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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대 월북사건과 아버지
1949년 5월 4일과 5일.
신생 대한민국에서는 창군 이래 최대의 국군 월북사건이 발생한다.
춘천에 본부를 두었던 8연대 예하 1대대장 표무원 소령과 홍천에 본부를 두었던 2대대장 강태무 소령이 대대병력들을 이끌고 38선을 넘어 집단월북을 한 것이다. 당시 상황에 대한 관련 사료 등을 종합해 볼 때 표무원 소령과 강태무 소령이 치밀한 계획 하에 북한 인민군과 사전에 내통하고 그들의 지령에 따라 부대원들을 속여 전방으로 이동한 후 월북을 한 것으로 요약된다. 그 시기의 국군은 창군 이후 군내 좌익분자 색출이라는 서슬 퍼런 숙군작업을 진행하던 때였다. 이에 표무원과 강태무 양 대대장은 국군에 들어오기 전 좌익 활동을 한 협의를 받고 있던 숙군 대상자로서 신변에 위협을 느끼자 예하 대대 병력을 이끌고 월북을 감행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춘천에 주둔하고 있던 제1대대장 표무원 소령은 5월 4일 점심을 마치고 야간행군을 한다며 대대병력을 455명을 집결시키고 1시 경 연대본부를 출발하여 20Km떨어진 38선 방면으로 북진한다. 오후 6시 38선 부근에 도달하여 저녁을 먹고 7시 경 모진교(일명 38교)를 건너 38선을 넘었다. 전 부대가 다리를 건너자 매복하고 있던 북괴군이 나타나 이들을 포위했다. 표무원 소령은 병력을 집결시키고는“우리는 지금 완전히 포위되었다. 저항해보았자 피해만 나니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자”고 권유했다. 이때 2중대장 최동섭 중위(육사 5기)가 나서서 한사코 반대하며 돌아가자고 했지만 실탄을 가지고 오지 않았으므로 포위망을 뚫을 수 없었다. 이때 북괴군이 위협사격을 가해 왔다. (장창국, ‘육사졸업생’ 중에서)
결국 부대가 동요하고, 일부 부대원들이 대대장의 투항 계략에 의한 북한 인민군의 포위로 귀환하지 못하였으나 최동섭 중위를 따라 결사 항전한 293명이 탈출하여 M1소총 등 무기를 지니고 부대로 복귀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한편 당시 전황을 상세하게 보도한 신문 기사에 따르면 홍천에 주둔하고 있던 2대대의 경우에는 1대대 보다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많은 희생자를 냈다.
홍천 2대대 강 소령은 200여 명의 부하와 1949년 5월 3, 4일 양일간에 걸쳐 38선 참호 구축공사에 당하였고, 5일 새벽 1시 38선까지 12Km 지점인 현리(오대산 기슭) 주둔 100여명을 규합하여 총 293명을 인솔하고 ‘38선 경비’라는 명목 하에 동일 오후 5시 하답(38선 접경선)에 이르러 인민군의 내습이 빈번한 복지개봉(38선상)에 있는 인민군 보안대를 공격한다고 하며 38선을 넘자 북한 인제로부터 6㎞ 남방에서 인민군의 사격을 받았다. 강 부대는 곧 전개하여 교전상태에 들어갔으며 약 1시간에 걸쳐서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강 소령은 “백기를 들고 투항하라”명령했으나 8중대 중화기 중대와 5중대, 7중대는 이에 응하지 않고 감연히 인민군과 교전하여 5중대는 거의 전멸 상태에 이르렀으며 7중대 일부분은 하는 수 없이 투항한 것이다. 6일 오후 8시 현재까지 125명이 귀환하였으며 그 중 6명의 부상자가 있었고 미귀환군 중에는 장교 2명의 전사는 확인되었다. (경향신문, 1949년 5월 8일자).
출동한 300여 명 중 김인식 중위(육사 7기)의 제8중대 중화기중대를 비롯한 143명이 긴박한 상황에서도 M1 소총과 로켓포 등 소지했던 무기를 가지고 탈출하여 생환하고 150명은 불행하게도 전사 또는 월북한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서 강태무 소령의 2대대 8중대 소속이었던 아버지가 월북의 대열에서 벗어난 것은 천우신조라고나 할까, 불행 중 다행이었다.
아버지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11월 11일, 즉 부대 월북사건이 발생하기 바로 전 해에 춘천에서 창설된 8연대에 입대하신다. 어느 날 이장이 마을 청년 몇 사람을 면사무소로 데리고 가 신검을 받았는데, 조선경비대에서 국군으로 체제가 바뀌고 국군1기를 모병하는 자리였다. 이렇듯 당시 군 입대는 형식은 모병제였지만 사실상 징병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국군 1기라는 이름으로 스무 살에 입대하여 춘천의 구 캠프페이지 자리에서 훈련을 마치고 독립된 중화기중대로 주둔하고 있던 경기도 가평지역의 8중대로 배속된다.
이 무렵 신남과 현리 등 3.8선 접경지역에 인민군의 내습이 빈번하자 대대본부가 있던 홍천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운명의 ‘강표 2개 대대 월북사건’이 발생하기 한 달여 전인 1949년 3월 인제 복주개봉에서 중상을 입고 춘천 야전병원을 거쳐 서울 제2육군병원으로 후송된다. 7월 1일 다시 부산 제5육군병원으로 후송되었다 8월 15일 퇴원하여 원주로 이동해 있던 부대로 복귀한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부상을 당하여 육군병원으로 후송된 사이 부대 월북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당시에 일등중사 1명을 비롯해 3명이 전사하고 1개 분대원들이 모두 중상을 입는 상황 속에서 기사회생으로 살아나셨는데 이 일로 인해 월북의 대열에는 서지 않은 결과를 낳았다. 새옹지마(塞翁之馬)였다.
이때 5중대 소속이던 원제순 씨라고 아버지의 고종사촌 형님이 되시는 아저씨는 북으로 넘어가 인민군에 편입되었다가 6.25전쟁 시 국군포로가 되어 반공포로로 석방되기도 한다. 참으로 극과 극을 넘는 드라마가 아닐 수 없다.
이 일은 지금으로부터 68년 전 이 땅에서 있었던 국군 역사에 전무후무한 비극적인 국가적 오점이자 참사였는데, 사적으로는 아버지와 우리 집안의 명운을 가른 극적인 사건이기도 했다. 만약 그때 아버지가 강태무를 따라 월북되어 돌아오시지 못했다면 장차 아버지와 집안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버지는, 강태무 대대장은 키가 크고 남자답게 생긴 사람으로 매일 대대병력을 집결하여 국기 하기식을 하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고 하시면서 부대를 모두 이끌고 북으로 가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다고 당시를 회고하신다. 강태무는 북한군 중장까지 지냈으며 2007년 6월 17일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2. 아버지의 6․25 참전기
아버지는 입대 후 대대 월북사건이 발생하기 두 달 전인 1949년 3월, 인제 현리 38선상에 위치한 복주개봉에서 인민군과 첫 전투를 기록한다. 인민군 10명을 사살하고 수냉식 기관포 2문, 장총 15정, 모포 30점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린다.
인제 현리 복주개봉. 1949년 3월, 인민군과 1차 전투. 인민군 10명 사살. 수냉식(기관포) 2문, 장총 15정, 모포 30장 노획…. (아버지의 ‘6.25 참전기록’ 중에서)
그러나 이 복주개봉에서 인민군의 보복전에 당하여 중상을 입고 그 후유증으로 1949년 11월 일등병으로 의가사제대를 하고 귀향하지만, 다음 해 6.25가 발발하면서 다시 군에 복귀하게 된다. 연로한 부모님과 이미 처자식을 둔 이대 독자인 아버지로서는 고뇌 끝의 결심이었다.
당시의 경찰은 군과 합동으로 공비토벌 작전 등에 투입되었는데, 경찰에서 보유하고 있는 중화기를 다룰 인력이 필요하자 제대 후 집에서 머물던 중화기 부대 출신의 아버지가 천거되었다. 그렇게 하여 인제경찰서 관할이던 두촌지서에서 전투경찰의 신분으로 소대장격인 포반장으로 임무를 수행하던 중 인제 원동에서 제대 전 복무했던 부대와 조우한다. 아버지를 만난 중대장과 인사계가 전선의 상황이 위급하니 경찰에 있을 바에는 다시 군에 들어오라고 권유하여 제대 시 군번과 일등중사 계급을 부여받고 18연대에 복귀하여 참전을 한 것이었다.
이후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될 때까지 한국 전장에서 생사를 넘나들며 수많은 전투를 치른다. 개전 직후 8연대가 해체되어 수도사단 18연대로 편입되는데, 이 18연대는 한국전사에 길이 빛나는 그 유명한 무적 백골연대, 즉 백골부대가 된다. 얼마 뒤 막강 18연대는 다시 3사단으로 편입되어 무적백골의 신화를 이어간다.
매봉산, 율전, 공작산 각 지역 등지로 공비토벌. 7연대와 교대. 6사단 8연대는 수도사단으로 편입. 6.25가 일어났다. 부대는 분산되었다. 경기 가평으로 출동하였으나 탱크 포사격으로 미아리까지 후퇴. 인민군은 미아리까지 남침. 아군 후퇴 한강에 오니 채병덕 다리를 폭파하였다. 아군 부대는 광나루 건너 낙동강 방어선까지 후퇴. 3사단 18연대 백골부대 편입…. (아버지의 ‘6.25 참전기록’ 중에서)
8연대는 분단 후 38선 경비와 대남도발을 일삼던 인민군과의 전투를 비롯하여 곳곳에서 준동하던 공비토벌 작전에서 혁혁한 전과를 거둔 역전의 연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18연대는 말 그대로 한국전쟁 중 전투의 핵심 중의 핵심 부대였다. 6.25 한국전쟁의 전사를 기록한 상세한 자료들이 입증하고 있다.
수도 서울의 함락으로 한강을 도하 퇴각, 기계‧안강 방어전, 인천상륙작전과 북진 그리고 양양에서의 38선 돌파, 중공군과의 전투, 원산철수 1.4후퇴, 인제 덕산 가리산 전투, 현리 철수작전, 가칠봉 전투, 949고지 전투, 화천발전소 사수작전 등 국가의 존망을 가르는 전투의 선봉에 있었다.
맥아더 장군 인천상륙작전부터 북상하여 박병순 일등중사 분대장으로 직책부여 받고 전진하며 싸웠다. 드디어 평양을 함낙. 이승만 대통령과 함낙식. 다시 전진. 압록강 3일 방어, 중공군 참전으로 아군은 원산서 배를 타고 부산까지 후퇴. 홍천 두촌 장남까지 전진, 다시 후퇴하였다. 삼마치, 영월, 안동까지 후퇴. 다시 전진 오대산, 내면 광원, 양양 38선 돌파. 인제 현리 복주개봉 과거 전투지역에 투입하였다. (아버지의 ‘6.25 참전기록’ 중에서)
참담한 전사戰史도 있다. 6.25 전쟁 중 국군의 가장 치욕적인 패전으로 기록되고 있는 현리 전투에서는 3군단이 중공군의 공격으로 패퇴하며, 예하였던 3사단 18연대도 부대가 뿔뿔이 흩어져 평창 진부까지 퇴각하는 수모를 겪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당시 18연대 2대대장인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의 화기중대 소속이었던 아버지는 후퇴 중 낙오되어 진부까지 이동하여 3일 간 포위되었다가 아군의 진격으로 천신만고 끝에 생명을 부지하고 부대로 복귀했다.
인제 덕산 가리산 전투 중 3군단은 완전히 포위되었다. 105미리 야포 40대를 파기하고 육박전으로서 정승화 대대장을 모시고 후퇴 중 대대장은 낙오되어 지휘관은 없었다. 부대는 마음대로 진부까지 후퇴 중 굶어 죽은 병사도 많다. 진부에서 3일 간 포위되어 군복을 버리고 바지저고리로 갈아입었다. 민간인이 되었다. 3일간을 여우 굴에서 먹지도 못하고 굶었다. 아군이 전진하였다. 낙오병은 낙오자 집결소까지 갔다. 부대는 강릉, 양양 오색까지 갔다. 박병순 외 5인은 실종보고 되었다. 중대장을 붙잡고 울다. 모두가 울었다. (아버지의 ‘6.25 참전기록’ 중에서)
휴전협정이 본격화되며 한 치의 전선이라도 더 확보하려는 남북한 간의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고, 이등상사로 진급한 아버지는 포반장으로 중부전선 949고지 기습작전에 투입된다.
인제 서화 가칠봉 전투 투입. 5사단 3사단은 전멸하다시피 되었다. 우리부대는 유엔군과 교대 화천 949고지 대암산 방어. 휴전조약이 되다가 전장은 점점 치열하다. 1953년 7월 20일부로 이등상사로 진급, 직책은 포반장으로 949고지 기습작전 성공 금성화랑무공훈장 수여받다. 휴전직전 전투는 악화된다. 직책은 선임하사로 9사단 예비대로 대기. 전사자 부상자 이루 말할 수 없다. 시체 옆에서 같이 잔 때도 수차례 된다. 식사도 거기서 한다. 보급 수송이 안 되어 2, 3일 굶는 날이 많다. 화천으로 이동 특명. 3사 백골부대는 전군 결사대로서 화천발전소 사수하라는 명령을 받아 우리부대는 최선을 다해 사수하였다. (아버지의 ‘6.25 참전기록’ 중에서)
아버지의 6.25 참전기는 18연대의 전사(戰史)와 궤를 같이 한다. 18연대의 참전사(參戰史)는 곧 아버지의 참전사라고 할 수 있다. 18연대가 전장을 누비며 전투를 치른 곳에 중화기중대의 중화기 사수로서 아버지가 계셨기 때문이다.
1953년 7월 27일 아버지는 생사를 함께 했던 전우들과, 산화해 간 영령들의 넋이 어린 대암산의 어느 고지에서 휴전을 맞는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으며, 생사를 넘나들었던 절체절명의 순간들. 한강에서 낙동강으로 그리고 압록강까지 일진일퇴를 거듭했던 피어린 삼천 리 강토의 이 고지 저 능선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전쟁은 끝났다. 포성이 그쳤다. 그토록 염원하던 통일은 이루지 못한 채….
다시 대암산. 휴전 2일 전 밤 10시까지 수십만 발 폭탄이 낙하되었다. 1시간 10분 전 최후의 일 분간 까지만 살리라 이를 악물었다. 입술이 바짝 탄다. 물 한 모금 안 넘어 간다. 휴전. 드디어 살았다. 포성이 그쳤다. 조용한 밤이었다. 아침 전방을 바라보니 슬퍼졌다. 통일 못한 채 휴전이 된 것이 섭섭하게 생각됨이다. (아버지의 ‘6.25 참전기록’ 중에서)
참전기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 중화기 포반장 시절의 부친(왼쪽)
[작가 후기]
전후세대로 휴전 2년 후 태어난 나는 전설의 백골부대 출신인 아버지로부터 6․25 전쟁 이야기를 많이 들으며 자랐다. 그런 영향인지 나는 언제부터인가 아버지의 6․25 참전기를 꼭 글로 써보고 싶었다. 그러나 일천한 글재주는 차치하더라도 60년도 더 지난 일을 격지도 않고 보지도 못한 내가 쓸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올해 90의 연세이신 아버지께서 아직 정정하시지만 기억에 한계도 있으시고 자료 또한 미흡하다. 다행이 아버지가 오래 전에 손수 쓰신 편지지 4장 분량의 6․25 참전기록을 내가 보관하고 있어서 이제나마 이를 소재로 옮길 수 있을 뿐이다. 이 기록은 아버지께서 오래 전 기억을 되살려 적으신 일부분이라고는 하지만 몇 분 안 남으신 6․25 참전 노병의 귀중한 증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는 많은 이들의 뇌리에서 사라져 가는 ‘잊혀진 전장’의 한 노병의 참전수기를 구인문학의 이름을 빌려서 이렇게라도 몇 줄 남길 수 있어서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자식이기 이전에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누란의 위기에서 구국의 전선에 서셨던 6․25 참전 용사께
머리 숙여 경의를 표하며 감사를 드린다. (2017.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