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몽골의 침입-8 : 홍복원의 반란과 강도 건설
04.09.25
살리타이의 허망한 죽음으로 몽골의 2차 침략은 무산된다. 그러나 몽골군은 물러갔지만 나라는 더욱 혼란에 빠졌다. 1233년 5월, 경주와 영천에 농민 반란이 일어나 관군과 전투를 벌였는데 서로 죽인 시체가 수십 리에 가득찼다.
또, 1233년 5월 서경에서 낭장 홍복원과 필현보가 반란을 일으켰다. 둘은 서경에 파견된 선유사 두 명을 죽이고 성을 빼앗아 몽골에 귀부한다고 선언했다. 여기에 많은 서경의 백성들이 동조했다. 몽골의 대대적인 재침이 있을 거라는 소문을 듣고 배반한 것이다.
앞서 최이가 다루가치를 제거하려 했을 때 서경의 백성들이 반대한 것에서 드러났듯이, 서경에는 진작부터 몽골과의 화친을 바라는 사람이 많았다. 두 차례의 몽골 침략을 받아 그 피해를 고스란히 입은 사람들로서는 전쟁이 계속 된다는 것은 참기 어려운 고통이었을 것이다.
이 소식을 접한 최이는 1233년 12월, 자신의 가병 3천여 명을 보내 서북면 병마사 민회와 함께 서경을 진압하도록 했다. 두 번의 몽골군 내습에서도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던 자신의 가병을 파견한 것을 보면 사태가 심각했던 모양이다.
이때 홍복원은 몽골로 도망치고, 필현보는 사로잡혀 강화로 압송되어 심한 고문을 받고 허리를 잘려 죽는 요참형에 처해진다. 그런데 그는 죽임을 당하면서 자신들의 반란에 조숙창도 가담했다고 무고를 한다. 결국 최이는 1234년 3월, 강화의 저잣거리에서 조숙창에게 참수형을 내린다.
조숙창은 몽골에 항복한 장수이지만, 필현보처럼 반란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그는 몽골과의 화친을 주장하는 쪽이었다.
헌데 최이가 조숙창을 죽인 것은, 반란을 일으켜 몽골에 넘어가려한 필현보나 화친을 주장한 조숙창이나 몽골의 편을 들었다는 점에서 다를 게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조숙창의 참수는 형식적이나마 유지되어온 몽골과의 화친이 깨졌음을 선언한 것이니, 최이로서는 몽골과 결사전을 벌이겠다는 전쟁 선포를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홍복원은 아들 홍다구를 데리고 몽골로 도망쳤는데, 이때 남은 가족인 홍복원의 아버지 홍대순과 홍복원의 동생 홍백수, 그리고 처자들도 최이의 병사에게 모조리 사로잡혀 해도로 귀양을 보내졌다.
이 일로 홍복원과 홍다구는 서릿발 같은 원한을 품었고 뒷날 고려는 이 두 부자로 인해 참혹한 전화를 입게 된다.
몽골 대칸 오고타이는 일단 고려 문제는 보류하고 만주의 동진과 황하 이남에서 간신히 명맥을 이어가고 있던 금나라를 공격했다. 동진국은 1233년 9월 오고타이칸의 장남 구유크가 수도 남경성을 함락시킴으로써 멸망했고, 금은 그보다 앞서 1233년 5월 수도인 변경(옛 북송의 수도인 개봉)이 함락되고 마침내 1234년 2월 마지막 황제 애종이 자살함으로써 역사속에서 사라졌다.
몽골이 금을 공격할 때, 그들에게 오랜 원한을 품고 있던 남송은 회하 이북의 영토를 되찾을 생각으로 5만의 군대를 보내 몽골의 금 공략을 도왔다. 그런데 금을 멸망시킨 몽골군이 변경에 소수의 몽골 분견대만을 남겨 두고 북방으로 철수하자 남송은 옛 땅을 회복할 기회라고 여겨 변경을 공격했다.
오고타이칸은 1235년 열린 쿠릴타이에서 몽골 제국은 남송의 정복을 결정하였고 그와 동시에 유럽과 고려 원정을 단행한다.
이렇게 나라 밖의 외부 사정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을 무렵, 최이는 강화도 방비에 만전을 기울이고 있었다. 우선 강화도 도성에 내성, 중성, 외성의 3중성을 쌓았고 최씨 정권의 사병과 삼별초 등 수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 무려 1천 척의 함대로 강화 주변 해역을 방어했다.
섬 주변에는 제방을 쌓아 행여나 있을 지 모르는 몽골군의 상륙에 대비했고 (나중에 여몽연합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일본에서도 해안에 이런 제방을 쌓았죠) 강화도를 요새화하면서 본토에 남아 있던 백성들에게 산성이나 섬으로 들어가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 명령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강화도의 여러 기간시설은 옛 수도인 개경을 그대로 모방하여 건설했다. 강도 조영사업의 근간은 1232년 6월 천도가 시작되면서부터, 1235년 하반기 몽골의 3차 침략이 시작되기 전까지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불과 3년 만에 강화도는 왕도로서의 모습을 대강이나마 갖추게 되었다. 섬 안의 벽지에 하나의 도시, 그것도 수도를 대체할 규모의 대도시를 새로 만드는 일이었으니 그야말로 천지개벽이 따로 없었다. 오늘날처럼 기계화된 중장비가 동원되어도 쉽지 않은 일이었을텐데 말이다.
이처럼 신속하게 새 수도를 건설한 것은 최이가 인력과 자금을 아끼지 않고 집중적으로 투자한 결과였다. 이 공사의 주역은 전국 각 지방의 장정들과 상비군이었다. 게다가 최이는 자신의 사병과 사재도 아낌없이 강도 건설에 쏟아부었다. 이것은 최이와 같은 강력한 통치자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강도가 새로운 왕도로서 자리를 잡아가면서 최이의 권력은 절정에 이른다. 가히 최씨 왕조의 전성기라 부를 만했다. 최씨 가문을 하나의 왕조에 비교하자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