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달콤 씁쓸 원문보기 글쓴이: 신성녀가 되고파~
오늘은 문종의 딸에 대해 쓰고자 하는데... 재미있으려나 모르겠네요..
드라마 공주의 남자를 보지 않아 잘 모르겠는데 주인공이었던 세조의 딸 의숙공주의 사랑얘기보다, 문종의 딸 경혜공주의 사랑얘기에 달콤님들이 설레어했던 기억이 있네요..
문채원이랑 박시%$##놈의 해피엔딩이었겠져...? 근데 경혜공주 이야기는 어찌 결론이 났는지......?
아무튼 간에 경혜공주에 대해 써보려 합니다.
문종은 29세가 되던 해부터 세종을 대신해 섭정을 했는데,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어린시절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학자를 가까이 했으며 측우기 재작에 직접 참여했을 정도로 천문, 역산, 산술, 서예에 뛰어났고 거기다 성격마저 유순하고 자상하여 모든 사람들이 좋아했습니다.
게다 거동이 침착하고 판단이 신중하여 남에게 비난받는 일도 하지 않았는데 단 하나 단점이라면 너무 유순해서 연약했다...라는게 단점이라면 단점이었죠..
성장해서도 여자에 대해 관심을 별로 두지 않았는데 만약 요즘 태어났나면 전국 상위 1%에 들어가서 과학고-카이스트 행이 보장될만한 인재였을 듯~~
문종은 14세였던 동궁시절에 세자빈 김씨를 맞았는데 어리기도 했지만 여자에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학문에만 힘썼습니다.
그런 문종의 관심을 끌고자 세자빈 김씨는 남자의 사랑을 끌어낸다는 요상한 민간 술법을 쓰다가 시아버지인 세종에게 들켜 그만 쫒겨나고 말았습니다.
그후 16세에 다시 세자빈 봉씨를 맞았는데, 그 나이에는 이미 남녀간의 그렇고 그런 일을 알만한 나이임에도 여전히 문종은 여자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지요..
왕성한 정력을 자랑하는 세종은 이런 세자에게 아이가 생기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는데 '비록 부모일지라도 어찌 침실의 일까지 자식에게 가르칠수 있겠는가'하며 푸념을 자주 했다 합니다.
어쩔수 없이 세종은 명문가의 여식들 중에서 후궁을 고르기로 했는데, 이때 문종이 자신의 후궁을 고르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섭니다. 이 후궁간택에서 권씨, 정씨, 홍씨가 승휘의 작위를 받으며 후궁으로 간택되었는데, 문종은 그 중 권씨와 홍씨를 좋아했습니다.
문종이 열씨미~ 노력한 끝에 드디어 권 승휘가 딸을 낳았는데, 그때 문종나이 20세였고 권 승휘는 16세였습니다.
그 딸은 태어난지 얼마안가 죽고 말았지만 얼마안가 권 승휘는 다시 임신을 하게 되고 다시 둘째 딸을 낳게 되는데, 이 딸이 바로 경혜공주입니다.
공주를 낳자 권 승휘는 양원으로 승진을 했는데, 이것은 세자빈 봉씨에게는 커다란 좌절과 질투와 상실감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자신을 찾지 않는 문종에 대한 원망, 시아버지 세종에 대한 야속함 등이 드디어 표출되고 말았는데 그것은 바로 궁녀 소쌍과의 동성애를 통한 욕구해소였던 것입니다.
세자빈 봉씨의 동성애는 결국 1년 만에 세종에게 발각되는데(세종 탐정 돋네요;;;) 이 사실을 안 그날로 세자빈 봉씨는 바로 폐출되고 말았습니다.
세종은 봉씨를 폐출한 후 다음 세자빈에 대해 고민했는데, 세종은 내심 권 양원을 맘에 두고 있었습니다
권씨와 홍씨가 모두 문종에게 사랑을 받았지만 홍씨는 아이가 없는 반면, 권 양원은 이미 두번이나 딸을 낳았으므로 앞으로 아들을 낳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죠..
세종은 중국 역사에서 황제의 후궁을 황후로 삼은 예를 들어 자신의 뜻을 대신들에게 알리고 권 양원을 세자빈으로 앉혔습니다.
권 양원이 세자빈으로 될 때에는 경혜공주는 2살이었져.
원래 경혜공주는 아버지가 세자로 있던 시절의 후궁 소생이므로 현주여야 하지만, 생모가 세자빈이 되었으므로 군주가 되었습니다.
세자빈 권씨는 집안의 여종으로 있던 어리니라는 여성을 공주의 유모로 삼았는데, 어리니는 아주 총명하기로 소문이 자자했기 때문에 세자빈이 특별히 공주를 잘 키우고자 데려온 것이었죠.
공주는 무럭무럭 자라 7살이 되었는데, 생모 권씨가 동생인 단종을 낳은지 하루만에 그만 세상을 떠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공주는 이후 궁에서 나와 어리니와 함께 조유례라는 사람의 집에서 살았는데, 조유례의 부인은 공주를 딸처럼 대해줍니다.
보통 12살 무렵이면 혼인을 하는데, 세자빈을 떠나 보낸 후 재혼을 하지 않고 홀아비처럼 살고 있는 아버지을 떠나기 싫어 공주는 16세가 되도록 혼인을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공주는 평창군주라 불렸는데 세종의 건강이 나빠지면서 공주의 혼인을 서둘러 결정하게 됩니다.
세종과 문종 모두 왕비가 없던 상태였고 게다 동궁의 딸이었기 때문에 공식적인 간택절차는 없었지만 문종은 어미 없는 딱힌 공주
의 입장을 생각해 마침내 공주와 비슷한 나이의 정충경의 아들인 정종을 배우자로 결정되었습니다.
그러나 혼인이 결정된 직후 세종이 승하했으므로 혼인절차는 모두 중단되었고, 문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정종에게 영양위로 책봉하고 공주에게도 공주의 칭호가 주어집니다.
세종의 3년상이 끝난후 공주의 혼인이 다시 진행될 수 있었지만 문종의 건강이 좋지 않은 문제가 발생하게 되죠..
세종의 상 중 문종이 승하한다면 공주는 다시 3년을 더 기다려야 하고 그러면 22세를 넘어야 혼인할수 있다는 얘기가 되는데, 이것은 문종이나 공주 입장에서는 매우 심각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문종은 일단 세종의 1년상이 끝난 후 궐 밖에 공주의 살림집을 위한 집을 짓고 그후 1년 즈음 지나, 우선 공주는 출합을 시키는데, 공주가 출합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문종이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공주나이 18세, 단종 12세에 할아버지의 3년상에 이어 아버지의 3년상을 치뤄야 했는데 그때까지 공주는 아직 영양위와 초야도 치르지 못한 상태였죠.
문종이 승하한 후 단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지만 주위에는 유능하고 야심많은 삼촌들이 너무 많았고, 특히 수양대군은 조카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툭하면 단종을 위협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단종은 이런 무서운 궁을 떠나 경혜공주의 집을 자주 찾았는데, 수양대군이 김종서 및 살생부의 명단으로 격살하던 이른바 계유정난도 경혜공주의 집을 무대로 펼쳐졌었지요.
단종은 왕위에 오른지 3년만에 자신은 상왕으로 물러나고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주었지만, 수양대군은 친형제였던 금성대군은 물론 단종에겐 어머니와 다름없었던 혜빈 양씨(세종의 후궁), 의빈 권씨(태종의 후궁), 영풍군 등의 숙청을 단종에게 요구했습니다.
금성대군과 어울려 지냈던 자들 중 공주의 남편인 영양위도 있었는데, 금성대군과 혜빈 양씨가 숙청되던 날 영양위는 영월로 귀양을 가게 됩니다. 단종 나이 15세 경혜공주 21세때의 일이었져...
영양위가 귀양을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공주는 그만 자리에 눕고 말았는데, 그 소식을 들은 세조는 놀라서 약과 어의를 보내주고 영양위의 유배지를 한양과 가까운 경기도 양근으로 옮겨주도록 했지만, 단종의 요청으로 한양으로 오게 해줍니다.
세조 입장에선 어찌되었던 간에 형의 딸이요 자신의 조카였고, 만약 공주가 자결하거나 죽기라도 한다면 사람들의 비난을 받을수도 있었기 때문에 부담이 컸던 것입니다.
영양위가 한양으로 오자 공주는 곧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공주의 병이 완쾌되었으니 다시 유배지로 보내지게 되었져.
세조는 영양위를 김포로 보냈는데 이때 경혜공주는 그곳까지 남편을 따라 가 남편과 함께 지냅니다..
세조 즉위 1년 후 사육신 사건이 터지게 되는데 이 사건은 단종과 공주 모두에게는 아주 불리하게 작용되었습니다.
성삼문이 고문을 받는 과정에서 '이 거사는 단종도 알고 있다'고 말했는데,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등되었던 단종은 영월로 귀양간 후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영양위는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는 한편 전라도 광주로 다시 유배되어 가게 된것이었습니다.
세조는 공주가 원한다면 남편을 따라 가도 좋다고 허락을 했기 때문에 공주는 영양위를 따라 전라도 광주까지 같이 가게 됩니다.
영양위에 대한 감시는 더욱더 심해졌고 이러한 답답한 현실을 벗어나고자 영양위는 불교에 심취했고 성격도 광적으로 변해 세조에 대한 비난도 서슴없이 하게 되는데, 이러한 행동으로 인해 영양위는 세조 7년 대역죄인으로 간주되어 능지처참을 당하게 됩니다..
당시 공주는 3살난 아들과 뱃속 아기를 가진 상태였는데, 아들 이름은 정미수였고 광주 유배중 태어났습니다.
영양위가 죄인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공주도 그리고 그의 아들도 모두 관비의 신분이었지만, 공주는 '나는 왕의 딸이다'라며 자신에게 일을 시키려는 관리들에게 대항했다 합니다.
아무튼 공주는 영양위가 능지처참을 당한지 3일 후에 한양으로 가게 되는데, 이는 공주의 유모였던 어리니의 노력 덕분이었습니다.
어리니는 공주가 자란 후 세조의 손자인 자산군(훗날 성종)의 유모로 있었는데, 수빈 한씨(훗날 인수대비)에게 경혜공주의 딱한 처지를 고하고 사정했으며 이에 수빈 한씨가 정희왕후에게 고하였고, 정희왕후는 다시 세조에게 이를 알렸던 것이죠..
공주에서 노비의 신분으로, 그것도 남편이 죽어 없는 어린 아들이 있고 게다 임신중이었던 공주의 몰골은 세조의 죄책감을 건드렸습니다.
세조는 공주에 대한 미안한 마음에 집과 노비, 토지, 봉급을 내려주고 노비에서 면천시켜 공주의 신분을 회복시켜주었습는데, 이러한 과정의 뒷면에는 유모 어리니의 지극한 노력이 있었습니다.
공주는 한양으로 돌아온 직후 딸을 출산했는데, 그 딸은 대략 12~3세 정도에 혼인을 하지 않은 상태로 죽었습니다.
공주는 세조와 마주하고 싶지 않아 단종의 비 정순왕후 송씨가 있는 정업원으로 출가하기로 하고, 아들 정미수와 딸을 정희왕후에게 맡기기로 합니다.
자신은 면천되었지만 여전히 자신의 아들과 딸은 노비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궁에서 살게되면 언젠가는 면천될 것이라 생각을 한 것이죠.
공주는 정업원에서 정순왕후와 함께 부처심의 자비심에 의지하며 단종와 영양위를 명복을 빌며 살았는데, 세월이 지나자 공주의 증오심도 많이 수그러들었는데, 어리니는 공주에게 아들과 딸의 문제로 세조를 만나볼것을 설득하게 됩니다.
어리니는 경혜공주에게 세조에 대한 증오심을 줄일것을 설득했고, 한편으로 수빈한씨와 정희왕후에게는 경혜공주의 불쌍한 처지에 대해 얘기해주는 등 중간에서 여러모로 많은 노력을 해왔지요..
공주는 노비에서 면천되었지만 아들 정미수는 엄밀히 말하면 도망 노비였습니다.
정미수는 여전히 노비신분이었고, 궁중법상 10살이 되면 궐에서 살수 없기 때문에 궐 밖으로 나가는 순간 노비안에 이름이 올라 일생을 노비로 살아야 했기 때문에 어리니는 공주에게 세조를 직접 만나길 권했던거죠..
공주는 자식을 위해 원수였던 세조를 만납니다.
예종실록에 의하면 '영양위의 아들과 경혜공주가 입궐하여 세조를 만나니, 세조께서 보시고 불쌍히 여기며 눈물을 뿌리고 나서 전지를 쓰게 하시니 연좌시키지 말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불쌍한 공주의 모습을 보고 세조는 연좌하지 말라 명령을 했고 이로써 공주의 아들과 딸은 비로소 노비의 신분에서 벗어날수 있었습니다.
이후 공주는 세조가 내려준 집에서 자고, 세조가 내려준 노비를 부리며 세조가 준 토지의 곡식을 먹으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궁에 들어가는 일도 잦아졌는데, 이는 아들 정미수를 만나기 위한 것이었죠..
아들 미수는 당시 자산군의 시종을 들고 있었는데 둘다 비슷한 나이로 서로 가까운 사이였는데 이들에게도 역시 유머 어리니가 있었습니다.
그러다 공주 나이 35세에 자산군이 1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고, 자산군의 유모였던 어리니는 봉보부인이 되었는데, 봉보부인은 인수대비의 최측근으로 궁중 실세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게다 정희왕후는 어린 성종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하였는데, 이는 경혜공주와 가까운 사람들이 갑자기 권력의 핵심으로 떠오르게 된 것이죠..
성종 4년에 정희왕후는 경혜공주를 위로하고자 15세였던 정미수에게 돈녕부 직장이라는 종7품의 벼슬을 내립니다.
이는 정희왕후가 정미수를 명실상부한 양반으로 만들고, 자신들이 지은 업보를 씻고자 하는 것이었지요..
정미수가 돈녕부 직장에 임명된지 7개월즈음 후에 경혜공주는 39세의 나이로 기구한 인생을 마칩니다....
- 끄~읏-
저희아들이 11살때 '어린 임금의 눈물'이란 책을 읽은 후 소파에 얼굴을 묻고 펑펑 운적이 있었다는 썰..
이 책은 단종이 '나'시점으로 쓴 역사소설인데, 어린이용으로 나온 책이에요.
초등 자녀가 있다면 한번쯤 읽혀보시는것도 좋을 듯~~
첫댓글 경혜공주는 실제로 관비가 된 적이 없습니다. 직첩을회수당해서 정종의처라고 불린적은 있지만 실제로 귀양지에서도 편하게 살았다죠. 실록이든 어디든 경혜공주가 관비가 된 기록은 없어요. 관비가 되었다는건 어떤 민담에서 나온건데 당시 순천부사라고 기록된 이는 경혜공주가 죽은뒤에나 부사가 된 이라서 실제로는 불가한 일이라죠. 물론 남편과 동생을 잃은건 안타깝고 슬프지만 관비는 된적이 없고 직첩이 회수되고 정종이 죽은지 얼마되지 않아 다시 공주직첩을 받았어요
왕자는 그런 일에 엮이면 아무리 어려도 목숨조차 부지하기 힘들지만, 공주는 웬만하면 죽이지는 않는다는 것을 잘 보여준 사례지요. 특히 아들을 위해 남동생의 원수에게 조아려야 했던 심정은 과연 어땠을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아요.
경혜공주가 관비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무고한 희생자의 고난을 강조하다 보니 과장되었거나, '관비와 다름없는 생활을 했다'는 것이 와전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공주 신분은 그대로였다 한들, 그런 상황에서 대체 무슨 의미가 있었겠느냐고 생각하는 입장이지만요.
정말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갔네요... 생각해보니 조선왕조 공주 중에서 혜로 끝나는 공주들은 다 왠지 불행한듯.. 경혜, 효혜, 덕혜... 그나마 경혜공주는 아들이 양반이 된 것을 보고 난 후 죽었으니 다행인걸까요...
너무 슬프네요. 동생도 남편도 딸도 잃고 일찍...
공주의남자를 언뜻언뜻 처음에만 보고 그 후로 보지 않았는데 이런결말이었다니 너무 슬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