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우리의 일본 여행의 마지막 코스인 다카마츠고분으로 갔다. 비가 조금씩 내려 불편할 수도 있었는데 덕분에 날이 시원해 좋은점도 있었다. 고분까지 가는 길이 잘 조성되어 있어 어려움없이 도착할 수 있었다. 7~8세기의 원형고분으로 무덤 내부의 벽화로 더 유명하다. 벽화는 석실의 동쪽과 서쪽 북쪽의 벽면과 천장에 있었으며 어찌보면 고구려 고분 벽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 났다. 다카마츠카벽화관의 팜플렛 제목이 '아스카의 미, 여기에 재현'이라고 되어 있다. 고부에서 내려오다 문무천황릉이라는 길안내 표지판을 보고 이 곳을 찾아가기로 하였다.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문천황묘를 돌아보고 비조리의 마을 전경을 내려다보며 버스정류장으로 돌아왔다. 이제 이 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가기전 쇼핑센터에 들러 간단한 쇼핑을 하고 공항으로 갔다. 입국할 때는 까다롭게 굴더니 출국심사는 의외로 빨리 통과했다. 탑승시각까지 약간의 시간이 있어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면세점도 구경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드디어 7시30분 대한항공 760편으로 부산으로 떠났다. 9시 5분 부산에 도착하여 입국수속하고 공항 로비에서 3박 4일 오.나.교 일정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게됨을 자축하며 함께했던 향토회원들과 아쉬운 작별을 했다. 그동안 수고해준 우리가이드님께 감사드리고 안전여행을 할 수있게 주관해준 은성관광 이**이사님께도 감사드린다.
다카이치지구의 서남쪽 사카아이(坂合) 지구 히노쿠마[檜畏] 지역에 있다. 구릉의 남사면에 만들어진 길이 약 18m, 높이 약 5m의 원분(圓墳)으로, 1972년 3월에 발굴 조사한 결과, 매장 주체부는 잘 다듬은 응회암 판석을 이용해서 구축한 굴식돌덧널[橫穴式石槨]로 정확히는 널길[羨道]이 없는 앞트기식돌덧널[橫口式石槨]의 구조를 하고 있으며, 묘실의 크기는 길이 2.65m,너비 1m, 높이 1.13m이다.
다카마쓰총의 돌방내부는 도굴로 교란되었지만, 금구나 정(釘)으로 장식되고 옻칠을 한 나무관이 있고, 주요한 부장품으로는 해수포도무늬거울[海獸葡萄文鏡]·은제대도외장구(銀製大刀外裝具)·금동투금구(金銅透金具)·금동식금구(金銅飾金具)·파리제소옥(玻璃製小玉) 등이 있었다.
해수포도무늬거울은 중심에 사자 여섯 마리와 포도무늬를 새기고 변두리에는 포도무늬·나비·새 등을 새겼다. 이는 중국에서도 유래가 드문 구리거울로 당나라의 것으로 보인다. 금동투금구는 관에 장식하는 금구의 일종으로, 모양은 꽃잎과 나뭇잎 모양으로 구성하였으며, 중심에는 국화무늬를 배치하였다. 이 외에 당풍(唐風)의 칼장식 금구 및 청색소형옥 936개, 하지키[土師器]와 스에키[須惠器]에 속하는 토기 22점이 발견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다카마쓰총고분 [高松塚古墳(고송총고분)] (두산백과)
다카마쓰총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는 데 있다.
특히 일본의 고분에서는 처음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돌덧널 내부는 전면에 회발이를 하였고 천정 및 벽측면에 성수(星宿)·일월(日月)·사신(四神)·인물군상(人物群像)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천정부의 거의 중앙에는 길이 약 0.9cm의 원형 금박을 칠하고 붉은 선으로 별자리를 표현하고 있다. 동쪽 벽면에는 중앙 상부에 금박의 일상(日像)과 그 밑에 청룡(靑龍), 남·북에 남녀 각 4인의 군상이 그려져 있고, 이것의 서쪽 벽면에는 은박의 월상(月像)과 백호(白虎), 남·북에는 남녀 4인의 군상이 그려져 있다.
이들 16인의 인물들은 각기 지물(持物)을 들고 있다.
벽화에 그려진 인물군상은 당나라 초기 벽화무덤에 자주 보이는 일하는 여인상[仕女像]과 관련되며, 또한 호류사[法隆寺] 금당에 그려진 벽화에서도 어느 정도 연관된 무늬를 엿볼 수 있다. 이처럼 이 벽화는 중국이나 한반도로부터 전래된 회화 기법을 기반으로 새로운 당대 회화의 양식도 채용하여 일본 독자의 화면을 구성한 것이다.
이를 통해 볼 때 이 벽화는 7세기 말에서 8세기 초에 그려진 것으로 생각된다.
혹자는 벽화의 내용 중 사신도(四神圖)가 고구려의 중화진파리 1호분 및 강서삼묘의 대묘·중묘의 것과 유사한 양식과 기법을 보이고 있는 점 등으로 미루어 8세기의 작품으로 추정한다. 매장된 사람은 40∼60세의 장신(長身) 남성으로 생각되며, 부장품이나 벽화의 주제로 보아 왕족(王族)·귀족 등의 유력자였을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으로 고분의 피장자가 한반도에서 건너간 고구려와 백제 중 어느 나라와 더 관계가 깊은가에 대하여는 앞으로 연구가 필요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다카마쓰총고분 [高松塚古墳(고송총고분)] (두산백과)
문무천황릉에 대한 궁내청의 푯말.
궁내청은 천황실 소속으로 천황가 및 천황릉, 문물들에 대한 관리를 하고 있다.
일제시대나 그 이전에 유출된 문화재를 많이 보관하고 있다.
몬무(문무)천황
덴무(천수)천황과 지오(지통)천황의 손자로 42대 천황이다. 젊었을때 사망하여 별로 알려진 내용이 없다
문무천황묘에서 내려오며 바라본 비조리마을의 모습
다시 한번 바라본 다카마츠고분
기와에서 떨어지는 물을 받는 물받이가 너무 예쁘다.
아스카문화
7세기 전반 스이코 천황[推古天皇] 때, 아스카[飛鳥] 지역(현재의 나라[奈良] 지역)에서 발달한 문화를 말한다. 쇼토쿠태자[聖德太子]가 중앙집권체제 강화를 위하여 불교를 국가적으로 보호하는 과정에서, 일본 사회에 널리 침투한 최초의 불교문화였다.
고구려, 백제, 신라와 중국 남북조 등의 영향을 다양하게 받으며, 유교와 도교 등 외래 학문과 사상이 다양하게 나타나 국제성이 풍부한 문화였다.
쇼토쿠태자는 594년 불교를 장려하는 조서(詔書)를 내리고 직접 불교서적으로 저술하는 등 불교의 이해와 보급에 힘썼다. 일본에서는 이미 신도(神道)가 널리 확산되어 있었으나, 불교는 기존의 혈연적 집단과는 무관한 통합정신을 제시하였기 때문에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려 했던 쇼토쿠태자에게 유용한 사상으로 활용되었다.
이렇게 쇼토쿠태자가 불교를 장려하자 호족들은 고분(古墳)을 축조(築造)하여 가문의 권위를 과시하던 이전의 방법보다는 가문의 이름을 건 사찰(씨사,氏寺)을 세우는 방향을 택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일본 내에서는 불교 사찰이 활발하게 건립되었는데 소가씨[蘇我氏] 집안에서 세운 아스카사(飛鳥寺), 조메이 천황[舒明天皇]이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구다라다이사(百濟大寺), 쇼토쿠태자가 창건한 시텐노사(四天王寺), 호류사(法隆寺), 도래계의 하타씨(秦氏)가 세운 고류사(廣隆寺) 등이 대표적인 사찰들이었다.
이렇게 세워진 불교 사찰에는 불상(佛像)이 소장되었는데,
이 시기에 제작된 불상들을 아스카불[飛鳥佛]이라 부르며 이들은 아스카 문화를 대표하는 작품들이 되었다. 이 불상들은 고구려와 백제를 거쳐 전해진 북위(北魏) 양식과 남양(南梁) 양식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북위 양식의 영향을 받은 불상들은 단정하고 힘차며 초현실주의(超現實主義)적인 인상을 주는 것이 특징이다.
아스카사 석가여래상, 호류사 금당의 삼가삼존상, 몽전의 구세관음상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남양 양식의 영향을 받은 불상들은 온화하고 부드러운 표정을 가진 것을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고류사 반가사유상, 호류사 백제관음상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 두 계통 모두 고풍(古風)스럽고 신비스러운 미소를 띠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불교 사찰 건축과 불상 조각 등의 작업도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관련된 여러 기술도 발달하였다. 사공(寺工, 사찰 건축 기술), 와공(瓦工, 기와 제조 기술), 화공(畵工, 회화 제작 기술) 등의 기술적인 측면과 예술적 측면에서의 발달이 두드러져, 화려한 아스카 문화의 한 요소로 자리 잡았다.
또한 중국 대륙과 한반도의 문화를 흡수하면서
삼국악(三國樂, 고구려․백제․신라의 음악과 춤), 기악(伎樂) 등도 전래되었다.
오경박사를 비롯한 유교의 관계자도 도래하여 학문과 사상의 영항을 미쳤다. 또한 도교 사상도 이 시기에 전해지면서 도교 관련 서적이 보급되고 궁정에서는 도교신앙과 관련된 행사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건축이나 조각에서도 도교적인 문양과 조각이 첨가되기도 하였다.
일본에 있어 아스카 시대는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항쟁이 격화되고,
중국에서 남북조의 대립을 통일한 수(隨) 제국이 출현하고 이어 당(唐) 제국이 등장하게 되는 동아시아의 격동기였다.
이러한 급변하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 일본이 흡수한 여러 문화들이 구체화된 것이
바로 아스카 문화인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스카문화 [飛鳥文化]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