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허망감에 대하여
그토록 가지고 싶어 했던 것을 막상 가지게 되었을 때 부조리한 것처럼 다가서는 허망에 대해 먼저 말해 보아야겠다. 우선 남녀간의 사랑에 대해 생각해 본다. 왜 그랬을까. 마음에 두었던 여자 앞에 서면 온 몸이 떨렸고, 헤어진 날 밤에는 몸살을 앓듯 밤새 뒤척거렸으며 마음의 헤아림과는 상관없이 멀리 떨어져 버렸을 때는 처절한 좌절감이 엄습했던 일.
그러고 보면 난 어떤 여자도 진정 사랑해 본 적이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채 익지도 않은 풋과일처럼 시퍼렇게 떨다가 떠나보면, 상대는 미처 내가 그녀를 생각한다는 어떤 눈짓도 제대로 줘보지 못한 채 사라져 버리는 것에서부터 설령 마음에 둔 상대를 만나거나 보았어도 제대로 다가가 보지도 못했던 바보같은 짝사랑들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와중에 속마음을 읽었다는듯 다리를 놓아준 관계조차 외면했다는 것 등.
내가 지독한 이기주의자였기 때문일까. 아니면 색한처럼 쾌락을 절대적으로 추구한 니힐리스트인가. 아니면 반대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어디선가 읽은 글귀처럼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되는 날에 인생의 모든 것은 끝이 나게 된다는 짧은 말을 악착같이 염두에 두고서 그만 물리치고 만 겁쟁이였기 때문일까.
그런데 따지고 보면 내가 바랬고 바랬던 상대가 내 주변에 없었던 것도 한 원인이기는 하다. 그리고 있었어도 세상의 일들은 그렇게 되도록 허락하지 않은 채 시종 여기저기로 내몰아 틈을 가지지도 못했던 것이다.
아니면 아예 내가 바라는 소설처럼 환상적인 사랑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고 나뿐만 아니라 또래 모두는 아예 포기나 체념했으리라는 생각도 들고, 좀 더 영리하거나 똑똑해서 사랑을 순수함 그 자체로 받아들이기 이전에 이미 세상을 알아버렸거나 종교에서 가르치는 진리에 압도되어 그렇게 했는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허망감도 어리석은 사람들, 생존경쟁에서 패배한 사람들이나 가지는 의식에 다름아닌 것은 아닐까. 매스컴을 훑어보고 역사적인 전례를 되는대로 뒤적거려 보지만 애틋한 사랑이 결실을 맺어 성공한 사례는 거의 없고 태반이 조작되거나 이별이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을 보면, 새삼 늦어 마흔 가까이에 남들은 벌써 고등학교 시절에 다 터득한 사랑학을 난 이제사 끄적거리는 것은 아닐까.
좀 더 약삭빠르게 세상을 보지 못한 죄가 죄의 충분한 조건이라면 난 함정과 같은 미로를 긴 시간동안 웃음거리나 되는 행동으로 시간을 낭비한 것 밖에 되지 못한다. 그리고 남들이 다하는 결혼을 하긴 하지만 내 방식에서는 결코 그것을 사랑을 쟁취하거나 획득했다고 느끼지 못하며, 그러나 주변에서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가지고 싶어하는 것을 가졌다고 추켜 세우는 억지에 몰려 쓴 사과를 먹은 듯한 허망감도 가지게 된다. 이렇게 길게 왔지만 결국 난 내가 원하는 것을 한 번도 얻지 못함으로서 처음에 제시했던 허망감의 의미 나누기에는 다소 실패한 것 같다.
대신 글쓰기를, 그토록 바랐던 것은 아니지만 동경의 대상이었던 글쓰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시인 행세를 한다는 점에서 얻기는 얻었다고 하겠는데 정작 내 손을 거쳐 나가는 작품이나 생각들이 내 인생 경험에 비추어도 그렇고, 완결된 내용들도 그렇고 모두 다 하나같이 꿈을 이루는 과정을 담아낼 뿐 어떤 명확한 길도 제시해 줄 수 없다는 점에서 허망감을 느끼는 것이다.
허긴 원하는 것을 얻었다고 이야기하는 자신 역시 그 꿈을 지켜가고 그럴듯하게 포장해야 하는 일들로 앞으로의 시간을 지탱해 가야하니 그야말로 허망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