나 좌익 측의 주도에 의한 학살까지도 궁극적으로는 규명되고 역사청산 되어야 한다. 그리고 베트남전쟁에서 한국군에 의해 자행된 양민학살 또한 철저한 진실규명과 올바른 역사청산이 이루어져야 한다. 한국전쟁이 끝난지도 벌써 반세기가 지났다. 베트남전쟁이 끝난지도 이미 반의 반세기를 지났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 원혼들은 구천을 떠다니면서 안착을 못하고 있다. 살아남은 유가족 역시 사무치는 원한을 가슴에 안은 채 쌓이고 쌓인 한을 풀지 못하고 있다. 또 일제의 식민지하에서 우리 조선인들이 겪은 쓰라린 과거가 아직도 종군위안부대책위원회의 수요집회가 한 주도 빠짐없이 진행되는 가운데 되살아나면서 우리는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분노는 노근리를 계기로 미국에게 향하고, 종군위안부에 이르러서는 일본으로 향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노근리의 해원을 넘어 베트남학살의 참회로까지 나아가야 한다. "지난날에 구애되어 앞날에 장애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승만 식의 역사인식이나 "과거를 닫고 미래로 나아가자"는 베트남 정부의 반역사적인 고육지계는 우리가 취할 바는 아니다. 오히려 "불행했던 역사가 전진을 가로막는 족쇄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 불행했던 역사에 대한 청산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이 역사적 진리를 구체적 역사 속에서 실행시켜야만 우리는 새로운 21세기를 만들고 문명사회의 진정한 일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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