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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 X- 파일 16 |
아리랑 아리랑 멀고먼 아리랑 일본 고대문명의 꽃을 우리는 아스카(飛鳥)라고 부른다. 세계사 책에도 나오고 국사책에도 나오니 들어보셨을 것이다. 야마토 문화시대 전에 성립하는 이 문화는 그 형식이나 특징이 그 후의 것과 상당히 달라서 일본의 근원을 밝혀줄 좋은 자료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런데 한자를 잘 보시라. 비조(飛鳥)라, 왜 아스카라고 부르는 한자를 비조라고 써놓았을까? 아스카의 아스는 “아사”와 같은 어원이므로 아침을 뜻한다. 멀게는 밝은 땅을 찾아간다는 우리 기마종족의 전통이 배어있는 이름이다. 그리스 사람들이 해뜨는 동쪽을 아시아라고 불렀던 것을 되새기면 이 이름의 연원은 억수로 깊다. 기마종족의 영역이 멀게는 소아시아와 핀란드에서 동쪽 만주까지 뻗쳤던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놀라운 언어의 보존이다. 그런데 왜 비조인가? 일본말로는 아무리 풀어도 절대 안나온다. 그런데 (여류)문학가 이영희씨가 간단하게 이 이두를 풀었다. 8세기 이전의 일본고대어는 거의 한반도 말이라는 힌트에서 줄줄줄 풀어가는 ‘노래하는 역사’라는 책에 보면, 비조를 순수하게 조선말로 옮기면 “나는 새”,“날새”다. 우리 말에 새벽이 오고 해뜨는 걸 뭐라고 하는가? “날 새-앴다”말이야. 그래서 아침을 “날새” 즉 “飛鳥”라고 이두로 쓴 것이다. 아스카, 비조, 날새, 아침, 정말 기가 막히는 추리다. 근데 사실이냐고? 이 정도 추리는 사실로 쳐준다. 단군의 도읍이 “아사달”이다. “아침의 땅”, “해뜨는 땅”, “아스카”다! 네번째 X파일에서 오리랑카라는 몽고부족이 오랑캐의 어원임을 알려드린 적이 있다. 그런데 스키타이의 이동흔적을 따라가면 비슷한 말이 마구 나타난다. 오리랑카 뿐만 아니라 오리, 아리가 붙은 말로는 소아시아를 뜻하는 “빛은 동방에서 부터”의 「오리엔트」, 이두문자로 받침을 떼고보면 그대로 아리가 되는 「압록」이나 나라이름으로 잘 쓰는 「낙랑」도 그렇다.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아리랑」에서 시작하는 단어는 멀리까지 가서 “우랄” “알”타이, “아리”안, “알라”신까지, 거대한 무엇을 가리키고 있다. 아시다시피 우랄산맥은 그리스 신화의 우라노스(제우스의 할아버지격)에서 비롯했다. 하기야 이집트의 “피라밋”은 누가 피라밋이라고 불렀는지 알수 없다. 일설에는 그리스어로 피르(PYRO, 불, 열)와 AMID(MESOS, 메소스-중심에서 비롯한 말)라고 하는데, “피르”야말로 “페르”, “불”, “펴라”, 우리말 부여, 평양이 아닌가. 이런 식으로 찾아가면 우리말의 원초적 단어인 “알”의 어원을 우랄 알타이뿐만 아니라 지중해까지 뻗치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 나는 아직도 “아리”의 정확한 본뜻을 모른다. 여러 가지 추정은 있지만 다 그럴싸할뿐 정확하지는 않다. 그런데 우리를 아연 실색하게 하는 흔적이 있어 지금까지 생각했던 모든 선입견을 버려야할 처지에
이르렀다. 독자 여러분은 그리스 신화를 잘 알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 신화는 사실 그리스인들이 아니고 그리스인들 이전에 살았던 선주민에 대한
기록이다. 그리스 신들의 근거지를 올림푸스라고 부르는데, 가만 보니 “올”자가 무척 닮았다. 너무 지나친 비약이라고? 그럴 수도
있다. 계속 가보자. 올림푸스가 어디었느냐는 추측에 대해 현재까지 서양학자들은 우랄산맥을 중심으로 한 지역이라고 추정한다. 발칸 반도의 그리스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다. 우리가 오랑캐를 뜻하는 글자로 쓰는 단어가 호(胡)자다. 글자를 잘 뜯어보면 옛날(古) 월(月)족이다. 오리, 아리, 올자를 한자로 옮기면 무어라 쓰겠는가? 당연히 ‘月’자다. 月氏국이라는 나라도 있었는데 배달국중에서 조선으로 적통을 잇는 곰족과 중원으로 들어가 은나라를 세우는 범족 이외에, 옛 배달국 근친후손들을 胡족이라고 불렀고 단군시대에 와서는 동호(東胡)라는 나라도 있었다. 동호라니? 동쪽으로 간 옛날 월씨족? 비약이 심하긴 하지만 올림푸스와 동호는 연결시킬 가능성이 많다. 기마종족의 영역을 생각하면 이건 상당히 가능한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신화의 하는 짓이 우리 고대설화와 엄청 많이 닮았다는 사실에서 이 가능성은 오로지 상상력의 문제일뿐 증명의 문제가 아니다. 여러분은 콩쥐팥쥐와 신데렐라가 왜 그렇게 닮았는지 생각해본 적이 없는가? 콩쥐팥쥐와 신데렐라는 인류사의 보편적인 흐름이라, 닮았대도 근원이 같다는 증명에는 부족하다. 그러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삼국유사의 경문왕 이야기와 귀가 길어져 당나귀처럼 되었다는 “미다스왕”의 그리스 신화를 놓고는 그런 이야기를 못하실 거다. 둘다 귀가 길다래진 임금님의 비밀을 참지 못해 발설한다는 이야기고, 둘다 고대문헌에 적혀있어서 현세에 지어내기 힘든 “증거”다. 정 인정하기 싫으시다면 “실크로드”를 통해 주고받은 이야기라고 해두자. 하기야 X파일 두번째 글에서 똥과 덩, 보리와 바리를 이야기 드린 적이 있지만, 차마 파리와 플라이, 모기와 모스키토가 닮았다는 이야기는 너무 우스개같아서 말씀드릴 수가 없었다. 상상력을 상실하면 “원/투/쓰리”와 “하나/둘/셋”이 너무 닮았다는 생각을 절대로 못한다. 아프가니스탄의 하나둘셋은? “약/두/세”다. 그리스어로는 “에나/디오/트리아”다. 이탈리아어로는 “우노/두에/트레”다. 신채호는 우리 고대민족의 하는 짓이 중국과 닮기보다는 오히려 터키나 그리스와 닮았다는 주장을 하는데,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우스개라도 이런 증거를 들어 우리 종족의 영역과 이동경로를 이야기하는 것이 상상력의 발전에는 매우 좋다. 역사란 어쩌면 상상력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과 희망을 재편집하고 거기에 미래를 얹는..., 각설하고, 아리랑과 아시아는 우리가 어디서 왔는가에 대한 지울 수 없는 증거다. 기억하시라 월씨족과 아리안과 오리엔트와 올림푸스를. 이 상상력의 비약이 마음에 안든다면 아시아라는 말을 쓴 사람이 그리스 사람들이고 그 말의 흔적을 일본말의 아사와 우리 말의 아침이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다는 사실만 기억하시라. 그러나 마음에 안드는 분을 설득하기 위해 나는 또 하나의 증거를 제시한다. 지중해는 사실 땅을 끼고 있는 내해(內海)에 가깝다. 지중해라는 말도 중앙을 뜻한다. 지중해 아래쪽 바다를 홍해라고 부르고 위쪽 바다를 흑해라고 부른다. 누가 이렇게 불렀는지 알 길이 없지만 하여튼 옛날부터 이렇게 불렀다. 그래서 영어로도 붉은 바다고 검은 바다다. 그런데 그 바다에 가보면 여전히 푸르다. 왜 붉어야했고 왜 검어야했을까? 모르는 여행자는 흑해가 정말 검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러면 홍해는 붉은가? 그렇다고 우겨도 하는 수 없지만, 음양오행에서 북방은 검은 색이다. 흑해! 남방은 붉은 색이다. 홍해! 한반도 서쪽바다를 내해로 삼던 우리 조상은 음양오행의 가운데(中) 색깔을 붙여 누런 바다“황해”라 불렀다. 북쪽은 검고 남쪽은 붉다는 생각, 지중해와 흑해와 홍해는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종족들이 붙인 이름이다. (동은 청색, 서는 백색이다)음양오행을 아직도 중국 거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X파일 첫번째 글부터 다시 읽어서 여기에 다다르시길 바란다. (중국거라면 “양음오행”이지 절대 “음양오행”이 아니다. 맛과 멋, 알과 얼, 모음의 점 하나로 완벽히 음양을 전환시킨다. 년놈vs남녀, 밤낮vs주야를 기억하시라, 농담.) 자, 지금부터는 모두가 박창규의 헛소리라고 생각하고 들으시라. 지중해 가운데 있는 섬, 크레타에는 신전과, 봉선을 위한 크노소스라는 제단이 있다. 그들이 섬기는 여신의 이름은 코레(kore)다. 가운데 바다의 한 가운데 있는 섬, 그곳에 제단을 쌓는다. 바로 강화도 마니(마리)산과 같은 형식이다. 옛 고구려의 뜻이 가우리이고 이는 가운데를 뜻한다. 구려, 구리라는 옛 조선족을 부르는 이름이기도 하다. 아스라한 아시아의 맨 서쪽에 살았던 사람들과 아스라한 아시아의 동쪽에 살았던 사람들... 올림포스, 고린도, 파르나소스 같은 이름들은 그리스 사람들이 붙인 것이 아니다. 한단고기에 나오는 옛글자의 이름이 무엇인가? 가림토(加臨土)이다. 단기고사에서는 이 가림토를 “산수가임다(刪修加臨多)”라고 부른다. 우리 말의 원리가 숨어있는 고대언어를 나는 “산스크리트”어로 알고있다. 진시왕과 알렉산더가 죄다 불태웠다는 “산스크리트(산수가임다)”어 문서... 크레타와 구다라, 듣고보면 비슷하지만 일본어에 백제를 “구다라”라고 부른다. (“별로다, 좋지 않다”라는 뜻의 일본말“구다라 나이”는 “백제에 없다”는 뜻이다) 크레타는 단순히 섬이름이 아니라 그 지역을 다스렸던 강력한 종족의 이름이다. 크게 솟은(크노소스,∀,소머리) 마리산, 크레타, 코레, 고구려, 구다라 이들은 지역과 역사를 떠나 죄다 한 화살로 쭉 꿰어들일 수 있는 하나의 연결, 상상력의 회오리지대이다. 더 묻지 마시라. 상상력 외에는 아무런 증거도 없다. 증빙이 없으니 X파일이다. 1987년 6월 “호헌철폐” 시위가 한창이던 그 무렵, 나는 길거리에서 시민들과 학생들이 함께 부를 수 있었던 두 가지 노래를 아직도 기억한다. 하나는 애국가였고 또 하나는 아리랑이었다. 둘다 장중한 슬픔을 지닌 노래였다. 왜 슬픔일까? 콱 막힌 세상과 콱 막힌 우리 시대에 콱막힌 주제를 놓고 뜨거운 여름을 지세던,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 그렇게 아픔이고 슬픔이던 시절에 우리는 아리랑을 불렀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그 오랜 세월을 불러온 노래, 이 촌스런 노래를 부르며 노을이 넘어간다... 아무리 무너지고 찢어져도 잊지않고 기억하는 우리 고향의 언어 아리랑. 멀리 왔다, 아스카(飛鳥)와 (소)아시아에서 출발한 우리의 여정은 이렇게 지중해와 아사달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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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 X- 파일 17 |
문명의 공간터널 우리 종족의 연원을 따져보기로 작정한 첫 파일부터 지금까지, 사실 필자는 잘 모르는 것도 아는 척하며 논리의 비약을 시도했다. 필자로서는 사실의 중요함보다 발상법을 전환하고 멸절된 상상력을 회복하도록 독자여러분을 도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증명”이나 “증거”의 문제에는 연연하지 않았다. 어차피 왠만한 독자가 아니면 반론을 위해 끌어댈 증거라고는 교과서밖에 없을테니, 이 주류이론을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근거 정도는 사방에 깔려있다. 그 때문에 설을 풀면서도 염려는 안했다. 이제부터는 정말 상상력의 뚜껑을 열어놓은 채, 훌쩍 뛰어넘어 볼 생각이다. 상상력을 위한 유체(영체)이탈, 스타게이트, 뭐 그런 종류다. 우리 종족의 고대 문화 중에 특징적인 것이라면 주로 중국이나 여타 종족들과 구분되는 것인데 그중 하나로 제천의식을 들 수 있다. 애니미즘(정령신앙)과 토테미즘(종족상징신앙) 같은 보편적인 원시종교와는 상당히 다른 “수준높은”의식이라고 생각하시면 되는데, 무속으로 격하시키는 주류학계에 비해 필자는 이것이 유대민족의 유일신 신앙에 비견할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고대국가들 중 유일신 개념이나 삼신(삼위일체)개념 등의 철학적 신관(神觀)을 갖고있던 민족은 그리 많지 않다. 중국의 “천자”개념은 한나라 이후에나 정리된 것이고 보면 종족의 시작을 하느님(환인)의 아들에서 그려내는 종족은 그리 흔하지 않다.(임금이라는 말의 구성이 그렇다) 거기다가 그 형식도 아주 독특한 것이어서 고산숭배, 즉 높은 곳으로 올라가 제사를 드리는 것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피라밋 신앙과 흡사하다. 왜 우리나라의 무덤은 높다랗게 솟은 산모양일까? 궁금하지 않은가? 그런 형식을 가진 종족이 그리 흔하지 않다. 거기다가 소도와 솟대라는 것은 매우 특이한 양식이다. 특히 하늘과 연결점을 찾기 위한 솟대야말로 아직까지 시골마을에 잔치가 있으면 높다란 나무를 세우는 풍속으로 남아있고 새 모양의 높은 나무문을 세우는 일본풍습과 더불어 우리의 먼 근친(아마 고구려 유민)으로 여겨지는 태국 치앙마이 부족도 이 습속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일본으로 가면 이 솟대 위에는 새가 앉아있는데 이건 바로 전편 "날새/아스카"에서 말씀 드린바 있다. 문화란 하나의 본뜨기, 흉내내기다. 문화란 그 전형(前形, 以前의 形態)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저 “창조된” 문명이란 없다. 혹시 조물주의 천지창조가 그랬을지는 몰라도 여기에도 체계와 철학이 필요하다. 사람의 것이 아니라서 말이지. 그렇다면 높은 산에 올라가 하늘을 섬기고 솟대를 세우고 소도에 함부로 안들어가던 이 문화습속을 그저 “어쩌다보니”생긴 것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겠는가? 근대성의 특징인 “합리적”인 것이 아무 소용없는 분야가 바로 고대문명이다. 우리는 아직까지 원시에서 문명으로 진화했다고 믿고있다. 그 증거로 물질문명을 든다. 편리해진 것들과 세세히 분화된 것들을 들며 옛 것을 원시적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이차대전 때 일이다. 폴리네시아에서 일본군과 싸우던 미군이 임시활주로를 설치하고 본국에서 화물기를 띄웠다. 여기 살던 원시부족은 얼굴이 하얀 신의 족속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커다란 나는 배에서 무언가 네모난 것을 꺼내는데 거기에는 온갖 먹을 것, 입을 것, 기이한 장구들이 죄다 들어있었다. 원시부족은 이것을 자세히 볼 수 없었고 기껏 경험한 거야 먹는 것이 모두였지만, 그들은 이제 신앙할 것이 생겼다. 네모난 화물을 만들어 이리 저리 옮기면서 “먹을 것”이 많이 생기기를 기원하는 “화물신앙”이다. 아프리카 오지의 부족이 하늘을 나는 커다란 새(항공기)가 자기 조상들의 정령이라고 믿고 수풀과 나무로 비행기 형상을 만들어놓고 자나깨나 보초를 세우는 이야기는 몬도가네로 잘 알려져있다. 그런데 다름 아닌, “솟대”가 그것과 흡사하다는 것을 필자는 주장한다. 세워놓으면 멀리서 잘 보이기는 하지만, 특별한 기능은 없는 상징물이 이 솟대다. 한 마디로 높다란 기둥, 첨탑인 셈인데, 이게 어디서 연유한 것일까? 하늘과 맏닿겠다는 의지는 높이 평가해야하지만, 아무리 원시부족이라도 하늘이 한 없이 높다는 것 정도는 느낌으로 알테고, 나무 위에 올라가서 닿는 높이고 하늘과 연결되려는 과욕을 부리지는 않았을 것인데 이 솟대는... 구약성서에는 하느님의 궤(레이더스라는 영화에 나오던) 위에 천사의 날개모양을 닮은 모양의 “케루빔”이 있다. 야훼(여호와)는 이것을 통해서 말하겠다고 이야기한다. 솟대 위의 날새, 피라미드 위의 제천의식, 소도(숲)과 에덴동산, 무언가 고대사에서 잃어버린 고리를 설명하려는 건 아닐까? 박창규, 너 드디어 돌았구나. 민족역사가 어쩌니 저쩌니 하는 건 어쨌거나 애국심이라고 봐주겠는데, 도대체 무슨 소리 하는거야! 나도 모르겠다.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 다만 봉선이라는 의식을 예로 들어 무언가 특이한 것이라는 상상을 이야기해보겠다. 봉선(封禪)이란 중국의 천자가 태산에 올라가 드리는 하늘에 대한 예이다. 禪과 같은 뜻이 壇(단)이므로 이 의식역시 처음에는 단군임검이 하던 것이라는 알 수 있지만 중국천자로 패권이 넘어간 이후의 이야기만 하기로 하자. 사기에 보면 천제의 예에 대해 방법이나 모습은 잘 전해주지 않지만, 제나라 노인의 말을 인용하여 봉선이라는 것은 “죽지 않는 말(言)”이라고 풀이해놓았다. 죽지 않는 말(言)?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여기에 사용하는 그릇 중 핵심이 되는 것이 보정(寶鼎)이라는 것인데 청동으로 만들어 무언가를 밀봉하는 것으로 그 용도가 매우 불투명한 그릇이며 은나라 때부터 사용했다. 그런데 이 그릇 안에 들어있던 것은 무엇이었는가? 이집트 피라밋에서 발견된 “달걀”이나 경주 155호 고분에서 발견된 “썩지 않은 계란”은 밀봉기술이 상당히 발달했던 고대기술을 보여준다. 사직단도 이와 비슷한 전통으로 조상의 영혼을 모셔놓아 왕조을 잇기 위한 방편으로 “천년사직”이라는 말의 유래가 거기에 있다. 그런데 왜 달걀인가? 이게 무엇의 상징인가? 이 오래된 전통의 시작인 봉선의 예에서 사용했던 이 보정이라는 그릇 안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놀라지 마시라. 왕의 정액이다! 봉선의 예란 천자의 정액을 밀봉하여 보관하는 의식이었다! 동굴에 들어가 나무를 흔든다는 봉선행위에 대한 문헌표현은 실제행위이든 상징이든 성행위를 의미한다. 왕의 성행위는 곧 제천의식이었다. 그런데 왜 밀봉을? 왜인가? 후대에 보이는 계란같은 상징으로만이 아니고 왜 실물을? 그들은 자신의 왕조를 영생시키는 방법으로 자신의 씨앗을 보존하는 방법을 택했던 것이다. 실제로 사용했는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천년이 지나 사직이 희미해지면 이 보정을 개봉하여 원래 왕족의 핏줄로 되돌아가기를 희망했던, 상당히 실질적인 용도였던 것이다. 이런 "방법론"의 상징이 바로 무덤 속의 계란이고 사직단이고 옥쇄였던 것이다. 내가 상상하기에 이 방식이 초기에는 가능했는지 몰라도 쓰다가(!), 후대에 와서 상징으로만 남아 사직단으로 변형된 것이다. 그렇다면 초기에는 정말 가능했는가? 정말 가능했다고 하더라도 이런 발상은 인공수정이 가능한 오늘날에나 쓰일 법한 이야기가 아닌가! 천년이 지난 후 보정을 개봉하여 천왕족의 부활을 노리는 천년왕국의 의식, 봉선! 과연 이 아이디어가 원시적일까? 고만해라 창규야. 술 맛 떨어지게 지저분한 이야기가 웬말이냐! 좋다. 그만하자. 허나 오늘 우리가 지저분하다고 생각하는 이런 이야기가 고대에는 지극히 신성한 의식이었다는 것만 기억해 두시라. 우리가 고대사 X파일 내내 고민했던 우리 종족의 이동 문제도 이런 식으로 풀면 무조건 아스라한 것만은 아니다. 그들은 현재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놀라운 천문학 지식이 있었다. 그래서 나라의 도읍을 항상 북두칠성이 머리 위에 있고 해가 춘분이나 하지에 신전의 정문으로 비치는 지점에 정했다. 영국 스톤헨지(고대 거석배열)가 하지에 태양을 맞추어 정렬되어있고 피라미드가 정확히 동서남북으로 한 면씩 바라보고 있고 그 방향은 춘분에 태양이 뜨는 정동으로 서있는 것도 같은 유래다. 고대의 모든 건축은 사방팔방의 방위와 천문학적 지식을 동원해 지은 그 시대 과학(?)의 표상이다. 왜, 어떤 이유에서 그랬는지, 그래야만 했는지는 어쨌거나 수수께끼지만, 이 지점은 대략 천년에 한 번씩 바뀐다는 사실은 과학으로 증명할 수 있다. 지축이 삐뚜랑해서, 지구가 팽이처럼 자전을 하길래 생기는 이 세차현상이 “특정한 어느 종족의 대규모 이동”을 일으킨다! 이 세차의 변화는 서에서 동으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동에서 서로 변하기도 한다. 그래서 일정한 기한을 두고 벌어지는 이 자전축의 이동현상을 이집트인들은 시리우스 사이클이라고 불렀고 그 주기는 대략 1460년이다. 고대사를 훑어보면 대략 천년에 한 번씩 대규모 민족이동이 일어나고 그 한 가운데는 수수께끼의 종족, 스키타이들이 버티고 있다. 먹고살기 위해서? 아니다! 기마민족이 모두 유목민족은 아니다. 오해하지 마시라. 그들은 왜 옮겨야했을까. 그리고 왜 멈추었을까? 만약, 만약! 그들 스스로 깨달은 지혜가 아니라면 그 고도의 지식은 어디서 온 것일까? 우리는 남은 시간동안“역사인류”의 피안에 억겁으로 묻혀있는 이 발자욱을 찾아서 가야한다. 우리는 정말 어디에서 왔을까. 왜 칠성별(플레이아데스)인가. 왜 시리우스인가. 왜 오리온인가.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갈 것인가. 우리는 억겁을 가르는 시공 앞에서 얼마나 겸손해져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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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 X- 파일 18 |
문명의 시간터널 과연 문명은 발전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최근 들어 이런 생각에 부쩍 회의를 갖기 시작했다. 첨단산업을 업종으로 삼는 회사를 다니면서 이런 생각을 하면 생활에 지장이 있다고 감각적으로 알아채면서도 이 화두는 떠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정직하게 문제를 제기하고 싶다. 종말이니 개벽이니 하면서 이 세상의 패러다임이 완전히 바뀔 것임을 암시하는 많은 예측과 예언 앞에, 떨리고 두려운 자기 한 몸을 가누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전망을 보고싶어하고 확실한 미래에 대해 궁금해하지만 “설”만 난무할 뿐 “방법론”은 없다. 전편의 "문명론"에서 질려버리셨다면, 더 읽으실 필요는 없다. 나는 이 글에서 어지럽지만 방법론에 가까운 발상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미래를 보기 위해 과거로 가자는 것이 그렇게 특별한 주문은 아닐테지만. 우리는 흔히 고대사를 생각할 때, 오늘날보다 덜떨어진 사회를 생각한다. 우리가 영상매체를 통해 보는 것이 대부분, 불편해뵈는 옷가지나 촛불, 호롱불 등등에다, 세수는 비누로 하나? 이빨은 치약으로 닦나? 하는 일상사에 부딪치면 얼마나 불쌍하게 생각되는지... 거기다가 “구석기-신석기-청동기-철기”라는 시대구분과 “수렵-농경-산업-정보화 사회”라는 문명구분을 외우고나 면 정말 내가 사는 지금이 얼마나 행복한 시절인지를 부득부득 외우지 않아도 잘 느낄 수 있다. 특히 우리가 사는, 우리가 실제로 살아온 세월만큼 “진보”나 “진화”의 모습을 확실히 잘 증명하는 것이 있는가. 세상은 시간이 갈수록 발전하는 것이다. 누가 그걸 부정하는가. 세상은 더욱 살기 좋아진다. 이건 상식이다. 증명할 필요도 가치도 없는, 진리다! 근데, 안그럴 수도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엔트로피”, “노동의 종말”의 저자 제레미 레프킨의 생각은 다르다. 오히려 『먹을 과실이 떨어지고 수렵할 동물이 줄어들자 인류는 하는 수 없이 채집생활을 포기하고, 심고 기르는 농경사회로 갔다. 인구의 증가로 농경사회를 지탱하기 힘들게 되자 이 사회도 해체되는데, 특히 쉽게 구할 수 있었던 에너지(주로 나 무)가 고갈되자 “나무”보다 훨씬 채집하기 힘든 “석탄”으로 가야만 했다. 석탄을 쓰려니 온갖 공해를 무릅쓰면서라도 효율있는, 필요한 기계를 만들어야 했다. 이제 우리는 석탄을 다 써버리고 훨씬 큰 채굴비용이 드는 석유마저 몽땅 다 써 버리는 에너지 고갈을 향해 대책없이 치닫고 있다. 그 앞에는 위험성과 비용에 있어 과거와는 수치단위를 달리하는 원자력이 버티고 서있지만, 만만하게 이용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열역학 제1법칙인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아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한번 써버린 에너지를 다시 쓸 수 있는 이전의 상태로 돌리는데는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며 결국 이런 식으로 에너지는 사라진다. 에너지는 다른 형태로 보존되겠지만 그것은 이미 우리가 쓸 수 있는 모양의 것이 아니다. 이것이 엔트로피 법칙, 열역학 제2법칙이다. 아주 최근까지 인류는, 지구의 에너지체계가 열역학 법칙중 제 1법칙의 지배만 받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산업사회는 이런 착각을 몇십년만에 무너뜨렸다. 엄청난 공해의 위력만 아니었어도 우리는 두번째 법칙을 기억하지 못할 뻔 했다. 우리 지구가 닫힌 세계라는 점을 명심하고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면 열역학 제2법칙인 엔트로피 법칙은 어김없이 우리의 미래를 결정할 것』 이다. 제레미 리프킨이 어떻게 진단하든 우리는 막대한 비용을 써야만 유지가 가능한 역사상 가장 “비효율적인” 시대를 살 고있다. 이처럼 문명의 진보 반대편에는 “자연의 몰락”, “에너지의 고갈”이라는 퇴보가 숨어있는 셈이다. 결국 “진보”라는 문제는 객관이 아닌, 주관적 가치의 문제다. 20년동안 폭탄테러를 자행하다가 몇 년 전 FBI에 붙들린 “유나바머”는 전직 대학교수(!)였던 문명 혐오론자였다. 그 가 주장하는 바는, 문명이 인간성을 타락시킨다는 것이다. 『한 번 “기술”에 물든 사람은 종(種)적 인간으로서의 순결을 잃어버리고 기계의 노예가 되고만다. 이제 그는 사람이 아니고 기계의 부속품이다. 그는 기계없이 스스로 존재하는 법을 잃어버리는 것은 물론이고 기계가 마치 자신의 일부인 것처럼 점점 그 최면의 세계로 들어간다. 이런 식의 인간성 말살은 자본의 힘이 획책하는 전세계적이고 거대한 음모이며 이대로 가면 인류사회 자체가 절망적인 파국에 이를 것이다. 인간성을 회복할 길은 “기계를 없애는 방법”뿐이다. 그래서 나는 “폭탄”으로 그 기술지상주의자들, 과학적 진보론자들을 응징한다. 멀지않은 장래에 이 문명은 스스로의 모순 때문에 위기에 처할 것이다. 고도로 발달한 문명은 한 번 무너질 경우 절대 로 회복할 수 없다. 생각해보라, 엄청난 전문성이 필요한 이 과학기술 문명의 어느 한 축이 전쟁이나 재난으로 붕괴된다 면, 사람들이 살아남은들 어쩌겠는가? 동네사람이 모두 모인다한들 냉장고 한대를 제대로 만들 수 있는가? 트랜지스터 라디오 하나라도 설계할 수 있겠는가? 인간의 종적 능력으로 가능한 것은 기껏해야 낫과 도끼, 수레와 물레방아 정도가 최상급이다. 여기까지가, 이 수공업 사 회가, 자연의 한 축으로 인간이 존재하는 방법이었다. 당신들은 지금 인간이 아니라 기계의 부속품, 일종의 괴물이다. 진정으로 인간성을 회복하고 싶은 사람들이여, 단결하라! 때가 다가왔다!』 폭탄테러를 안하기로 약속하는 대가로 뉴욕타임즈에 실었던 그의 논문에서 필자가 읽은 내용이다. 만약 여러분이 환경론자나 생태론자가 된다면 인류역사는 그야말로 퇴보의 역사다. 만약 여러분이 문명론자가 된다면 인류의 역사는 아직도 창창히 남은 진보의 역사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일 뿐이다. 우주는 “그 무엇이 진보다”라는 정의를 내린 적이 없다. 그래서 감히 나는 인류의 역사를 진보와 퇴보가 공존하는 혼돈의 역사라고 부르고 싶다. 현 시대의 이념은 무엇인가? 기술을 복잡하게 하고 일상의 편 리를 위해 온갖 기계를 만들어 일신이 안온해지면 행복은 오는가? 이런 이념으로 보아서 지금을 과거보다 나아졌다고 하는 것인가? 건강을 위협하는 문명질병과 삶의 기반을 침식하는 공해와 정신세계의 파탄은 간단히 치료할 수 있는 하찮은 것들인가? 그만해두자. 진화의 방향이 결정적이지 않다는 생각만 가지고 계실 수 있다면, 문명의 진보와 퇴보를 결정할 시각이 천 편일률적이지 않다는 점만 인정하실 수 있다면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가는데는 지장없다. 하지만 인류는 진화하고 있고 발전하고 있으며 아무런 잘못이 없고 순결무구하며 영생발전하리라는 “신앙”을 가지신 분은 더 이상 고대사 X파일의 탐구잔치에 참여하실 필요가 없다. 내가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이야기가 아무런 재미도 없고 자신의 신앙에 대한“신성모독”일 뿐이기 때문이다. 고대사를 볼 때 우리는 그들이 우리보다 원시적이라고 선입견을 갖고 관찰을 시작한다. 우선 이것부터가 잘못이다. 우리의 잣대로 그들을 규정할 수는 없다. 앞에서 보았듯 삶이란 것 자체가 하나의 유형은 아니다. 다만 우리와 같은 기계문명 을 그들이 가지지 못했다는 점, 우리와 같은 사회시스템을 그들이 영위하지 못했다는 점에 착안해 그들을 원시적이라고 본다면, 그 관점에는 동의하겠다. 그러나 관찰결과가 예상대로 나올까? 여기에 그 작은 사례가 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출발점으로 보이는 슈메르족(머리가 까만 직모이고 동양인의 모습을 하고있다)은 메소포타미아 문 명의 셈족이 살기 전에 이 지역에 문명을 일으켰던 종족이다. 이들은 설형문자를 쓴 사람들로 유명하다. 추정연대로 치면 BC 3000년에서 BC 5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확인한 바로, 그들은 문자를 사용하고 학교가 있었으며, 직업을 상당히 세분화하고 기능도 다양했으며 빈부격차가 있었다. 행정가, 외교관, 사원관리자, 장교, 선장, 세무공무원, 성직자, 감독, 십장, 서기, 기록보관인, 회계인 등이 그들의 직업 이었고 학교에는 교수와 학생 외에 테스트 담당 조교수, 그림 담당 교직원, 수메르어 담당 교직원, 사감 등이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언제적 이야기하고 있는거야? 그게 BC 3000년이라고? 한웅시절이네? 그런게 어디에 적혀있나? 이것들은 슈메르 점토판, 즉 점토에 슈메르 글자로 기록하여 그것을 구워놓은 그들의 기록으로 남아있다. 그들의 뒤를 잇는 바빌로니아 지식의 대부분은 이전 종족이던 슈메르 사람들의 것이다. 그들은 천문학과 수학, 문학, 공학에 능했고 우리가 알고있는 상당히 현대적인 사회제도를 갖추고 있었다. 신석기시대를 운운하는 시절에 이런 문명이 존재하는 것과 오늘날 기계문명이 원시림의 “야만부족”과 공존하는 것은 특별히 다르지 않다. 그래서 그런 공존은 아무 문제도 없다. 우리만이 문명이라고 착각하는 것이 문제일뿐 초고대문명의 존재는 인류역사 에 큰 누를 끼치지 않는다. 단지 우리의 착각에 상당히 큰 피해를 준다. 인류사에 갑자기 나타난 이 문명은 그 존재를 의심하는 수 많은 사람들에게 분명한 증거로 웅변하는 고대사의 미스테리 다. 이들은 지구라트와 점토판으로 그들의 기록을 남겼다. 그리고 그 기록은 수천년이 흐른 오늘에 와서 우리의 교만함 앞 에 작은 화두를 던진다. 우리가 생각하는 문명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가? 기계? 이미 그 시절에 초박막 도금(아주 얇은 도금)을 할 수 있었다. 그 수준은? 오늘날보다 더 낫다! 이거야 유물이 남아있기에 설명할 수도, 증명할 수도 있다. 고대사의 유물이란 그야말로 파편이다. 트로이를 신화로 생각하던 많은 사람들은 슐리히만이라는 미친 작자가 술수를 부린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아가멤논과 오딧세우스의 신화가 “사실”이었음을 증명해버렸다. 땅 속 수백 척 속에 묻혀있던 고대의 흔적, 이것은 아주 운이 좋아 발견한 것에 불과하다. 고대사는 흔적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실증할 수가 없다. 물론 설령 있다고 해도 우리는 슬쩍 치워버리거나 창고에 넣어버리고 잊어버린다. 그게 맘 편하다. 헷갈리게 하지마라 말이야... 우리는 원시에서 진보하여 오늘날의 문명을 이루었다고 생각하지만, 불과 삼사백년 전의 사람들은 아주 오랜 옛날, 뛰어난 문명이 있었고 자신들은 자꾸만 그 영민함과 오묘함을 잊어버리며 퇴보하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끝 없이 요순시절을 그리워했던 동양과 한도 없이 에덴과 찬란한 황금시절, 그리스와 로마를 지향했던 서양의 르네상스가 왜 다르겠는가. 불과 이백년전에야, “퇴보”의 방향을 바꿀 수 있었다. 산업혁명이라는 계기로 촉발된 이 변화의 흐름은
결국 생각까지 바꾸었다. “세상은 점점 발전하는 것이다!” 다윈의 자연도태 진화론과 약육강식의 제국주의는 이 가설을 공식화하고
이념화하였다. 세상을 진화시키자! 전쟁, 선교, 식민지, 개화, 근대화, 국제화, 과학기술혁명... 각양각색의 실천강령에 상관없 이 세상이 진화한다는 이 공식을 의심하는 사람은 이제 사라졌다. 불과 사오백년전 유럽에서 일어났던 르네상스란, 아랍세계가 이어왔던 그리스-로마(헬레니즘)의 과학기술을 역수입하려 는 야무진 시도였다는 사실을 모두 잊어버리고, 근대 서구인들은 자신들이 지구상에 나타난 최초의 문명인인양 행세하면서 그렇지 않은 증거들을 죄다 무시하기 시작했다. 둥근 지구와 태양을 중심으로 자전하던 천체의 운행을 수학적으로 증명하였던 이집트와 그리스의 천문학과 수학은 “사라지고” 재발견자였던 코페르니쿠스와 캐플러가 교조로 등장했다. 이미 야자수를 인공수정으로 재배하던 슈메르 농학은 사라지고 멘델이 교조로 등장했다. 증명할 수 없는 것은 죄다 무시해버렸다. 1000톤이 넘는 돌(돌 한 조각이 천톤)로 세워진 레바논의 고대사원은 그냥 그랬겠지, 이집트 밸리신전에 사용된 200톤의 화강암은 통나무를 밑에 깔아 굴려서 지은거란다. 야 이사람아 통나무가 견뎌나겠니? 지진나겠다. 기자 피라미드의 돌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35개를 지을 수 있다는데, 바퀴도 없던 사람들이 통나무를 굴려서 지었다고? 여러분, 이런 말도 안되는 은폐작업을 “근대과학에 근거한 체계화”로 재구성한 다음, 오늘날 우리가 책에서 배우는 모든 과학기술이 근대서구가 일구어낸“과학”이라며 등장했던 것이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쟌∼ 슈메르 사람들은 그들의 문자를 진흙판에 구워 새겨놓았다. 우리는 펄프와 CD-ROM을 자랑하며 이 원시문명의 현대적 (?) 사회제도를 기이한 불균형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알아두시라, 방부처리한 종잇장은 백년을 채 못가며 CD-ROM은 몇 년 후에 컴퓨터가 바뀌면 완전히 무용지물이 되거나, 불이나 아주 약한 방사능으로도 싸그리 지워질 수 있다. 그래서 아마 더 오래 후에, 사람들은 AD 20세기보다는 BC 30세기의 슈메르만을 기억할지도 모른다... 전기(電氣)라도 나가면 아마 볼만할거야...(감옥에서 유나바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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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 X- 파일 19 |
문명의 시공터널 금연(禁煙)이라면 당연히 담배를 피우지 못한다는 뜻이다. 금,禁. 금지를 뜻하는 이 글자는 중국, 일본, 한국을 통틀어 표지판에 가장 잘쓰는 글자이기도 하다. 우리 풍속에도 아이를 낳으면 금줄을 드리워서 출입을 막는다. 그런데, 이 글자를 풀어보면 나무 목(木)자 두개에 볼 시(示)다. 나무목이 둘이면 수풀림이니 숲을 보는 것은 “해서는 안될 일”이라는 뜻이다. 그러면 무슨 이유에서 금(禁)자는 이렇게 생겼을까? 19세기 말엽, 청나라로 파견된 선교사들은 본토인들 중 영어가 가능한 사람들을 뽑아 중국말로 성경을 가르치도록 지도했다. 그런데, 그들이 가만 보니 이 중국사람들은 성경 이야기를 자신들의 글자를 예로 들어 설명하더란 말이다. 선교사들이 가만 뜯어보니 이런 식이었다. “에덴 동산 가운데에는 나무가 둘이 있었어요, 林.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였는데, 이건 절대로 보지(示)말라고 했어요. 두 그루의 나무를 보는 것은, 그래서 해서는 안되는(禁) 거죠.” 자신들의 글자의 유래와 히브리 구약의 이야기를 동일시하는 이 방식은 낯선 이방의 이야기라는 거부감을 상쇄시키는 아주 멋진 효과를 가진 설교방법이었다. 비단 이 글자만이 아니었다. 약간의 은유와 해석을 더하면 많은 글자를 구약과 대비시켜 설명할 수 있었다. 특히 에덴동산 이야기에 대해서는 이런 엉뚱할 듯한 추정을 가능하게 하는 많은 글자가 있었다. 楚(고초)의 옛글자는 나무 사이에 사람이 손을 뻗고있는 형상이며 수풀림 林 아래 여자 女가 있는 글자는 탐할 람자다. 큰 배를 뜻하는 선(船)자는 어떤가? 배(舟) 안에 여덟(八)명의 사람(口)이 있는데 노아의 방주에 탄 사람이 여덟이었다.(노아와 세 아들 부부) 마귀(魔)는 또 어떤가? 여기도 두 나무 아래 걸어다니는 악마다. 만들다는 조(造)는 흙으로 무언가 빚어 입이 생기고 걸어다닌다는 의미다. 이런 글자가 한 둘이 아닌데, 정말 우연의 일치일까? 그나저나 고대사 X파일이 드디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에 다다랐다! 귀신 씨나락 안까먹는 초현대 이야기를 해보자. 잠실 북쪽으로 한강이 흐르고 그 서쪽에 남에서 북으로 탄천이 흐른다. 근데 한 70년 전에는 북쪽의 한강이 지류고 탄천이 한강의 본류였다! 뭣이? 정말? 음! 한강본류는 잠실운동장 북쪽이 아니고 지금의 가락농수산물 도매시장 북쪽을 흘렀다. 따라서 이 때만해도 잠실과 신천동은 섬이었다! 1927년부터 두 해에 걸쳐 대홍수가 나고 토사가 밀어닥쳐 이 본류를 막아버렸다. 그때부터 지금의 잠실북쪽이 한강 본류가 되었다. 그 때 밀어닥친 토사에 밀리고 밀려서 인조가 청나라에 머리를 조아리고 항복선서를 했다는 삼전도마저 땅이 되어버렸다.(송파구 삼전동) 토사가 밀려들어 그 북쪽에는 움푹 팬 땅에 물이 고였으니 이게 바로 석촌호수다. 한 때 이 석촌호수는 모기들의 천국이어서 묻어버릴려고도 했다. 근데 호수를 흙으로 묻어 그 땅을 팔아도 매립비용이 안나오더란다.(70년대) 그러다가 강남 개발 붐을 타고 땅값이 올랐다. 그래서 정부가 한몫 벌려고 했는데, 이번에는 주민들이 이 좋은 환경을 왜 망치려드냐고 결사반대했다.(80년대) 그래서 아직까지 남아있는 거대한 연못이 바로 석촌호수다. 우습지? 강산이 변한다는 게... 아마 한 십년 후면 누가 너섬(여의도)이나 뚝섬이 그 옛날 서울 사람들이 물놀이 다니던 섬이었다고 생각할 것인가. 세상살이가 다 그렇다고 늘 생각은 하지만, 우린 참 어리석다. 홍수 이야기가 나왔으니 홍수하면 노아의 방주 아닌가. 예수 안 믿는 사람들 중 얼마만큼은 그게 사실이겠냐고 하는게 바로 구약이다. 예수라는 성인이 있었던 신약은 인정하겠는데, 흙으로 사람을 만들질 않나, 갈비뼈로 여자를 뽑아내질 않나, 뭐 어째? 홍수가 났는데 지상의 동물들을 배에 다 태워서 종자를 보존하고, 그래도 모자라 바벨탑을 쌓고, 벼락맞아서 언어가 갈라지고... 그리스 신화처럼 재미도 없는 것이 황당한 이야기만 늘어놓는구만, 하기야 삼황오제 신화에도 여와가 흙으로 사람을 빚어 굽는데 너무 타서 흑인, 너무 설익어서 백인, 적당히 익혀서 황인종이 되었다는 재미난 “전설”은 있더랬지... 그러나 앞선 X파일에서 말했듯 문화라는 것이 하나의 흉내내기라면 전설이나 신화는 정확하지는 않을지라도 분명히 있었던 그 무언가에 대한 반영이다. 이것은 고도의 추상이나 비유가 결코 아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이 전설을 기록하는 시대의 사람들은 현대사회가 생각할 수 있는 관념이나 은유와는 거리가 멀다. 나는 확신한다. 출애굽기(이집트 탈출기)에 나오는 불기둥, 일시에 사람을 태워죽일 수 있는 강력한 무기, 애스겔서에 나오는 천사가 앉아있던 거대한 “기계”모양의 탈것(동물처럼 묘사함)은 분명 당시 이것들을 목격하고 기록했던 인류의 문명 발달단계와는 거리가 먼, 무언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영화 “스타게이트”의 상상력은 거기서 가져온 것이다. 노아의 대홍수도 아마 그런 위치를 차지할 것이다. 성경과 관련한 종교를 가진 사람들(주로 천주교, 기독교, 이슬람교)이라면 이런 과거를 대충 사실로 믿고 있을테고, 아닌 사람에게는 남일이지만, 최근 20여년에 걸친 지질학계의 보고에 따르면 이 홍수는 사실로 증명되고 있다. 광범위하거나 국지적인 여러번에 걸친 대홍수의 흔적이 전세계적으로 발견되고 있다. 홍수의 전설은 원래 히브리족의 구약에만 고유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구약에 전승되어온 기본 텍스트는 메소포타미아 전설이다. 그 중에서도 슈메르 점토판에 새겨진 전설이야말로 문헌상으로 기록된 최초의 홍수기록이다. 이 기록을 잠시 요약해보자. 바빌로니아판 아트라-하시스(Atra-Hasis) 설화다. 『45만년전에 하늘에서 신들이 강림하였다. 이들을 아눈나키(Anunaki)라고 불렀으며 하늘(An)에서 땅(Ki)으로 온 자들이다. 이 신의 무리중 주신의 이름은 아누(Annu)였고 그는 하늘에 머물렀다. 그의 아들인 엔릴과 엔키가 지상을 다스렸다. 먼저 엔키가 그의 부하들과 내려왔으며 도시를 건설하고 농업과 광업을 일으켰다. 이들이 지상에 내려와 직접 노동을 하며 문명을 건설하자 엔릴이 내려와 본격적으로 지상을 다스리기 시작했고 엔키는 바다와 하계의 신이 되었다. 그러던 중 아눈나키들은 과도한 노동에 불만을 품어 반역을 일으켰다. 엔릴과 엔키는 이 반란을 진압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동을 위해 필요한 “어떤 것”을 만들기로 했다. 반란의 주동자를 재료로 삼아 흙을 섞어 “인간”을 창조했다. 목표대로 인류를 완성시켜 노동에 활용하자 아눈나키들의 불만은 해소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인간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통제하기 어려워졌다. 아눈나키중에서는 인간과 교접하여 피를 섞는자마저 나타났다. 중요한 몇몇 기술을 인간들이 알아내는 사고마저 생겼다. 이러자 엔릴은 인류의 수를 줄이기로 했다. 처음에는 기근을 일으켰다. 그 다음으로 엔릴은 대홍수를 일으켜 지상의 사람들을 멸절시켰다. 홍수가 끝난 후 지상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전처럼 조직적으로 움직이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메소포타미아, 정확히 슈메르 점토판에 새겨진 전설이야기를 요약한 것이다. 약간 섬뜩한 생각이 들 정도로 구약의 그것과 모티브가 닮아있다. 메소포타미아 신화전승이 히브리 신화로 이어졌다는 이야기다. 거기에 더해 히브리 족이 조상으로 섬기는 인물인 아브람(아브라함)은 슈메르 문명의 본거지인 칼대아-우르 지방출신이다. 그의 일족이 여기서 출발해 가나안으로 갔으며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꾼 이 “선택받은 자”의 아들이 바로 오늘날 아랍과 히브리(이스라엘)의 조상으로 떠받들어지고 있는 이스마엘과 이삭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구약에 나와있는 홍수이야기는 메소포타미아의 그것과 동일한 것이다. 같은 전승을 다른 민족적 입장에서 다르게 서술한 것일뿐, 동일한 고대사건을 기록한 것이다. 이런 전승은 아메리카 인디언에서 중국에 이르기까지 약간의 내용만 틀릴뿐 모티브가 거의 똑같다. 대홍수는 지구상에서 일어났던 “사실”이었다. 슈메르의 주신은 아누(Annu), 최고의 신을 뜻한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이 말이 우리말의 하느님과 닮았다. “하느”님 이란 말에서 “하(아)”가 뜻하는 것이 하늘과 위와 남성적인 것이라면 “느”가 뜻하는 것은 땅, 아래, 여성적인 것이다.(누리(땅), 누이(누나) 같은 말도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이고 며느리, 마누라도 이 어원에서 나온, 여자를 지칭하는 말) 하느님이라는 말은 양성을 모두 지칭하는 뜻인 셈이다. 아(하) - 누(느)! 슈메르어로 안이란 하늘을 말한다. 이것이 동쪽으로 오면서 “한”“칸”으로 바뀐다. 하지만 “아누”는 “하느”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이 사용했던 12궁도와 우리의 12간지, 60진법과 60천간, 흑해/홍해와 황해의 오행흔적, 한단고기의 한인 12국에 묘사된 수밀이(須密爾)와 슈메르, 이들이 우리와 관계가 분명히 있다는 심증은 확실하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나타난 아카드 문명이 그후 바빌로니아, 아시리아와 힛타이트, 박트리아, 페르샤 등등으로 연결되는데 반해 찬란한 슈메르 문명은 후계를 잃어버린, 바람같은 역사가 되어버렸다. 그들의 “문명”은 그야말로 불가사의(不可思議) 취급을 받지만, 역사적으로 분명히 바빌로니아-그리스-동로마-아랍(오스만투르크 등)-서유럽 르네상스로 그 계보를 잇는다. 일단 초고대사로 발을 들여놓으면 이 정도의 문제는 별 문제가 아니다. 이야기가 나온김에 잠시만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나열해볼까? 혹자는 고대의 건축물이 돌무더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이 건축물들은 오늘날의 기술로도 건축하기가 간단하지 않은, 매우 정교한 것들이다. 이런 건축물들은 대홍수로 휩쓸려간 여러 유물들과는 달리 아직도 튼튼하게 살아남아 과거를 증언하고 있다. 도대체 그 위력은 어느 정도일까? 단적으로 말해서, 기자의 피라밋은 오늘날의 기술로도 재현할 수 없다. 스핑크스 신전에 쓰인 가장 큰 화강암은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가장 무거운 물건을 들 수 있는 기중기로도 들 수 없다. 그 무겁고 큰 암석을 채굴해 깍아내고 한반도 길이에 해당하는 거리를 옮긴다? 사람의 힘으로? 통나무를 아래에 깔아 굴리면서? 한 마디로 불가능한 이야기다. 그런데도 정통 고대사학자들은 최근들어 불리한 증거들이 속출하자 몇천년에 걸쳐 건설한 것이 아니겠냐고 한다. 천년씩 만년씩 일관성있게 추진되는 건축 프로젝트? 이거야말로 공상과학이다. 기자 피라미드에서 출토된 항아리들은 이집트에서 가장 단단한 돌인 현무암, 단암 등으로 만든 돌도자기다. 아시겠는가? 쇠보다 더 단단한 암석을 깎아 속을 파낸 항아리란 말씀이다.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흙을 빚어 구운 도자기가 아니라 죄다 돌로 만든 것들이다. 이걸 손으로 깎아? 돌을 손으로 깎아서 두께 5㎜ 항아리를 만들어? 한 두개도 아니고 똑같은 크기의 것을 수십수백개도 아니고 몇 만개나? 거기다 귀퉁이에 손잡이용 실을 끼우는 구멍은 직경이 3㎜에 길이가 10㎝다. 이건 불가능하다. 오늘날 어떤 기술을 동원하더라도 이루어낼 수 없다. 사실인지 아닌지 기술자에게 물어보시라. 아직 레이저 기술로도 이런 구멍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항아리들은 강력한 강도를 가진 도구로 선반작업을 해도 흠집을 내지 못하는 유물들이다. 메소포타미아의 박막 금도금이나 고대 그리스의 증기기관, 세차계산용 구리제 톱니시계 등등 이런 사례를 들라면 수도 없이 많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학계의 공식적인 해명은 “노코멘트”다. 우리는 도대체 무얼 배우고 있는가? 구석기에서 신석기? 우습다. 모든 금속에 金자가 붙는 이유가 뭔지 아시는가? 맨처음 사용한 금속은 금이었다. 돌멩이가 아니시다. 금처럼 요리하기 편한 금속이 있던가? 그 다음이 은이다. 그러고도 안되니 구리와 주석이고 합금이다. 거꾸로 배우는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미개에서 문명으로 발전한 결과여야하기 때문이다. 그 반대라면? 뒤집어진다. 그레이엄 행콕이라는 사람이 멋들어지게 문학화한 “신의 지문”에는 초고대의 지도가 나온다. 행콕은 “좀 이상하다 그치”에서 그치고 있지만, 16세기의 아랍에서 나온 이 지도는 이미 오랜 옛날에 시간을 측정하고 경도를 재는 과학과 기술이 있었다는 점을 증명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고대에 관해서는 까막눈이라는 사실도 아울러 증명한다. 몇 번의 문명이 일어서고 주저앉기를 반복했을까? 우리가 처음은 아니라는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을 앞에 두고 우리는 이것을 어떤 “교훈”으로 해석해야하는가? 필자가 찾아가는 종착지 “아리랑”역은 아직 먼 듯싶은데, 드디어 아무런 정보가 없는 “진짜 상상력 지대”에 도달해버렸다. 여기서 아무리 슈메르인들의 “아누”와 우리 말 “하느”가 비슷하대봤자 이제 독자들의 상상력은 그런 “사소한” 문제에 얽매이지 않으실게 분명하다. 내가 진도를 너무 나간거다. 이런 것들은 단지 에피소드일 뿐인가? 정말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린가? 그게 아니라면 또다른 레이더스를 기다리는 어마어마한, 깊고깊은 시간정지대, 진정한 고대사 X파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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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 X- 파일 20 |
문명의 스타게이트 독자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나는 박씨 성을 가졌다. 멀리 거슬러 가봐야 박혁거세를 시조로 하는 씨족이다. 엉뚱한 이야기 같지만 신라에 불교를 공인시키는 대가로 죽음을 당한 이차돈도 사실 박씨다. 이차돈이 이씨지 왜 박씨냐고? 이차돈의 “이”자는 다를 이(異)를 쓴다. 김용옥 선생의 풀이대로라면 이 이두문자를 풀어써서 “박 고슴도치” 정도의 이름이다. 우리가 학교에서 얼마나 재미없는 역사를 배웠는지 이것만 봐도 안다. 어쨌거나 그토록 오랜 옛날부터 성씨를 가졌다는 것은 강력한 씨족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씀인데, 박혁거세 신화는 비록 규모가 단군신화에는 못미치지만 “대단한” 아이디어(?)다. 단군이 하늘님의 아들과 사람 사이에서 태어나는 반면, 혁거세는 아예 알에서 태어난다! 하늘을 나는 말을 타고 올라가고, 몸이 여러조각 나고, 이를 다시 붙이고 하는 신화의 형태는 이집트의 오시리스 신화와 비슷하다. 이런 형식의 신화는 세계공통이다. 어쨌거나 알에서 태어나는 이 형식은 계속 반복사용(?)되는데, 고구려 시조인 고주몽도 알에서 난다. 알에서 태어난다는 것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저번 X파일에서 보듯, 일종의 “특수종족”을 상징하는 것은 확실한데, 실제로 이것이 어떤 모습의 “혈통계승”의식인지 도대체 감 잡기가 힘들다. 하긴 따지고보면 감 잡을만한 게 그리 많지도 않다. 하느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합하는 이 시시한(!) 주제는 질리게 나온다. 히브리 구약이나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아예 집단적인 결혼을 행한다. 거기서 태어나는 아해들이 바로 거인족(네피림)이라고 적혀있다. 이집트 신화에서 하늘의 남신 우라노스와 땅의 여신 가이아 사이에서 티탄(거인)족이 나오는 것도 마찬가지고 우리의 단군신화도 바로 그 전형에 속한다. 그들은 틀림없이 하늘에서 내려온다. 이건 거짓이 아니다. 독자 여러분은 혹시 이 원시족속들이 이런 일들을 기록할 때 왜 하늘에서 내려온다고 표현했는지 아시는가? 필자는 산에서 내려오거나 땅으로 걸어온 사람들을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꾸며서” 표현할 정도로 다양하고 찬란한 비유의 문학적 소질을 그들이 가졌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건 비유가 아니라 사실일 거라고 추정(!)한다. 하늘이 신성하니까? 신성은 누구에게 배웠나? 벼락이 치고 비가 오는 것이 하늘이니까? 그럼 산사태는 안무섭고 지진은 안무섭나? 그런 식으로 따지면 결국 두려운 것을 신앙한다는 모호한 결론에 이른다. 왜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는지 설명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용납 못하실 독자들도 계시겠지만, 고대인들이 이야기한 것을 그대로 한 번 믿어보자. 아무런 편견없이, 비록 서툴더라도 묘사하는 그 자체를 사실로 인정해보고 들어가자는 말이다. 우리가 정한 방법론이나 선입견이나 이론을 배제한 채! 그렇게 보면 이 신화의 세계는 즐거움으로 가득차있다. 산해경에 출현하는 그 많은 동물들, 반인반수의 괴인들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고대인들이 기록하려면 그런 방법밖에 더 있겠는가. 머리는 원숭이같고 꼬리는 황새같고 사슴같은 뿔이 달렸으며 몸은 염소의 그것과 같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게 정말 무언지는 모르지만 이 표현법은 모든 신화에서 활용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북유럽 설화에 출현하는 트롤(꼬마요정)은 실제로 존재하는 부족이었다는 것이 최근 밝혀졌다. 이 소인족은 실제로 무리를 이루어 살다가 18세기 이후 외부침략으로 와해되었고 학살당하거나 뿔뿔이 흩어져 곡마단으로 팔려나갔다고 한다. 이 요정의 이야기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바탕으로 부풀려지고 감정이입된 아주 그럴싸한 “이야기화”과정을 보여준다. 우리 쪽으로 오면 도깨비도 마찬가지다. 도깨비의 전형은 군신으로 널리 숭앙받는 치우한웅이다. 그 마스크는 머리가 청동으로 되어있고 뿔이 났다는 고대기록과 일치한다. 이런 형상은 각 종족의 상상력에 힘입어 많은 이야기로, 많은 조각으로, 많은 문양으로 발전하고 후세의 우리들은 실물보다는 그 상징과 전형만을 본다. 우리는 실제보다 그 형상의 의미가 더 관심있다. 그러고보니 우리는 한 번도 그 신화나 설화에 나온 것을 실제로 형상화해보려 하지 않았던 셈이다. 아예 처음부터 사실이 아니라고 단정하고 들어갔다. 용이란 정말로 존재했는지, 용왕은 무엇인지, 왜 알에서 태어나는지, 왜 하늘에서 내려오는지, 왜 인간의 딸들과 교접하는지, 우리는 사실 자체를 물어보기 전에 그 말같잖은 사실들을 우리의 의식과 지성으로 이해하기 위한 “틀”부터 세운다. 그러나 고대사, 더 나아가 초 고대사는 우리의 얄팍한 우월의식으로 재단하기에 그 시공의 깊고 넓음이 상상을 초월한다. 우리인류는 기껏해야 몇 백년의 실천으로 현재의 지성을 이루었다. 이 지성이 존재하는 최고의 것이라는 믿음마저 그 지성의 일부일 뿐이다. 그러면 어쩌란 건가! 특별한 방법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고대의 것이 분명한 침술이 우리의 과학으로 새롭게 조명받고 그들의 명상법과 자연조화 패러다임이 미래의 전형으로 추앙받는 현실 앞에서 우리가 먼 옛날에서 발전과 진보를 거듭해 오늘에 이르렀다는 주장은 분명히 철회해야한다. 비과학적? 아니다. 우리의 과학이란 불과 몇 십년전만해도 태양흑점과 지구기상과의 관계를 몰랐다. 마야에서는 아예 시계로 만들어놓고 주기를 계산하던 것이다. 자 그렇다면 알에서 태어났고 하느님의 아들과 결혼을 해서 낳은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싶었던 것인가? 그들은 혈통을 보존하고자 했고 그래서 황실과 왕실을 지어내고 이를 보존하려 했다. 그들은 사람과 분명히 다르다는 일관된 주장이었다. 정말 그랬을까? 정말 그랬다. 주로 신들의 모습(!)은 노란 머리에 파란 눈을 가진 종족들이었다. 말 안해도 알다시피 오늘날의 백인종이다. 언젠가 다시 돌아오겠다면서 아즈텍을 떠난 케찰코아틀이라는 신을 믿던 인디오들은 스페인의 학살자들이 그들 앞에 나타나자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채 찬란한 누백년의 문화를 내어주고 학살의 언덕너머로 사라져버렸다. 까만 머리 종족 슈메르의 경우도 다르지는 않다. 그들은 신의 형상을 새겨놓았으며 특히 신의 눈동자에는 파란 보석을 박아놓았다. 이집트도 마찬가지였다. 파란눈의 백인들은 초 고대에도 지금처럼 후진국을 쥐어누르던 신적인 존재였을까? 그래서 이런 것들이 남은 것일까? 그래서 그들의 피를 이어받은 황족들은 그 핏줄을 지키기 위해 그토록 처절한 골육의 장벽을 쌓았던 것일까? 전설의 뮤우대륙의 흔적을 찾아다니던 제임스 처치워드가 발견한 “얼굴이 하얀 신”의 설화는 고대민족들에게 공통적인 것이었다. 이집트에서 아메리카 인디언에 이르기까지 파란눈의 신은 아주 보편적인 개념이었다는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백인종이 우월하다는 주장을 펴는 사람은 마빈 해리스의 “작은인간”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완벽한 백인종은 존재하지 않는다. 피부색으로 인종을 구분하려는 시도는 무지의 소산이다. 까만 피부의 흑인종이 오히려 더 많은 코카서스 백인종의 DNA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는 한때 북방의 백인이었을 수도 있고 한 때 남방의 흑인이었을 수도 있지만 그런 것은 인종문제와는 상관없는 것들이다. 우리가 찾고싶었던 것은 우리가 어떤 인종이었느냐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어디서 온 사람들이었는가 였다. 왜 우리 조상중 특정인들은 자신들을 “아리랑”으로 연결시키며 그 혈통을 보존시키려고 끊임없이 노력해왔을까. 왜 그들은 천신의 자손이었던 자신들의 과거를 지키기 위해 끝없이 노력했을까. 여기서 필자는 잠정적인 결론을 내린다. 고대의 우리 종족은 분명 초고대문명이 말하는 “신”들과 관계가 있다. 우리의 오랜 조상은 곧바로 “신”들은 아니겠지만 분명 “신”의 피를 이어받은 “신의 아들”임에 틀림없다. 그들은 비슷한 경험을 한 다른 인류들처럼 여러 가지 방법을 택해 그 적통을 계승하고 지키려 했다. 해모수의 호령거나 박혁거세의 난생묘사는 이런 적통잇기가 한 나라를 일으키는 것과 동일한 가치였다는 사실을 입증해준다. 이러한 우리 배달의 조상들이 자신을 “아리랑”족으로 부르며 그 적통을 주장해오다 역사시대에 이르러 이 적통잇기의 문화는 “세속적 권력”잇기의 모습으로 문명적 전환을 이룩한다. 이제 적통을 뒷받침하는 것은 실제로 나타나는 신들이 아니라 정치적 사상과 철학적 관념, 종교적 의례다. 기가 막히게 유대(이스라엘)에서 야훼의 간섭이 없어지는 시점과 중동, 아시아에서 신화적 전설이 사라지는 시점이 일치한다. 이거 뭔가 있다! 특정 종족이 과거 “신”이었다는 사실은, 최소한 그들을 신으로 불렀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것도 눈으로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이 하느님의 아들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지상에 문명을 건설하고 인류를 다스린다는 신화가 도대체 어떤 사실을 설명하는 것인가, 에 대한 해답이 나는 필요하다. 나는 이 부분에서 상상력을 완전히 비약시킨다. 인류의 문명수준과 판이하게 다른, 하늘을 날아다니는 이 신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인도의 고대경전인 리그 베다에는 이미 수만년 전에 하늘을 날아다니는 기계를 타고다니며 불을 뿜으며 날아가 작열하는 거대한 화살을 사용하는 신들의 전쟁이 묘사되어 있다. 모헨조다로라는 유적은 고대어로 “시체들의 언덕”이다. 여기는 엄청난 충격에 의해 사지가 비틀린 채 화석이 되어버린 시체들이 즐비하다. 또한 엄청난 방사선으로 주위의 유적과 맞지 않는 엉터리 탄소측정 연대가 검측된다. 경전에 나온 그대로 버섯구름을 뿜어내는 무서운 화살이 떨어진 자리다. 그들은 케루빔과 불칼로 에덴동산을 지키기도 하며(구약 창세기), 대홍수를 피해 하늘로 올라가기도 하고(슈메르점토판), 인류에게 지혜의 상징인 불을 가져다 주기도 하며(그리스신화 프로메테우스), 핵무기로 전쟁을 하기도 하고(리그 베다), 산 위에 1°도 어긋나지 않는 거대한 직선도로를 건설하기도 하며(안데스 유적), 대홍수에도 끄덕않는 반영구적 구조물을 세우기도 하고(기자 피라밋), 캡슐을 통해 적통을 계승할 우주아이를 내려보내기도 하며(박혁거세), 흙으로 사람을 빚어 창조하기도 한다(삼황오제의 여와). 우리 인류는 도대체 누구인가? 우리는 지금껏 우리의 연원을 찾아 줄기차게 달려왔지만, 막상 고대에 이르자 “우리”라는 의미가 흐느적거리더니 이제 “우리 인류”로 둔갑해버렸다. 우리가 찾던 정통성의 유산은 알 수 없는 신화 속으로 사라져 우리 이성의 판단과는 궤적을 달리하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의 저쪽에서 유유자적하고 있다. 독자 여러분, 이제 어떻게 해야하는가. 어디로 가야하는가. 이 신의 아들이 우리의 직계조상이라고 선언하고 말텐가? 속상하게도, 신이라 불렀던 존재들이 백인이었으니 모른 척 입다물고 말 것인가? 고대인의 상상과 환상수준이 오늘날에 비해 뒤지지 않는다고 감탄하며, 박창규의 주장이 말같잖다고 웃고 말텐가? 나도 모르겠다. 여기까지 와서 계속 고대사 X파일을 주장하는 것은 내가 보기에도 말도 안된다. 이미 나의 이야기는 고대사를 건너와 불가사의의 세계에서 발을 구르며 공룡을 부르고 있다. 발을 구르다보면 어떤 해답이 있지 않을까 생각은 하지만, 반대로 벌써 해답은 나왔는지도 모른다. 우리인류는 서구사회의 기준으로 불과 400년전만 해도 지구가 이 세상의 중심이고 태양과 행성들이 지구 주위를 돌며, 지구는 평평하고 먼 바다로 나가면 절벽으로 추락하고 거기가 바로 지옥이라고 믿고 있었다. 오늘날의 우리는 그들보다 이성적이고 그들보다 지성적이고 그들보다 합리적이다. 이건 분명하다. 그러나 바닷가의 조약돌 하나를 들고 좋아하는 어린 아이같다고 자신의 발견을 표현하던 아인쉬타인의 겸손을 손톱 끝만큼만 받아들일 수 있다면, 오늘날 우리가 아는 것은 쥐뿔도 없다. 우리의 미래를 우리가 알 수는 없지만 과거는 다르다. 과거를 향한 오만한 시선을 거두고, 우리보다 더 찬란한 문명을 이룩했던 고대를 재평가한다면,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문제의 몇 가지는 풀 수 있다. 이것은 당장 필요한 공학기술 몇 가지에 얽힌 문제가 아니라, 우주와 인간을 대하는 우리의 총체적 패러다임에 대한 반성이다. 이런 태도만 갖는다면 고대사에 X파일이란 없다. 우스꽝스럽게 우리조상 잘났다고 말타고 달리지 않아도 된다. 반성이 없다면, 우리는 아마 또다른 모헨조다로의 화석으로 남아 길이길이 빛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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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 X- 파일 21 |
고대사 X파일을 끝내며 10월3일이면 개천절이고, 개천절날마다 우리는 신문과 TV에서 단군영정을 본다. 해마다 보는데, 왜 단군께서는 상투가 없을까? 상투가 아니라 머리띠를 한 것같은 그 머리는 도대체 무슨 헤어스타일인가? 그때는 상투가 없었나? 그래, 그럴 수도 있겠네... 그러나 자세히 보라, 정말 답답한 생각을 풀어버리고 자세히 보면, 머리색깔만 다르지, 그리스 신들의 조각상에 나오는 머리, 메소포따미아 조각상, 슈메르 조각상에 나오는 그 머리다!! 아닌가? 지금 당장 서점으로 뛰쳐나가서 확인해보라!! ... 울 어머니 왈, 이기 무신 소리고? 돈 되는거 좀 하그라, 으이?... 우리 집에 있는 종이 피라밋은 교보문고 뒤에 있는 정신세계사 문고에서 산 삼천원짜리지만, 지난 1년동안 최소한 2만원은 벌어주었다. 나는 지난 14개월간 면도날을 여기 넣어두고, 쓰고있다! 길어야 한달만 쓰면 수염을 쥐어뜯어서 갈아치워야했던 쉬크울트라 면도날을, 나는 14개월동안 쓰고있다. 하긴 체코에서는 실용신안 특허로 이런 장치가 등록되어있단다. 우린 어릴적 어깨동무, 새소년, 소년중앙에서 죽도록 읽어놓고도 이런 “짓” 하면, 어른들이 감히 가만 놔두질 않아서 끝까지 가본 적이 없었지. 그러다보니 그런걸 언제든지 재탕해도 기사가 된다. 그래서 모래 위에 누각을 쌓고 ‘한강의 기적’이라며 좋아하다가, 그 누각이 바스라지자, 이제는 누구, 어떤 놈이 그랬어! 라며 다 니탓이란다. 우리 모두의 책임은 좋은 말로 내 책임은 하나도 없다는 뜻 아닌가... 치아라 고대사X파일에 왠 현대사를 씹어뭉개나.. 외람된 말씀일지 모르지만, 나는 X파일을 매우 싫어한다. X파일 영화야 재미있지만, X파일이라며 등장하는 비밀스러운 그 무엇은, 깨끗하고 밝은 진실과는 거리가 먼, “권력의 냄새가 잔뜩 묻은 음흉한 그 무엇이, 우리가 당연히 알아야할 그 무언가를 감추고, 그 감춘 것을 파헤쳐내는 손길 위에 칼침을 놓으려 드는” 그런 이미지다. FBI나 CIA의 것도 그렇고 특정 정치인에 대한 X파일도, X파일이라는 이름이 붙은 “추정”하는 문서들은 신비스러움보다는 역한 냄새가 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왜 나는 나의 글에 X파일이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그것은 독자여러분이 내 글에 대해 연상하는데 가장 쉬운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정확하지는 않으나 완강히 부인하기에는 무언가 찝찝한, 그런 진실에 대해 필자가 완강히 저항한다는 뜻이다. 물론 박창규가 이런 글 쓴다고 안기부에서 잡아가지는 않겠지만, 내가 대항했던 것은 “상식”이라는 너무나 거대한 편견의 힘이었다. 과학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증거라는 명함을 달고 유명인사의 말이라는 간판까지 내걸어야 가능한 “상식”은, 알고보면 전혀 사실이 아닌 경우가 많다. 우리 인류는 상당히 심각한 편견에 시달리면서 살고 있다. 학교교육이 그런 편견을 “정규적으로” 재생산한다. 나의 정신적 스승인 라즈니쉬 말대로, 세상에 모조리 미친 놈만 있고 단 하나 바른 정신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 놈이 바로 미친 놈이다. 그래서 대체 언제까지 쓸 수 있을런지 감잡기 힘들었던 이 글의 제목에 X자를 붙여버린 것이다. 누군가 주먹을 쥐고 X파일을 뒤지는 내 얼굴을 패지는 않겠지만, “이런 정신나간 놈을 보겠나”, “평소에도 그런 생각으로 어떻게 사냐”, “돈 되는 거나 좀 파라” 등등의 무언의 분위기는 짬을 내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필자를 완전히 눌러버리는 바위덩어리다. 그래서 주저주저 했다. 그러나 처음의 생각과는 반대로 나는 이 글을 쓰며 무척 행복했다. 독자 여러분의 성원이 아니었으면 진작에 끝났을 이 행보가 지금 와서 보면 무척 대견하다. 술안주로 글을 쓰는 이 무모한 시도는 의외로 스스로에게 많은 교훈을 남겼다. 처음에 우리 민족의 연원을 따져보려고 출발했던 이 글은 우리종족의 연원과 인류의 고대사가 밀접하게 연관되었다는 주장에 내다르고 싶었지만, 필자의 능력부족으로 조금은 설득력이 약하다는 느낌과 함께, 그런 이야기 어디선가 한 번 들은 적이 있다는 정도의 인상만 남긴채 여기서 마무리해야할 모양이다. 글을 쓰면서도 필자는 우리 스스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에 재미를 느꼈을 뿐, 그것을 해결하려는 의지는 전혀 없는 열외의식으로 일관했다. 한마디로 심각한 것은 남들이 해주기를 바라는 얌체속성이다. 물론 그 핑계로 나야 그저 “회사원에, 곁눈질로 배우는 사람”이라는 자기정체성을 항상 들이민다. 우리의 문제다. 우리는 우리 문제를 누군가 풀어주겠지, 하며 오늘도 누가 대통령이 되면 좋아질 것인가를 고민한다. 우리가 그러는 한 대통령이 누가 되든 아무 소용없고, 정치인들 욕해보았자 누워서 침뱉기다. 이 글들을 쓰는데 활용한 책만해도 30권에 달한다. 내가 알고있는 모든 것은 아닐지라도 거의 다 건드렸다고 표현해도 지나치지는 않다. 잘난 척 해보려고 도전했다가 아는 것이 바닥난 이 허탈함, 술 자리 안주로는 무궁무진하지만, 글로 쓰면 이렇게 금방 목마를, 건성으로 아는, 부실한 모래 위의 누각들... 그나마 애써서 썼다고는 하지만, 나름대로 정리한 것은 아니라서 들쭉날쭉, 헷갈리셨을 것이다. 내 글을 읽고 정연한 논리가 들어온다면, 그분은 앞으로 나와 같이 술 마시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내가 알고있는 책들은 아주 과학적인 근거를 대는 책에서부터 황당한 주장에 불과한 것에 이르기까지 여러가지지만, 나는 편견없이 이 책들을 대한다. 미친 소리를 꿈으로 분류하고 사실성있는 정보를 생시로 구분하면 그만이다. 꿈과 생시는 분명히 존재하는 세상의 양면이다. 꿈이라고 해서 무시할 필요는 없다. 고대사 X파일을 계기로 필자는 이제 더 넓은 방면으로 이 분야를 파들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더 들어간댔자 더 이상 나올 것도 없다. 거기에는 드디어 UFO와 심령학과 정신세계가 나오는데, 나는 이 분야에 대해서는 “실제체험”이 관심있지, 연구는 별로다. 이상이 필자에 대한 약간의 설명이다. 기회가 닿는다면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드리겠지만, 아마 술자리에서의 일일테다. 고대사 X파일을 통해 우리는 한국사에서 동아시아, 넓게는 유라시아를 건너 이집트와 그리스, 메소포타미아와 슈메르까지, 시간의 영역도 천년 전에서 수만년 전까지 오고갔다. 이 연재물의 제목이 “한국고대사 X파일”이 아니고 그냥 고대사였던 것은, 처음부터 이런 여정을 머리맡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종족의 고대사를 빌려 그것을 설명하고 싶었을 뿐이다. 변하지 않는 주제가 있다면, 진실에 대한 탐구와 우리의 닫힌 마음을 열자는 호소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이 좁고좁은 영역에 가두지 말자. 우리 시대를 그 속에 가두려는 바보짓을 그만두자. 우리는 그런 식으로 행복해질 수 없다. 열려있는 마음이 영원한 시간과 억겁의 공간의 품으로 우리를 이끈다. 언제나 그랬던 저 먼 옛날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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