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식탁에 어김없이 나오는 것이 "타쿠앙(たくあん)이라는 짠지이다. 이 타구앙은 "무우"를 햇볕에 말린 다음, 쌀겨와 소금에 절인 것으로 한국 짠지와 비슷한 것이다. 일본 농촌에 가보면 겨울에 집의 처마 밑이며 텃밭에 장대를 세워 기다란 큰 무들을 줄지어서 말리는 광경을 살피게 해준다. 이것은 일본의 겨울철 농촌의 풍물시라고도 하겠다
졸깃 졸깃 하고 달콤한 일본 짠지 타쿠앙은 에도시대 초기에 타쿠앙(たくあん.1573~1645)이라는 조선인 승려가 고안해 냈다는 설이다, 그는 불교 임제종의 고승으로서 쿄토의 타이토쿠지(たいとくじ)사찰의 주지였다.
그는 1629년 에도막부 군사정권에 항의 사건을 일으켜 "데와(でわ)지금의 아키타현 등 일대)지방으로 유배 당했다. 일본 서북지방으로서 추운 고장이었으므로 타쿠앙 스님은 그 곳에서 겨울철 저장 식품으로 짠지를 손수 만들어 먹었던 게 아닌가 한다. 그렌데 아키타현에 가보면 겨울에는 해가 짧아서 타쿠앙 무를 햇빛 대신에 집안에 천장 벽 쪽에 주욱 매달아서 말린다.
짠지의 일종으로 유명한 것이 "나라츠케(ならつけ)"이다 일본 나라 지방에서 만드는 저장 식품인 나라츠케는 참외의 변종인 "시로우리(しろうり.월과)"술지게미에다 소금을 넣고 담그는 우리나라의 오이지 비슷한 것이다.
"오우진천황(4~5c 초)당시 백제로부터 왜나라에 건너 온 백제인 "수수허리"가 왕을 위해 양조주를 만들었다."[고서기]
이와 같은 일본 고대 역사가 말해주듯이 누룩으로 술담그는 법은 이미 고대에서 백제로부터 일본에 처음으로 전해진 것이고 술지개미로 오이지며 무 짠지를 담그는 법도 이이 그 당시에 전수된 것으로 추찰된다
사무라이 : 친절
본래 사무라이라는 용어는 귀족 출신인 무사를 가리키는 것이었지만, 12세기에 권력을 장악하여 1868년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때까지 일본 정치를 지배한 무사계급에 소속된 모든 사람을 지칭하게 되었다. 지방 무사 출신인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1192~1333]의 사무라이들은 상당 수준의 무예를 지녔으며 자신들의 극기주의에 대한 높은 자부심을 가지고 이전의 잔잔하고 세련된 왕실 문화와는 전혀 다른 절도 있는 문화를 발전시켰다.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1338~1573]의 사무라이들은 선(禪) 불교의 영향을 받아 오늘날까지도 계속되는 다도(茶道)나 꽃꽂이 같은 일본 고유의 예술들을 탄생시켰다. 이상적인 사무라이는 불문의 행동규범을 따르는 극기적인 무사여야 했으며, 이 행동규범은 뒤에 무사도 (武士道)로 정립되어 용기, 명예, 개인적 충성을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게 되었다 (→ 색인 : 무사도). 이때문에 불명예나 패배를 당했을 경우에는 할복 자살(셋푸쿠[切腹])을 택하는 것이 제도화되었다.
도쿠가와 시대[德川時代:1603~1867] 초기에 전체 인구 중 10% 미만에 불과했던 사무라이들은 사회질서를 정착시키고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 속에서 폐쇄적인 계층으로 밀려났다. 여전히 자신들의 사회적인 지위를 상징하는 2자루의 검을 차고 다니는 것이 허용되긴 했지만, 250년간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아래의 평화시대에 대부분의 사무라이들은 관리가 되거나 다른 생업을 가져야만 했다. 18세기초부터 상업경제가 발전하고 도시가 성장함에 따라 일본에는 활기찬 도시문화가 꽃피기 시작했으며 궁극적으로 사무라이들의 검소한 생활방식을 변화시켰다. 동시에 주로 고정된 봉급을 받고 살아가던 사무라이들의 경제적 지위도 점차 악화되었다. 도쿠가와 시대 말기에는 높은 사회적 지위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많은 수의 사무라이 가족들이 궁핍에 시달렸다. 19세기 중반 서구 열강의 침략에 직면하여 새로운 민족의식을 자각하고 출세를 열망하던 하층 사무라이들은 도쿠가와 체제에 반대하는 운동에 참여했으며 이로 인해 1868년 메이지 유신이 일어났다. 1871년 봉건제도가 공식적으로 철폐되었을 때 사무라이 계급의 특권적인 지위도 상실되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사무라이 출신들은 1870년대에 여러 번 반란을 일으켰으나 새로 창설된 관군에 의해 곧 진압되고 말았다.
사무라이(일본어:武士, ぶ-し, 부시, 모노노후; 무사)는 일본봉건 시대의 무사(武士)를 뜻한다. 본래는 가까이에서 모신다는 뜻의 단어, 시(侍)에서 나온 말로써 귀인을 경호하는 사람을 가리켰으나,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이후 일반적인 무사를 가리키게 되었다. 주군을 잃은 사무라이는 로닌이라 불리며, 칼솜씨를 제외한 기술이 없어 특별한 직업없이 유랑하거나 걸식하며 살인청부 등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원래는 유력 귀족이나 여러 다이후(大夫)를 섬기는, 사무라이혼(侍品)이라 불린 통상 위계 6위 정도의 하급 기능직 관인층, 즉 귀족과 연줄이 있는 국가 레벨의 지배계층의 가장 낮은 곳을 차지하고 있던, 실무자 계급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말하자면 조정을 섬기는 관인이면서 동시에 상위 귀족・관인층을 섬기며 조정의 실무직을 맡았던 신분이 바로 「사무라이」로, 출세한다 해도 귀족의 말석인 5위 정도까지 오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 실무라는 것도 말 그대로 조정의 국사 전반에 관련된 것으로 굳이 무예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업무가 존재했고 각각의 업무를 가업으로 계승했으며, 후세에 이르러 차츰 무예를 직능으로 하는 부시(武士)를 가리켜 사무라이라 부르는 경우가 많아지게 되면서 사무라이=무사라는 공식이 성립하게 된 것이다(부시 또한 초기에는 다이후 신분의 군사 귀족과 사무라이 신분의 일반 부시라는 두 계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또한 귀족과 연결된 지배층이던 사무라이 신분보다 낮은, 본래는 백성의 신분이었던 지자무라이(地侍) 등도 부시 취급을 받으면서 이들 백성 출신의 지자무라이와 구별해, 「사무라이」는 「상층 부시」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여기서의 상층이란 엄밀하게는 발생기의 부시와 마찬가지로 말을 타고 전투에 나갈 자격과 권리를 갖춘 부시를 말한다). 17세기 초에 간행된, 일본어 단어를 포르투갈어로 해석한 사전인 《닛포지쇼》(日葡辞書)는 부시(Bushi)나 모노노후(Mononofu)는 각각 「무인」(武人), 「군인」(軍人)을 의미하는 포르투갈어로 번역되어 있는 한편으로 사부라이(Saburai)에 대해서는 「귀인 또는 존경받는 사람」(貴人、または尊敬すべき人)으로 번역하고 있어, 이 시기 사무라이라는 이름이 부시 계층 안에서도 특별한 존재가 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무라이」는 16세기에 이르러 등장한 단어로,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에서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에는 「사부라이」(サブライ), 조금 더 올라가 헤이안 시대(平安時代)에는 「사부라히」(サブラヒ)로 각기 발음되었다. 「사부라히」는 일본어 동사 「사부라후」(サブラフ)의 명사형이다. 「사부라후」라는 단어는 이미 나라 시대(奈良時代)에 「사모라후」(サモラフ)라는 단어 형태가 등장하고 있어 이것이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원형으로 여겨진다. 「사모라후」는 엿본다, 살핀다는 뜻의 동사 「모라후」(モラフ, 候)에 접두사 「사」(サ)가 붙여진 것으로 「모라후」는 다시 지킨다, 엿본다는 뜻의 동사 「모루」(モル, 窺・守)에 존재・계속이라는 뜻의 조동사(동사성 접미사라고도) 「후」(フ)가 붙여져 나온 단어로 추정되고 있다.
이렇듯 「사모라후」의 원래 뜻은 상대의 모습을 가만히 엿본다는 뜻이 되지만, 나라 시대에는 이미 귀인의 옆에 붙어 그 모습을 엿보며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린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었다. 이 「사모라후」가 헤이안 시대에 모음 교차를 일으켜 「사무라후」가 되고, 나아가 자음 교체를 일으켜 「사부라후」가 된 것으로 보인다. 「사부라후」는 「侍」라는 한자의 훈으로도 쓰이고 있는 데서도 보이듯 헤이안 시대에는 오로지 귀인의 옆에서 모시는 자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었다.[1]
「주군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모시는 일, 또는 그러한 사람」으로써 훗날 조정을 섬기는 관인인 동시에 상급 귀족을 섬기는 하급 기능직 관인을 가리키게 되고 그 기능직 관리의 한 축을 이루었던 부시를 가리키게 되었으며, 앞서 서술한 것과 같이 초기에는 부시뿐 아니라 법관이나 음양사 같은 중하급 기능직 관인도 모두 「사무라이」라 불렸고 굳이 「부시」(무인)라는 특정 직책의 계층만을 지목한 것은 아니었다. 헤이안 시대의 「사부라히」는 그 뒤 「사부라이」→「사무라이」 등의 어형 변화를 거치게 되지만, 지위와 상관없이 군사 관련 직능을 가진 자, 즉 부시 전반을 사무라이라 부르게 된 것은 에도 시대(江戸時代)의 일로, 그 전까지는 귀족이나 쇼군(将軍) 등의 가신인 상급 부시들에만 한정하여 사무라이라고 불렀을 뿐이다.
현재 널리 알려진 것과 같은, 전투를 본분으로 하며 고대로부터 근세까지 일본이라는 국가의 지배계층을 형성했던 전문 군사 계층을 일본에서는 부시(武士) 또는 부샤(武者)라 불렀다. 부시는 헤이안 시대에 처음 발생하여 그들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근세, 즉 에도 막부 말기까지 일본 역사를 이끈 중심적 존재였으며, 심지어 그러한 부시의 존재 자체를 없앤 근대 일본의 신정부(메이지 정부) 또한 많은 부시들의 참여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일본 역사에서의 이러한 부시의 탄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재지영주설
메이지 시대의 역사학자 미우라 히데유키(三浦周行)가 제창한, 일본의 부시는 지방의 무장 영주들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하는 설. 지방에서 일어난 신흥 영주층이 스스로를 방호할 목적에 따라 무장하였으며 이들 세력이 부시단으로 조직화됨에 따라 수도에서 지방관 등으로 파견된 하급 귀족 · 하급 관인층을 우두머리로 추대하고 더 큰 조직화가 진행되면서 황족 출신의 명문 귀족이 보다 상위 부시단의 우두머리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2]
직업관인설
사토 신이치(佐藤進一), 우와요코테 마사타카(上横手雅敬), 도다 요시미(戸田芳実), 다카하시 마사아키(高橋昌明) 등이 제창한, 재경(在京) 부시에서 비롯된 「(전투)기술직 관인」에서 부시의 기원을 찾는 설. 여기서 「기술직 관인」이라는 것은 부시의 기원이 되는 군사 업무를 전담하고 그것을 가업으로 삼아 전수하게 된 귀족들, 즉 세이와 겐지나 간무 헤이시와 같은 군사 귀족 및 하급 관인층을 말한다.[3] 헤이안 시대 후기의 장원공령제 아래서 장원 영주(유력 귀족이나 지샤, 혹은 인세이 시기의 상황)나 지방 관청과 유착하여 영지 경영자로서 발전했다고 보는 설이다. 즉 무사단으로써의 조직화는 아래에서 위로 아니라 위에서 밑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헤이안 시대 후기 조정의 지방 지배가 조정에서 파견한 지방관에게로 권력을 몰아주는 체제로 이행하면서 수령의 수탈에 대한 부농층의 무장 습격이 빈발하게 되고, 지방관들은 과거 에미시 등의 북방 종족과 전투 경험이 있는 수령 역임자나 그 자녀들로써 중앙에서 밀려난 귀족 및 지방관이 될 자격을 갖춘 여러 다이후들을 지역 분쟁 진압에 동원했고, 이들은 그 훈공의 대가로 조정으로부터 공전(公田) 경영을 위임받았지만, 그 훈공에 불만을 품은 자들이 일으킨 반란(대표적인 것이 다이라노 마사카도나 후지와라노 스미토모의 난)을 진압한 다이라노 사다모리 · 후지와라노 히데사토 · 미나모토노 쓰네모토 등의 집안은 무예를 가업으로 하는 집안, 즉 무문(武門)으로써 조정으로부터 공인받고 훗날 부시라고 불리는 집단의 시조격인 존재가 되었다.[4] 즉 초기 부시들의 경제 기반은 조정으로부터 위탁받은 공전에 있었지 그들 자신이 영지를 경영하는 영주가 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11세기 중반부터 장원 개발이 가속화되면서 국가 소유의 공령과 장원 간에 무력 분쟁이 잦아졌고, 현지의 경찰이자 재판 책임자로서 장원 책임자나 공령의 지배자인 지방관으로써 군사 분쟁에 대응할 수 있는 부시가 임명되는 경우가 잦아지면서 부시들은 자연스럽게 영지 경영자로서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고쿠가군제설
일본의 고대 말기에서 중세 초기(10세기 - 12세기)에 성립된 국가군사제도를 가리키는 개념으로써 율령국가가 왕조국가로 변질되고 조정에서 지방의 행정권을 지방관인 수령에게 위임하는 과정에서 성립된 것이 국가군제다. 율령지배체제가 무너지고 조정이 조세 진납을 비롯한 지방의 행정권을 수령에게 집중시키는 과정에서, 수령은 고쿠가(国衙) 기구 내부의 소(所)를 중심으로 지방 권력을 재편성하고 그 아래의 하급 토착수령인 군지(郡司)나 부호층은 토지 경작 및 경영을 다시 수령으로부터 조세 의무와 함께 위임받은 다토부묘(田堵負名)로써 고쿠가 지배 조직에 편입되고, 한편으로 「소」에 배속된 재청관인(在庁官人)으로써 고쿠가 행정의 한 축을 맡게 되었다. 간표(寛平)에서 엔기(延喜) 시대에 이르는 동안, 도고쿠에서 조세 문제에 반발해 일어난 반란에 대해 조정은 지방관이 군사를 동원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추포관부(追捕官符)를 고쿠가에 발급해 병사 징발 등의 재량권을 지방관에게 주었고, 이를 근거로 자신이 맡은 구니 안의 다토부묘들을 병사로써 징발할 수 있게 하였다. 지방관은 다시 이들 병사의 지휘권을 고쿠오레이시(国押領使)· 스이호시(追捕使)에게 위임하여, 오레이시가 이들 병사를 조직하여 추포 활동에 나서기도 했다. 이러한 반란을 진압한 훈공자(자신들이 가진 전지 경영에 경제 기반을 두었고, 수령에 속하여 치안 유지활동에 종사하였던 다토부묘들 포함)야말로 초창기 부시라는 것이다. 도고쿠에서 시작한 국가군제는 쇼헤이(承平) 연간(930년대)에 세토 내해에서 발호하게 된 해적에[5] 대한 진압이나, 이들을 진압하는 공을 세웠지만 그 훈공을 제대로 보상받지 못한 후지와라노 스미토모 등과 같은 다토부묘들이 일으킨 해적 행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조정은 세토 내해 여러 지방에 도고쿠의 오레이시와 같은 게고시(警固使)를 두어 추포관부를 받고 병력 동원 권한을 가진 수령 아래서 유사시 병력 지휘를 맡게 함으로써, 도고쿠와 같은 고쿠가군제가 사이고쿠에도 세워졌다.
각각의 학설에는 모두 저마다 약점을 갖고 있는데, 서구 역사학의 고대-중세-근대라는 시대발전사관에 맞추어 일본역사를 해석함으로써 일본 근대화의 토대를 마련한 재지영주설은 부시단(武士団)의 주요 구성원이었던 겐지(源氏)나 헤이시(平氏), 후지와라 씨(藤原氏)의 존재, 고대 지배계급으로써 조정이나 인(院), 셋칸케 등 권문(権門)과 밀접하게 연줄이 있던 상급 부시들의 기원을 설명할 수 없다는 데에 난점이 있었고, 직업관인설은 겐페이도시쓰로 통칭되는 군사 귀족들을 기원으로 하는 부시나 관료 직업적 기술로서의 무예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있지만 그들의 직업적 기술을 뒷받침할 경제적 기반으로써의 「영지」나 인적 기반이 필요한 주종관계에 대한 설명이 아주 약하다.
사무라이의 기원은 덴노를 중심으로 중앙 집권 체제를 수립하였던 아스카 시대가 끝나가고 점차 세력을 키운 귀족들에 지방 분권 체제가 확립되었던 시기에 생겨나기 시작했다.
헤이안 시대 중기에 들어서면서 명문귀족인 후지와라 가문이 덴노를 제치고 중앙 권력을 장악하게 되자 이전까지 덴노의 왕권에 의해 통치되었던 일본의 질서는 무너져갔다. 이에 따라 10세기 초부터 일본의 율령제가 급속히 무너지게 되었다.
이렇게 중앙 집권 질서가 무너져가게 되자 중앙 기관은 더이상 지방을 효울적으로 통치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었다. 결국 쇠약해진 중앙 기관은 지방 세력의 세력가들인 '고쿠시'들에게 중앙 기관을 대신하여 해당 지역을 다스리고 세금을 걷을 수 있는 권리를 내려주었다. 이들 고쿠시들 역시 자신들의 영지를 더욱 효과적으로 통치하게 위해서 유력한 농민들에게 땅을 나눠주고 사업을 맡겼는데, 이들을 '다토'라고 하였다.
그러나 다토들이 스스로 토지를 개간하여 새로운 경작지를 만들고는 스스로 영주라고 자처하면서 다토와 고쿠시 간에는 권력 충돌이 빈번하게 발생하게 되었다. 고쿠시에 비해 비교적 세력이 미약했던 다토들은 중앙권력자에게 자신의 땅을 바쳐서 세력을 키워나갔고, 이에 따라 권력 투쟁은 더욱 치열하게 번져갔다. 다토들은 싸움으로부터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무력집단을 만들게 되었다.
이런 무력집단의 일부가 중앙귀족의 눈에 들어 귀족의 사병으로 종사하는 시종(侍從)이 되는데, 이 시종에서 나온것이 사무라이(侍)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헤이안 시대 말기에 접어들면서는 귀족의 경호원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무사들까지 통틀어 이르는 말로 변질되었다.
전국시대가 끝나고 에도 막부 시기에 들어서도 사무라이들은 명맥을 이어나갔다. 다만 사무라이들이 주로 활동하던 센고쿠 시대의 지방 분권 체제가 붕괴되면서 사무라이들의 문화와 고유한 무사도도 중앙 집권 체제에 맞도록 변질되어 갔다. 또한 한편으로는 일본 내에서 전쟁이 거의 사라지고 일본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서민 계층의 죠닌 문화가 발달하면서 예전에 비해 그 위세가 크게 줄었다.
사무라이들의 역사는 메이지 유신 시기에 종결되었다. 사무라이들의 계급을 유지시켜주었던 에도 막부가 무너지고, 토지 개혁 정책에 따라 사무라이들에게 지급되던 영지가 사라지자 당연히 큰 반발이 일었다.
사무라이나 그 후손들은 메이지 유신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결국 신식 군대에 의해 진압되면서 번번히 실패하였다. 결국 1870년대에 들어 사무라이라는 존재 자체는 거의 소멸되었고 현재는 과거의 명문가 정도로 남아 있다. 이 이야기를 다룬 영화가 바로 라스트 사무라이.
그러나 사무라이들이라고 해서 영화에 나온 것 마냥 신식 군대에게 갑주입고 칼을 휘두르며 싸운 것은 아니었다. 애시당초 사무라이는 칼에 특화된 게 아니라 단지 군인의 역할을 수행하는 전사계급이었고, 그들 역시 신식 군대처럼 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오히려 몇년 사용법 교육받는 평민과는 다르게 10년이상 사격술을 갈고 닦고, 그 시대 총기사용에 가장 중요한 대열과 사기에서도 굉장히 뛰어났다. 정부에서 무기 입수를 방해하지 않는한 권력과 재산을 이용해서 유럽1선급 무기를 들여오는 일도 많았다. 무진전쟁, 서남전쟁 항목 참조.
최초의 사무라이들은 대개 싸움을 잘하는 무사들을 모아 귀족들을 경호하는 수준에 그쳐서 날강도 수준의 단순무식한 무사 집단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센고쿠 시대(전국시대)로 접어들어 다이묘 정권이 들어서면서 400년 넘게 거의 서양의 기사와 가까운 계급으로 뛰어올라게 되면서 당연히 그 격과 수준도 높아졌다. 때문에 사무라이들이 그 오랜 기간동안 이들이 이끌어온 일본의 문화는 무시못하는 수준이다.
단, 사무라이들의 교양의 수평은 지방별로 큰 격차가 있었으며 어떤 사무라이들은 서양의 언어를 필두로 하는 외국어 서적을 번역하고 주석을 달 정도의 교양이 있었던 반면, 어떤 사무라이들은 한자로 제 이름조차 쓰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애초에 일괄적으로 사무라이라고해도 1만석 이상의 다이묘와 다이묘의 시종이나 다름없는 하급 사무라이들간에는 큰 격차가 존재했고 다이묘들끼리도 가문의 위세나 성향에 따라서 큰 격차가 있었으니 일괄적으로 단언하기는 어렵다.
일부 다이묘나 사무라이들은 자신의 권세를 뽐내기 위하여, 혹은 권력다툼에 패하여 할 일이 없어서, 혹은 그냥 취미생활로 교양을 쌓았으며 이 과정에서 선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아 차문화와 독특한 화풍 등을 활벌하게 발달시키기도 하는 등 제법 높은 교양과 문화적 소양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일명 하이쿠라 불리우는 시문학도 이 시대에 꽃을 피우게 된다.
게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불교와 유교의 이론에 깊이 감화된 사무라이들이 늘어나면서 그 전성기에는 사람을 죽이는 것을 정말 극도로 꺼리는 왠지 사무라이답지 않은 사무라이들도 늘어났다(...). 사무라이들이 불교에 심취한 나머지 출가하여 승려가 된 사례도 역사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하지만 난세인지라, 사무라이들이 환상을 품던 승려들은 직접 나기나타들고 난폭하게 설쳐대거나, 무뢰배들을 모아 승병을 만들었다. 물론 그런 쪽하고는 분명하게 거리를 두는 종파도 있었다.
각종 픽션에서는 주군에 대한 충과 의를 다하는 것처럼 묘사되지만 실제로 그런 사무라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했고 대부분의 경우 아무렇지도 않게 배신을 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충과 의를 중시하는 무사도는 후에 에도시대에 중앙집권적인 에도막부가 들어서면서부터 강조된 것이고 전국시대에는 적에게 목숨 구걸을 했다가 적이 방심하면 등 뒤에서 찌른다거나 배신을 하거나 동맹을 깨거나 하는 일도 몹시 흔한 편이었다. 현재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무사도에는 유교 사상[1]의 영향이 크다. 유럽에서 기사의 시대가 지나고나서 기사도 로망이 유행하며 기사도가 발생한 것처럼[2]무사도 또한 무사의 시대가 지난 에도 시대에나 발생한 개념이다. 현대에 알려진 멋진 무사도는 사실 옛날을 동경하던 에도 시대 공무원 사무라이들이 망상해낸 비현실적 내용이 많은데, 문제는 이걸 한 바보 집단이 절대의 국시이자 이데올로기로 삼아버렸다는 것. 결국 그들은 피로 덕질의 대가를 치른다.
실제 센고쿠 시대의 무사들은 현대의 인상과 달리 엄밀히 말해 철따라 조건 따라 직장을 옮기는 샐러리맨에 가까웠다. 보통 이들은 전공을 세우면 적극적으로 그리고 마구 부풀리기까지 해서 주군에게 보고했고, 주군은 칸죠라고 불리는 "감사장"으로 보답했다. 이 감사장에는 해당 무사의 무공이 적혀 있어, 이를 타 가문에 임관할 때 이력서로 활용했던 것이다. 그래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가신인 토리이 모토타다는 "나는 도쿠가와 가의 귀신이 될 것인데, 타 가문에 임관할 때 쓰이는 감사장이 무슨 소용인가?"하고 감사장을 대놓고 거부했다고 한다.
하지만 흔한 경우가 아닌지라 보통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것은 다이묘 자신의 친족이었지만 센고쿠 시대 쯤 되면 친족들 사이에도 밥먹듯이 배반행위가 저질러졌다.
게다가 이들은 후세인의 인상처럼 칼에 목숨을 거는 멋진 사나이들도 아니었다. 칼은 어디까지나 개인호신용 보조무기이자 신분 과시, 수양용이었고, 전쟁에서 거의 대부분의 사상자는 활, 총포 등의 투사 무기에 의한 것이었다. 게다가 일본에선 유럽과 달리 장거리 공격을 비겁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는 없었다.[3] 애초에 헤이안 시대만 해도 사무라이간의 일기토란 서로 말을 달리면서 활을 쏘는 것을 의미했고, 검을 쓰는 것은 활쏘기로 승부가 나지 않았을 경우에 한정되었다. 총포가 도입된 이후에는 전투의 첫포를 쏘는것을 명예롭게 생각하기도 했다. 이는 환경적인 요인도 있는데, 일본에는 양질의 철광이 드물어서 사철을 주로 사용했는지라 제련이 까다로워 전금속제 갑옷은 마련하기 힘들었고, 유럽에 비해 훨씬 습하고 더운 날씨에서 중무장은 오히려 전투력을 저해시켰을 것이다.[4] 덕분에 투사 무기가 유럽에 비해 더 큰 위력을 발휘했다
교육에도 많은 힘을 썼던 모양인지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가 1549년에 로마에 보내었던 보고서엔 대학 비슷한 교육시설도 있었던 모양이며 사무라이의 자제는 8살부터 19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면에 관한 교육을 받았다는 기록도 전해져 온다. 치열한 센고쿠 시대에도 이랬으니 에도쯤 되면 더욱 사무라이에게는 단순한 전투력이 아니라 정치력, 지력이 요구되기 시작한다.
본디 전투원인 사무라이들은 평화가 찾아오자 그 성격이 변하기 시작하는데, 에도 막부 때의 사무라이라는 이들은 전투에 나가는 이들이 아니라, 다이묘 밑에서 그 지역을 다스리는 관리직이 주된 임무였다. 이로 인해 대다수의 사무라이들이 일평생 칼 싸움 한번 해보지 못하거나, 심한 경우에는 아예 칼을 휘두르는 법도 모르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것은 시대가 지날 수록 심해져, 나중에는 성 하나에 검도 유단자는 단 한명만 있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 유단자는 성이나 마을에 불한당이 나타나면 해결사처럼 불려갔었다고 한다. 거친 무사들의 풍습이었던 할복도 진짜 배를 가르는 것에서 에도 막부에서는 점차 부채를 대어 배를 가르는 흉내만 내는 사실상의 참수형으로 변한다.
메이지 유신이후는 사민평등을 실현한다는 기치 하에(사실은 구 무사계급의 특권을 박탈하기 위해) 칼을 빼앗는 "폐도령"이 내려졌고, 칼과 신분을 잃은 구 무사계급은 대부분 "화족"으로 편입되었다.
길가다 평민들이 모욕하면 그냥 죽여도 되는 특권이 있었는데, 부레이우치(無礼討ち)나 키리스테고멘(切り捨て御免)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대적으로는 사무라이가 무자비하게 무례한 농민을 베어넘길 것 같지만[5] 사실 키리스테고멘은 결투형식을 취해야 하기 때문에, 하층민에게 지기라도 하면 할복, 할복이 아니어도 사회적으로 매장되며, 결투를 하지 않아도 처벌의 구실이 되었다. 지거나 오히려 사무라이가 죽어도 상대 평민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사무라이와 그 가족은 사회적으로 매장. 상대가 결투를 회피하면 그냥 공격해도 되지만, 응하는데 무기가 없다면 자신이 와키자시를 빌려줘야 했다. 게다가 사실상 법률상의 정당방위와 비슷한 개념이라서, 농민이 자신을 모욕했다는 행위의 목격 증인이 필요했다. 그래서 후대에는 무사의 이미지 형성에 큰 역할을 한 개념이지만 당시엔 거의 행사되지 않았다. 에도 시대에 이르러서는 사무라이의 횡포를 방지하기 위해 일본도의 크기도 법적으로 제한하였고, 개인적인 사유로 결투를 하는 것을 엄중처벌하게 되면서 몇몇 겁없는 사람들이 사무라이를 모욕한 다음 칼을 주기 전에 도망치는 치킨게임을 하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그 사무라이가 활과 화살을 갖고 있다면 어떨까?
덤으로 무사는 모욕에 대해 반드시 갚아야 하는 명예를 중시하는 계층이라서 무시당하고 그냥 넘겨도 또 그것대로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진퇴양난(...) 그래서 오히려 이런 제도가 상류층인 무사가 함부로 평민 근처에 못 가고 몸을 사리는 상황을 초래했다.
게다가 이 시대에는 평민들도 와키자시를 소지하는 경우가 많았고, 정당방위처럼 취급되는지라 사무라이가 평민을 죽였다면 정당한 부레이우치였다는 것을 증명해줄 증인이 필요했는데 사건을 기록한 서류를 제출하고, 칼은 증거품으로 일시적으로 압류되었다. 정당한 부레이우치라는게 입증되지 않으면 그냥 살인사건이 돼서 처벌받았고, 할복, 심하면 하층민의 처형방법인 노코기리비키[6]나 참수형으로 처형되기도 하였다.
에도 성내에서는 한 술 더 떠서 칼을 뽑는 것 자체로 사형선고를 받을 정도였고 이 때문에 형식상으로만 패용하기 위해 날 부분을 대나무(...)로 대체하던 시대였다. 이 법에 걸려서 죽은 대표적 사례가 추신구라의 주가 아사노 가문이다. 에도 성내에서 칼을 뽑은 데다 상관에게 상해까지 입혀서 즉시 가문이 멸망해버렸다. 그냥 안 차고 다니면 되지 않냐고 하겠지만 당시 복식문화상 남자가 칼 두자루도 안차고 다니면 조선으로 치면 선비가 갓도 안 쓰고 길에 나선 꼴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칼은 반드시 차고 다녔다.
이런 이유로 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도시인 죠카마치는 신분별 구획이 철저하게 나눠져 있다. 전적으로 상대의 악의에 의해 시비가 걸려도 본인이 억울하게 손해를 볼 수도 있는 제도라는 점은 민간인들과 시비라도 붙으면 무조건 경을 치는 대한민국 국군의 장병들과도 비슷하다(...).
물론 에도시대 이전에는 법보다 주먹이 우선인 시기였으므로 이러한 형식적인 의례는 아무 의미가 없었기 때문에 이 시기에 평민이 사무라이를 모욕하는 것은 죽음이나 다름 없었다. 더욱이 사무라이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는 평민이라면 결투까지 갈 것도 없이 바로 영주를 모독한 죄로 참수시키면 그만이다.
하지만 이 시대에도 사무라이 마음대로 평민들을 죽이지는 않았는데 그 이유는 평민은 대체적으로 농민으로서 영지의 경제적인 생산을 담당하는 중요한 인력이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멩스크가 자기 마음에 안든다고 해서 이유없이 마구잡이로 SCV를 죽일 수 없듯이 말이다. 뭐 어떤 술수라도 부려서 죽였겠지... 더욱이 자기 영지 소속의 농민이 아니라면 더욱 조심해야 했는데 이유는 당연히 해당 농민의 영주와 시비가 붙기 때문이다. 그게 정당한 결투인지는 둘째치고 자기 영지의 생산을 담당하는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데 가만히 있을 바보는 없기 때문이다. 이 경우 어찌저찌 넘어가는 경우도 있었으나, 해당 농민의 영주가 납득하지 못할 이유라면 최소 농민을 죽인거에 대해 배상을 해줘야 하고 심하면 영주 간의 결투나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하지만 자기 가신의 영지라면 예외. 오히려 해당 가신이 관리소홀이라는 이유로 문책을 받을 수가 있다. 니네 영지는 어째 맨날 그 모양이냐?
즉 봉건제 사회에서 하층민이 결코 편한 건 아니지만, 극한 전시상황에서 자기 영지의 주민 목숨을 파리 취급할 만큼 어리석은 자는 없었기 때문에 난세인 이 시대에도 그렇게 막장스런 상황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고, 자세력의 성 근처라면 치안도 생각보다 괜찮았다. 아니 근데 후손들은 왜 그모양이었는지...
기록상으론 서양 사람이 진짜 다이묘에게서 이름과 검을 하사받고 사무라이가 된 경우도 있다. 16세기의 영국 선원 윌리엄 아담스와 그의 동료 독일인 로뎀슈타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서 정식으로 이름과 영지를 받고 사무라이가 된다. 도쿄역 야에스 출구 일대(!)가 그 곳으로, 이것은 로뎀스테인의 일본식 이름 야요우스를 잘못 읽은 것이다. 만약에 그 봉토를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으면 땅값이 어마어마할 것이다(...). 이 사람의 일대기에 영향을 받은 소설이 쇼군. 사실 이전에도 오다 노부나가가 모잠비크 출신의 흑인 노예를 해방시켜 야스케란 이름을 주고 부하로 부렸다는 기록이 있다.
보통 검에 죽고 검에 산다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초창기에는 오히려 "활 없이 말을 타지 않는다"고 얘기할정도로 활을 중시했다. 거기다가 소위 말하는 일기토도 본래는 서로 말타고 달리면서 활 쏘는 것이었다고. 그래서 사무라이를 궁수(유미토리)라고도 표현하며, 사무라이의 무력을 궁술로 비유하기도 한다.
주인이 없으면 로닌(낭인)이 된다. 이들은 보통 주가가 망하거나 처벌을 받거나 해서 규모가 쪼그라들어 더 이상 부양할 수 없자 내쳐진 일종의 실직자인데, 출세를 위해서 전쟁에 목이 말라 있는 호전광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상당한 암적 존재이기도 했고, 가끔 충성스런 로닌들은 떠돌아 다니며 주가의 복수를 하기도 했다.
일부 한국인은 "사실 일본의 사무라이는 한국의 '싸울아비'[7]에서 따온 것이라고 주장한다.[8] 당연하지만 가능성은 없다.
[1] 일본에게 가장 유행한 유학은 임진왜란 후에 전해진 퇴계 이황의 이기호발설과 율곡 이이의 이통기국설이다. 이들의 성리학은 도쿠가와 막부의 정치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2] 서양에서 흔히 중세 시대하면 떠올리는 중세 전성기(11세기 이후)는 기사계급의 준귀족화가 진행되며 기사도가 생겨나고 있었고 기사의 시대가 끝나기까지는 그 후로 몇백년이 더 흘러야 했기 때문에 기사시대가 끝나고 기사도가 생겼다는 말은 사실과 다르다. 기사계급이 처음부터 기사도와 함께 생겨난 계급이 아니라고 하면 맞겠지만.
[3] 유럽에서는 고대 그리스부터 중세 초기까지 장거리공격을 불명예스럽게 생각하는 국가가 꽤 있었다.
[4] 반면 서양에서는 귀족과 부자들은 비싼 철갑주를 마련했고 경무장하고 투사무기를 쓰는 병사는 보통 평민출신이 많았다.
[5] 와패니즈 영화 쇼군에서 자신에게 절을 안하고 멀뚱거리는 농민을 단칼에 쳐죽이는 장면이 대표적. 당연한 얘기지만 와패니즈는 와패니즈다.
[6] 땅에 목만 남겨두고 파묻은 뒤 땅을 따라 칼질해서 참수하는 방법. 형 집행 직전에는 땅 위에 사람의 머리가 튀어나온 모양이지만 형 집행 후에는 땅이 완전한 평지가 된다.
[7] 싸울아비란 말 자체가 근대에 들어 생긴 조어다. 싸울아비 항목 참조. 이 오해를 널리 퍼트린 요인 중 하나가 사무라이 스피리츠2 하오마루 지옥변의 국내판인 진 싸울아비 투혼이라고 하기도 한다.
[8] 2000년대 초반에 서비스되었던 '프로젝트 신루'라는 온라인 게임에서 '싸울아비'라는, 정신수양을 패시브 스킬로 하던 동양무사풍의 직업이 있었다. 하지만 이 무렵에 팔리던 게임 중 싸울아비라는 직업이 등장하던 게임이 저거 하나뿐만이 아닐 뿐더러 싸울아비를 동양무사풍의 직업으로 묘사한다고 전부 싸울아비=사무라이라고 주장하는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진짜 그런 경우도 있으니 조심.
일본어로는 切腹(셋푸쿠)나 腹切り(하라키리)라고 하며 사무라이에 한해 사형 집행 방법이기도 하다.[1] 1960년대 이후로 일본의 사무라이/시대극 영화들이 서양권에서도 제법 입소문을 탄 탓에 사무라이, 스시나 스모, 닌자보다는 인지도가 덜하지만 어쨌든 서양인들이 익숙할 일본어 명사중 하나가 되었다. 해러키릐 일부 영어사전에서도 신조어 등으로 등재될 정도.
최초로 행해진 것은 헤이안 시대이며 정확하게 누가 처음으로 했는지에 대해서는 제설이 존재해서 명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았다. 헤이안 시대 귀족이면서 도적으로 유명한 후지와라 야스스케가 붙잡히자 배를 가르며 난동을 부렸다는 기록이 있긴 하다.[2] 할복의 원조로는 미나모토 다메토모를 뽑고 있다. 일부 환빠를 비롯한 재야사학자들은 이것이 삼국시대에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는데, 큰 근거는 없다.[3]더욱이 환빠들의 주장이 사실이라고 해도 자랑스러운 게 절대 아니다!!!신라의 화랑들이 카미카제랑 반자이 어택을 했다는 걸 자랑할 수 없듯이 말이다.물론 당시에 카미카제를 할 항공기가 있었으면 자랑거리지만 말이다.[4]
이것이 일반적으로 널리 퍼지게 된 것은 가마쿠라 시대이며, 무사도의 개념이 발생한 것과 함께 일본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후에 무로마치 시대가 되면서 주군의 죽음에 따라 죽는 순사의 한 방법으로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으나 한 편으로 센고쿠 시대의 기록을 살펴보자면 시골 사무라이들은 정확하게 하는 작법을 몰랐다는 기록을 살펴볼 때 전국적으로 폭넓게 받아들여졌는지는 알 수 없다.
전국시대까지는 주로 사무라이들이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거나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행했다. 대표적인 예로 전국시대의 무사인 시미즈 무네하루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공때문에 성을 함락당하기 직전까지 갔는데 결국 화친을 맺기로 했다. 그러나 도요토미 측은 화친의 조건으로 무네하루의 할복을 요구했고 무네하루는 굳이 할복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5]에서 부하들의 목숨을 구하는 조건으로 배를 갈랐고 오다 노부나가의 죽음 직후인지라 한시라도 빨리 회군해야되는 히데요시도 무네하루의 할복을 진정한 무사의 죽음이라하여 끝까지 지켜보았다고 한다. 히데요시는 후에 그의 이름을 기억해두었다가 일본을 석권한 다음 그 아들인 카게하루에게 다이묘로 삼아줄테니 자신의 직신[6]이 되라고 제안하였으나 카게하루는 모리에 대한 의리로서 그것을 거절하였다고 전해지며 이 일화는 무사도의 본질을 관통하는 일화로서 유명하다.
그 밖에도 전해내려오는 이야기로는 어느 무사의 아이가 먹을 걸 훔쳐먹었다는 의혹을 받자 무사는 치욕을 씻기 위해 자식의 배를 갈라 무죄를 증명한 뒤 상대방 역시 쳐죽이고 자기도 자결했다[7]는 흠좀무스런 이야기도 있다. 일반적인 의미의 할복과는 좀 다르지만...
패장이 적에게 붙잡히는 것을 수치로 여겨서 자인했다는 것을 여기저기서 들어볼 수 있는데 이것은 할복을 포함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애시당초 자인이라는 것은 글자의 뜻처럼 스스로 날붙이를 써서 자살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반드시 그것이 할복인 것은 아니다. 또한 이 경우에는 목을 쳐서 숨김으로서 효수를 피하거나 자신의 죽음을 숨기는 목적[8]도 있었다. 실제로 몇몇 장수의 경우 목이 발견되지 않거나 목이 달라보였다는 이유로 생존설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가 오다 노부나가와 아케치 미츠히데.
전국시대가 끝나고 아즈치-모모야마 시대가 되어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성격이 괴랄맞은 것도 있어서 사형의 한 방식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이 경우 할복은 참수형이나 십자가형 같은 다른 사형이 불명예스러운 죽음이라고 여겨진 것과는 다르게 명예있는 죽음으로서 여겨졌다[9]. 정권이 도요토미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로 넘어가도 이에야스는 굳이 그것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시행했으며 이 때 비로소 흔하게 접할 수 있는 할복의 형태가 완성된다.
기본적인 방법은 상의를 벗고 옷감 따위로 칼날을 감싼 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배[10]를 가르면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무라이가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신속하게 목을 치는 것. 이 경우 목을 치는 것을 카이샤쿠라고 부르는데 사람의 목을 단숨에 절단하는 것은 어지간한 검의 달인이 아니면 불가능[11]하기 때문에 할복을 하게 되는 사람의 주변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자나 믿을 수 있는 친한 친구등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카이샤쿠를 행하는 사람의 격에 따라서 할복을 하는 사람의 격이 정해진다고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에 변변치 않은 가문에서는 돈을 주고 카이샤쿠를 해줄 사람을 몰래 구해왔다는 기록도 있고, 그 밖에도 아는 사람이 인맥을 동원하여 불러왔다는 예도 있다.
이 카이샤쿠에도 작법이 있는데 각 지방마다 달랐다고 하지만 보편적으로 으뜸으로 치는 것은 바로 목이 완전히 절단되지 않고 가죽이 한 장 붙어서 들러붙어있는 것이다. 그렇게 자르면 목이 땅바닥을 구르지 않고 죽은 자의 품 안에 안기기 때문에 그렇다는 듯 하다. 일본에서는 거기에 유래해서 목의 가죽 하나의 차이로 살았다는 관용구가 있는데 이것의 뜻은 아슬아슬하게 살아남았다이나 실제로 그런 상태가 되면 물론 죽는다(...).
할복 시행자가 어려서 힘이 약해 스스로 할복을 할 수 없는 어린 소년이면 부채를 쥐고 배를 긋는 시늉만하고 카이샤쿠 시행자가 목을 벴다. 일설로는 할복 자체는 의식, 행위에 지나지 않고 실제로 배를 가르지 않았으며, 실제로 할복 당사자의 목숨을 끊는 것은 카이샤쿠를 담당한 사람의 몫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배를 가르는 이유는 옛날에는 일본인들이 사람의 영혼이 뱃속에 들어있다고 믿어서 그것을 통해 자신의 긍지나 결백함등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리한 것이 시초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 밖에도 몇 가지 예법이 있어서 할복을 할 때는 바닥[12]에는 천을 덮어놓는데 타인에게 선물받은 천을 사용하면 그것은 선물한 자에 대한 최대한의 호의의 표현이라고 한다. 사극 등에서는 하얀 옷을 입거나 하얀 천을 깔아놓는 것을 볼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했다가 지나치게 주변이 핏빛으로 물들기 때문에(...) 하얀색을 쓰지는 않았고, 피의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하여 하얀 색을 쓴 것이 정답.
그러나 모든 사무라이들이 스스로 배를 가를 정도의 기개를 가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억지로 붙잡아놓고 흉내만 낸 다음 목을 쳐서 끔살시켰다는 이야기(...)도 있고 에도 시대 중기부터는 그러한 번거로운 과정을 간략해서 칼 대신 부채로 흉내만 내면 뒤에 있던 카이샤쿠역의 인물이 알아서 목을 치게 되었다.
이렇다 보니 에도 후기부터는 진짜 자기가 배를 가르고 죽었다는 것은 상당한 의지 표명으로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그리고 이래서 스스로 배를 가른 진짜 할복은 숭고한 죽음으로 포장되는 경향이 더욱 강해졌으며, 이런 성향은 제국주의 시대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13]
그 밖에도 도쿠가와 막부가 막부의 권력기반을 잡기 위하여 말기양자[14]를 금지하거나 사소한 것을 구실로 개역[15]을 일삼았기 때문에 문제를 일으켰을 경우 막부가 개역을 선고하지 못하도록 선수를 쳐서 할복을 해버리는 경우가 있었다. 막부에서도 그런 경우는 약간 형을 덜주는 풍조가 있었고 이미 사건을 일으킨 자가 할복을 했다면 깊게 추궁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사건이 너무 크면 그런 거 없다. 심지어는 참수+개역콤보를 먹인 것도 있을 정도.
막말시기 사무라이들이 오사카 근처 사카이(堺)[16]에 모르고 상륙한 프랑스 해군을 습격하여 몇명을 죽였는데 이에 열받은 프랑스 공사가 막부를 협박하여 묘고쿠 사(妙國寺) 광장에서 이들을 전원 처형케했다. 문제는 처형 방법이 할복. 이에 프랑스 공사와 해군 사령관 등 프랑스인들은 엄청난 충격을 먹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내장을 꺼내놓고 그걸 정렬한다음, 피묻은 손으로 모래바닥에 '나 죽는다'고 쓴 다음, 그 내장을 프랑스인들을 향해 집어던졌단다... 여담으로 영국 공사는 이 이야기를 가지고 일본인을 칭찬하고 프랑스인을 깠다. [17]
일본의 사무라이 그림을 보면 칼을 두 자루 차고 다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큰 쪽을 혼자시라고 부르고 작은 쪽을 와키자시라고 부르며 이 중에서 와키자시를 할복용으로 쓰는 경우가 있었으나 원래부터 그렇게 쓰라는 것은 아니고 부러지기 쉬운 일본도의 특성상 보조무기로서 사용되었다. 때마침 할복용의 단도를 구할 수 없는 상황에서나 와키자시를 할복용으로 썼다. 실제 길이도 할복을 하기에는 불편할 정도로 긴 편. 그래서 보통 칼날 부분에 옷감을 말고 그 부분을 잡고 베었다.
할복을 하면 대부분은 과다출혈로 죽는다. 그나마도 빠른 시간에 죽음에 이를 정도의 출혈이 일어나려면 등 쪽의 간동맥을 찔러야 하는데, 배 쪽에서 칼을 꽂으면 초인적인 의지와 힘이 아니고서는 기껏해야 복근이나 복막, 아주 대단해도 장을 베는 정도에서 그치고 간동맥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래서 카이샤쿠가 없으면 몇 시간 동안이나 고통에 시달리며 뒹굴다가 흉한 꼴로 죽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혼자서 할복을 하면 장시간의 고통을 못이겨 배를 갈랐던 칼로 자기 목이나 가슴을 찔러 끝을 낼 정도로 고통이 심하고 죽기까지 오래 걸렸다.
몇몇 문헌을 살펴보면 이런 비슷한 의식은 중국에서도 행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전투에 나간 군주[18]가 시체조차 찾지 못하고 간만 남자 신하가 배를 가르고 자신의 내장을 꺼낸 후 간만 집어넣고 장례를 치르게 한 일화도 있다. 서양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어서, 로마 공화정 말기의 공화주의 정치가인 소 카토는 자신이 수비하던 우티카가 카이사르 군대에게 항복하는 전날 저녁에 친구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벌인 후 배를 갈라서 자살을 했다. 로마인들이 자살을 "의지의 죽음"이라고 불렀다고 하지만[19], 소 카토의 방식은 워낙 충격적이어서 키케로는 카토를 찬양하는 글을 남기고 카이사르는 카토의 행동을 비판하는 글을 쓸 정도였다. 그리코 소 카토가 할복자살로 표명한 공화정 이념은 그 뒤로 150여 년 동안 로마제정을 괴롭혔다.[20]
현대에 들어서도 광기와 강렬한 의지를 표하기 위해 간간히 행해진다. 일본의 극우 지식인이었던 미시마 유키오가 있는데, 미시마의 카이샤쿠역은 칼질이 서툴렀던 탓에 즉사하지 못하고 두 번이나 목을 쳤다.[21] 더구나 그 때 사용한 일본도는 날이 나갔다.
헤이그 특사로 잘 알려진 이준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회의장에서 할복으로 순국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정확한 사인은 일제의 방해로 회의장 입장도 못하게 된 상황에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탓인지 지병인 뺨종기가 도져서 돌아가신 것인데, 어니스트 베델의 대한매일신보에서 오보를 내버린 게 민중들에게 강렬한 임팩트를 주며 걷잡을 수 없이 퍼져버린 결과.
'생각한 대로 잘 안되는 경우'도 많았을 것 같다. 위에 나온 미시마 유키오의 할복 자살이 그 예.
자신이 사무라이의 후예[24]라고 생각하던 일본군에서도 이런 할복이 잦았는데, 유명한 할복자로는 러일전쟁 당시 뤼순에서 일본군을 지휘했던 노기 마레스케가 메이지 덴노[25]가 사망하자 아내와 함께 할복자살하였다. 그리고 가미가제 특공대를 최초로 만들었던 오니시 다키지로는 패전후 카이샤쿠 없이 할복하다가 삑사리가 나 무지막지한 고통 끝에 15시간만에 사망했다. 오키나와 전투가 패하자 참모장 조 이사무, 사령관 우지시마 미쓰루도 할복자살했다. 그러나 모든 일본군 자살자가 할복으로 자살한 것은 아니며, 나구모 주이치 같은 사람은 권총을 쏘아 자살하였다.
시미즈 무네하루 부하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스스로 배를 가름. 당시 혼노지의 변으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것을 진정한 무사의 죽음이라고 칭송하여 끝까지 지켜보았다. 특이점은 당시 히데요시의 수공으로 성 안이 물바다였기 때문에 배의 위에서 할복을 했다고 한다. 또한 후손은 끈질기게 살아남아서 메이지 시대에는 남작의 자리까지 얻었다.
칼로 자기 배를 관통(!)시켜서 등뒤에있는 상대에게 대미지를 주는 가불기이지만 자기몸을 관통하는 만큼 자기도 대미지를 입는다. 가불기들 중에서 상당히 빠르고 앞으로 길게 전진하기 때문에 기습으로 넣으면 상대가 맞아주기도 하지만 공격 사거리가 짦아서 그냥 자살이 되는 경우가 많다.
요시미츠인 만큼 할복에도 파생이있다. 할복 훼이크라든가 연속 할복이라든가 할복 후 스핀이라든가... 일향포(rk~lk)후에 2 lp+rk로 할복을 공중 콤보를 넣어줄 수도 있다.(...)
이 기술을 사용해서 이기면 엄청난 쾌감을 얻지만, 이 기술로 ko당하면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TTT까지는 할복으로 상대를 KO시켜도 더블 KO처리 되었지만 4편부터는 자신의 피가 몇프레임 늦게 달기 때문에 상대가 KO당하면 요시미츠의 승리가 된다. 6편부터 레이지에서 사용시 상대방이 반피 이상이 날아가기 때문에 간보다가 써주면 생각보다 짭짤한 편. 믿음과 신념의 할복. 주로 뒤돈자세에서 쓰는 경우가 많다.
[8] 당시에는 적이 죽으면 반드시 목을 쳐서 그것이 본인의 목이 맞는 지를 확인함으로서 죽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9] 일단 죽는 건 매한가지이지만 불명예를 당하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형식이므로 그나마 체면은 차릴 수 있었기 때문.
[10] 단 전국시대 초기까지는 배가 아니라 가슴을 갈랐던 듯하며, 카이샤쿠역이 없고 할복자가 스스로 칼로 목을 찔러 죽었다.
[11] 오죽하면 유럽에서는 한 번에 잘죽여달라는 의미로 사형집행자에게 뇌물을 주는 관습이 있을 정도였다. 한 번에 끝나면 운이 많이 좋은 거고 보통 두 번 세 번, 어떤 귀족은 일곱번 목을 쳐야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사형집행인들이 정신적 고통을 덜기 위해 술을 잔뜩 마시고 해서 난이도가 올라가는 것도 있고.
[13] 남의 도움 없이 자신의 의지와 힘만으로 배를 가르는 건 통증과 쇼크로 인해 아주 어렵다. 실제로 도검에 의해 발생하는 우발적/계획적 사고에서도 가장 흔한 경우는 도검이 꽂힌 상태이거나 꽂힌 후 다시 빼면서 발생한 2차상이지, 도검을 꽂거나 관통시킨 후 다시 힘을 주어 날을 진행시켜 베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자해로 이 정도의 상처를 발생시키려면 칼날이 아주 예리하고 의지가 초인적으로 강해야만 가능하다. 물론 이것과는 달리, 아예 처음부터 도검을 내리쳐 베어버리는 경우는 가끔씩 있다.
[14] 다이묘가 죽기직전, 죽은 후에 양자를 들여서 가문을 잇게 함으로서 가문이 끊기지 않도록 하는 것.
[23] 죽을때 불교식대로 승려가 고니시의 머리위에 불경을 놓고 경을 읊었는데 고니시는 "허튼 짓 하지 말아라 나는 기리시탄(크리스천)이다."라며 경을 냅다 팽개치고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참수당했다.
[24]메이지 유신을 통해서 많은 고급 사무라이들이 몰락했다. 그러나 애초에 막부에 대한 충성심이 그리 깊지 않거나 처음부터 막부와 척을 졌던 사무라이들은 후에 메이지 정부에 편입되어 화족이 되었다. 이에 권력에서 배제당한 사무라이들과 그 후예들은 자유주의 운동, 은거 등의 방법으로 메이지 정부를 외면하였다. 이로 인하여 일본 정치사에서는 일본 진보주의 계열의 시조를 사무라이 계층 중에서도 박탈감이 심했던 고급 사무라이 계층 중에서 찾기도 한다. 한 편으로 하급 사무라이들은 적극적으로 메이지 정부에 등용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치안유지나 소방업무같은 필수불가결한 업무를 맡고 있는 것도 전부 사무라이였기 때문에 완전히 사무라이를 배제한 정권을 만드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또 군대를 조직하면서도 이들을 사관이나 부사관으로 받아들였다. 일본군이 일본도를 차고 다니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25] 러일전쟁의 전사자가 엄청나게 많았기 때문에, 노기 장군은 승전을 했음에도 할복을 하려고 하였지만, 메이지 천황이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안 된다고 말렸다.
원래 사무라이들은 사적으로 무장한 토착세력으로 후에 중앙의 통제가 약해지자 각지의 귀족들이 장려하여 만든 사병이다.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을 지닌 만큼 사무라이들의 행동은 양아치나 다를 바가 없었고 무력을 쥔 사무라이들은 권력을 장악하여 점차 귀족화되었다. 특히 사무라이 중에서도 지방귀족화한 것을 다이묘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자신의 권세를 뽐내기 위하여 교양을 쌓기도 했다.
그런 사정과는 별도로 사무라이의 전성기라고할 수 있는 센고쿠 시대까지도 대부분의 사무라이들은 시정잡배와 다를 바가 없었다. 무사도가 탄생한 것도 그 당시의 사무라이의 삶의 방향성을 제시한 것이 바로 무사도였으며 근대화 이후 일반적으로 알려진 일본의 무사도와는 크게 다르다.
당초의 무사도는 사무라이가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살리기 위하여 주군을 바꾸는 것은 물론이고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비열한 수를 써도 된다고 하였다. 이것은 전란 속에서 가문의 이름을 남기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무라이의 갑옷과 투구는 동시대 다른 국가 군사집단의 방어구에 비해 유난히 장식적이고 눈에 잘 띄는 모습이었고, 여기에 화려한 가문 문장을 그려넣은 깃발을 사용했다. 서양의 기사들이나 중국의 군웅들도 깃발은 썼지만 이런 군기는 본래 공인받은 지휘관에게 국왕이 부여하는 표식이었고, 병사까지 등에 직접 가문 깃발을 꽂고 다니는 것은 일본에서만 볼 수 있었던 현상.
한 편으로 센고쿠 시대가 끝나고 도쿠가와 막부가 들어선 에도 시대가 되자 그런 사고방식은 오히려 막부에 의하여 은연 중에 압력의 대상이 되었다. 도쿠가와 막부는 애초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익을 미끼로 다이묘들을 모아서 세운 것이기 때문에 체제의 유지를 위해서는 지방세력의 견제가 필요했고 이에 따라 유교에 중점을 두고 충과 의를 강조했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고 도쿠가와 막부가 쓰러지자 계급사회의 통념인 무사도는 사민평등의 이름 하에 매장되었다. 그러나 일본이 급격히 군국주의화하자 주군의 말한마디에 부하가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무사도의 이용가치를 발견한 군인계층이 이것을 발굴해내어 국민의 일반적인 도덕관념으로 교육하기 시작한다. 전형적인 국가 막장 테크인 셈.
게다가 절대적 충만이 부시도의 모든 내용을 이루지는 않는다. 사무라이는 기본적으로 사대부인지라, 충 외에도 효인의예지신을 따라야 하므로, 주군이 이에 위배되는 명을 내리면, 사무라이는 목숨걸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목숨걸고 간언을 해야 한다. 이는 군국주의 시대에 병사들을 사무라이의 후예라고 합리화시키며, 여러 가지 막장 행위를 강요한 일본군 수뇌부부터가 부시도가 부재했다는 것을 입증해준다. 당시 실제 사무라이의 후손이거나, 사무라이를 자처한 사람들은 이러한 인과 충의 딜레마로 인하여 군부에 동참하지 않고 은둔하는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정신력으로 기술력이나 병력의 차를 극복할 수는 없기 때문에 일본은 전쟁에서 패배하였고 패전으로 군인계층이 몰락함에 따라 무사도도 다시 한 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애초에 역사속의 사무라이들은 승리를 위해 신식무기를 도입하는데 열심이었다.
대표적인 무사도적 관념에는 이런 것이 있다.
주군에게 불충을 저지르면 할복. 죄질이 악랄한 경우는 참수이며 이 경우 상당한 불명예로 가문이 전재산을 몰수당하고 계급도 박탈당하는 일이 많다.
등 뒤의 상처는 적에게서 도망치다 생긴 비겁한 상처라고 여겨져 처벌의 대상이 됨.
사무라이끼리 칼을 뽑으면 양쪽 모두 처벌의 대상이 됨. 켄카료세바이(喧嘩両成敗)라고 한다.
사무라이가 칼을 뽑았을 경우 반드시 자신이 죽거나 아니면 상대방이 죽어야한다.
사무라이는 체면을 중시하며 굴욕을 받았을 때는 반드시 결투로 이것을 청산해야한다. 이것을 부레이우치(無礼打ち)라고 부른다. 단, 양측이 모두 사무라이였다면 양자모두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
사무라이는 주군이 사형을 선고하면 이것을 달게 받아야하며 이것은 죠이우치(上意討ち)[1]라고 부른다.
사무라이는 묘지타이토(苗字帯刀)라고해서 성씨를 자처하거나 일본도를 차고 다닐 권리가 주어졌다. 단, 에도시대에는 치안적인 문제때문에 평민들도 무장하는 것이 허락되었으나 타치같은 본격적인 일본도는 사무라이만이 찰 수 있었다. 사무라이는 두 자루를 차고 다녔으나 은거한 사무라이나 주군이 없는 로닌은 하나만 차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런 사정 때문에 일본도는 사무라이의 혼이라 하여 보관상태가 안좋을 경우 처벌[2]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단, 그것이 주군에게 하사받은 것이었다면 두말할 것없이 할복.
만약 평민이 사무라이의 흉내를 내어 두 자루를 차고 다니다 걸리면 참수형. 단, 많은 조공을 바치거나 막부를 위하여 공을 세운 경우 관청의 허가를 받아서 평민도 묘지타이토를 허가받는 경우가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해서 사무라이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부레이우치를 키리스테고멘(切捨御免)이라고도 하는데 주로 이것의 대상이 되는 것은 평민계층이었다. 만약 사무라이가 평민에게 굴욕을 받고도 굴욕을 준 평민을 죽이지 못한 경우 당연히 할복. 일방적으로 사무라이가 평민을 죽이는 것은 형편성이 어긋나기 때문에 이 경우 평민도 와키자시로 저항하는 것이 허락되었고 사무라이를 죽여도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일이 그렇게 될 경우 오히려 죽은 사무라이의 가족은 손가락질을 받는 입장이 되었다. 만약 대상이 와키자시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3]에는 사무라이가 자신의 와키자시를 건네주어야했다. 이것을 이용하여 에도 시대에는 평민들은 사무라이를 놀려먹은 다음 사무라이가 자신에게 칼을 주기 전에 신속하게 도망치는 일종의 치킨 레이스가 유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평민의 경우, 싸우지 않는다고 처벌받는 일은 없기 때문에 발이 빠르다면 해볼만했다.
일본의 사극에서는 이것을 이용하여 사무라이가 평민들을 괴롭히는 것처럼 나오지만 실제 에도 시대에는 오히려 사무라이들이 시비를 거는 평민을 피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만약 부레이우치를 하지 않았다는 소문만 나더라도 사무라이에게는 처벌의 빌미가 되었지만 거꾸로 사무라이가 상대를 죽였을 경우 반드시 이것이 정당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을 증명할 증인이 필요했고 전후를 기록한 서류를 제출해야했으며 사용한 칼은 증거품으로서 일시적으로 압류되었으며 얼마간의 자택근신을 명령받았다. 만약 증인이 없을 경우 단순한 살인이라고 여겨져 할복을 명령받거나 심각할 경우 참수형의 대상이 되었다. 그렇다보니 오히려 사무라이들이 몸을 사리는 진풍경이 만들어진 것.
본명은 아니스 모하메드 유세프 페르치치. 예명은 1번 항목에서 따왔으며 본명에서 알 수 있듯이 아랍계로 그의 아버지는 튀니지 인이며 어머니는 독일인이다. 김나지움 재학 시절 마약 소지 및 반달리즘 행위로 미술 심리 치료와 감옥행 중 한 쪽을 택하라는 판결을 받았는데 이 때 미술 수업을 받으며 훗날 역시 래퍼가 되는 Fler 를 만나 그래피티 아트와 힙합에 빠져들게 되었다. 독일의 대표적인 갱스터 랩 아티스트로 분류되며 아랍계이자 무슬림답게 반-이스라엘 정서를 공공연하게 노출하여 독일 내에서는 논란의 대상이 되었고 이 외에도 극우적 성향과 여성, 동성애 혐오를 조장한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가사로 인해 호불호가 심하게 갈리는 편이다. 2012년 이후로 안나 마리아 라거블롬[4] 과 결혼하여 지금까지 혼인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일본의 왕조가 규슈에서 동진을 개시하여 지금의 기나이(교토 인근)에 정착하고 나라에 도읍을 정할 때까지도 일본이 이때 사용하던 도검은 환두대도였다. 그러다 백제가 멸망하고 한반도와의 관계가 단절됨에 따라 중국과 직접 교역하며 견수사, 견당사를 파견하면서 주력 도검이 당나라의 양식으로 바뀐다. 이러한 것들을 당대도(唐大刀)라고 불렀다.
이때까지는 장교용, 병사용 가릴 것 없이 모두 한 손으로 사용하는 직도의 형태를 가졌으며 날 길이도 70cm가 채 못 되는 짧은 도검들이었다. 쇼토쿠 태자의 칠성검이나 일반 병사용으로 사용된 흑작대도(黑作大刀) 등이 이 시대의 군용 일본도이다.[2]
이후 견당사의 파견이 중지되면서 일본도는 독자적인 변화를 겪는다. 그 과정 중 하나에 해당하는 것이 게누키가타타치(毛拔形太刀)라는 것인데 휘어진 칼날과 둥근 칼코등이(쓰바. 정확히는 아오이가타) 등 일본도의 형상을 갖추었지만 장식은 기존 당대도의 양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이다. 이때는 도호쿠 지방 국경선 너머로 준동하는 원주민인 에미시들과 조정간의 전쟁이 격화되던 시기로 이때 에미시들은 말을 타고 활을 쏘며 기동력을 갖춰 전쟁을 했고 이것을 일본의 무사들이 도입했으며 마상전투에 걸맞게 휘어진 칼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초기형 타치(太刀)에 해당된다. 헤이안 시대를 거치면서 율령제가 붕괴하고 평민으로 구성된 군단제가 포기되고 지방관아의 자제로 구성된 건아(健兒)제도로 병역제도가 변경되며 자연히 소수정예의 형태로 군사제도가 변화되면서 도검의 형태도 무사들이 사용하는 휘어진 형태로 정착되어간다. 헤이안 말기-겐페이 시대에 이르면 일본도는 18~23cm의 짧은 손잡이를 금속 박판으로 위아래를 덮고 옆에는 어피를 붙이고 80cm이상의 긴 칼날을 가진 마상용 도검의 형태를 가지게 된다.
가마쿠라 시대 말기에 이르면 산야를 자유자재로 기동하면서 습격이나 매복, 지형지물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전투법이 활용되며 기존의 기마궁시 전법은 입지가 줄어든다. 몽골과의 전쟁이나 고다이고 천황의 신정부 수립에 관여한 악당(惡黨)의 전법 등 과거에 비해 도보 지상전의 비율이 늘어났다. 또 고다이고 신정부의 붕괴와 무로마치 막부의 등장으로 초래된 남북조 시대 60여 년간의 내전기간 동안 도보전의 확대와 더불어 갑옷이 도보전에 걸맞는 도오마루(胴丸), 하라마키(腹卷)로 대세가 변했고 또 팔이나 다리 부분에 대한 방어가 더욱 철저해졌기 때문에 실전용 타치는 자루에 끈을 감아 땀의 흡수나 파지감의 강화를 꾀했다. 우리가 아는 일본도의 모습은 거의 이때 정립된다. 또 갑옷의 중장화에 따라 금쇄봉 같은 타격 무기의 활용도가 늘어나는 한편 나가마키, 노다치와 같은 커다란 도검들의 사용도 일반화되며 일본도가 전체적으로 중후장대화되는 것이 또한 이 시기이기도 하다.
견해에 따라서는 무로마치 시대의 일본도를 이후의 전국시대보다 더 우월하게 보고, 일본도의 절정기를 무로마치 시대로 파악하기도 한다. 전국시대에는 오히려 조총 등의 등장으로 일본도의 전술적 가치가 떨어지면서 질적으로도 저하되었다는 것이다.
무로마치 말기에 들어 오닌의 난과 같은 내전이 발발하고 나서는 점차 기존의 기마무사의 공급이 줄어들고 소모가 심해지면서 자연스럽게 도보로 나서는 하급무사, 뒤이어 아시가루들이 전쟁의 주력을 차지하게 된다. 이때 이들이 사용한 것이 바로 카타나라는 일본도로써 주요 특징은 타치보다 한 단계 낮은 위치의 도검으로써 패용 장치가 없이 허리춤에 끼우고 다녔고 칼날도 2척 1촌(63cm) 정도로 짧으며 한 손으로 쓰기 적당한 칼이었다. 정확한 것은 우치카타나 항목 참조. 이러한 카타나는 오다 노부나가가 아즈치 성을 건설하여 천하인임을 표명한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들어서면서 도보전이 일반화된 전쟁 환경을 감안하여 기존의 타치를 대체하여 사용되게 되고 전체적인 스펙도 타치와 큰 차이가 없게 되었다. 이 즈음에는 카타나와 와키자시를 장식을 통일해서 한 셋트로 차고 다니는 것도 유행하기 시작했으며 이를 다이소 코시라에, 또는 니혼자시로 부른다. 또 기존의 타치를 패용장치를 제거하고 카타나의 쿠리카타를 붙여서 허리에 끼워서 차고 다니는 한다치(半太刀) 양식이 등장하기도 했다. 장식성에서 워낙 우월했기 때문에 카타나라도 한다치의 양식을 모방해서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에도 시대에 들어서는 지나치게 긴 칼을 금지하고 날길이의 기준을 정했다. 일단 하바키를 제외한 날 길이 기준으로 1척(30.3cm) 이하는 단도, 1척 이상~2척 미만은 와키자시, 2척 이상은 카타나로 규정했다. 또 카타나의 날 길이는 2척 5촌(75cm)를 넘기지 않도록 규정했다. 그래서 기존의 타치를 갈아내서 날길이를 맞춰 패용하고 다닌 경우도 존재한다. 이와 동시에 카타나와 와키자시를 신분의 상징으로 무사가 항시 패용하도록 규정하였다. 또 실전이 없어지고 일본도에 대한 관념이 의식화되고 장식적인 것이 호평을 받으면서 일본도의 여러 부품에 화려한 투각이나 문양이 새겨지거나 다양한 디자인들이 선보이게 된다. 현대 일본도 문화에도 큰 영향을 끼쳐서 카타나에 실전용 외장과 보관용 시라사야를 따로 만든다거나 정비할 때 도침(칼배게)를 이용해서 뉘어놓는 등의 문화가 죄다 이 에도시대에 정립된 것이다. 물론 히고나 사츠마 코시라에처럼 실전적이고 투박한 것도 있었지만 대세는 보다 가볍고 화려하고 장식적인 것이었다.
에도시대 말기에 이르러 쿠로후네 사건과 같은 서양 세력의 침공과 교전이 자주 벌어지면서 막부측은 강무소(講武所) 등을 세워 신식 전술을 교육시키는데 서양인들이 총기에 의지하여 백병전에 무지할 거라 생각하고는 창술이나 검술을 정립해서 가르쳤다. 또 이때 교토와 같은 대도시에서 당시 횡행하던 존왕양이 사상을 주장하던 이른바 유신지사들이 테러나 암살을 반복했으므로 이에 대항한 신센구미와 같은 조직들이 창설, 일본도로 시가지에서 교전을 벌이는 경우가 자주 발생했다. 이때에는 서양도검과 서양전술의 영향을 받아 그에 걸맞게 개량된 돗페이(突兵)코시라에가 등장하기도 했으며 유럽식의 행어패용방식을 따라 서양식으로 패용하기도 했다. 칼자루가 뒤로 가게 하거나 등에 지고 다니는 경우도 볼 수 있었다.
무진전쟁 때에는 주로 총포를 이용한 전쟁이 벌어졌지만 간혹 도검을 이용해 돌격하는 경우도 있었다. 총검 사용이 잘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는 4~5kg에 달하는 당시의 소총으로 총검술을 하는 것을 일본인들이 상당한 부담을 느껴서라고 한다. 서남전쟁에서는 화력이 딸리고 총탄이 부족한 사츠마 군대가 일본도를 이용해 발도 돌격을 수행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는데 평민 장정으로 구성된 당시 일본군이 혼비백산하여 도주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서남전쟁은 구시대의 산물로 무시된 일본도가 다시 실전력을 증명한 전쟁으로써 이후 일본은 검도를 제정하고 실전군도를 제정하는 등 백병전에 대한 고려를 다시 하게 된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때에는 16식 해군장교도, 19식 육군장교도(둘 다 세이버)의 양식을 유지한 채로 일본도 칼날을 끼우고 양손으로 쥐는 손잡이를 장착한 양손세이버가 실전군도로써 사용되었다. 1934년에는 파시즘 열풍에 의해 일본도 타치 양식을 갖춘 신군도가 등장한다. 1945년 패망 이후로 일본도들은 죄다 회수되어 폐기될 위기에 처했으나 전통 공예품으로써의 측면을 강조하여 겨우 살아남게 된다. 비무장국가로써 15cm 이상의 날길이를 지닌 날붙이를 무기로 규정하여 소지가 금지되는 일본에서 일본도가 자유롭게 소지와 거래가 가능한 것은 전통 공예품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쇠를 접어가면서 불순물을 제거한다.[5] 접을 때마다 짚과 재를 이용하여 철 내부의 탄소량을 조절한다.
강한 쇠를 u자 형태로 만들고 그 사이에 연한 쇠를 집어넣는다(이는 '甲伏(こうぶせ、코부세)' 라는 강한 쇠와 연한 쇠를 조합시키는 방식의 경우이다. 강한 쇠와 연한 쇠를 조합시키는 방법은 맨 아래의 그림과 같이 다양하다. 참고).
망치로 두들겨가면서 칼의 형태로 모양을 잡는다.
특수한 진흙을 바른다. 칼등 부분은 비교적 느리게 냉각되도록, 칼날 부분은 빠르게 냉각되도록 진흙을 바른다. 부위별로 다른 진흙을 사용하는 것과 진흙을 바르는 모양에 따라서 일본도의 무늬인 하몬의 형태가 달라진다.
다시 가마에 넣고 충분한 온도가 될 때까지 두었다가[6] 물에 넣어 담금질한다. 이때 날 부분은 급격하게 냉각되어서 마르텐사이트라는 견고한 조직이, 다른 부분은 느리게 냉각되어 연한 조직(펄라이트)이 생성된다. 마르텐사이트가 생성될 때 부피가 4.4% 정도 증가하기 때문에 일본도가 뒤로 휘어지게 된다. 급격한 변형이 일어나는 과정이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실패할 확률이 높다. 하몬은 이 과정에서 생겨난 무늬이다.
적절한 온도에서 뜨임을 해주어 인성을 좋게 한다. 이때 경화된 조직이 연화되어 담금질로 생긴 하몬이 사라지지 않게 주의한다.
간단하게 초벌연마를 한다. 칼의 배 부분에 조각을 하고 히(혈조)를 새기기도 한다.
손잡이 안에 들어가는 부분(슴베)의 연마를 하고 작가의 이름, 사는 곳 등을 새긴다. 이 부분은 작가에 따른 특징이며 마음 내키는 대로 바꿀 수 없다.
전문 연마사에게 넘긴다. 연마사는 여러 숫돌과 연마재를 사용하여 작가가 표현하고자 한 바를 잘 나타나게 한다.
일본도의 장점 중 하나라면 비교적 간단하게 분해, 조립이 가능하여 관리 수리가 용이한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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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피를 감은 손잡이를 칼몸의 슴베에 끼워서 메쿠기를 박을 구멍을 뚫는다.
다시 칼몸을 손잡이에서 빼고 손잡이에 가죽끈이나 면끈 등을 감아준다. 이 과정에서 손잡이의 적당한 위치에 메누키를 얹고 그 위로 손잡이끈을 감아 고정시킨다.
하바키를 칼몸에 끼운 뒤에 그림과 같이 셋파와 코등이(츠바;tsuba)를 끼운다.
후찌를 손잡이에 끼우고 손잡이에 칼몸을 끼워넣는다.
대나무나 뿔 재질의 못(메쿠기)을 박아 칼몸과 손잡이를 고정시킨다.
따라서 일본도에 있어서 도 그 자체인 것은 칼몸이며, 다른 부분은 얼마든지 갈아치울 수 있는 부속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한국과 중국에서는 실용성을 위해 각 부품들을 금속 못 등으로 견고하게 고정시켜 일체화한 점과는 다른 점이다.
이는 취향에 따라 부품을 바꾸어 검을 치장하는 덕질을 가능하게 했으며, 정교하며 다양한 조각이 이루어진 코등이(츠바;tsuba)를 필두로 일본도의 의장을 강화시켰고, 일본도가 미술품 취급을 받으며 수집되는데 일조하였다. 현대에도 이와 같은 부품들을 모으고 거래하는 경우가 많다. 일본도에 있어서 가장 화려하게 치장되는 부분은 코등이로, 이만 다루는 전문적인 서적이나 전시 컬렉션이 있을 정도.
의식(儀式)용 메기 - 관청의 의식에서 패용하는 의장용의 시키다치(式太刀) 등을 패용할 때 쓰는 방법. 관복의 허리띠인 관대(官帶)에 패용 끈을 끼워서 패용한다.
허리에 둘러메기 - 타치의 가장 기본적인 패용법. 타치의 칼집에는 패용을 위한 가죽이 연결되는 아시(足)라는 패용 부품이 2개 붙어있다. 여기에 붙은 가죽에 2~3m 정도의 끈인 타치오가 연결되어 이것을 풀어서 길게 늘인 다음 와키자시에 걸고 X자로 매듭을 지은 다음 허리에 두세 바퀴 감아서 단단히 묶는다. 단순히 허리에 두르기보다는 단도나 와키자시에 함께 걸리는 방식이다.
타치다이(太刀帶)에 끼우기 - 전국시대 후반이 되면 점차 패용장치(足)을 사용하여 타치오로 허리에 둘러 고정하는 방식은 잘 사용되지 않게 된다. 그대신 간편한 타치다이가 등장하는데 허리에 두르는 끈과 타치를 고정하는 끈이 따로 있어 허리에 타치다이를 두른 다음 타치를 끼우는 끈 매듭에 끼워주기만 하면 간편하게 고정되는 장점이 있었다.
끈매듭으로 고정하기 - 2~3m의 끈을 준비하고 반으로 접어 칼집에 X자로 묶어 허리에 둘러서 남은 부분을 배꼽 부근에서 매듭을 지어 벨트처럼 착용한다. 칼집이 단단하게 고정되는 효과가 있다. 반면 칼집이 잘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이 반대로 불편함을 초래하기도 했다. 타치 뿐만 아니라 카타나까지 이 방식으로 패용할 수 있으며 달리 패용 장치가 없는 한다치(半太刀)나 우치카타나(打刀)를 갑옷 위에 패용할 때에는 이 방식을 많이 사용했다.
카타나의 패용법
허리띠에 끼우기 - 대표적으로 잘 알려진 방법. 허리띠에 끼우면 칼집 옆에 튀어나온 쿠리카타(栗形)에 걸려 밑으로 빠지지 않게 된다. 평복 뿐만 아니라 갑옷 착용시에도 가능했는데 갑옷 착용시에는 갑옷 위가 아니라 안의 평복 허리띠에 끼웠다. 그래서 갑옷을 착용하고 카타나를 허리띠에 끼우면 칼집 일부 쿠사즈리(草接)에 가려져 있고 자루는 쿠사즈리 사이에서 튀어나와 있는 식. 갑옷 위에 패용할 때에는 끈매듭으로 고정하기로 고정하였다.
등에 둘러메기 - 닌자의 방식으로 알려져 있지만 흔히 알려진 닌자도라는 것 자체가 할리우드의 창작물이나 다름없어 근거가 없다. 일단 닌자도는 80년대의 가짜 닌자의 대표격인 아시다 킴이라는 미국인이 자신의 책에서 등장시킨 것을 시초로 본다. 역사적으로는 노다치를 등에 둘러메어 운반하는데 쓴 사례가 있고 평범한 카타나를 등에 둘러메고 다닌 것은 메이지 유신 당시의 무진전쟁 때의 사무라이들. 무진전쟁에서는 칼이 아니라 총과 대포가 전쟁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칼을 쓸 일이 별로 없어서 발도의 불리함 대신 총기 취급의 용이함을 택해서 이런 방식으로 많이들 차고 다녔다. 별다른 장치나 방식이 있는 건 아니며 넓은 천을 이용해 묶어서 대충 둘러메는 방식.
허리 옆에 세워서 패용하기 - 마찬가지로 메이지 유신의 무진전쟁에서 사용되던 방식. 넓은 천을 이용해 묶고 핸드백처럼 어깨에 걸어서 메고 다녔는데 이럴 경우 보통 왼쪽 허리에서 수직으로 섰다. 이유는 마찬가지로 총기 사용에 편하다는 점 때문. 보통 무사들은 천을 이용해서 패용했지만 높은 직급의 간부들은 유럽에서 수입한 가죽제 Frog를 사용하기도 했다. 행군하거나 총격전을 벌일 때에는 칼자루를 뒤로 가게 했다고 한다.
사실 일본도에 대한 고평가는 1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임진왜란과 중국 해안지역에의 연이은 왜구 약탈에서 드러난 난전에서 일본도의 유용성은 동아시아인들에게 깊게 각인되었고, 징비록이나 명나라의 기록에서도 일본도의 유용함을 논하는 대목은 빠지지 않는다.
무기가 결국 사용자의 능력에 좌우되는 것임을 고려해보면 약 백여년 간의 전국시대를 거친 일본인들이 비교적 평화로웠던 조선이나 중국에 비해 단병접전에 있어서 유리한 위치를 점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할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유가 있다고 한들 당대 일본인들과 맞서 싸운 주요한 인물들이 다른 것이 아니라 일본도를 위협적인 무기로 인식하였음은 사실이다.
일본도가 제대로 무장을 갖춘 병사들에게는 별 효과가 없다는 말도 있지만 도검류 자체가 동서고금 막론하고 대갑주전투에서는 별 효용이 없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일본도만의 단점으로 보기는 어렵다. 질이 떨어진다는 것도 현대기준에서의 얘기이지 당시 시대상황을 고려하면 꽤 쓸만한 물건이었다.[8]
일본에서 직접 제작한 일본도의 경우 가격이 천문학적 수준이라고 알려져 있는 경우가 많으나 국보와 같은 극소수를 제외하면 그렇지 않다. 보통의 미술품과 같이 작가의 명성, 제작기법 등에 따라 평가된다. 그러나 일단 일본에서 제작되기 때문에 "일본도" 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칼의 경우 아무리 싸도 60만엔 정도다.[9]
참고 -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요시하라 요신도와 제자들이 일본도(칼날 부분)를 제작하는 동영상. #
송나라 시절에 일본과의 무역을 통해 타치(太刀)가 수입되긴 했지만 이때는 실전무기가 아니라 독특한 양식의 외국 칼, 수집품 취급을 받았다. 일본도가 실전무기로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명나라 시대에 왜구가 준동하면서부터였다. 당시 명나라는 이른바 해금정책으로 대외무역을 크게 제한하였는데 무역으로 큰 돈을 벌던 중국과 일본의 상인들이 이에 저항하여 용병을 고용하고 밀무역을 하면서 사실상의 해적집단으로 변화되었다. 여기에 많은 일본인 용병들이 한 몫을 잡기 위해 뛰어들면서 명나라 해안에 대한 노략질이 극심해졌다. 특히 저장 성 지방의 피해가 막심했다.
명나라 군대는 전통적으로 창과 대포, 짧은 도검을 착용한 정규전용 무장을 하고 있었으며 총기류나 긴 칼에 대해서는 비중이 그리 높지 않았다. 그래서 소수로 기동력 있게 달려들어 약탈하고 바로 사라지는 왜구를 효과적으로 처치할 수 없었다. 또 시간 내에 당도해서 전투를 한다고 해도 생전 처음 보는 커다란 일본도를 휘두르며 왜구가 달려들면 병사들은 혼비백산하고 대나무로 만든 창대가 쉽게 잘라져 병사까지 참살당하는 경우가 잦았다.
이때 절강성에 부임한 군사령관 척계광은 낭선, 등패를 비롯한 신무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왜구의 주특기인 일본도 검술과 돌격을 저지하는 원앙진을 고안하고 기동력 있는 경량 화포(호준포 등)을 채용하고 화승총도 채용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도의 절삭력, 긴 길이에서 나오는 사거리, 양손으로 잡음으로써 가능한 뛰어난 컨트롤을 인정하고 일본도를 복제 생산하여 화승총병이 백병전시 사용할 수 있게 지급하였다. 이 명나라제 일본도는 길이가 150cm에 달하며 쌍수도(雙手刀)라고 불렀다. 또 일본 검술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투항 왜구에게 검술을 배우는 동시에 1561년에는 일본에서 카게류(陰流) 검술[10]도 수입하여 모쿠로쿠(目錄)[11]까지 입수하였다(신유년에 입수하여 신유도법(辛西刀法)이라고도 부름). 이후로 명나라에서도 일본도를 이용한 검술 연구가 이루어져서 왜도로 창을 이기는 방법을 담은 정종유(程宗猷)의 단도법선(單刀法選)[12]이 출판되었으며 1621년 모원외가 15년이라는 긴 시간에 걸쳐 2천여 종의 병법서를 참고하여 정리한 병법서 《무비지》에도 '일본음류도법' 과 '왜구도법' 이 기록되어 있다.
처음에는 일본도의 양식을 그대로 베껴서 생산했다. 이순신 장군에게 명황제가 하사한 명조팔사품 중에 대도의 쓰바(鍔)는 일본의 기쿠 양식을 그대로 복제한 것. 하지만 나중에는 명나라식으로 중국 양식의 물건으로 대체된다. 명나라 멸망 때까지 이 중국식 일본도들은 상당히 많이 쓰였지만 청나라가 들어서면서 기효신서, 무비지와 같은 병법서가 금서로 지정되고 일본도 형식의 도검들이 폐지되면서 더이상 사용되지 않게 된다.
다만 중국의 소수민족인 묘족에게서는 이 명나라식 일본도와 왜도술, 단도법선(單刀法選)의 기술들이 그대로 전수되어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묘족 특유의 무기로 여겨지며 묘도, 묘도술로 불리고 있지만 그 시작은 명나라의 절강병법에 있는 것.
중국 배경인 무협소설에서도 종종 언급되기도 한다. 보통 중국 배경의 무협물에서는 도는 두껍고 검은 가는 경우가 많은데 일본도는 검처럼 가느다란 도로 찌르기에도 큰 문제가 없어 검과 도의 장점을 고루 가진 무기로 평가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본래 임진왜란 이전에는 조선은 일본의 왜검에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물론 이전부터 왜검은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골동품 겸 병장기로 수입하는 경우도 자주 있기는 했지만 대대적으로 도입되지는 않았다. 삼포왜란 등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일으킨 폭동에서 조선군은 활과 대포를 통해 어렵지 않게 제압했기 때문에 도검이라는 무기 자체에 대해서 큰 의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당시에는 일본군이 조총으로 조선군의 대열을 흐트려놓은 다음 일본도를 휘두르며 돌격해왔는데 이러한 백병전 상황에서 일본도는 큰 위력을 발휘했다.
임진왜란 이후엔 조선과 명의 장수들도 일본도를 모으는데 혈안이 되었을 정도라 할 정도로 당시로선 백병전에서 강력한 무기였다. 항왜들의 총포술과 함께 일본도를 이용한 검술도 높게 평가되어 조선군에 채용된 바가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군기시(軍器寺)에 간직한 왜도(倭刀)는 아무리 하품(下品)이더라도 몹시 날카로우니 진실로 군국(軍國)의 중한 기구인데 가볍게 화매(和賣)하는 것은 미편(未便)합니다" 란 기록이 있다.
임란 이후 조선은 군사력 강화를 위해서 일본도를 대대적으로 도입하였으며 검술을 도입하기도 했다. 무관 김체건은 일본에서 왜검술을 배워오기도 했고 조선정조 시대에 편찬된 《무예도보통지》의 한 장에 왜검(일본도)을 사용하는 검법에 대한 설명 또한 전해진다.
예술품으로서의 기능도 있어 삼전도 굴욕 이후 청나라 사신들에게 임진년 때 노획한 왜검을 하나둘씩 진상품으로 안겨주기도 했다.
그러나 곧 왜검(일본도)를 사용한 전술이나 검법은 명과 조선 모두에서 사라졌는데 아무래도 종전에 써오던 무기와 다르다는 문제점 때문이었다. 특히 조선은 전통적으로 활과 같은 원거리 무기를 중시하고 칼은 일종의 호신용 개념으로 짧은 것을 선호하였기 때문에 길고 활을 쏠 때 걸리적거리는 칼은(지휘용 칼이 아닌 이상)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미 같은 도 계열로서 리치도 길고 파괴력도 더 강한 월도가 있었기 때문.
하지만 이 때문에 후기의 조선검에는 중기에 대대적으로 도입되었던 왜검의 영향이 다소 남아있게 된다.
일본도가 엄청난 내구성과 절삭력을 가진 것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잦으나 일본도의 실제 내구성은 상당히 좋지 않다. 실제로는 다다미나 대나무를 베다가 실수해도 쉽게 휘어지는 경우가 많고 2차대전 당시 일본군도도 전통 칼날을 쓴 경우는 예외 없이 휘어지고 망가지는 경우가 많이 문제가 되었다. 심지어는 일본도 칼날에 조각을 하는 호리모노는 열처리가 다 끝난 다음에 작업을 하는데 도검의 강도가 최상에 다다른 열처리 직후에 정으로 쪼아서 조각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일본도가 얼마나 무른 칼인가를 방증한다.[13]
하지만 이런 것을 가지고 일본도를 쓰레기라고 비하할 수는 없다. 일본도는 전통적인 강재와 제조법을 아직까지 그대로 사용해서 제조하고 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수백년 전 이상의 오래된 공업능력 수준의 품질 그대로이다. 이것은 일본에서 일본도를 전통문화유산으로 보며 무기금지법에 의해 현대강재를 이용한 생산은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14] 즉 일본도는 전통 칼에 속하는데 전통 제법으로 만들어진 무기들은 모두들 현대인의 시각으로 보면 심각할 만큼 한계를 내포하고 있다.
이런 점은 서양도검도 큰 차이가 없다. 중세시대의 유물을 가지고 경도계로 여러 군데를 찍어보면 그 경도가 천차만별이다. 이는 당시의 기술이 탄소를 고르게 분포해서 제철할 수 있을 만큼 발달하지 못해서 하나의 강괴라도 탄소량이 몰린 부분과 별로 없는 부분이 혼재한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경도를 충분히 올리는 열처리를 할 경우 탄소량이 몰린 부분은 지나치게 경도가 올라가고 탄소량이 적은 부분은 매우 무른 경도가 나온다. 문제는 경도가 올라간 부분이 매우 쉽게 깨지고 갈라지며 곧 부러지는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평균 경도를 락웰경도 40 이하로 잡으며 이 때문에 날카로움 유지능력과 절삭력은 평균적으로 낮을 수밖에 없다. 그대신 탄성을 많이 줘서 어지간하면 부러지지 않도록 한 것이 서양검의 제법이다.
일본 국내에서 생산 가능한 철은 모래와 섞여 불순물이 굉장한 사철이었으며 10kg를 타다라로 제련할 경우 1kg의 강괴밖에 나오지 않을 만큼 생산효율이 나빴다. 이조차도 불순물을 다량 함유하여 접쇠 공정을 통해 불순물을 제거하고 강재의 순수성을 높여야만 했는데 접쇠 공정은 내구성이 나쁘면 나빴지 좋을 것이 없는 공정이며 잘해봐야 평균 수준이다.[15]
재질과 제법의 한계는 여러모로 일본도, 특히 전통 방식으로 만들어진 일본도의 성능과 내구성에 많은 제약을 가하는 부분이다. 구조적인 면에서 볼 때 일본도는 강도는 낮지만 부드럽고 유연성이 높은 연철 소재의 심인 '신가네(心鉄, 心鐵)'[16]를 유연성은 낮지만 딱딱하고 단단하며 강도가 높은 고탄소강 소재의 표피인 '하가네(刃鉄, 刃鐵, 刃金)'[17]로 감싸는 구조를 채용함으로서 어느 정도의 충격흡수력과 경도를 겸비하는 칼날을 지닐 수 있도록 꾀하고 있으나[18], 여기서 한 가지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면 순전히 장인의 감에만 의지해서 주먹구구식의 구시대적이고 전근대적인 생산방식으로 만들어지는 전통 일본도의 경우에는 그냥 감으로 두들겨 만들어진 탓에 이러한 특징으로부터 낳아지는 특성들을 실제로는 그다지 유용하게 활용하기 어려운 편이라는 점이다. 실제로 전통 일본도 중에는 앞서 말한 것과 같은 특징이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을 정도로 생산 과정에서의 품질관리의 미흡함으로 인한 중대한 결함을 지닌 경우도 많은데, 연철 소재의 심인 신가네가 고탄소강 소재의 표피인 하가네로 덮여지지 않고 그대로 외부에 노출되어 칼날 전체의 성능과 내구성을 저하시키는 등 여러모로 품질이 엉망인 칼날들이 굉장히 많은 편이다. 오히려 공업적인 생산방식을 나름대로 도입하고자 했던 만철도 등의 일부 일본군도가 이런 면에서는 전통 일본도보다 사정이 다소 나았을 지경이니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일본군도 중 전통 일본도의 칼날을 전용해 만들어진 칼들이 실전에서는 성능이나 내구성 등에 있어 영 좋지 못한 모습을 많이 보이는 것도 이러한 전통 일본도의 제약과 결함에 기인하는 면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전통 방식은 모두 장인의 감에 의지한다는 것이 크나큰 한계이다. 일본도는 탄소량이 높은 강재는 칼날에 배치하고 낮은 강재는 칼등에 배치하는 구조를 지니며 세간에는 이것이 우월한 위력의 비결처럼 알려졌으나, 전통 방식으로 만들어진 일본도의 경우에는 사철을 망치로 깨봐서 뭉그러지는 것은 '신가네(心鐵)'로 분류하고 깨지는 것은 '하가네(刃鐵)'로 분류하는 매우 주먹구구스러운 방식으로 생산된다는 점 때문에 이러한 구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점을 실제로는 제대로 살릴 수 없다는 중대한 한계를 지닌다. 강재를 차등배치할 때도 단조작업 중 신가네가 노출되어 취약 부분이 발생한 제품도 있는데 이것은 작업 과정에선 결코 알 수 없다. 또 열처리를 할 때 현대 공정에서는 온도계를 비롯한 측정도구를 통해 최대한 동일한 환경에서 작업을 하지만 전통 방식에서는 장인이 쇠의 달구어진 색깔을 보고 감으로 판단한다. 그리고 부분열처리를 위해 바르는 진흙의 두께도 매번 미세하게 다를 수밖에 없다. 칼의 성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들이 매우 부정확한 감으로 이루어지고 그 환경도 매번 달라지므로 품질의 균일화를 애초에 만족시킬 수가 없다.
실제로 고도 계열의 도검일수록 잘 휘지 않고 빳빳하다고 하나 이런 도검들은 서양검과 동일한 이유로 쉽게 부러질 수 있었으며 사철이라는 강재 태생적인 한계점이 더해졌다.
환상을 가중시키는 것은 가십거리에 혈안이 된 매스미디어들의 탓도 크다. 《디스커버리 채널》에 의하면 '베는 것' 에 한정해서 모든 인병기 중 가장 고성능을 발휘하는 무기로 묘사되며 사람과 같은 밀도를 가진 젤라틴을 베는 실험에서 오직 일본도만이 일도양단에 성공했다고 나왔으나 사실 그 정도의 절단 성능은 일본도 외의 타 문화의 검으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정상적인 정규군이면 최소한의 갑주는 갖추어입는다. 다다미를 베다가도 휘는 일본도가 갑옷을 제대로 갖추어입은 정규군 상대로 활약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한다.[19][20] 디스커버리 채널 등에서 무술이나 병장기를 소개하는 프로그램들은 이러한 동양의 무술/무기에 대한 판타지를 그대로 보여주며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이야기하곤 한다.[21] 또한 판타지 소설이나 판타지 부류의 만화가들에게 입문서인 "무기와 방어구"시리즈 중국편에서는 일본도가 중국의 전통 도검인 박도(항일대도), 오구(유엽도,우미도)같은 중국 전통곡도보다 우월하게 표시하였으나 이 책을 쓴 사람이 일본인이라는 사실을 알고나면 일본도에 대한 과장이 있다는 것을 알수있다. 더구나 일본 만화나 영화에서는 중국 전통도검이 일본도에 어이없이 절단되거나 부서지는 과장한 면을 보여주는데 실제로는 실험한 결과 오히려 부서지거나 절단되는 것은 일본도였다.[22] 사실 딱봐도 중국 박도류가 일본도보다 훨씬 두껍고 날이 넓으며 무게도 많이 나가는것들이 많은데, 이런 구조차이로는 동일 재질로 만들었을때 일본도가 박도와 있는힘껏 날 대 날로 부딛치는 단두대 매치를 벌여서 이길수 있는 방법이 사실상 없다. 박도와 일본도의 체급차이라면 사실 박도쪽이 좀더 무른 재질로 만들어도 일본도와 맞먹거나 이길수 있을 지경이다. 일본도는 장인의 신비로운 힘 같은게 불어넣여져 만들어진 초자연적인 존재가 당연히 아니므로(...) 구조적으로 박도를 이기기 힘든게 당연하다.
일본도로 총알을 가르는 시험도 원래 서부시대부터 총을 쏘아 풍선 두 개를 터트리던 식의 유희, 즉 트릭에 지나지 않는다. 권총탄은 납을 구리 외피로 감싼 것이며 열처리된 강철보다 훨씬 무르기 때문에 잘려나가는 것이 당연한데 굳이 일본도 뿐이 아니라 쇠를 갈아서 날을 세운 것이라면 그 무엇도 가능하다. 한국 환도는 물론 심지어 내구도가 한참 떨어지는 버터용 나이프로도 자르는게 가능하다.# 굳이 일본도 뿐이 아니라 쇠를 갈아서 날을 세운 것이라면 그 무엇도 가능한데 실제로 m2중기관총의 철갑탄을 상대로 한 실험에서는 심각한 날손상이 즉시 발생했으며 얼마 못 가 부러졌다.[23] 워터젯 커터 실험도 비슷한 트릭이며 날카롭게 세워진 칼날은 단면적이 현미경으로 봐야 할 만큼 좁으므로 이것을 중심으로 고압 수분이 2갈래로 갈라져 빠져나간 것이다.
더불어 기관총의 총신을 가르고 박혔다던지, 사람과 갑옷까지 절단한다던지 하는 헛소문들도 이런 환상에 크게 일조한 바 있다.
여러 중세시대 매니아들의 실험결과 칼로 숭숭 잘 베일 것만 같던 가죽 갑옷조차도 찌르기나 좀 통하지 베기에는 굉장한 내성을 지닌다는 것이 확인된 바 있다. 하물며 금속으로 만든 갑옷은 칼 따위로 베어내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다. 같은 맥락으로 기관총의 총신을 가르는 것 또한 철갑옷을 절단하는 것 이상의 헛소리. 애초에 총신은 사격시의 열을 견뎌야 하기 때문에 가장 공들여서 견고하게 만들어지는 부위다.
양판소에서는 현대인 천재론과 도검제일주의에 의거하여 이고깽들이 뚝딱뚝딱하면 만들어진다. 드워프라면 "쇠를 접어서 두들기고 이런 모양으로 만들어줘"라고 하면 그냥 만들어준다.
일본쪽 창작물에서는 사무라이와 함께 단골로 자주 나오는 무기. 현대 능력자물이건 판타지건 어디에서나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거기다 신기하게도 광선검마냥 아무거나 쑥쑥 벤다. 사람 팔다리와 목은 물론이고 나무, 강철, 자기보다 무겁고 두터운 검이나 둔기, 갑옷 등도 두부 자르듯이 가볍게 자르거나 부수거나 튕겨내는 등 무시무시한 위력을 선보인다. 게다가 저렇게 무기를 휘둘러놓고는 날이 상하거나 휘어지는 것도 없이 멀쩡한 사기급 내구력은 기본 사양. 심지어는 검기를 내뿜어 저 멀리 있는 물체까지 한큐에 베어버리는 초능력을 구사하기도 한다. 물론 다 뻥. 아무리 단단한 검이라도 저런건 불가능하다. 검기 쓰니까 그러지.
서양 판타지를 배경으로 한 매체에서도 비교적 등장하는 경우가 꽤나 있는 편이다. 중세시대 배경이나 스타일리쉬한 배경이든 간에 일단 공통점으로는 레벨이 오를수록 가드나 검신에 화려한 무늬가 붙는 검 계열 무기와 달리 일본도는 레벨이 높은 무기여도 장식이 안 붙는 경우가 많다.
대체적으로 중세풍인 엘더 스크롤 시리즈에서도 아카비르 지방의 대표적인 무기라 하며 역시 강력한 편에 속한다. 다만 이름은 카타나가 아니라 블레이드 소드(Blades Sword)라 불린다.
서양 중세시대 갑옷 및 무기 고증이 비교적 꽤 높은 편이며 중세시대 분위기를 상당히 잘 재연한 데몬즈 소울, 다크 소울에서도 등장하며 기량특화 캐릭터들에게 상당히 인기가 많고 강력한 무기이다. 덕분에 중세 기사 갑옷 입고서 카타나 들고 돌아다니는 진풍경을 많이 보게 된다.(...)
다크 소울 2에서 등장하는 지역인 녹아내리는 철성은 발전된 기술을 받아들여 번영했다는 설정이며 이곳에서 중세 갑옷을 입고는 무기로 일본도를 차고 돌아다니는 기묘한(...) 기사들을 상대해야한다. 칼을 검집에 넣거나 빼고, 휘두르는 모션도 매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무라이의 그것.
서양 판타지에서 일본도가 등장하는 게임의 원조는 위저드리가 가장 많이 꼽히며 위저드리의 영향으로 많은 서양 판타지를 배경으로 한 RPG게임은 물론이요 RPG게임이 아니여도 작품이 판타지풍에서도 일본도가 많이 등장하게 된다. 사실 원조 위저드리 시리즈 제작자 중 한 명인 앤드류 그린버그(Andrew C. Greenberg)에 의하면 원래 위저드리 시리즈에 왜색적인 요소를 넣을 계획은 거의 없다시피 했으나 또 다른 제작자인 로버트 우드헤드(Robert Woodhead)가 당시 워낙 사무라이, 닌자물에 열광하고 쟈포네스크 기질이 심한 편이여서 작중 사무라이, 닌자 클래스가 등장하게 되었고 이 두 직업이 상당히 강력하며 무라마사가 끝내주게 강한 아이템이 되었다는 비화가 있다.
이 외에도 상당히 많은 판타지 작품들 중에 일본도가 많이 등장하는 편이니 잘 찾아보도록 하자.
현대에 와선 특유의 간지와 일본 만화의 영향으로 동양 판타지의 마스코트 격이 되었으며 아예 일본도는 사무라이, 닌자물에서만 등장하는 무기가 아닌 서양 판타지의 무구에서 대표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주장도 상당히 많은 편이다. 동양과는 단 1g의 연관성도 없는 현대 서양 뱀파이어들이 일본도를 제식무기처럼 쓰는 경우도 있으며 미국에서 만들어진 메리 수 테스트를 보면 캐릭터가 메리 수인가 아닌가를 평가하는 기준 중에 (일본인이 아니면서) 일본도를 사용하는지의 여부가 있다(...). 여러모로 와패니즈의 득을 단단히 본 칼이다.
전통방식으로 일본 내에서 장인이 제조한 것만을 일본도로 인정하기 때문에 세계 각국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현대강재, 현대 공법으로 만든 것 혹은 일본의 전통방식을 모방해서 만드는 모든 일본도형 도검들은 모조일본도 혹은 모조도로 분류한다. 진검, 가검 가리지 않는다.
일본도에 대한 수요는 세계적으로 막대하지만 이 수요를 감당하기에는 일본도의 생산량은 너무 적고 가격도 상당히 비싸다. 그래서 많은 메이커들이 모조일본도 생산에 뛰어들었다.
모조일본도 생산의 최대 거점은 중국이다. 1045탄소강을 이용하고 아연합금 도장구를 탑재한 일본도 모양의 저질 칼이나 가검류, 1060이나 1095탄소강을 사용하여 상당한 내구성과 절삭력을 갖춘 물건은 물론 일본의 타마하가네를 사용하여 전통일본도의 하몬까지 자유자재로 재현하는 것까지 다양한 수요를 만족시킬 수 있는 다양한 품목을 생산하며 폴첸, 다이너스티 포지, 콜드 스틸, 친니즈 커틀러리 등 이쪽에서 제법 알려진 메이커들의 제품은 물론 이베이에서 장사하는 수많은 중국 군소 유통업체들까지 다 중국에서 만들어온다. 그 중에서도 중국 용천시가 지상 최대의 모조일본도 생산 거점. 용천시의 물건들은 미국은 물론 일본에도 가검으로 들어가고 있고 한국에도 생각보다 많이 풀렸다.
국내에서 생산되는 일본도형 도검도 물론 모조일본도에 속한다. 국내 칼의 특징은 베기장에서 주로 사용하고 전통 있는 일본의 도검문화가 들어오지 않은 탓에 주로 베기를 위해 칼날이 넓고 국적불명의 도장구를 탑재한 것들이 많이 팔린다. 그 대신 내구성은 평균적으로 매우 뛰어난 수준. 중국제 모조일본도들은 일본도의 양식을 철저하게 연구하고 재현했기 때문에 국산 칼보다는 훨씬 원래 일본도에 가까운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모조일본도의 내구성도 천차만별이라 1045탄소강이나 타마하가네를 사용한 물건들은 내구성이 전통일본도와 다를 바 없거나 더 약하기도 하다. 강재를 속이는 경우도 일부 보고되고 있다. 하지만 1060이나 1095 탄소강을 사용하고 통열처리를 한 성능 위주의 제품들은 무시무시한 내구성을 자랑하며 절삭력도 상당히 좋은 편으로 미국 등지에서 소비되는 모조일본도들 중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부분열처리를 하는 제품들의 경우 아무래도 통열처리 제품보다는 내구성이 떨어진다.
인도 등지에서 수상쩍은 다마스커스 칼날 일본도를 판매하고 있으나 장식용 이상의 성능을 기대하기 어려운 물건들이다.
현대의 군충장 연구를 참고하면 전국시대의 전투에서 무기에 의한 사망율은 각각 활, 조총, 창, 투석, 일본도 순이다. 용감하게 일본도를 뽑아들고 돌격하는 일은 적어도 전국시대에서는 통용되지 않았다는 것으로 활, 조총, 창, 짱돌 등의 무기가 일반 병사 역시 사용하는 무기였던 것에 비해서 일본도는 그리 흔한 무기는 아니였다. 사실 전국시대에서 일본도는 다른 무기를 보조하는 역할에 가까웠던 듯 보인다.
위의 연구 결과를 보고 무작정 일본도를 까는 사람도 적지 않다. 2000년대 초반까지는 인터넷에서 일본도에 대해 엇나간 환상을 가진 사람이 꽤나 많아 충돌을 빚은 반면 군충장 연구결과가 인터넷상에도 퍼지기 시작한 근래(2010년도 내외)에 이르러서는[24] 일본도를 심하게 비하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듯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둘 모두 옳은 이야기는 아니다. 사실 검이 다른 무기의 보조무기로서 활약한 것은 동시대 유럽도 마찬가지고 단순히 주무장으로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로 일본도를 폄하하기엔 무리가 있다. 전국시대 이후로 눈을 돌려보면 난전에서 조선군과 명군이 일본군에게 크게 고전하였다는 기록을 자주 찾아볼 수 있다. 임진왜란에서 조총 다음으로 두려운 무기는 '일본도' 였으며 조선 전기와 중기에는 일본도를 바치고 귀화하는 왜인들을 받아주기도 하였다. 척계광의 기효신서나 박제가의 무예도보통지 등에도 일본도를 막을 수 있는 쌍수도에 관한 내용이나 아예 왜검이라 하여 일본도 기법을 실어놓기도 하였다. 일본도에 큰 환상을 가져서는 안 되나 일본도가 역사적으로도 위력적인 활약을 펼쳤던 도검 중 하나였음이 사실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일본도를 쓴 일본인들이 워낙에 치고받고 하는 일이 많았기에 자연스레 일본도의 실전경험이 많이 쌓여갔던 것 뿐이지만(...).
유럽의 롱소드가 갑옷의 발달에 맞춰 그 형상이 적극적으로 변화한 것과 달리 일본도는 용도 자체는 바뀌었어도 부드러운 것을 가르는 데에 특화된 디자인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았다. 현대 사극 등에서는 병사(아시가루)들도 삿갓(진가사)에 흉갑과 팔보호대를 걸치고 나름대로 중무장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실제 일본의 모노가타리 에마키(두루마리 그림)의 삽화들을 보면 갑옷을 입었는데 7부바지에 쓰레빠를 끌고 싸우거나 훈도시만 차고 갑옷을 입고 평상복에 조총과 카타나만 차고 참전한 병사들의 모습이 상당히 많이 나온다. 이는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측 기록화인 동래부사순절도 등에서도 확인된다. 물론 체제가 갖추어지고 상당히 후기인 오사카 전투나 시마바라의 난을 그린 삽화에서는 사극에서 묘사되는 무장을 갖춘 병사들이 그려져 있으나 긴 시대 동안 일본의 전쟁에서 갑주를 철저하게 갖춘 비율은 그다지 높지 않았으며 또 아시가루들에게 대여되는 갑옷들은 종이로 만들어진 것도 유물로 많이 남아있다.[25] 이런 배경하에서 일본도는 베기에 특화된 디자인을 유지할 수 있었다. 유럽에서도 크릭메서, 스위스 세이버처럼 일본도와 흡사한 양손 사용의 휘어진 외날 도는 존재했지만 호응을 얻지 못하고 사라진 것은 전장환경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본도는 얼른 보면 다 같아 보이지만 전술의 변화에 따라 디자인의 개선도 많이 있었다. 처음 등장한 시점에서의 타치는 순수한 기병도로써 길고 많이 휜 칼날, 18~21cm 정도로 짧은 손잡이를 가져 한손 사용에 적합했다. 가마쿠라 시대에서는 손잡이가 24cm 정도로 길어져 양손 사용도 감안한 스타일이 되었다가 중갑옷이 유행한 남북조 시대에는 타격력을 중시하여 전체적으로 도검이 거대화되고 노다치(野太刀)라는 장르까지 출현한다. 이후에는 다시 평범한 사이즈로 돌아간다. 카타나는 원래 무로마치 후기에 아시가루 보병집단들이 편하게 쓰기 위해 만든 것이었고 철저한 보조무기였으므로 2척(60.6cm) 정도의 짧은 칼날에 한 손으로 쓰는 손잡이를 가지고 있었으나 전국 시대의 전쟁 속에서 기마무사가 급감하고 보병전술이 확립되자 점차 주력 도검이 되어 칼날과 자루가 길어지더니 기존의 주력 도검인 타치를 대체하게 된다.
다른 문화권의 도검들이 손잡이를 비롯한 부품까지 완전하게 조립된 것을 완전한 도검으로 보는 것과는 달리 일본도는 칼날만을 완전체로 보고 손잡이나 기타 부품, 즉 도장구(刀裝具)는 하나의 옷처럼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문화권의 도검, 일본도의 영향을 받은 조선 후기 환도조차 손잡이를 분리할 수 없도록 슴베를 길게 빼서 망치질을 하여 리벳처럼 뭉개고 자루 옆에도 금속 파이프(유소)를 끼워 튼튼하고 분리가 불가능하게 만드는 반면 일본도는 대나무 못(메쿠기)을 끼워 고정하기 때문에 필요시 쉽게 빼서 분리할 수 있게 만든다.
도장구를 옷 개념으로 보므로 칼 한 자루라도 여러 개의 도장구가 현존하는 경우도 있다. 또 약간의 가공만으로 자유롭게 도장구 부품을 교체할 수 있으므로 쯔바, 후치, 카시라, 츠카이토, 메누키 등의 다양한 부품을 각양각색으로 만들어 따로 판매하는 시장도 일본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활성화되어 있으며, 주인이 한 가지 칼로 다양한 스타일로 개조하여 즐기는 것이 가능하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칼날만이 아니라 도장구도 골동품으로써 많은 수가 보존되어 있으며 일본 내외에서도 활발하게 거래되고 있다. 일본도가 세계적으로 인기가 유지되는 데에는 이러한 자유로운 커스텀 문화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보통 시대극에서 볼 수 있는 무사들이 일본도를 두 자루 차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는데 이것을 니혼자시(二本差し)라고 부른다. 보통 사용하는 일본도를 혼자시라고 부르고 혼자시의 파손에 대비해서 휴대하는 작은 일본도를 와키자시라고 부른다. 여기서 혼은 本을 뜻하고 와키는 옆구리이다. 즉 이름부터 보조적인 무장이라는 것을 명확하게하고 있는 셈. 혹은 다이소(大小)라고도 칭했다.
에도 시대에 이르러서는 그런 것을 보다 공고히하여서 무사는 두 자루의 일본도를 차는 것이 올바른 예법이라고 하였다. 한편으로 무사이면서도 실전에 나갈 염려가 없는 은거자나 관직이 없는 로닌 등은 한 자루만을 찼다. 이렇게 도검 패용이 문화로 완전히 자리잡은 까닭에 메이지 유신 이후 내려진 폐도령은 상당한 사회적인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일반적으로 칼을 차는 것은 무사계급의 특권이나 무사계급이 아닌 경우에도 와키자시의 휴대는 허락되었기 때문에 호신이나 싸움을 목적으로 농민이나 박도 등이 와키자시를 휴대하였다가 무사계급과 싸움을 벌이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그렇게 될 경우 일이 어떻게 되더라도 극형을 피할 수는 없었다.
후에는 아무래도 길이가 긴 칼이 싸움에 유리하다는 생각이 퍼져 길이가 와키자시로써 규정된 최대 길이인 2척에 육박하는 소위 오오와키자시라는 물건이 등장하였으며 불량배나 박도가 와키자시를 휴대하는 풍습은 후세까지 이어져서 야쿠자가 휴대하는 도스 등의 유래가 되기도 하였다.
[8] 도검이 대갑주전투에서 별 효용이 없었다는 것은 한손검 얘기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지만, 유튜브에서 도검 대 갑옷 대결 동영상을 검색해보면 알 수 있듯이 투핸디드 소드로도 철판을 제대로 뚫지 못하고, 서양검이 단순한 둔기일 뿐이라는 기존 관념의 연장선상일 뿐이다. 대갑주전투에 있어서의 도검의 효용성이 갑옷의 발달에 따라 점차 줄어들었다는 것은 서양에서도 마찬가지로 벌어진 일이었다.
[9] 원으로 치자면 600~620만원 정도이다. 유물의 경우 감정서가 붙지 않은 물건은 현대도보다 저렴하게 거래된다. 근래에는 수요는 제한적인 데에 비해 생산은 지속되고 있고, 무술과 전통에 대한 관심이 적어져 수요 자체가 거의 없다시피 한 관계로 공시가는 60만엔을 걸지만 방문해서 현금완납하면 10만엔에 구입할 수 있을 정도.
[14] 미군정 GHQ는 전쟁 중 일본군에 학을 뗀 나머지 무도를 전면 금지하고 일본도를 모조리 압수하여 폐기처분하려고 하였으나 일본측이 일본도는 전통예술품임을 강조하며 세세한 구분과 감상 포인트 등 예술품으로써의 특징을 보여주어 겨우 막아낼 수 있었다. 이때 이후로 일본도와 화승총, 창, 나기나타 등은 전통 예술품으로 분류되어 자유롭게 유통과 구입이 가능하지만 같은 도검이라도 현대 강재로 만들어진 총검이나 무라타도, 서양도검 등은 무기로 분류되어 절대로 소지가 불가능하다.
[15] 비숙련자가 하면 용접이 제대로 되지 않아 내부에 하기레라고 하는 공간이 생기며 이는 일본도에서는 하품 취급도 못 받게 되는 결함요소이다. 당연히 내부에 공간이 있는 만큼 내구성도 나쁘다.
[16] 덧붙여 이 '신가네'라는 말은 연철 소재의 심을 뜻하기도 하고, 그 구성 소재를 뜻하기도 한다.
[17] 덧붙여 이 '하가네'라는 말은 고탄소강 소재의 피철(皮鉄, 皮鐵)을 뜻하기도 하고, 그 구성 소재를 뜻하기도 한다. 또한 이 말은 일본어로 강철을 의미하는 단어들 중 하나인 '하가네(鋼)'와는 동음이의어이다.
[18] 서양도검의 예에서도 알 수 있듯이 탄성을 많이 줘서 충격흡수력을 높이게 되면 칼날이 쉽게 구부러지거나 휘어지지 않을 수 있게 되어서 쉽게 부러지지 않게 되고, 한편 경도를 높이게 되면 날을 날카롭게 세워 절삭력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 따라서 어느 정도의 충격흡수력과 높은 경도를 함께 겸비하는 칼날을 지니게 되면 여러모로 사용이 편리한 칼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발상은 자연발생적으로 나올 만한 것이었고, 연철 소재의 심을 고탄소강 소재의 표피로 가리는 구조를 채용한 일본도 역시 그러한 발상을 적용한 사례들 중 하나이다. 그리고 여기서 고려해야 될 점은 연철 소재의 심이 생산 과정에서의 문제로 인해 표피로 덮이지 않고 밖으로 나오게 되었을 경우 칼날의 성능과 내구성에 있어 문제가 발생된다는 것인데, 전통 일본도의 경우 특히 이러한 문제가 심각하게 나타나는 편이다.
[19] 다만 일본 갑옷 자체가 서양플레이트 아머만큼의 기밀성을 갖춘 것은 아니니만큼 갑옷이 노리지 못하는 부위를 공략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다. 일본 고류 중 전국시대까지 거슬러올라가는 유파들의 경우 대갑주 검술을 다루는데 갑옷으로 보호하지 않은 빈틈을 포착해 공격한다. 도검으로 갑주를 입은 적을 상대하는 방식은 동서를 막론하고 갑옷 자체를 공격하기보다는 갑옷의 취약점이나 갑옷이 보호하지 못하는 틈새를 노리는 방식이었다.
[20] 반면, 플레이트 아머가 이례적일 정도로 완전방어에 집착한 케이스이고 플레이트 아머를 제외한 다른 갑주들은 모두 플레이트 아머보다 한참 못한 수준의 기밀성에 한정된다는점은 감안해야 한다. 일본 갑옷 역시 세계적인 기준에서 보면 상당히 철저하게 기밀성을 추구한 사례에 속한다. 당장 많은 나라의 갑옷이 찰갑 수준에서 더 이상의 발전을 멈춘것에 비하면 통짜 철판을 여러장 엮어서 기밀성을 추구한 일본 갑주는 상당한 방어력을 지니고 있었다. 전신을 갑주로 중무장한 일본 장수의 난감함은 이성계가 전신을 철로 두른것으로도 모자라 철가면까지 쓰고 있어 화살로 도무지 공략할 방법이 없었던 아기발도를 신기에 가까운 활쏨씨로 쏴죽인 일화에서 잘 묘사되어 있다.
[21] 실험에서 일본도를 사용한 것은 태권도 마스터로 출연한 사람이다. 도대체 일본도랑 태권도가 무슨 상관인지(...) 실제로 검도나 검술에는 전혀 문외한스러운 움직임을 보였다.
[23] 또 한 가지 의혹은 하가네를 현대강재를 사용했을 경우다. 100% 전통강재로만 제조하면 시참을 하거나 할 때 하도 휘므로 특별히 청지강 같은 현대강재를 하가네로 써서 만든 이른바 <수련도>도 하나의 중요한 상품이다. 이것도 눈으로 봐선 절대 구별할 수 없다.
[24] 인식 변화의 시작은 특정 블로거가 센고쿠를 인용한 것이 시초에 가깝다. 이게 다시 출처 불분명한 지식으로 인터넷에 퍼져나가기 시작.
[25] 이런 일이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 상기한 바와 같이 사철을 사용하여 제련하면 칼 한 자루 만드는 데에도 결과물의 10 배 이상의 사철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만큼의 숯도 필요해서 일본의 옛 묘사를 보면 창칼을 만드느라 숲이 사라진다고 할 정도. 이런 상황에서 갑주까지 쇠로 만든다는 것은 경제적, 환경적으로 엄청난 부담일 수밖에 없다.