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란다 꽃 키우기 외 2편
최윤희
준비물
우뚝 솟을만한 빈 영역
영혼을 떠낼 작은 꽃삽
삶과 죽음에 관한 사소한 실랑이와
툭 툭 껍질을 깨고 나오는 몸부림
그리고 살아야 할 몇 가지 이유들
재배법
봄이 어디 날 잡고 오시더이까
내 마음 꽃피면 봄인 게지
이마에 손 얹고 까치발로 서면
못 박고 떠난 자리에도 보이나니
길게 자라 미워진 가지 짧게 자르면
눈시울 젖은 예닐곱 얼굴이
눈부신 그림자로 걸어와
종말보다 더 깊은 어둠을 밝히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찾을 수 없는 그 무엇을
베란다 양지 밭에 심어놓고
무작정 기다리는 한나절
신화에 나오는 어떤 피치 못할 사유로
무심히 지는 날에도
까만 씨앗 하나 정표로 남으리니
기념촬영
좀 웃어보라는 말에
심장엔 아예 폭죽이 터진다
제비 둥지 그 허기짐으로 입 벌리는 붉은 뺨에
어찌 다 입 맞출 수 있을까
끝끝내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결국 우리가 먼저 시든다 해도
시험에 들다
답지가 수상하다
가나다순은 건방져 보이고
나가라나가는 불온하며
다나가라로 적기 미안해 답을 고치면
시험지가 허연 종아리를 걷고 회초리를 맞는다
헝클어진 실타래를 움켜쥐고
누군가 묻는다
이쪽이냐 저쪽이냐
이도 저도 아니라고 고개 저으면
채찍을 휘두르며 줄을 세운다
요즘 문제는 OX로 푼다
한 손에 각목을 집고 삐딱하게 서서
머릿속까지 뒤지는 불심검문에
오늘도 시험에 들게 하옵시고
나는 또 망설이는데
사피엔스의 밤
낯선 여인이 비틀거리며 걸어와
윗도리를 벗으며 옆에 앉는다
뭐가 그리 급했던지
콧등에 송송히 이슬이 맺히고
진달래 물던 입술엔 단내가 난다
오늘은 이 여자 어제는 저 여자
인사도 없이 만나는 자리에서
내 무엇을 물어보리
어차피 갈 길은 뻔하고
우리는 이제 같이 잘 것인데
뒤늦은 후회도 소용없지
천벌을 받아도 어쩔 수 없어
죽든 살든 한 몸에 묶여
갈 데까지 가야 한다
으스름 달빛을 타고 흐르는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밤
퇴근길 고속버스는 깊어만 가고
최윤희_ 2009년『미네르바』로 등단
카페 게시글
신진 조명 작품
베란다 꽃 키우기 외 2편 / 최윤희 - 미네르바 2014 여름호 신진 조명
이종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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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6.11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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