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작가 진우석의 우리산 기행-<12>충남 계룡산
<1392년 건국된 조선왕조의 새 수도 1순위는 북한산이 아닌 계룡산이었다.
태조 이성계는 풍수지리에 밝은 무학대사를 모시고 직접 계룡산에 행차해
의견을 물었다. 그러자 무학대사는 “계룡산은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ㆍ
금빛 닭이 알을 품은 형상)이요, 비룡승천형(飛龍昇天形ㆍ용이 날아
하늘로 오르는 형상)입니다”라고 답했다. 이곳에 도읍하면 풍요한
태평세월이 보장된다는 말이었다. 이에 흡족한 이성계는 계룡산 남쪽
신도안을 새 왕조의 수도로 낙점했고, 새 수도 건설 공사가 시작되었다.>
순조롭게 진행되던 계룡산 천도 사업은 1393년 연말 문신 하륜의 맹렬한 반대로 파국을 맞는다.
하륜은 신도안이 남쪽에 너무 치우쳐 교통이 불편하고 큰 배가 드나들지 못하며 흘러나가는 물이
땅의 기운을 약화시켜 나라가 곧 쇠망할 곳이라 주장했다.
조정 대신들은 치열한 공방 끝에 하륜의 주장을 옹호해 계룡산 천도 계획은 결국 백지화되고 말았다.
조선의 수도가 한양으로 결정되자 계룡산 천도설은 한동안 잊혀졌다.
그러다 17세기 말부터 민심은 조선왕조를 돌아서기 시작했고, 그로 말미암아 계룡산 천도설이 다시
고개를 들게 된다. 계룡산 부활의 중심에는 ‘정감록’이 있었다.
‘조선왕조가 망한다, 살아남으려거든 복된 피난처로 가라, 위기가 절정에 이른 순간 계룡산에서
정진인(鄭眞人)이 나타나 새 나라를 세운다’는 것이 ‘정감록’ 예언의 골자다.
그것은 조선 지배층에게는 혹세무민의 황당한 책이었지만 민중들 입장에선 위로와 희망의 터전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새로운 나라의 수도가 계룡산에 세워질 날만을 기다렸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연천봉 정상 바위에 새겨진 ‘방백마각구역화생(方百馬角口或禾生)’ 글씨다.
19세기 후반에 발견된 이 글씨는 아무도 해석을 못하다가 ‘조선은 개국 482년째 되는 1874년에 망한다’는
뜻임이 밝혀졌다.
몰래 이 글을 바위에 새긴 사람은 아마도 ‘정감록’의 신봉자였을 것이다.
계룡산은 공주시ㆍ논산시ㆍ대전광역시에 둘러싸여 있다.
여기에 2003년 계룡산 최고의 명당인 계룡시 두마면, 일명 신도안 지역이 ‘계룡시’로 승격함에 따라
행정구역상으로는 네 도시에 인접하게 되었다.
계룡산은 최고봉의 높이가 845m, 그리 큰 산은 아니다. 그러나 고대로부터 손꼽히는 명산이었다.
신라는 전국의 5대 명산을 5악으로 지정하고 국가적 제사터로 삼았다.
토함산이 동악, 지리산이 남악, 태백산이 북악, 팔공산이 중악, 계룡산은 서악이었다.
5악 신앙은 고려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져 왕건은 계룡산 산신에게 호국백(護國伯)이라는 작호를 내리기도 했다.
조선은 묘향산을 상악(上嶽), 계룡산을 중악(中嶽), 지리산을 하악(下嶽)으로 삼아 각각 상악단과 중악단,
하악단을 설치했다.
그 중 계룡산 신원사에 건립된 중악단이 지금까지 유일하게 남아있다. 중악단은 계룡산 무속신앙의 상징으로
무당 할미들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는다. 중악단을 지은 것은 고종이었다.
고종이 중악단의 격을 올리고 건물도 새로 지은 것은 새 왕조의 도읍으로 공공연히 일컬어지는 계룡산의 땅
기운을 억누르려는 의도였다.
무속신앙의 상징 ‘중악단’ 계룡산 산길은 동학사 들머리가 대전에서 가깝고 다양한 길이 나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코스는 자연성릉과 남매탑을 둘러보는 원점회귀형 산행이 대표적이다. 동학사계곡은 곳곳에 아름다운 소와
담을 품고 있어 동학사까지 발걸음을 더디게 한다. 동학사는 별다른 문화재는 없지만 앳된 얼굴을 한 비구니
스님들이 인상적이고, 그들의 세심한 손길이 곳곳에 미쳐 정갈하기 그지없다. 동학사에서 완만한 계곡을
40분쯤 오르면 은선대피소에 닿는다. 대피소 직전 왼쪽 10m 아래에 위치한 은선폭포는 약 30m 높이로 비가
온 뒤에야 폭포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산꾼들의 휴식처 역할을 하던 은선대피소는 아쉽게도 없어졌다.
대피소에서 너덜지대와 활엽수들이 어우러진 길을 30분쯤 걸으면 관음봉고개다. 여기서 100m 오르면 관음봉
정상이다. 관음봉 전망대에 서면 남쪽으로 쌀개봉 암릉이 힘차게 뻗어내리며 천황봉이 하늘을 찌를 듯 우뚝하고,
그 왼쪽으로 천황봉~황적봉 능선, 오른쪽으로 문필봉~연천봉 능선이 학이 날개를 펼치고 있듯 장관을 이룬다.
이곳 조망은 가히 계룡산의 전모를 파악하기에 충분하다. 관음봉부터 자연성릉이 시작된다. 1시간쯤 동학사와
갑사쪽 산사면을 이리저리 우회하며 아기자기한 암릉을 따르면 삼불봉에 올라붙는다. 삼불봉에서 20분쯤
더 가면 유명한 남매탑이다. 탑 앞의 돌거북 12개는 신도안에 사는 어떤 보살이 절 주춧돌로 사용하고자 마련한
것이라고 하는데, 사람들의 훌륭한 휴식용 의자 역할을 하고 있다. 남매탑에서 동학사 방향으로 내려오면
원점회귀하지만, 여기서 갑사로 넘어가면 더욱 좋다. 이 길은 예전 국어교과서에 실린 이상보의 수필 ‘갑사로
가는 길’에 남매탑에 얽힌 전설과 함께 소개되면서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금잔디고개를 넘으면 수려한 갑사계곡을 따른다. 웅장한 용문폭포를 지나면 경내 풍광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갑사에 닿는다.
▨주변 명소
△갑사와 신원사 갑사는 계룡산을 대표하는 아름다운 절집이다.
420년 고구려에서 온 승려 아도화상이 창건했다.
679년 의상이 당우 1천여 칸을 더 지어 화엄도량으로 삼아 신라 화엄십찰의 하나가 되었고,
옛 이름인 계룡갑사를 갑사로 개칭했다.
보물인 철당간 및 지주와 부도, ‘석보상절’의 목각판, 1584년(선조 17년)에 만든 범종,
경종이 하사한 보련(寶輦), 10폭의 병풍, 1650년(효종 1년)에 만든 16괘불이 유명하다.
신원사는 가장 계룡산다운 절집이다. 절 주변에 무속신앙의 굿당, 신흥종교 암자,
기독교와 천주교의 기도원 등이 많다.
절 안에 계룡산의 산신제단인 중악단이 자리 잡았다. 백제 말기인 651년 보덕이 창건했다.
계룡산 동서남북 4대 사찰 중 남사(南寺)에 속하는데, 경내에는 석탑 부도가 있고 백제시대의
연화문와당이 발견되었다. 부속 암자 고왕암, 등운암이 빼어나다.
▨교통
자가용은 호남고속도로 유성 나들목으로 나와 찾아간다. 동학사는 대전역에서 102번,
대전고속버스터미널 앞에서 103번 좌석버스를 탄다. 오전 6시부터 오후 10시까지 15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갑사ㆍ신원사는 공주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시내버스 이용한다.
▨숙식
동학사 입구의 숲속의 모텔(042-825-1377)은 계룡산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위치에
맑은 계곡을 끼고 있는 숙박업소다. 숯불바비큐그릴 등이 구비되어 있는 뒤뜰정원과
취사와 간단한 조리가 가능한 옥상 파라솔 쉼터 등이 갖춰져 있다.
갑사 쪽은 공주유스호스텔(041-852-1212), 계룡산 갑사유스호스텔(041-856-4666)을 이용할 수 있다.
동학사 입구 먹을거리촌에 위치한 계명식당은 한정식(042-825-4015)을 기본으로 산채비빔밥, 버섯전골 등
싱싱한 자연산 재료로 맛을 낸 상차림으로 유명한 한식당이다. 갑사 가는 길의 창벽 일대에는 매운탕과
장어구이를 내놓는 맛집들이 즐비하다. 어씨네옛날장어구이(041-853-7340)집이 잘하기로 이름 난 원조집이다.
사진설명 : 갑사구곡 중에서 가장 빼어난 팔곡 용문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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