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21 : 朝明연합군의 평양성 탈환과 이여송의 한성수복 실패
04.08.2
개전 첫해인 임진년(1592년)이 끝나가는 12월 말경, 전라도 감사 겸 순찰사인 권율은 휘하 병사(兵使) 선거이, 소모사 변이중, 조방장 조경, 의병장 임희진, 변사정, 의승군장 처영등과 함께 정병 1만여 명을 거느리고 근왕을 위하여 북상하였다.
이 당시, 일본군은 6만여 명이 한성에 주둔해 있었고, 평양, 개성 등 주요 지역도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어서 의주에 있는 조정에 물자의 조달이 어려웠다.
또한 일본군의 주둔지역에서는 민가에 대한 일본군의 약탈이 심하여 백성들이 산 속으로 숨는 등, 경기 황해도 일대가 적에게 유린되고 있었다. 이에 전주에서 일본군의 전라도 진입을 저지하고 있던 권율은 한성 탈환을 위한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북상하였던 것이다.
권율은 용인전투에서 남도 근왕군 5만여 명이 궤멸된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 한성까지 곧 바로 진격하지 않고 수원의 독성산성으로 들어가 지키기로 했다. 이 때 한성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총대장 우키다는 권율 군이 독성산성에 주둔하고 있으면 한성의 후방 연락이 위협을 받을 뿐만 아니라, 관서, 관북으로의 보급 추진도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고 권율 군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우키다는 한성에서 2만여 병력을 차출하여 수원에서 오산, 관천, 용인 등지로 통하는 도로를 차단하고 독성산성을 공격하게 했다.
그러나 권율 군은 소수 병력으로 타격조를 편성하여 수시로 일본군의 측방을 교란했다.
권율군이 야간에 기습 공격과 매복작전으로 일본군의 작전을 방해하자 일본군은 적극적인 공격을 펴지 못하고 성 안으로 들어가는 물줄기를 막아 독성산성을 고립시키려 했다.
권율 군은 야간에 제방을 막고 있던 일본군을 기습하여 급수원을 재개시켰다.
이 때 전라도 도사 최쳘견이 의병을 모집하여 권율을 지원하러 올라오는 등 증원군이 속속 산성으로 투입되는 것을 본 일본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한성으로 철수하였다.
수일간의 전투에서 농락만 당한 일본군은 추운 겨울 날씨에 더 이상 지구전을 수행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한성 이남의 경기 지역은 일본군의 활동이 제약받게 되었으며, 경기 일원이 수복되어 갔다.
한편 북쪽에서는 명의 대군이 압록강을 넘어 평양 북방에 집결하는 한편, 전국 각지에서 조선의 관군과 의병이 일본군을 압박하는 가운데, 길고 길었던 임진년이 저물고 두번째 해인 계사년(1593년)이 밝아왔다.
명나라는 1차로 파견했던 조승훈이 평양성 전투에서 패배하고 요동으로 철수한 이래 즉시 재 출병을 할 필요성을 절감했으나 재출병을 실천에 옮기는 데에 상당한 시일이 경과했다.
당시 명은 부총병 발배가 영하에서 일으킨 반란 때문에 조선에 대규모 병력을 신속히 파견할 수 없었다.
파병이 지연되자, 명은 일단 8월에 유격장군(遊擊將軍) 심유경을 조선에 급파하여 동정군(東征軍)이 조선에 출병할 때까지 외교적 교섭을 통해 일본군의 북진을 지연시키며 시간을 벌고자 하였다.
심유경은 조선에 도착한 후 평양에 주둔하고 있는 고니시와의 회담을 성사시켜 9월 1일부터 50일 기한부로 잠정적인 휴전을 성립시켰다.
그 동안 명에서는 반란이 평정되었고, 조선에 출병할 동정군을 편성하여 병부우시랑 송응창을 동정군의 경략(經略)으로 삼아 군사행정을 관장하도록하고, 제독(提督) 이요송을 도독군무(都督軍務)로 삼아 작전을 지휘하도록 하였다.
명은 12월 8일에 4만여 명의 동정군을 삼군(三軍)으로 편성하고, 그 지휘부를 정하였다.
도독군무(都督軍務) 제 독 이여송
중협대장(中挾大將) 부총병관(副摠兵官) 이여백, 좌협대장(左挾大將) 부총병관(副摠兵官) 양 원, 우협대장(右挾大將) 부총병관(副摠兵官) 장세작
명의 동정군은 부총병 왕필적을 선봉장으로 삼아 보병 1천 명을 거느리고 조선으로 진군하도록 하였다.
12월 13일에 왕필적 선봉부대가 압록강을 도하한 데에 이어서 그 이튿날인 14일에는 부총병 오유충이 병력 1천 5백명을 이끌고 강을 건넜다.
12월 25일 동정군의 총대장인 제독 이여송은 그들의 군세가 10만이라고 허장성세하면서 압록강을 건너 의주 용만관으로 진출하였다.
1593년 1월 6일 명의 동정군 총대장 이여송은 평양성 근교까지 진군하여 성을 공격하기 위한 최종적인 태세를 갖추었다.
동정군이 평양성 공격을 준비하자, 조선에서도 5일 평양성 공격에 따른 선후책과 균량 확보 대책을 의논하였다.
조선군 도원수 김명원은 우 방어사 김응서, 좌 방어서 정희현으로 하여금 8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평양성 공격에 참전케 하였고,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總攝) 서산대사 유정의 7백 명을 비롯한 총 2천 2백명의 의승군이 명군과 함께 전투에 참가할 준비를 하였다.
한편 고니시는 명군 대병력이 평양성을 공격한다는 사실을 알고 황해도 봉산에 주둔중인 오토모 요시무네(大友吉統)에게 병력 증원을 긴급히 요청했다.
그러나 6,000여 병력을 가지고 있던 오토모는 고니시의 요청에 응하지 않고 한성 방면으로 철수하였다. 증원군이 오지 않자 일본군은 사기가 저하되었다.
평양성을 버리고 철수하자는 주장도 있었으나 고니시는 평양성 사수를 결의했다.
1월 6일 동정군은 평양성 공격을 개시했다.
일본군은 성 밖에 녹각책자(鹿角冊子)를 설치하고 성벽에는 조총 사격을 위한 시설을 만들고, 온갖 장애물로 난공불락의 요새로 구축해 놓았다.
성의 북쪽 모란봉에는 일본군 2천여 조총병이 배치되어 있고, 봉우리 또한 높이 솟아 형세가 매우 험난하였다.
조명연합군은 평양성 서쪽 외성에서 공격을 실시하여 모란봉, 칠성문, 보통문을 공격하고, 이일, 김응서의 조선군은 함구문을 공격하도록 배치를 완료했다.
명군 부총병 오유충 군사와 조선 의승병 부대가 처음으로 공격해 들어 갔으나 거짓으로 패한 척 후퇴하자 일본군은 기세를 올리며 추격해 왔다.
그러자 후퇴하던 명군이 일제히 돌아서서 일본군을 포위하여 맹공을 가하여 서전을 승리로 장식했다.
조선군 8천 명이 성의 남쪽 함구문을 공격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접근하다가 일본군의 매복에 걸려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새벽 일본군 3천여 명이 명의 양 원, 이여백, 장세작 등의 진영 세 곳에 대한 야습을 감행하였으나, 명 군은 장수둘의 지휘에 따라 일본군의 기습을 물리쳤다.
7일 조명연합군은 본진을 보통문 앞으로 전진 배치하고 조선의 정희현과 김응서로 하여금 경 기병대를 이끌고 적을 유인하도록 하였으나 일본군은 속지 않았다.
조명연합군은 이틀간의 탐색전으로 일본군의 전력을 파악하고 총공세로 돌입했다.
8일 아침부터 성 주변 요소에 포 진지를 구축하고 각종 화포를 성문 부근에 방렬시켰다.
대장군포, 위원포, 자모포, 연주포, 불랑기포 등 명군의 대포가 일제히 성벽과 성문에 집중사격을 퍼부은 다음, 외성의 서남쪽 함구문은 명군 부총병 조승훈 군과 조선의 이일 김응서 군 8천 명이, 우협대장 장세작 군은 칠성문으로, 좌협대장 양 원 군은 보통문으로, 모란봉은 부총병 오유충 군과 조선 의승군장 유정의 승병 2,200 명이 공격에 나섰다.
쌍방간의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다. 유격 대장 오유충은 적이 쏜 탄환에 가슴을 맞으면서도 큰 소리로 병사들을 독려하며 전투를 하였고, 말을 타고 전투를 지휘하던 이여송 또한 타고 있던 말이 총탄을 맞아 쓰러지자 다른 말로 갈아타고 군사들을 독전하자 군사들의 사기가 크게 올랐다.
동정군과 조선군은 외성과 읍성을 점령하고 중성으로 돌입하여 일본군을 만수대와 을밀대 쪽으로 압박했다.
일본군은 풍월정 아래에 토굴을 파고 그 속에 들어가 숨은 후 조선 백성들을 방패로 내세우며 최후의 발버둥을 쳤다.
평양성 함락은 시간문제인 것처럼 보였다.
조명 연합군의 각종 화포와 일본군의 조총이 빗발치며 피아간의 사상자가 늘어갔다.
이날 피아간 사상자가 1만여 명에 달했고, 백병전 중에 목이 잘린 일본군이 1,264명이었다.
피이간의 사상자가 늘어나자 이여송은 여기에서 더 이상 공격하지 않고 병력을 성 밖으로 철수시켰다.
그리고는 고니시에게 서한을 보내 평양성에서 철군하도록 종용했다. 위기에 처한 고니시는 이여송으로부터 퇴로를 차단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이날 밤에 평양성에서 철수했다.
하지만 명군 참장 이령 군 3천 여 병력이 추격에 나서 358명을, 조선군에서도 추격에 나선 방어사 이시언이 60명, 황주 판관 정화가 120명의 일본군을 죽였다.
이리하여 고니시군에게 점령당했던 평양성은 7개월만인 1593년 1월 9일에 조명연합군에 의해 수복되었다.
평양성을 빼앗긴 일본군은 봉산 -용천 - 배천을 경유하여 한성으로 철수하였으나 그 병력은 당초 18,700 명에서 6,600명으로 격감될 정도로 큰 타격을 입었다.
조명연합군의 평양성 공격으로 패퇴한 고니시 군은 개성에 주둔하고 있던 고바야가와 군과 함께 한성으로 들어갔다.
한성에 머물고 있던 우키다는 평안도, 황해도에서 철수한 병력과 기존의 한성 주둔 병력을 재편성하여 조명연합군을 한성 외각에서 저지할 계획을 세웠다.
평양성을 탈환한 이여송은 황주까지 남하하여 중협대장 이여백과 우협대장 장세작에게 일본군에 대한 추격을 명령하고 자신은 다시 평양으로 귀환했다.
그러나 이여백과 장세작군은 평양에서 겨우 4백여 리밖에 안 떨어진 개성까지 무려 9일이라는 시간을 소요하면서 완면한 속도로 남진을 하였다.
이에 조선측에서 명군측에 적극적인 추격작전을 전개해 줄 것을 강력히 요청하자, 이요송은 1월
18일에 좌협대장 양원과 함께 조선군 기병 3천 명을 거느리고 평양에서 재차 남하를 개시했다.
황주로부터 조명연합군의 선두부대가 남진해 오고 있던 중협대장 이여백은 19일에야 개성에 입성하여 선봉장인 부총병 사대수와 경기방어사 고언백을 한성 방면으로 보내 적정을 탐지하면서 남진을 지연시켰다.
1월 25일 이여송이 지휘하는 명의 본군과 조선 기병 3천 기가 개성에 당도했다.
이여송은 여기에서 친위병 3천기와 부총병 손수염, 조승훈, 참장 이녕의 기병을 거느리고 임진강을 도하하여 오산(한성 북쪽 80리)에 포진했다.
얼었던 길이 녹아 기병의 기동이 용이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린 것이다.
27일 일본군 수색대의 활동으로 이같은 명군의 동향이 서울에 보고되고 곧 고바야카와 타카가게를 선봉장으로 한 일본군 주력 2만여 명을 임진강 쪽으로 급히 전진시켰다.
3천 명을 거느리 다치바나 무네토라가 제 1대로 선두에 섰고, 8천 명을 거느린 타케가게가 제 2대로 뒤따랐으며, 고바야카와 히데케아네의 제 3대가 5천명, 키카와 히로이에의 제 4대가 4천명을 이끌고 후미를 받쳤다.
구로다 나가마사의 제 5대 5천 명, 이시다 미쓰나리의 제 6대가 5천 명, 가토 미쯔야스의 제 7대가 3천명, 우키다 히데이에의 제 8대 8천명, 모두 2만 1천 명으로 us성된 본군은 총사령관 히데이에 지휘하여 한성에서 출동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고바야가와는 25일 여석령(한성 서북쪽 30리 지점)으로 전진하여 조명연합군과 접전을 벌일 태세를 갖추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27일 아침 사대수와 경기 방아서 고언백의 기병 3천여 기가 여석령에 포진하고 있던 고바야가와 군 제 1대인 다치바나(立花銃虎) 군의 방어진을 공격하였다.
그런데 조명 연합군의 기병은 지형이 협소하고 땅이 질어서 제대로 기동을 못하고 고전하였다.
마침 망객현 부근에서 이녕 군 7천 명이 증원됨으로써 겨우 열세를 만회했다.
이렇게 접전이 계속되는 동안 오산에 있던 이여송은 일본군을 쉽게 격멸할 수 있을 것으로 자만하고 호위 기병 수십 기와 부장 몇 명을 거느리고 벽제관을 지나 격전장으로 달려 갔다.
그러나 이여송은 망객현을 지나 주막리 일대에서 고바야가와군의 기습을 받아 일거에 궤멸되고 말았다.
이여송은 간신히 포위망을 탈출하여 파주로 퇴각했다.
한편 여석령에서는 고바야가와 군과 조명 연합군과의 접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동안 우키다의 본대는 주말리 서쪽으로 우회하여 조명연합군의 우측방을 공격하기로 했다. 이에 동정군 좌협대장 양원이 대형을 회전하여 이에 대항했다.
날이 저물자 일본군은 철수하기 시작했다. 조명연합군도 더 이상 일본군을 추격하지 못하고 파주로 철수했다.
이리하여 한성탈환을 경솔하게 생각했던 이여송은 일본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위축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