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옥(漱玉)마을은 수옥폭포에서 따온 마을명이고 마을이름에서 보듯 수옥정과 뗄레야 뗄 수 없는 마을이다.
중학교 때 국어선생님과 수옥폭포를 간 적이 있다. 대부분이 아는 수옥의 수가 '양치할 수'인줄로만 알고 있지만 이 양반은 내게 '머금을 수, 옥옥 자'라.....옥을 머금은 곳이라면서 특유의 상상력을 더해 설명해주었고, 연풍현감이었던 조규수가 암벽에 쓴 싯구까지 알려주셧다. (그의 숙부가 벼슬을 하는 동안 청백리로 살아온 것을 칭송한 시라 함)
믿기 어려운 얘기지만 수옥폭포를 연풍현감이던 조규수란 분이 1711년 처음 찾아냈다 한다. 그 당시엔 개암나무숲으로 우거져 연풍주민들은 감히 들어갈 엄두도 안났다지만, 내겐 벼슬아치들의 허풍으로 들린다. 이미 그즈음엔 고사리와 안터에 사람이 살고 있었고, 살기 어려운 시절엔 먹을거나 땔감찾아 산으로 들로 헤매는 게 당연지사인데 여름이면 웅장했을 폭포의 물줄기 소리를 그 숱한 시간동안 듣지 못햇을까......
여튼 정자를 짓고(6.25때 소실된 것을 괴산군과 연풍양조장 사장 권희철씨를 중심으로 돈을 모아 새로 지음) 수옥정이라 명명한 이는 그 분 조규수이다.
수옥마을은 수옥정, 한섬지기(쌀이 한 섬 정도 나오는 크기의 농토라는 뜻의 지명), 샛터가 모여 마을을 이루고 있다. 연풍전체가 깍아지른 산만 있어 장마철 심산유곡도 계곡물이 금새 마르는 데 이곳은 폭포, 말용추(말용초), 신혜원 삼관문이 있어 연풍의 명산과 더불어 외지인이 연풍을 찾는 곳이다.
옛날 경주 율리에 살던 유장자란 사람이 자식이 없어 명산을 찾아 기도를 하던 중 한 고승의 권유로 수옥정에 정착하여 폭포에 아침저녁으로 기도를 드렸으나 자식을 만들지 못하고 죽은 뒤 그의 전답을 마을 재산으로 하고 매년 시제(음력 10월 20일)를 지내주고 있다한다.
이후 청송 심씨가 정착하여 본격적인 마을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던 신혜원이 어느날인가부터 헷갈린게, 지금의 행정기준으로 나눈 동리의 영역과 혼동되어 그런거 같다. 이는 신혜원 마을이 88년에 고사리와 수옥이 분리된 것이 잘 알려지지 않음으로 인함인 듯.
<자연마을>
○ 수옥마을 : 수옥폭포 아래에 있는 마을
○ 샛터 : 서재골 휴게소가 위치한 마을
○ 한섬지기 : 수옥폭포 서남쪽. 앞들의 농사지을 면적이 한섬을 낼 정도라 해서 이름지어짐.
<마을지명>
○ 가마바위골 : 큰 바위가 있는 골짜기
○ 깃대봉 : 임진왜란 당시 깃발을 세우고 봉화를 올리던 곳
○ 덤바위골 : 덤바위가 있는 골짜기
○ 되살이골 : 옛날 홍역을 앓다 죽은 아이를 이곳에 갖다놓으면 되살아 난다고 해서 이름지어진 골짜기.
○ 바랑골 : 옛날 이곳에 살던 사람이 늘 바랑을 짊어지고 다녀서 붙여진 이름
○ 밤나무골 : 산밤나무가 많은 골짜기
○ 범바위골 : 범처럼 생긴 바위가 있는 골짜기
○ 불당골 : 옛날 조그마한 불당(佛堂)이 있던 곳
○ 삼밭구렁 : 길쌈하는 삼이 잘되어 많이 심던 곳
○ 상용추 : 수옥폭포 위에 있는 소(沼: 못 소). 새재의 물이 모여 깊은 소를 이룬다.
○ 샛골 안골 : 옛날 「숙소트름」(새알을 품은 현상)이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
○ 약상이등 : 산약초가 많다해서 붙여진 이름
○ 옥녀굴 골 : 옛날 전란때 옥녀라는 처녀가 피난하여 베를 짰다는 골
○ 용성골 : 샛터말 동쪽. 수옥폭포 위 소안에 사는 이무기가 용이 되어 승천할 때 이 계곡으로 날아간다해서 붙여진 이름
○ 옹지골 : 옹지(향로)를 놓고 향을 피우며 기도를 드리던 곳
○ 어듬이골 : 산이 음지여서 한낮에도 어둠컴컴해서 붙여진 골짜기
○ 장치골 : 도리깨 장치처럼 골이 곧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 중용추 : 상용추 아래 있는 소. 매우 깊어서 돌이나 나뭇가지로 아무리 매우려 해도 도무지 매워지지 않는다 함
○ 진터 골 : 옛날 전란 때 군대가 진을 치고 주둔하던 곳
○ 차돌백이골 : 차돌이 묻힌 맥이 큰 것이 나왔다 해서
○ 치마바위골 : 여자가 치마를 두룬 형상이라 해서
○ 한섬지기 : 수옥정 서남쪽에 있는 들로 면적이 한섬이 나올 정도라 해서
○ 곰넘이골 : 전에 곰이 서식하던 곳
○ 황장군 피난골 : 옛날 황씨 성을 가진 장군이 세상을 등지고 숨어살던 골짜기
<일화>
폭포위에는 웅덩이(소)가 두 개 있다. 실타래를 풀어보면 하나는 2관문 위 용추골로 이어져 있고, 하나는 금강산까지 통해 있다한다. 이 소안에는 이무기(의심이)가 사는 데, 이를 확인하려 일제시대 때 일본사람이 들어갔다가 깊은 소안에서 그 의심이를 알현(?)하고 혼이 반쯤 나갔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주민들은 옛부터 이무기가 살고있음을 알고 있어 가뭄이 들면 마을 사람들이 이 소에다 나무토막을 마구 집어넣엇다 한다. 이 용님의 자제분께서는 제 사는 곳을 결벽증처럼 깔끔하게 하는 습성이 있는 걸 이용, 더러운 걸 집어넣으면 그걸 깨끗히 청소하기 위해 비를 내리기 때문에 더럽혔다 한다.
수옥폭포 위로 약 30여미터만 가면 우측으로 샛길이 있고 중간에 철망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한 곳이 잇는데 이곳이 용성골이다. 폭포위 소에서 살던 이무기가 승천할 때 용성골을 거쳐 승천한다 해서 용성골이라 했는데, 여기를 지나 말용초를 거쳐 옹추골을 향해 깊숙히 들어가면 옛날에 옥녀라는 처녀가 늙은 부모를 모시고 피난했다는 큰 굴(옥녀골)이 있는데 이곳에 베틀을 짠 흔적과 절구, 온돌의 흔적이 있다.
용성골에서 2킬로미터 위에 절바위골이라 하는데 지금도 기도와 참선 장소로 이용하고 있고, 그 옆엔 황장군 피난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