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시험의 경향이 바뀌고 있다.암기 위주의 시험문제 출제방식에서 종합적인 이해력을 묻는 문제 위주로 출제되고 있다.합격자들은 혼자서 고시원에 틀어 박힌 전통적인 ‘폐쇄형 공부’ 방식보다는 동료수험생들과 토론하며 시야를 넓히는 ‘열린공부’ 방식으로 기본기를 보강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서울신문은 지난해 말 발표된 45회 사시 합격자 가운데 이색합격자 4명을 선정해 합격비결 대담을 가졌다.대담 참석자는 최고령 합격자인 조영종(50)씨,군산경찰서 동부지구대 1사무소장인 이정철(27) 경위,회계사 오명석(25)씨,천정배 국회의원의 맏딸인 천지성(25)씨다.지방근무자도 있어 대담은 e메일로 이뤄졌다.
● 기본기를 쌓고,다양한 이론을 접해라
대담자들에게 처음 던진 질문은 합격의 비결.이들은 ‘교과서 중심’이라고 입을 모았다.동시에 귀를 열어 놓고 다양한 학설에 관심을 기울였다고 소개했다.
조씨는 장소를 가리지 않고 토론을 벌이는 ‘길거리 스터디’ 도움을 톡톡히 봤다.“나이 어린 수험동료생들과 휴식시간에 자료 없이 토론하면 내 주장의 논리적 결함을 발견할 수 있었다.개인적으로 가장 도움됐던 방법이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과 동료들만의 ‘우물’을 벗어나기 위해 학원 공개강의도 많이 활용했다.공개강의 때는 법학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이 따라붙기 마련이기 때문이다.“강사들의 설명을 들으면서 내 논리의 한계를 많이 떨쳐냈고 소위 ‘리걸 마인드(legal mind)’를 갖추는 데 도움이 됐다.”고 했다.모의고사를 통해 자신의 수준을 가늠하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오씨는 ‘한우물 파기’ 전략을 세웠다.1차시험을 준비하면서 여느 수험생들이 흔히 읽는 교과서 1∼2권을 반복해서 읽었다.그렇게 전체적인 흐름에 익숙해지면 문제집 위주로 공부법을 바꿨다.그는 “답이 맞든 틀리든 문제를 푼 다음 반드시 교재를 거꾸로 확인하면서 관련 부분을 다시 전체적으로 읽었다.”고 소개했다.2차시험도 마찬가지로 교과서 중심 전략을 폈고,논술형인 점을 감안해 다양한 학설을 파악하는 데 중점을 뒀다.
천씨는 “요약서나 문제집을 모두 보면 공부량만 지나치게 늘어나고 집중하기 어렵다는 생각에 교과서를 파고들었다.”고 말했다.교과서를 반복적으로 읽으면서 기본 개념은 물론 다양한 학설이 나오게 된 근거를 깊이 있게 생각했다는 것이다.그는 답의 옳고 그름도 중요하지만 글 전체의 논리적 흐름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보고 문장이나 단어 하나하나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이씨는 강의테이프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한 스타일.“경찰 근무 때문에 집안에 앉아서 책보는 시간보다 바깥에서 근무를 해야 하기 때문에 강의테이프만 줄기차게 들었다.”고 했다.1·2차시험 모두 테이프를 듣고 또 들었다.자신의 처지를 감안해 공부방법을 택하면 주경야독으로 충분히 합격이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준 것이다.
● 법률 과목은 역시 힘들다
조씨의 경우 공부할 때는 형법이,시험칠 때는 민법과 형사소송법이 까다로웠다.그는 “형법은 이론 자체도 어렵고 학설도 엇갈리는 부분이 많아 정리하기 쉽지가 않았다.시험칠 때는 역시 범위가 넓은 민법과 형사소송법이 힘들었다.”고 전했다.
오씨와 천씨는 준비하기 어려웠던 과목으로 헌법을 꼽았다.오씨는 2차시험 막판까지도 헌법 때문에 고심했다.시험은 민법이 복잡한 데다 소홀히 했던 부분까지 출제돼 상당히 고전했다고 소개했다.천씨 역시 “양이 방대했던 헌법이 제일 어려웠는데 1차 시험 때도 역시 헌법이 제일 어려웠다.”고 말했다.
● 약점을 극복하면 장점이 된다
“수험생 누구에게나 약점이 있기 마련이지만 극복하느냐에 따라 장점이 될수 있다.”
여성인 천씨를 가장 괴롭혔던 것은 건강.시험 기간 내내 스트레스에 피로가 쌓인 천씨는 2차 시험 내내 감기에 시달렸고 시험직전에는 해열주사를 맞을 정도였다.“곁에서 간호해준 어머니가 아니면 시험을 치를 엄두도 내지 못했다.”는 그는 요즘 집 근처 헬스클럽에서 운동으로 몸을 다지고 있다.
현직 경찰인 이씨는 쏟아지는 졸음이 힘들었다.공무원으로서 월급만 축내는 게 아닌가 하는 고민이 있었다.지난해 10월 결혼한 이씨는 “시험을 준비하면서 신경이 예민해져서 아내와 많이 싸우기도 했다.”고 했다.경찰서에서 상대적으로 한가한 형사관리주임 보직을 주는 등 배려도 보탬이 됐다.그는 2차시험 합격자 발표를 부안 원전센터 시위현장에서 들었다.
최고령 합격자 조씨는 묵묵히 뒷바라지해준 가족들에게 합격의 공을 돌렸다.지난 93년 대기업 과장자리를 그만 두고 나와 6년 동안 변리사 시험준비에다 3년 동안의 사시 준비 끝에 합격했다는 그는 “가족들이 변리사 시험 때도 자꾸 떨어지고 하니까 은근히 그만하길 바라는 눈치셨는데 내색은 안하더라.”고 했다.
회계사 오씨는 지난 2000년 가을부터 준비해서 2년 6개월가량 준비 끝에 합격했지만,지난해 3월 다가온 슬럼프 극복이 난적이었다.그럴 때면 합격 때 기뻐할 부모님 얼굴을 떠올리기도 하고,다른 사람들의 합격수기를 읽으면서 각오를 다졌다.
● 나는 이래서 법조인의 길을 택한다
이씨는 연수원에 들어가면서 경찰서에 사직서가 아닌 휴직계를 낼 참이다.법조인이 아닌 경찰로 남고 싶어서다.“경찰대에서 법률과목을 제법 들었는데 형사계 근무를 하니까 법률지식이 많이 부족하더라.”는 그는 초동수사 단계 때부터 충분한 (법적)증거를 갖추고 싶다고 했다.이씨가 관심이 많은 분야는 러시아다.
천씨는 “판사가 되어서 법리뿐 아니라 상식적으로도 합당한,사회를 이끌 수 있는 방향의 판결을 내려보고 싶었다.”면서 존경하는 법조인으로는 소수의견을 많이 낸 변정수 전 헌법재판관,미국의 더글러스 판사 이름을 댔다.대학 3학년 때 회계사시험에 ‘운좋게’ 합격했지만 나중에 할 수 있는 일의 폭을 넓히기 위해 사시를 택했다는 오씨는 군 법무관으로 병역을 해결한 다음 진로를 택할 생각이다.나이 탓에 판·검사 임용은 생각도 못하는 조씨는 변호사 개업 등의 진로를 천천히 고를 계획이다.
(서울신문 2004/02/02 조태성기자)
실직한 은행원 고시 인생역전 "IMF가 약 됐어요"
[중앙일보 윤창희 기자] IMF 외환위기 때 실직한 은행원이 인생역전의 꿈을 이뤘다.
23일 제45회 사법시험에 최종 합격한 박대산(朴大山.35.사진)씨 얘기다.
그는 지난 2월 법원 행정고등고시를 시작으로 5월 입법고시에 이어 이번에 사법시험까지 합격했다.
사법.행정.외무고시를 모두 합격한 경우는 그동안 몇 차례 있었지만 입법.사법.행정분야의 3시(試)합격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의 인생역전은 좌절과 고통, 인내와 극복으로 이어진 한편의 드라마였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장기신용은행에 입사한 것이 1996년 1월. 그러나 98년 말 국민은행에 흡수.합병되면서 졸지에 '백수'신세가 됐다.
"은행에서 인사부 주임으로 일하다 하루아침에 명예퇴직금 3천만원 받고 나오니 정말 막막하더군요. 명문대를 나왔다며 기대가 컸던 부모님 뵐 면목도 없고요." 함께 일하던 직장 동료 중 절반 이상이 회사를 떠났다.
그는 "말이 명퇴지 사실상 감원이나 다름없었다"고 했다.
몇 군데 직장문을 두드렸지만, IMF 여파로 재취업은 쉽지 않았다.
그는 "장래를 생각하면 확실한 자격을 따는 것이 낫겠다"며 고시 공부를 택했다.
서울 S여중 교사인 아내 진모(33)씨를 설득해 어렵사리 허락을 받았다.
곧바로 서울 강북구 미아동 집을 떠나 99년 초 신림동 고시원으로 들어갔다.
공부를 잘 했던 朴씨였지만 30대에 시작한 고시공부는 만만치 않았다.
고시원.학원비에 책값까지 매달 1백만원 이상 드는 비용은 아내가 댔다.
아내 진씨는 참고서.문제집 저술 아르바이트까지 했다고 한다.
朴씨는 아홉살 딸, 일곱살 아들과 한달에 한번 얼굴을 마주했다.
2001년 6월에는 사법시험 2차 시험을 앞두고 고향(부산)의 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지는 통에 낙방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심란했던 것은 체력 저하와 주위의 눈길. 매일 열시간씩 두툼한 법률책과 씨름하면서 체력은 떨어졌고, 이미 사회에서 중견으로 자리잡은 친구들 소식에 조바심도 났다.
"간발의 차이로 떨어져 다시 1년을 준비하는 '도돌이표' 생활에 낙담도 했지요." 그는 현재 입법고시를 통해 국회 재정경제위원회 입법조사관으로 근무 중이다.
내년 3월에는 사법연수원에 들어갈 예정이다.
그는 "사법연수원 과정을 마친 뒤 법조계로 갈지, 국회로 돌아올지 결정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날 사법시험 합격자에는 재경부 서기관 임범상(36)씨, 현역 해군소령 유영무(33)씨, 치과의사 김연경(28.여)씨 등 이색 경력자도 포함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