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강성서원 소재지 ; 전남 장흥군 유치면 면사무소 윗쪽 (당초 늑용리에 소재하고 있었으나 탐진댐 공사로 인한 수몰로 유치면 사무소옆으로 이건(移建)이 완료된 상태임) 문화재 ; 전남문화재 제70호 사액서원 향사일 ; 9월9일(음) 12:00 유림주관 배향선조 ; 12세 충선공 諱익점, 21세 풍암공 諱위세 1644년(인조22) ; 임란 때 장흥출신 士林 풍암 文緯世(위세)의 학문과 절의를 기리고 향사(享祀)하기 위해 월천사를 세움. 1702년(숙종28) ; 태학 장보(章甫)의 상소로 국가에서 공인 사당의 건립절차와 규모 마련. 이때 심은 암수 한쌍의 은행나무의 수확으로 제수비용 이 되었다함. 1729년(정조5) ; 풍암의 신도비(神道碑) 세움 1734년(영조10); 월천사에 문익점을 合享해 主壁으로 하고 풍암을 배향함 1785년(정조9) ; 전라도 유생 600여명이 사액을 청해 강성서원의 액호 내림 1812년(순조12); 풍암의 신도비를 서원의 사당과 강당 사이로 이전. 1894년 ; 후손 貞源· 郁浩 등이 전답 일부를 환속시켜 享祀 재개. 1905년 ; 장흥군수 이장용(李章鎔)과 향교 유생들의 협조로 강당중건. 1933년 ; 신실 崇德祠(숭덕사)중건 1975년 ; 중수함 2002년 ; 탐진댐 공사로 인한 수몰로 이건작업을 진행하여 신실을 준공하고 2003년 ; 강당을 기공하여 완공 함. 2. 풍암공의 대표적인 유적은 강성서원·신도비 풍암(楓菴) 문위세(文緯世)는 1534년 중종 29년 부산면 부춘리에서 태어나 유치면 늑룡리에서 1600년 선조 33년에 67세의 일기로 별세했던 조선후기 도학(道學)과 절의(節義)의 큰 선비였다. 생전에 그가 제수받은 관직은 용담현령과 그가 별세하던 해에 제수받은 파주목사가 전부였으나, 그는 임진왜란이라는 절체절명의 위란 앞에 과감히 창의(倡義), 흰옷을 입은 '백의(白衣)의 의병장'으로 더 위명을 떨친 충신이요, 비록 관직에 나아가기보다 많은 세월을 은둔생활로 자족했지만 그의 학덕(學德)에 대한 명성만큼은 중앙 유림사회에서도 인정받을 정도로 학문·인품 등에서 출중했던 호남의 대학자이자 문신이었다. 이러한 그의 공훈으로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백여년만인 1798년 정조 22년에 병조참판에 추증되는 영예를 입기도 했다. 강성서원은 연곡서원(淵谷書院. 1772년 사액), 용산면 계산리의 충렬사(忠烈祠. 1798년 사액)와 함께 국가 공인의 3대 서원 중의 하나이다. 1785년 (정조9년)에는 전라도 유생 6백여 명이 문익점의 공덕을 추앙하여 사액(賜額)할 것을 청하는 상소문을 올려, 조정에서는 삼우당의 출생지인 강성(江城:의 경남 산청)의 이름을 빌어 와 '강성서원(江城書院)'이라 는 사액을 지어 내리고, 이와 함께 정계충(鄭啓忠)을 예관으로 보내 치제(致祭)케 했다. 이에 따라 강성서원은 국가공인서원으로 위상과 면모를 일신하게 되었으며, 장흥도호부에 연곡서원 다음의 두번째로 사액서원(賜額書院)인 강성서원이 생기게 된다(淵谷書院은 1698년에 사액되었다). 사액서원이란 조선시대 국왕으로부터 편액(扁額)·서적·토지·노비 등을 하사받아 그 권위를 인정받은 서원이란 뜻이다. |
강성서원 현판
장흥군 유치면 사무소 쪽에서 본 강성서원의 원경
강상서원의 근경1.
강성서원의 근경2.
강성서원의 앞에 있는 풍암공 위세(경절공21세) 선조의 신도비
서원정문인 숙연문
서원내 강성서원 강당
숭덕사 정문인 존현문
숭덕사
서원에서 본 탐진댐(탐진댐공사로 수몰지구인 늑용리에서 현재 위치로 서원을 이건(移建)하였다 함)
서원과 멀지않은 유치초등학교 입구에 있는 효자비각
쌍효비각의 안내간판
서원에서 멀지않은 유치초등학교 입구의 효자비각내의 효자비
효자비각옆에 여러종류의 비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