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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6]
동학소설
제12화 동학군이 항일전선에 나섰다
이상면_작가, 전 서울대 교수
대원군은 갑오(1894)년 8월 15일 (양력 9월 16일)
평양성 전투에서 청나라가 승리하기를 고대했다가,
청군이 하루 만에 모란봉 을밀대에 백기를 걸어놓고 압록강으로 달아나자, 허탈감에 빠졌다. 17일 벌어진 압록강 입구 해전에서도 청나라가 패해, 군함 여럿이 격침되거나 파손되어 수많은 병사가 수장되었다는 비보에 크게 놀랐다.
‘청일 간 전세는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일본 육군은 요하(饒河)를 건너 중원(中原)을 압박할 것이고, 해군은 아직 남아있는 청나라 군함을 찾아다니며 격침시키려 들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항만이 봉쇄되고 급기야 중원마저 잃게 된다면, 청국은 망국의 길로 가고 말 것이다.’
‘전봉준 대장은 이 판국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청군이 참패한 소식을 접한다면 크게 낙담할 것이다. 혹시 관민상화(官民相和)에 열중한 나머지, 급격히 돌아가는 국내외 정세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간 전봉준이 김개남의 거병을 극구 말린 것도, 실은 청나라가 승전할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었다.’
이종만은 8월 25일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말을 몰아 전주로 달려갔다. 놀랍게도 전봉준의 전라대회소가 텅 비어있었다. 원평 대도소로 달려 가보니, 전봉준은 이미 김덕명 등 참모들과 남원으로 갔다고 했다. ‘김개남이 또 거병을 하려고 나선 것은 아닐까?’
이종만이 남원에 당도해 보니, 과연 김개남 동학군은 남원성을 점령해 놓고 출정기세를 보이고 있었다. 동헌(東軒)에 들어서자, 전봉준 김개남 등 지도부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모두 일어나 서울에는 잘 다녀왔느냐며 반갑게 인사를 했다.
지도부가 다 좌정하자, 전봉준이 말문을 열었다.
“지난 7월 15일 남원회의에서 곡식이 익는 것을 보며 관망하기로 했는데, 그간 이종만 장군이 서울에 가서 운현궁의 뜻을 살피고 왔습니다. 우선 그 보고를 들어보기로 합시다.”
“국태공(大院君)을 찾아뵈었더니, 동학군이 일본군의 배후를 쳐서 청국이 승전하도록 돕는 것이 국권회복의 기연을 마련하는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청군도 동학군의 참전을 바라고 있어서, 양총이라도 지급해주면 가능할 것이라고 했는데, 허무하게도 지난 15-16일 평양성 전투에서 청군이 단 하루 만에 패배해 압록강 쪽으로 달아났습니다. 다음 날 벌어진 압록강 입구 해전에서도 청군 전함이 여럿 격침되거나 파손되어 수많은 병사가 수장되었답니다.”
“청군이 요동으로 쫓겨났다니···. 그런 비보를 열흘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구먼···.”
“두어 달 전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했을 때도, 열흘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지 않았소.”
“이종만 장군이 아니었더라면, 보름이 지나도 한 달이 지나도 세상 돌아가는 걸 모르고 있을 뻔했소.“
전봉준이 좌중에게 향후 방략을 묻자, 김개남이 나서서,
“경복궁을 점령당해 임금님이 두 달이 넘도록 포로가 되어 있는데···, 빼앗긴 국권을 되찾아야 하오. 동학군이 전국 각처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우리가 그 선봉에 서야 하오.”
손화중이 손을 저으며,
“우리가 일본군과 싸워봤자 질 게 뻔한디, 각자 향리로 흩어져서 생업에 종사하며 기회를 보는 편이 나을 것 같소.”
전봉준이 다시,
“우리는 어차피 청일전쟁에서 이기는 쪽을 상대하게 될 거요. 아직 청일전쟁이 다 끝난 것은 아니니, 각자 향리에 돌아가 사태를 관망하고 있다가···,”
김개남이 언성을 높여 말을 가로막는다.
“지난 7월 15일 남원회의 때, 사태를 관망하다가 곡식이 익거든 다시 일어나자고 했지요? 추석이 지난 지 보름이나 되어 곡식이 다 익어 가는디, 아직도 더 기다려 보자는 거요?”
결국 좌중을 물리고, 전봉준과 김개남 두 거두가 담판을 짓기로 했다.
다음 날 오전, 전봉준이 다시 지도부를 모이게 해 놓고,
“곡식이 익으려면 아직 시일이 좀 더 있으니, 사태를 관망하다가 계제(階梯)를 보아 ‘천연의 요새’ 공주성을 차지해놓고, 일본 측에 힐문(詰問)하는 것이 어떻것소?”
김덕명이 손을 저으며,
“지난 봄 우리가 전주성을 점령하자, 조정이 바로 위기에 빠졌지만, 일본군은 우리가 공주성을 차지한다고 하더라도, 별로 겁을 먹지는 않을 것 같소.”
손화중이 이어서
“공주라도 점령해 놓지 않고 왜놈들에게 그냥 사정을 해봤자, 미동도 안 할 거요.”
전봉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어차피 기포(起包)는 해야 할 것 같소. 내가 계제를 볼 테니, 위임해줄 수 있겠는지요?”
*
이종만은 28일 귀로에 계룡산 신도안(新都內)으로 공주 대접주 임기준을 찾아갔다.
“남원에 가보니 김개남이 달포 전보다 훨씬 더 많은 동학군을 모아 놓고 있습디다.”
“그래서, 이 판국에 어쩌겠다고 합디까?”
“김개남이 즉각 거병하겠다는 것을 우선 말렸습니다. 논의 끝에 결국 기포를 하기로 하여, 그 시기를 전봉준 대장에게 일임했습니다.”
“평양성 전투를 앞두고 내가 8월 초에 기포했어도 호응이 없더니, 청군이 패배해 요동으로 달아났는데, 이제 와서 기포를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답디까?”
“국권을 빼앗겼으니 공주성이라도 차지해놓고 일본군에게 힐문을 해보자는 것 같습니다.”
“뜻은 갸륵할지 모르나, 희생만 클 것 같소. 호서의 여러 접주들도 나와 같은 생각일 거요.”
“금강 상류에서도 접주들이 대일항전에 나서자고 하지만, 기포여부는 동학교단의 뜻에 따를 것 같습니다. 혹시 귀 공주접에서 우선 저희와 향토방어에 뜻을 같이할 분들이 있다면···.”
“그야 각자 원하는 대로 해야지요.”
“저희 향리 인근 퉁점(銅店)에 광맥이 있는데, 여건이 좋습니다. 이곳 동천점(銅川店)에서 장인을 몇 초빙해서 철광석을 제련해 무기를 제작하고 싶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내가 기포를 접으면 장인들이 놀게 될 것 같아 걱정을 하고 있던 참이오. 장인을 몇 데려가도 좋고, 이곳 동천점에서 필요한 무기를 제작해도 되겠습니다. 마침 오늘 저녁에 공주지역 접주들이 이곳에 모이기로 했으니, 저녁이라도 함께 하면서 논의해 보시지요.”
과연 저녁때가 되자, 인근 지역 접주들이 모여들었다. 임기준이 나서서
“이종만 장군은 지난봄 전봉준 대장의 경호대장 겸 작전참모로 많은 공을 세운 분이오. 지금 금강 상류에서 휘하 4천여 동학군을 거느리고 동학교단을 방어하고 계시오. 나는 청군 참패로 기포를 접으려 하니, 더 하실 분은 이 장군과 공조하시면 어떨까 하오.”
갑작스런 발언에 좌중이 술렁거렸다. 다들 흘금흘금 이종만을 바라보며,
‘저렇게 새파랗게 젊은 사람이 동학군 무슨 대장이라고?’
‘팔뚝이 장정 다리 같은데. 힘깨나 쓰겠구먼···.’
잠시 후, 이종만이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구국운동의 첫걸음은 향토를 지키는 일입니다. 우리는 금강 중상류에서 이웃 간이니 서로 친하게 지내면 좋을 것 같소. 기포여부는 나중에 논의하기로 하고, 우선 향토방위를 위해 현재 조직은 그대로 두기로 하시고, 일단 저희와 공조하시면 어떻겠습니까?”
이런 저런 논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좌중에서 공조할 의향을 보이는 접주들이 하나 둘 늘어났다. 만찬 말미에 이르러 얼추 반이나 참여할 의사를 밝혔다.
*
이튿날 29일 이종만은 동천점 장인(匠人) 넷을 데리고 청주 남쪽 왕암산(王岩山) 너머 대머리(首谷里) 강변으로 접어들었다. 장인들은 고봉으로 둘러싸인 분지에 굽이쳐 흐르는 금강 원류를 바라보며 계룡산 신도안에 못지않은 승경(勝景)이라고 경탄했다.
분지 남쪽에 치솟은 대수산(大首山)에서 발원한 원류가 동쪽으로 흐르다가, 거대한 차령산맥 아래서 180도로 방향을 바꾸어 동북쪽 고봉 선도산에서 발원한 물줄기와 합수해 서행하더니, 분지 북쪽 왕암산 밑으로 파고들어 건너편 대수산 쪽에 수십만 평의 백사장을 펼쳐내고 있었다.
청주목, 회인현, 문의현이 분지 가운데서 이마를 맞대고 있어서. 동학군이 각 영역을 넘나들며 유격전을 전개하기에 십상일 듯했다. 대수산 북쪽 기슭에서 뻗어 내린 작은 산자락이 감아 도는 미니 분지 ‘묏골’에 이종만 별가가 숨어있었다. 인근에 동굴도 있어서, 청주 보은 간 ‘동학 루트(route)’ 선상에 있는 아지트(agitpunkt)로 손색이 없었다.
이종만은 장인들을 데리고 ‘동학 루트’를 따라 끌재를 넘어서 퉁점(銅店)으로 들어갔다. 금강이 발원하는 곳이라고 예로부터 신성시하는 곳이었다. 장인들은 검붉은 광석을 깨보더니, 철 함량이 신도안 동천점(銅川店) 보다 높다고 평가했다. 더구나 광맥이 참나무 숲이 빼곡한 산골짝 냇가에 있어서, 물레방아 동력으로 풍구를 돌려 참숯을 때서 광석을 제련해 무기를 제작하는 데도 안성맞춤이라는 것이었다.
이종만은 9월 1일 군현 무술시합을 논의한다는 명분으로 경호대 전원을 대머리 강변으로 소집했다. 3일 오후 4(申)시경, 대원 80명이 적토마를 타고 흙먼지를 일으키며 대머리 강변 백사장으로 몰려들었다.
이윽고 대머리 강변 물레방앗간 앞 광장에서 화톳불을 피워놓고 회식준비에 들어갔다. 분지에서 다수를 점하는 고령 신씨 가문에서 닭과 돼지를 잡아 만찬을 베풀기로 했다. 검암 술도가에서 막걸리 통을 달구지에 싣고 오자, 경호대가 풍물을 치며 분위기를 한껏 돋구었다.
“대원 동지, 지금 격변하는 정세 속에 전국 각처에서 구국운동이 일어나고 있소. 우리도 준비를 잘 해야 할 것 같소. 그러려면 우선 체력이 좋아야 하고 장비도 잘 갖춰야 하오. 그간 우리 대원들이 각 군현에서 집강체제로 관민상화를 이루어 개혁운동에 수고했으니, 중추가절을 맞이해서 관민 운동회라도 한번 여는 것이 어떻겠소? 향토방위를 잘 하려면 관민 협조를 얻는 것이 중요할 것이오.”
대원들이 좋은 생각이라고 박수를 쳤다.
“나라를 구하려면 무엇보다도 좋은 장비가 있어야 할 터인데, 우선. 창과 활 등 전통 무기부터 확보해가는 것이 좋을 성싶소. 공주접과 천안접에서는 광석을 제련해서 장창과 대포까지 만든다 하오. 우리도 끌재 너머 퉁점(銅店)에 좋은 광맥이 있으니, 계룡산 신도안에서 모셔온 장인들과 함께 철을 생산해서 우리가 필요한 무기를 제작하면 어떻겠소?“
대원들이 탄성을 지르며 박수로 화답했다.
“다른 지방에서는 도인을 자칭하고 무슨 운동을 한답시고 남을 해치고 빼앗는 등 몹쓸 짓을 한다고 들었소만, 우리는 그렇지 않소. 최근 우리가 집강체제를 이루어 개혁운동에 나선 것이 증명하듯, 우리는 무장을 하지 않고서도 관민 반상 간 친목 속에 개혁을 해가면서 서로 잘 사는 고장을 만들자고 다짐해왔소. 우리의 뜻이 정의롭고 행동이 바르다면, 누가 도와주지 않겠소? 오늘 회식은 고령 신씨 문중에서 찬조할 것이오. 다음에는 은진 송씨 가문에서 낸다고 하오.”
모두들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드디어 풍물이 울리고 술잔이 돌자 온통 잔치 분위기다.
*
잠시 풍물이 멈추자, 먼데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가만히 보니 일전에 왔던 밀사 박동진이 누구 한 사람을 데리고 오는 것 같았다. 이종만이 얼른 일어나 원두막으로 안내하면서 술상을 차려오게 한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 동지들을 초대해 회식을 하려던 참이었습니다.”
“이준용 대감의 참모 정선생(鄭寅德)이십니다. 배제학당 교수를 지내신 분이오.”
“산천경개가 참 좋습니다. 적토마가 많은 것을 보니, 먼 데서 오신 분들 같습니다.”
“예, 인근 군현 장사들로 지난봄 호남 봉기에 참가했는데, 각기 향리에서 소대 병력을 양성하고 있습니다.”
“허-, 그러면 장군 휘하에 4-5천 병력이 있으신 거로군요.”
“사기는 높은데 무장이 저조해서 걱정입니다. 산 너머 광맥에서 광석을 제련해 무기를 만들려고 합니다. 계룡산에서도 우리 패 동학군이 광석을 제련해서 무기를 제작하고 있습니다. 우리 호중동학군은 다른 지역에서 보는 것처럼 도인을 자처하고 남의 것을 빼앗거나 물의를 일으키지 않고, 관민 반상 간 공조를 통해 구국운동의 기반을 마련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말씀 듣던 대로 대단하십니다. 내무대신 이준용 대감께서 이종만 장군을 구국의군 총참모장 겸 호중 의군 총사령장이 되어주시기를 바라십니다. 두 분이 갑장으로 죽마고우시니 협조가 잘 될 것입니다. 청나라에 교섭해서 동학군을 신무기로 무장하는 방안을 강구하시던 중에, 그만 전세가 기울어 뜻대로 되지 않았지만, 겨울철에 압록강이 얼게 되면 청군이 다시 진주하게 될 거라며, 항전준비를 잘 해나가자고 하십니다.”
“대개 언제쯤 거병할 것으로 보십니까?”
“최근 이노우에(井上馨) 공사가 새로 부임했는데, 군국기무처에서 동학군 토벌 법안을 통과시키고, 대원군과 이 대감을 고립시킬 획책을 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있다가는 모두가 다 화를 입게 될 것 같아서, 그 대비책을 강구하고자 하십니다.”
“일본군이 공격해온다면 당연히 방어를 해야지요.”
“장군께서 전봉준 대장과 막역하시니 호남 호중 동학군의 협동작전이 수월할 것 같습니다.”
“호남에서는 아직 기포 시기를 못 잡고 있습니다. 충청도에서는 동학교단의 결심이 중요합니다. 전라도에도 조만간 다시 가보고, 교단 측과도 의논을 해보겠습니다.”
두 밀사는 만찬을 대강 들고, 이내 어둠 속에 길을 나섰다.
*
다음 날 9월 4일부터 인근 군현 경호대원들이 퉁점(銅店)에서 장인과 조수가 거처할 산막을 짓고, 벽돌을 구을 요(窯)를 만드는 작업을 했다. 벽돌이 제작되면 야로(冶爐)를 짓고 숯을 구어 철광석을 제련하게 된다. 이종만은 핵심 대원에게 현장 지휘를 맡기고, 전봉준에게 달려갈 채비를 했다.
이종만은 9월 7일 (양력 10월 5일) 아침 남으로 말을 달려, 저녁 때 원평에 도착했다. 총참모 김덕명과 시국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전봉준 대장이 특유의 눈빛을 번뜩이며 나타났다.
“장군, 마침 잘 오셨소. 고비마다 장군을 만나게 되는 것을 보니, 하늘 뜻인 것 같소.”
전봉준이 허리춤에서 편지 한 장을 꺼내어 보여준다.
“어제 운현궁 측으로부터 효유문(曉諭文)을 가지고 두 사람이 내려왔는데, 의심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나, 중요한 일에 관계되기에 우선 대책을 논의하고자, 전주도회소를 철폐하고 구촌(龜村) 집으로 옮겨왔습니다. 어제 저녁에 또 두 사람이 내려왔기에 상세히 전말을 알아본즉, 과연 운현궁에서 개화파에 눌려 효유문을 발하고, 뒤이어 비계(秘計)를 내린 것이었습니다. ······. 대저 이런 일은 속히 행하면 만전책(萬全策)이 되고 늦으면 기밀이 누설되므로, 양찰하시고 날듯이 오시어 큰일을 도모하시도록 천번 만번 빕니다. 9월 6일 접제 송희옥”
“실은 저한테도 며칠 전 운현궁 측에서 보낸 밀사 두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송희옥 편지에서 그날 저녁에 찾아왔다는 그 두 사람이 동일한 인물인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은 달포 전 호서선무사(湖西宣撫使) 정경원(鄭敬源)을 따라온 소모사(召募使) 박동진(朴東鎭)이고, 또 한 사람은 국태공(大院君) 손자 이준용(李埈鎔)의 지시로 내려온 정모(鄭寅德)입니다.”
“그래 그 두 사람이 무어라고 합디까?”
“일본군이 최근 일련의 대청 전투에서 다 이기고 나서 한결 사나워졌답니다. 최근 이노우에(井上) 공사를 새로 파견해 국태공(大院君)과 그의 손자 내무대신 이준용을 핍박하고 있으며, 동학군 토벌 안을 군국기무처에 보내 의결토록 했다고 합디다. 삼남의 동학군이 총 단결해서 대일 항전에 나설 채비를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김덕명이 나서서
“어제 오후 정석모(鄭碩謨)라는 자가 와서 대원군 효유문을 주고, 남원으로 급히 갔습니다.”
전봉준이 그 효유문을 보고 나서 상을 찌푸리더니, 김개남 앞으로 그 자를 즉각 처단하라는 편지를 써서 사송을 시켜 남원으로 보냈다.
8일 아침 전봉준은 이종만과 말을 몰아 구촌(龜村)으로 달려갔다. 송희옥이 버선발로 나와
“그끄제 저녁 운현궁 측에서 보낸 박동진과 정모 두 사람이 찾아와 작금의 국내외 정세를 설명하고 동학군 봉기를 원하는 임금님 밀지를 보여주고 갔습니다.”
“이름을 들으니, 며칠 전 청주로 저를 찾아온 두 사람과 동일 인물인 것 같습니다.”
셋이서 도란도란 방책을 숙의하고 있는데, 서울에서 온 제3의 밀사 이건영(李建永)이 찾아들었다.
“일전에 원평으로 찾아갔더니 안 계시기에, 남원으로 먼저 가서 김개남 장군을 뵙고 서둘러 오는 길입니다.”
이건영은 전 승지(承旨,正三品)로 행동거지가 남과 달랐다. 가슴에서 두루마리를 꺼내더니 북쪽으로 받들어 읍(揖)을 하고, 전봉준 앞에 펼쳐 든다. 전봉준도 자리에서 일어나 북쪽을 향해 읍을 하고 두 손을 모았다. 이건영이 국왕의 밀지를 대독한다.
“너희는 선대 왕조로부터 교화를 받은 백성으로 선왕의 은덕을 저버리지 않고 살아왔다. 조정에 있는 자들은 모두 저들에 붙어서 더불어 의논할 자가 하나도 없어, 외롭게 홀로 앉아 하늘을 우러러 통곡할 따름이다. 지금 왜구가 대궐을 침범하여 화가 종사에 미쳐 명이 조석을 기약하기 어렵도다. 사태가 이러하니, 너희가 오지 않으면 박두하는 화환(禍患)을 어찌 할꼬···. 이로써 교시하노라.”
전봉준은 다시 북녘을 향해 읍(揖)을 했다.
“김개남 장군도 밀지를 받들어 거병을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음-, 때가 된 것 같소.”
이튿날 9월 9일 전봉준은 전주에 설치했던 전라대회소를 폐쇄했다. 금구 동학군으로 하여금 고산 군기고를 습격해 무기를 탈취케 했다. 다음 날 10일에는 삼례에 의군대도소를 설치하고 본격적으로 거병준비에 들어갔다. 태인 금구 등 각 군현에 군자 2천 냥과 공양미 3백석을 보내라고 요구하는 서신을 보냈다.
그날 저녁 전봉준은 각 군현 관아를 털어 무기와 군량 등 기본 병참이 확보되었다는 것을 보고 받고나서,
“이종만 장군, 호중동학군 무장을 위해 우선 화승총 1천 정과 탄약 1만 근을 공여하겠소. 보은 취회 때처럼 공양미 3백석도 보내드리겠소. 내가 적시에 호남동학군을 이끌고 북진해서 공주를 칠 터이니, 이 장군은 호중동학군을 이끌고 공주로 서진해서 협공해주시오.”
“예, 전처럼 선편에 보내주시면, 지명산(芝茗山)에 의군대도소를 차리고 대기하겠습니다. 지명진(芝明津)은 한양길 율봉도(栗峰道)와 금강이 교차하는 곳으로 높은 산과 큰 장터가 있습니다.”
*
‘호남과 호중이 공조하기로 했지만, 최종적으로 기포여부는 동학교단의 결심이 있어야 한다.’ 이종만은 9월 11일 아침 보은으로 말을 달려 늦은 오후 장내리 대도소로 들어갔다. 마침 교주 해월 최시형 이하 김연국 손병희 등 교단 요인들이 모여 있었다.
“장군, 오래간 만이오. 종종 근황을 듣고 있었소.”
“보고 드릴 일이 있습니다. 7월 15일과 8월 25~27일 남원에서 동학군 지도부 회의가 있었는데, 김개남이 기포하려는 것을 두 번 다 전봉준 등 온건파가 간신히 막았습니다. 그런데, 엊그제 전봉준에게 다시 가보니 운현궁 측에서 보낸 밀사가 와서 임금님 밀지를 꺼내 읽었습니다. 그 내용은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한 이래 친일 난적들이 궁궐에 우글거려 의논할 사람이 없어 비통해 하신다며, 선왕의 은덕을 입은 백성들이 일어나 나라를 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전봉준이 어떻게 한다든가?”
“전봉준은 임금님의 명령이니 기포를 해야 한다며 동학군 동원에 나섰습니다.”
“허허, 큰 탈이로다. 지난 봄에도 때가 아니라고 했어도 기포를 해서 일을 저질러 놓더니, 지금 또 다시 일을 그르치고 있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는가?”
김연국이 나서서,
“지난 봄 전봉준이 기포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급거 중지하라는 통문을 보냈지만, 전란 통에 전달이 안 되고 있다가, 근 한 달이 지난 후 동학군이 전주성을 차지한 다음에야 전달이 되었답니다. 이번에는 속히 통문을 작성해서 삼례로 내려 보내 거병을 즉각 중지케 해야 하겠습니다.”
손천민이 나서서,
“청군이 패전해 요동으로 달아났는데, 이제 와서 기포를 하게 되면 손실만 클 것 같습니다. 어서 통문을 내려 거병을 막아야 합니다.”
해월이 좌중을 둘러보더니, 손천민에게
“그러면, ‘아직 때가 아니니 도(道)로써 난(亂)을 작(作)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로 통문을 기초하여, 이종만 장군과 함께 삼례로 가서 전봉준에게 전달하시오. 또 동도(東徒) 가운데 전봉준 선동에 부화뇌동하는 자들이 나올까 걱정되니, 차제에 도인들이 지켜야할 근신조목(勤愼條目)을 적어 각 포접에 배포하기로 합시다.”
12일 손천민과 이종만이 교주의 통문을 들고 삼례로 말을 달려 저녁에 전봉준의 의군대도소에 도착했다. 삼례는 5일 장이 서는 소읍이었지만, 사통팔방 교통의 요지로 객잔(客棧)이 여럿 있어 숙박에 편리한 곳이었다. 손천민이 이종만과 함께 전봉준 대장소로 들어가서 간단히 목례를 하고
“주인(敎主) 해월 선생님께서 기포 소식을 접하고 통문을 내리셨기에 가지고 왔습니다.”
전봉준이 통문을 훑어보더니, 격한 목소리로
“내가 난(亂)을 작(作)한다니! 임진왜란 때 스님들도 구국운동에 나섰지 않았소? 지금 갑오왜란이 일어났는데, 동학교단에서 아직도 때가 아니라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요?”
손천민이 낭랑한 목소리로,
“지난 4월 기포 시 주인(敎主) 해월 선생님께서 급히 통문을 써서 대장께 전했으나, 나중에 전주 입성 후에야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결국 난(亂)을 작(作)한 탓에 외세가 들어와 국권이 무너진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주인(敎主) 선생님께서 거병을 중지하라고 하시니, 그에 따르는 것이 도리일 줄 압니다.”
“무엇이라? 갑오왜란이 일어나 임금님이 포로로 잡히고 국권을 빼앗겼는데, 가만히 있으라고? 이놈, 우선 너부터 내 칼을 받아야겠다.”
전봉준이 장검을 빼어들자, 이종만이 벌떡 일어나
“사자(使者)에 불과합니다. 통문에 거부하셨으니, 그저 돌아가게 하시지요.”
*
13일 아침 손천민이 돌아간 다음, 삼례에서는 북접 동학교단을 성토하는 목소리가 거세졌다. 현지 동학도 대다수가 자신들을 남접이라고 칭하면서 북접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동학교단의 뜻을 따르려는 북접 지지파들도 좀 있었지만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그 가운데 익산인 오지영(吳知泳,1868-1950)이 ‘갑오왜란이 일어났는데 동학군이 거의(擧義,起包)를 놓고 남접 북접으로 갈라지면 안 된다’고 개탄을 했다. 그는 친구 이종만더러,
“이 장군이 오늘 보은에 달려가서 해월 선생님께 말씀 좀 드려봐···.”
“음, 내가 곧 돌아가서 이번 기포는 난(亂)이 아니라 구국운동이라고 말씀드려볼게, 자네도 보은에 가서 해월 선생님께 읍소하겠다고 전봉준 대장께 진언해보는 게 어떻겠나?”
이종만은 오지영을 데리고 전봉준 대장소로 들어갔다. 오지영이 절을 하고 말하기를
“의(義)를 거하는 남접도, 난(亂)으로써 하지 말자는 북접도, 모다 도(道)를 위하자는 것이니, 보은 장내리에 가서 해월 선생님을 찾아뵙고 남북접 조화의 방도를 찾고저 합니다.”
“좋소. 이종만 장군이 먼저 가서 설득하시고, 이어서 귀군이 가보도록 하시오.”
이종만이 말을 달려 그날 저녁 보은 장내리에 돌아와 보니, 두령들이 대도소에 모여 한 걱정을 하고 있었다.
“장군, 전봉준이 자기 분수를 모르고 저러고 있으니, 어찌 했으면 좋겠소?”
“일본군과 그들을 따르는 관군이 조만간 남접을 치게 될 터인데, 북접마저 나서서 남접을 치려든다면, 도리에도 맞지 않고 실행하기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면, 남접이 저러는 것을 그냥 내버려 두자는 거요?”
“무슨 방도가 있으면 모르되, 지금은 어쩔 도리가 없는 것 같습니다. 조만간 일본군이 관군을 이끌고 남접을 치게 될 터인데, 북접도 그냥 두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일본은 동학당을 조선의 ‘희망의 싹’으로 보고 뿌리 채 뽑아버리고 나라를 차지하려고 합니다.”
해월이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듯, ‘남북접이 함께 같은 도를 믿고 교조를 받들어 위도존사(衛道尊師)할 뿐이니, 동심협력하여 교도신원운동을 전개하는 마음으로 난국을 풀도록 해보라’고 교시했다. 그런 취지로 새로 통문을 작성하여 날이 밝는 대로 전봉준에게 보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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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오지영은 인근 지역 북접 친구 김방서(金邦瑞)와 유한필(劉漢弼)을 찾아가 보은으로 함께 가서 동학교단을 설득하자고 청했다. 16일 셋이서 말을 달려 보은 장내리로 갔다.
셋이서 교주 최시형의 법소를 찾아가 자초지정을 설명하자, 해월은 별 말이 없이 대도소에 가서 두령들과 상의를 해보라고 일렀다. 그들이 대도소에 들어서자 김연국 손병희 손천민 등 십여 명이 대청에 둘러앉아 있었다. 오지영이 남북접조화책을 설명하려고 하자, 좌중에서 누가 통문 한 장을 내보였다.
“호남의 전봉준과 호서의 서장옥은 사문난적이라, 우리가 결속해서 타도하는 것이 가하도다.”
오지영은 통문을 보고 놀랐지만, 애써 태연한 자세로,
“듣건대 왜병이 곧 동학도를 친다고 하온대, 남접만 왜병과 싸우다가 패하면 북접에게도 수치요. 만일 북접이 왜병과 함께 세를 더하여 남접을 쳐서 망하게 한다면, 그 또한 수치라. 도인은 도인끼리 합하여 생사를 같이 해야 하는 것이 도리에 타당한 줄 아오···.”
두령들이 그 말을 듣고 다들 묵묵부답이었다. 잠시 후 손병희가 나서서
“그 말이 옳도다.”
그러자, 좌중에서 하나 둘 그 말에 동조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해월이 두령들의 논의한 바를 듣고 나서, 두 손을 모아 하늘에 고하더니,
“같은 도인인데, 왜적이 그들을 죽이게 두고 우리만 살려고 한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것이다. 하물며 도를 받드는 자로서 어떻게 형제 동도를 칠 수 있으랴. 시국이 이렇게 되는 것도 다 시운이려니, 어찌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있을쏘냐. 함께 일어서는 수밖에···.”
이어서 손병희가
“우리도 기포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전봉준은 이미 동학군을 다 무장시켰을 거요.”
손천민이 나서서
“이종만 장군이 지난 봄 경호대 80명을 이끌고 전라도에 가서 전봉준을 도우며 실전 경험을 많이 쌓았소. 대원들이 인근 군현으로 돌아가 각기 소대병력을 양성해서 현재 4천여 가용 병력이 있소.”
“이종만 장군이 금강 상류 호중에서 그렇게 잘 하고 있다면, 나는 한강 상류 호북으로 가서 동학군을 소모(召募)하겠소. 거기서도 2천 정도는 모집할 수가 있을 것이오.”
최시형이 그간 논의를 정리하여
“인심이 곧 천심이라, 이것은 천운(天運)의 소치(所致)이니 동학도를 동원하여 전봉준과 협력해서 교조의 신원(伸寃)을 펴도록 하는 등 우리 도의 대원(大願)을 실현하라.”
대도소장 김연국이 나서서
“그러면 남접을 타도하자는 통문을 거두어들이고, 벌남기(伐南旗)를 꺾어버리도록 하겠습니다.”
손병희가 다시 나서서
“우리가 우선 이렇게 합의를 하고 대의를 모으기로 하였으니, 다 함께 그 뜻을 하늘에 고하는 치성식(致誠式)을 모레 9월 18일 4(申)시에 올리기로 합시다. 각 포접에 통지하고 경호대도 부르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