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여 오라
-영화를 보았다
-구두수선소
미소여 오라
김혜령
출장을 보낸 적도
문을 잠근 적도 없는데
어이하여 그대는 오지 않나
무엇이 못마땅한지
눈꼬리 치켜올린 저 차돌멩이
꽁꽁 싸맨 속내
어린 시절 춥고 외로웠던 시골 동네
바위틈 패랭이꽃 찾던 소녀
어느 날 꽃 브로치 꿈을 꾸고
희망이 생겼을까
미소여
수줍은 칡꽃처럼 살포시 오라
노을빛 그윽한 눈동자로 오라
농익은 둥근 화관같이 오라
오
긴 세월 삭은 낙엽 묵은 찌끼로 막힌
수챗구멍에서도
둥근 해처럼 방긋 솟아올라라
미소 너는
언제든지 문을 벌컥 열고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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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았다
김혜령
복부 통증으로 응급실에 갔다 맞은 편에 내가 다니던 산책로 계단이 보였다 지독한 통증으로 마치 지하에서 지상을 보는 듯했다 응급실에 들어가 구석 침대에 누웠는데 간호사가 수액을 놓으며 혈액채취를 했다 팔목을 찌르는 따가운 바늘 나는 시험대에 섰다 아구같이 달려들며 심장을 요동치게 했던 그 날 그 번뇌들이 얼마나 잘 여과되어 붉게 흘렀는지 기다려 보아야 한다 심전도 모니터가 달린 침대 사이를 주황과 파랑의 조끼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닌다 머리에 붕대를 감은 중년의 남자가 피가 묻어 있는 시트 위에 누워 가쁜 숨을 쉬고 있다 큰 병원을 알아볼게요 저희 병원은 안되겠습니다 전화를 받고 달려온 아들이 누워 있는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다 가방을 멘 채 뒤돌아 서 있는 며느리 링거 줄을 타고 올라간 시선 첨탑이 아득하다 다음 스크린은 가운을 입고 수국꽃 찾아든 나비 사이로 잔잔히 흐르는 통화음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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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수선소
김혜령
김포 장기동 좁은 찻길을 지나면 구두수선소가 나온다 등을 구부려
쪽문을 열고 들어가면 투박한 표정으로 맞이하는 중년의 남자 맞은
편에서 신축공사가 한창일 때 없어질까 걱정했던 구두수선소 팔목
인대가 늘어난 만큼 근육을 키운 은행나무가 지붕 위로 가지를 뻗어
이중천장이 되었다 언젠가 은행잎과 붉은 낙엽이 구두수선소에 붙은
목재함 위에서 불꽃 튕기며 춤추고 있는 걸 보았지 하늘 한 폭이 쪼
그려 앉아 있는 동안 바늘을 들고 야무진 입술로 도시의 소음을 한 땀
한 땀 기우고 있는 그 나는 단단한 목질의 나무가 되어 나를 지그시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