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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에 미친 문학의 순기능과 역기능 上
----尹東柱 대 徐廷柱 그리고 林和-------
김우종
상편
1.구원과 배반의 두 얼굴
2.윤동주의 아름다운 십자가
3.임화의 혁명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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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편
4.서정주의 친일 문학
ㄱ. 그가 교과서에서 삭제되 사연
ㄴ. 피묻은 선운사 동백꽃
ㄷ. 한국문단이 바친 최고훈장과
ㄹ. 세계최고의 부패 문단
5. 서정주 문학의 정체
ㄱ. 미당과 무당
ㄴ. 자식을 제단에 바쳐라
ㄷ. 기교의 우수성과 사기성
ㄹ. 친일의 자발성과 적극성
ㅁ. 이승만 전기와 전두환 찬미가
ㅂ.' 천황과 일본에게 종이 되고 순종하자'의 사자성어
6. 이광수의 친일과 서정주의 차이
7. 김용제의 친일과 서정주의 차이
8.. 결론--한국 사회 망쳐 온 한국문단
김우종
1.구원과 배반의 두 얼굴
문학이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주제는 휴머니즘이다. 즉 인간에 대한 사랑을 구현해 나가는 것이 문학의 최대 기능이고
중추적 핵심적 기능이며 이를 배반하는 것은 문학이 아니다. 따라서 이를 배반하며 먹고 사는 글쟁이가 있다면 그 사람은
그가 아무리 천재적 명문장가라 해도 문인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구미호에 홀리듯이 그 잔 재주에 홀려서 문인과 비문인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문학은 본질적으로 장미꽃처럼 아름답다. 나비도 새도 달도 별도 모두 아름답고 거의 모든 자연이 아름답듯이 문학도 그렇게
본질적으로 태생적 미모를 지닌다.
‘문학은 언어로써 상상을 통하여 사상과 감정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예술이다’ 이렇게 정의 되어 있듯이 문학은 아름다운 몸매
로 태어나는 것이다.
마치 커다란 조개껍질 속에서 발가 벗고 나와 몸매를 자랑하는 비너스처럼. 문학의 사전적 풀이에서 “아름답게 표현한다“라고
하는 것은 아름다움을 느끼게끔 감동적으로 표현한다는 뜻이다.
감동이란 느낄 감(感) 움직일 동(動)의 합자이며 느끼면서 행동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문학에 감동한다는 것은 마치 멋진
이성에게 반해서 포옹하듯 입맞추듯 전전반측(輾轉反側) 새벽 별이 스러질 때까지도 잠 못이루듯 행동으로 나타내게되는
경우와 같은 것이다.
이렇게 감동적인 형태를 진닌 문학은 모두 그 감동의 정도가 다르다. 어떤 문학은 강력한 힘으로 세상을 바꿔 나가는 역할을
한다. 문학은 감동을 통해서 사람을 바꿔 나가니까 그것이 가능하다.
이런 의미에서 문학은 ‘경국지색(傾國之色)’이다. 경국지색은 ‘한번 돌아 보면 성을 위태롭게 하고 두 번 돌아 보면 나라를
위태롭게’한다는 ‘북방 가인’을 가리키며 어찌 그런 위험을 모르리오마는 ‘어여쁜 여인은 다시 얻기 어렵도다’ 하고 한무제
(漢武帝)를 유혹했던 이연년(李延年)의 시에서처럼 문학은 그 아름다운 용모로 나라를 망칠 수도 있고 살리는데 큰 역할을
맡을 수도 있다.
그래서 일제도 전쟁에 이기기 위해 조선문인협회를 조직하고 동원해서 경국지색의 언어의 매력을 활용하려 했고, 그래서
부끄러운 친일문학이 나온 것이다. 이유야 어쨌든 이렇게 문학은 꽃처럼 나비처럼 아름답다는 것이 일반론이다.
다만 이 같은 일반론에도 불구하고 속옷까지 들추고 정확히 내부 검사를 해 보면 악취가 풍귀고 흉측한 모습이 들어 나는
경우가 있다. 똥물보다도 더럽고 흡혈귀의 피 묻은 입술처럼 섬찍하게 살기를 느끼게 하는 문학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학은 로마의 어느 신전을 지키던 야누스처럼 때로는 두 개의 얼굴을 지닌다. 그런데 야누스와 다른 것은 한쪽이
악마라 하더라도 겉으로는 다 같이 은유법 직유법등으로 멋진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온갖 수사적 기법을 써서 예쁘게 치장함
으로써 이것에 망신스럽게 기만당하고 바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문학은 이런 의미에서 순기능만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배반의 역기능을 지닌다. 그리고 좀더 주의를 기울여 보면 모든
문학이 순기능과 역기능의 두 가지 형태로만 쉽고 단순하게 구별되는 것도 아니다.
어떤 문학은 순기능과 역기능의 양쪽에 발을 담그고 있다.
자기 자신은 순기능 편에 서 있다고 확신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것이 문학의 본래적 목적에 위배되는 역기능이 될 수도 있다.
자기는 누군가를 미치도록 사랑하고 있으며 누가 물어도 그것은 진실이라고 대답할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를 괴롭히는
스토커가 되고 있는 경우와 같다.
이런 의미에서 문학은 때때로 야누스의 두 얼굴을 지니지만 이렇게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특수한 경우까지 치면 문학은
세 얼굴이 된다. 그리고 좀더 살피면 문학은 더 많이 복잡하게 세분화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구분은 식민지시대를 거치고 오늘날 분단 현실에서 문인으로 살아가는 모든 사람과 그들의 작품에 대한 평가과정에서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중요한 과제다.
여기서 순기능은 한자어로 順機能 또는 純機能 두 가지를 다 써도 좋다. 順機能이란 본래의 목적에 잘 순종하는 기능이다.
문학은 처음부터 어느 누가 목적을 정해놓은 바는 없지만 고려가요인 <청산별곡>이나 월명사의 향가 <제망매가>나 황진이의
시조 <청산리 벽계수>나 끓는 쇳물 속에 던져진 아이가 운다는 에밀레종의 전설이나 남원땅에서 변학도에게 맞아 죽은 춘향
전의 근원설화처럼 그것은 우리들의 감정을 순화시키고 우리들에게 진실을 속삭이고 무지와 몽매에서 각성시키며 우리 모두의 행복을 위한 휴먼 메신저로 발달해 온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그러므로 이에 맞는 문학은 順機能을 지닌 문학이다. 그리고 이런 문학은 순수하며 다른 목적이 불순하게 섞이지 않았기
때문에 순수할 순자의 純機能을 지녔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본래적 목적 또는 순수한 목적을 배반하는 사이비문학 또는 이단문학(異端文學)이 우리 문학 유산 속에는
적지 않다. 그것은 아주 더럽고 싸가지 없는 인간들이 개인적 이익을 위해서 남을 해치는 문학이며 그러면서도 곱게 분바르고
연지 찍고 곤지 찍고 위장하며 문학 본래의 목적에 반역하고 있기 때문에 역기능(逆機能)의 문학이다.
2.尹東柱의 아름다운 십자가
가장 올바른 목적과 기법과 자신의 행동으로 문학의 순기능을 보여 준 대표적인 문인은 윤동주다.
순기능의 문학은 사회성 역사성을 떠나서 보더라도 우리들의 일상적 개인적인 삶에 대하여 항상 잔잔한 호숫가의 물결처럼
소리없이 행복을 가져다 준다.
좋은 음악과 미술과 영화나 연극 등이 그렇듯이 문학은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그 예술적 기능을 통해서 우리들의 삶을 좀더
풍요롭게 해 주고 위안을 주고 삶의 기쁨을 조금씩 더해 준다.
마치 고향처럼 또는 행복한 가정 속의 삶처럼. 그런데 그 기능이 좀더 힘을 지니고 확충 되면 온 민족을 억압으로부터 해방
시키고 온 인류를 구원하는 사회적 역사적 큰 기능으로 발전한다. 윤동주의 문학은 그런 기능을 발휘한 대표적인 문학이다.
그는 우리민족이 가장 절망적이었던 일제 말기에 그 고통을 혼자서라도 짊어지고 가겠다는 사명시를 남기고 그 길을 따라
감으로써 죽음을 마지했다.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이 시 <십자가>는 연희 전문시절인 1941년 5월31에 탈고되었으며, 그로부터 약 반년 후인 12월 8일에 일제는 마침내 영국과
미국을 향해서 선전포고를 하며 진주만을 기습 공격했다.
한국 다음에 만주를 삼키고 다시 난징 대학살을 저지르며 중국 전역을 피로 물들이던 그들은 그 침략전쟁을 아시아 태평양
전역으로 확대해 나가기 시작했다.
37년 12월 17일부터 40일간 계속된 30만 민간인과 포로들에 대한 난징 대학살의 참극은 이에 직접 참가했던 일본인의 수기
<미나고로시 모노가다리(皆殺 物語)>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일본은 우리 젊은이들로 하여금 이런 인류 학살의 무대에 동원되도록 몰아친 것이다. 태평양전쟁 발발 반년 전에 이 시가 쓰인
것을 보면 윤동주는 이미 이같은 비극의 절정을 예감하고 사명시(使命詩)로서 <십자가>를 쓴 것 같다.
여기서 그가 말한 십자가는 온 인류의 죄와 고통을 혼자 감당하기 위해 스스로 짊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미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에게 그런 십자가를 허락했듯이 윤동주도 자신이 그런 역할을 대신하도록 허락해 달라고 간절히 바란 것이다.
물론 그 역시 동족의 배반자들과 로마 군사들이 몰려 오기 직전에 게세마네 동산에서 땀 흘리고 기도하며 그가 믿는 하나님
에게 그 ‘쓴잔‘을 피하게 해달라고 애원한 적이 있듯이 망설이고 번민하는 시들을 남기기도 했지만.
이것은 물론 그의 종교적 기원의 형태지만 더 나가서 우리 민족 전체의 구원을 위해 자기 한 몸을 바치겠다는 선언이며 또
더 나가서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한 휴머니즘의 선언이었다. 다만 ‘허락된다면’이라는 조건이 붙은 것은 자기 한 몸의 희생으로
그것이 가능하다면 허락해 달라는 겸허한 태도를 나타낸 것일 뿐이다.
그리고 이 해 태평양전쟁 직후에 연희전문을 조기 졸업하고 이듬해 봄에 일본 도쿄의 릿쿄대학(立敎大學)을 거쳐 10월에
교토의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에 다니게 된 그는 다음해 1943년 7월 14일 여름방학 때 고향가는 짐을 싸 놓고 시모가모가와
(下鴨川) 경찰서에 구금되고, 다음 해 2월에 교토재판소에서 2년 징역형을 받고, 1945년 2월 16일에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한다.
윤동주의 당숙인 윤영춘 교수가 송몽규를 면회하고 그로부터 들었다는 증언에 의하면 이것은 생체실험에 의한 죽음이며
죄명은 치안유지법위반( 민족해방과 독립운동)으로 나타나 있다.
같은 독립운동의 주동자로서 투옥되어 같은 생체실험을 받고 있던 교토제국대학 학생 송몽규는 다음달 3월 10일에 윤동주의
뒤를 따랐다.
이같은 윤동주의 문학은 민족해방과 함께 그 한계를 뛰어 넘어서 온 인류의 구원을 지향하는 휴먼 메신저가 된 것이다.
그런데 윤동주의 이런 민족 구원의 기능에 대해서는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한 평론가는 대표적으로 거론 되는 친일 시인 서정주의 역할을 대학 강단에서 이렇게 반문하며 옹호한 일이 있다.
그런 친일 문학이 과연 그 당시의 우리 젊은이들에게 무슨 영향을 끼칠수 있었겠느냐고. 즉 그가 우리 젊은이들에게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서 전쟁터에 나가서 죽으라고 선동했더라도 그 말 듣고 나가 죽을 조선 사람들이 있었겠느냐고 반문한 것이다.
아무리 감언이설(甘言利說)로 삼천만 동포를 개죽음의 전쟁 속에 몰아 넣으려 했어도 이에 응한 사람이 없다면 죄를 물을 수
없다는 논리다. 물론 응한 사람이 없다는 것은 그러리라는 가정이고 추측이지만.
그런데 이런 주장이 옳다면 친일과 반대로 민족적 저항시인으로 평가되어 온 윤동주의 문학에 대해서는 그 시기에 그 문학이
누구에게 무슨 영향을 미쳤겠느냐고 반문하며 그의 역할을 비웃는 논리도 된다. 즉 윤동주의 문학이 누구에게도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한 문학이라면 그 당시의 윤동주 문학은 쓸모없는 휴지조각 묶음에 불과하며 그 죽음은 개죽음이 되는 셈이다.
그런데 문학 또는 그 작자에 대한 이같은 평가는 문학의 기본 개념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오는 것이다.
우선 문학 작품은 그 시대적 한계 속에서 그 결과에 의하여서만 평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 문학은 그것이 쓰이거나 발표
된 지역적 공간 속에서만 평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무명인의 범작이라도 혼자만의 밀폐된 사적 공간에서 그친 것이 아닌 이상 사회적 활동으로서 얼마든지 널리 확산되며 그것은
세계적으로 읽히는 작품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문인은 공인으로서 윤리적 도덕적 영향까지도 미치게 되며 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문학은 화장실의 두루마리 화장지처럼 당시의 다급한 상황에서만 한번 사용되고 버려지는 물건이 아니다. 그것은 그 시대의
특수한 사회적 상황의 배경이 낳은 것이라 하더라도 한시적(限時的) 일회적인 용도가 아니라 긴 세월의 역사적 기능을 지닌다.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이 있다. 이것은 태평양 전쟁이 터지기 한 달 전의 긴박한 상황 속에서 윤동주가 가을 하늘의 무수한
별을 바라보며 쓴 것이다. 그 당시의 특수상황이 만들어 낸 시로 해석된다. 그렇지만 그것은 지금도 우리 국민 다수의 애송시가
되고 세계 도처에서 사랑을 받으며 우리들의 감정을 울려 주고 있다.
그것은 단순한 서정시에 머무르지 않는다. 어린 시절에 만났던 가난한 이국소녀와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을 자아 내게 해 주고
있으며 그 그리움은 곧 사랑이고 따뜻한 인간정서이며 그것은 인간구원의 큰 역할을 한다.
그리고 어머니를 부르는 절실한 목소리는 우리 모두에게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그 고귀한 사랑을 되새기게 하고 우리
들의 심성을 더욱 아름답게 해 주며, 사랑하는 자식이 조국을 위해서 되돌아 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난다고 어머니에게 고하는
이 이별의 시는 우리들에게 민족애를 심어 주고 고통받는 인류에 대한 고귀한 사랑의 정신을 심어 주고 메말라 가는 우리들의
가슴을 촉촉이 적셔주고 눈물의 가치를 되새겨 준다.
그러므로 역사적 평가를 내리는 훗날에 와서 문학을 어느 특정 시기의 결과만으로 평가하는 것은 잘못이다.
문학은 영원히 인간 구원의 휴먼메신저가 되어서 온 세계로 파급되어 갈 수 있다. 즉 일제말기에 그 작품이 미친 영향의 정도
만으로 그 작품 가치를 폄하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렇게 좋은 문학은 좋은 종교와 마찬가지로 언제나 다시 부활하고 또 다시 부활하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인류 구원의
메시지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나 석가모니나 그들은 말로써 제자들을 감화시키고 정신적 구원을 주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더 크게
당대 모든 인류를 고통으로부터 구원해 줬다는 증거는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가르침은 당대의 일회용 비닐 봉투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가르침은 서서히 다시 부활하고
인류에게 희망과 용기와 밝은 빛을 안겨 주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국의 천도교도 1984년 동학혁명 당시에 고통 받는 농민들에게 일시적 희망을 주고 용기를 주다가 그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이 지닌 인간구원의 메시지는 전봉준을 비롯한 수많은 혁명군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근대정신의 밑거름으로 끊임없이
부활해서 오늘에 이르렀다.
문학도 마찬가지다. 문학이 지닐 수 있는 인간 구원의 정신은 오늘도 끊임 없이 되살아 나서 멀리 그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윤동주가 죽은 지 50 주기가 되는 것은 1995년 2월 16일이었다. 그 전날인 2월 15일에는 전야제로서 반세기만에 추모제가
후쿠오카에서 열렸었다. 한국에서 문단과 대학의 학생 및 교수와 언론계와 일반인등 대표들 총 50명이 비행기로 일본 땅까지
날아간 대규모 행사였다.
가수 양희은씨가 노래를 부르고 무용가 이애주 교수가 사물 놀이 패들의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며 타향에서 외롭게 옥사한
윤동주의 넋을 위로하고 부활을 기원해 주었다. 니시오카겐지(西岡健治) 교수는 일본인 대표로서 앞에 나가서 “우리가 윤동주
를 죽였습니다”하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웨쳤다.
그리고 일행은 다시 교토로 날아가서 도시샤 대학 구내에서 윤동주 시비 개막식에 참가하고 우리가 주최한 심포지움에 참가했다.
이 심포지움에는 윤동주를 사랑하고 연구하는 일본인들이 전국 각처에서 모여 들어 니지마(新島) 회관을 꽉 차게 메꿨다.
이것은 가해자의 나라인 일본 땅에 그날로써 전국적으로 보도되었다. 그리고 전년인 1944년에는 필자의 후쿠오카 형무소
답사를 계기로 ‘윤동주의 시를 읽는 모임’이 그 고장에서 발족되고 이들의 행사는 지금까지 매월 이어지고 있으며 윤동주
사랑은 일본 및 전 세계로 확산되어 왔다.
윤동주는 그렇게 그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골고다의 언덕(일본 후쿠오카 형무소. 지금은 후쿠오카 구치소지소로 되어 있다.)
에서 부활했다. 죽을 때 큰 소리를 질렀다고 했듯이 그는 50년 만에 다시 큰 목소리로 그곳에서 부활한 것이다.
이것은 그같은 문학이 당대의 일회적 가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구히 그리고 전세계적으로 인간 구원의 휴먼메신저가
되어서 순기능을 발휘한다는 증거다. 물론 이런 아쉬움은 있다.
그의 자필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그 당시에는 출판되지 못했다. 그러므로 대중적으로 읽히지 않았다.
읽히지 않았으니 쓸모없는 물건이었다고 말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 시집의 독자라면 1941년 5월에 함께 하숙하고 있던 정병욱(鄭炳昱, 훗날 서울대 교수)과 하숙집 주인이던 소설가
김송(金松), 그리고 출판을 상의 드리며 원고를 들고 찾아가 뵈었던 (李敭河 )교수가 꼽힌다. 정병욱교수는 그 후 이 자필
시집을 고향집 마루 밑에 숨겨 놓고 학도지원병이라는 형식의 강제 징집으로 떠났기 때문에 그 시집은 다른 독자들에게
읽힐 수 없었다.
한편으로 또 하나의 자필 시집과 함께 더 많은 윤동주의 시와 기타 유품들을 보관했던 윤동주의 친구 강처중(姜處重)이 있지만
역시 일제하에서 이 작품들을 출판 보급하지는 못했다. (강처중은 광복 후 남로당 간부로서 서울 형무소에서 사형집행을
기다리다가 6.25전쟁 발발로 살아나서 월북했다.)
그러므로 그의 시가 우리 민족을 해방시켰다는 말은 간단히 성립되기 어렵다. 그렇지만 이미 13세 때부터 송몽규와 함께
등사판 문예지 발행으로 문학활동을 시작하고 18세 때에 <삶과 죽음><초 한 대><내일은 없다>를 발표한 그가 민족 정신이
뚜렷한 기성시인으로서 연희전문학교에서도 활동을 계속하다가 마침내 저항적인 시를 써 나간 것은 과소평가 될 수 없다.
남들은 친일시를 쓰며 동족에게 패배감과 부끄러움을 안겨 주고 있을 때 거의 비슷한 나이의 시인이 한 편에서는 저항시를
쓰며 위험을 무릅쓰고 출판을 시도하다가 실패한 것, 그리고 출판이 어려워서 자필 시집이 한 권이 아니라 세권이 되었으리
라는 것은 소문만으로도 어둠속의 우리 민족에겐 희망의 불빛이 되고 힘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민족 해방은 다수에게 알려진 유명 독립운동가 몇 사람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었다. 민족해방의 원동력은 이에 동참
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의지의 합산이다. 그러므로 윤동주의 당대 역할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으며, 그 후 그의 문학은 인류
구원의 메신저로서 끊임 없이 그 기능을 재생산하고 확충해 나간 것이기 때문에 그 가치는 시대적 일회성을 넘어서 평가되어야 한다.
3. 林和의 혁명문학
앞에서는 문학의 두 얼굴 중 순기능의 문학으로서 윤동주의 문학을 말했다.
다음은 그 반대가 되는 역기능의 문학과 그 장본인들에 대해서 말해야 할 차례다. 그런데 그 중간에 애매모호한 제 3의 얼굴이 있다. 순기능인지 역기능인지 독자를 헷갈리게 한다.
문학의 본질 또는 문인의 정체를 바로 밝히고 역기능과 순기능의 책임을 작자들에게 물으려면 이 애매모호한 문학이 발생하는
원인과 결과에 대해서 먼저 언급해야 한다.
이런 문제가 가장 많이 우리 문학에서 발생한 것은 문인이 창작 과정에서 정치적 목적의식을 개입시켰을 때다.
정치가들이 시키는대로 또는 시키지 않아도 그들에게 아부하기 위하여 그들의 정치적 목적에 맞도록 미리 알고 기는 똥개
문학은 원초적으로 문학의 기본 조건을 상실한다. 그 정치가가 아무리 거룩해도 마찬가지다. 창작활동은 기본적으로 저 높푸른
하늘을 마음대로 나는 새처럼 작가의 자유로운 의지의 표현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어떤 강요된 형태도 용납될 수 없고
주체성과 자부심과 긍지를 내던진 어떤 것도 창작의 기본 조건에서 이탈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정치적 목적의식을 표현한 문학이 모두 정치가에 예속되어서 부득이 굴종하거나 줏대를 버리고 꼬리치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 목적의식은 정치가들만의 것은 아니다. 교토에서 윤동주가 하숙방에 모여 민족해방을 논의한 것도 정치적 활동이며
그는 사상범이고 정치범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사상적 정치적 신념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확신범이라고도 한다.
윤동주의 이같은 정치적 목적의식은 물론 종교적 목적의식과 공존하는 것으로서 그의 문학적 가치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만일 인권이 유린되는 정치적 현실에서 인권을 되찾기 위한 문학을 한다면 그것은 문인으로서 문학을 통한 정치적 활동을
하는 것이 되며 그가 체포된다면 그는 출판법보다는 치안유지법 위반의 정치범으로 수사기관의 블랙 리스트에 기록될 것이다.
그런데 이같은 사상적 신념에 의한 문학 활동 중에서도 분단 후의 남한의 커뮤니스트들에 의한 작품들은 가치판단이 애매해진다.
대표적인 것은 임화의 문학이다. 그는 월북하기 전에 사회주의 혁명을 성취해 나가기 우해서 <인민 항쟁가>를 지었고 또
<태백산맥(빨치산의 노래)>도 지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월북 후 6.25전쟁 당시에 쓴 <너 어느 곳에 있느냐
(사랑하는 딸 혜란에게)>가 많이 알려져 있다.
그는 북한에서 사형되었지만 남한에서 체포되었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북한에서 공산주의 혁명의 이상을
배반한 적도 없거니와 남한에서의 문학활동도 그의 정치적 사상적 확신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확신범이다.
그런데 그 확신은 피의 투쟁을 통한 혁명의 완수였기 때문에 문학 작품에도 그것이 선동적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인간을
온갖 고통으로부터 구원해야 하는 것이 문학이라고 할 때 그의 문학은 어떻게 평가되어야 할까?
일방적 흑백논리를 떠나서, 또는 전쟁 도발자가 누구냐를 떠나서 분단 상황 속에서 우리가 겪은 민족 상잔의 역사는 남북
어느 쪽을 막론하고 다수가 서로 인권을 극단적으로 짓밟은 잔혹한 역사였다. 그 속에 임화의 시가 있다.
결코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한 시다.
< 인민항쟁가>
원수와 더불어 싸워서 죽은
우리의 죽음을 슬퍼 말아라
깃발을 덮어 다오 붉은 깃발을
그 밑에 전사를 맹세한 깃발
더운 피 흘리며 말하던 동무
쟁쟁히 가슴 속 울려 온
동무야 잘 가거라 원한의 길을
복수의 끓는 피 용솟음 친다.
백색 테러에 쓰러진 동무
원수를 찾어서 떨리는 총칼
조국의 자유를 달려는 원수
무찔러 나가자 인민 유격대
<태백 산맥>
태백산맥에 눈 나린다
총을 메어라 출진이다.
눈보라는 밀림에 우나
마음 속엔 피 끓는다.
높은 산을 넘어 넘어
눈에 묻혀 사라진 길을 열고
빨치산이 영(嶺)을 내린다.
(이상 두 작품은 발표당시의 원본을 구하지 못했지만 필자의 기 억으로도 거의 정확할 것이라고 추정됨)
임화는 일제 말기 KAPF의 사무국장으로서 1935년에 해산계를 낼 때까지 사회주의 혁명과 민족 해방을 위한 문학활동을
열성적으로 해 나갔다.
그리고 광복 후에는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신념에 의해서 이런 노래말 시창작을 했다. 이 경우에 그는 누구의 지배 하에서
본인의 의사와 상관 없는 문학을 한 것이 아니다. 그는 당당히 자유로운 창작의 주체로서, 그리고 혁명을 이끌어 나가는
고위 지도자중 한 사람의 입장에서 이것을 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정의감의 표현이었다고 하더라도 그 문학은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킨 도구의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다.
이 노래말 가사들에는 혁명을 위해서 몸을 바치는 죽음이 미화되어 있다. 장엄하게 싸우다 죽어 가는 인민유격대가 ‘붉은
깃발을 덮어다오“하는 마지막 말은 불굴의 위대한 혁명정신을 고무하고 그 죽음을 한껏 아름답게 미화하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다른 젊은이들에게도 죽음을 유혹하는 것이다.
<태백산맥>도 마찬가지다. 여기서는 매우 아름다운 풍경이 전개되고 있다. 눈보라가 징징 우는 소리를 내는 험준한 태백산맥
의 산마루를 넘고 넘어 다니는 빨치산들의 모습은 그 가혹한 고난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상상으로는 참으로 장엄하고 멋지고
아름다운 그림이 된다. 그리고 이곳으로 부르는 소리는 곧 동족끼리 죽고 죽이는 잔혹한 비인간적 살인 전쟁상황이다.
이 노래들은 남한에서 한 때는 마치 유행가처럼 사방에서 불리어졌다. 중학생들의 학교에서도 적지 않게 불리어졌다.
그러면 이 노래가 지닌 죽음에의 유혹과 사상적 선동성이 남북 갈등 구조 속에서 차지했던 비중은 얼마나 될까? 물론 그것은
수치계산이 불가능하지만 그 문학적 영향력은 결코 적은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즉 그 문학은 참으로 많은 사람을 죽이는
무기로 사용되었으리라는 것이다.
임화의 시는 북한에서도 사랑을 받았었다. <김일성 장군의 노래><스딸린 대원수의 노래>‘동방홍 태양승(東方紅 太陽昇)으로
시작되는 모택동의 노래와 함께 임화의 <인민항쟁가>와 <태백산맥>은 북한군들 속에서 가장 많이 불리어진 애창곡이었다.
그리고 <너 어느 곳에 있느냐>도 많이 사랑을 받고 있었다.
1952년 초여름으로 기억되는 어느 날 저녁에 전방의 북한군 벙커 속에서는 한 병사가 눈을 지긋이 감고 이 시를 낭송하고 있었다.
(상략)
너는 지금 이
바람 찬 눈보라 속에
무엇을 생각하여
어느 곳에 있느냐
머리가 절반 흰
아버지를 생각하며
바람 부는 산정에 있느냐
가슴이 종이처럼 얇아
항상 마음 아프던
엄마를 생각하며
해 저무는 들길에 섰느냐
그렇지 않으면
아침마다 손길 잡고 문을 나서던
너의 어린 동생과
모란꽃 향그럽던
우리 고향집과
이야기 소리 쟁쟁한
그리운 동무들을 생각하며
어느 먼 곳 하늘을 바라보고 있느냐
사랑하는 나의 아이야
벌써 무성하던
나뭇잎은 떨어져
매운 바람은
나뭇가지에 울고
낯익은 길들은
모두 다 눈 속에 묻혀
귀 기울이면 어데선가
들려 오는 얼음장 터지는 소리
아버지는 지금
물 소리 맑던 낙동강에서
악독한 원쑤들의 손으로
불타고 허물어진
숱한 마을과 도시를 지나
우리들이 사랑하던
서울과 평양을 거쳐
절벽으로 첩첩한 산과
천리 장강이 입울마다 우는
자강도 깊은 산골에 와서
어데메에 있는가 모를
너를 생각하여
이 노래를 부른다.
(하략)
이 시는 본 제목 밑에 ‘사랑하는 딸 혜란에게’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이귀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혜란은 1931년 12월생이니까 이 시가 쓰인 1950년 12월에는 만 19세가 된다.
이때 임화가 ‘천리 장강이 입울마다 우는’ ‘절벽으로 첩첩한 자강도" 깊은 산골에 있었다면 우리가 사랑하다가 배신해 버린
춘원 이광수는 이 때쯤 이곳으로부터 머지 않은 곳에서 쓰러져 죽어 있었을 것이다.
이 작품은 임화의 문학에서 특수한 자리를 차지한다. 다른 거의 모든 사회주의 작품들이 그렇듯이 그 속에는 작자의 개인적인 사생활 측면을 실명까지 써가는 예는보기 드믈다.
더구나 감상주의적인 색채가 매우 짙다. 그리고 그것은 전쟁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하고 북한군 전체가 지리멸렬 되어 산 줄기를
타고 만주 국경 너머까지 후퇴하던 모습을 들어내고 있는 작품이다.
이것은 혁명적 낙관주의의 문예이론에 위배되며 용납될 수 없는 패배주의라고 비판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비판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혁명의 의지를 선동하는 또 다른 방법이 될 수 있다.
이 작품에는 전쟁으로 참담하게 파괴된 조국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것은 패배의 자취이기도 하지만 거의 모두 미군에 의한
폭격의 자취임을 나타내기 때문에 외세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을 고취할 수 있다. 남북 문단 속에서 양쪽이 가장 잔혹하게 학살
을 범한 것은 이같은 피해상황에 대한 복수의 반복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시에는 행복하던 가정이 파괴된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이 시는 작자가 딸을 얼마나 사랑하고 그리워 하는지, 그리고
그녀의 어린 동생이 있고 가슴이 종이처럼 얇아 늘 마음 아프던 아내가 있는 고향집을 얼마나 그리워 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시절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기억을 되새기고 있는 작품이다. 그런데 이 부분은 ‘미제국주의자들’에 의한 참담한 파괴 현장의
앞머리에 배치되어 있다.
전쟁의 참상은 그것이 개인적인 평화로운 삶을 어떻게 파괴하고 있는지, 전쟁이 있기 전에는 그 삶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를
나타냄으로서 가장 확실한 고발적 효과를 나타낸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는 임화의 패배주의적 감상의 결과라고만 단정하기는
어렵다.
가장 패색이 짙은 절망적 막다른 벼랑 끝에 서면 누구나 혁명이고 개나발이고 사랑하는 가족 생각부터 나겠지만 이 작품은
전쟁의 참상을 개인적 삶에 투영시켜서 구체화한 사실주의적 성과로서 더욱 선동적일 수 있다. 즉 더욱 많은 젊은이들을
복수의 전쟁터로 몰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같은 임화의 문학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는 문학의 기본적 기능에 비춰서 어떻게 설명되어야 할까?
그 혁명이 억울하게 고통받아 온 사회적 약자의 해방을 위한 것이라면 그 방법을 묻기 전에 이데올로기의 문제로서 가치판단
이 앞서야 한다.
한반도에서의 사회주의 활동은 결과적으로 훗날의 북한 체제를 만들어 나가는데도 기여했지만 임화가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서 문학을 했더라도 의도적으로 그 북한체제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 문학을 바친 것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그 체제에
의해서 문학을 배신당하고 또 참혹한 죽음을 당했다. 그러므로 특정 정치가가 발명한 체제와 순수 이데올로기의 문제는
구별되어야 한다.
여기서 사회주의냐 자본주의냐는 각자의 선택의 자유에 속한 문제이지 선악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을 북한 독재 체제로 혼동
하고 선악을 따지는 것은 우매하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선동한 임화의 문학은 남남 갈등의 정치적 문제가 아니라
그가 문학을 정치적 도구와 수단으로 씀으로써 어떤 결과를 가져 왔으며 그 방법이 옳은 가를 따져야 한다.
임화의 모든 사회주의 문학도 비록 순수한 확신범으로서의 창작활동이었다 하더라도 문학의 본래적 기능을 다분히 손상시킨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문학은 인간의 생명을 존중하고 행복을 추구하는 휴머니즘이 가장 올바른 기능이다. 그리고 그 방법은 폭력을 배제하는 평화
주의적 사상에 입각해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문학은 인명살상의 도구로 쓰일 수 없다.
<너 어느 곳에 있느냐>가 북한군 전방고지의 컴컴한 벙커 속에서 한 병사에 의해서 낭송되고 있었을 때 다른 병사들은 모두
이에 귀를 기울이며 떠나온 고향과 어머니와 어린 동생등 가족과 친구들을 그리고 있었을 것이다. 옷들은 모두 남루했다.
그 때가 초여름 쯤이었는데 솜이 터져 나온 누더기 동복을 그대로 걸치고 있었다.
퀴퀴한 땀 냄새에 이가 득실거렸다. 한달이 넘고 또는 요행히 한 계절이 다 가도록 살아 남은 병사들은 거의 모두 세수 한번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영양 실조로 얼굴이 누렇게 부어 있고 해만 저물면 야맹증으로 장님이 되어 있는 병사도 많았다.
한달이면 소대원이 3분의 1쯤은 죽어 없어지는 극한 상황이었다. 이 속에 인민군복만 갈아 입혀져 그곳에 전원 투입된 국군
포로(398부대)들의 운명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곳에서까지 임화의 시가 낭송되고 있었다는 것은 한반도의 분단 현실 속에서 남북 어디서든 그의 문학이 얼마나 큰 비중
을 차지하고 있었는지를 잘 말해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벙커속에서 낭송되던 <너 어느곳에 있느냐>는 조금 변형되어 있었다. ‘사랑하는 딸에게’가 사랑하는 아들에게로
바뀌고 그 아들은 바람 찬 눈보라 속 어느 전선에 있느냐로 바뀐 것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북한군 속에서 사랑받고 낭송되고 있던 그 시간에 후방에서는 이미 박헌영 일파들에 대한 숙청작업으로 임화에
대한 죽음의 축제가 은밀히 진행되고 있었던 것같다.
그는 다음해 1953년, 아마도 8월경에 ‘미제 간첩‘의 죄명으로 총살형에 처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다음 호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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