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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영 가족사
본관은 창원(昌原)이며, 아버지는 한림학사 석범(錫範)이며 어머니는 이윤혜이다. 아버지 정5품인 한림학사를 지낸 황석범으로 창원황씨의 명문가 출신 (주. 한림학사[翰林學士] 고려 시대, 한림원, 학사원에 속한. 정사품 벼슬>황사영 태어나기 직전에 병사함.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과거시험 사마시나 문과에 급제한 것으로 사료됨. 어머니 이윤혜는 이승훈의 친척인 이동훈(진사)의 딸...기록이 거의 없다. 신유박해 때 거제도 관노로 왔으나 그 뒤의 기록이 없다. 제주도로 귀양간 정난주와 손자 황경한과 연락이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대체적으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아버님은 황사영이 태어나기 직전에 병사하여 유복자로 태어나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황사영이 천주교에 가입되어 활동하는 바람에 가족은 풍지박산이 되었다.
본인 : 황사영 ( 천주교 선교활동하다 1801년 신유박해 시 순교함) 부 : 황석범 (아버지 정5품인 한림학사를 지낸 황석범으로 창원황씨의 명문가 출신 (주. 한림학사[翰林學士] 고려 시대, 한림원, 학사원에 속한. 정사품 벼슬>황사영 태어나기 직전에 병사함.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과거시헌 사마시나 문과에 급제한 것으로 사료됨) 모 : 이윤혜 (이승훈의 친척인 이동훈(진사)의 딸...기록이 거의 없다. 신유박해 때 거제도 관노로( 1801.11.21.) 왔으나 그 뒤의 기록이 없 다. 제주도로 귀양간 정난주와 손자 황경한과 연락이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부인: 정난주 ( 순교자 정약정 형인 정약현의 딸, 제주도로 귀양감, 제주도 대정형 김석구집에서 삶. 제주도에 순교자 묘역이 있다.) 아들: 황경한 ( 2살 때 추자도로 귀양 감, 평생 어부로 살다가 돌아감, 추자도에 순교자 묘역이 있다.)-
황사영 부인 정난주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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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영 일생~~
황사영: 1775(영조 51) 경기 강화~ 1801(순조 1). 무남독자, 조선 후기의 천주교 순교자. 유복자
본관은 창원(昌原). 세례명은 알렉산드르. 아버지는 한림학사 석범(錫範)이다. 정약종(丁若鍾)에게 사사했다. 1790년(정조 14)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정약종의 형인 약현(若鉉)의 딸 명련(命連)과 혼인하고 정약종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1791년 진산사건(珍山事件)을 계기로 일어난 신해박해의 와중에서도 신앙을 지켰으며 관직 진출을 단념했다. 1795년 숨어서 전도하던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를 만나 그의 측근으로 활동했으며, 명도회(明道會)를 조직하여 교리를 연구하고 전교활동을 벌였다. 1796년에는 이승훈(李承薰)·홍낙민(洪樂敏)·최창현(崔昌顯)·주문모와 협의하여 베이징[北京]에 서양 선교사 파견을 요청하기도 했다. 1801년(순조 1)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충청도 제천의 배론[舟論]으로 피신하여 은거했다. 그곳으로 베이징 주교에게 박해의 전말을 알리고 조선교회 재건책을 제시하는 백서(帛書)를 작성하여 옥천희(玉千禧)를 통해 중국으로 보내려고 했으나 발각되어 같은 해 9월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된 뒤 11월 서소문 밖에서 처형당했다. 1984년 한국순교자 103위 시성식 때 교황 요한네스 파울루스 2세로부터 성인 서품을 받았다.
<<< 황사영 성장 과정 >>>
1775년 경기도 장흥에서 남인의 명문 창원 황씨집안에서강화에서 출생/ 1774년 부친 사망으로 유복자로 태어남. - 경기도 고양군 –서울 아현동으로 이사 ( 훈장과 성경필사와 선교활동) - 정약종에게 입교, 주문모에게 세례 1781년 황사영 7세. 노비와 팽이 사건 ( 공부는 하지 않고 장시간 팽이 놀이 한다고 어머님이 횟초리 가함. 1789년 15세. 숙부 황세필의 권유로 선비들의 모임에 참가하여 쓴소리 함. 1790년 16세. 사마시 시험에 응시하여 소과에 급제함. 부상으로 종이2권, 붓3자루, 먹2장 받음. 정조 임금은 황사영 손을 잡고 “ 네가 20이 되거든 찾아오너라. 네가 너를 꼭 일을 시키고 싶다.”그래서 황사영은 언제나 손목에 노란 명주를 감고 다녔으며, 묘지에서도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후 전시(殿試)에 4번이나 응시했으나 모두 백지를 제출하였다. 정조는 천주교에 입고하였다는 소식을 접하고 슬퍼했다고 한다. 1791년 17살. 어머님과 갈등 어머님이 “ 천주학을 버려라, 그렇지 않으면 감누이 망한다.” 황사영 “ 어머니, 못버립니다.” 어머니 : 횟초리 부려지도록 때린다. 황사영 : “ 이 불효자를 용사하소서” 결혼: 정약용의 큰형인 정약현의 딸 정마리아와 결혼. 이 결혼의 성사는 숙부 황세필이 마련한 시인들과의 자리에서 똑 뿌려지게 답한 것이 인상적이 어서 정약용이 중매를 썼음. 세례 : 이승훈에게 세례 받음( 알렉시오 ) - 1791년 ~1799 왕성한 천주교 포교 활동을 함. ( 정약종 입교 주문모에게 세례),천주교 최초모임인 명도회 간부로 활동 (회장 정약종) 1799년 주문모 신부 자기 집에 모시다. 1801년 2. 신유박해로 천주교 소탕작전이 벌어지자 상복을 입고 제천 베른 김귀동 집으로 피신함. 2.26 조정에서 체포령 발효 - 1801년 3 이승훈 정약종 순교하였다는 소식 접함. - 1801년 중국인 신부 주문모 순교 - 1801년 5월20일 대왕대비(정순왕후) 황사영 잡아들이라는 특명이 내려짐. 1801년 8월26일 백서 최종정리 1801년 9월15일 최측근자 황심체포 1801년 9월20일 백서 전달 예정자인 옥천희와 같이 황사영 체포 1801년 10월3일 의금부 압송 6차에 걸쳐 심문 1801년 11월5일 입을 열지 않자 능지처참(陵遲處斬)당함. 황사영 사형시키고 가산은 몰수하고 노비(5명)는 관노비로 바꾸고 처는 제주도 대정군으로, 아들은 추자도로 어머니는 거제도로 숙부 황석필은 철원으로 황사영을 숨겨준 김귀동은 모진 고문 끝에 1810년 12월30일 참수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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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영/ 정난주 일생
황사영 성장과정 | 사건1. 황사영 15세. 문인과의 만남. 1782년 황사영이 7세 때...팽이치기 사건 황사영은 종들이 만들어진 팽이를 돌리느라 하루 종일 시간을 보냈다. 어머니는 황사영에게 매질을 하고 문밖으로 쫓아버렸다.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앉자 종들과 함께 찾아나셨다. 우물가에서 발견했다.
“아, 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아 한마디에 어머니 이휸혜는 가슴이 아파왔다.
황사영의 아버지 황석범이 결혼한 지 얼마 안되어, 황사영이 아직 뱃 속에 있었을 때 갑자기 병이 들어 죽은 것은, 문중 사람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까닭에 시집온 이윤혜에게 그 요절의 책임이 돌려졌다. 이윤혜를 잡아가야 할 역신이 그 지아비를 먼저 잡아 갔다고, 문중 안이든 밖이든 쑤군대는 소리가 가득했다. 그녀는 외로움 속에서 아들을 낳았다. 아들은 준수하고 총명했다. 그녀는 최선을 다해 아들을 키워냈다. 그러나 그 아들이 조금이라도 어긋난 모습을 보일 때에, 그녀는 자신이 애써 유지했던 균형에서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그녀는 성난 사자처럼 광포해졌다. 그것은 그녀 스스로 짊어지고 있는 불행을 감당하기 위한 최소한의 몸부림이었다. 견했다.
사건2. 숙부 황석필의 주선으로 문인들과 만남이 있었다. 자네도 오늘 참석했으니 시나 한 수 지어보게...머뭇거리다가
“시는 이렇게, 날씨 좋은 곳에 모여서 시간을 보내며 한 수씩 읖조리는 것이 아닙니다. 시는 바로 제가 보고 온 그들의 삶이었습니다. 하루하루, 삶과 싸워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시입니다. 그들의 삶 속으로 걸어갈 수 없다면, 제가 짓는 시도 쓰레기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그런 것을 느꼈습니다.”황석필은 멋쩍은 듯이 헛기침하며 조카 황사영을 다리고 자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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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0년 과거시험 |
과거시험 사마시 합격(장원) 선조: “고개를 들고 이리 가까이 오너라.” 임금이 손을 뻗어 황사영의 손을 잡으며,“장하구나. 올해 열여섯이라고.” “ 네 글이 짐의 마음을 끌었나 보구나.” “나이 스물이 되면, 내게로 오겠느냐.” 그리고 노란 천을 손에 감아주었다. 이 노란 천은 황사영의 묘소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 후 과거에 시험을 쳤으나 황사영은 백지를 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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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
~~~ 정약종 딸과의 혼담~~~
“ 성균관에서 수학 중인 정약종의 동생 정약용 따님과 혼담이 들어왔다. 황사영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황석필을 보았다. 황석필이 허허, 웃었다. “네가 그 자리에서 거침없이 한 말이 마음에 들었단다. 정약종에게 조카가 하나 있는데, 똑똑하고 다부진 규수라고 한다. 네 얘길 집안에 했더니 모두 좋아하더란다.”
“쑥스러워 하지 말거라. 이것이 다 하늘의 일 아니겠느냐. 너는 그냥 알고만 있거라. 그 댁에 들어가면 너도 여러 가지로 좋을 것이다. 학문적으로도, 또 출세하는 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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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0년 과거급제 |
~~황사영 결혼~~
신부는 정약종의 조카였다. 1년 전의 혼약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오늘의 혼례까지 이어진 것이었다. 방이 단둘이 있는 것이 어색하여 군불을 때어 딱근 딱근 한데도
“춥지, 않소?”
정난주는 대답하려다가 입술을 물었다. 혼례 전에 단단히 주의를 들었던 것이었다. 신랑이 이야기해도 함부로 대답해서는 안되고, 함부로 먼저 나서서도 안되고, 그저 신랑이 하는 대로 조용히 따라야 한다고.
정난주가 아무 대답이 없자, 황사영은 나직하게 읖조리며 방바닥에 손바닥을 대었다. 어쩐지 허술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정난주는 자기도 모르게 쿡, 하고 웃어버리고 말았다. 무섭기만 했던 남편이 그 순간 의외로 순진해 보이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소, 송구합니다.”
정난주는 웃음을 그치고 정색을 하며 말했다. 그리고 살짝 눈을 들어 남편의 얼굴을 살폈다. 황사영은 별로 노한 표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정난주가 웃은 이후로 황사영의 표정도 온화하게 바뀐 듯했다.
“아니, 아니오. 웃어도 괜찮소.” “저어, 실은 지금 좀 많이 덥습니다.” 정난주가 족두리에 손을 얹었다. 황사영이 몸을 일으켜 그녀의 족두리를 잡았다.
“미안하오. 내가 벗겨 주어야…….” “아닙니다. 함께…….”
두 사람의 손이 아슬아슬하게 닿았다. 황사영은 자신의 심장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서 당황했다. 정난주의 눈이 남편에게로 향했다. 작은 방에서, 젊은 남녀의 눈이 서로를 바라 보았다. 터질 듯한 긴장과 설렘이, 따스함과 호기심이 그 눈 안에 녹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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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1 |
황사영17세, 정약종과의 만남
명절이라 황사영은 처가 식구들과 함께 앉아 있었다. 정약전과 정약종, 정약용 형제는 황사영의 아내인 정난주의 숙부들이었고, 모두 천주교인이었다.
장인 정약용은 무거운 말투로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조상께 제사를 지내지 말라니요. 그것은 우리의 뿌리까지 앗아가려는 것 아닙니까. 조상을 섬기는 것을 우상 숭배로 본 것도 문제이구요. 그들은 조선이 천주교 국가가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겁니다.”
정약종이 정약용을 노려보다가 입술을 떼었다.
“그렇게 속단하기엔 일러. 분명 천주교에서는 천주님 외의 우상 숭배를 금하고 있어.” “제사가 어떻게 우상 숭배가 될 수 있습니까? 제사는 조상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제사를 지내지 못하면 조선 땅에서 어찌 사람 구실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천주교 선교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곧, 조선에서 천주교는 망하고 말 겁니다.” 정약용이 단정적으로 말했고,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정약종이 소리쳤다.
“그렇게 함부로 말하지 말아, 어찌……. 천주님이 살아 계시는데!” 정약종은 멀지 않은 곳에 홀로 서 있었다. 황사영은 조심스럽게 정약종에게로 다가갔다. “자네도 내가, 고지식하게 보이나?”“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그렇지만 유교를 믿지도 않습니다.”
정약종의 얼굴이 조금씩 밝아지기 시작했다. “유교를 안 믿는다고? 작년에 급제하지 않았나? 아니, 이런 발칙한 사람을 보게. 믿지도 않는 유교 경전을 읽고 급제까지 한 건가?” “과거를 본 것은 어머니의 바람이었지 제 바람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아까도 실은, 조금 우스웠습니다. 왜, 제사를 그렇게 절대시해야 하는 건지…….” “이참에 천주교가 뭔지 좀 알아보지 않겠나. 내 집에 책이 여러권 있네. 읽어보면 놀랄 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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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3년 |
황사영, 정나주, 이윤혜 ...고부갈등
정난주는 수를 놓다가 침침해진 눈으로 옆을 보니 황사영은 소리도 없이 책에 집중하고 있었다.
“ 무슨 책을 그리 열심히 보시는지.” “이 책 말이오? 성인전이오. 부인의 숙부에게서 빌려 왔소.” “살아 있을 때, 꼭 한 번은 가보고 싶소. 천주당이 있는 곳 말이오. 성인들이 살았던 그 나라도. 그 곳은 모두를 형제와 자매로 부른다지.”
정난주는 미소하며 황사영에게 다가와 남편의 손을 쥐었다. “천주님께서, 이 조선 땅에도 그런 나라가 오게 하실 것입니다.” “그렇소? 그러면 얼마나 좋겠소.”
정난주는 얼굴을 붉히며 가만히 있었다. 문이 열린 것은 그 때였다. 정난주가 채 일어서기도 전에,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녀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각자의 처소가 있는데 낮부터 예서 뭐하는 짓이냐!” 어머니 이윤혜였다. 황사영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서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같이 있자고.” “어미의 처소에는 고개 한 번 기웃하고 내내 체통 없이 아내의 치마폭에서 놀고 있느냐. 네가 무슨 일곱 살 어린 아이인 줄 아느냐?” 무서운 호통 소리가 방 안을 메웠다. 정난주는 무릎을 꿇고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떨고 있었다. 그런 정난주를 황사영이 안쓰러운 눈으로 훑고는 다시 고개를 앞으로 했다.
“잘못했습니다, 어머니. 제가 나가겠습니다.”
황사영은 이윤혜 앞에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잘못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나, 어머니의 심기가 건드려진 데에 견딜 수 없는 자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만 노여움을 푸시지요.” “돌아가라. 왜 여기까지 와서 이러느냐?” “어머니가 이러시면 제 마음도 불편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너는.” 황사영은 고개를 들었다. 이윤혜의 입술이 바르르 떨고 있었다. “내가 한 마디를 해야 이렇게 방에 들어오는 구나. 그러지 않으면 안채에 콕 박혀서 나오지를 않고.”
황사영은 이윤혜의 눈에서 깊은 어둠을 감지했다. 그는 깊이 심호흡하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제가 어떻게 해야 어머니 마음이 풀어지실지 모르겠습니다. 앞으로는 매일 문안 드리는 것 외에도 이 곳에 자주 들르겠습니다. 하지만 아내와의 관계 또한 제가 신경써야 하는 부분입니다. 제가 어머니께 소홀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아내에게 소홀하는 것 또한 잘못입니다. 저는 어떤 잘못도 저지르고 싶지 않습니다.”
이윤혜는 미간을 좁히며 또박 또박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아들을 노려보았다. 이미 너무 많이 커버린 아들이었다.
“누가, 질투라도 난다더냐? 이 어미가 잘못했구나. 앞으로는 네 마음대로 하려무나. 어서 나가라. 네 아내가 기다리고 있지 않으냐?”
황사영은 별채에서 나와서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누구에겐가 기대어 실컷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내와 함께 있을 때에는 기뻐서 둥둥 떠올랐던 마음이, 어머니와 함께 있을 때에는 한없이 추락하는 것 같았다. 그는 비틀거리며 사랑채로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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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5 (21세) | 1795년. 황사영 21세...중국인 신부 주문모와의 만남
밤은 아무 기척도 내지 않았다. 황사영은 소리 없는 밤이 깨어질까 조심하면서 역관 최인길의 집에 들어섰다. 문은 열려 있었고, 그가 들어서자 미리 약속된 듯이 계집종이 그를 안채로 인도했다. 여인들의 처소라 외간 남자는 들이지 않는 곳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황사영은 금단의 곳에 들어섰다. 방 안에는 집 주인인 최인길과, 다른 남자 한 명이 앉아 있었고, 그들의 앞에는 작은 서안과 지필묵이 준비되어 있었다.
“가까이 오라시네.”
남자 옆에 앉은 최인길이 말했다. 남자는 평범한 선비 복장을 하고 있었으나, 황사영은 이미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남자는 자애로운 눈을 들어 황사영을 찬찬히 살피며 중국어로 말했다. 최인길이 그것을 통역해서 황사영에게 들려 주었다.
“오느라 고생 많으셨소. 오늘은 달도 없는 캄캄한 밤인데.”
황사영은 달도 없는 밤에, 달을 찾아 이 곳까지 온 것 같았다. 그는 감격에 몸을 떨면서 입을 열었다.
“신부님도,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렇게 뵈오니, 영광입니다.”
최인길이 통역을 하기 전에, 신부라고 불린 남자는 황사영의 진심 어린 태도에서 그의 말을 눈치챈 듯이 빙긋이 웃어 보였다. 그는 청나라에서 막 입국한 주문모 신부였다. 천주교 신자들만 있던 조선 땅에 최초로 들어온 천주교 성직자였다. 그가 입국을 하기도 전에 조선에 수배령이 떨어져, 그는 입국 후에도 이렇게 역관의 집 안채에 숨어 있어야 했다. 임금은 드러내놓고 천주교인들을 핍박하지는 않았으나 몇 년 전에 금령을 내린 이후로 천주교를 경계하고 있었고, 외국에서 천주교 성직자가 온다는 소문을 두려워했다. 황사영도 신부가 입국했다는 소문은 들었으나 만나지 못하고 있다가, 오늘 밤에야 기별을 듣고 찾아온 것이었다. 주문모 신부는 눈 앞에 단정히 앉아 있는 사내를 다시 한 번 살폈다. 갓 스물이 되었을까 말까한 젊은 사람이, 신중하고 총명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것에 그는 본능적인 끌림을 느꼈다. 그가 열 여섯에 소과에 급제한 천재라는 것은 다른 사람을 통해 들었지만, 주문모 신부는 그에게 단순히 천재라고 칭하기에는 부족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최인길이 일어서며 황사영에게 눈짓했고, 황사영은 서안 앞으로 다가 앉았다. 최인길이 방을 나가고 나자, 주문모 신부가 붓을 들어 종이에 써 내려갔다.
“형제님에 대한 말은 들었습니다. 모두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이 곳에 와서 내가 몸을 드러낼 수 없는 처지가 되었으니, 형제님이 나 대신 힘을 좀 써 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종이를 보고 황사영은 울 듯한 표정을 지었다.
“모두 저희의 불찰입니다. 신부님을 잘 모셔야 하는데, 오시자 마자 이런 고통을 겪게 하다니.” “조선이 금지국이라는 것은 알고 왔습니다. 이 정도는 각오하고 있던 일입니다.”
북경에서 신학교를 나온 주문모 신부는, 같은 학생 중에서 단순히 서양 세계에 대한 열망 때문에, 혹은 많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싶어하는 권력욕을 신앙으로 착각해서 신학 공부를 하는 동기들도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조선으로 가는 주문모 신부를 불쌍하게 생각했다. 아직 천주교가 인정되지 못하고 있는 조선으로 가는 것은, 곧 죽음으로 가는 것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주문모 신부는, 이 곳에 와서 세상에 다시 없을 순수한 영혼들을 만난 것을 큰 축복으로 여기고 있었다. 조선은 가난한 나라였으나, 가난한 나라였기 때문에 더 은혜가 필요했다. 주문모는 이 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이제는 조선의 땅과 하늘, 멀리 보이는 산과 끼니 때마다 물큰히 일어나는 밥 냄새까지 모두 사랑하게 되었다.
“나는 조선을 통해 천주님이 놀라운 일을 하실 것을 믿습니다. 제가 그렇게 쓰임 받는 것이 감사할 따름이지요. 제가 실은, 들어오기 전부터 구상하던 것이 있습니다. 이 곳은 금지국이어서 아마도 신자들이 모두 모여 미사를 드리는 것은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다섯 명에서 일곱 명 정도로 작게 모임을 만들어, 각각의 집에서 미사를 드리도록 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초대 교회가 박해를 받을 때에 성도들이 하던 방법이기도 합니다.”
주문모 신부는 종이에 그림을 그려 보여 주었다. 일곱 개의 점들이 둥근 모양으로 찍혀 있는 그림이었다. 황사영은 미소했다.
“좋은 방법입니다.”
“이 방법이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적은 수의 신자들을 인도할 인도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조선에서는 몇 년 전부터 자발적으로 교리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인도자로 세울 몇몇 사람에 대해 미리 조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 형제님의 이름도 있었습니다.”
황사영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의 얼굴에 당혹의 빛이 떠올라 왔다.
“저는, 많이 부족합니다. 나이도 아직은 어리고…….” “나이는 크게 상관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저는 형제님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이 일에 적격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황사영은 종이 위에 쓰여진 글을 보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하, 하는 헛웃음이 그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신부님이 저를 몰라서 그렇습니다. 저는 많이 부족합니다.” 황사영은 겨우 그렇게 쓰고는 붓을 내려 놓았다. 팔이 떨렸다. 신부의 눈이 엄해졌다. “부족한 것은 천주님이 채워주실 것입니다. 부족은 사양의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혹시 하기 싫으신 겁니까?” 황사영은 난처한 얼굴로 신부를 보았다. 신부는 다시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혹시 거리낌이 있다면 솔직히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형제님이 꼭 저를 도와 주었으면 합니다. 지금 조선에는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황사영은 떨리는 눈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자신이 누군가를 지도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럴 성격도 못 된다고 생각했었다. 황사영은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의 눈처럼 따스한 눈이 그의 앞에 있었다. 황사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붓을 들고 빠르게 써 내려갔다.
“저는 남을 가르치는 일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말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를 이끄는 일은 어색합니다. 성격도 활달한 편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히려 누를 끼칠까 걱정이 됩니다.” 주문모 신부는 고개를 잠시 끄덕거리고는 붓을 들어 그 옆에 써 내려갔다.
“형제님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지도자 중에서는 활달하고 사교적인 지도자도 필요하고, 조용하고 온순한 지도자도 필요합니다. 다양한 지도자가 있어야 모이는 사람들도 다양할 수 있습니다.” 황사영은 천주교에 입교한 후로도 사람들을 만나 교리를 전하기 보다는, 교리책을 언문으로 번역하는 일에만 몰두했었다. 사람을 대하는 것이 어색한 자신은 그런 것 밖에는 할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부탁드립니다. 저를 도와주십시오.”
주문모 신부가 다시 종이에 글을 쓰고는 갑자기 황사영의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황사영은 놀라서 마주 머리를 조아렸다. 황사영의 마음 속에 뭉클한 감동이 일었다. 신부의 진실한 태도가, 그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황사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음과 같이 쓰고는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제가 쓰임받는 것에 다만 감사합니다.” 주문모 신부의 얼굴에 찬연한 미소가 퍼졌다. 그는 황사영의 손을 모아서 굳게 잡은 후, 다시 붓을 들어 종이에 써 내려갔다.
“감사합니다. 형제님은 잘 하실 것입니다. 이 모임은 반상의 구별이 없습니다. 조선에는 신분제도가 엄격하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천주님의 나라는 그렇지 않습니다. 형제님의 모임에도 천민부터 양반까지, 신분이 다양한 사람들이 섞일 것입니다.”
황사영은 눈을 크게 뜨고 주문모 신부를 바라 보았다. 그것은 이제까지 상상 밖에는 할 수 없던 것이었다. 자신이 그토록 가고 싶었던 서방 세계, 천주님의 도가 실현된 곳, 그 곳의 작은 시작이 이 곳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내가 이 이야기를 여러 사람에게 꺼냈을 때, 모두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믿습니다. 조선의 제도보다 더 큰 천주님의 섭리를 말입니다. 형제님도 믿으십니까?” 황사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뜨거워진 눈으로 주문모 신부를 보았다. “제 예상이 맞았군요. 형제님과 제가 만난 것은 천주님의 큰 계획하심인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저를 많이 도와주십시오.”
황사영은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두 손으로 얼굴을 쓰다듬었다. 조선에서 양반과 천민이란, 주인과 종은 될 수 있어도 형제는 될 수 없는 관계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모두와 형제가 될 수 있었다. 다른 곳이 아닌 이 조선에서. 황사영은 상상만으로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리고 곧 세례식을 베풀 예정입니다. 형제님과, 형제님의 부인과 어머니도 세례를 받으셔야 합니다. 혹시 생각해 두신 세례명은 있습니까?” 황사영은 고개를 저었다. 정난주는 이미 마리아라는 세례명을 생각하고 있었으나, 황사영은 아무리 성인전을 뒤져 보고 생각해 보아도 마땅히 떠오르는 세례명이 없었다.
“없으시다면 제가 하나 권해드려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알렉시오라는 성인이 있습니다. 부유한 로마 원로원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아버지를 떠나 청빈의 덕을 실천하며 평생 가난하게 살았던 분입니다. 형제님 또한 부귀영화를 버리고 천주님의 도에 헌신하게 되었으니, 알렉시오라는 세례명을 권하고 싶습니다.”
주문모 신부는 알렉시오, 라는 발음을 일부러 해 보였다. 황사영은 그 말을 따라해 보았다. 이국의 냄새가 배어 있는 이름이었다. 머언 땅에 있는, 한 아비를 가진 족속들의 이름이었다. 황사영은 그 이름으로 부르고 답할 때마다, 그들의 세상이 한 걸음씩 이 곳으로 오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고독도 고통도 없이 서로 손을 잡아 주는 세상이, 그렇게 소리 없이 다가와 임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
1795년 여름 |
황사영은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고 방 안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헛기침을 하기도 하고 멈추어 서서 먼 곳을 보기도 하고, 공연히 쿵쿵 발을 구르기도 했다. 정난주는 황사영이 번역한 교리서를 읽다가 참지 못하고 고개를 들었다.
“한 번, 더 해 볼까?” 황사영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정난주는 질린 듯이 고개를 저었다. “벌써 몇 번을 하십니까. 그만하면 되었다니까요. 정 불안하면 기도를 하십시오.” “아니오. 아직 부족해. 뒷말이 생각나지 않는단 말이오.”
황사영은 주저 앉아서 머리를 긁적였다. 정난주는 피식 웃고 책을 덮었다. 오늘 밤은, 명도회 첫 모임이 있는 밤이었다.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후로 천주교 조직은 더 숨을 죽였다. 이제 서로 연락을 주고 받는 일도, 나다니는 일도 조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모든 천주교 관련 모임도 밤에 하게 되었다.
“목소리 톤은 어떻소? 너무 크지 않을까? 아니 너무 작은가? 아니 표정은? 손 동작은 어떻게 해야 하지?” 황사영은 대답도 들으려 않고 허공을 보면서 중얼 중얼 순서를 외웠다. “시원한 것 좀 갖다 드릴까요?” 정난주가 말하며 일어섰고, 황사영이 그런 정난주를 붙들었다. “아니, 가지 마시오. 옆에 있으시오. 당신마저 가면 불안해 미칠 것 같소.”
“과거 시험은 도대체 어떻게 보신 겁니까?”
엉거주춤 일어섰던 정난주가 주저 앉으며 물었다. “그거야, 답안을 쓰는 것이지 않소. 쓰는 것은 자신 있소.” “저는 서방님의 말솜씨도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말씀 잘 하시는데요.” “그게, 여러 사람이 모이면 그렇지가 않소. 알고 있는 것도 생각이 안 나고. 아, 주님의 기도가 어떻게 시작하는지 아시오?” 정난주는 대답 없이 웃었다. 주님의 기도는 가장 기본적인 기도문이었다. 그것을 황사영이 모를 리가 없었다. 문소리가 난 것은 그 때였다. “이제 시작되려나 봅니다. 저는 상을 준비하도록 이르겠습니다. 어서 일어나서 준비하십시오.” 황사영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정난주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문 밖에는 허름한 옷을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는 문 밖에서 꿇어 엎드려 절했다.
“남송로라고 합니다요.”
황사영은 이미 받은 명단에 있었던 이름을 기억해 냈다. 남송로, 붓을 만드는 장인이라고 했었다. 장인이라면 천민일 것이었다. 황사영은 남송로에게 다가갔다.
“어서 들어오시지요.”
남송로는 고개를 번쩍 들고 놀란 눈으로 황사영을 보았다. 양반에게 처음 듣는 존댓말일 것이었다. 황사영은 빙긋이 웃었다. 남송로는 비틀거리며 황사영을 따라 방 안에 들어왔다. 방 안에 들어와서 그는 무릎을 꿇고 엎드려 몸을 깊이 숙였다. 황사영은 마주 무릎을 꿇고 그를 일으켰다.
“자꾸 이러지 마십시오. 아시지 않습니다. 천주교에는 반상의 구별이 없습니다. 신분이 높든 낮든 똑같은 형제입니다.” “제발, 말씀, 좀 편히 하십시오, 제가 불편해서 그렇습니다.” 남송로는 울 듯한 표정으로 황사영을 보며 말했다. 황사영은 짧은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알겠네. 말을 낮출 테니 자네도 편히 앉게나.”
그래도 남송로는 무릎을 꿇고 앉은 채 몸둘 바를 몰라 했다. 황사영은 가만히 남송로를 살폈다. 짙은 눈썹과 부리부리한 눈은 처음 보는 이에게 좀 무서워 보이기도 했으나, 또렷하고 맑은 그 눈에 거짓이 담겨 있지는 않은 듯했다. 황사영보다 더 나이가 들어 보이긴 했으나 고생을 많이 한 듯해서 실제 나이는 가늠하기 힘들었다. 문이 열렸다. 정난주가 간식 거리가 담긴 상을 들였다. 정난주가 앉아 있는 남송로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고, 남송로는 아까처럼 몸을 떨면서 자리에 엎드렸다. 정난주가 나간 후, 황사영은 상을 남송로 쪽으로 내밀며 말했다.
“이리 와서 좀 들게. 다들 조금 늦어지는 것 같구먼.” 남송로는 몸을 일으키기는 했으나 황사영에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이 처음 경험하는 모든 것이 신기한 듯이, 방 안을 휘돌아 보았다. “붓을 만드는 장인이라고 했나. 일하는 곳은 어디인가?” 장인들은 보통 관청에 소속되어 품값을 받고 일을 하고 있었다. 어색해진 공기를 깨기 위해 황사영이 묻자, 남송로는 깜짝 놀란 듯이 몸을 가볍게 떨며 대답했다. “한성부(한양의 관청)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잘은 모르지만, 한성부라면, 재주가 뛰어나야 가는 곳이 아닌가? 자네 재주가 매우 훌륭한 모양이군.” 마땅히 할 말이 없었던 황사영이 칭찬을 했고, 그 말을 들은 남송로의 얼굴이 뜻밖에 어두워졌다. “실은 그게 아니라.” 남송로는 침을 삼키고 잠시 가만히 있었다. 황사영은 당황해서 헛웃음을 웃으며 말했다. “아니, 아니면 무슨 사정이 있는 겐가. 내가 허튼 말을 했구먼.” “그게 아니라, 실은 아버지가 한성부에서 일하셨는데, 돈을 제 때 주지 않아 항의하다가 그만.” 남송로의 이마에 땀이 번질거리며 났다. 그의 눈이 붉어졌다. 황사영은 표정을 굳혔다.
“그만, 심하게 매를 맞고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억울하고 분한데, 누가 우리 같은 장인들 생각이나 해 줍니까. 이런 일이야 흔한 일이고. 이깟 세상 싹 불 지르고 나도 죽어버릴까, 하다가 어머니 생각에 그 죽여버리고 싶은 한성부에 제가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남은 식구 먹고 살아야 하니까…….”
남송로가 주먹으로 눈물을 닦았다. 황사영은 남송로의 곁에 다가 앉았다. 그의 손이 남송로의 손을 쥐었다.
“괘, 괜찮습니다. 제가 괜한 말을 했습니다.”
남송로는 억지로 웃어 보였으나, 황사영의 눈에는 근육이 씰룩거리는 얼굴이 더 보기 안쓰럽기만 했다.
첫 명도회 모임이 끝난 후, 정난주는 황사영이 있는 사랑으로 건너 갔다. 잠잠히 생각에 잠겨 있던 황사영은 정난주가 나타나자 깜짝 놀랐다.
“아직, 안 잤소?” “잘 수가 있어야지요. 잘 끝났습니까?” 정난주는 웃으면서 남편의 얼굴을 살피다가, 그의 얼굴에 감지되는 우울한 빛을 보고는 표정을 굳혔다. “무슨 일이 있으셨군요.” “내가 모르던 세상이 있었소.” 황사영이 괴로운 듯 미간을 씰룩이며 말했다. 정난주는 그에게 다가 앉았다. “무슨 말씀입니까.” “난 양반가에서 귀하게 태어나 그저 내가 보고 듣는 것이 전부인 줄만 알고 자랐소. 내 눈과 귀가 닿지 않는 곳에 상상도 하지 못할 불의와 아픔이 있다는 건 몰랐소.”
정난주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안타까운 눈으로 남편을 보고만 있었다.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린 것은 그 때였다. 이미 깊은 밤중이라, 찾아올 사람은 없었다.
“이걸 급히 전해주라고 하십니다.”
여종인 복덕이 정난주에게 작게 접혀진 종이를 내밀고 나갔다. 정난주가 의아한 눈으로 황사영을 보았다. 굳이 이 밤중에 전하는 소식은, 좋은 소식보다는 나쁜 소식일 확률이 컸다. 정난주가 떨리는 손으로 황사영에게 종이를 내밀었고, 황사영이 그 종이를 들어 펼쳤다. 글을 읽어내려가는 황사영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무슨 일입니까.”
정난주는 황사영이 서안 아래로 떨구는 종이를 받아 읽었다. 황사영은 붉어진 눈을 허공으로 향한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종이에는, 주문모 신부를 대신하여 그의 입국을 도운 역관 최인길을 비롯한 몇몇이 붙잡혀서 참형을 당했다는 소식이 적혀 있었다. 그들이 신부의 은신처를 대지 않았기에 신부는 안전하기는 하나, 그래도 몸을 피하고 있으니 모두들 알아서 조심하라는 내용이었다.
“왜, 잡아가야 할 사람은 잡아가지 않고.”
황사영이 한숨처럼 말을 토해내고 고개를 숙였다. 그는 독백을 하는 것처럼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그 권력을 함부로 휘둘러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있소. 천주님이 노할 죄를 짓는 그들은 지금도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지. 하지만 나라에서는 그들이 아닌, 착한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죽이고 있소. 천주교가 외래 종교라는 이유만으로, 그것이 성리학과 어긋난다는 생각만으로 두려워서 그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그들은 도대체 뭘 두려워하는 거지? 자신들의 권력이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인가? 진실을 알게 되면 모두가 등 돌리게 되는 걸 두려워하는 것인가?”
“갑자기 셋째 숙부 생각이 납니다.”
분노에 떨고 있는 황사영을 지켜보던 정난주가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셋째 숙부가 급제한 지 얼마 안되어, 임금님의 밀명을 받고 암행어사를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본 참상이 너무 끔찍해서, 충격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백성들은 당장에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고 있는데 수령은 빨리 세금 내라고 하고, 내지 않으면 늙은이건 아이건 잡아다 매질하고. 자신이 군역을 감당해야 하는 사내인 것이 너무 싫어서, 자신의 성기를 스스로 자른 사내도 있었다고 합니다.”
황사영은 멍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숙부는 보다 못해서, 그렇게 착취하는 수령을 고발했답니다. 그 수령의 집안이 대단해서 주위 사람들이 건드리지 말라고 말렸지만, 숙부는 백성들을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답니다. 하지만 그 수령은 잠시 귀양 갔다가 다시 돌아오고, 오히려 그 여파로 숙부가 아직까지 고생하고 있습니다. 임금님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계속 한직을 돌면서 중직을 맡지 못하는 건, 그 때 그 수령과 한 패인 신하들이 숙부를 공격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황사영은 늘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던 셋째 숙부 정약용을 떠올렸다. 비록 천주교는 버렸지만, 그는 함부로 비굴해지거나 나약해지는 사람은 아니었다. 황사영은 깊은 한숨을 내쉰 후에 눈에 맺힌 눈물을 닦아 내었다. 그는 단호하고 진중한 어조로 말했다.
“세상이 악하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이미 천주님의 나라가 임했다고 하셨소. 우린 이 말씀을 믿어야 하오. 성리학은 이미 권력자들에 의해 썩어버렸소. 우리가 가진 것은, 이 진리 뿐이오.”
정난주는 흐르지 않는 눈물을 머금은, 남편의 핏발 선 눈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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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난주 | 정난주 (마리아) 1772-
정약현따님( 순교자 정약종은 작은 아버지, 작은아버지, 정약용, 정난주의 언니정하상 ) 정약용의 누이 정하상은 이승훈 부인이고, 윤지충과 외사촌지간이다. 정약현의 부인은 천주교최초신자인 이벽의 누이이다.
지금은 天惠의 관광지로 봄가을이면 신혼의 단내가 온 섬을 물들이는 남녘의 제주, 세계 어느 나라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빼어난 풍광과 온화한 날씨로 찾는 이로 하여금 이국적 정취마저 느끼게 하는 섬 제주가 조선시대에는 중죄인들을 사회에서 격리시키는 유배지였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듯도 싶다.
천주교 신앙이 가장 늦게 전파된 한반도의 남쪽 섬 제주 땅에는 남과 북에 하나씩 史蹟地가 자리 잡고 있다. 정난주 마리아의 무덤이 있는 '대정 聖地'와 '황사평'이 그곳이다. 이제야 버젓한 사적지로 조성되어 순례객들을 맞이하게 되었지만 그동안 방치되어 오다시피 하여 제주의 신자들조차도 여기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할 정도였다. 이 사적지들은 제주 복음전래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제주의 신자들이 한마음으로 노력하여 일군 탓에 더욱더 신자들의 마음에 깊이 자리 잡게 되었다.
제주가 맞이한 첫 번째 신앙인으로 기록되는 정난주 마리아는 제주도 남제주군 대정에서 官婢가 되어 天壽를 다하신 뒤 모슬포 뒷산에 묻히셨다.
정난주 마리아는 유명한 '백서사건'(帛書事件)으로 순교한 황사영(알렉시오)의 부인으로, 양근 땅 마재의 유명한 정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家系상으로 마리아는 정약용의 맏형이신 정약현의 따님이고, 순교자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의 조카이며, 聖人 정하상(바오로) 의 누님이 되신다. 18세가 되던 1790년 무렵 16세의 황사영과 혼인을 한 마리아는 서울 아현의 시집에서 생활하셨다. 바로 그 해에 進士試에 합격한 황사영은 이승훈, 정약종 등에게 교리를 배워 入敎한 뒤 科擧를 포기하고 교회 일을 도왔으며, 마리아는 이런 남편을 도와 아현의 집을 신앙공동체로 가꾸는 데 노력하셨다.
마리아는 혼인 초기에 자주 자식을 잃은 것 같다. 그러다가 1800년에 아들 경한을 낳게 되었으나 이듬해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일어나면서 모든 가족이 수난을 겪게 되었다. 황사영이 교회재건을 위해 제천 배론으로 몸을 숨긴 뒤 1801년 2월 10일경 아현의 가족들은 모두 체포되어 갖은 문초를 받게 되었다. 이때 마리아는 특히 어린 경한이를 옥에서 키워야 했으므로 肉情에서 오는 또 다른 고통까지 감내해야만 하셨다.
7개월 후 황사영은 배론에서 체포되어 11월 5일에 능지처사(陵遲處死) 되고, 11월 7일에는 마리아와 남은 가족들에게도 연좌죄(緣坐罪)가 적용되어 유배형이 내려졌다. 시어머니 이윤혜는 경상도 거제부로, 마리아는 전라도 제주목 대정현의 奴婢로 유배되었다. 다행히도 어린 경한은 두 살이었던 까닭에 역적의 아들에게 적용되는 형률은 받지 않았고 전라도 영암군 추자도의 노비로 유배되었다. 이들이 서울을 떠나 유배지로 향한 것은 11월 8일이었다.
마리아와 어린 경한의 유배지인 제주도와 추자도는 조선의 유배지 중에서도 서울 한양에서 가장 먼 곳으로, 이름하여 유배 3천리이다. 훗날의 傳承에 따르면 마리아는 유배형을 받은 뒤부터 어린 경한이만은 일생을 노비로 살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사공과 나졸들을 구슬렸다고 한다. 제주를 향해 오던 중 마리아는 추자도 가까이 왔을 때 뱃사공에게 패물을 주며 애원하면서 경한이만은 살릴 생각으로 '경한이 죽어서 水葬했다'고 조정에 보고하도록 부탁했다. 패물을 받은 사공은 나졸들에게 술을 사 주며 허락을 받고 추자도 예초리 서남단 물산리 언덕배기에 어린 경한이를 내려놓았으니 마리아의 애간장이 얼마나 탔는지 기절까지 했다고 한다.
당당한 모습으로 천주를 증거하고 목숨을 바친 남편은 비록 天上의 永福을 누릴 것을 의심치 않았기에 영광이요 환희이기도 했겠지만 인간적으로는 엄청난 고통과 실의에 빠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겨우 두 살 난 젖먹이 아들 경한을 데리고 떠나는 유배길은 너무나도 외롭고 고통스런 일이었을 게다. 최인으로 제주 땅을 밟은 뒤 자신은 물론 아들마저 죄인의 자식으로 평생을 멸시받으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차마 받아들일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추자도에 내려오는 傳承을 보면
'어린아이 울음소리를 듣고 소를 뜯기던 부인이 가보니 아기가 있어서 집으로 데려왔다. 저고리 동정에 무엇인가 들어 있는 것을 보고 펼쳐보니 부모와 아기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 후 아기를 그 집에서 기르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그곳에 사는 뱃사공 오씨(吳氏)였다.'
고 하는데,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리며 어머니 정난주 마리아는 끝도 없이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녀의 발자취를 좇는 순례자들의 눈가도 뜨거워지게 된다. 이후 추자도 오씨 집안에서는 황씨를 기른 인연으로 해서 오늘까지도 황씨와는 혼인하지 않는다고 한다. 예초리 산 위에 가면 경한이의 묘가 있다.
박해가 끝난 뒤 마리아와 아들 경한은 오랫동안 잊혀지게 되었는데, 1909년에 具 라크루(Lacrouts) 제주본당 2대 주임사제가 전교를 위해 추자도를 왕래하시던 중에 황경한의 손자를 만나 이런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라크루 사제는 곧 파리의 샤르즈뵈프 사제에게 서한을 보내 순교자 황사영의 아들 경한과 그 후손들의 비참한 생활을 알렸고, 샤르즈뵈프 사제는 이를 전교잡지에 소개했다. 그 후 라크루 사제는 프랑스 은인들의 후원금으로 경한의 손자에게 집과 농토를 사 주셨다.
한편, 제주에 도착한 마리아는 그곳에서 대정군으로 配所가 결정되어 제주의 거친 바람결만큼이나 쓰리고 모진 官婢의 유배생활을 시작하셨다. 그러나 그 시련을 신앙과 인내로 이겨내셨고, 뿐만 아니라 풍부한 교양과 뛰어난 학식, 그리고 굳건하고 깊은 믿음의 덕으로 주위 사람들의 칭송을 한 몸에 받았다고 한다. 다행한 것은 관비를 담당하던 관리 김씨 집안에서 비록 노비의 신분이었음에도 마리아의 성품을 높이 사서 그들의 어린 아들을 맡긴 일이었다. 마리아는 시간이 지나면서 그 집안의 배려로 점차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명색이 관비의 몸이었으므로 아들을 만나러 추자도로 갈 수는 없었다. 그 후 김씨 집안에서는 마리아를 '한양할머니'라 부르면서 養母와 같이 봉양하였고, 1838년 2월 마리아가 사망하자 추자도의 증손자들에게 서한을 보내어 이 사실을 알렸다. 그 서한은 지금까지 보존되어 오고 있다.
마리아는 유배된 후에도 신앙을 버리지 않고 비밀리에 기도생활을 하셨는데, 김씨 집안에서는 이 사실을 알았지만 누구도 이를 막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녀의 일상기도는 30여 년 동안 유배지에서 외롭게 불린 신앙의 노래였다. 마리아는 이처럼 어린 아들을 추자도에 떼어놓았던 생이별의 아픔을 신앙의 힘으로 극복한 것이다. 마리아는 37년간 오직 신앙에 의지해 사시다가 1838년 음력 2월에 병환으로 숨을 거두시고, 이웃들은 그 유해를 바로 이곳 모슬포 뒷산에 묻었다고 한다. 비록 그녀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삶 전체가 순교자의 생애를 방불케 하는 굳건한 신앙의 증거로 가득했기에 후손들은 그녀를 순교자의 반열에 올리고 있다. 1994년 9월 5일 순교자 현양대회 강론에서 김창렬 주교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신앙 때문에 이 고장에 유배된 유일한 증거자이신 정 마리아 난주님을 순교자라고 말씀드리는 것에 대해 놀라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우리 보편교회도 피 흘려 순교하지 않은 사람들 중에서 어떤 분들은 순교자로 공경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무덤은 김씨 집안사람들이 모슬포 북쪽에 있는 속칭 '한굴밭'에 조성하였고, 이로부터 130여 년이 지난 1970년대 초에 敎會史家 김구정과 김병준 사제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이는 김씨 집안에서 대를 이어가며 무덤을 돌보아왔기에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이 무덤은 1977년 순교자 묘역으로 단장되었다가 1994년 제주 신자들의 염원을 담은 '대정성지'로 조성되었다. 이제 제주의 신자들은 마리아를 '백색순교자'(白色殉敎者)로 공경하고 있다.
제주에서 官婢로 유배생활을 하면서도 불우한 이웃에 나눔을 실천하며 복음적 삶을 살았던 '백색순교자'인 마리아의 모범을 본받기 위해 제주교구는 1999년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묘소를 새롭게 단장하고 聖域化했다. 묘소 입구부터 야자나무로 이국적 정취를 풍기고, 아치형 돌담에 둘러싸인 내부는 아늑하게 잔디밭으로 꾸몄고 그 주위로 십자가의 길 14처가 설치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