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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부(妻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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順興 安氏 監察公 6代 靈苑 사적지
순흥 안씨 소절종중회와 논산시종친회는 선조들의 훌륭한 업적을 계승하고 후손들에게 물려주고자
감찰공 6대 영원 사적지를 조성했다.
사패지(賜牌地-賜田 또는 別賜田이라고 하는데 국가나 왕실에서 공을 세운 신하에게 왕이 특별히 하사하는 토지)성역화 사업
으로 만들어진 <순흥 안씨 감찰공 6대 영원 사적지>에 다녀오다.
안치화(安致和)-소절공(昭節公)의 생애
1542(중종 37)~1592(선조 26)
임진란 때 용인전투에서 순절
본래는 문신, 자는 正淑, 호는 誠齊, 시호는 昭節, 본관은 順興
고려말 안향의 14세손, 이조판서 好義의 둘째 아들
충남 논산시 連山에서 출생
어려서부터 성품이 단정하고 의리가 강하고 학문을 즐김
1576년 사마시에 급제
아산, 정산, 석성의 현감을 지내며 미신 타도에 힘쓰고
학교를 부흥시켜 칭송을 받음
1592년 석성 현감으로 있을 때 임진란이 일어나자
충청병사의 휘하에 들어가 의병 규합, 관군을 정비하여 공을 세웠으나
용인전투에서 중과부적으로 적에게 사로 잡히게 되자 목숨을 끊어 순절.
조정에서는 소절공을 충신으로 정려하여 정문(旌門)을 세우게 하고,
국가에 예장으로 모셔진 묘소가 있는
현 당진시 송악읍 기지시리 반촌리 일대의 땅을 사패지로 하사해 수호하게 함
그의 묘소 아래에 장자 안홍복의 묘가 있었으나 원주시(문막)으로 이장
소절공(昭節公) 안공 치화(安公 致和)
우리나라가 도적의 침략을 입은 것이 임진왜란[壬訌]보다 더 참혹함이 없었다. 가리를 타서 흉악한 왜적이 우리 국토를 침략하야 팔도가 거의 산 무너지듯 하고 백성들이 장차 남아나지 못 할 뻔 하다가, 적의 괴수가 낯을 돌리고 험한 풍진이 다시 개인 것이, 어찌 명(明)나라의 두 차례구원 때문이라고만 할 수 있겠는가
실상은 곧은 신하 굳센 선비들이 갑옷을 띠고 나라를 방어하고 위태함을 무릅쓰고 인군을 보호하였으니, 그 늠름한 의리와 열렬한 충성은 가히 왜놈을 굴복시키고 하늘의 도움을 부른 까닭이다.
당일에 의리에 죽으면서 절개를 세운 사람을 역역히 세어보면 드러내어 칭송할 분이 손가락으로 다 꼽을 수 없었으나, 증 병조참판(贈兵曹恭判) 시호는 소절(昭節)인 안공 휘 치화, 자는 정숙(字正淑), 호는 성재(號誠齋)가 그 중에 한 분이다.
안씨는 선계가 순흥이라 고려 상호군(上護軍) 자미(子美)께서 비로소 가서(家?를 열어 3세에 와서 휘(諱) 향(珦)은 세상에서 회헌선생(晦軒先生)이라 칭하니, 도덕이 뛰어나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고 문순공 우기(文順公于器), 문숙공 목(文淑公牧), 문혜공 원숭(文惠公元崇), 경질공 원(景質公瑗)이 우뚝하게 서로 이어나서 가문이 우리나라에서 으뜸이었다.
조선조에 와서 휘 종례(從禮)는 감찰(監察)이니 공의 5세조(五世祖)이다. 치(緇), 처회(處會)는 다 감찰(監察)이요 관(琯)은 봉사(奉事)니 이분들이 공의 고조증조 및 조부이시고, 고(考)의 휘는 호의(好義)니 이조판서(吏曹判書)요, 남양홍씨길창(南陽洪氏吉昌)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중종 임인(中宗壬寅)에 공을 낳으니, 천성이 무리에 뛰어나 말이 적고 웃음이 드물어 동류들에게 많이 월등하다.
스승에게 나아가 과목을 쫓아 수업할새, 의리 지키는 데는 고기보다 더 즐기고 욕심을 두려워함은 홍수(洪水)나 맹수(猛獸)보다 더 겁내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함이 군진(君陣 주나라 명신)의 풍도가 있었다.
사마시(司馬試: 생원 및 진사, 지금의 고시)에 합격하여 아산 정산 석성(牙山定山石城) 현감을 역임할새, 가는 곳마다 백성을 편안히 하고 관리를 단속함이 각각 적절함을 얻으니 감당(甘棠 위정자를 찬양하는 시)의 칭송이 있었다.
임진년에 왜적이 전쟁할 의사로 뜻밖에 허점을 이용하여 쳐들어오니, 이때 온나라가 안일한 데 젖어 대비하는 일을 오랫동안 전혀 강론치 않았다가 일조(一朝)에 난을 당하니, 선조(宣祖)대왕은 서북으로 피란하고 백성들은 도망갈 겨를이 없는 중 공이 칼날 같은 뜻을 가다듬어 비룡같이 날뛰고 기린같이 떨쳐 고인(古人)의 강회(江淮)를 가로막던 일을 본받고자 하나, 힘은 모자라고 사태는 거창하여 마침내 몸은 떠났으나, 충절은 서있으니 아! 위대하도다. 사실이 주달됨에 그에 정려 세우기를 명령하고 증직 및 시호를 전례대로 하였다.
선영을 따라 당진 국사봉 남쪽 해좌사향에 안장하다. 배위는 증 정부인(贈貞夫人) 청주한씨(淸州韓氏)니 감찰 안세(安世)가 그 부친이다. 아름다운 부덕이 족히 공의 배위가 될 만하다.
묘는 합폄하였고 삼남을 낳았으니 홍복(弘福)은 주부(主簿)요, 홍록(弘祿)은 판관(判官)이요, 홍우(弘祐)는 생원(生員)이다. 손자 사과 충길(忠吉)과 무과급제 효길(孝吉)과 제길은 홍복의 소생이요, 참의를 지내고 이조판서에 증직된 신길(信吉)은 홍록의 소생이요, 대길(大吉)은 홍우의 소생이다.
대개 충절은 백세(百世)의 조종이요, 의리는 만인의 사모함이라. 그러므로 백세(百世)에 분발하고 만인에 뛰어나는 사람이 한두 명 나면 세대의 원근도 관계없이 인품의 고하도 차별 없이 다 우러러보고 사모하기를, 상서로운 기린과 봉이 세상에 나온 것 같이 하는데, 공은 능히 사람마다 사모하는 의리와 세상에서 우러러보는 충성을 세워 기린과 봉의 상서로움 같이 하였으니, 공은 가히 생전에 빛이 나고 사후에도 유감이 없다고 이를 만하다.
큰 나라 운수가 비색하여 흉악한 도적이 하늘을 거슬리니, 장하다! 우리 공이 장순의 담과 조고의 간(巡膽?肝)과 같이 충성으로 창을 삼고 의리로 노를 저어 마땅히 힘쓸 데 힘을 쓰고 그 나머지는 거슬려 보지 않았다. 미친 물결이 구렁이에 밀리니 한손으로 막기 어렵다. 기와의 온전함은 실로 부끄럽고 옥으로 부서짐이 오직마땅하다. 이제 칠적(七尺) 몸 버리기를 한 깃털같이 가벼이 여긴다. 실패도 오히려 성공이 될 수 있고 죽는 것도 또한 명예롭다. 그러므로 성주의 표상이 예나 이제나 찬란하게 나타난다. 위대한 절의는 인신(人臣)의 극진함이라. 우뚝한 저 국사봉에 정기가 어려있네. 한 날등 아늑한 곳이 만세(萬世)의 안영지라. 여러 자손이 정성을 쌓아 돌에다 공적을 새기니 천억 년 길이길이 꽃다운 이름 없어지지 않으리.
-순흥 안씨 대종회-
2007년 5월 소절공의 묘소를 이장할 때 고려자기, 직령, 액주름포 등의 유품이 발굴되었는데 이를 국립민속박물관에 무상 기증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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