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은 조선 오백년의 도읍지, 왕도(王都)의 역사와 전통이 곳곳에 배어있는 도시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걸어서 한양답사를 다니고 있는데 이 한양에 대한제국 황궁이 있다니?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 이 5대 궁궐 말고 황제폐하가 계시던 황궁이 있었다니?
조선왕조에 스물 일곱분의 임금님 말고 황제폐하가 계셨다는 말인가?
그럼 과연 조선은 멸망했는가?
엄밀히 말하면 조선은 일제에 멸망한것이 아니라 26대 고종에 이르러 대한제국을 선포함으로써 제후국에서 황제국이 된것이며 이후 대한제국은 2대에 걸쳐 황제로 이어지다가 일제의 강제병합으로 멸망하였으니 조선의 임금은 26대 고종이 마지막이요, 고종은 대한제국의 태황제(太皇帝)인것이며 순종은 27대 임금이 아니라 대한제국 2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인것이다.
즉,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하였던 고종은 1897년 2월 20일 덕수궁으로 환궁하였으며, 그해 10월 12일에는 소공동(小公洞)의 원구단(圓丘壇)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황제에 등극하니 이날부터 덕수궁은 대한제국의 정궁(正宮)이 되었으며, 연호를 광무(光武)라 하니 조선은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고 새로운 나라가 된것이다.
석조전(石造殿) 역사
이렇게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 이에 걸맞는 황궁(皇宮)을 계획하여 지금의 석조전을 1900년에 착공, 1910년에 준공하였다.
사실 석조전(石造殿)이라는 명칭은 그동안의 조선왕궁이 대부분 나무로 지어진 건물, 즉 목조전(木造殿)인데 비하여 서양의 건축기법을 동원하여 돌, 즉 대리석으로 지은 궁궐이라는 뜻이니 고유명사라기보다 일반명사로 보는것이 타당할 듯 하다.
그러나 오랜동안 석조전으로 불러왔기에 이제는 거의 고유명사처럼 쓰이고 있다고 본다.
아무튼 이렇게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지어진 석조전은 당연히 광무황제(고종)와 순헌황귀비의 생활공간이어야 했지만 광무황제는 덕수궁 함녕전에서 생활하면서 석조전은 공식행사가 있을때만 사용하였고, (명성황후 시해이후 황후자리는 비어 있었으며) 후궁격인 순헌황귀비는 석조전 준공 이듬해인 1911년 훙거하여 석조전을 사용하지 못하였다. 그러다보니 석조전은 공식행사나 행사후 만찬 등에 주로 사용되었고, 영친왕이 일본에서 귀국할때 임시 거처로 사용되었다. 이후 광무황제(고종)가 승하후 덕수궁이 방치되면서 석조전도 사용되는 일 없이 지내다가 1933년 일제에 의한 덕수궁 '중앙공원화 정책'에 따라 '덕수궁 미술관'으로 용도가 변경 되었다.
그리고 1938년 '이왕가(李王家) 미술관', 해방후 1946년에는 '미소공동위원회 회의장', 1955년 '국립박물관'등으로 사용되면서 그 원형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석조전(石造殿) 복원
정부(문화재청)에서는 대한제국의 역사적 의미를 회복한다는 취지로 2009년에 석조전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5년만인 2014년 10월에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으로 재탄생 시켰다. 그동안 이곳저곳에서 보관하던 당시 가구들을 원래 자리에 배치하여 황궁의 생활사를 재현하였으며, 재현이 어려운 공간은 전시 공간으로 조성하였다.
석조전 대한제국 역사관은 총 3개로 구성되었는데, 접견실과 대식당등 공적공간이었던 1층에는 대한제국의 정치, 외교, 의례 등에 관한 내용을 전시하였으며, 황제의 침실과 서재등의 사적공간이었던 2층은 황실 소개와 함께 광무황제(고종)과 그의 비(妃), 영친왕 등에 관한 전시공간으로 구성하였다. 나머지 한곳은 시종들의 생활공간이던 지층(地層)인데 이곳에는 대한제국의 근대개혁과 신문물의 도입과정, 당시 덕수궁 주변 지역을 소개하고 석조전 복원 5년간의 기록을 담아 전시중이다.
대한제국 역사관, 즉 석조전을 관람하기 위해서는 일주일전쯤에 인터넷으로 신청해야하며 (http://www.deoksugung.go.kr/) 별도 입장료는 없이 덕수궁 입장료로 가늠한다. 다만 지층 전시공간은 이와 무관하게 둘러볼 수 있다.
<복원된 석조전 전경>
석조전은 황제의 승낙을 얻어 대한제국 해관(海關) 총세무사 영국인 브라운(J. M. Brown)이 계획을 세우고, 청국 해관 엔지니어 영국인 하딩(J. R. Harding)이 설계하였다. 공사 감독 역시 영국인 가트만(F. A. Kartman), 하딩, 데이비슨(Davidson)이 맡았으며, 인테리어 공사는 영국인 로벨이 총 감독을 맡고, 영국 가구회사 메이플에서 시공 및 납품을 담당하였다. 한편 건축 공사를 시작하기 전에 목재로 1/10 크기의 석조전 모형을 제작하였는데, 이 모형이 1900년 미국 건축잡지에 소개되기도 하였다.
대한제국 최대의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은 신고전주의 양식의 철골 콘크리트조 건물이다. 지층은 창고와 주방 등의 준비실로 구성되었고, 1층은 공식적인 행사를 위한 공간, 2층은 황제와 황후의 생활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전통적인 궁궐은 편전과 침전이 분리되어 있는데, 석조전은 이를 한 공간에 둔 서양식 궁전이다.
1910년 준공된후 1911년에는 외국에서 나무를 들여와 석조전 앞 정원을 완성하였다. 순 서양식으로 완성된 석조전은 서구화로 그대화와 부국강병을 꿈꾸었던 대한제국의 의지가 반영된 건물이다.
석조전의 건축양식은 18세기말~19세기초 프랑스, 독일, 영국에서 유행한 콜로니얼(Colonial) 양식의 일종으로 미국에서 유행하였던 신고전주의 양식을 따른 것이다. 정면과 측면에 개방형 테라스를 두었으며 정면 중앙에 거대한 원형기둥이 줄지은 그리스 로마 신전을 연상케하는데 기둥 위 주두(柱頭)는 이오니아 양식으로 하였고 건물의 실내는 우아하고 셈세한 로코코(Rococo)풍 장식이다.
<정면 중앙 현관의 상부 박공 면에 대한제국의 문장인 오얏꽃(李花) 문양을 새겼다.>
1층을 들어서면 중앙홀의 공간을 중심으로 왼쪽이 대식당, 정면이 접견실, 오른쪽은 귀빈대기실이며 중앙홀 상부 2층 공간은 탁 트인 구조로 되어 있어 개방감을 한껏 살린 구조이다. 접견실과 대식당 사이에는 소식당이 있다.
황제를 뵙는 접견실은 석조전 실내중 가장 화려하고 위엄있는 공간이다. 다른 방들과 달리 황실의 문장인 이화문(李花紋 : 오얏꽃무늬)을 가구와 인테리어에 사용하였다. 이화문은 태극기, 무궁화와 더불어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문장(紋章)으로 서양식 관복, 군복, 훈장, 공문서, 동전, 우표, 관용식기등에 사용하였다.
접견을 기다리는 귀빈대기실도 매우 격조 높게 꾸며졌으며, 접견후 또는 행사후 만찬등을 위한 대식당 역시 크고 화려하다.
<1층 중앙홀 정면의 접견실... 크고 화려하다.>
<접견실 벽면에는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황실의 문장 이화문(李花紋 : 오얏꽃무늬)을 인테리어로 꾸몄다.>
<1층 중앙홀 좌측의 대식당... 대한제국 의례서(儀禮書)를 기준으로 12인석 연회석을 마련하였다.
식기는 대한제국 이화문 백자이며 식탁 장식과 식기 배치등은 영국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재현하였다.>
<중앙홀 우측의 귀빈대기실... 격조높게 꾸며졌다.>
<1층에서 2층으로 오르는 계단, 유일무이(?)하게 온전하게 남아있는 부분이라고 한다.>
석조전 2층은 황제와 황후의 침실과 거실, 서재등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광무황제(고종)나 순원황귀비는 이곳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일본에 체류하던 영친왕이 잠시 귀국할때 머물었다는 기록이 있다.
침실 사진이나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복원이 힘들었지만 남아있던 가구중에서 황제침실(EMPERORS BEDROOM)이라 쓰여진 옷장과 세면대가 남아 있었으며, 또한 영국 메이플사의 카탈로그를 참조하여 가구를 배치하고 침대위 캐노피까지 설치하였다고 한다.
황제침실은 황금색, 황후침실은 자주색으로 재현하였다.
<황제 침실, 황제색인 황금색으로 치장하였다. 옆에 보이는 옷장이 EMPERORS BEDROOM 문구가 새겨진 옷장이다.>
<침실 옆 황제의 거실이자 서재 공간, 원탁위에 양장본 책이 한권 놓여있는 1922년 사진 그대로 복원하였다.>
<원탁 뒷편으로 보이는 책상은 접어 넣을수 있는 독서책상으로 특이한 구조가 눈길을 끈다.
그 옆에 서 있는 책장과 위의 둥근원탁에 EMPERORS LIBRARY라고 문구가 찍혀있어 황제 서재 가구임을 알 수 있다.>
<황후 침실, 자주색으로 치장하였는데 사실 국모(國母)가 공석이었으니 아쉽다.>
<황후의 거실은 여성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중앙 타원형 탁자와 왼쪽 책상에는 EMPERORS BOUDOIR이라는 문구가 있는데
BOUDOIR은 전통적 개념의 안방, 규방과 같은 뜻이니 황후의 거실용이다.>
2층은 이처럼 황제와 황후의 침실과 거실, 그리고 부속공간들로 되어 있다.
또한 1층의 중앙홀 상단부는 2층까지 통창으로 뚫어놓아서 공간적 확장감과 함께 시원한 시야를 제공한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면 넓고 탁트인 베란다가 있어 덕수궁내 전망을 살필 수 있다.
베란다 정면에는 근대식 정원과 분수대가 잘 꾸며진 조경과 함께 아름답다.
<2층 중앙부, 1층 중앙홀과 단일 공간으로 탁 트인 구조이다.>
<2층 베란다. 무척 넓다. 열주(列柱)들 사이로 바라보이는 덕수궁 풍경과 정면 분수대가 아름답다.>
석조전 앞 분수대는 아마도 국내 최초의 서양식 정원 분수였을것이다. 이 분수는 물개모양이 사방으로 물을 뿜는 구조이다.
관련 기록을 보면 1920년대에 세워진 처음 모양에는 커다란 거북모양 조각상을 세웠는데 이는 우리 고유의 장수의 상징이자 신성시하는 동물을 세운것이었는데, 이후 1938년 6월 석조전 서관(현재 미술관) 개관에 맞춰 9월에는 물개모양 분수대로 바뀌었는데 그 이유가 한국 전통의 동물을 제거하고 일본 북해도 지역에 서식하는 물개를 세운것이라며 주장하는 의견이 있어 주목된다.
<물개 분수대 이전의 거북 모양 조각상 사진...>
5년에 걸친 대규모 복원공사를 마친 덕수궁 석조전
사실은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기획하고 건축된 역사적인 건물인데 그 지나온 시간들이 너무나 초라하고 참담했다는 느낌이 든다.
뒤늦게나마 대한제국의 정궁을 되찾고자 하는 마음으로 최대한 당시의 구조와 배치, 장식까지 맞추어 복원했다하니 다행이다.
많은 사람들이 고궁산책과 더불어 꿈을 펼치지 못하고 사라진 대한제국의 흔적이나마 찾아보면 좋겠다.
< 계 속 >
첫댓글 세세한 이야기 즐겁게 읽었습니다...
내문답 강의 시간에 대강봤는데 다시 보니 속속 들어옵니다... 감사요~~^^
헐.
어제 그렇잖아도 인터넷 예약을 하려보니 오늘 열두시 것이 있던데...
그러나 지금은 병원에 앉아 있습니다.
언니, 아프다고 전화왔길래 병원에 모셔오니 뼈가 부러졌네요. ㄴㅇ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