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
때가 되어 중학교 진학 문제로 집에서 많은 이야기가 있었다.
학비가
적게 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졸업한 대구 사범학교로 진학하라고 했다.
그 당시 사범학교는 특차로 무시험 전형이었다.
초등학교
졸업 성적 평가는 200점이
만점이었다. 필자는 189점이었다.
선생님은
이 점수면 합격할 것이라고 하여 사범학교에 응시했다.
그러나
낙방했다.
그
이유는 변두리학교 출신 중에 200점 짜리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계명 중학교가 기독교학교 이기 때문에 그 학교 진학도 이야기했다.
그러나
사립학교 보다 공립학교가 학비가 싸다고 해서 공립학교인삼중
학교로 진학하게 되었다.
1951년
8월 20일 : 대구 제 삼중 학교로 설립되었고
1955년
11월 10일 : 교명을 경상중학교로 변경
인가를 받았다.
경상중학교(慶尙中學校)는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에
있는 공립 중학교이다.
이
학교는 야구 명문 중학교였다.
우리가
살던 남산동은 다른 지역보다 높은 지역이라 수돗물이 잘 나오지 않았다.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물 배달을 시켜 먹었다.
필자는
긴 막대기 양쪽에 양철 통을 달고 물을 배달하여 용돈을 벌기도 하였다.
겨울에는
학교 바로 옆에 큰 연못이 있어서 점심 시간엔 친구들과 스케이트를 타곤 했다.
1년에 한 번 전교생이 학교 뒤산을 에워싸고 토끼 몰이를 했다.
끝나면 학교에서 돼지를 잡아 삶고 고기와 뜨거운 국물을 점심으로 먹었다.
겨울 뒷산 토끼 몰이
때로는
점심 시간에 학교 옆 콩밭에서 콩을 줄기 채로 뽑아 삼각형으로 쌓고 가운데로
나무나 풀을 넣고 불을 질러 콩이 다 익으면 둘러 앉아 콩을 먹곤 했다.
이것을
우리는 ‘콩 사리’라고
했다.
입가가
시커멓게 된 채 교실로 돌아오면 선생남은 “너희들 콩
사리 했구나”하고 꾸중을
하셨다.
좋아했던 운동들
운동을
좋아해서 위 사진의 운동을 조금씩 다 해보았다.
특히
핸드볼(송구)은 학교
대표 선수였다.
자전거
타기를 좋아해서 싸이클 선수가 되려고 연습하다 학교 화단 주위에 끝이
뾰쪽하게
박아 놓은 나무에 넘어지면서 오른 쪽 정강이를 다쳐 피가 많이 나왔다.
그
때 입은 상처가 아직도 있다.
이신문이란
음악 여자 선생님이 계셨는데 필자가 노래를 잘한다고 운동을 그만 두고
노래를
하라고 했다.
필자는
운동이 더 좋다고 거부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은 날 교무실로 불러서
“너 많은 사람
앞에 혼자 서서 노래부르는 것이 좋으냐 ?
아니면 11명 속에서 뛰는 운동을 하는 것이 좋으냐 ?”
하고
물으셨다.
그래도
나는 운동을 하겠다고 하니까
“두 손을 앞으로
내”하시고 손목을 대나무 회초리로 때리셨다.
양 손 목에 핏자국이 생겼다. 손바닥이 아니라 손목이었다
이
선생님은 후에 서울로 올라 올 때 필자를 불러서
“대광 학교에
가면 이용빈 선생님이 계시는데 그 분이 내 오빠다”하시면서
꼭
찾아 뵈라고 하셨다.
이
일이 인연이 되어 대광에서도 핸드볼을 하게 되었다.
그때
같이 운동한 동창이 바로 이광택이었다.
그리고
정승철 김봉태(?)도 함께
했던 같은데 분명치가 않다.
후에
핸브볼을 그만 두고 배구를 하게 되었다.
왜
그랬는지 기억이 안 난다.
중학교
시절 함께 노래하던
친구가 훗날 서울 음대 입학한 후에
필자와 만난 기억이 난다.
내 기억엔 내가 그 친구보다 노래를 더 잘 불렀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때 이 신문 선생님 말씀을 따랐다면 나는
유명한 성악가가 되지 않았을까는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형님(김창주목사)는 나환자 촌 선교를 하다가 부산 신학대학교 교수로 청빙 받아
학교에서 히브리어를
강의 하셨다.
1959년 대광 학교에서 교목으로 청빙 받아 온 가족이 서울로 올라왔다.
이때는 걷지도 않고
Truck도 타지 않고 편안하게 앉아 기차로 올라왔다.
8년간의 6.25 피난 길(생활)을 청산하는 기쁨은 경험해보지 못하면 알 수 없는 기쁨이다.
드디어 그 지긋지긋한 피난 생활을 접고 서울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때가 중학교 2학년을 마치고 대광 중학교 3학년으로 편입하였다.
이때부터 대광 친구들과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중하교 시절 찍은 사진은 이것 뿐이다
3년 연상인 작은 형과 함께
대구 평북교회 중등부
대구 평북 교회 야외 예배
차 례
(회고록)(9) 6.25 피난 길에
終止符를 찍고 上京(大光 시절)
(회고록) (10) 대학과 군 입대 그리고 복학
(회고록) (11) 대학 졸업과 결혼
(회고록)(12) 국립보건 연구원(공무원)
(회고록) (13) 목회 시작 전 다녔던 교회들
(1).대구 남산교회.(2).영락교회.(3).동안교회.
(5).수원 공군 기지 교회(4).영암교회
(회고록)(14) 신학교 입학(재학과 졸업)
(회고록) (15) 목회의 시작(전도사 시절)
(1).명성교회.(2).성광교회.(3).한빛교회.(4).송학대교회.(5).광성교회
(회고록) (16) 안수 받은 후(영락교회)
(회고록) (17)이민 목회 시작
1).산호세 영락교회
2).샌디에고 호산나 장로교회(개척)
3).샌디에고 영락교회와 통합(은퇴)
(회고록)(18).은퇴 후
1).동양선교교회 협동목사
2).샌디에고 연합장로교회 출석
3).샌디에고 매스터 코랄 합창단
4).유니온 교회 설교 목사
첫댓글 오늘 아침 조간신문 광고에 떴다.
"세기의 성악가 김창기 (78세), 서울에서 발표회 !!
소년.청년시절 값진 추억거리가 많군요.
한국엔 가짜 뉴스가 난무하던데
진원지가 바로 당신이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