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전거 : 行狀(權萬 撰), 平海黃氏世系譜 등에 의함 | | | | 행력 | 왕력 | 서기 | 간지 | 연호 | 연령 | 기사 | 명종 | 11 | 1556 | 병진 | 嘉靖 | 35 | 1 | 10월 21일, 沙銅里에서 태어나다. | ~ | ~ | ~ | ~ | ~ | ~ | ~ | 仲父 黃應淸에게 수업하다. | 선조 | 2 | 1569 | 기사 | 隆慶 | 3 | 14 | 杆城 鄕試에 응시하다. | 선조 | 9 | 1576 | 병자 | 萬曆 | 4 | 21 | 사마시에 합격하다. | 선조 | 18 | 1585 | 을유 | 萬曆 | 13 | 30 | 別試에 합격하여 한림원에 들어가다. ○ 검열, 대교, 봉교 등을 역임하다. | 선조 | 25 | 1592 | 임진 | 萬曆 | 20 | 37 | 봄, 高山道 察訪이 되다. ○ 尹卓然의 종사관이 되다. | 선조 | 26 | 1593 | 계사 | 萬曆 | 21 | 38 | 봄, 軍功으로 형조 정랑이 되다. ○ 6월, 병조 정랑이 되다. | 선조 | 27 | 1594 | 갑오 | 萬曆 | 22 | 39 | 2월, 형조 정랑이 되다. ○ 9월, 도원수 權慄의 종사관이 되다. | 선조 | 29 | 1596 | 병신 | 萬曆 | 24 | 41 | 여름, 세자익위사 사어가 되다. | 선조 | 30 | 1597 | 정유 | 萬曆 | 25 | 42 | 여름, 승문원 교리가 되다. | 선조 | 31 | 1598 | 무술 | 萬曆 | 26 | 43 | 3월, 시강원 사서가 되다. ○ 9월, 사헌부 장령이 되다. ○ 10월, 陳奏使 書狀官으로 北京에 가다. | 선조 | 32 | 1599 | 기해 | 萬曆 | 27 | 44 | 5월, 장악원 정이 되다. | 선조 | 34 | 1601 | 신축 | 萬曆 | 29 | 46 | 10월, 醴泉 郡守가 되다. | 선조 | 39 | 1606 | 병오 | 萬曆 | 34 | 51 | 永川 郡守가 되다. ○ 5월, 성균관 전적이 되다. | 선조 | 40 | 1607 | 정미 | 萬曆 | 35 | 52 | 宣武 原從功臣에 녹훈되다. | 선조 | 41 | 1608 | 무신 | 萬曆 | 36 | 53 | 9월, 부친상을 당하다. ○ 10월, 모친상을 당하다. | 광해군 | 3 | 1611 | 신해 | 萬曆 | 39 | 56 | 10월, 吉州 牧使가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 광해군 | 4 | 1612 | 임자 | 萬曆 | 40 | 57 | 昌原 府使가 되다. | 광해군 | 6 | 1614 | 갑인 | 萬曆 | 42 | 59 | 7월, 사예가 되다. | 광해군 | 7 | 1615 | 을묘 | 萬曆 | 43 | 60 | 東萊 府使가 되다. | 광해군 | 9 | 1617 | 정사 | 萬曆 | 45 | 62 | 東萊鎭 兵馬僉節制使가 되다. | 광해군 | 10 | 1618 | 무오 | 萬曆 | 46 | 63 | 공조 참의가 되다. | 광해군 | 12 | 1620 | 경신 | 泰昌 | 1 | 65 | 가을, ‘海月’로 自號하고 晩歸亭을 짓다. | 광해군 | 14 | 1622 | 임술 | 天啓 | 2 | 67 | 4월 2일, 正寢에서 졸하다. ○ 吏曹 參判에 추증되다. ○ 五台山에 장사 지내다. | ~ | ~ | ~ | ~ | ~ | ~ | ― | 平海의 明溪書院에 제향되다. | 영조 | 52 | 1776 | 병신 | 乾隆 | 41 | ― | 문집이 목판으로 간행되다. |
기사전거 : 行狀(權萬 撰), 墓碣銘(李光庭 撰), 朝鮮王朝實錄 등에 의함 | | | | 편찬 및 간행 | 저자의 유문은 5대손 黃尙夏가 家藏草稿를 바탕으로 수집 편차하여 1774년에 李象靖의 校勘을 거친 뒤 그에게 序를 받고 1776년에 李世澤의 跋을 받아, 저자가 제향되어 있는 平海의 明溪書院에서 당시 山長인 李亨福의 도움을 받아 木板으로 14권 7책의 문집이 간행되었다.《초간본》 현재 이 본은 국립중앙도서관(古3648-文94-6),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D1-A1926),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장서각(D3B-1920) 등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1776년에 목판으로 간행된 초간본으로 국립중앙도서관장본이다. 본 影印底本은 目錄 제1판의 板心에 ‘卷一’이 잘못 들어가 있고, 권3의 제9판은 卷次가 ‘二’로, 권11의 제4ㆍ8ㆍ23판은 卷次가 ‘十’으로, 제12판은 板次가 ‘二’로, 권12의 제3판은 板次가 ‘二’로 誤記되어 있으며, 권13의 제1판, 권14의 제17판은 상태가 불량하여 동일본인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장본(811.98/황여일/해)으로 대체하였다.
기사전거 : 序(李象靖 撰), 跋(李世澤 撰), 行狀(權萬 撰) 등에 의함 | | | | 저본의 구성과 내용 | 본집은 14권 7책으로 되어 있다. 권두에 1774년에 李象靖이 지은 서문이 있고, 그 뒤에 목록이 있다. 권1~4는 詩이다. 저자는 五山 車天輅, 白湖 林悌에 비견될 정도로 詩에 능하다고 평가되고 있는 인물인 만큼 산일된 원고를 수습한 중에도 시가 전부 513題가 남아 있다. 시의 편집은 권1(193), 권2(153), 권3(141)이 저작 연도순으로 배열되어 있는 반면, 권4(26)의 경우는 저작 연도를 확인할 수 없는 작품들만 따로 모아 놓은 듯하다. 내용면에서 제일 앞의 〈題眞珠竹西樓〉는 14세 때 杆城의 鄕試에 응시하러 갔다가 죽서루를 지나며 벽에 써놓은 것인데, 당시 수령인 蓬萊 楊士彦이 보고는 매우 놀라 수소문해 저자를 찾고는 매우 기뻐했다는 일화가 있는 시이며, 〈登淸心樓〉 이상의 25편의 시는 內迎山에 대한 기행시이다. 〈萬曆庚申孟夏承旨赴京……〉 이하 3題는 아들 黃中允이 1620년에 奏聞使로 북경에 가게 되자 국사에 진념하라는 당부와 무사히 돌아온 데 대한 기쁨을 적은 시이며, 〈舟人謠〉는 海運으로 고통 받는 關東 지방 백성들의 참상을 세세히 진술한 것이다. 이 밖에 挽詩로는 丈人인 金守一에 대한 것 등 5편이 있으며, 주요 수창자는 숙부인 黃應淸, 鶴峯 金誠一 형제, 白見龍, 李義述, 林檜 등이다. 권5는 賦(3), 對策(1), 論(1)이다. 賦는 일본으로 왕자 未斯欣을 데리러 간 朴堤上을 그의 아내가 치술령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며 기다리다 望夫石이 되었다는 신라의 악곡을 소재로 지은 〈鵄述嶺賦〉 등 3편이며, 대책은 政事는 인재를 얻는 데 달려 있다는 데 대한 것이며, 論은 諸葛亮이 魏延의 奇計를 따르지 않은 데 대한 것이다. 권6은 書(29)이다. 柳成龍, 李恒福, 숙부 黃應淸, 趙穆, 曺好益, 琴蘭秀 등 모두 22명에게 보낸 것으로 인물별로 편차되어 있다. 권7은 元帥 權慄의 종사관을 사직하는 등의 疏 3편과 狀啓(1), 敎書(1), 箋(2), 表(1), 頌(1), 記(3), 序(3), 跋(3) 등이 수록되어 있다. 권8은 〈遊內迎山錄〉 등의 雜著 5편과 鶴峯 金誠一, 藥圃 鄭琢 등에 대한 18편의 祭文이 수록되어 있다. 권9~12는 〈銀槎錄〉이다. 〈은사록〉은 저자가 1598년 正使 李恒福, 副使 李廷龜와 함께 丁應泰의 誣國에 대한 辨誣를 위해 陳奏使 書狀官으로 北京에 다녀온 기록이다. 권9는 이때 지은 詩 92題를 따로 모아 놓은 것이고, 권10~12는 1598년 10월부터 1599년 4월까지의 日錄이다. 권13은 효자 朱景顔에 대한 傳과 鄭湛에 대한 墓誌, 鄭琢에 대한 行狀 및 柳成龍의 行蹟錄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14는 부록으로, 權萬이 지은 行狀, 李光庭이 지은 墓碣銘, 鄭玉이 지은 〈明溪書院奉安文〉 및 〈常享祝文〉, 李山海가 지은 〈沙銅記〉와 〈海月軒記〉, 崔鐵堅이 지은 〈送年兄上第歸覲〉, 楊士彦이 지은 〈送黃壯元歸寧平海〉, 〈鄕社上樑文〉, 吳瀷이 지은 祭文 등이 실려 있다. 권말에 李世澤이 1776년에 지은 跋이 있다.
| 필자 : 강여진(姜麗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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