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5] 포덕과 천도교의 궁을촌 건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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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5. 24.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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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현대사 사건과 인물
포덕과 천도교의 궁을촌 건설 (3)
- 남해지역을 중심으로
탁암 심국보_편집주간
1925년 10월 29일 조선농민사를 설립하였다. 조선농민사는 농민대중의 당면 이익과 생활향상 등 경제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1926년 10월 조선농민사 알선부를 신설한다. 알선부 사업은 출자액의 상한을 정하고, 출자액의 다과에 따라 이익을 배분하는 등 협동조합의 원칙을 따랐다. 당시 조선농민사 알선부에서는 개량농구를 알선하는 등의 사업을 비정규적으로 하였다. 1930년 4월부터는 알선부의 사업은 확대하며 실행 강목을 발표하고 농민대중의 생활안정에 힘을 쏟는다. 실행 강목은 다음과 같았다.
① 생산품과 소비품을 알선하여 중간이익을 농민에게 취득케 할 것,
② 중앙알선부 사업은 수수료를 요구하지 않고 희생적으로 취급할 것,
③ 소작인에게 무리한 행동을 하는 지주를 철저 응징할 것,
④ 궁窮 농민의 참상을 조사하여 당면의 대응책을 강구할 것 등
자주적 협동조합운동이었던 농민공생조합
1931년 4월부터는 알선부를 농민공생조합으로 바꾸었고 조직이 더욱 확대되자, 지역별 농민공생조합연합회가 결성되고 지방조합의 연합회 구성에 부응하여 1932년에는 조선농민사공생조합중앙회로 발전하였다. 농민공생조합중앙회의 주요사업은 다음과 같았다.
① 농촌일용품을 공동 구입하여 배부 또는 판매하는 소비부 사업,
② 농업창고 및 생산공장 경영을 통한 생산물의 위탁 혹은 공동판매,
③ 조합원의 농자융통 및 저축 편의를 도모하는 신용부 사업,
④ 중요한 농구 및 기타의 시설을 설치하여 일반조합원의 편의를 돕는 이용부 사업,
⑤ 의원·목욕탕·이발소 등을 설치하여 일반조합원들의 편의를 돕는 위생부 사업 등
또 주목할 것은 공동경작운동으로, 1933년 무렵부터 공작계工作契를 설립하여 공생조합 운영에 필요한 자본금을 마련하였다. 농민공생조합과 공작계의 실시는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 지방에서 활발하였고, 남쪽의 천도교인들도 지역별로 농민공생조합을 만들고 공작계를 조직하였다.
이러한 농민공생조합운동은 일제의 통제와 억압 아래에서 농민의 경제적 이익을 획득하기 위한 ‘자립적 경제운동’이며 ‘자주적 협동조합운동’으로, 천도교 포덕에 큰 역할을 하였다. 안타깝게도 농민공생조합은 일제의 탄압으로 1938년 무렵 해산되지만, 각 지역단위로 공작계, 식산계 등의 명칭으로 지속되었다. 경남 사천의 경우를 살펴보자.
경남 사천에도 사천군농민사가 조직되고 농민공생조합도 설치되어, 포덕73년(1932) 사천군농민사 이사장은 최영준이었고, 사천군농민공생소비조합을 설립하였다. 소비조합 조합장은 박윤안, 전무 하석주, 상무 최영준으로 농민대중의 경제적 이익을 도모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포덕79년(1938) 일제의 탄압으로 중앙기관이 해체되면서 사천군농민공생조합도 해산한다.
공작계 사천군위원회는 포덕74년(1933) 3월 1일 최봉권을 위원장으로 하여 설립되었다. 공작계는 천도교인들이 공동작업을 통해 상호협동정신을 기르고 경제적 향상을 기하기 위한 공동체 활동이었다. 당시 사천지역 공작계 현황은 다음과 같다.
계별
계장
계원
공작면적
사남면 죽천리
하석주
하태주 이석원 최봉갑 김인필
답 150평
사남면 화전리
최영준
하명돈 최영철
답 150평
삼천포읍 이금리
장태영
김경진 장태인 전덕규 윤성근 장태호 이명수 김정한 조만수 손봉우
전 300평
삼천포읍 봉남리
강석한
김기련
삼천포읍 선구리
최봉권
장태한 김점수 오주현
공동상(공상계)
고성군 하이면 석지리
강기수
최현순 최종순 최학순 강찬이 조성문 송성옥 송성화
전 300평
포덕 89년(1948) 1월 15일 석지부 공동작업 수입금 500원이 사천교구에 수납된 것을 보면 중앙의 폐지 지시에도 불구하고 교인 간 공동작업은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선구교구 포덕선전대(1969.12.1.)
회암 하준천, 식산계를 창설하다
농민공생조합이 해산된 이후 1945년 해방이후 농협협동조합 등 농민생활을 이끌어주는 국가조직이 부재했던 시기에, 천도교 포덕이 크게 늘었던 남해지역은 천도교인들을 중심으로 자구책으로 식산계 등을 운영하며 협동, 상호부조의 정신을 함양시켜 천도교가 이상하는 공동체 사회 실현을 위해 노력하였다.
“한 지역에 3천 명만 천도교인이 되면 지상천국이 되고 한울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동귀일체가 되어 상부상조할 수 있으며, 병이 없는 천국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남해지역 천도교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회암 하준천(1897~1963)의 말씀이다. 당시 남해지역은 남해, 선구, 고현 3개 교구 2천여 호, 만 명 이상의 천도교인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이야기였다. 해방이 되자 한사람이라도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하준천 선생은 원근을 불구하고 가가호호를 찾아 다녔고 우리의 생활을 더욱 윤택 시키고 안정시키기 위해 식산계를 창설하여 교회와 가정에 재정적인 뒷받침이 되는데 활력소가 되었다. 농업에 있어서는 농민들의 많은 수확을 위하여 농약을 살포해야 된다고 호소하는 한편 박하 기름을 생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회암 하준천은 남해 식산계 설립에 공을 세운 분으로 한의사였던 박길연 등을 들었다.
“의식은 경건 위주로 하되 영세불망토록 할 것이며, 중앙교당 위주에서 진일보하여 식산계를 운영함이 적당합니다. 교화, 교무, 경리 3부는 상호 제휴토록 하시오. 비란 진목에 사는 실암 박길연 동덕은 본래 한의사였습니다. 그런데 한의사라는 직업을 포기하고 남해의 식산계 설립에 지대한 공을 세웠습니다. 우리는 그가 세운 교회 발전의 공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천도교남해교사』에 기록된 박길연 등 남해지역 식산계에 공헌했던 동덕들의 사례는 아래와 같다.
실암 박길연(포덕63.3.13-129.12.15)
설천 진목리 출생. 한학 수학, 한의학 입문 의술의 경지에 도달하였으나 때를 얻지 못하여 그 실력을 꽃피우지 못하였다. 인근의 환자를 대할 때 그 태도가 참으로 정성을 다하여 대하니 그 명성이 자자하였다. 수도 요령 손수 발간하여 후학의 지도에 전념하였다.
예암 박태련(포덕69.11.3-129.2.6)
2차에 걸쳐 진목전교실장을 역임(112.3.-118.3)하는 동안 판매장을 만들고 식산계를 재정리하여 일상 생활용품을 판매하여 이익금을 전교실 교인들에게 배당하였고 일부는 전교실 운영비로 충당하였다.
강암 박영옥(포덕53.11.16-112.9.20)
전교실장을 역임하며 교구 식산계를 착실히 운영하여 교구의 재정을 충실히 하였으며 달걀을 수집하여 생활용품과 교환하게 하는 그 수완은 강암장이 아니면 그 당시 생각할 수 없었던 애교심이 강하였다. 그 당시는 일제말기로 농가경제가 극도로 궁핍하였던 때로 묵암선생의 뜻에 따라 식산계를 잘 운영하여 교회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환암 하점준(포덕47.3.11-117.9.6)
봉사정신을 발휘하여 남해에서 처음으로 농약분무기를 구입한 후 공작계라는 이름의 농약 살포회를 청년 4명으로 구성하여 설천 비란리에서 남면 선구 마을까지 70리 길을 걸어서 농약 살포와 아울러 동덕을 만난다는 기쁨으로 봉사 자선사업을 벌이기까지 하였다.
보암 박치영(포덕61.12.27-111.12.12) 협동조합의 전신인 식산계가 개설된 후 그 책임을 맡아 신발, 계란 등 생필품을 취급하면서 멸사봉공의 정신으로 교회 일에 열중하였으며, 교구에서 경작하던 밭을 손수 소와 쟁기로 직접 가꾸고 일구면서 교인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천도교의 21세기 비전”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 말까지 보고된 남해지역 교구의 식산계 등의 활동 상황은 다음과 같다.
“(남해지역) 교구에서는 식산계를 만들어 축산을 장려하고 있다. 처음에는 매 시일 한집에서 달걀 세 개 이상씩을 교회에 가져오도록 하였다. 그것이 날로 늘어서 지금에 와서는 만개 가까이 모이는 데 그것을 ‘天’이라는 상표를 붙여서 부산에 갖다 공동판매하여 수익금을 교인들에게 분배케 된다. 부산 시장에서는 남해에서 오는 ‘天’자표 계란이 가장 좋고 신용있는 것이라 하여 그것만 찾게 되었다. 앞으로 좀더 확장되면서 양계뿐만 아니라 양돈과 기타의 축산을 많이 장려하여 신경제운동을 전개하리라 한다.”
고현교구 학생회 연성(1971.12.30.)
“5월 24일 아침 고현교구에 도착하니 교당 뜰까지 포진병장布陳屛帳하고 남녀동덕 3백여 명이 벌써 집합되었을 뿐 아니라 이날이 시일이라 각자 가지고 온 모으는 계란이 산과 같이 쌓인데 대해 다시 한번 놀랐다. 남해지역을 순강하며 느낀 점은 몇 가지를 기록한다.
시일식에 전 가족이 참례하고 시일식 저녁마다 ‘부’단위로 ‘부회’를 열고 집단수련과 교리를 강론하는 것. 저축계를 조직하고 매달 매호당 10원씩 저금을 실행하여 부락 전교실 마다 벌써 수만 원씩의 기금이 적립되어 있는 것. 상조계를 조직하고 하곡기에는 보리 1두, 추곡기에는 벼 1두씩을 수합 저축하였다가 교인간의 빈궁을 서로 돕고 환란을 서로 돕는 것. 각 교호에서 의무적으로 닭 5마리 이상씩을 키우고 계란은 매 시일 참석할 때마다 가져가면 전교실 단위로 식산계에서 수집 통합하여 부산과 서울로 직접 수출판매하고 그 대금으로 생활필수품과 아동학용품 등을 공동구매하여 각 가정소요대로 안배 이용하는 것.”
“교인 생활향상을 위하여 모든 의례는 간소하게 지내며 ‘식산계’를 조직하고 호당 10 수首 이상 양계를 장려하며 계란의 공동판매 생필품의 공동구입 등을 실시하며 그 이익은 각자 저축한다.”
1960대 이후 농협이 생기고 제도적 금융기관이 들어서면서 남해 천도교의 역할이 줄고 도시화의 진전으로 이촌향도 현상으로 남해지역의 인구가 줄면서 남해의 천도교 세력이 많이 줄었지만, 식산계 등을 통한 상호부조와 협동의 남해 천도교 활동은 높은 평가를 받고 있고 앞으로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남해 포덕대회 후 거리행진(1980.9.21.)
궁을계 등을 통한 협동조합적 활동은 신일철의 글 제목 그대로 ‘천도교의 21세기 비전’이 되기에 충분하다 할 것이다. 신일철은 남해 천도교활동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경상남도의 일부 천도교인들이 ‘천자天字’ 달걀로 소비자의 대단히 큰 신용을 얻었던 성공사례가 있다. 자유시장 경제와 민간기업에서의 천도의 실현은 천도교인의 ‘동학적’ 기업가 정신으로 우리 경제개발에 혼을 넣는 일이라 하겠다.” (다음호에 계속)
참고한 자료
『천도교 사천삼천포교구백년사』
회암 하준천 천도강론 』
『신인간』 통권244호(1966.6)
『남해신문』(2008.3.17.)
『신인간』 속간8호(1957.11)
『신인간』 통권260호(1968.12)
『신인간』 통권641호(20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