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한국의 수련문화 30년 | 이야기 2005/01/07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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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수련문화 30년 김인곤의 취재파일 김인곤 (1999 년 9 월호)
한민국 국적을 가진 사십대 후반의 남자 치고 태권도를 배우지 않은 사람은 없다. 혈기 왕성한 십대 또는 이십대 그 시절 동네마다 무덕관, 지도관, 청도관, 정덕관 해서 도장이 없는 곳이 없었고, 한 겨울 추위에도 아랑곳없이 이른 새벽 골목길 아침잠을 깨우는 것은 태권도 수련생들의 구령 소리였다. 하긴 당시만 해도 군 입대 시 태권도는 테니스나 바둑과 함께 특기자 혜택을 받아 좀더 편한 군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바로 ‘태권도 한국’의 한 풍경이다. 더구나 부대에 따라서는 군 생활을 하는 동안 의무적으로 검은 띠를 따야하는 곳도 많았던 그 시절.
이때까지만 해도 한학(漢學)을 하신 우리의 할아버지들께서는 아침에 일어나시면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르고 두 귀를 잡아당기는가 하면, 빨래 방망이 같은 둥근 통나무를 지근지근 밟으셨다. 또한 그저 앉기만 하면 발바닥을 주먹으로 때리거나 손가락 발가락을 주무르거나 한자 투성이의 책을 소리내어 읽으시면서 허리를 좌우로 흔들곤 하셨다. 바로 그런 동작들이 도인술·양생술이라는 이름의 건강법이라는 것을, ‘야 - 압!’ 하고 주먹을 내지르는 태권도 흉내에 바빴던 손주들은 알 리가 없었다.
수련 문화의 태동
중국 또는 일본이 원산지인 당수도 또는 공수도 체육관과 공존하던 수 개의 태권도 문파가 국기원이 설립된 72년을 기점으로 정부 차원에서 하나의 단체로 통합 정리되는 과정을 밟게 된다. 그 러자 일부 태권도 문파는 이 같은 조치에 반발해 해외로 빠져나가 태권도 열기를 잠재우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동네의 태권도장은 홍콩의 액션 배우 이소룡(73년 사망)의 ‘정무문(精武門)’이나 ‘당산대형(唐山大兄)’의 등장에 힘입어 합기도·십팔기·쿵푸 같은 무술을 가르치는 도장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 때쯤 일제 치하에서 교육을 받으셨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일본어에 능통하셨던 우리의 아버지들 가운데에는 마치 자랑(?)이라도 하듯 그저 틈만 나면 일본어 책을 읽던 분이 계셨는데, 당시 일본에서는 이미 니시 가쯔조 같은 걸출한 인물이 등장해, 서양의학이 아닌 새로운 대안의학으로 운동요법인 모관 운동이나 붕어 운동 같은 니시식(西式) 건강법이나 인도의 요가가 유행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주로 일본 책을 통해 소위 지식층이 들여온 요가는 신체 단련법 위주로 된 ‘하타 요가’여서, 그때 어린 우리들은 요가라는 말 대신 ‘꼰다리 또꽈’로 부르곤 했다.
소설 『단』의 실존 인물 봉우 선생
지 금은 거의 일상 용어가 되어버린 ‘단전호흡’ 또는 ‘운기조식’이라는 용어가 국내에 널리 알려진 것은 지난 84년 기존 중국판 무협소설을 능가하는 재미로 채워진 소설 『단』이 신생 출판사인 정신세계사에서 출간되면서부터였다. 더구나 소설 속의 주인공인 권필진 옹이 실존 인물인 봉우 권태훈 옹을 모델로 했다는 다분히 의도적인(?) 소문이 돌면서 소설 『단』은 폭발적인 인기를 끌기에 이르렀다.
1900년 서울 종로구 제동에서 태어나 94년 타계한 봉우 선생은 한의사로, 그리고 단학을 보급하는 한국단학회 연정원(韓國丹學會 硏精院)의 창시자로도 유명했지만, 단군을 섬기는 대종교의 최고직인 총전교로도 이름을 떨쳤다. 소설 『단』은 제목이 의미하듯 상당 부분 실제 상황이 포함되어 있지만,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닌 소설이라고 작가이자 당시 정신세계사 초대 편집장이었던 김정빈 씨가 밝혔음에도 불구하고,‘독립문을 한 걸음에 뛰어넘거나 손가락으로 가리키기만 해도 나는 기러기가 떨어지는’초능력의 발현이 우리의 전통적인 수련을 통해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는 강한 암시를 주었다.
최 고 인기를 누렸던 중국판 무협소설에 빠져 있던 젊은이들은 완전한 허구라고 생각했던 무협지의 주인공이 초능력을 갖게 되기까지의 과정에서 등장하는 각종의 수련 관련 용어들, 다시 말해 운기조식이나 분골착근, 환골탈퇴, 전음입밀, 주화입마 같은 현상들이 실제로 우리의 전통 수련문화인 선가비법(仙家秘法) 속에 존재했고, 또 그런 과정을 거친 실존 인물이 있다는 막연한 믿음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봉우 선생은 ‘평생을 통한 수련으로 얻게 된 통찰력’에 근거, 『백두산족에 고함』이라는 저서를 통해 ‘우리 민족은 인류 최초의 동방문명(東方文明)을 건설한 백두산족이며, 사물 즉 물질문명이 극에 달하면 반드시 반대인 정신문명으로 되돌아온다는 물극필반(物極必返)의 원리나 백두산족에 찾아온 삼천 년만의 대운이 연계된 황백전환론(黃白轉換論 : 지금까지 백인들이 주축이 되어온 서구 문명의 선도적 역할은 이제 한 세대 안에 끝나고 황인종 특히 한국·인도·중국인을 중심으로 새로운 문명이 열린다는 이론)에 의해 머지않아 홍익인간 이념을 바탕으로 한 백두산족이 절대 평화의 세계 통일을 이룬다’는 논리를 펼쳤다. 이처럼 독특하고 신선한 사상 체계는 우리 것에 목말라 하던 수많은 젊은이들을 매료시켰다. 열화 같은 독자들의 요구를 감지한 정신세계사는 85년 여름 류관순 기념관에서 봉우 선생의 특별 강연회를 열었고, 무려 이천오백 여명의 청중이 몰려드는 대성황에 힘입어 열흘 후에는 여의도 광장에서 또 한 차례의 강연회를 개최, 역시 대인기를 끌었다. 이 같은 관심에 부응, 봉우 선생은 86년 2월 종로구 내수동 한국 빌딩에 한국단학회 연정원을 열었고 그 이후 ‘호흡법 곧, 조식법을 통해 단학을 수련한다’는 말의 줄임말인 ‘단전호흡’이라는 용어가 일반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여 섯살 때 모친으로부터 호흡법(調息法)을 배웠으나 열살 되던 해에 수명이 다해 이승을 하직하고 선계(仙界)에 갔다가 우여곡절 끝에 다시 살아나는 과정에서 봉우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권옹이 그토록 알리고 싶어했던 단학은 천부경에서 시작되어 조선시대 중엽, 정북창이 남긴 수단서(修丹書)인 용호비결(龍虎秘訣)을 논리의 기본으로 삼는다.
그러나 봉우 선생이 총전교로 이끌어오던 대종교는 92년, 후임 안호상 총전교의 쿠데타 사건으로 권 총전교가 비상 대권을 발동하는 등 파란의 내분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구한말 세도가의 외아들로 자라 일본에 유학했던‘상류층 자제’ 봉우 선생에 대한 다양한 재평가가 등장했는데 “원래 무협지를 광적으로 좋아했었다” “일본 유학시절 ‘오까다식 정좌법(精坐法)’을 배운 것이 전부” “칠십년대 중반 매일 아침 통행금지가 풀리는 새벽 네시 삼십분쯤이면 청산거사가 창시한 국선도(그 때는 정각도) 수련장에 나타나 세 시간씩 수련을 하는 바람에 수련장 문을 닫지 못했다”는 이야기들이 꼬리를 이었다.
수련을 시작할 때 중요한 점은, 맹목적으로 수련에 뛰어드는 것보다 어떤 수련법이 자신에게 적합한 지를 판단하는 일이다. 바로 그 수련법을 찾기 전까지는 가능한 한 여러 가지 수련법을 경험해보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의학적으로나 심리학적으로 자신에게 적합한 수련법을 찾고 난 뒤에는 곁을 돌아보지 않는 의지가 필요하다.‘무엇인가를 반드시 이루어 내겠다’는 분심(奮心)이 수련의 경지를 높이는 근원적이고 또 결정적인 동기가 되기 때문이다.
마라톤 선수에게 축지법 훈련
86 아시안 게임과 88 올림픽을 서울에서 개최하기로 결정되어 국내 체육계의 기대가 한껏 고조되고 있던 83년, 무교동 대한체육회 회장실로 한 통의 편지가 배달됐다. 붓으로 직접 쓴 유려한 한문체의 편지는 ‘본인은 어려서부터 우리 전통의 심신 수련법인 단학 공부를 한 사람으로서, 소싯적에 충남 온양에 살았는데, 축지법을 배운 관계로 아침을 먹고 온양에서 출발해 한양에 와서 볼일을 보고, 한양에서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가 잠을 자곤 했다. 말로 하기는 어려운 선배들의 엄청난 능력을 얘기하기는 무엇하지만 내가 배운 축지법을 마라톤 선수들에게 전수하면 금메달은 따 놓은 당상’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편지는 당시 체육회를 출입하던 기자들에게 우스갯 소리로 공개되었다. 그 러나 당시 중앙일보 기자였던 필자는 특별한 호기심을 품고 전화로 인터뷰를 요청했는데, 편지의 주인공은 밤 열한 시에 자신의 거처에서만 만날 수 있다고 했다. 그 때 필자는 세검정의 계곡에 위치한 한의원으로 찾아가, 수 차례 대한체육회로 날라왔던 흥미로운 편지의 주인공 여해 권태훈 옹을 만났다. 장시간 축지법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으나 그 때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얘기들이 많았다. 축지법에 대한 권옹과의 대화 한 토막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문 : 축지법이 실제 가능한 것입니까? 답 : 마라톤 선수가 최고 속도로 계속 달리려면 무엇이 문제인가. 자신이 달릴 수 있는 가장 빠른 속도로 끝까지 달리면 되는 것이 아닌가? 문 : 가장 빠른 속도로 끝까지 달릴 수 없는 것이 문제죠. 답 : 왜 그렇게 못하는데? 문 : … . 아마 숨이 차고 힘이 들어서일 것입니다. 답 : 계속 달려도 숨이 안 차고 다리가 아프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닌가? 문 : 그렇겠죠. 답 : 숨이 차는 이유는 두 팔을 위 아래로 흔들기 때문이야. 두 팔을 좌우로 흔드는 주법을 익혀야 해. 아베베를 봐. 달릴 때 두 팔이 좌우로 흔들리고 있어. 다음으로 발자국이 한 일자로 남아야 해. 호랑이를 봐. 발이 네 개지만 발자국은 한 줄로 나잖아.
결 국 마라톤 선수에게 축지법을 가르치고 싶다는 권옹의 이야기는 지금은 폐간된 《주간 중앙》에 화제성 기사로 소개되었고, 이후 모 텔레비전방송에서 인터뷰와 함께 권옹이 직접 지팡이를 양손으로 잡고 눈이 쌓인 집 앞마당에서 간단하게 축지법 시범을 보이는 모습까지 소개되기도 했다.
권옹에 대한 언론의 보도는 청와대 비서실에 근무하던 육군사관학교 출신 L씨의 관심을 끌었고, 결국 대한 육상연맹은 축지법 훈련을 희망하는 꿈나무와 2진급 선수를 추천, 실제로 축지법훈련에 돌입했다. 권옹은 대표 선수들을 희망했으나 스포츠과학 연구소에서 2주마다 경기력 향상 측정을 받는 조건으로 훈련 결과를 보면서 결정하자는 쪽으로 합의를 이뤘다. 훈련을 실시하면서 스포츠과학 연구소의 의견은 “심폐 기능은 향상되고 있으나 근력은 오히려 퇴보되는” 것으로 나타났고, 이에 권옹은 특수한 약(한약)을 복용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희귀 약재 구입을 위해 홍콩에 다녀오기도 했다. 이후 희귀 약재가 국내로 반입되는 과정 중에 김포세관에서 말썽이 일기도 했는데, 결국 축지법 훈련은 유야무야 끝나고 말았다. 그 러나 수 년 뒤 당시 축지법 훈련을 받았던 장거리 선수 가운데 종목을 경보로 바꾼 K모군은 세 차례나 한국 신기록을 수립하는 결과를 낳아 “축지법은 역시 달리는 법이 아니라 걷는 법인 모양”이라는 비아냥거림이 관계자들 사이에 유행하기도 했다.
최초로 대중 수련 지도를 시작한 국선도
사 실 ‘단전호흡’ 또는 ‘기(氣)’라는 용어를 내놓고 사용하지 않았을 뿐, 국내에서 정식으로 수련장을 열고 일반 대중을 상대로 수련 지도를 시작한 인물은 청산 고경민 선사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전에도 물론 국내에 수련문화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수련이라는 용어 자체를 사용하지 않았을 뿐 호흡법 또는 조식법이라는 이름으로, 주로 산중의 이름 없는 스님들 사이에 개인적으로 전수되거나 알음알음으로 수련에 입문한 사람들이 있긴 있었다. 그런데 이 수련법들은 전인적인 품성도야나 깨달음을 얻기 위한 총체적 목적이라기보다는 무술적인 성격이 강했고, 효과적인 신체단련을 위한 방편으로 호흡 조절법 가운데 한 가지인 역호흡법들이 주를 이루었다.
같은 맥락으로 초야(충남 천안군)에서 맥을 이어오던 청산거사가 하산한 시기가 1967년. 초기에는 개인적으로 몇 명의 제자를 받아들여 생식(生食)과 함께 주로 외공(外功) 위주의 수련을 시켰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시에 제자들과 함께 시범단을 구성하여 각종의 차력 시범을 보이는 것으로 수련 홍보에 나섰다. 당시만 해도 기(氣)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사람이 많지 않아, 수련과정에서 얻게 되는 경지를 간접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현상으로 초능력을 보여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지금은 차력이라는 말이 윈래의 뜻과 꽤 거리가 있으나 당시에는 ‘차력이란 도통(道通) 공부를 통해 얻게 되는 초능력으로, 자연에서 힘을 빌려쓰는 것’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였다. 초기 시범단이던 청산거사와 1대 제자들의 이름이 신력사(神力士 : 청원 박진후), 태력산(太力山 : 청화 김종무), 철선녀(鐵扇女 : 김단화, 후일 청와대 경호실 지도)인 것을 미루어 보아도 당시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68년 청산선사는 당시 내로라 하는 차력사가 모두 참가한 민족정기 선양대회(회장 이갑성)에서 철화방(鐵火房 : 불 속에서 견디는 수련)을 보이는 등 차력 시범을 계속해 이름을 얻었고, 이를 계기로 70년 4월 단성사 부근의 팔진옥 4층에 최초의 수련장을 개설하였다.
“70년 4월 사부님을 모시고 도장 개관 기념 일본 후지 텔레비전 강의 및 시범을 했고, 12월에는 철선녀 외 또 한 명의 여자 수련생을 데리고 동남아 순방 시범을 했다.”(청화 김종무 법사 증언) 국선도가 칠십 년대 중반까지도 신체단련 위주의 외공이 우선이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82년 도로공사 임직원을 위한 수련 모임을 만들었을 때에도, 제자의 머리 위에 바위를 올려놓고 해머로 내리쳐 깨트리는 시범을 보였다.
초창기의 국선도는 한 곳에 정착할 수 없으리만치 여건이 미비하여 수련장을 응암동, 청계천으로 옮겨다니다가 71년에 현재 본부수련원으로 사용하고 있는 종로4가 백궁 빌딩에 자리를 잡았다. 명칭도 71년에는 사회단체 정신도법 교육회였다가 1986년에 이르러 현재의 국선도법 연구회(사단법인)로 등록을 했다. 본원 개원 직후인 칠십 년대 초반까지 수련법 명칭은 국선도가 아니라 신라의 화랑(일명 國仙)들이 수련했던 정통의 심신 수련법인 정각도(正覺道)였다. 정각도라는 이름이 국선도(國仙道)로 바뀐 것은 칠십년대 중반. 이 때를 즈음해서 국선도는 다시 국선도(國■道)로 이름이 바뀌면서 청산거사도 청산선사로 승격했다. 그 이유는 정각도라는 이름으로 밝달법(국선도의 우리말)을 수련하던 문하생들의 수준이 점차 높아지면서 고급 단계인 통기법(기혈 순환 유통법)을 수련하게 되었고, 수련 단계를 체계화하는 과정에서, 초급 과정을 정각도라 했기 때문에 총괄적인 수련과정을 의미하는 국선도로 명칭을 바꾸게 되었다는 것이 국선도 측의 설명이다.
국선도에 관한 두 가지 비밀
국선도는 사실 우리 나라 수련단체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그러면서도 구십년대 초반까지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첫 번째 이유는 초창기 국선도의 경우 초능력적인 차력 시범을 위주로 소개되었던 까닭에 특별히 무술 지향적인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수련을 희망하는 대중적 요구가 너무도 빈약했다는 점이다. 동시에 이 같은 무술적인 능력자들을 필요로 하는 소위 군 고위층이나 정부 요인 같은 고위 정치권에서 먼저 관심을 보였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시범단의 잦았던 군부대 차력 시범을 비롯해 청와대 경호실 직원들을 지도했던 철선녀의 경우, 그녀가 행한 것은 무술 지도였지 정신적인 수련 지도 차원이었다고 보기는 힘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고위층이나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지식층과 가까워졌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현재 국선도를 수련하는 회원들의 친목 모임인 단우회의 회장직은 윤필용(前 도로공사 사장) 씨가, 선우회 회장직은 장덕진(前 농수산부 장관) 씨가 맡고 있다가 최근에는 남욱(前 한화그룹 부회장) 씨로 바뀌었다는 사실만 보아도 이 같은 추측이 사실과 무관하지는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국선도의 정신적인 바탕과 실제 수련법이 현재의 체계를 갖추게 된 것은 칠십 년대 초반부터 중반에 걸쳐서이다.
이들의 차력 시범이 유명세를 타면서 수련장은 시내 복판인 종로통으로 이전하게 되었고, 이 시기를 전후로 동양 철학과 민족주의 역사관을 가진 많은 식자층들이 관심을 갖고 개입되어 정신적인 체계를 확립하는 한편, 수련법 체계도 차츰 일반인을 위해 외공의 비중을 줄여가면서 현재의 수련법 체계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국선도의 이론적 정립에 관여하면서 이십여 년간 국선도 고문을 맡았던 김건(작고) 씨는 문교부 사상국장을 거쳐 건국대 문리대학장을 지냈다.
“시내의 백궁 도장 운영을 계획하면서 수련법을 재정비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됐는데, 내공 50%에 외공 20%, 이론 30%로 잡고, 이론은 동양 철학과 음양오행, 민족사관을 중심으로 하자고 했다. 여기에 한의학, 서양 철학과 심리 상담, 한문과 붓글씨를 넣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청화 김종무 법사, 일명 太力山의 증언)
“사부님께서 너는 근골이 좋으니 외공도 배워 보라고 하셨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때 사부님 말씀을 따르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된다.”(평광 임경택 법사 증언)
“육 십 년대 정치적 이유로 수형 생활을 하는 동안 요가를 접하게 됐고, 요가의 원리를 이해하고 수련을 통해 건강을 되찾으면서 어릴 적 한학(漢學)선생이신 최일중 씨가 우리에게 강요했던 도통(道通)공부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나름대로 요가와 어릴 적 배웠던 조식행공(調息行功)을 병행하면서 전신에 퍼지는 열감을 경험했다. 때문에 우리의 전통 수련법인 선도(仙道)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칠십 년대 초반 선도 수련단체의 체계를 확립하는데 직간접으로 도움을 준 적이 있다.”(前국회부의장 청곡 윤길중 씨의 증언)
“내가 국선도에 입문한 것은 국회부의장이던 청곡 선생과 김 건 고문님의 권고에 의해서이다.”(김용태 국선도 연구회 이사의 증언)
두 번째 이유는 청산 거사의 재입산이다. 국 선도가 차력 위주가 아닌 일반인의 심신수련 단체로 뿌리를 내리고 자리를 다져 가는 한편, 사회적으로도 호흡이나 명상, 또는 수련이라는 단어가 차츰 일반인들에게 부담감 없이 받아들여지기 시작할 무렵인 84년, 돌연 청산거사의 행방이 묘연해졌다. 국선도 측은 청산거사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글을 통해 이렇게 소개한다.
“나는 산중에서 세간으로 도법을 끌어내왔고, 나에게 주어진 시간 내에 되도록 많은 사람에게 펼쳐야 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전국적으로 많은 도장이 확산되어야 하는데 지도자가 없으니 과도기적 방편으로, 사회적으로 신망을 얻고 인품을 갖춘 몇 명을 모아 집중적으로 교육시켜 앞에 내세우고 배우며 가르치게 했다.’라는 말에서 ‘주어진 시간’이라는 글귀를 지적한다. 딱 꼬집어 말하지는 않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다하고 靑山이라는 이름 그대로 청산으로 되돌아 가셨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 동시에 퍼져 나온 소문이 ‘정보기관 연행설’, ‘고문으로 인한 사망설’ 들이었다. 앞에서 지적했듯, 민족사관에 입각한 식자층과 고위층을 둘러싼 청산거사의 발 넓은 행보가 정치권의 알력에 의해 저지 당한 것이 아닌가하는 추측 때문이다. 누군가가 나서서 밝히기 전까지는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정신세계사, 책방 정신세계 그리고 정신세계원
소설『단』의 저자는 김정빈 씨가 틀림없으나 『단』을 기획하고 실제로 권태훈 옹을 만나 구술을 녹음한 장본인은 당시 정신세계사 송순현 사장이다. 정 신세계사는 84년 1월에 설립되어 『요가난다』 『어린이 정신세계 시리즈』를 발간했고, 세 번째 기획물이 바로 소설 『단』이었다. 송순현 사장은 출판사를 설립하기 전인 81년 이미 마인드 컨트롤 한국지부에서 봉준식 신부에게 마인드 컨트롤을 배우면서 정신수련에 입문했다. 그후 소설 『단』이 당시로선 거의 전무후무한 베스트 셀러가 되면서, 86년 봉우선생이 설립한 한국단학회 연정원의 1 기 수련생으로 입문, 스스로도 수련인의 길을 걷게 된다.
정신세계사는 그 이후 자연스럽게 뉴에이지 관련 전문서적을 발간하는 차별화된 출판사의 길을 가게 되었고, 국내 수련인들 사이에 정보 교환의 구심점 역할을 담당하였다. 90년에는 대학로에 자사 출판물은 물론 다른 출판사에서 발간된 정신 수련 및 정신세계 관련 서적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서점 ‘책방 정신세계’를 열었다. 반면 수련인으로서 송사장은 92년 미국에 유학, 마인드 컨트롤 전문강사 자격을 얻었고, 93년에는 심신 수련 전문 문화센터인 정신세계원을 설립했다. 95년 ‘책방 정신세계’는 광화문으로 장소를 옮겨 도심 한복판의 명소가 되는데, 이 때를 전후로 출판사와 서점, 정신세계원이 분리되면서 송사장의 친구인 정주득 사장이 운영을 맡고, 송사장은 정신세계원 운영에만 전념하게 된다.
마인드 컨트롤과 마인드 컬처
‘마 인드 컨트롤’이 국내에 본격적으로 柰났?것은 79년 마인드 컨트롤을 창안한 호세 실바 박사의 내한 강연회를 기점으로 해서다. 이후 봉준식 신부가 이끄는 마인드 컨트롤 한국지부가 설립되어 80년대 초반 수많은 사람들이 마인드 컨트롤을 익혔다. 마인드 컨트롤은 점진적 이완 방식을 사용해 최대한 육체를 이완시키는 한편 의식의 수준을 낮추어 잠재의식 수준까지 끌어내린 다음, 원하는 상태를 기억하게 하는 심리 조절법을 말한다. 그러나 엄격하게 따지면 마인드 컨트롤은 이미 70년대 초반 ‘마인드 컬처’라는 이름으로 국내에서 교육되고 있었다. 당시 신학대학 교수였던 천년수 박사는 일본어로 된 관련 서적을 통해 마인드 컨트롤을 알게 되어, 종교적인 신앙심과 마인드 컨트롤, 여기에 우리의 전통적인 수련법 가운데 조심법(調心法) 원리 등을 배합해 ‘마음을 조절한다’는 의미가 아닌 ‘마음(잠재 의식)에 씨앗을 뿌린다’는 뜻의 컬처(culture)라는 이름으로 마인드 컨트롤 기법을 가르쳤다. 때문에 우리의 전통 수련법 이론인 ‘일지심(一止心)이 곧 정(正)’이라는 수련에 임할 때의 정신적 자세를 강조했다.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수련의 정신은‘전통의 선도(仙道)’였고, 기술적인 테크닉은‘마인드 컨트롤’이었던 셈이다.
기수련의 기업화·대중화에 성공한 단학선원
우 리 전통의 신선도(神仙道)와 단학(丹學)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문화, 새로운 철학, 새로운 가치관이 곧 인류의식이라는 커다란 화두를 내건 수련 단체가 ‘현대 단학’을 보급하는 단학선원이다. 최초의 단학선원이 신사동(현재 단학선원 강남센터)에 문을 연 것은 1985년 5월. 단학선원이 불과 십오년만에 오늘날 소위 신비주의와 함께 세기말 현상의 하나로까지 회자되는‘기(氣) 신드롬’의 주역으로 자리잡게 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대외적으로 단전 호흡이나 수련이라는 용어보다는 ‘기(氣)’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선원’이라는 명칭인데, 같은 서울의 강남구 신사동에서 시작되어 폭발적 중흥을 이룬 불전(佛殿) 능인 선원을 의식했을 가능성이 크다.
정확하게 말해서, 전국의 단학선원 수련장에는 ‘단학(氣)선원’으로 표기되어 있다. 현재 국내 최대인 삼백 개의 수련장, 곧 지원을 보유한 단학선원의 시작은 바로 ‘기(氣)’라는 용어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단학(氣)선원이 문을 열기 전인 79년, 국내 재벌기업의 하나인 선경그룹에서 새로운 경영관리 시스템을 구축하면서 사원들의 ‘패기(覇氣)’를 슬로건으로 내걸었던 사실이 계기가 된다.
80년대 초, 고(故) 최종현 회장은 ‘氣’라는 단어에 관심을 가졌고, 측근인 손길승 경영기획실장에게 “기(氣)가 있는지 알아 보라”고 지시하는 한편, 스스로도 각종 관련 서적들을 통해 기의 존재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한다. 손길승 실장은 단학(氣)선원에서 ‘기’를 찾았고 삼 개월여를 직접 체험한 후, “회장님, 氣는 분명 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단학선원과 선경그룹의 밀월 관계가 시작된 것은 86년, 최회장은 단학선원이 파견한 지도자의 지도를 받으며 매일 아침 워커힐의 자택에서 단학선원 방식의 수련을 시작했다. 세간에는 단학선원의 창시자인 일지 이승헌 선사가 직접 지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이 때부터 89년까지 단학선원은 물심양면에 걸쳐 최회장으로부터 그룹 차원의 지원을 받게 된다. 그룹 전체의 임직원은 물론 사원 가족까지 건강을 위해 단학선원 방식의 수련을 받게 되면서, 공식·비공식 경제적 지원이 시작된 것이다. 예를 들어 단학선원에서 지원을 설립하면, 지원 설립에 필요한 경제적 지원뿐 아니라 선경그룹 사원들로 회원 수를 채워준다는 식이었다. 이 같은 지원에 힘입어 86년 한 해 동안 전국 주요 도시에 무려 열두 개의 지원이 설립된다. 그러나 단학선원이 선경그룹으로부터 받은 지원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돈이 아니라 투자 과정에서 관련 임직원들로에게 직간접으로 배우게 된 경영 마인드다. 선경그룹으로부터 배운 경영 마인드로 일지선사는 단기간에 지도자를 배출하는 한편, 지원 설립을 늘려가면서 수련과 관련한 책자나 명상 테이프, 건강제품 등을 지속적으로 개발해 상품화했다. 또한 회원들에게 건강을 판매하는 한편, 심성수련 같은 이벤트성 행사에 기존 회원들을 적극적으로 참여시켰다. 계열사 제품을 그룹사 임직원들에게 판매토록 하는 재벌 기업의 경영 방식을 그대로 채택한 것이다.
또 기업체에서 사원들의 결속을 다지고 내외부인들을 향한 홍보 수단으로 사보를 발행하듯, 내부자용 소식지와 외부인용 월간지를 겸하는《건강 丹》(현재는 《힐링 소사이어티》으로 제호가 바뀌었음)의 발행을 시작했다. 이 같은 바탕 다지기를 거친 결과 93년에는 서른여섯 개의 수련장이 생겨났고, 96년 1월에 일백 개, 7월에 이백 개, 9월에 삼백 개의 수련장으로 확대되었다. 국내의 다른 수련단체들은 엄두도 내지 못할 전무후무한 대약진을 기록했으니, 기업적 관점에서 보면 전국에 삼백 개의 직영점을 갖게 된 것이다 . 99년 현재 단학선원은 이미 단순한 수련 단체라기보다는 거대한 재벌 그룹의 양태를 띠고 있다. 단학선원을 모체로 하는 한문화 운동본부가 중심이 되어 국내에 사단법인 한문화원, 도서출판 한문화, 천지인 상사, 한문화 기획, 야외 수련장 천화원(충북 영동), 천화 의원과 기의학 연구원, 인체과학 연구원, 한국 기공사 연합회, 단군 민족 일체화 협의회 등 여러 관련 조직을 갖추고 있고, 건설 및 여행업에도 손을 대고 있다. 그런가 하면 공원, 약수터 등 무료 수련장이 이천여 개에다 백육십 개의 직장 단위 수련장을 운영하고 있고, 그 동안 양성된 단학 강사의 수만도 오천 여명에 이른다. 가히 국내 ‘기 신드롬의 주역’‘기 재벌’이라는 말이 어울린다.
일지선사와 단학선원
단학선원을 창시한 일지선사 개인 신상에 관한 이야기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1950년 충남 천원군에서 태어나 친구의 죽음을 목격했고, 정신적 방황기에 깡패들에게 맞은 후 태권도와 합기도를 익혔다고 한다. 이후 야간 전문대학에서 임상병리학을 공부하고 단국대 체육교육학과에 편입, 졸업한 일지 선사는 학비를 벌기 위해 태권도장을 직접 운영할 만큼 일가견을 가진 무도인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던 어느 날 태극권에 관한 책을 통해‘천하무적이 될 수 있는 기의 세계’에 빠져든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유일하게 대외적으로 밝힌 이력 사항으로는 한독병원 병리실장이라는 직함이 있다. 단학이라는 우리 고유의 수련 철학 체계를 배워 나름의 체계를 확립한 시기는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반.
백일 수련을 통해 “북두칠성이 백회혈로 쏟아져 들어오는” 경험을 했고, 또 다른 고행을 통해 “천지 기운이 결국 내 기운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됐다”고 한다. 이후 82년 경기도 안양의 충현탑 공원에서 무료 단학 수련을 지도하기 시작, 단학 지도자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나 이 기간 일지선사는 기 수련과 스스로 말하는 ‘깨달음’을 풀어내는 과정에서 자신이 공부한 기초 의학 분야의 지식을 적절하게 결합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70년대 후반 국내에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한 마인드 컨트롤을 배워 상당한 조예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어, 수련법을 체계화하는데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최초의 수련장인 신사동 수련장을 운영할 당시까지 일지 선사는 쿵후나 십팔기, 합기도와 같은 무술도장을 운영하는 사람들의 모임인‘영등포 모임’에 꾸준히 참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이들 사이에서 “무술도장의 퇴조에 따라 건강 쪽으로 가야한다”는 논의가 활발했었다는 소문을 증명이나 하듯, 지압과 안마를 배우는 데도 상당한 시간을 할애한 것으로 알려져 이같은 추측을 뒷받침하고 있다.
단학선원이 대외적으로 표방하는 것은 ‘몸과 마음의 건강’이다. 그러나 단순한 건강 외에 정신적으로는 전인류적 평화를 이루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지구촌 시대를 맞아 모든 사람을 이롭게 하는 새로운 정신이 필요하고, 그 실질적 대안으로 우리 민족이 가진 천지인(天地人) 정신을 내세운다.
전 인류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유일한 정신, 동시에 ‘홍익인간(弘益人間)·이화세계(理化世界)’라는 단군의 건국 이념을 포함하는 인류정신으로서 ‘한 정신’을 주장한다. 그리고 ‘한 정신’을 깨닫기 위한 구체적 수단, 곧 수련법으로 신선도와 단학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전통적인 단학이 아닌 ‘현대 단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동시에 지향하는 목표나 수련법 등을 우리의 전통적인 수련 지침서에서 인용하면서도 결코 어렵거나 깊이가 심오한 단어들을 사용하지 않고, 알기 쉬운 현대적 감성어를 사용하여 일반화시킨다. 따라서 수련 방식의 논리나 체계가 미비하다는 지적을 받기는 하지만, 쉬운 것을 선호하는 젊은 층으로부터 커다란 호응을 얻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 일례로 현재 전국 오십 개 대학에 ‘바숨(바르게 숨쉬기) 동아리’가 결성되어 있다.
단학선원과 선경그룹의 최회장 사이의 밀월 관계가 어긋나기 시작한 것은 88년 말, 단학선원 창설 멤버인 안동환(선경그?심신수련실장) 씨가 아예 선경 그룹으로 자리를 옮기면서부터이다. 안씨는 그 이유에 대해 구체적으로 밝히기를 꺼려하지만, 최회장은 단전호흡을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하여 활기찬 실생활에 도움이 되도록 하는 수련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데 반해, 단학선원의 정신적인 방향이 단군 사상 쪽으로 강하게 기울어지는 데 불만을 나타내지 않았는가 하는 추측이 가능하다.
단학선원이 확장 또 확장을 거듭하던 93년 6월, 신문 사회면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서 울 동부지청 특수부 박준모 검사는 3일 정력제, 죽염 등을 불법 제조, 단학 수련생들에게 판매한 혐의(보건범죄단속에 관한 법률위반)로 한국 단학협회 회장 이승헌 씨(41.단학선원 원장)와 사범 강기문(28), 이종화(24) 씨 등 3명을 구속했다. 이 씨 등은 90년 5월부터 지금까지 단학선원 기숙사(포이동 184)에서 생강, 꿀, 감초 등을 섞어 만든 60개들이 정충단 1천6백여 갑과 시중의 죽염을 재포장한 천화 죽염 2천3백여 개를 단학선원 본부와 전국 32곳의 산하분원에서 수련생들에게 팔아 2억7백만 원 상당의 부당 이득을 챙긴 혐의다 … . "
이후 이 사건이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확인할 길은 없으나, 일지 선사는 93년 말부터 본격적인 미국 체류를 시작한다. 물론 91년부터 미국을 순회하며 교포들을 주대상으로 하는 강의 등을 계속해온 결과로서 이미 필라델피아에 수련장이 개설되어 있는 상태이기는 했다. 어쨌든 일지선사는 이후 해외수련장 개척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현재 볼텍스가 있는 아리조나주 세도나에 미국 본부를 마련, 주로 그곳에 체류하고 있으며 미국 외에도 캐나다, 최근에는 남미의 파라과이에도 수련장을 여는 등 해외 지원의 수만도 삼십 개에 이른다.
‘임자도’와 ‘기공(氣功)’의 등장
소설 『단』에 등장한 ‘박경표’의 실제 인물인 민정암(태극기공회장) 씨는 건강법 또는 수련법으로서 중국의 태극권을 내걸고 최초로 수련장을 시작,‘기공을 가르쳐서 기사 딸린 자가용까지 탈 정도로 성공한 인물’이 되었다. 기 본적으로 태극권은 당랑권이나 용호권처럼 중국에서 고래로 전해오는 외기의 무술로 태극권 유파만도 십여 가지에 이른다. 1956년 중국 정부 체육위원회는 태극권 각 유파의 양식을 통합·정리해 일반인을 위한 24식으로 표준화한‘간화태극권(簡化太極拳)’을 제정, 우리 나라의 도수 체조처럼 국민 체조화 시켰다. 무술 태극권에서 무술적인 파괴력을 발휘하기 위한 난이도가 높은 자세들을 제외하고, 건강 차원의 동작만을 엄선해서 재구성한 것이다.
따라서 간화태극권은 엄밀하게 말해‘태극권’이라기보다는‘태극양생기공(太極養生氣功)’이라 표현해야 옳다. 현재 지구촌 어디든지 중국인이 사는 곳이면 아침마다 공원에 모여 춤을 추듯 수련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간화태극권이다. 민 정암 회장이 이끄는 태극기공회는 중국이 자랑하는 양생 기공 가운데 하나인‘팔단금’을 비롯, 바로 간화태극권과 태극양생장이라는 양생 기공을 주 수련법으로 삼는다. 88년 인사동에서 태극기공회라는 이름으로 도장을 시작한 민정암 회장은, 국내 수련계에서 두 차례에 걸쳐 화제가 됐다.
첫 번째는 세칭‘임자도 사건’ 때문이다. 81년 실바 마인드 컨트롤 한국지부에서 마인드 컨트롤을 배운 뒤 마인드 컨트롤 지도를 하던 민회장은, 우리의 전통적인 호흡수련법인 조식법(調息法)과 마인드 컨트롤을 결합하면 더욱 효과적인 수련이 가능하다고 판단, 83년 무인도나 다름없는 전남 신안군에 있는 외딴 섬 임자도로 들어가 수련장을 열었다. 임자도 수련장이 문을 닫은 것은 86년, 무조건 하루 8시간씩 정좌호흡 수련이라는 끔찍(?)할 정도의 용맹정진에 스스로 참여한 사람은 최고 삼십여 명까지 이른다.
“당 시 경험을 두고 정말로 무엇인가를 얻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나의 판단은‘단전호흡 한 가지만으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 때 발생한 문제들 때문에 결국 나는 중국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중국의 기공을 통해 나의 문제들을 해결했다.”(민정암 회장 증언)
임자도에서 육지로 되돌아온 민회장은 봉우 선생이 단학회 연정원을 설립하자 초창기 연정원의 지도 사범을 지냈으나, 결국 자신이 밝힌 것처럼 지식(止息) 위주의 단전호흡으로 얻은 부작용들을 해결하기 위해 기공연합회 이동현 회장 밑에서 수기 지압 치료를 사사했고, 이동현 회장의 추천으로 홍콩과 중국에 유학, 중국식 기공을 익혔다. 민 회장이 국내 수련계에서 일으킨 두 번째 화제는 중국식 용어인 ‘기공(氣功)’이라는 단어를 도입한 것이다. 초창기에는 수련법의 이름 자체가 중국에서 건너온 태극권이었기 때문에, 무술태극권을 하는 무술인들로부터 “겨뤄 보자”는 시비를 당하기도 했고, 중국 본가와의 족보를 따지는 바람에 곤욕을 치른 적도 있다.
“국제화 시대에 어떤 수련법이 좋은지가 중요하지, 중국산이냐 국산이냐를 따지는 발상은 없어져야 한다. 문화란 혼자서 만들거나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단체 이름부터 무술을 의미하는 태극권 협회가 아니라 건강을 위한 수련이 우선이기 때문에 태극기공회라고 정했고, 본토와의 정통성을 따지는데 그런 것이 무엇 때문에 중요한가. 나는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수련하는 것은 중국의 양가, 진가처럼 민가 태극권이다. 더 자세히 말하라면‘민가 건강태극권’이다”라는 게 민회장의 주장이다.
본인이 주장하는 것처럼 수련 방법을 나름대로 재편성한 ‘민가 태극기공’을 보급하던 민회장은 한때 사회적으로 주식 투자가 관심을 끌 때, ‘기운으로 보는 주식 투자법’을 강의하는 한편 실제로 주식 투자에 뛰어들기도 했다. 현재는 민족사관 고등학교에서 기공을 가르치고 있어 다채로운 경력이 국내 수련계에 널리 회자되고 있다.
또 한 사람 스스로 ‘정통파 기공’임을 주장하며 단전호흡 수련단체를 설립하고, 국내 수련계에 등장한 자칭 ‘당산기공(唐山氣功) 장문인(掌門人)’장운락 씨를 빼놓을 수 없다. 장 운락 장문인은 화교로서 “한국에서 태어나 대만으로 건너가, 대만 정통의 단법(丹法)을 터득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구십년대 초반 수련 안내서를 통해 “당산기공은 정통 단전호흡으로 기와 혈(血)을 운기하여 … 오장육부를 뜨겁게 하는 동시에 … 전설적인 중국의 비법으로 … 선(仙)의 경지인 무아지경에 몰입, 몸이 진동하면서 …”라고 밝히고 있다.
당산기공 측은 ‘당산기공(唐山氣功)’이라는 명칭을 특허청에 상표 등록을 마쳤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도용할 수 없다고 밝혀 또 한 번 화제에 올랐다. 무협영화나 소설에 흔하게 등장했던‘당산기공’이라는 단어는 일찍이 중국 공산 혁명에 참여했던 유귀진이 악성 위궤양 등 병발증에 시달리다 기공을 배워 기적적으로 효과를 본 후, 1954년 중국의 당산(唐山)에 기공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당산기공 요양원」이라는 의료시설을 설립한데서 유래됐다.
80년대 국내 가전제품 시장의 인기품목이었던 ‘마마 전기 밥솥’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바로 그 마마 전기 밥솥을 생산하던 대원전기의 김대원 사장 역시 재계에서 유명한 인물이었다. 착 실하게 사업을 꾸려가던 김대원 사장이 어느 날 갑자기 ‘경성 기의학 연구원(景星 氣醫學 硏究院)’을 설립하고 원장으로 등장, 국내 수련계에 놀라움을 안겨 주었다. 김원장은 사업가로서 외국 여행의 기회가 많았던 만큼 이미 서구에서 기공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고, 동시에 기를 핵심으로 하는 동양 철학적 체계를 공학도 출신답게 과학적으로 풀어내면서 치유 기공 쪽에 많은 관심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다. 구십년대 초반 서울 성북 지역에서 장애아를 비롯해 복지시설을 상대로 무료 기공 치료를 펼치면서 동시에 수련 지도에 힘을 썼다. 최근에는 기를 자기 파동으로 해석하고 이를 측정하는 자기공명 분석기기인 양자 파동 분석기(일명 Q. R. S.) 관련 사업을 하고 있다.
수련 문화의 춘추 전국 시대:93∼ 94년
93 년∼94년은 신문·TV·라디오·잡지 할 것 없이 건강 관련 기사가 붐을 이루는 시기였다. 건강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폭발적으로 커진 것이다. 특히 스트레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대안으로 각종 방법이 소개되었고, 또 그 효과에 대한 학술적인 발표가 거의 날마다 언론 매체에 실렸다. 강남의 아파트촌에는 노인을 대상으로 하는 요가 교실이 붐을 이뤘는데, 이를 소개하는 언론은 “요가는 에어로빅 등 다른 운동에 비해 과격한 동작이 없어 노인에게도 적당한 심신운동이어서 주민 단체운동으로 선호하는 것 같다”고 제법 점잖은(?) 분석을 붙이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각종 동양식 수련의 효과를 생리학적 차원으로 검증하는 시도들이 도처에서 이루어졌다. 그 중에서 가장 각광을 받은 것은 알파(α)파 이론. 알 파란 두뇌의 활동을 외적으로 측정하는 뇌생리학적 지표의 한 가지로, 뇌파 검사의 결과를 편의상 몇 가지 단계로 나누어 놓은 것 가운데 한 단계이다. 압축시켜 설명하면, 뇌파에서 알파파가 발견된다는 것은 몸과 마음이 아주 많이 이완된다는 의미로 육체적으로는 근육의 피로가 적극적으로 회복되고, 정신적으로도 스트레스를 해소시키고 있다는 간접적인 징표라는 것이다. 수련 도중 입정 상태에서 겪게 되는 각종 정신 현상을 뇌파 한가지로 설명한다는 것은 아직 장님 코끼리 더듬는 식일 수밖에 없으나, 인도의 요기가 초능력을 발휘하거나 기공사가 기 치료를 하는 순간, 명상 상태에 들어간 사람의 생리적 변화를 어떤 식으로라도 증명해보려는 서양식 사고의 산물이다.
알파 뇌파는 마치 엔돌핀처럼 각종 스트레스 증상을 치료하는 효과가 있고 수험생의 학습 능력이 향상된다는 연구 보고들이 쏟아지면서, 그저 듣기만 하면 알파파가 나온다는 음악과 화면을 담은 CD나 테이프, 그리고 레이저디스크가 선을 보이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집 안에 가만히 두기만 하면 알파파가 나온다는 화분까지 나와‘알파파’ 산업이 성황을 이루었다. 건강 산업이 심신 수련을 건강법 차원으로 끌어내리는 데 한 몫 하게 된 것이다. 이 때를 전후해 등장한 각종 연구 결과 및 관심을 끌었던 사건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93년 심신 스트레스 의학회장 황준식 박사 논문 “단전호흡은 부교감 신경에 작용해 긴장 해소에 큰 효과가 있다"
93년 제3회 세계 바이오피드백과 행동의학 학술대회(동경) “고혈압과 신경성 노이로제에 호흡법과 명상이 효과”
93년 동서의학 비교회(동양의학적 현상에 관심을 가진 의사들의 모임) 회장 전세일 박사(신촌 세브란스 병원 재활원장) “기공을 재활 운동 요법으로 수용하기 위한 긍정적 시도를 시작"
94년 SBS-TV 〈그것이 알고 싶다〉의 ‘기 신드롬을 밝힌다’‘도인, 영원한 물음 편’에 대한 전문가의 평가 “산중에서 수련하고 있거나 부적을 사용하는 자칭도인들의 주장을 여과 없이 보여주기만 했다. 내용상 실패다”
94년 국제 실험 생물학회(미국 앤하임) 원광의대 생명공학 연구소 정헌탁(미생물학) 유훈(생리학) 교수팀 발표 “기 수련은 협력 T세포의 수를 늘여주고 혈액 순환에도 좋아 인체 면역력을 1.5배 증가시켜 질병 감염률은 줄이고 상처 치유력은 강화시킨다.”
94년 손가락으로 책을 읽는 초능력소녀 신민주 양 등장
12월 한국 정신과학학회 창립 (초상현상을 연구하는 전자공학, 물리학, 금속공학해서 여러 이학자들의 학술 연구모임으로 초대 회장은 서울대 전자공학과 이충웅 교수였으나 현회장은 전세일 박사) “창립 총회 겸 제 1차 학술 대회(대전)에서 신민주 양은 믿을 수 없는 시연을 보였다”
황태자의 잘못된 단전호흡
94년 5월 언론에는 ‘박철언 의원 탈장 입원 / 단전호흡 복압 상승’ 이라는 제목의 짤막한 기사가 보도됐다. 한 때‘정치권의 황태자’소리를 듣던 박의원은 슬롯머신 업자인 정덕진 형제로부터 육억 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 기소되어 징역 일 년 육 개월을 선고 받고 서울 구치소에서 복역 중 갑자기 탈장 증세를 보였는데, 그 이유가 단전호흡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박 의원의 한 측근은, “박의원이 몸이 허약해진 상태에서 전문가의 지도를 받지 않고 작년 오월부터 혼자서 교본을 보면서 단전호흡법을 익히다 복압이 높아져 탈장 증세를 일으킨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 사실은 단전호흡이나 기수련이라는 용어가 일반화되면서 사회적으로 한창 관심을 끌던 때여서 많은 사람에게 충격을 주었다. 만병통치약처럼 수련의 일차적인 효과를 알리는 데만 주력하던 지도자들이나 단전호흡을 유치한 건강법 정도로 여기던 일반인들에게 좋은 화제거리를 제공하였다. 그런가 하면 전문가들 사이에는, 수련법에 관한 한 자신들의 수련법만이 옳다고 주장하면서도 부작용은 서로 감추고 정작 수련법을 공개해 객관적으로 검증받지 못하는 우리의 수련문화 풍토에 대한 자성의 소리가 높아졌다.
95년 7월 삼풍 참사로 스타가 된 임경택 교수
95 년 3월 일본에서는 한바탕 난리가 났다. 동경의 지하철에 독가스가 살포된 것이다. 불특정 다수를 향한 이 해괴망측한 테러의 주인공은 「옴(AUM) 진리교(眞理敎)」라는 이름의 신흥 종교 단체. 일본의 경우 종교 법인을 설립하는 절차가 까다롭지 않아, 98년 말 현재 일본 문화청이 인가한 종교 법인 수는 십팔만 삼천 오백 팔십일개에 달한다. 89년에 설립된 옴 진리교의 창설자는 아사하라 쇼코(43, 본명 마스모토 치즈오)로 히말라야에서 팔 년간의 요가 수행을 통해‘최종 해탈(解脫)’을 했다고 선언한 뒤, 교단 내에서 ‘존사(尊師)’라 불리며 군림해 왔다고 한다. ‘절대 자유와 행복’을 목표로 합숙을 하며 요가와 티베트 밀교식 수행을 하는데, 일정 수준에 이르면 출가를 하며 이 때는 전 재산을 모두 교단에 기증한다. 초기에 요가 수련장을 열고 건강 요가를 가르치던 아사하라 쇼코가 조직력과 경제력를 갖춘 신흥 종교의‘존사’로 변신한 데는 공중 부양 능력과 예지 능력이 크게 작용했다. 옴 진리교 사건 내막을 소개하자는 것이 아니다. 다음 몇 가지 사실을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첫째는 신도 가운데 칠십팔 퍼센트 이상이 젊은이들로 명문인 동경대나 오사카대 학생들이 많고 또 교단을 이끄는 핵심 요직을 맡고 있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교육 및 조직 관리 등은 주로 컴퓨터 통신망을 이용하면서 통신 위성까지 사용하는 등 첨단의 정보통신 기술을 적절히 이용해 신비주의와 첨단 과학기술을 교묘히 결합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세 번째는 이 사건을 바라보는 전문가들의 견해인데,“과거에는 종교를 통해 질병과 가난으로부터의 구제를 기원했으나, 지금은 삶의 목적을 상실한 젊은이들이 신비주의에 자신을 몰두시킴으로써 안정을 얻으려는 정신적 구제로 그 목적이 달라졌다. 동시에 첨단 과학기술이라는 젊은이들의 언어 수단을 사용해, 젊은이들과 눈높이를 맞추는 포교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으로 모아졌다.
네 번째는 사건을 소개하는‘언론의 무지와 요가 수행자들의 묵시적 악의’를 들 수 있다. 일본은 물론 국내에서도 이 사건을 소개하면서, ‘옴’이라는 단어에 대해 “옴이라는 단어는 우주의 창조·유지·파괴를 뜻하는 것으로, 자기들이 만든 조어(造語)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요가의 요’자만 들어본 사람이라도 요가와 뗄 수 없는 관계인 탄트라 불교에서 전해지는 여섯 자 진언인 ‘옴마니 반메훔’의 첫 글자임을 알고 있을 것이다. 실제로 국내에서도 칠십년대 초반 안동민 선생에 의해 얼마나 많이 주창되었는지 기억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당시 특이하게도 한국일보 기자로서 안동민 선생을 깊이 이해하고 스스로도 수행에 돌입, 결국 출가해 일가를 이룬 분이 있는데 이분이 바로 능인선원의 지광 스님이다. 당시 안선생은 ‘옴 진동수’를 만들었는데 없어서 못 팔 지경까지 이르렀다. 따라서 육자 진언을 알고 또 진언 수행을 하시는 분들이 많았을 터인데, 이들이 모두 침묵하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오랜 역사를 가진 동양의 수행법인 요가로 비롯된 사건을 보도하면서 요가 전문가의 자문을 구하지 않았던 언론의 독단도 독단이지만, 침묵을 선택했던 요가 지도자들의 속마음은 어떤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삼개월 후, 삼풍 백화점 붕괴 사고가 일어났다. 이 때 매몰자 구조 과정에서 등장한 목포대 임경택(정치학과)교수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원 래 고교 시절 유도를 했던 임교수는 고려대에 입학하면서 73년에 국선도에 입문, 외길 수련을 계속해 온 국선도 수련인으로 현재 국선도 내의 직함은 법사이다. 사고가 난지 구 일째인 7월 8일 오후 2시쯤, 필자와 지인이던 임교수가 찾아왔다. 그리고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아침에 중앙일보를 보고 난 후 단전호흡 수련을 시작했다. 수련이 깊어지면서 잠심(潛心)에 들어갔는데, 갑자기 삼풍백화점 사고 현장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 군데에서‘살려달라’는 간절한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한 군데는 남자, 또 한 군데는 여자, 그리고 또 한 군데는 여자인데 급격하게 약해지고 있었다. 스스로도 믿기 어려웠다. 그래서 수련을 끝내고 신문에 나온 현장 그림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정신을 집중해 보았더니 마찬가지였다. 잊어버리려고 노력했으나 하루 종일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결국 나는, 사고 현장으로 갔다. 그랬더니 기운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구조반에 알리려고 했으나 접근조차 불가능했다."
임교수는 사고 현장에 접근하기 위해 신문사 기자라는 빽(?)을 찾아온 것이었다. 기나 수련의 분야에 약간의 지식이 있는 필자로서도 퍽 난감한 상황이었다. 구조작업에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꼭 가봐야 되겠나?" “나도 사실 불안하지만, 모른 척하자니 죄를 짓는 것 같아서 말이야.”
그 래서 결국 필자가 동행하는 대신 현장에서 취재 중인 후배 기자를 연결, 일단 현장에 들어가보고 가능한 도움을 줄 수 있는 만큼 도와주는 게 좋겠다는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저녁 11시쯤, 피곤에 지친 모습으로 임교수는 돌아왔다.
“정말로 다행스럽게도 그 와중에서 구조본부장을 만났고, 기니 수련이니 뭐 그런 얘기를 할 수 없어 그저 대학교수라는 직함을 강조하면서 구조 작업 위치를 옮겨보자고 설득했는데, 처음에는 말도 안된다는 표정이더니 갑자기 그렇게 하자고 했다. 세 시간 넘게 건물 더미를 치웠으나 사람을 구조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러나 최소한 할만큼은 했으니 더 이상 죄의식은 갖지 않을 수 있었고 더 이상 한은 없다.”고 임경택 교수는 말했다.
그러나 다음 날 임교수가 지적한 곳에서 불과 십 미터도 안되는 지점에서 최명석 군과 유지환 양이 구조됐다. 십 미터의 오차가 난 이유에 대해 임교수는 자신의 『숨쉬는 이야기』라는 저서에서 “당시 A동의 구조를 잘 몰라 비상 계단과 지하실의 위치 파악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런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수많은 점쟁이, 역술가, 초능력자를 자칭하는 도사들이 삼풍 사고 현장으로 몰려들어 “이곳을 파라” “저곳에 살아 있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구조본부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임경택 교수는 현직 대학교수라는 직함이 주는 신뢰성을 바탕으로 ‘기수련과 초능력’ 또는 ‘단전호흡과 초능력’의 대명사로 언론의 각광을 받았다. 동시에 ‘기수련’ ‘단전호흡’ ‘초능력’으로 대변되는 ‘기 신드롬’을 또 한번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교수는 아직까지 최군이나 유양을 직접 만나본 적이 없다고 한다. 최군이나 유양을 구조하는 과정에서 임교수의 역할이, 언론에서만 시끄러웠지 정작 당사자들이나 당사자 가족들은 이 같은 사실을 믿지 않고 있음을 증명한다. 그들이 감사의 표시를 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기수련이나 초능력에 대해 우리 사회가 가진 시각의 한 단면이라는 것이다.
경제계의 도인 ─ 최종현 회장 사망
98 년 8월 재계의 별 최종현 SK 회장이 별세했다는 급보가 전해졌다. 왕성한 경영 활동을 펼치며 93년에는 심신 수련서를 발간할 만큼 기수련에 일가견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재벌그룹의 오너가 사망한 것이다. 최회장은 운명을 달리하는 최후의 순간까지도 두 번째 수련서를 쓰고 있었다고 한다. 건장한 체격에다 화색이 도는 불그레한 얼굴, 자타칭 전문가 수준에 달하는 기수련 경력을 가진 최회장이 97년 폐암이라는 진단을 받았을 때 사람들은 기수련(단전호흡)의 효과에 대해 의문을 나타냈다. 그러나 미국의 첨단 의료 기술에 의해 수술을 받고 최회장이 다시 왕성하게 활동을 재개하면서 이 같은 의문은 꼬리를 감추었다가 1년 후 결국 유명을 달리하자, 이번에는 단전호흡의 효과에 대한 일반인들의 의문 제기가 아니라, 지도자들 사이에서 단전호흡의 호흡법에 대한 논란이 본격적으로 일어났다. 단전호흡을 하던 많은 수련생들이 자신들의 지도자에게 “단전호흡도 암에는 소용이 없는 것 아니냐?”는 질문을 던졌고, 많은 지도자들이 “최회장이 하던 단전호흡법이 잘못된 것이었다”고 해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최회장의 호흡법 시비는 전문가들 사이에서 이미 4~5년 전부터 회자되었던 문제다. 왜냐하면 단전호흡은 물론이고 기 수련이란 ‘열 기운은 아래로 내리고 물 기운은 위로 올린다’는 수승화강(水昇火降)을 기본 원리로 하는 것인데, 최회장이 자랑하는 불그레한 얼굴은 ‘열 기운이 위로 올라 멈추어 있는’상기(上氣) 현상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었다. 수승화강이란, 인간의 노화 현상을‘열 기운은 숨자리와 함께 위로 올라가고, 수 기운은 아래로 내려가 손발이 차가워지는 과정’이라 정의하고, 이를 되돌리는 수련 즉 역법(逆法)에 의거, 젊음과 건강을 유지하려는 자연회귀 원칙에 따라 정해진 수련 원리이기 때문이다.
딱 부러진 결론은 나지 않았다.“과학적으로 증명되지도 않은 단전호흡의 효과란 ‘혹시나’에서 ‘역시나’일 뿐이다”라는 부정적 의견도, “최회장의 가족 병력상 선천적으로 폐기능이 약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단전호흡 수련을 해서 그 만큼이라도 건강하게 천수를 다 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긍정적 의견도 모두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다.
어느 날 눈을 뜨니 도처에 外道 열풍
전 통적인 우리 식 수련을 고집하는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우리도 모르는 사이 국내의 수련계에도 외제 바람이 불어닥치고 있다. TM으로 불리는 초월 명상을 비롯하여, 아봐타·오쇼·아난다 마르가·라자 요가 해서 외국산 명상 단체가 수도 없이 등장했다. 그런가 하면 중국의 기공법 가운데 정신적인 수련을 위주로 하는 원극공이나 법륜공 등 중국제 수련법도 국내에 크고 작게 자리를 잡았다. 말 그대로 세계화·국제화가 국내의 수련 문화를 바꿔 가고 있는 과도기적 상황인 것이다.
국내에 가장 먼저 수입된 명상법은 TM(초월 명상). 사실 오늘날 명상이라는 단어 자체가 전세계적으로 알려진 것은 바로 이 TM의 공로라고 할 수 있다. 비 틀즈의 멤버였던 조지 해리슨이 심취했던 것으로 잘 알려진 인도 명상이 바로 TM이다. TM은 칠십 년대 중반 주한 외국인에 의해 국내에 소개되었다. 미군 부대 군인들이 명상을 하는 모습을 보고 함께 근무하던 한국인들이 이를 배우면서 점차 알려지게 된다. TM은 본래 인도의 베다 성자들이 이용하던 의식 계발 수련법을 요기인 마하리시 마헤시가 현대식으로 새롭게 개발한 것으로, 이미 육십 년대부터 미국에서 뿌리 내리기 시작했다. 최초의 한국인 TM 교사 세 명이 배출된 것은 83년, 이들 중 이원근 씨와 한숙례 씨가 부부가 되어 지금까지 ‘마하리시 초월 명상(TM) 센터’를 열고 있다.
‘아봐타 코스’는 해리 팔머라는 사람이 86년에 체계화한 자기 계발 프로그램으로 인도식 명상법을 서구인들의 사고로 이해하기 쉽고 수련하기 적합하게 개발한 것이다. 말 그대로 ‘인도산 - 미국 포장의 명상 상품’인 셈이다.
이 같은 현상은 우선 대중문화의 흐름과도 무관하지 않다. 세계 대중문화의 종주국임을 자임하고 있는 미국에서 동양의 정신문화에 관심을 갖게 되다 보니 영어권인 인도의 명상법들이 가장 먼저 자리를 잡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인도식 명상 다음으로 미국 무대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태극권의 경우, 언어 문제 때문에 서구화에서 선점 기회를 놓친 셈이고, 그 결과 2위 자리에 머물러 있다. 최근에는 태극권을 소개하면서 ‘움직이는 명상’, 곧 ‘Moving Meditation’이라거나, 불교에 대한 관심을 틈타‘움직이는 선’,곧 ‘Moving Zen’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바로 이런 시기에 국제화 시대가 열리면서 이미 사고방식이 서구화된 한국의 젊은이들도 미국에서 재구성된 ‘서구화된 명상’을 쉽게 받아들인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이런 현상에 대한 의견도 분분하다.
“막 연한 느낌이나 스승의 판단에 모든 것을 의존해야만 하는 동양식 수련법이, 서구의 가공 기술에 의해 쉽고 그리고 머리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바뀌어져 있어 누구나 수련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수련문화에도 사대 사상이 적용되고 있다. 동양인과 서양인은 사고의 틀뿐만 아니라 기질적 차이가 있는데, 서양식으로 가공된 심신 수련법은 한계가 있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그런가 하면 중국에 직접 유학을 가서 배운 태극권파와 국내 수련파가 결코 합쳐지지 못하는 것처럼, 같은 이름의 명상법을 수련하는 단체라도 미국에서 배운 이들과 직접 인도에 가서 배운 이들이 각각 다른 단체를 설립하고 있다는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도 지적할 만하다.
--- 글쓴이 김인곤 씨는 연세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78년 중앙일보사에 입사해 '건강인생 기(氣)를 살린다'와 같은 여러 시리즈 기사를 연재하는 등 '기와 건강 부문 전문기자'로 활동해 왔다. 칠십년대 초반부터 여러 단체에서 수련을 했고, 중국에 유학해 소림 무술학교 청강생 과정, 북경 골상학원 객원 학생 과정, 왕리핑 선생에게 사사를 받고 돌아왔다. 현재 자신이 기획위원으로 재직중인 중앙일보 문화센터에서 '수람기공과 단전호흡'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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