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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렇게 비아냥거렸다. “세밀한 조사와 물샐 틈 없는 고증은 조정래 소설가에게는 시간낭비일 뿐이다. 어디 조정래 소설가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 있겠는가. 한국의 역사학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한 자락의 바람에 불과하거늘.” 과연 이러한 오만함이 용인될 정도로 식민지근대화론의 실증은 완벽한가? 『아리랑』을 비난한 근거는 과연 세밀한 조사와 물샐 틈 없는 고증으로 이루어진 역사적 사실인가?
허수열의 『일제초기 조선의 농업』은 이에 대한 통렬한 실증적 반박이다. 부제도 “식민지근대화론의 농업개발론을 비판한다”로 달았다. 식민지근대화론에 대한 비판은 역사학계에서도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지만, 저자와 같은 경제사 전공자가 철저한 고증과 분석을 통해 식민지근대화론을 비판한 경우는 극히 드물다. 저자는 6년 전에도 『개발 없는 개발』이란 저술을 통해 식민지근대화론의 허구성을 실증적으로 비판했으며, 그 학술적 공로를 인정받아 ‘임종국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 책은 『개발 없는 개발』의 연속선상에서 일제 초기 농업부분에서의 식민지근대화론을 비판하고 있으며, 특히 이영훈의 『아리랑』비판에 대한 실증적 반박이 핵심을 이루고 있다.
제1장은 농업부문의 식민지근대화론 내용에 대한 비판이다. 농업부문에서 식민지근대화론의 핵심적인 주장은 1911~18년의 농업생산이 1918~29년에 비해 빠르게 증가했다는 것이다. 그 주요 근거는 『한국의 경제성장 1910~1945』(김낙년 엮음)이 정리한 조선의 국내총생산(GDP) 추계다. 이 통계자료에 나타난 식민지시기 농업생산의 성장에 따른 국내총생산의 비약적 증가 추세는 실상 식민지근대화론의 기초적 근거였다. 1910년대 농업생산이 크게 증가했다는 것은 이 통계 중에서 1911~18년의 증가 추세를 근거로 한 것이다.
그런데 1910년대의 통계는 어떻게 파악하느냐에 따라 식민지시기 전체의 경제 평가가 크게 달라질 수도 있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공업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1932년 이후로서 1920년대 말까지는 농업생산액이 전체 산업생산액에서 차지하는 매우 비중이 높았고, 따라서 1910년대의 농업생산의 통계는 식민지시기 경제성장률 산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만약 1910년대의 통계가 잘못되었다면 그동안 식민지시기 경제성장률이 높았다는 식민지근대화론의 핵심적인 주장도 설 자리가 잃게 된다. 식민지근대화론의 주장은 이 통계에 따른 것이다. 그리고 1910년대에 농업생산이 크게 증가한 원인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호경기에 따른 생산의 급증, 러일전쟁 이후 일본인의 진출에 따른 개간과 각종 수리시설의 발달, 활발한 지목 변환, 우량품종의 보급 등을 들었다.
이에 대해 저자는 이들의 1911~18년 통계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반박한다. 1917년까지는 통계가 체계화 되지 않았기 때문에 1910년대 농업통계는 부정확하고 불충분하다는 이유였다. 1910년대 통계가 정확하지 않은 것은 경지나 인구 통계만으로도 쉽게 확인된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1911~18년의 농업의 변화 양상은 1918~29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경지면적이나 재배면적은 산미증식계획 기간인 1920년대에 더 빨리 증가했다는 것이다. 또한 1910년대 농산물 가격이나 개량농법의 보급 등 농업생산이 증가할만한 요인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결국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통계 분석은 그 근본인 1910년대부터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토대로 저자는 2~7장에 걸쳐 실증적이고 구체적으로 식민지근대화론의 허구를 파헤쳤다. 핵심은 2장 ‘1910년대 김제·만경평야의 수리시설’과 3장 ‘벽골제’로서, 이영훈이 『아리랑』을 가장 집중적으로 비판한 부분이다. 『아리랑』에서는 일본인들이 진출하기 이전의 김제,만경평야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 끝이 하늘과 맞닿아 있는 넓디나 넓은 들녘은 어느 누구나 기를 쓰고 걸어도 언제나 제자리에서 헛걸음질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 벌판은 ‘징게 맹갱 외에밋들’이라고 불리는 김제 만경평야로 곧 호남평야의 일부였다. … 그 초록색 들판은 누구에게나 한없이 넉넉하고 푸짐하면서도 경건하고 겸손한 마음까지 품게 했다.”
이영훈은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며, 형편없던 한국의 농업생산력이 일제의 개발로 크게 향상되었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조정래는 징게 맹갱 외에밋들의 광활함과 풍요로움을 그토록 구성지게 노래하였다.” 그는 일제 초기까지만 해도 이곳은 풍요로운 평야지대가 아니라 광활한 갯벌과 소금기로 풀이 죽어 있는 갯논으로 가득 차 있었다며, 그 실증적 근거로 지도까지 작성했다. 여기에 벽골제 방조제설까지 덧붙여 자신을 주장을 더욱 강화했다. 벽골제가 방조제였다면 둑 아래 김제,만경평야는 갯벌이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결국 이 지역이 비옥한 평야지대로 바뀌게 된 것은 일본인들의 진출과 개발, 즉 수리조합사업 때문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영훈의 주장이 대부분 부정확한 사실인식에 입각해 있거나 혹은 자의적인 해석으로 가득 차 있는 허구라고 비판했다. 방조제설에 대해서 『삼국사기』,『삼국유사』,『조선왕조실록』,『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옛 문헌의 철저한 고증을 통해 벽골제가 방조제가 아닌 엄청난 규모의 저수지였다고 반박했다. 다만 벽골제는 오랜 기간 제방의 일부가 파괴된 상태로 존재했다고 본다. 또한 1910년 무렵 벽골제 아래에는 제언과 보, 수로, 하천의 둑, 해안 방조제 등 재래의 수리시설이 곳곳에 축조되어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곳에는 수많은 촌락이 곳곳에 산재해 있었고, 충분한 농업용수를 공급 받을 수 없어 다소 생산성이 떨어지거나 자주 한발을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다른 지역에 비해 특별히 생산성이 떨어지는 지역은 아니었다는 사실도 입증했다. 즉 일본인이 개발하기 전부터 이 지역은 평야지대였고 수많은 재래의 수리시설이 새로이 수축 또는 보수되면서 활발한 생산 활동이 전개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재래의 농업발전을 과소평가 내지는 무시하고 일본인의 농업개발을 과대평가한 이영훈의 주장, 식민지개발론에 대한 실증적 비판이다.
이어 4~6장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의 호경기, 일본인 주도의 농업개발, 우량품종의 보급 등으로 1910년대 농업생산성이 크게 향상되었다는 식민지근대화론의 주장을 통계자료를 통해 조목조목 반박했다. 이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1910년대 급속한 농업생산의 증가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농업개발도 허구라는 것이다. 농업개발이 본격화 되는 것은 1920년대였다. 7장에서는 조선 후기부터 일제 초기까지의 농업생산의 변화를 고찰해, 식민지근대화론이 조선 말기의 경제적 혼란과 침체를 과장하고 일제시대의 농업개발은 지나치게 확대해석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식민시관의 정체성론과 사실상 다를 바 없다고 주장했다. 8장 맺음말은 식민지근대화론에 대한 총체적인 비판으로서, 이들의 강력한 무기인 통계분석과 실증이란 것이 실상은 오류투성이며 그 원인을 잘못된 통계분석과 자료 해석, 나아가 역사 해석의 문제로 파악했다.
식민지근대화론의 존재 이유는 통계자료 분석과 고증, 즉 실증이다. 이들은 방대한 통계자료를 체계적으로 분석한 결과와 고증을 통해 역사를 재구성했다. 『일제초기 조선의 농업』은 이러한 식민지근대화론의 실증에 대한 문제점과 오류를 구체적으로 지적한 책이다. 저자는 수탈론의 입장에서 식민지근대화론을 비판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식민지근대화론이 가장 강력한 무기로 삼고 있는 철저한 통계분석과 고증을 통해 그 허구성과 문제점을 입증한 것이다. 특히 이 책은 식민지근대화론의 통계 오류에 대한 분석에 중점을 두고 있는데 이는 저자가 한때 식민지근대화론자들과 함께 연구한 경제학자로서 그들의 연구방법론의 특징과 한계를 잘 알고 있는 데서 기인한다. 여기에 수리조합 자료를 비롯해 많은 자료를 수집, 정리, 보강해 『개발 없는 개발』보다 더욱 철저한 실증적 분석을 가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은 식민지근대화론 비판에 관한 한 가장 체계적이고 실증적이다. 또한 저자는 실증적 오류에 대한 지적과 함께 역사 해석의 차이를 강조했다.
▲2005년 찍은 해창갑문 모습. 이영훈 교수는 일제가 이 갑문을 설치하면서 김제만경평야 유역이 쓸 만한 경작지로 바뀌었다고 주장한다. 허수열 교수는 해창갑문이 1942년 준공됐다는 사실을 밝히며 그렇다면 일제시기 내내 이곳은 버려진 땅이었을 것이라고 반박한다. 한길사 제공
하지만 이 책에 대한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의 반응은 불 보듯 뻔하다. 지금까지 식민지근대화론에 대한 수많은 비판이 있었지만, 이들의 주장은 독선적인 경향을 버리지 않고 오히려 더 강경해지는 면모를 보이고 있다. 이 책에서 주장한 내용은 이미 6년 전 『개발 없는 개발』에서도 강조된바 있지만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이영훈은 『일제초기 조선의 농업』이 출간된 직후 한 언론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읽어보지는 않았어도 "논쟁할 필요가 없는 사안"이라고 일축했다. 일부 언론에서는 다시 식민지근대화론 논쟁이 불붙는다고 했다. 논쟁이 되겠는가? 이들에게서 초기 잠시 보여주었던 일말의 참신한 문제의식이나 학문적 진지함은 사라진지 오래다.
더욱이 보수 기득권층과 한 배를 타고 뉴라이트의 기치를 높이 쳐들면서 이들의 오만함은 극에 달하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연구를 만능으로 믿고 있다. 식민지근대화론은 철저한 분석으로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완벽함으로 역사를 재단할 수 있는 ‘도깨비 방망이’인 셈이다. 심지어 역사 해석의 차이조차 인정하지 않고 있다. “역사에 고정불변한 진리는 없다”는 명제조차 이들에게는 공허한 외침에 불과하다. 식민지근대화론은 모든 역사상을 만들 수도 있고 어떠한 역사 해석도 가능하다. 식민지근대화론과 배치되면 연구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이고 역사를 모르는 것이다. 이들의 눈에는 한국의 역사학자들이 너무 공부를 하지 않는다. 역사소설가 수준 또한 일본에 비해 너무 떨어진다. 오죽하겠는가. 그러나 그들이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교훈이 있다. 역사는 결코 오만함을 용서하지 않는다는 준엄한 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