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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명고수 김명환 연보 조사 정리/노재명(국악음반박물관 관장)
*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자료(관리번호 미부여 상태) 판소리 인간문화재 성우향 춘향가 완창 공연 실황(소리:성우향, 판소리 고법 인간문화재 김명환 사상 초유의 6시간 홀로 북반주 공연 녹음) 코웰뮤직 기획 제작 COWR-006(5CD 박스물), 1986년 12월 10일 14:00∼20:00 서울 세종문화회관 소강당 공연 실황 녹음, 2002년 제작. 음반 해설 및 사설 채록:노재명(국악음반박물관 관장). * 음반 해설서 기록: 고수 김명환 연보(조사 정리/노재명) 본명 - 김명환(金命煥) 아호 - 일산(一山) 1913년, 전남 곡성군 옥과면 무창리에서 김해 김씨 삼현파, 만석꾼 부자인 아버지 김용현과 어머니 명사현 사이에서 막내 아들로 태어남. 1918-1919년 무렵, 아버지인 김용현에게 한문을 배움. 송만갑, 장판개, 김정문 등의 명창이 옥과에서 부자집으로 소문난 김명환의 집에 초청되어 가서 판소리를 함. 이를 계기로 김명환은 판소리에 흥미를 느끼게 됨. 1920년, 옥과보통학교에 입학. 1923년, 아버지의 회갑연에 전라도 일대의 판소리 명창과 산조의 명인들이 초청되어 가서 공연을 함. 이 해 여름에 김명환은 후두염을 앓았으나 한방 치료로 곧 나았다. 1925년, 옥과국민학교 졸업. 1926년, 일본 동경에 있는 효성중학교에 입학. 1927년, 우에노음악학교에 다니던 큰조카의 권유로 동경 공회당에서 연주되는 서양음악을 자주 들음. 1928년, 아버지가 중풍에 걸려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에서 일시 귀국. 아버지의 성화로 혼처를 정함. 1929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남. 이 해 음력 10월 6일에 창녕 조씨, 조금안과 혼인. 혼인 후 처가집에 놀러갔다가 북 못치는 일로 여러 사람 앞에서 망신을 당함. 이를 계기로 김명환은 북을 배우기로 결심하고, 이 해 겨울에 장판개를 찾아가 북과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함. 1929-1932년, 옥과의 장판개에게 고법과 심청가 등 판소리를 배우는 한편 신찬문, 박판석, 오성삼, 주봉현 등에게 북을 배움. 1930년, 이 해 여름에 김명환은 각기병에 걸려 유학을 포기하고 귀국하여, 처남의 권유로 고창고보에 입학. 1931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효성중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함. 큰아들 현표가 태어남. 방학 때 틈틈히 장판개를 찾아가 북 공부를 하면서 씨름판에도 나가 힘을 겨룸. 1932년, 김명환은 글 공부보다 북 공부에 취미가 있어 계속 북 공부에만 몰두하여, 형에게 여러번 매를 맞기도 하였다. 한편 김명환의 집 사랑에는 송만갑, 유성준, 장판개, 박봉래, 김정문, 공창식, 김봉학, 박중근 등 여러 명창들이 드나들며 판소리를 했는데, 김명환은 1932년에 처음으로 자신의 집 사랑에서 북반주를 했다. 1932-1935년, 송만갑이 이끌던 단체 ‘대동극단'에 입단하여 김정문, 조학진, 강남중, 이화중선, 김추월, 박금선 등과 공연을 다님. 1933년 무렵, 광주에서 이동백의 판소리에 북반주를 함. 1933년 무렵, 구례 화엄사에서 열린 명창대회의 정정렬 판소리 공연 때 북반주를 함. 1933년, 둘째 아들 준표가 태어남. 1933-1934년 무렵, 옥과에서 열린 임방울의 수궁가 공연 때 북반주를 하여 공식적으로 데뷔함. 1930년대 초-말, 조선음률협회, 조선성악연구회에서 활동. 북반주 연습을 하기 위해서 잔치상 차리고 쌀, 돈 등으로 사례하며 이동백, 송만갑과 같은 대명창들의 소리 반주를 하여 북을 익힘. 1935년, 큰딸 효정이 태어남. 1936년, 둘째 아들 준표가 치아에 종독이 올라 죽음. 1936년 무렵, 여관과 이선유의 집에서 이선유에게 판소리를 배움. 1936년 무렵, 김종길의 집에서 북을 배움. 1937년, 전도성의 판소리에 북반주를 함. 1940년, 협률사를 따라 전국을 순회하다 여비가 떨어져 귀향. 1941-1942년 무렵, 만주, 봉천, 장춘 등 중국을 여행함. 1944년 무렵, 징용 끌려가는 도중에 열차에서 뛰어내려 탈출. 1945년, 광복 후 김명환의 형이 친일파로 몰려 가산을 몰수당하고 사방에서 핍박을 받음. 부인 조금안이 장결핵으로 세상을 떠남. 1949년, 가산을 정리하고 광주시 금남로로 이사. 1950년, 6.25 전쟁 발발. 큰아들 현표가 월북하여 수모를 겪음. 1952년, 병사한 아내에 대한 생각, 핍박당하고 수모받은 설움, 경제고 등을 잊어 보려고 아편을 시작함. 1953년, 김명환은 임방울의 난장 공연에 성우향과 함께 참가함. 1954년, 조선일보사 주최로 열린 ‘독자 위안 공연’에 참가함. 1953년, 광주에서 박의숙이 부르는 수궁가 중 <약성가>를 듣고서 좋은 소리제라 여긴 김명환이 박의숙의 스승인 정응민을 수소문하여 찾아감. 김명환은 임방울의 난장 공연 때 번 돈을 밑천 삼아서 성우향을 명창으로 길러내려고 정응민에게 데리고 갔다. 1953-1957년, 약 4년 동안 김명환은 정응민이 소리를 가르치는 방에서 북을 치며 정응민의 집에서 기거했다. 김명환은 정응민의 보성소리를 오랫동안 듣고 북반주를 하여, 누구보다도 보성소리를 훤히 알고 북반주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김명환은 훗날 보성소리를 세상에 알리는 데도 큰 공을 세웠다. 1953-1957년 무렵, 경무대에 초청되어 이승만 대통령 앞에서 임방울 판소리의 북반주를 하여 ‘일산'(一山)이라는 아호를 얻음. 1958년, 아편 중독이 심해져서 이를 끊기 위해 자진해서 79일 동안 광주 교도소에 들어가 생활함. 아편을 끊고 약 2달 동안 전라남도 초도에서 요양 생활을 하였음. 1959-1962년 무렵, 약 3년 동안 전라남도 해남에 있는 대흥사를 드나들며 대흥사 밑의 동굴에서 요양 생활을 하였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남. 1961년, 떠돌이 생활을 하며 극심한 경제고에 시달림. 1968년, 서울에서 활동하기 시작함. 1969-1970년 무렵, 김연수의 권유로 박동진의 변강쇠타령 완창 등의 공연에 북반주를 함. 1970-1973년 무렵, 이보형에게 북을 가르침. 이 때 이보형은 김명환에게 북을 배워 문화재 제10-12호(서울:문화재관리국, 1976·1977·1979년)에 논문 ‘판소리 鼓法 1-3'을 발표했다. 1971년 7월 5일, 국립극장에서 판소리보존연구회와 동아일보사가 주최하고 한국국악협회, 한국민속음악학회, 문화재관리국, 국악예술학교, 해사화갑기념회가 후원하여 열린 ‘판소리 유파 발표회(명창 권삼득 탄생 200년 기념)'에 김명환이 참가하여 박록주의 춘향가 중 <사랑가>, 정권진의 수궁가 중 <토끼화상>과 <벌덕계가 용왕께 장담을 하며 호기있게 나오는 데>, 한승호의 춘향가 중 <옥중상봉>, 성창순의 춘향가 중 <갈까보다>와 <춘향이 사령에게 돈 주는 데>의 북반주를 하였다. 1969-1974년 무렵, 함동정월(1917-1994)과 함께 살면서 함동정월의 최옥산류 가야금산조를 북반주 하며 예술적 교류를 가짐. 1972년, 이보형이 김명환의 집에 자주 드나들던 박봉술을 김명환의 집에 초청, 소리판을 벌여 김명환의 북반주에 맞춰 박봉술의 송만갑제 춘향가 전바탕(정정렬제도 일부 섞여있음)을 릴 테입에 녹음함. 1973년 10월-1978년 10월, 1973년 10월부터 판소리학회가 기독교방송국 연주실에서 ‘판소리 감상회'를 한달에 한번씩 개최하기 시작하여, 1974년 1월부터는 서울시 중구 저동2가 영락빌딩 3층 브리태니커社 밴튼회관에서 판소리학회·한국브리태니커회사가 공동으로 ‘판소리 감상회'를 개최했다. 1976년 4월에 월간지 뿌리깊은나무가 창간됨으로써 그 이름이 ‘뿌리깊은나무 판소리 감상회'로 바뀌었고 매주 금요일마다 정기적으로 소리판이 벌어졌다. 1978년 10월에 국립중앙박물관 중앙홀에서 100회 기념 공연회를 끝으로 이 판소리 감상회는 막을 내렸다. 이 판소리 감상회에는 명창 21명, 고수 5명이 참가하였다. 김명환도 이 판소리 감상회에 여러번 고수로 참가했다. 1974년 11월 12일, 명동예술극장에서 열린 ‘성우향 第二回 硏究發表會 金世宗制 春香歌' 공연에 고수로 참가. 1974년 11월 15일, (주)성음에서 제작된 ‘沈淸歌(SHIM CHUNG GA) 重要無形文化財 第五號'라는 김소희의 사가판에 김명환의 북반주 녹음이 담겨있다. 1974년, 담석 제거 수술. 1975년, 한국판소리보존연구회 발족식에 참가. 1975년 무렵, 동숭동 서울대학교에서 정권진(소리)과 김명환(북)이 춘향가를 공연함. 1976년 5월 21일, 오아시스레코드사에서 제작된 ‘오아시스 민요 시리즈-조상현의 沈淸歌'(화초타령-끝)라는 음반에 김명환의 북반주 녹음이 담겨있다. 1976년, 김채윤과 재혼. 1976년, 문화재보호협회에서 기획하고 지구레코드에서 제작된 ‘한국전통음악 대전집' 중에서 춘향가(소리:김소희), 적벽가(소리:박봉술·한승호·박동진), 수궁가(소리:정광수·박초월) 음반에 김명환의 북반주 녹음이 담겨있다. 1977년 4월 30일, 한국문화예술진흥원 강당에서 민속악회 시나위 주최, 한국민속극연구소 후원으로 열린 ‘성우향 第三回 硏究發表會 宋萬甲制 興甫歌' 공연에 고수로 참가. 1978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9호 판소리 고법 기예능보유자로 인정받음. 1978년, 고수로는 최초로 고법 발표회인 ‘金命煥 판소리 鼓法 發表會'를 가짐. 이 발표회 때 김여란, 박봉술, 정권진, 함동정월, 김소희, 박귀희 등이 참가하여 소리를 했다. 1978년, (주)성음에서 제작된 ‘춘향가(春香歌) CHOON HYANG GA 무형문화재 제5호'라는 김소희의 사가판에 김명환의 북반주 녹음이 담겨있다. 1979년, 정권진과 함께 전남 보성, 고흥 등지에서 순회 공연을 함. 1979년, 담석증이 재발하여 재수술을 받은 후에 건강이 나빠져서 전처럼 활발한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됨. 1980-1983년, KBS 텔레비젼과 라디오에 출연. 1981년 6월 4일, 오아시스레코드사에서 제작된 ‘金世宗版 春香歌-國唱 成昌順'이라는 음반에 김명환의 북반주 녹음이 담겨있다. 1981년, 김명환의 예술을 흡모하는 이들이 ‘일산회'를 결성함. 박록주 생전에는 박록주의 집에 여러 전통음악 애호가들이 드나들었다. 그러다가 박록주가 1979년에 타계한 이후로는 김명환과 정권진의 집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일산회가 정식으로 결성되기 오래전부터 김명환의 집에 많은 이들이 모여들어서 1981년에 자연스럽게 모임이 만들어졌다. 일산회에는 이보형, 백대웅, 문재숙, 김해숙, 오용록, 장종민, 정회천, 김정수, 이은자, 김일륜, 박종권 등이 참석하였다. 1982년 5월 1일, 한국브리태니커회사에서 발매된 ‘뿌리깊은나무판소리'라는 전집 음반(소리:박봉술·정권진·한애순·조상현)에 김명환의 북반주가 담겨있다. 1982년 8월, 전남 보성군 영천면 회천리에서 있었던 정응민 명창 추모 공연과 정응민 유적비 제막식에 참가. 정권진, 성우향, 조상현, 성창순 등이 발족한 ‘강산제 판소리 연구보존회'의 고문으로 김명환이 추대됨. 1982년 8월 30일, 공간사랑에서 열린 ‘강산제 판소리 연구보존회' 발족 기념공연에 참가하여 공연. 1982년, 일본과 유럽 순회 공연. 1983년 7월 30일, (주)현대음반에서 제작된 ‘판소리 춘향전(순수 판소리 창극)'이라는 음반에 김명환(고수)이 정권진(도창), 조상현(이도령), 김동애(춘향), 신영희(춘향모), 은희진(방자), 강종철(변학도), 안숙선(향단), 서봉석(대금), 박종선(아쟁)과 함께 녹음에 참여했다. 1983년, ‘일산 문하생 고법 발표회'가 열림. 1984년 9월 15일, (주)성음에서 제작된 성금연의 가야금산조 음반에 김명환의 북반주 녹음이 담겨있다. 1984년 11월 25일, (주)현대음반에서 제작된 함동정월의 가야금산조 음반에 김명환의 북반주 녹음이 담겨있다. 1984년, KBS 국악대상에서 공로상을 받음. 1980년대 중반, 이보형·김정수 등 최승희의 예술을 아끼는 이들이 협력하여 한정판으로 제작한 최승희의 춘향가 음반에 김명환의 북반주 녹음이 담겨있다.(지구레코드 제작, 6MC, 1994년 재발매됨) 1986년 2월, 음악동아(서울:동아일보사) 166-171쪽, ‘명인 명창을 찾아서(23)'에 김명곤이 김명환에 대해 쓴 글이 실렸다. 1986년 12월 10일 14:00-20:00, 세종문화회관 소강당에서 열린 성우향의 김세종제 춘향가 완창 공연에 고수로 참가. 1987년, SKC에서 제작된 ‘國樂 제5집(김해숙 가야금산조)' 음반에 김명환의 북반주 녹음이 담겨있다. 1986-1987년, 국립창극단 지도위원을 맡음. 1987년 9월 30일, 국립중앙극장 소극장에서 김명환의 제자 정회천의 고법 발표회가 열림. 1987년 12월 6일, 서울 동숭동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사단법인 판소리보존연구회 분실 주최로 열린 ‘김세종제 춘향가 성우향 제자 발표회' 공연에 고수로 참가. 1988년 5월 28일, 국립중앙극장 소극장에서 열린 성창순의 심청가 완창 공연에 고수로 참가. 1988년 11월 30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18회 판소리 流派 發表會'에 고수로 참가. 1980년대 중․후반, 김명환이 송만갑제 단가 <진국명산>, 장판개제 흥보가 중 <제비노정기>, 정응민제 심청가 중 <곽씨부인 죽음, 심봉사 절규>를 직접 북반주 하며 방창하여 녹음함.(한국문화예술진흥원 소장 음악자료 릴테입 AT-334) 1989년 3월 31일, 뿌리깊은나무사에서 제작된 ‘뿌리깊은나무산조' 전집 음반 중에서 함동정월의 가야금산조 음반과 지성자의 가야금산조 음반에 김명환의 북반주 녹음이 담겨있다. 1989년 4월 15일, 작고. 김명환은 정응민, 함동정월 등과 교류하면서 이 땅의 전통음악을 발전시키는 데 큰 몫을 하였고, 중요무형문화재 제59호 판소리 고법 기예능보유자로서, 국악협회 이사로서, 국내뿐 아니라 프랑스, 스페인, 미국, 일본 등 여러 공연 무대에서 활동했으며, 전통음악에 대한 이론이 밝아서 동아일보에 전통음악의 가락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글을 발표하기도 했고, 장종민, 정회천 등 여러 제자를 길러내다가 1989년에 세상을 떠났다. 1989년 4월 21일, 예음홀에서 열린 가야금산조 여섯바탕전(2) 정회천의 최옥산류 가야금산조 공연은 본디 김명환이 북반주를 맡기로 되어 있었으나, 4월 15일에 김명환이 별세하여 정회천의 동생 정회석이 대신 북반주를 맡았고 추임새없이 엄숙하게, 김명환 명고 서거 추모 공연으로 치루어졌다. 1991년 1월 1일, 김명환의 삶과 예술에 대한 얘기를 김해숙, 박종권, 백대웅, 이은자가 정리한 내 북에 앵길 소리가 없어요(뿌리깊은나무 민중자서전 11)가 출간됨. 1994년 12월, 명인기획에 의해 기획된 성우향의 첫 독집 음반인 ‘판소리 춘향가’(초입-사랑가, 1974.11.12. 명동예술극장 공연실황, 지구레코드 제작)에 김명환의 북반주 녹음이 담겨있다. 1995년, 뿌리깊은나무사에서 두번째로 기획하여 발매할 예정인 ‘뿌리깊은나무판소리' 전집 음반(소리:정광수·오정숙·조상현·최승희·송순섭) 중에서 최승희의 춘향가 음반에 김명환의 북반주가 담겨있다. 1999년, 지구레코드에 의해 기획된 ‘성우향 흥보가’ 완창 음반(1977.4.30. 한국문화예술진흥원 강당 공연실황, 지구레코드 제작)에 김명환의 북반주 녹음이 담겨있다. 2002년, 코웰뮤직에 의해 기획된 ‘성우향 춘향가’ 완창 음반(1986.12.10. 세종문화회관 소강당 공연실황, 코웰뮤직 제작)에 김명환의 북반주 녹음이 담겨있다 | | 고수의 북소리는 섬진강을 타넘고.... 김명환과 곡성 김병종 둥둥둥……. 북소리에 마음을 빼앗겨 본 적이 있는가? 저홀로 울다가 마음을 두 드리고 어느 순간 자지러지며 핏줄 속으로 흘러들어와 온 몸을 전율하 게 만드는 저 묵직한 연타음에 말이다. 그 북소리에 있어 이나라 첫째 로 치는 국고 김명환. 그의 고향인 곡성의 옥과를 찾아가는 동안 고사 하나가 떠오른다.조조앞에 명고수 미형이 불려나왔을 때 천하명고 미형 은 북채를 쥐기 전 의관부터 훌훌 벗어던져 버리더라는 이야기. 놀란 조조가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지만 미형은 오히려 조조를 향해 "예의 자유도 모르는 무식한 자"라고 일갈하고는 그 자리를 떠버린다.
-------------------------------------------------------------------- 사진설명 : (위)푸른 산과 촌락을 감아흐르는 맑은 물과 매화, 산수유, 은어, 그리고 물오리와 개구리.... 봄과 생명의 기쁨을 노래하는 섬진강 가족들. (아래)김명환은 길이 한자 두치에 둘레 여덟치의 이 소리북을 끌어안고 평생을 살다 갔다. ------------------------------------------------------------------- 예의 자유. 조선 명고 김명환이야말로 일체의 권위와 인습과 타성 을 벗어던져 버리고 유천희해하며 예의 자유경에서 노닐다 간 사람 아 니던가. 칼칼하고 표표한 성품으로 칠십 평생 곁눈질 한번 안주고 북채 하나에만 오로지하여 장엄하고 기백 큰 조선북의 '소릿길'을 열었던 사 람이었다. 그 조선의 미형 김명환의 소리를 키운 섬진강변은 지금 봄기운으로 난리가 났다.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는 매화와 강변 여기저기서 축포처 럼 터지는 산수유꽃,그리고 핏빛으로 흐드러진 자운영, 그 꽃무더기 사 이를 비집고 흘러나오는, 지리산 얼음 녹아 차고시린 강물과 그 물속으 로 미끄러지는 은어떼. 폴짝, 연두빛 풀밭 여기저기서 튀어오르는 개구 리. 귓가로 날아오고 가는 꾀꼬리며 멧새소리들…. 다섯 빛, 다섯 색으 로 퍼진다는 김명환 북의 원음은 바로 이 섬진강변에서 생겨났을 터. 봄햇살은 길과 강에 질펀한데 이 '봄의 소란' 속을 걸어 옥과면 무 창리에 이른다. 무창은 김명환이 『내 북소리를 산으로 막고 물길로 풀 어냈다』고 했던 바로 그 곳. 마을 앞으로는 섬진강 상류가 되는 순자 강 옥과천이 부드럽게 흐르고 뒤로는 임면쪽으로 설산이 성깔있게 뻗어 간 2백여호 가까운 반촌이다. 손주를 데불고 동구에 나 앉아있던 노인 한분에게 청해 어렵사리 김명환 생가터를 찾았지만 그 자리에는 교회가 서있다. 유리창 너머로 아이들 몇이서 성가연습을 하는 모습이 보인다. 시골 아이들의 맑고 청아한 노래를 뒤로 하며 마을 뒷산의 묘소로 오르 는 동안 나를 안내하던 노인은 사람들이 심심치않게 서울이나 광주 혹 은 일본에서까지 찾아와 김명환을 '조사해 가는데', 일산 영감이 정말 그렇게 유명했는가고 묻는다. 북을 차고 앉은 모습에서 흡사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팽팽한 살 기가 느껴지고 소리꾼을 쏘아보는 눈에서는 퍼렇게 불이 뚝뚝 떨어졌던 김명환. 제자의 북소리가 시원치 않으면 『치라는 북은 안치고 쇳자국 만 보듬고 앉아있는 저 썩을 놈을 어째야 쓰까』라고 내지르곤 했던 가 파른 성깔. 소리가 영 성에 안차면 『니기미, 소리는 국민학생인데 대 학원생보고 북을 치라허네』라며 팩하고 돌아서던 그도 선산 찾아 다니 러올 때만은 보통 노인과 다름없었던 듯하다. 사실 소리마당에서는 소 리하는 이가 주역이 되고 북은 으레 '소리'에 가리워 잘 드러나지 않는 법이지만 김명환의 경우는 예외였다. 「일고수 이명창」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게 그의 '북'은 거의 늘 '소리'를 리드하고 압도했다. 흐물흐물 곰삭아 터지다가 가슴 미어지고 숨줄 끊어지도록 모질게 몰고가는 기- 경-결-해가 늘 황홀했다. 그러면서도 김명환 북은기백이 크고 서슬이 퍼랬다. 그는 '잘디잔 북' '뼈대없는 북'에는 단박 『저거 예술 아니여. 저러면 쓰간디』하고 손을 내젓곤 했다. '예술인 것'과 '아닌 것'의 경 계에 늘 단호했다. 김명환 북의 기운생동한 맛에 반해 나는 그가 박봉 술,정권진, 조상현, 한애순 같은 명창들과 호흡을 맞추던 「뿌리깊은 나무 판소리감상회」에 뻔질나게 드나들었지만 내 귀에 어렴풋이 그 북 소리의 뼈대가 가늠되어올 때 쯤에 그는 이미 저 세상 사람이었다.소년 '명창'은 있어도 소년 '명고'는 없다고 '좋은 북'은 치는 이나 듣는 이 모두에게 언제나 그리도 더디고 애닯게 오는 것이었는지. 무덤곁 풀섶에 앉아 멀리 굽이돌아 흐르는 섬진강을 다시 바라본다. 매화꽃잎이 점점이 떠가는 저 강에는 지금 은어가 빠르게 물살을 타고 있을 터이다. 가늘고 긴 몸체에 청록과 회백색 자태가 아름답기 그지없 지만 너무 성마르고 깔끔해 잡히면 팔딱일 새도 없이 제가 먼저 숨길을 놓아버린다는 은어. 언제나 맑은 물에서만 놀며 깨끗한 돌자갈 이끼만 먹고 자라 몸에서 수박냄새 같은 향기가 풍긴대서 향어라 불리기도 한 다던가. 문득 오뉴월 염간에도 늘 칼날같이 풀먹인 세모시에 옥색 물들여 날아갈듯 차려입고 나서곤 했다는 북의 가인 김명환이 어쩌면 그가 나 서 자란 저 섬진강 은어의 생태를 그대로 닮았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 글-그림 김병종·서울대미대 교수 ). '캡션' ◇깨어나는 봄의 섬진강변 푸른 산과 촌락을 감아흐르는 맑은 물과 매화, 산수유, 은어, 그리고 물오 리와 개구리…. 봄과 생명의 기쁨을 노래하는 섬진강 가족들. ◇다섯 색, 다섯 빛으로 울린다는 김명환의 소리북 김명환은 길이 한자 두치에 둘레 여덟치의 이 소리북을 끌어안고 평생을 살 다 갔다. 김명환 누구인가 1913년 전남 곡성의 옥과에서 태어나 1989년 봄 노량진의 한 초라한 연립주 택에서 세상을 떠난 우리 음악사의 가장 위대한 '소리북쟁이'. 곡성의 대지주 아들로 태어나 일본에까지 공부하러 갔지만 혼례치르던 밤 벌어진 소리판에서 『남도 청년이 소리장단 하나 못 짚느냐』는 핀잔에 그 길로 명창 장판개를 찾아가면서 그의 한평생은 길이 한자 두치 둘레 여덟치 의 소리북 안에 갇히게 된다. 송만갑, 임방울, 박녹주 같은 나라 안의 한다하는 명창들이 김명환 북과 함 께 무대서기를 소원했을 만치 최고의 고수(고수)였지만 정작 자신은 전란과 비운에 쫓기는 험한 세월을 살았다. 서울의대 다니던 큰아들의 납북으로 충격을 받아 한때 아편에도 손을 댔고 이를 끊기위해 자진해서 광주교도소 에 들어가기도 했던 그는 만년에 KBS국악대상을 받고 「뿌리깊은 나무 판소 리감상회」가 시선을 모으면서 비로소 세간에 그 존재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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