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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과 아브라함의 생애 2 (애굽 귀환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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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과 아브라함의 생애 애굽의 귀환부터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애굽에서 돌아와서 다시 가나안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하는데 아브라함과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으시고 또 사라와 하갈 간의 어떤 갈등, 후세의 새 언약 아브라함과 새 천사 이런 내용들이 헤브론에서 그랄과 브엘세바 지역에서 살면서 일어났던 그런 일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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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일단 한번 보겠습니다. 이게 애굽에서 돌아간 이후에 하나님께서 창세기
15 장을 보면 아브라함과 함께 새 언약을 맺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때 하나님께 약속하셨던 게 뭐냐면 유브라데 강에서부터 애굽 강까지 여기를 약속의 땅을 주신다고 약속을 하셨는데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했을 때는 그 땅을 차지해 보지 못했지만 저 땅을 실질적으로 차지했던 데는 다윗과 솔로몬왕 때였어요.
그리고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단된 다음에 영토가 계속해 잘려 나가서 줄어들다가 다시금 그런 영토를 회복했던 때가 또 언제냐면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 세 때 유브라데 강까지 올라가서 그 영토를 회복하는 그리고 하나님께서 요나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을 하셨어요. 여로보암 2 세 때 그 땅을 회복하게 되는데 여로보암 2 세 때는 굉장히 치세라고는 하지만 성경적으로 굉장히 악한 왕이라는 평가를 받는 왕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에게 그런 번영을 얘기했던 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불쌍히 여겼기 때문에 그들에게 구원자를 주셨더라라고 하는 거거든요. 근데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그런 것 같아요.
악인도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사용하시는데 여로보암 2 세도 그런 면에서 사용하시는 그런 사람이 됐다는 것 그 얘기를 우리가 한번 이 지역을 통해서 볼 수가 있고 그 다음에 히스기🅓 왕 때나 요시🅓 왕 때 다시 북쪽 이스라엘 땅까지 북이스라엘 땅까지 올라가서 많은 지역을 영토를 회복하고 옛날에 영광을 재현했던 그런 시기가 있었다라고 하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이거는 뭐 현대에 있어서 왔다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의도한 건 아니지만 거듭된 전쟁을 통해서 이스라엘 지도가 확장돼 가는 부분들이 공교롭게도 사실은 저 영역을 맞춰가고 있는 걸 볼 수가 있어요.
시리아 골란 고원까지 그다음에 예전에 6 일전쟁에서 시나이 반도까지 다 점령을 했다가 돌려주긴 했지만 이런 것들이 좀 공교롭게 그렇게 좀 영토가 맞춰지다 보니까 거기에 대해서 설교도 그런 관계를 맞춰서 했던 그런 시기도 있었는데 요즘에 그런 설교를 안 하시긴 하지만 요즘에는 이스라엘의 번영에 대한 이런 부분들을 이스라엘이 큰 복을 받아서 그런 번영을 누린 것처럼 이렇게 설교를 많이 했었어요. 근데 요즘에 와서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그런 부분을 자제를 하고 있긴 합니다.
그리고 옆에 사진은 와디라고 하는 건천에요, 마른 강… 여기가 강수량이 적다 보니까 비가 안 오는 기간에는 바짝 말라서 물이 없어요.그리고 우기 때 비가 오게 되면 강이 되는데 상류 쪽에서 비가 오게 되면 순식간에 이 강물이 가득 차더라고요. 제가 예전에 다큐멘터리 나온 걸 보니까 이 지역은 아니지만 아프리카에 건천 소위 말하는 와디들이 있는데 섬에서 비가 오기 시작하니까 순식간에 강물이 불어나는데 진짜 큰 홍수가 나는 다 커다란 강이 막 넘실 되는강들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이런 이 강들이 평상시에는 대상들이 다니는 통로예요. 저 길을 따라서 낙타를 타고 무역을 하던 이 길인데 비가 오면 강에 대한 뭔가 독특한 이런 지형입니다.
지난 시간에 얘기했던 부분이 겹치긴 하는데 하나님께서 사라의 몸에서 난 자가 내 후사가 될 것이다라는 약속을 재확인시켜주는 부분이 여기 있었고요. 그다음에
아브라함이 롯을 구출하고 돌아오고 난 다음에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는데 왜냐하면 그 동방의 연합군을 극적으로 물리치기는 했는데 자기는 개인이고 여기는 나라 않습니까? 이 사람이 사실 언제 쳐들어올지 알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두려워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나타나서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얘기를 하시고 그다음에 내가 너의 큰 상급이 된다라고 위로의 말씀을 하시는데 사람이 그럴 것 같아요. 아브라함을 여기서 뭐라고 얘기하냐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다가 하나님 상급 필요 없어요. 내가 자식도 없는데 우리 종 엘리에셀를 양자 삼아 볼 테니까 얘나 그냥 잘해주세요 이렇게 얘기를 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까?
점 작게 표시돼 있지만 아마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저는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되는데 그래서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지만 이 메소포타미에 여러 도시 국가들이 있었는데 누지라는 도시 국가에서 수많은 이 토판들이 발견돼요. 거기에 소위 말하는 이 창세기에 기록돼 있는 양자법 상속법 그다음에 첩을 드리는 방법 관한 성경을 이해할 수 있는 문서들이 여기서 출토가 되어 그래서 여기서 조건을 양자로 삼았다고 하는 건 뭐 있었냐면 그 당시 풍속 중에 후사를 그 자식이 없으면 한국 같은 경우는 친척 중에 데리고 왔지만 그것도 안 될 경우에 여기서 자기 종 중에서 똑똑한 사람이 있으면 자기 재산의 모든 관리를 맡기고 내 노후를 책임져라 그리고 내가 죽으면 재산 니가 다 가져라 이렇게 양자 관계를 맺고 모든 재산 관리를 맡기는 겁니다.
부양을 받는 이런 법적인 제도가 있었고 또 파양 제도가 있더라고요. 나중에 진짜 친자를 낳게 되면 자연적으로 그냥 파양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관계가 해제가 되는 이 부분이 됩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다시 한번 얘기하겠지만 제가 주일 학교 설교 준비하다 보니까 아브라함이 나중에 이삭을 장가보낼 때 이름 모를 종을 보내잖아요. 근데 전통적으로 저는 설교를 이렇게 들어 왔었어요. 나중에 지금 설교를 아마 찾아봐도 이름은 안 나와 있는 건 맞긴 한데 엘리에셀이라고 항상 얘기를 하거든요.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이 각종 보물을 싣고 이삭의 아내를 구하기 위해서 하란으로 떠나는 관계를 생각해 보면 그렇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장면이기도 한 것 같아요.
그리고 아브라함과 하나님께서 횃불 언약을 세우게 되는데 이 언약 특별하게 나오죠. 모든 동물을 잡아서 반으로 쪼개 놓고 밤에 아브라함은 새를 쫓아 내는 장면이 나오고 밤에 갑자기 횃불이 나와서 이 두 개로 갈라놓은 이 제물 사이로 지나가면서 이 제물을 불태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굉장히 이게 이해불가한 부분이었는데 이게 나중에 고대 문서가 발견됐는데 우리가 아는 히타이트 왕국이라고 불리는 이 왕국과 이집트와 전쟁이 있었어요.
람세스 2 세와 히타이트 왕국과의 전쟁이 있었는데 이집트 역사에는 이집트가 승리한 걸로 기록돼 있다고 하는데 역사학이 나중에 바뀐 건 히타이트 왕국이 사실 원 사이드하게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 이집트 군대가 약간의 반격을 가해서 약간 좀 주을 맞추는 그리고 고대 전쟁은 그 상대방을 전멸시키는 이 전멸전이 아니기 때문에 적당히 때려서 그냥 이렇게 손 좀 봐주고 너는 까불지 마 이 정도의 전쟁이었기 때문이지 그렇게 화친을 맺게 되는데 그 화친 내용이 뭐였어? 화친을 할 때 조약이 내용이 어떻게 기록돼 있냐면 재물을 놓고 재물을 둘로 쪼개 놓고 이 재물 사이로 두 사람이 계약 당사자 손을 잡고 지나가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평화 조약을 맺었는데 이 조약을 어기는 사람은 오늘 이 자리에서 둘로 쪼개진 짐승처럼 둘로 쪼개지면 죽음을 당할 것이다라는 어떤 저주의 맹세문이 발견이 됩니다.
그래서 이 언약의 의미가 뭐냐면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사실은 두 사람이 손을 붙잡고 걸어가면서 이 약속을 어긴 자가 이렇게 된다고 얘기하는 건데 하나님은 단독적으로 이 약속을 하시는 거 아브라함의 의사와 상관없이 아브라함은 여기에 대한 아무런 책임이
없이 하나님이 내가 전적으로 책임지겠다라는 그래서 내가 너에게 후사를 주지 못한다고 한다면 나는 이 짐승이 이렇게 둘로 쪼개서 죽임을 당한 것처럼 나는 그런 저주를 받을 것이다라는 저주의 맹세를 하나님께서 스스로 하시는 장면이에요. 굉장히 놀라운 장면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철저하게 약속에 대해서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그런 장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고고학적인 발굴들이 우리가 성경에 좀 이해하지 못한 부분들을 이해시켜 주는 부분들이 많이 있어요.
그리고 또 하나는 뭐냐하면 이거는 제가 뜬금없이 성경학 책에 나왔던 부분인데 레위기에 보게 되면 이런 장면이 나오거든요. 새끼 양을 어미의 젖과 함께 삶지 말라는 거 있어요. 뜬금없잖아요. 이게 영원한 숙제였던 거🅓. 도대체 이게 어떻게 하냐 그랬는데 나중에 이 고대 가나안 지역에서 발굴을 하다 보니까 뭘 발견했냐면 이게 풍년을 기원하는 이 미신적인 의식이었던 거예요. 어미 양의 젖에다가 새끼 양을 삶아가지고 이거를 사방에다 묻는 거예요. 나눠가지고 그러면 그의 풍년이 된다라고 하는 이 사람들의 풍년 의식이었던 거고 그러니까 철저하게 성경에서 얘기가 뭐냐 하면 우상숭배에 관계된 것들은 진짜 어떠한 것도 다 철저하게 버리라는 그러니까 악은 어떠한 것도 버리라고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철저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가나안 땅의 모든 잘못된 우상숭배 문화를 배격하려고 했던 장면들이 거기서 이렇게 나오는 거더라고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 어떤 마음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이끌었는지 그리고 또 그러면서 우리는 어떤 마음을 가져🅓 되는지 그런 생각을 갖게 만드는 그런 게 되는 부분이 있게 되는 거죠.
(질문)
목사님 언약 의식을 치르는 거와 관련해서 아브라함이 새를 쫓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그건 신학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나요? 저는 사실 그냥 그런 이벤트가 있었다라는 거는 몇 번을 봐서 아는데 그게 왜 성경에 그게 기록돼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런 거죠. 쉽게 부여할 수도 있고요. 왜냐하면 그것도 새가 때로는 악을 상징해 가기도 하자나요. 그래서 그런 것들이 범접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이런 얘기를 하잖아요. 주검 위에 독수리가 보인다. 그리고 제가 주석을 찾아봤더니 그 독수리 찾아봤더니 이런 속담도 있더라고요. 바벨론에서도 다마섹에 있는 양을 볼 수 있다 이런 속담이 있대요. 그만큼 눈이 좋다는 얘기는 이게 하는데 보게 되면 다윗이 왕이 됐을 때 유대 땅에 가뭄이 들었을 때 하나님께 묻잖아요 왜 가뭄이 들었느냐고 물었을 때 사울 왕 때문에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 기부아 주민들 그 사람들 때문에 이 가뭄이 내렸다. 이 사람들 불러서 우리가 어떻게 풀어주면 좋겠냐 그랬더니 다 필요 없고 사골의 직계 가족들을 7 명만 우리한테 내줘라. 그래서 다윗이 사울의 자식들하고 다 모아 7 명을 잡아다가 죽이기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처음에 자식들이 다 죽임을 당하고 목을 매달아 놓지 않았는데 거기에 보면 사울의 첩이 자리를 깔고 비가 올 때까지 그들의 시체를 새나 들짐승들이 오지 못하게 쫓는 장면이 나오거든요. 저는 그렇게 당연히 그런 장면을 찾았어요. 왜냐하면 동물을 잡아서 사체를 쪼개서 버려 놨는데 들짐승이나 새는 당연히 몰려올 거고 그리고 아직까지 하나님이 불을 내려서 이 제물을 태워줘🅓지 이 계약이 완성이 되는데 그 사이에 아브라함은 당연히 피 냄새를 맡고 고기 냄새를 맡고 달려오는 그 새들을 쫓지 않았을까? 언약식이 완성이 안 됐으므로 방해 요소들을 갖다가 제거했다. 그 정도 되고 그렇죠. 왜냐하면 낮에 다 준비를 했는데 그 성격에 놨다가 밤에 타는 횃불이 이 사이를 지나가면서 어떻게 태우고 나오지 않습니까?
굳이 의미를 부여한다면 의미를 부여할 수 있긴 할 거예요. 그래서 예전에 초대 교구 중에 오리겐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이 표현한 알레고리 쪽 해석을 굉장히 많이 했는데 그런 알레고리 쪽으로 해석을 한다고 그러면 그런 색들이 가능해지는 거죠. 차이는 이런 건데 이렇게 해서 들이 가능해지는 거죠. 그래서 가장 대표적인 게 다윗이 물맷돌을 던진 거 목사님이 옛날 설교 많이 다 사랑해 물맷돌 이런 얘기하지 않습니까? 이렇게까지 먼저 나가는 거죠.
그게 고고학적 연구 결과들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소위 말해서 고고학 경영 약간의 그 내용들을 설명해 주는 부분도 있고 아니면 또 다른 주석 같은 데서 설명하는 부분도 있고 아마 아까 이 언약에 관한 기본적인 내용들은 아마 기본적인 주석이 아마 다시금 다 나와 실려 있을 거예요. 그 문제는 있을 거예요. 그래서 공식적인 부분을 말씀드리고 제 개인적인 생각은 제가 말씀을 드리고요.
그리고 이때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얘기하냐면 내 후손이 400 년 동안 애굽 땅에서 객이 되었다가 그리고 종살이를 하다가 400 년이 지나면 돌아오게 될 것이다라고 이렇게 하나님께서 예언을 하시죠. 아브라함에게 그리고 그 예언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400 년 동안 종살이하다가 돌아오는 이 장면이 여기서 알 수 있는 부분이죠. 그리고
사라와 하갈 창세기 16 장 넘어가면 사라와 하갈 이🅓기가 나오는데 이 부분도 누지라는 도시에서 발견한 서화에 보게 되면 본 부인이 자식을 갖지 못했을 때 자기 여종을 남편에게 첩으로 줘서 그 자들을 낳게 되면 부부의 호적이 올라가는 거예요.
낳기는 작은 부인이 낳는데 호적에는 큰 부인의 호적으로 올라가요. 그래서 자기 아들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사라가 말해서 후사를 얻기 위해서 이런 방법까지 사용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근데 하나님은 철저하게 계속 얘기하는 게 뭐냐 하면 그게 아니라 니가 직접 낳아🅓 된다는 얘기를 하시는 거잖아.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서 우리가 이런 걸 많이 들어보셨을 거예요.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임의로 이렇게 후처를 들여서 자식을 낳은 이스마엘이라는 자식을 낳는 바람에 이스라엘과 이스마엘 간에 수천 년 간의 악연의 관계가 만들어졌다라고 얘기를 하게 되는데 이 부분은 제가 어렸을 때 하고 신학 공부할 때까지는 주류적이었는데 지금은 아주 보수적인 목사님 빼고는 그렇게 설교를 안 하시는 것 같아요.
자기들이 시조라고 이렇게 하는데 중요한 건 이스마엘과 이삭이 원수 관계가 됐기 때문에 그 원수 관계가 지금까지 내려왔다라고 사실은 이렇게 설명을 한 부분인데 후대의 기독교, 이슬람은 원수가 되지만 이 두 사람은 그런 관계가 아니었다는 거죠. 성경에 찾아보게 되면 아버지 아브라함이 돌아가셨을 때 두 형제가 와서 아버지의 어떤 장례식을 같이 치르지 않습니까? 이런 장면은 나오고 그리고 실질적으로 아까 그런 면들이 아니고 진보적인 입장에서 보수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봤을 때는 자유주의이라고 불리는 이 신학적인 입장에서는 이렇게까지도 주장을 해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 주장은 뭐냐면 이 창세기가 우리는 저는 우리 모세가 기록하고 모세
오경이라고 얘기하지 않습니까? 근데 이 자유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포로기 이후에 창세기부터 기록이 됐다고 이 사람들은 주장을 해요.
그러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에서 돌아올 때 이 땅에는 소위 말하는 이 사마리아 사람들과 소위 이민족들이 가득 차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여기 보게 되면 아브라함의 수많은 자식들이 나오지 않나요? 미디안도 나오고 이 사람들이 나오게 되는데 이런 민족들을 거론하면서 봐라 여기 창세기 봐라 니네하고 우리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는 이렇게 올라가 보면 우리 아브라함의 같은 이 자손들이🅓 그러니까 우리 친하게 지내자라고 그런 의도에서 성경에 기록돼 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리고 제가 요즘 인문학 강의를 찾아서 많이 듣는데 고고학자들은 그런 주장을 좀 하더라. 인문학자하고 고고학자들은 그런 주장을 좀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약간 좀 다른 개념이긴 하지만 근본적으로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후처를 통해 이스마엘이라는 자녀를 낳아서 어떤 갈등 관계를 만들어낸 건 잘못되기는 했지만 그 관계가 현재 이슬람과 기독교의 이런 대립 관계를 만들어놓은 건지 아니다라는 것들은 그 당시 풍습으로는 굉장히 자연스러웠다. 굉장히 자연스러웠던 건데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이게 항상 그 하나님 쪽이 이거잖아요. 세상 풍습이 그렇다 그 풍습을 따라가지 말고 나의 법을 따르는 게 하나님의 이 가장 강력한 그런 부분을 우리가 이해를 할 수가 있는 거죠. 그런데 이게 우리 성향과 똑같이 맞는 것 같아요. 우리도 믿음을 얘기하지만 항상 어떤 상황이 전개되면 먼저 내가 이걸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걸 우리가 먼저 생각해서 먼저 기도하고 맡기기보다는 그럴 수밖에 없기도 하고 이런 면들을 우리가 좀 그런 본성을 좀 볼 수가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고 단순하게 이 관계가 그런 나다 엄청난 역사적인 비극을 만들어냈다고 보는 거는 좀 무리한 해석이다라는 것들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17 장에 가게 되면 하나님께서도 자손의 번성에 대한 또 약속을 해 주십니다. 이게 약속을 해 줄 수밖에 없는 게 99 세에 하나님이 약속을 하는데 처음으로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죠. 그리고 이스마엘도 할례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아브라함의 집에서는 태어난 자식뿐만 아니라 돈 주고 사 온 종들까지 다 할례를 받아🅓. 그럼 이렇게 보면 아람 사람도 할례를 하지 않았다는 거죠. 이스라엘 민족의 직접적인 조상으로 여겨지는 아람 사람도 할례를 안받았는데 하여튼 후대 사사 시대
그리고 다윗 시대에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할례 받지 않은 사람들은 사람 취급을 안 하지 않습니까?
제가 봤던 자료인데 신기하게도 이집트 사람들은 할례를 했대요. 이거 나중에 한 번 한 번 더 찾아봐🅓 돼요. 제가 그렇게 본 기억이 나는데 이 사람들은 할례를 했다고 나오고 우선 저는 그래서 이거 제가 이건 확인을 못하고 말씀드리는 건데 그래서 스캔 쪽이 판매를 했을까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좀 아닌 것 같고 약간 좀 모호하긴 한데 예전에 민족 분포 지도를 보게 되면 애굽 땅에 빨갛게 샘족으로 이렇게 표시가 돼 있거든요. 제가 그래서 제가 확인을 못 해보고 지금 생각나서 말씀을 드리는데 그래서 이집트 사람들이 좀 독특한 위치에 지금 있다라는 것들이 좀 있어요. 그래서 한번 시간 나시면 한번 찾아보시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얘기를 하기도 하고 그다음에 또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얘기를 하고 여러 가지 얘기들이 있는데 크게 이 내용을 이해하는 데는 우리가 문제는 없어요. 어떻게 해석하든지 간에 그리고 어떻게 해석하든 간에 사실 문제될 부분은 하나도 없는 부분이라서 하여튼 간 이 새 천사의 존재에 대해서는 그냥 내 마음에 가는 대로 상상하셔도 크게 문제는 없을 것 같다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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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돔과 고모라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고 할 때 아브라함이 기도를 하죠. 하나님 거기에 의인이 있는데 의인도 같이 멸하실 겁니까 하는 의인 그러면 의인 50 명만 있으면 내가 너네 죽이지 않겠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그런데요. 죄송한데 숫자를 계속 줄여나가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10 명까지 나오는데 예전에는 저도 어느 때 그렇게 생각을 했어요. 그냥 그 넓은 성에 열 명도 없겠어. 롯과 부인과 딸들과 사위 따지고 하면 한 10 명은 나오겠지라는 생각이었는데 제가 나중에 말씀을 들으면서 쭉 보니까 그 열명이라는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사실 중고라고 얘기하지만 어떻게 보면 떼를 쓰는 거죠. 소돔과 고모라의 주민을 살리기 위해서 한번 끊임없이 하나님에게 무리한 부탁인 것 같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청을 할 때 계속 들어주시는 거거든요. 열명에서 멈췄다는 게 뭐냐 하면 아브라함이 더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절대로 무고한 사람을 심판하지 않겠다라는 어떤 확신이 드는 거죠. 그래서 그때 기도를 봅시다. 내가 더 이상 얘기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무고한 사람은 건드리지 않고 의인들은 분명히 살려주겠다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에 더 이상 이
기도를 멈추는 장면이라고 저는 그렇게 이해를 하고 또 그렇게 해석하는 주석들이 또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고전적으로는 아마 그런 해석을 많이 하셨고 목사님들 같은 설교들을 저는 그렇게 듣고 자라게 했습니다. 그래서 또 여기 얘기는 안 했지만 이 사이 장면에서 하나님의 천사 내가 이맘 때 다시 올 때 사라에게 후사가 있을 거라고 얘기하니까 사라가 웃죠. 속으로 저 사람 웃었대 나 웃지 않았다고 하는 장면도 나오기는 하는 이 장면들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천사들이 소돔을 방금 나갔는데 롯이 성문 앞에 앉아 있다가 천사를 보고 천사들이 자기 집을 이끌어 가죠.
그래서 이렇게 볼 때 롯이 요단 동편으로 가서 살다 보니까 점점 내려가서 이 소돔과
고모라 같은 죄악된 도시까지 흘러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하나님의 사자들을 알아볼 수 있는 어떤 영적인 눈이 아직까지 갖다가 있었다라는 것들을 우리가 생각했던 부분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고대의 이 마을 입구에 앉아 있었던 사람들은 재판장이라든가 장로들이었다고 그래서 룻이 상당히 소돔이라는 땅에서도 높은 그 위치에서 갖다가 그 성공한 삶을 살고 있었다라고 생각할 수가 있고 또 가서 그 집에 들어 있는 천사들을 사람들이 끌어 내라고 할 때 롯이 그것을 막을 때 누가 우리 너희 재판장을 세웠느냐라고 하는 그 사람들의 질타 속에서 롯이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그 땅에서 상당히 높은 지위로 살았다라는 걸 이해할 수가 있고요. 이 소돔과 고모라 이 죄악된 장면이 롯의 집에 찾아간 이 세 천사를 끌어내려는 장면에서 등장을 합니다. 성경에는 점잖게 번역이 돼 있어요. 그들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들과 상관하리라 이렇게 돼 있거든요. 근데 이 상관이라는 말이 뭐냐면 동성애를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 잘생긴 남자들을 끌어내면 우리가 그들과 관계를 맺어🅓 될 테니까 내가 그래서 요즘 얘기를 아니다. 손님은 그렇게 할 수가 없으니까 내 시집 가지 않은 내 딸을 내줄 테니까 그런 악을 범하지 말라고 얘기를 하는데 거기서 정확하게 이 사람들도 거부하는 장면에서 확실하게 이 사람들이 단지 성적인 타락을 넘어서 동성애를 광범위하게 버리고 있다는 게 증명이 되는 거거든요.
사사기에도 동일한 장면이 하나 나오죠. 도망간 첩을 찾아서 베들레헴인가 갔다가 돌아오는 이 레위 사람이 기브아 성읍에서 어느 노인네 집에 머물렀는데 밤에 불량배들이 찾아와서 이 사람이 첩을 막 내놓으라고 하니까 이 주인이 자기 딸을 줄 테니까 손님들은 그렇게 하지 말아라는 장면이 나오는데 거기서 이 천만 큰 재난을 당하는 피해를 당하는 이 장면이 나오는데 그렇게 봤을 때 여기서 이 소돔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남색이라고 하는 동성애를 광범위하게 벌렸고 이 천사들과도 동성애를 하려고 했다는 것들을 우리가 확실하게그렇게 결론 지을 수 있는 부분이거든요. 그리고 또 여기는 소위 말하는 수간이라고 하는 그 짐승과 섹스를 하는 이런 잘못된 성적인 이런 것도 굉장히 광범위하게 벌어졌다고 해서 소돔이라고 하는데… 그게 맞나요?
저는 그렇게 소돔이라고 하는 말이 수간을 나타나는 단어인데 이 기원이 바로 이 소돔에서 나왔다라고 얘기하는 그만큼 이 두 가지를 들었을 때 이 소돔과 고모라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아주 엄청난 죄악 가운데 머물러 있었다라는 것들을 알 수가 있는 거죠. 이 사람들은 심판을 면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라고 하는 데
그냥 이름만 나오는 거잖아요. 근데 그게 굳이 갖다가 그렇게 설명하지 않아도 같아서 설명을 안 했을 수도 있어요. 같은 카테고리 왜냐하면 소돔과 고모라 뿐 아니라 그 이웃에 있는 다른 성도도 다 심판을 받는데 오직 롯이 아니 천사에게 붙어 내가 늙어서 도망가서 걱정되고 산에 가두고 또 무서우니까 저기 조그마한 소알이라는 성이 있으니까 내가 거기로 도망할 때 그 성을 심판을 면해달라고 하죠. 그래서 소돔과 고모라뿐만 아니라 인근에 있던 어떻게 보면 소돔과 고모라의 연합군들 5 개 소국이 다 심판을 받는데 롯 때문에 그 심판을 모면하는 장면이 나오게 되는데 그래서 뭐 굳이 그 어떤 심판이었느냐 성경에는 유황과 불을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소위 말하는 핵으로 하나님께서 심판하셨다고 해서 지금은 그 중에서 방사능이 발견된 이런 얘기도 많이 합니다.그런 얘기들이 그냥 기독교 서적에도 굉장히 많이 나왔던 저로 기억을 해요. 그냥 이게 우스개 소리로 했던 게 아니라 교회 안에서는 좀 진지하게 나름 얘기됐던 그런 부분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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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부분이 됐다고 하는 거죠. 그러면 여기서 하나님의 천사가 어떤 신적인 능력으로 사람들의 눈을 보이지 않게 하고 이 롯과 부인과 두 딸을 데리고 나가죠. 근데 여기서 다음에 한번 사진 볼게요.여기 보면 제가 한번 지난 시간에 얘기했을 때 사해가 점점 줄고 있는데 저 옅은 부분이 고대 사해가 저만큼 넓었었는데 지금 현재는 저렇게까지 줄어들었다. 그래서 더 줄어들어서 조만간의 사해 바닥에 드러날지도 모른다라고 하는 그런 우려 섞인 목소리가 계속 나온다라는 거를 제가 그 사해를 다루는 영상에서 제가 봤습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 사진을 보게 되면 저기에 좀 떨어지는 바위 하나가 있죠. 약간 사람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그럴듯하게 보이는 게 있는데 그러니까 후대 사람들이 롯의 아내라고 부르는 소금 기둥이라고 합니다.
근데 그 소금 기둥이 롯의 아내가 가다가 뒤로 돌아오지 말라 했는데 뒤로 돌아와서 소금 기둥이 됐다라고 하는 저 지역에 암염 지대이기 때문에 암염이라서 이게 흙과 불순물이 다 섞여서 묻어 있어서 안 되지 소위 말하면 우리가 색깔 소금 색깔이 아니라 저런 빛깔을 띠게 되는 거죠. 그래서 좀 여담이지만 예수님이 맛을 잃은 소금 비유를 하잖아요. 우리는 이해가 안 되잖아요. 🅓 무슨 소금이 다 짜지 무슨 소금 맛을 밀어라고 하는데 암염이 실질적으로 천일염보다 염도가 더 높아요. 순수한 이 소금의 결정체이기 때문에 염도가 더 높은데 저 지역의 암염의 특징이 불순물이 상당히 많이 섞여 있는 거🅓. 그래서 제대로 정제되지 않은 이 압력 같은 경우에는 그냥 잘못 보관하면 그냥 이 맛도 저 맛도 그냥 돌 조각인 소금이 아닌 거예요. 그래서 그냥 길에 던져 바닥에 밟고 다니 진짜 돌 조각밖에 안 된다는 거죠.
그래서 그런 유적의 소금 암염의 특성 때문에 이렇게 해서 맛을 잃은 소금의 비유를 그렇게 하셨다라고 이렇게 주석학자들이 얘기를 그렇게 하더라고요. 저 지역만의 어떤 특징이다라는 거를 그냥 상식적으로 한번 알아두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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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다음 볼게요. 여기가 롯이 두 딸과 함께 소알로 도망갔다가 또 무서우니까 산으로 도망가지 않습니까? 그 도시 옆에 있던 산과 그리고 도피 했던 동굴이라고 얘기를 해요. 그래서 이렇게 유적지를 꾸며 가지고 만들어 놨는데 이게 제가 배우기는 이 소위 말하는 지금 팔레스타인 지역에 있는 이 기독교 유적지들 있지 않습니까?
이 유적지들이 대부분을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가 이름이갑자기 생각이
안 나요. 헬레나, 헬레나가 굉장히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는데 기독교가 교인이 되고 난 이후에 이 성지를 다니면서 이 소위 말하는 이 성지를 성역화 하는 작업을 했대요. 그래 가지고 그때 아마 이것도 만들지 않았을까? 베들레헴의 마굿간이라든가 이런
것들을 다 꾸며놨던 게 헬레나가 황제라고 하는 막강한 아들의 힘을 빌어서 작업들을 다
했다라고 얘기를 제가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무려 한 2 천 년 전 이상 되는 이 기독교 유적들이 지금까지 잘 보존돼 있는 이유 중에 하나가 300 년경 400 년경에 그 작업이 이루어졌다고 다 모든 보존 작업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리고 그 성경에 소위 말하는 그 유적을 우리가 지금도 사진을 볼 수 있는 거죠.
기본적으로 십자가를 보게 되면 카톨릭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있는 십자가지 않습니까? 근데 이게 신학적인 의미가 있는 거예요. 카톨릭의 기본적인 신학적인 개념이 뭐냐면 고난당하는 예수님이거든요. 이 소위 말하면 종교 개혁의 개신교의 신학적인 이념은 승리하신 예수님이고요. 죄를 이기고 승리하신 예수 그래서 그냥 그 십자가에 더 이상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신 예수님이 존재하지 않는 거죠. 근데 양쪽의 장단점이 다 있는 게 뭐냐면 고난 가운데서 진짜 다 우리가 예수님의 고난을 잊지 않는 그리고 동시에 사도 바울이 많이 얘기하지 않습니까?
내가 복을 받았으니 고난 달게 받으라라고 하는 어떤 기본적인 신앙의 기본을 생각해 끊임없이 잊지 않게 상기시켜준다는 장점이 하나 있지만 또 하나는 어떤 하나의 단점도 있는 거고 또 기독교 신학에서는 어떤 승리의 신학들 자체는 뭐냐 하면 기독교인들이 어떤 삶에 있어서 짓누르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반드시 승리하게 된다는 이런 어떤 믿음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그런 것들을 불어넣을 수 있는 그런 신학적인 장점이 있는 부분이거든요. 그래서 이 부분들이 그냥 이렇게 만든 게 아니라 나름대로 그런 신학적인 의도가 존재를 한다고 합니다. 여기 그래서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봤어요. 이건 되게 여담인데 이거 마지막 부분에 해도 될 것 같은데요. 이거 하나하고 이게 이말씀드릴게요. 동굴로 도망가서 여기서 비극적인 사건이 하나 나오잖아.
두 딸들이 다 망했으니까 우리하고 결혼할 사람이 없을 거다. 우리 시집 못 가니까 아버지를 통해서 자녀를 낳겠다라고 하고 아버지에게 술을 먹이고 아버지를 통해서 이 후사를 이어갑니다. 근데 이게 여기에 대해서 또 다른 신학적인 얘기도 있는데 소위 말하는 고대 근동 지역의 광범위 표현 ?? 제도라고 볼 수가 있어서 이 ?? 제도가 단순하게 형제가 그 형제나 친척이 자녀가 없이 죽었을 때 그 부인과 결혼해서 후사를 이어준 것뿐만 아니라 그 형제나 자식이 없으면 시아버지도 그 의무에 참여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보면 유다와 다말 시아버지와 며느리 간의 관계가 이렇게 나오게 되는데 유다가 나중에 밝혀지고 난 다음에 그곳에 왔다가 처음에는 불태워 죽이려고 그러다가 이 물건의 주인 때문에가 임신했다고 그러니까 유다가 자기가 자기 며느리와 관계를 맺은 걸 알고 내가 나보다 의롭다라고 얘기를 할 때 이게 최신의 신학적인 연구를 그렇게 얘기를 했다가 그 ??의 의무를 그러니까 둘째 아들이 그 오난도 죽고 막내 아들도 죽을까 봐 자기 막내 아들을 한테 결혼을 안 시키고 시집으로 보내 버리잖아요.
내가 그래서 벌써 그때 이 유다는 자기 스스로 갖다가 자기가 그 의무를 지는 책임을
지게 됐다라고 보거든요. 그래서 그런 장면이 나오는데 그런 관점에서 보게 된다 그러면 우리 관점에서는 이건 있을 수 없는 폐륜적인 얘기인데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그런 관점에서는 이게 대를 잇기 위해서는 이런 방법도 허용이 되는 거예요.
근데 그렇게까지는 할 수가 있는데 나중에 신명기에 보게 되면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올 수 있는 자격을 보게 되면 음경이 상한 자라든가 이런 사람들이 그 총회에 들어올 수가 없고 애굽 사람은 3 대가 지나면 총회에 들어올 수 있는 게 너희가 크다 해서 나그네가 되었습니다. 얘기하는데 암몬과 모합 이 사람은 10 대가 지나도 못 들어온다고 얘기를 하죠. 왜냐하면 이 사람이 사생자였기 때문에 얘기를 하는 거거든. 그래서 이 부분이 어떤 고대 근동의 법상으로도 충분히 허용되는 부분이긴 했는데 신학적인 부분을 봤을 때는 이게 허용되지 않는 부분이라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은 절대로 모압과 암몬 사람들은 10 대가 지나서 들어오지 못한다는 거 하나 딱 박아 놨는데 또 재미있는 건 롯을 보게 된 모압인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총회에 들어올 뿐만 아니라 메시아의 계보에 이름을 딱 올리고 있죠. 굉장히 좀 특별한 관계이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본다고 한다면 보아스 얘기를 하죠. 여호와 하나님의 나에게 그날에 찾아온 에게 하나님의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얘기할 때 분명히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찾아오는 자에게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용서와 사랑과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들을 이렇게 엮어서 한번 우리가 또 그렇게 생각을 해 볼 수 있는 자료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