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병대 군악대 (ROKMC Band) 정리중
(내용정리 1951년~1958년: 복기호-군악창설期=특하 1期-1951년 입대)
(내용정리 1959년~1961년: 서봉석-군악5期= 신병 118期-1961년 입대)
[참고] 하사관과 병의 계급명칭은 각군별로 달랐던 명칭을 1962년부터 전군이 통일됨.
1962년이전에는 해병대는 해군과 비슷한 명칭을 사용, 하사관은 병조(兵曺),병은 水兵에서
해병(海兵)을 기본으로 이등병조,일등병조,병조장/견습해병,이등해병,일등해병,상등해병
등으로 칭했었음.
(1) 해병대군악대의 창설(Since 1951)
1949년 4월15일 380명으로 창설된 해병대는 해군의 단위부대로 시작되었지만 6.25전쟁중에
병력이 점차 늘고 독립된 군대의 형태를 갖추게 되면서 해군과 별도의 군악대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1951년4월1일 해병대사령부참모장 김대식대령(후에 제3대 사령관)은 과거
만군(滿軍)시절 군악대 근무경력이 있는 이관승병조장(상사-당시 해군군악대 근무)에게
해병대군악대 창설 준비를 지시했다. 이관승병조장은 마침 그 시기에 해체된 국민방위군13단
(경남부산지구)군악대원 16명을 5월8일 당시 해병대하사관교육대(진해도천국민학교 사용)에
가입대 시킴으로서 해병대군악대의 역사가 시작된다.
(이 시절 군악대 창설의 모체가 된 국민방위군 출신자 16명은 Clar.-복기호,이성근. Sax.-
김성태,이홍석,강철모. Horn-이준호,양희문. Trbn.-한정진. Trpt.-조동순,이광수,유영인,
김재만. Bar.-함성국. Drum-송상헌,김중국,신성모)
당시에는 해군의 장교와 하사관등을 해병대로 전환입대토록 하여 해병대 창설의 주역이
되었기때문에 이관승도 마찬가지로 해군군악대에서 1951년5월10일 전환입대케 되었다.
[참고] 국민방위군이란 갑작스런 북한의 6.25남침으로 인하여 남한의 젊은이들을 많이 희생
되었고 군 징집도 어려움을 당하자 1951년 1.4후퇴 직후 정부에서 현역군에 입대하지 않은
68만 젊은이들을 남쪽으로 안전하게 후송시키기 위해 국민방위군제도를 만들어 1951년1월
30일 국회에서 209억원 예산을 통과시켜 운영을 했었다. 그러나 이 예산이 몇몇 정치인들에
의해 잘못 쓰여진 관계로 국회가 시끄러웠고 결국 부대를 해체하고 말았다)
그러나 16명이라는 인원이 너무 적어 가입대로 있던 도중, 군악대원들을 각자 고향으로
보내서 군악병 모병운동을 벌인 결과 총 52명이 해병대제1기특과하사관후보생 의 이름으로
해병학교 (당시 진해여고에 있던 해병대사관후보생교육대-1951년4월1일 창설)에 6월
18일에 입교하게 되어 정식으로 해병대특과하사관 교육을 받게 되었다.
1951년 6월18일은 군악대원들의 해병학교 입교일이지만 이날부터 시작하여 교육기간 도중
에도 군대내의 행사와 일선 위문등, 군악대로서의 활동을 펼치게 된다.
1951년 9월30일 창설기 요원 52명이 하사관교육을 마치자 정식으로 해병대군악대라는 부대
명칭이 부여되었다. 이때에 군악대원 전체가 하사관이 되면 병이 없기에 교육기간 동안의
성적,연주능력,나이,본인의사등을 참작하여 같은 동기이면서도 하사관과 병으로 구분하여 상하
조직을 어느 정도 갖춘 후에 군악대로 출발하게 된다. 당시 해병대사령부는 부산에 있었지만
해병대교육단이 진해에 있는 관계로 진해에서 많은 행사를 담당하게 된다.
(참고: 초창기 해병대는 해군총참모장 휘하의 단위 부대로 활동하다가 4개 대대로 병력이
증강하면서 진해여고에 사령부를 설치 운영하였으며 1951년5월 부산용두산 막사로 이전
하였다)
### 해병대군악대 창설자 이관승 병조장 은 누구인가?
이관승(클라리넷)은 8.15 해방전 일본 만주군 군악대원으로 있다가 해방후 해군의 전신인
해안경비대군악대를 거쳐 해군군악학교 교관으로 복무후 전역, 고향인 충북제천에서 중학교
음악교사 생활을 하던중 6.25동란으로 해군에 재입대하여 해병대군악대를 창설하고 1951년
10월 군악장교가 되기 위해 해병학교 제8기 간부후보생 교육후 중위로 임관, 후에 대위로 진급.
1954년12월 금촌의 해병전투연대가 제1임시여단으로 승격되면서 또 하나의 해병대군악대가
창설되고 제1임시여단군악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시절 군악대 막사로는 (막사에 관한 증언:신병12기 故김용기님)
1.하사관교육대(진해도천국민학교) -가입대 기간중
2.해병학교 (진해여고 옥상)-하사관후보생교육기간중
3.舊일본군사병구락부 강당(진해운동장근처)-이때 신병12기가 군악대로 편입됨
4.하사관교육대로 다시 옮김
5.1953년 9월28일 진해 원일봉에 막사(콘세트 1개동과 천막 3동)를 새로 짓고 정착하게 됨.
(위와 같이 자주 옮기게 된 이유는 악기소리때문에 타부서의 근무에 지장이 있으므로)
[자료제공: 창설기 故박남교님의 아들 박종석님]
(2) 초대 군악대장 한상기(韓相基)중위
1951년10월 해병군악대 창설자인 이관승병조장이 군악장교가 되기위해 해병학교로 입교
하게 되자 사령부에서는 해군에 의뢰하여 해군통제부 군악대장인 한상기중위를 해병대로
전환입대케 하여 1951.10.01.자로 해병대군악대장으로 임명함으로서 해병대군악대 초대
군악대장이 된다.
한상기(1923년 서울출생-피아노-작곡가)는 일본 동경 고등음악학교 사범과를 졸업하고
해방 직후, 일본에서 성악을 전공한 李안드레의 탱고오케스트라에서 백해제(바이올린)
전봉초(첼로)황병열(아코디온),김호길(아코디온)등과 함께, 요즈음으로 말하자면 크로스
오버 장르의 연주 활동을 하다가 당시 해군군악학교 교장이던 남궁요열씨의 권유로 해군
사관학교 제4차 특교대를 거쳐 곧 중위로 임관되어 해군통제부군악대 대장으로 임명되고
당시 서울에 있던 해군군악학교 교관으로 출강하였으며 해병대로 전환입대, 1951년10월
해병대군악대장으로 임명되어 7년 복무 후 1957년 중령으로 예편하였다.
경 력
1942년 콜롬비아 레코드 전속작곡가
대표곡: 산중일기,안남아가씨, 통군정의 노래, 청춘항로, 청노새극장, 꽃파는 꾸냥.등
군시절 작품
군가작곡: 도솔산의 노래
취주악곡: 휘날리는 태극기, 해병대 행진곡, 유엔기 아래에, 민요접속곡,
전원시곡: 시골풍경
예편후, 영화음악계에서 활동 300여편의 영화음악을 작곡, 3차례 대종상 음악부문 수상.
예총 음악분과 위원장 역임.
(아래사진은 1952년12월29일 진해해양극장에서 군인가족을 위한 송년음악회)
<지휘:한상기 대위> [자료제공:창설기 복기호]
(3) 해군군악대 고급 하사관의 전환입대
당시 해병대 자체에서는 군악대 경험이 풍부한 지도자급 인력이 없었기에 훗날 예하 각
군악대장이 된 4명의 고급하사관들이 해군으로부터 전환입대 되었으니 병조장(상사)의
정삼윤,인석환,문병일과 일등병조(중사)의 김명조이다.
정삼윤(바리톤)병조장은 후에 해병대사관후보생 교육을 거쳐 대위로 진급했으며 진해
교육단과 제1사단(포항)의 군악대장 역임.
인석환(트롬본)병조장은 해군의 전신인 해안경비대군악대를 거쳐 해군통제부 군악대
에서 복무중 해병대를 지원 전환입대하여 후에 준위로 진급하여 진해교육단과
제1여단(김포)의 군악대장 역임.
문병일(트럼펫)병조장은 한상기대장 부임후 해군군악대에서 해병대로 전환입대. 후에
준위로 진급하여 제1여단(김포) 군악대장 역임.
김명조(클라리넷)일등병조는 해군에서 예편한후 해병대로 재입대하여 후에 준위로 진급
하여 진해교육단 군악대장 역임.
(4) 창설기 이후 1973년까지의 군악대원 모집
군악대 창설때 뽑은 특과하사관1기(병8기) 이후에는 신병12기(1951.12.)때에 훈련병중
에서 연주경력자를 선발해 군악병으로 다수의 인원을 충원한것을 시작으로 수시로 대원을
모집했는데 신병12기 이후에는 신병18기(1952.06.) 신병22기(1952.10.-제주도에서의
교직자들이 대부분) 신병27기 등이 군악대 초기의 군악병이다. 특히 신병27기는 군악대에서
연주경력자를 미리 선발 모병하여 훈련소에 입소시킨 첫번째 군악병이며 진해에 해병대
군악대가 하나만 있을때 모집한 마지막 깃수가 신병39기이다. 이때의 군악대원은 80~90명
정도 되었기에 훗날 제1여단(금촌-포항-후에 제1사단)군악대.사령부(서울)군악대, 교육단
(진해)군악대, 제1여단(김포-후에 제2여단,제2사단)군악대로 배치하게 될 근간이 되었다.
1954년2월1일 금촌의 제1임시여단군악대 창설때 진해에서 30 여명을 차출, 조직하였고
1956년6월30일 서울 신청사로 해병대사령부가 이전하면서 사령부군악대가 정식으로
탄생되는데 이때에도 진해에 그 당시까지 있던 사실상의 사령부군악대가 주병력40 여명을
중심으로 서울로 이전하고 진해에는 교육단군악대로 30 여명이 남게 되며 군악대원 모집은
종전처럼 신병훈련소에서 연주경험자를 수시로 선발해서 구성하게 되었다.
이러다 보니 연주능력면에서 질적인 향상을 도모하기 힘들어 사령부 군악대장으로 새로
부임한 안진영 대위는 상부에 건의해 전국적으로 군악대원모집을 홍보하고 오디션을 통해
군악1기(1957.10.) 68명과 군악2기(1958.06.) 72명을 서울 현지입대케 하여 사령부군악대
자체에서 해병기초훈련과 군악교육을 수료후 전원 하사관(부사관)으로 임명하고 4개 군악대
로 배치하여 각 군악대의 발전을 꾀하였다.
이 시기에 진해에 있는 교육단군악대는 군악대원 수급이 원만치 않게 되자 자체적으로
전국에 군악대원 모집 홍보를 하고 오디션을 통해 군악대원 25명을 선발하여 진해 현지입대
형식으로 교육단군악대 자체에서 3개월간 보병기초훈련과 군악제식교육을 실시했으며 1주에
1일은 교육단에 들어가 신병교육을 보충하는 형식으로 교육을 이수한 후 포항의 제1사단에
약간 명을 배정하고 20 여명은 진해에서 복무케 하였다. 이 깃수가 신병76기(1957.12.)이며
1년후에는 약간 명을 제외한 전원이 하사관학교에 입교하게 된다.
1959년4월에는 군악3기생을 뽑게 되는데 전과 마찬가지로 사령부에서 현지입대하여 같은
내용의 교육을 이수하고 전원 兵으로 임명되었다.
1961년에는 군악1기,2기,3기생들과 그 이전 하사관들의 예편과 또 고적대 창단관계로 많은
군악대원이 필요하므로 4월(군악4기)6월(군악5기) 8월(군악6기)에 2개월 간격으로 3개 깃수에
걸쳐 100 여 명을 모집하게 되는데 이들은 모두 진해신병훈련소에서 12주교육을 수료 후
전원 兵으로 임명받은 후 각 군악대로 배치되었다.
이 이후에는 군악7기생만이 서울 현지입대하여 사령부군악대 자체에서 3개월간 신병기초
훈련과 군악교육을 마친후 각 군악대로 배치되었고 그 이후부터 군악26기까지는 신병훈련소
에서 8주간 기초훈련 수료후 상남의 전투훈련소를 가는 대신 사령부군악대에서 4주간 군악
교육을 받고 각 군악대로 배치되었다.
군악대원 모집은 매년 일정 기간에 행해지는것이 아니라 군악대원 전역 관계로 결원이 생겨
어느 정도 모집할 인원이 될때에 맞춰 모집하게 되므로 깃수간의 간격은 일정하지가 않았다.
군악대원 모집 방법은
1.전국적으로 군악병 모집 공고를 내고 연주경력자를 선발하는 방법 (군악 깃수에 해당)
2.신병교육 도중 군악병 지원에 의해 연주능력 또는 가능성을 인정 받아 선발되는 경우
3.신병교육후 자대배치 받고 부대 복무중 같은 사단내 군악대에서 연주능력이 인정되어
군악대로 부서 이동하는 경우.
(아래사진은 1952년3월 1일 임시막사로 쓰던 해군사병구락부앞에서)
<대장:한상기 대위> [자료제공:창설기 복기호]
(5) 초창기의 군악대 활동과
의장대(Cremonical Guard)의 창설
한상기대장 부임후 전대원들 각고의 노력으로 점차 음악의 기초와 실력이 쌓여 드디어
1952년4월10일 진해 해양극장에서 해병대 창설 3주년을 기념하는 첫 군악연주회를 갖게
되었다. 그 이후로 전대원이 자신을 갖고 연주활동을 했으며 1952년 9월에는 서해의
백령도와 지금은 북한땅인 석도등을 방문, 절해의 고도를 지키는 해병들의 사기를 고무
시켰다. 1953년 가을에는 서울,대전,대구,부산등지에서 수도탈환 3주년을 기념하는 순회
연주를 개최하여 해병대군악대의 존재를 대외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아래 사진은 1952.04.10.해병대창설3주년기념연주후 진해 해양극장에서)
<대장:한상기대위> [자료제공:창설기 복기호]
1953년12월10일에는 해병대의장대(실지로는 제1상륙사단 의장대-1955.01.15.사단창설)
가 창설되었다. 의장대 초기에는 군악대연주와 함께 하는것이 아니었고 의장대 자체에서
구령을 붙여가며 동작을 했었는데 당시 금촌주둔의 제1사단군악대 선임하사관인 복기호
일등병조(중사)가 의장대장과 의논하여 의장대원들의 동작 하나하나를 체크해서 의장대쇼의
반주음악을 편곡하여 의장대시범을 한 결과 동작과 음악이 딱딱 맞아 떨어져 더욱 절도있게
보이고 아슬아슬한 묘기까지 연출되니 대단히 호응이 좋아 인근 미군에게도 소문이 나면서
의정부에 있던 미육군제1군단(I Corp)의 1956년 창설기념일에 초청을 받아 가게 되었다.
여기에 참석했던 이승만대통령 앞에서 군악대와 의장대가 쇼를 했는데 그날의 감동이
해병대군악대와 의장대의 명성을 널리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하겠다. 특히 의장대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의장대쇼를 실시했고 M-1소총에 대검을 꽂고 곡예같은 아슬아슬한
묘기를 연출하여 해병대의장대는 국내는 물론, 동남아 최고라는 찬사를 받으며 지금도
전통적으로 그 명예를 유지하고있다.
이 시절 해병대군악대와 의장대의 복장은 몇가지 있었지만 그중에도 해병대특유의 세련된
작업복에 생전 처음 보는 얼룩무늬 철모,빨간 바탕에 노란글씨의 명찰,오른쪽 허리에는
빨간 악보가방,검게 탄 얼굴에 거칠게 보이는 외형이 육,해,공군과는 차별화 된 느낌이 들어
그 당시 시민들에게는 대단히 강인하고 믿음직스럽게 보여 한때 장안의 화제꺼리가 되기도
했었다.
(아래사진은 1956년 의정부 미1군단창설기념일에 의장대시범장면 <이승만대통령 참관>
[자료제공"창설기 복기호]
(아래사진은 1956.09. 의정부 미1군단창설기념식 참석후의 이승만대통령 일행
[자료제공:창설기 복기호]
1955년 2월15일에는 서울특별시 후원으로 명동의 시공관에서 미 해병대 제1사단의 환송
연주회를 우리 해병대1사단군악대와 미 해병1사단군악대가 합동으로 가졌다.
또 1956년 봄에도 창경궁에서 우리 해병대사령부군악대와 미해병대군악대가 합동연주를
개최하므로서 혈맹의 의를 더욱 깊게 하였다. 1958년에는 공보처(현 문화관광부)주관으로
동남아순회 문화예술사절단에 참가하여 KBS교향악단등과 함께 해병대의장대와 군악대가
해군함정으로 각국을 돌며 순회공연을 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아래사진은 1955.02.15.한미해병대 제1사단군악대가 합동연주 장면 <명동소재 시공관>
[자료제공:창설기 복기호]
(6) 해병대에 4개 군악대
{사령부군악대,진해교육단군악대,제1사단(포항)군악대,제1여단(김포)군악대}
(A) 사령부군악대:
1951년 진해에서 창설된 군악대가 사실상 사령부소속 군악대이지만 실지로는 부산에 있는
사령부로 가지않고 진해교육단에서 활동을 했다. 1956년6월30일 사령부가 서울 용산구후암동
신청사로 이전할 때, 그보다 앞서 3월26일 진해에서 차출된 군악대 주병력 40여명을 주축으로
서울용산구한남동 막사로 이전하여 한상기소령을 사령부군악대장,김형섭일등병조를 선임
하사관으로 하여 명실상부한 사령부군악대가 출발되었다. 1957년10월 한상기 대장이 예편
되면서 육군에서 안진영대위를 전환입대케 해 사령부군악대장으로 임명하게 된다. 안진영
대장은 당시 사령부군악대의 연주능력 향상 방안으로 전국적으로 군악대원을 모집 홍보를 하고
오디션을 통해 군악대원을 선발하는등 군악깃수 제도를 확립하여 군악1기.2기를 8개월 차이로
모집하여 전원 하사관 복무를 하도록 하고 연주력 향상 작전에 돌입, 타군 군악대보다 우수
하다는 평을 들었었다. 안진영대장은 건강이 너무 안 좋아 1962년 예편함에 따라 보좌관
윤동균중위가 사령부군악대장을 맡았고, 1965년 김영방대위가 이어 받아 활동하다가
1973년 10월10일 사령부 해체와 더불어 예편하게 되며 사령부군악대도 기약없이 해체되는
비운을 맞는다.
(대장= 한상기소령-안진영대위-윤동균대위[해간29기]-김영방소령[해간29기])
(선임하사관= 김형섭일조-양희문일조-복기호일조-한정진일조-김성태일조-배봉환상사
-김삼복상사)
( 아래사진은 1959년 사령부군악대 합주실에서 찍은 모습 <대장:안진영대위>
[자료제공:군악3기 이재창]
(B) 진해교육단군악대:
1951년 진해에서 창설된 군악대가 교육단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사령부가 부산에서 서울로
이전하면서 교육단군악대가 명실공히 진해교육단군악대로 거듭 나면서 1956년3월26일
정삼윤중위를 군악대장으로, 조동순 이등병조(하사)를 선임하사관으로 출발하게 되었다.
1957년12월에는 사령부에서 모집 선발된 군악1기의 배정이 부족하여 진해에서는 전국적으로
군악병모집공고를 내고 25명을 선발하여 진해군악대로 현지입대토록 하여 군악대 자체에서
12주간 기초훈련과 군악교육을 이수케 하여 20 여명이 진해에 남아 복무토록 함으로서 군악대원
40 여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깃수가 신병76기인데 이중에는 국내 최고의 재즈 트럼펫주자인
강대관님이 속해 있어 군악대에서 스윙밴드음악을 하면 그의 즉흥연주로 인해 타 군악대가
대단히 부러워했다고 한다.
또 한가지는 1961년8월에 입대한 군악6기중에는 5.16혁명 직후 병역기피자 단속이 심해지자
당시 최고의 인기를 자랑하던 미8군쇼의 악단 중견멤버(대부분 20대중후반)들이 대거 지원해
진해훈련소에서 훈련을 받던 도중 진해군악대에 파견근무를 나오게 된것이다. 5.16혁명 직후
행사도 평소보다 많아졌고 전역 대상자도 많아서 파견을 나왔지만 시민을 위한 행사때는 타군
군악대보다 훨씬 뛰어난 프로급 베스트 멤버로 스윙빅밴드를 조직해서 연주함으로서 해병대
군악대의 위상이 아주 높아지기도 했다.
진해교육단군악대는1959년2월5일 진해기지사령부로 승격하면서 진해기지사령부군악대로
부대명이 변경됬으며 1967년에는 해병교육기지사령부군악대로 또 변경되었다.
(대장= 정삼윤중위-김명조준위-인석환준위-김영방중위-박종원중위)
(선임하사관= 조동순이조-김성태이조-고중갑상사-정병한상사 )
(아래사진은 1961년10월1일 국군의날 부산시가행진-영도다리 부근-진해기지군악대
<대장:인석환 준위 행진지휘:고중갑 중사> [자료제공: 군악5기 서봉석]
(C) 제1사단군악대(금촌-포항):
진해에 1개 군악대만 있다가 휴전(1953.07.27.) 직후인 1954년2월1일 금촌에 있던 해병
제1전투단이 해병제1임시여단으로 승격되면서 제1임시여단군악대가 창설되게 되는데 당시
진해에서 30 여명을 차출하여 대장에는 군악대 창설자인 이관승대위(후에 인석환준위)를
선임하사관에는 복기호이등병조가 맡아 출발하였다. 1955년1월15일 해병제1여단이 해병
제1상륙사단으로 승격함에 따라 제1상륙사단군악대로 부대명이 다시 변경되었다. 사령부
군악대가 진해에서 서울로 옮기게되는 1956년6월 이전까지는 금촌이 서울과 가까운 관계로
서울과 인근지역의 행사는 제1사단군악대에서 맡아서 사실상 해병대를 대표하는 군악대의
역할을 했었다. 1959년3월12일 금촌에 있던 상륙사단이 포항으로 이동하고 본격적인 포항의
제1상륙사단군악대로 재발족되면서 대장에 정삼윤대위, 선임하사관에 한정진일등병조가
담당하여 출발하게 된다.
(대장= 이관승대위-인석환준위-정삼윤대위 -곽진용대위-조인원대위- )
(선임하사관= 복기호이조-한정진일조-유치준이조- 박노천 )
(아래사진은 1956년 사단군악대-금촌<대장:이관승중위, 선임하사관: 복기호일등병조>
[자료제공:창설기 복기호]
(D) 제2여단군악대(김포):
1959년3월12일 금촌에 있던 해병제1상륙사단이 포항으로 이동함에 따라 김포에 해병
제1임시여단이 창설되면서 제1여단군악대가 발족하게 된다. 대장에는 금촌의 제1사단 군악
대장으로 있던 인석환준위가, 선임하사관에는 김삼복일등병조가 임명되었다. 제1여단군악대는
1970년 해체되었다.
(대장= 인석환준위-문병일준위-윤동균소위-김영방소위-인석환준위-백대웅소위)
(선임하사관=김삼복일조-김성태일조-이동석중사)
(7) 사령부군악대장 안진영 대위 육군에서 전환입대
1957년10월 사령부군악대장 한상기 중령이 예편한 후, 해병대내에서는 군악장교를 육성
하지 않은 관계로 마땅한 후임이 없었다. 황기오 육군대령(군악2기 황기선 하사의 친형
으로 육군본부군악대 창설의 주역)의 주선으로 당시 육군군악대의 트럼펫 주자였고 육군
상사에서 장교로 특진한 음악능력이 탁월한 안진영 육군중위를 전환입대후 해병대위로
진급시켜 군악대장에 임명했다. 안진영 대장의 뛰어난 음악성으로 인해 해병대군악대가
연주면에서 이시절이 가장 발전적이었고 군악대원 개개인의 능력도 대단히 향상 되었다고
하겠다. 특히 사령부에서도 안진영대장의 건의를 받아들여 군악병을 군악대 자체에서
모집하고 사령부군악대내에서 기초훈련과 군악교육을 자체교육하도록 배려했다.
군악1기(1957년10월 입대) 군악2기(1958년6월 입대)는 교육후 하사관으로 임명되었고
군악3기(1959년4월 입대-신병92기)부터는 계속 교육후 병으로 복무하게 되었다.
(1962년 봄- 가운데의 안진영대장과 왼쪽의 보좌관윤동균소위,대원들
<사령부군악대 뒷산에서> [자료제공:군악3기 이재창]
정리중
나가자 해병대가 (신영철 작사, 김형래/이병걸 작곡)
1) 우리들은 대한의 바다의 용사 충무공 순국정신 가슴에 안고
태극기 휘날리며 국토 통일에 힘차게 진군하는 단군의 자손
나가자 서북으로 푸른 바다로 조국건설 위하여 대한 해병대
2) 창파를 헤치며 무쌍의 청룡 험산을 달리는 무적의 맹호
바람아 불면 불라 노도도 친다 천지를 진동하는 대한 해병혼
3) 백두산 봉우리 폭풍이 불고 태평양 검은 구름 굽이치어도
우리의 젊은 피가 약동하는 곳 원한의 삼팔선도 부서지리라
첫댓글 맨아래동정복사진은군악1기부터6기까지연주대사진입니다.
대장대위안진영보좌관소위윤동균선임하사병조장김성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